당에 관한 레닌의 사상적 궤적(1)
당에 관한 레닌의 사상적 궤적
안토니오 카를로
들어가며
오늘날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레닌의 사상을 재구성하는 것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레닌의 규정적 명제는 수없이 많이 논의된 그의 유명한 저작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개요가 잡혔던 것으로 여겨진다. 몇몇 사람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는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완전히 발전시키지 못한)에 관한 유일하게 과학적인 답변으로 남아 있다.1)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저작은 주지주의(intellectualism)와 관념론에 흠뻑 젖어 있는 스탈린 시대의 고전으로 간주되며, 소비에트 경험의 모든 관료주의적 변종의 근원으로 여겨진다.2) 분명히 {무엇을 할 것인가}는 부정적 저작이며, 이를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레닌의 유일하거나 가장 중요한 입장으로 파악하는 것은 완전한 잘못이다. 사실 이 점에 관해서 러시아 혁명의 사상은 지극히 분열되어 있고 모순적이다. 1902년({무엇을 할 것인가}가 출간된 해) 이후,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명제들에 완전히 반대되며 그것들에 대한 사실상의 기각을 함축하는 일련의 분석과 입장을 발전시켰다. 레닌이 러시아 노동운동의 역사적 발전에 의해 야기된 이와 같은 정정을 어느 정도까지 의식하고 있었는지 추정하기란 쉽지 않다. 확실히 레닌은 마르크스 그 자신처럼 모순에서 면제된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의 사상은 발전을 경험했는데, 이는 그가 몇몇 초기 분석들을 넘어서고 기각했음을 의미한다. 레닌이 이와 같은 사실을 항상 뚜렷하게 의식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그 자신의 과학에 대한 과학"을 결여했다. 따라서 그의 저작들이 어느 정도까지 일관성 있는 개념적 체계 속에 통합될 수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서, 주석자들은 반드시 그의 저작에 내재된 분석들을 재구성해야 한다.
레닌 스스로 우리에게 몇 가지 암시를 제공한다. 명시적으로, 1921년에 레닌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막스 르비앙(Max Levien)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가 불어로 번역되기 위해서는 그 저작이 생산했을 수 있는 의문과 모호성에 대해 권위 있는 볼셰비키의 해명이 담긴 서문이 반드시 추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3) 이는 매우 확실한 사실인데, 왜냐하면 1907년 이후 레닌 스스로가 ({무엇을 할 것인가}의 중심적 테마인) 자생성과 의식성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자신이 그의 반대파들(예를 들면 플레하노프 같은)이 악용하려 해왔던 애매하고 부적합한 표현들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4)
레닌은 이 점에 관해 모호하다(무엇이 부적절한 표현들이고, 어느 정도 부적절한가?). 그러나 이미 1905년에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미 지나가 버린 역사적 조건 아래서 쓰여진 저작으로 간주했다. 즉 현실의 논쟁과 사건의 발전이 심대하여,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출간되고 불과 3년 만에 더 이상 그것의 이론적 입장의 역사적 적합성을 변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5)
분명히 오늘날 레닌의 심리적 상태를 재구성한다거나, 그 저작에 대해 그가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 따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관념들은 그것들의 창시자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는 별개로 자신의 고유한 내포와 객관적 의미를 가진다. 이 글은 [당에 관한] 레닌 사상의 모순적 특성에 대해 그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는가와는 독립적으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레닌의 사상의 복잡한 발전과정을 재구성하는 것에 정확히 정향되어 있다.
레닌의 초기 입장(1895-1896)
소비에트의 공식 역사서술은 일반적으로 레닌을 절대적으로 일관되고 무오류의 인물로 제시한다: 그는 항상 모든 것을 바로 이해하고, 평범한 사람들보다 몇 년 앞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다. 사실 레닌의 사상은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언제나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는 개방적 변증법을 통해 발전해 왔지만, [이러한 역사서술에서] 레닌은 혁명의 수호천사로 변형되고 만다.6) 우리는 이 문제[정당의 문제]에 관한 레닌의 관점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문제적이었고, 그것이 유래한 역사적 맥락을 어떻게 반영했는지 보여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레닌의 최초의 분석('사회민주주의당의 강령 초안과 해설')7)은 18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기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와 전혀 다른 입장이 제시된다. 이 저작에서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임무를 다룬다. 이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레닌은 계급 의식이 외부로부터 가공되고 노동자들에게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계급 의식은 경제 투쟁에서 "불가피하게" 발전하는 것처럼 공장 안에서 노동자들과 고용주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의 내재적 발전을 돕기 위해 이와 같은 투쟁의 일부가 되어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다.8)
이 점에 관한 한 레닌의 테제는 매우 분명하다: "따라서 고용주에 맞선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불가피하게 전체 자본가 계급,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모든 사회 질서에 맞서는 투쟁으로 전환한다."9) 즉, 1902년에 레닌이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주의 사이의 의식과 정치를 분명히 구별했던 입장과 달리, 노동조합주의적이지는 않은 의식이 노동자 투쟁에서 "불가피하게" 발전한다. 이는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의 특정한 측면(예를 들어,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 환경) 뿐 아니라, 전체 자본주의 구조에 맞서 투쟁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결국 혁명적 의식이 경제 투쟁 안에서 발전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레닌은 자신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은, 자본가들 및 대공장에 의해 창출된 공장-소유자 계급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하고 해방을 쟁취하는 유일한 방도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은) 특정 국가의 소속과 무관하게 노동자들의 이해(interest)는 동일하며, 노동자들이 사회의 모든 다른 계급들과 분리되어 별도의 계급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영주들과 자본가들이 이전에 그랬고 여전히 그런 것처럼, 국가의 업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어떤 수단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가? 끊임없이 투쟁을 경험함으로써, 처음에는 고용주에 대항하기 위해 시작되어, 점차 발전하고 첨예해지고, 대공장의 성장에 따라 막대한 숫자의 노동자들을 포함하게 되는 투쟁을 경험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세 번째로, 이 투쟁은 노동자들의 정치 의식을 발전시킨다. 열악한 생활 조건 때문에 근로인민대중은 여가나 국가적 문제에 대해 숙고할 기회가 없다. 반면 일상적 요구를 걸고 공장주에 맞서 투쟁하면서 노동자들은 자생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국가적·정치적 질문들, 예를 들어 러시아 국가가 어떤 식으로 통치되는지, 법률과 규제가 어떻게 공표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이해에 복무하는지 등에 대해 생각하도록 자극된다. 공장에서의 충돌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은 법률과 국가적 권위의 대표자들과 필연적으로 갈등하게 된다."10)
이 절에 따르면 레닌은 정치 의식이 "자생적이고 불가피하게" 공장에서의 생활과 투쟁으로부터 발원한다고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투쟁은 노동자들을 자본주의와 발본적으로 적대적인 입장(레닌이 일찍이 언급한 것처럼, "전체" 자본주의 사회구조 내에서의 투쟁)으로 인도하며, 법률과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이해하게끔 한다. 이러한 투쟁의 즉각적 결과로 "러시아 국가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각성이 출현한다. 그러나 레닌은 오직 입헌적으로 보장된 정치적 권리의 획득을 통해서만(즉, 짜르 전제정의 전복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함을 덧붙인다.
이와 같은 유형의 의식(전제정을 붕괴시키는 투쟁)은 사회민주주의적 정치 의식이다. 1895-1896년의 기간 동안 레닌은 내심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치 의식이 공장 내부의 관계와 투쟁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사실 노동자들은 바로 이러한 관계 내부에서 법률과 국가가 "누구의 이해"에 봉사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 이로부터 그들의 계급적 본질 및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의 필요성이 나온다. 반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이렇게 단언한다: "계급적 정치 의식은 외부로부터만, 즉 경제 투쟁의 외부로부터만, 다시 말하자면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라는 영역의 외부로부터만 노동자에게 도입될 수 있다. 이 지식이 획득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모든 계급 및 계층과 국가 및 정부의 관계라는 영역, 모든 계급 상호 간의 관계라는 영역 뿐이다."11)
이는 7년 전 레닌의 견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당시 당의 기능은 의식의 발전을 돕기 위해 공장에서 불가피하게 분출하는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투쟁은 전체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혐오(그리고 이는 노동조합주의 내에서처럼 단순한 부차적 특성이 아니다)와 군주제에 맞서 입헌제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려는(더 나은 전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의지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와 같은 정식화는 경제주의에 아주 근접해 있는데,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의 의식과 정치적 조직을 노동조합적 투쟁의 불가피하고 따라서 자생적인 결실로 보기 때문이다 ― 비록 레닌이 이 "불가피한" 과정을 촉진시키는 문제를 제기했다 할지라도. 이는 레닌이 1896년 직후에 쓴 글에서도 발견된다: "1895-96년의 파업은 헛되지 않았다. 파업은 러시아의 노동자들에게 막대하게 기여했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이해를 위한 투쟁을 어떻게 벌이는지 보여 주었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상황과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요구를 이해할 수 있게끔 가르쳤다.12)
따라서 파업은 정치 의식을 낳는다. 여기서 레닌은 혁명적인 정치 의식과 노동조합주의적인 정치 의식을 구별하지 않았는데, 이는 몇 년 뒤 레닌의 견해와 자뭇 다른 것이었다. 이제 문제는 레닌의 초기 입장을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가 1894년부터 1901년까지 러시아 사회주의 써클에서 성행하던 원시성(primitivism)의 영향을 받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후에 레닌 스스로 명료화한 것처럼, 원시성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잡하고 무계획적인 방식("원시성"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유래했다)으로 다루었다. 써클의 성원들은 견고하고 집중된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은 채, 앞뒤 가리지 않고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에 뛰어들었다. 더구나 이와 같은 경향은 점차 고유한 이론을 낳았는데, 이 이론은 써클들의 자생적이고 비조직적인 행동들을 정당화하면서, 사실상 운동을 자생성에 굴종시키고 결국 운동을 초기 단계에 결박시켰다.13) 1901년에 레닌은 경제주의와 모든 형태의 자생성(주의), 즉 주타방의 근원으로 원시성을 규정했다.14) 1년 후 같은 현상에 대한 그의 분석은 일종의 자기비판 같다. "원시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레닌은 1894-1901년의 전형적인 러시아 써클 활동을 묘사한다. 그런데 1894년과 1895년에 레닌 자신이 "전형적"인 사회민주주의 써클(성 페쩨르부르크 투쟁 동맹)과 정치적으로 결부되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레닌은 1895년 즈음 러시아에 당을 형성하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들(레닌 그 자신을 포함한)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와 같은 "원시적" 작업의 오류와 한계 또한 지적한다.15) 그러므로 레닌의 고백은 은연중에 자신이 "원시주의"에 관련되었던 방식을 드러낸다. 물론 레닌은 그러한 경향 내에서 매우 선진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당이라는 문제의 즉각적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6) 하지만 레닌은 여전히 혁명적 의식의 고양을 공장 투쟁의 자생적-기계적 결과로 보았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임무는 이런 자생적 현상을 촉진하는 것일 뿐이었다. 여기에서 기본적 계급 투쟁에 대한 의식성의 외재적 특성은 강조되지 않는다({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레닌의 원시적 자생(성)주의는 반대편 극단으로 나아간다: 비록 혁명적 의식이 지역적이거나 국제적인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 속에서만 출현하고 외부로부터 도입될 수 없다 하더라도,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기본적 계급 투쟁으로부터 의식성으로의 이행은 기계적이거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다. 이 과정은 변증법적이다. 그러한 변증법적 성격으로 인하여 그것의 귀결점은 기계적-자생적 전망에 따라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정치적 계급 의식은 오직 노동자 투쟁의 맥락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필연적인" 경우라 할 순 없다. 그 과정의 결과는 항상 잠재적일 뿐, 결코 선험적이지 않다(혹은 보증된 것도 아니다).
1897년의 전환과 {무엇을 할 것인가}에 선행하는 저작들
1897년 동안 초창기 러시아 노동운동 내에서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 1895-96년의 대파업들은 의미있는 성과 없이 종결되었다: 그것은 의식성도 정당도 낳지 못했다. 유일한 가시적 성과라곤 1년 후(1897)에 좌절될 공장 환경과 노동일에 관한 법령뿐이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행위는 의식을 앞지르는 법이니, 실천적으로 파탄났음에도 불구하고 원시성은 초기 사회민주주의 그룹들(그리고 써클들)의 의식 속에 단단히 뿌리박힌 채 존속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것은 스스로의 입장을 상세화·명료화하고 1895-96년의 경험을 제도화하려 함으로써, 경제주의의 정치 조류를 낳기도 했다.
반면 레닌은 순수히 경제적이고 노동조합적인 활동의 부적합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이리하여 그는 사건의 교훈을 기꺼이 배우는 위대한 혁명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장법의 도래와 함께 레닌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결론은 단호하리만치 부정적인 것이었다: 1895-96년 파업에 뒤따른 공장법은 고용주들에게 일련의 빠져나갈 구멍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 요구한 총노동시간을 본질적인 지점에서 변경하지 않았다. 따라서 운동의 주요 목표는 쟁취되지 못했다. 긍정적이었던 것은 정부가 비록 형식적이지만 양보를 강제받았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대중들이 하나의 정당,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 하에 그들의 결합된 요구를 제기할 때," 그리고 "정부가 더 이상 이런 식의 무의미한 양보로 대충 때울 수 없을 때," 기회는 올 것이다.19)
따라서 오직 당만이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에 적합한 정치적 성과를 보장할 수 있다. 이를 위한 필수조건은 이미 현존하고 있다. 운동이 지역의 경계를 넘어 전국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당 없이는 단순한 노동조합 투쟁조차 다만 무의미한 양보를 낳을 뿐이다. 이제 경제적이고 노동조합주의적인 투쟁의 맥락에서조차 정치적 계기의 자율성은 물론 당의 본질적 중요성이 전에 없이 강조된다.
1897년 말에 이르러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임무}라는 매우 중요한 팜플렛에서 동일한 문제를 다시 다루고 명료화했다. 1895-96년 시기의 저작에서는 경제 투쟁의 필연적 귀결이자 반영이며, 따라서 사실상 그것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정치 투쟁의 중요성과 자율성이 강조된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쓴다: "경제적인 선동과 정치적인 선동 모두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식을 발전시키는 데 동등하게 필요하다; 경제적 선동과 정치적 선동 모두 러시아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을 지도하는 데 동등하게 필요한데, 왜냐하면 모든 계급 투쟁은 정치 투쟁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치 의식과 정치 투쟁이 여전히 경제 투쟁의 자생적이고 기계적인 반영으로 간주되었다면, 정치적 계기의 자율적 중요성을 힘주어 말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예견하면서, 경제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과의 배타적인 갈등에 돌입하는 반면, 정치 투쟁에서는 인구의 모든 다른 계급들과 접촉하게 된다는 점도 지적한다.20)
그러나 {임무}는 아직 과도기적 저작이다. 왜냐하면 경제 투쟁이 아직 정치 투쟁에 종속({무엇을 할 것인가}에서처럼)되지 않고, 동등하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의식성은 정치-경제적 영역과 독립적으로 그것을 발전시키는 일군의 부르주아 지식인들에 의해 외부로부터 프롤레타리아에게 도입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닌은 지식인들이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헤게모니화되어야 한다고(따라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담지자로 간주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 다소 비관적인 분석을 제시한다: "교육받은 자들 그리고 '인텔리겐챠'는 일반적으로 사고와 지식을 박해하는 전제정의 야만적 경찰 독재에 맞서 반역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물질적 이해 때문에 인텔리겐챠는 전제정과 부르주아지에 결박되며, 비일관적이고 타협하도록, 공직의 봉급이나 이윤의 일부 혹은 배당금 따위를 위해 대항적이고 혁명적인 열정을 팔아치우도록 강제 받는다."21) 1897년 이후 러시아의 상황은 정체되었다. 1898년에 아래로부터 당을 건설하고자 하는 써클들의 '원시적' 시도는 기껏해야 다양한 형태의 자생주의를 포괄하는 완전히 탈-중심화되고 자율적인 써클들의 분산된 동맹만을 만들고 실패했다.22)
결국 레닌은 유사한 운동의 필요를 인식한 다른 지식인들처럼 자생주의에 맞선 논쟁을 개시했는데, 이는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와 2차 당 대회(실질적으로는 1차)에서 절정에 이른다. 1895년과 1899년 동안 레닌은 투옥되었다가 망명길에 올랐다. 정치활동으로부터 절연된 상태에서 ― 그러나 그는 러시아의 상황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었고, 그 속에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저술했다 ― , 레닌은 아마도 자연스레 정치적-이론적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끌렸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요소는 러시아의 상황이 전술한 바와 같지 않았다면, 따라서 모든 형태의 자생주의에 맞선 가차없는 투쟁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별로 중요치 않았을 것이다. 1899년 {라보차야 가제타}에 실린 기사에서 레닌은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계기의 본질적 본성에 관한 테제를 정정하고 정교화하면서, 그것 없이는 심지어 경제적인 영역에서조차 노동조합 투쟁은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23)
당시 레닌의 가장 중요한 논문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내 퇴행적 경향"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퇴행적 경향은 자생주의이다. 이 저작에서 그는 실질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기본적 테제들을 예상하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미 {무엇을 할 것인가}의 근본 가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원래 사회주의와 노동자 계급 운동은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따로따로 존재했다. 노동자들은 자본가에 맞서 싸우면서 파업과 조합을 조직했고,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 운동에서 한발 물러서 동시대 자본주의 내지 부르주아 사회 체계를 비판하고 그것을 다른 체계, 즉 더 우월한 사회주의 체계에 의해 대체할 것을 요구하는 교설들을 정식화했다. 노동-계급 운동과 사회주의의 분리는 서로에게 유약함과 저발전을 초래했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유리된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은, 유토피아나 실제 삶에 아무 효과도 미치지 못하는 미망에 지나지 않았다; 당대의 선진적 과학에 의해 계몽되지 못한 노동-계급 운동은 사소하고 파편화된 신세를 면치 못했으며, 정치적 중요성을 결여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통합된 사회민주주의 운동 안에서 사회주의와 노동-계급 운동을 융합시키려 하는 요구가 전 유럽 국가에서 점증한다. 이러한 융합이 발생하면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은 유산 계급에 의한 착취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적 투쟁이 되고, 사회주의(적) 노동자 운동의 보다 우월한 형태로 진화된다 ― 독자적인 노동자 계급 사회민주주의 정당.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운동과의 융합으로 인도함으로써,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헌을 했다: 그들은 융합의 필연성을 설명하는 혁명적 이론을 창안했고, 사회주의자들에게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투쟁을 조직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24) {무엇을 할 것인가}의 기본적 테제들은 여기에 분명하게 예견되어 있다: 노동 계급의 외부에서 획득되는 혁명적 의식; 홀로 떨어져 있을 때,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조합적 한계를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혁명적 과학을 만들어 내고 프롤레타리아에게 "그것을 증여하는" 사회주의적 경향을 지닌 마르크스와 엥겔스 같은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필요하다는 것.
같은 시기의 다른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는 레닌이 러시아 노동 운동의 문제들(자생주의에 맞선 투쟁)에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보여 준다. 러시아 노동 운동의 문제들은 카우츠키의 이론적 기여보다 레닌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카우츠키는 1900년과 1914년 사이의 모든 국제 사회민주주의자들 내에서 막대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25) 카우츠키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혁명적 조직의 문제들과 계급 투쟁의 결과를 다룰 때 '정치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레닌에게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노동 운동에 지배적인 경제주의와 러시아 노동 운동의 발전에 주된 장애물을 물리치는 무기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내부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카우츠키의 일반적인 이론적 입장들을 수용·정정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레닌과 유사한 실천적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고 이후에 {이스크라}에서 레닌의 동료가 될 마르토프의 정치적 영향도 마찬가지다. 레닌은 그로부터 몇 페이지를 인용하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적 정교화를 빌어왔다.26)
이제 레닌의 생애로 돌아가 보자: 1900년에 복역을 마친 후, 그는 해외로 나가 사회민주주의 망명자에 가담하였다.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은 그 자체로 그의 입장을 강화했다: 레닌이 가담했던 {이스크라} 지식인들의 분위기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써클의 원시성을 격퇴할 것을 목표의 하나로 삼고 있었다. {이스크라}는 형편없었던 1898년 써클 동맹을 대체하기 위해 진정으로 집중화된 당을 구성할 작정이었다. 1898년의 아래로부터의 건설 경험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당은 위로부터 건설되어야 했다. {이스크라} 지식인 그룹은 각 써클에 이론적 의식성과 조직을 도입함으로써 러시아의 현실 외부에서 써클의 원시성을 격퇴시켜야 했다.
다시 말해 레닌과 이스크라의 상황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기본 테제들에 가장 적합한 모델을 배태했던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러시아의 상황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01년의 서신에서 레닌은 자생주의 및 무엇보다 그것의 뿌리로서 써클들의 원시성을 격퇴시킬 필요성을 되풀이했다.27) 이와 같은 상황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이스크라} 그룹의 외재적 개입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형태의 자생주의에 맞선 가치 없는 투쟁을 위한 때는 무르익었다. 1902년 마침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출간되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는 사회민주주의적 의식이 있을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 의식은 외부로부터 노동자들에게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나라의 역사를 통해 입증된 바, 노동자 계급은 그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노동조합적 의식, 즉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고용주에 대항하여 싸우고 정부로 하여금 필요한 노동법을 통과시키도록 노력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는 신념 만을 발전시킬 수 있을 뿐이다. 반면 사회주의 이론은 유산계급의 교육받은 대표자, 즉 지식인들이 만든 철학·역사학·경제학의 제 이론으로부터 성장해 나왔다. 현대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사회적 지위로 보면 부르주아 지식인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학설은 노동운동의 자생적 성장과는 완전히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다. 그것은 혁명적·사회주의적 지식인의 사상 발전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로서 발생했던 것이다."28)
레닌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위의 구절 직후에 유사한 관점을 설명하는 긴 구절을 카우츠키로부터 인용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카우츠키의 극단적 명제를 완화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사회민주주의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하며,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했다.29) 따라서 당은 일단의 외부적 요소들(부르주아 지식인)나 프롤레타리아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사람들(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함으로써 지식인으로 간주되게 되는 노동자들, 즉 노동계급에 외재적인)로 구성된다.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존재조건과 공장관계에 갇혀 있는 한 사회에 대한 전반적 통찰을 요청하는 혁명적 의식에 이를 수 없고, 기껏 해야 부르주아지에 종속된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인 노동조합주의적인 정치 의식에 머물 뿐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당은 활동적으로 통일된 자신의 기능을 소진하지 않는다: 단번에 주어지는 메타-역사적인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레닌은 "정력적 정신을 가진 10명의 사람들"의 힘에 근거해서 강고하게 집중된 당을 통해, 투쟁의 와중에서 대중들을 지도하고 교육시키고 정치화할 것을 강조했다. 당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은 대중들을 지도하고 의식을 부여하는 이 끊임없는 역할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더욱이 1902년에 이와 같은 조직 모델의 비민주적인 특성은 단순히 러시아적 상황(사회민주주의의 불법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이 하나의 요인이기는 했지만, 레닌은 사실상 민주적 원리의 적용이 "현 사회에서 매우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과 독일의 노동운동에 관련된 카우츠키와 웹의 저작을 인용한 것에서 유추해 보건대, 이 맥락에서 그는 러시아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일반을 지칭한다. 요컨대 레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만일 "민주적 원칙의 적용이 매우 상대적"인 게 사실이라면, 대중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직접 통제는 토대에 대해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는 전문화된 기능들의 필요성을 제거하지 않는다(레닌의 예에 따르자면: 국회의원 언론인, 조합에서의 보험 전문가).
따라서 종종 지적되었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는 종국에도 객체가 될 뿐, 역사의 주체는 아니다. 보통 소위 정통 레닌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이 지적될 때마다 분노로 펄쩍 뛴다. 그러나 이것이 레닌의 담론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만일 어떤 계급이 그것 스스로의 의식과 혁명적 조직을 정교화할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들을 다른 계급들로부터 차용할 수밖에 없다면, 그 계급은 다른 계급들에 종속적일 뿐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데 주체가 될 수 없다. 기껏 해야 다른 계급들에게 조종되는 도구가 될 뿐이다. 말의 강한 의미에서 혁명적 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혁명적 과정을 조직하고 지도할 수 있어야 하고, 같은 말이지만 종속적인 태도로 단순가담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역사유물론의 창시자들(또한 다른 곳에서의 레닌 그 자신, 트로츠키, 그리고 마오)은 쁘띠적이고 중간적인 부르주아지들이 근본적으로 혁명적 계급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자주 강조했던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에서 동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스스로를 해방시킴으로써 다른 계급들도 함께 해방시키는 프롤레타리아를 따를 때에만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헤게모니화될 수 있으며 사회주의 혁명에 가담할 수 있다. 요컨대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자율적인 계급이다.
반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쁘띠적이고 중간적인 부르주아지에 실질적으로 동화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율적 혁명 역량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는 노동조합주의(즉 그것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지식인들이 도래할 때까지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받아들이는)를 실천하기 십상이다. 이 도식에서 근본적 계급은 한편에서 부르주아지이고, 다른 한편에서 혁명적 지식인이다(그러나 지식인이 계급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중간에는 쁘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함께 있는데, 이들은 부르주아에 종속된 노동조합주의와 지식인들에 의해 부여된 혁명적 의식 사이에서 동요한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가 잠재적·본능적으로 혁명적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은 의식과 조직의 담지자인 지식인들에 의해 현실성으로 전화하기 전까지, 다만 잠재적일 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와 마르크스주의
의심할 여지 없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는 마르크스주의, 적어도 1845년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성숙기 저작들과 충돌한다. '철학의 빈곤'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경제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의 과학적 대변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론가다. 아직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계급으로 구성할 정도로 충분히 발전해 있지 못한 한, 따라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 자체가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지 않는 한, … 이 이론가들은 공상가들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나 역사가 전진하고 역사와 더불어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 보다 선명히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과학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서 진행되는 것을 설명하고 그것의 매개체가 되기만 하면 된다."30)
마르크스에게서, 이론가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조합원에서 혁명가로, 그리하여 이전에 없던 혁명적 상황을 혁명적인 무엇으로 만드는 프롤레타리아트로 변형하지 않는다.31) 여전히 중요하긴 하지만, 이론가는 오히려 벌어진 혁명 투쟁의 과정을 분명하게 하는 훨씬 겸손한 역할을 할 뿐이다.
1880년, 죽기 몇 년 전에 마르크스는 다시 다음과 같이 썼다. "신의 뜻을 따르는 구원자가 아니라, 오직 그들 자신만이 강력한 처방책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사회적 궁핍을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32) 노동자들이 자신들만 남겨진 채 노예 상태로 남거나, 잘해야 노동조합 의식(마르크스 또한 이것에 정치 투쟁이 결합되지 않는 한 제대로 된 처방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33)에 이를 운명이라면, 그리하여 그가 이를 분명히 견지했다면 이것을 쓸 수 없었을 것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의 지식인들과 같은 "신의 뜻에 따른 구원자들"에 호소해야 했었을 것이다. 어쨌든, 마르크스의 이 구절은 오직 제1차 인터내셔널 기념비의 도입부에 포함된 유명한 명제와 부합할 뿐이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일이어야 한다."34)
'철학의 빈곤'으로 돌아가서, 마르크스가 노동 계급이 "대자적" 계급(즉 혁명적 계급)으로 발전하는 것에 대해 다루는 것을 살펴 보자: "우리가 단지 그 몇몇 국면들만을 지적했던 투쟁 속에서 이 대중은 결합하고 자신을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한다. 대중이 옹호하는 이해는 계급의 이해가 된다. 그런데 계급 대 계급의 투쟁은 정치 투쟁이다."35)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들은 노동조합 및 차티스트 정치운동의 발전과 더불어 스스로를 "대자적 계급"의 수준까지 끌어 올렸다. 이같은 역사적 과정은 부르주아 "사회주의자" 지식인의 영향권 밖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자신은 이들 지식인이 노동계급을 방문하여 그들이 당이나 노동조합으로 연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러나 노동계급은 지식인들을 무시하였다), 어떻게 반혁명적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분석했다.36)
게다가 영국의 노동운동은, 적어도 1847년까지는, 단순한 경제적 운동이 아니었다. 사실 (대중적으로 강력히 전개되었던) 차티즘은 정치적 제 권리 및 완전한 민주헌법의 쟁취(몇 가지는 반(半)귀족적 성격을 띤 1840년의 영국에서 대단히 혁명적이었다) 등과 같은, 말의 강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요구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요구는 노동조합주의적 정책에 관한 레닌주의적 개념에 포섭될 수 없다. 사실 레닌에 따르면 자유 및 정치적 권리가 결여된 나라에서 이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인 투쟁인데, 왜냐하면 정치적 권리를 완전히 획득함에 따라 노동 계급이 그들의 투쟁을 가차없이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37)
영국에 대한 책에서 엥겔스는, 영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부르주아 분파들과 노동자들이 갈라선 것은, 부르주아에 대해 독립적으로 프롤레타리아가 쟁취한 계급-정치적 입장이 표현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차티즘과 사회주의의 희망적 융합의 경우, 노동 계급 외부에 있는 지식인 엘리트의 행동을 통해서 달성될 순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차티즘의 사회주의로의 접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상공업의 현재의 활황에 뒤이어 늦어도 1847년까지는 일어날 것이며 필시 내년에는 일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는 다음의 공황, 격렬하고 맹위를 떨친다는 점에서 이전의 모든 공황들을 뛰어넘을 이 공황은 빈궁 때문에 점점 더 노동자들을 정치적 구제 수단 대신에 사회적 구제 수단으로 이끌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헌장을 관철시킬 것이며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때까지는, 자신들이 헌장에 의해서 성취할 수 있는 많은 것, 지금은 아직 조금밖에 모르고 있는 많은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38)
여기에서 엥겔스는 일종의 기계적 낙관주의의 혐의를 받을 만 하다. 그러나 그는 차티즘이 부르주아로부터 독립적임을 인지했고 차티즘이 사회주의와 융합할 것을 고대했다.39) 하지만, 그러한 융합은 프롤레타리아트(엥겔스에 따르면, 그들은 차티즘과 함께 이미 부르주아지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해 있었다)의 외부에 있는 엘리트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사태들의 발전 결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1847년의 공황은 노동자들이, 획득된 정치적 권리의 사회적(전복적) 사용을 스스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혁명적 기반을 공유하는 차티즘과 사회주의의 융합을 결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엥겔스는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이 차티스트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차적인 문제이다. 만약 다음과 같은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이 사회주의자들은 대단히 온건하고 평화적이다. 그들은 공개적인 설득 이외의 어떠한 방법도 거부하는 한에 있어서, 현존 관계들이 아무리 나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승인한다. 그런데 동시에 이 사회주의자들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그들은 그들의 원리들의 오늘날의 형식으로는 공개적 설득을 결코 달성할 수 없게 된다."40) 이미 살펴 본 것처럼, 2년 후에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제안들을 무시하고 실재적인 계급 투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에 관한 마르크스의 글을 보자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율적이고 자생적인 혁명 역량은 어떤 중앙집권적이거나 외재적인 지도 없이 전개되는 것으로 보인다.41)
이 모든 것은 레닌의 주장, 즉 대중들은 의식과 조직을 도입해 줄 지식인들의 외재적 지도가 없는 한 노동조합주의와 경제 투쟁을 넘어설 수 없다는 주장과는 대조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논리적·역사적 모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은 1870년경 짜르 제국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이유는, 지식인들의 머릿 속에 고이 모셔진 "순수한" 사상의 불가피한 발전이 아니라, 한정된 내부의 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러시아에 깊은 영향을 미친 파리 꼬뮌 같은 사건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한 내적 조건은 러시아 경제의 초창기 자본주의 구조(아직 지배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및 그에 동반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의 결과이다.42) 약간 늦기는 했지만, 러시아 역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계급 투쟁이라는 유럽적 경로에 막 진입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현실과 연관된 역사적·사회적 요소들의 이같은 상호작용이야말로,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계급 투쟁의 이론적 표현이자 귀결로서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증폭시킨 원인이었다. 당시 마르크스·엥겔스와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 밀도 있는 서신교환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서신교환 중에 빈번하게 등장한 주제는 대체로 동일하다: 러시아도 서유럽의 경로를 밟을 것인가? 많은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시작했고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에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러시아에서조차 마르크스주의가 확산된 것은 종별적인 물질적, 사회-역사적 요인들 때문이지,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개념의 발전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해명되지 않은 것이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을 정교화한 지식인들이 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것을 제공하는가? 카우츠키는 이와 같은 의식의 변화는 객관적 조건이 허용할 때 발생한다(얼마나 명쾌한가!)고 말했고, 레닌은 단순히 카우츠키를 인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비껴 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로 전환되는 현상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고찰했다: "결국 계급 투쟁이 결정에 가까워지는 시기에는 지배 계급 내부, 낡은 사회 전체 내부에서의 해체 과정이 너무나 격렬하고 너무나 날카로운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지배 계급의 한 작은 부분이 지배 계급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는 혁명적 계급, 즉 그 손안에 미래를 움켜쥔 계급과 한편이 된다. 그런 까닭에 과거에 귀족의 일부가 부르주아지에게로 넘어갔던 것처럼, 현재 부르주아지의 일부, 그리고 특히 역사 운동 전체의 이론적 이해에 도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 중의 일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43)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은 아주 명확하다: 혁명적 위기(프롤레타리아트의 압박에 의해 야기된)의 상황에서 자신이 "패배한" 계급의 일부임을 깨닫고 진보적인 계급의 편으로 넘어오는 이데올로그들이 존재한다. 이것이 전부다.
사회적 이동의 유사한 과정은 "노동조합주의적"인 투쟁을 통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유형의 투쟁으로는 혁명적 위기가 발생하지 않음을 마르크스는 잘 알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정당의 본질적 특성이 {선언} 전반에서 제시되는 것이다. 분명히, 계급 투쟁이 절정에 달하고 낡은 사회가 거칠고 격렬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으로 혁명적인 도전자로 완연히 등장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부르주아지와 귀족 사이의 역사적 투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몇 해 전 마르크스가 혁명적 이론가들(부르주아 출신이든,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든)에 관하여 말했던 것은 이를 순차적으로 증명한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머리 밖에서 일어난 혁명적 운동을 기록할 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만이 역사유물론의 원칙과 유일하게 일치한다. {선언}의 모델이 개별적인 역사적 상황에 맞게 조정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이런 식으로, 러시아에서도 최소한 초기 국면에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견디기 어려운 압력 때문에 지식인들이 부르주아지의 편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편으로 넘어 오는 일이 발생했다(1870년에 계급 투쟁은 이제 막 초기 국면이었을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것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례(제 1인터내셔널, 파리 꼬뮌)의 결과였다. 이런 사례들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발전을 깨닫기 시작한 지식인들에게, 심지어 그곳(러시아)에서조차 미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것임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이 경우에조차 이론은 현존하는 역사적, 정치적 그리고 혁명적인 운동과 연관되서 발전한 것이지,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개념적 발전의 결과는 아니었던 것이다.
레닌과 카우츠키에게 돌아가 보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된다: 한편에는 홀로 남겨져 있을 때 어떤 혁명적 행동도 할 수 없는(단지 노동조합주의인)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혁명적인 도전을 받지 않아 유래없이 굳건한 권력을 갖는 부르주아지가 있다. 이 시점에서 몇몇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자신의 계급을 떠나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혁명적 의식을 도입한다: 레닌은 이 과정이 어떻게 또는 왜 발생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부르주아지의 가장 지적인 분파가 자신의 계급(그리고 자신의 특권)을 파괴한다. 프롤레타리아를 활력 없고 다만 본능적이고 잠재적으로만 파괴적인 대중에서 일단의 혁명가로 변형시킴으로써.
한발 더 나아가, 마르크스나 엥겔스와는 달리 레닌은 지식인이 프롤레타리아트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외적인 상황에서 "정치적인" 방식 즉 지식인으로 당에 가담함으로써 자신의 계급을 떠나는 것은 오히려 노동자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투쟁은 부르주아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냈지만 프롤레타리아에 가담하지는 않는 집단에 의해 지도된다. 이 점에서 레닌과 카우츠키의 테제는 칼 만하임의 유토피아적 정식화를 선취하는 것 같은데, 이에 따르면 독자적인 사회 집단(지식인들)이 사회에 있으면서, 고통받는 인간애와 진리, 그리고 정의의 대변인이 됨으로써 사회를 교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입장의 저열한 관념론은 너무 명백해서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다. 이상한 일이지만,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 만하임의 테제는 격렬히 공격하면서도, {무엇을 할 것인가?}는 아직까지도 탁월한 과학적 저작으로 여긴다. 반면 노동 운동의 역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들을 거부하는 사례들로 넘쳐난다.
차티스트 운동의 경험과 프랑스에서 1848-1849년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더 최근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나온 지 3년 후 러시아의 노동 운동은 소비에트의 경험을 통해 그 자생적 혁명 역량을 입증했다. 사실 초기에 볼셰비키는 이 자생적인 대중-추동적 현상에 외부적, 적대적이었다.44) 유사하게 대중들은 말할 나위 없이 사회-민주주의의 (심지어 간접적인) 영향권 밖에 있었다. 심지어 대중들에 가담한 볼셰비키 노동자들조차 "개인 자격으로" 그렇게 했는데, 당이 소비에트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 탁월하게 혁명적인 기관들은 당에게 혁명의 길을 보여 준 대중들의 업적이었다.45)
똑같은 일이 1936년 스페인의 노동자·농민 평의회에서 발생했는데, 이들은 어떠한 혁명적 지도의 영향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46) 중국의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1926-27년에 그들은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는데, 이는 창건 당시부터 제 3인터내셔널의 지도 하에 있었기 때문에 국민당의 휘하로 들어가는 방침을 채택했던 중국공산당과는 대조적이었다.47) 1936년과 1968년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건 역시 같은 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곳에서 당들의 "혁명적" 지도는 대중들의 "노동조합주의" 앞에서 아주 우아하게 스스로를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48)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둘러싼 사회-민주주의의 논쟁
처음에는, 레닌의 책은 최소한 {이스크라} 그룹 안에서는 별다른 논쟁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분열은 1903년 제2차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당대회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외관상으로는 하찮은 기술적 문제로 야기된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분열은 {이스크라} 그룹 안에 당에 대한 상이한 관점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룹 전체적으로는 경제주의를 격퇴하고 진정한 정치정당(1898년 이후로 단지 종이 위에만 존재했던)의 조속한 조직화를 옹호했지만, {이스크라} 그룹의 몇몇은 의회 및 선거투쟁에 특히 적합한 서구 사회민주주의 대중정당의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요컨대 이 그룹은 절대주의 이후 시대와 이어지는 의회 및 선거투쟁을 대비하려 한 것이다. 레닌의 엘리트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전망은 이러한 합법적인 의회주의 관점(마르토프)와 대립되었다. 분열 이후 멘셰비키는 그 원인을 {무엇을 할 것인가?}의 이론적 입장과 결부시켜 설명하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경제주의자들을 물리친다는 멘셰비키의 목적과 일치했기 때문에, 원래는 공격받지 않았었다.
분열 이후 레닌의 입장은 점점 더 곤란해지게 됐다: 그의 입지는 매우 좁아지고 당의 지도자들 대부분(마르토프, 페트로세프, V. 자술리치, 악셀로드, 젊은 트로츠키, 그리고 플레하노프)은 그를 반대했다. 레닌이 도움을 기대했던 카우츠키({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정확히 독일의 관점에 근거하지 않았는가?)는 그를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레닌을 격렬히 공격했던 룩셈부르크에 대한 레닌의 회답49)을 출판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1905년에 쓴 편지50)에서 레닌이 쓰라리게 인지했던 것처럼, 모든 국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멘셰비키와 같은 편이었다. 계속해서 공격을 받는 그런 상황에서, 레닌이 한발 물러서서 말썽 많고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 테제들의 어조를 낮추려 했던 것은 수긍이 갈 만 하다.
1904년,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사회 집단인지 지적함으로써 레닌을 비난했던 악셀로드의 공격에 응수하면서, 레닌은 그것은 물론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당의 관료주의적 중앙집중화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 신뢰할 수 없는 집단들을, 공장생활을 통해 집중화에 이미 익숙해진 프롤레타리아트의 제어 밑에 두기 위해서 말이다.51) 이 맥락에서는 당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하는 일단의 지식인들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구원자이기는커녕 신뢰할 수 없고 외부적인 집단으로 간주되는 비밀 아나키스트 쁘띠 부르주아의 관료주의52)에 대항해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보인다.53)
이 지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논쟁에 뛰어 든다. 그녀가 레닌에게 제기한 혐의는 관료주의적 집중제와 대중에 대한 온정주의였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활동은 이와는 매우 다른 조건하에서 이루어진다. 사회민주당은 역사적으로 기본계급의 투쟁으로부터 출현한다. 그리고 잇따른 변증법적 모순에 따라 당이 형성되고 발전되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 군대는 투쟁 그 자체의 과정 속에서 충원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당 조직의 활동과 프롤레타리아가 투쟁목표를 더욱 의식해가는 것과 투쟁 그 자체는 연대기적으로나 기계적으로 분리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54) 룩셈부르크의 입장은 명백히 마르크스·엥겔스의 관점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최소한 이론은 노동 투쟁의 과정 속에서 탄생하고 그것과의 연관 속에서 확산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경험과도 일치한다.55)
레닌에 대한 그녀의 비판은 정확하다. 레닌을 블랑키에 비유한 것을 포함하여 그렇다. 레닌과 저 위대한 프랑스 혁명가와는 다른 점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당이 대중들과 끊임없이 접촉해야 한다고 (비록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이 접촉이 다소 온정주의적이긴 했지만)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상가는 한 가지 점에는 완전히 일치했다: 그들은 모두 의식과 조직을 곧 이어 결합될 대중들의 투쟁에 일시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고려했다. 룩셈부르크의 공격에 대한 레닌의 회답은 당황스럽고 혼란스럽다. 그는 룩셈부르크가 제기한 원칙적 문제들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다. 그는 블랑키주의라는 혐의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다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활동에서 기술적인 사항이나 주변적 문제들을 다룰 뿐이다. 그런데, 악셀로드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레닌이 외재적 의식과 당의 "인텔리주의적" 특성의 문제에 관하여 이미 본질적으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여기에서 그의 침묵은 징후적이다: 그는 더 이상 {무엇을 할 것인가?}의 극단적인 테제들을 공개적으로 방어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악셀로드를 반박했던 이전 주장들의 강조점을 정정하면서,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에 적합한 조직형태로서 관료주의를 방어하려고도 않고, 당내에서 중앙위원회가 지방위원회와 대회위(congress)에 대해 절대적이고 관료적인 지배권을 가지는 것이 어째서 전적으로 온당하지는 않은가를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레닌은 이전에 "정력적 정신을 가진 10명의 사람들"의 규정을 명확히 강조했는 바, 지방위원회는 이들의 세세한 명령에 따라야 한다. 또한 그는, 러시아와 다른 비전제적인 국가에서도 프롤레타리아 조직 안의 민주주의의 "대단히 상대적인" 특성을 강조했었다.56) 확실히 여기에서 그는 목표를 정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1905년 7월에 레닌은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 중 하나로 꼽히는 {두 가지 전술}을 썼다. 이 저작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혁명기에 지도자와 대중들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지도자의 임무는 "대중들의 자생적인 혁명 활동"에 길을 밝혀주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57) 그런데 "대중들의 자생적인 혁명 활동"이라는 구절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맥락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생적인 활동은 다만 노동조합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1905년 1-2월 후 러시아에서 펼쳐지는 대중들의 자율적인 혁명적 창조성에 직면하고 나서, 1902년의 테제들을 계속 고수하는 것은 오류이거나, 차라리 미친 짓이었을 것이다. 레닌은 점차 이를 깨닫기 시작했는데, 비록 그의 "전환"이 처음에는 다만 혼란하고 함축적이었을 뿐이었다 하더라도 이는 사실이다. 더욱이 대중들의 자생적인 압력의 끊임없는 성장이 있었다: 10월에 첫 번째 소비에트가 출현했는데, 하지만 볼셰비키는 그것이 비-당(파)적인 대중조직이라는 이유로 그것에 가담하지 않았다. 당시에 레닌은 스톡홀롬에 있으면서, 다만 소비에트 현상의 단편적인 소식만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스웨덴의 망명지에서 그는 당과 볼셰비키 분파가 소비에트에 가담하게 하기 위해 볼셰비키 신문인 {신생활}에 기고하였다: 이것이 바로 전환이다.
안토니오 카를로
들어가며
오늘날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레닌의 사상을 재구성하는 것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레닌의 규정적 명제는 수없이 많이 논의된 그의 유명한 저작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개요가 잡혔던 것으로 여겨진다. 몇몇 사람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는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완전히 발전시키지 못한)에 관한 유일하게 과학적인 답변으로 남아 있다.1)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저작은 주지주의(intellectualism)와 관념론에 흠뻑 젖어 있는 스탈린 시대의 고전으로 간주되며, 소비에트 경험의 모든 관료주의적 변종의 근원으로 여겨진다.2) 분명히 {무엇을 할 것인가}는 부정적 저작이며, 이를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레닌의 유일하거나 가장 중요한 입장으로 파악하는 것은 완전한 잘못이다. 사실 이 점에 관해서 러시아 혁명의 사상은 지극히 분열되어 있고 모순적이다. 1902년({무엇을 할 것인가}가 출간된 해) 이후,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명제들에 완전히 반대되며 그것들에 대한 사실상의 기각을 함축하는 일련의 분석과 입장을 발전시켰다. 레닌이 러시아 노동운동의 역사적 발전에 의해 야기된 이와 같은 정정을 어느 정도까지 의식하고 있었는지 추정하기란 쉽지 않다. 확실히 레닌은 마르크스 그 자신처럼 모순에서 면제된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의 사상은 발전을 경험했는데, 이는 그가 몇몇 초기 분석들을 넘어서고 기각했음을 의미한다. 레닌이 이와 같은 사실을 항상 뚜렷하게 의식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그 자신의 과학에 대한 과학"을 결여했다. 따라서 그의 저작들이 어느 정도까지 일관성 있는 개념적 체계 속에 통합될 수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서, 주석자들은 반드시 그의 저작에 내재된 분석들을 재구성해야 한다.
레닌 스스로 우리에게 몇 가지 암시를 제공한다. 명시적으로, 1921년에 레닌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막스 르비앙(Max Levien)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가 불어로 번역되기 위해서는 그 저작이 생산했을 수 있는 의문과 모호성에 대해 권위 있는 볼셰비키의 해명이 담긴 서문이 반드시 추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3) 이는 매우 확실한 사실인데, 왜냐하면 1907년 이후 레닌 스스로가 ({무엇을 할 것인가}의 중심적 테마인) 자생성과 의식성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자신이 그의 반대파들(예를 들면 플레하노프 같은)이 악용하려 해왔던 애매하고 부적합한 표현들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4)
레닌은 이 점에 관해 모호하다(무엇이 부적절한 표현들이고, 어느 정도 부적절한가?). 그러나 이미 1905년에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미 지나가 버린 역사적 조건 아래서 쓰여진 저작으로 간주했다. 즉 현실의 논쟁과 사건의 발전이 심대하여,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출간되고 불과 3년 만에 더 이상 그것의 이론적 입장의 역사적 적합성을 변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5)
분명히 오늘날 레닌의 심리적 상태를 재구성한다거나, 그 저작에 대해 그가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 따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관념들은 그것들의 창시자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는 별개로 자신의 고유한 내포와 객관적 의미를 가진다. 이 글은 [당에 관한] 레닌 사상의 모순적 특성에 대해 그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는가와는 독립적으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레닌의 사상의 복잡한 발전과정을 재구성하는 것에 정확히 정향되어 있다.
레닌의 초기 입장(1895-1896)
소비에트의 공식 역사서술은 일반적으로 레닌을 절대적으로 일관되고 무오류의 인물로 제시한다: 그는 항상 모든 것을 바로 이해하고, 평범한 사람들보다 몇 년 앞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다. 사실 레닌의 사상은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언제나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는 개방적 변증법을 통해 발전해 왔지만, [이러한 역사서술에서] 레닌은 혁명의 수호천사로 변형되고 만다.6) 우리는 이 문제[정당의 문제]에 관한 레닌의 관점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문제적이었고, 그것이 유래한 역사적 맥락을 어떻게 반영했는지 보여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레닌의 최초의 분석('사회민주주의당의 강령 초안과 해설')7)은 18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기에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와 전혀 다른 입장이 제시된다. 이 저작에서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임무를 다룬다. 이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레닌은 계급 의식이 외부로부터 가공되고 노동자들에게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계급 의식은 경제 투쟁에서 "불가피하게" 발전하는 것처럼 공장 안에서 노동자들과 고용주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의 내재적 발전을 돕기 위해 이와 같은 투쟁의 일부가 되어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다.8)
이 점에 관한 한 레닌의 테제는 매우 분명하다: "따라서 고용주에 맞선 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불가피하게 전체 자본가 계급,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모든 사회 질서에 맞서는 투쟁으로 전환한다."9) 즉, 1902년에 레닌이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주의 사이의 의식과 정치를 분명히 구별했던 입장과 달리, 노동조합주의적이지는 않은 의식이 노동자 투쟁에서 "불가피하게" 발전한다. 이는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의 특정한 측면(예를 들어,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 환경) 뿐 아니라, 전체 자본주의 구조에 맞서 투쟁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결국 혁명적 의식이 경제 투쟁 안에서 발전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레닌은 자신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은, 자본가들 및 대공장에 의해 창출된 공장-소유자 계급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하고 해방을 쟁취하는 유일한 방도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은) 특정 국가의 소속과 무관하게 노동자들의 이해(interest)는 동일하며, 노동자들이 사회의 모든 다른 계급들과 분리되어 별도의 계급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영주들과 자본가들이 이전에 그랬고 여전히 그런 것처럼, 국가의 업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어떤 수단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가? 끊임없이 투쟁을 경험함으로써, 처음에는 고용주에 대항하기 위해 시작되어, 점차 발전하고 첨예해지고, 대공장의 성장에 따라 막대한 숫자의 노동자들을 포함하게 되는 투쟁을 경험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세 번째로, 이 투쟁은 노동자들의 정치 의식을 발전시킨다. 열악한 생활 조건 때문에 근로인민대중은 여가나 국가적 문제에 대해 숙고할 기회가 없다. 반면 일상적 요구를 걸고 공장주에 맞서 투쟁하면서 노동자들은 자생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국가적·정치적 질문들, 예를 들어 러시아 국가가 어떤 식으로 통치되는지, 법률과 규제가 어떻게 공표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이해에 복무하는지 등에 대해 생각하도록 자극된다. 공장에서의 충돌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은 법률과 국가적 권위의 대표자들과 필연적으로 갈등하게 된다."10)
이 절에 따르면 레닌은 정치 의식이 "자생적이고 불가피하게" 공장에서의 생활과 투쟁으로부터 발원한다고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투쟁은 노동자들을 자본주의와 발본적으로 적대적인 입장(레닌이 일찍이 언급한 것처럼, "전체" 자본주의 사회구조 내에서의 투쟁)으로 인도하며, 법률과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이해하게끔 한다. 이러한 투쟁의 즉각적 결과로 "러시아 국가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각성이 출현한다. 그러나 레닌은 오직 입헌적으로 보장된 정치적 권리의 획득을 통해서만(즉, 짜르 전제정의 전복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함을 덧붙인다.
이와 같은 유형의 의식(전제정을 붕괴시키는 투쟁)은 사회민주주의적 정치 의식이다. 1895-1896년의 기간 동안 레닌은 내심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치 의식이 공장 내부의 관계와 투쟁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사실 노동자들은 바로 이러한 관계 내부에서 법률과 국가가 "누구의 이해"에 봉사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 이로부터 그들의 계급적 본질 및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의 필요성이 나온다. 반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이렇게 단언한다: "계급적 정치 의식은 외부로부터만, 즉 경제 투쟁의 외부로부터만, 다시 말하자면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라는 영역의 외부로부터만 노동자에게 도입될 수 있다. 이 지식이 획득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모든 계급 및 계층과 국가 및 정부의 관계라는 영역, 모든 계급 상호 간의 관계라는 영역 뿐이다."11)
이는 7년 전 레닌의 견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당시 당의 기능은 의식의 발전을 돕기 위해 공장에서 불가피하게 분출하는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투쟁은 전체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혐오(그리고 이는 노동조합주의 내에서처럼 단순한 부차적 특성이 아니다)와 군주제에 맞서 입헌제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려는(더 나은 전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의지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와 같은 정식화는 경제주의에 아주 근접해 있는데,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의 의식과 정치적 조직을 노동조합적 투쟁의 불가피하고 따라서 자생적인 결실로 보기 때문이다 ― 비록 레닌이 이 "불가피한" 과정을 촉진시키는 문제를 제기했다 할지라도. 이는 레닌이 1896년 직후에 쓴 글에서도 발견된다: "1895-96년의 파업은 헛되지 않았다. 파업은 러시아의 노동자들에게 막대하게 기여했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이해를 위한 투쟁을 어떻게 벌이는지 보여 주었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상황과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요구를 이해할 수 있게끔 가르쳤다.12)
따라서 파업은 정치 의식을 낳는다. 여기서 레닌은 혁명적인 정치 의식과 노동조합주의적인 정치 의식을 구별하지 않았는데, 이는 몇 년 뒤 레닌의 견해와 자뭇 다른 것이었다. 이제 문제는 레닌의 초기 입장을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가 1894년부터 1901년까지 러시아 사회주의 써클에서 성행하던 원시성(primitivism)의 영향을 받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후에 레닌 스스로 명료화한 것처럼, 원시성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잡하고 무계획적인 방식("원시성"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유래했다)으로 다루었다. 써클의 성원들은 견고하고 집중된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은 채, 앞뒤 가리지 않고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에 뛰어들었다. 더구나 이와 같은 경향은 점차 고유한 이론을 낳았는데, 이 이론은 써클들의 자생적이고 비조직적인 행동들을 정당화하면서, 사실상 운동을 자생성에 굴종시키고 결국 운동을 초기 단계에 결박시켰다.13) 1901년에 레닌은 경제주의와 모든 형태의 자생성(주의), 즉 주타방의 근원으로 원시성을 규정했다.14) 1년 후 같은 현상에 대한 그의 분석은 일종의 자기비판 같다. "원시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레닌은 1894-1901년의 전형적인 러시아 써클 활동을 묘사한다. 그런데 1894년과 1895년에 레닌 자신이 "전형적"인 사회민주주의 써클(성 페쩨르부르크 투쟁 동맹)과 정치적으로 결부되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레닌은 1895년 즈음 러시아에 당을 형성하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들(레닌 그 자신을 포함한)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와 같은 "원시적" 작업의 오류와 한계 또한 지적한다.15) 그러므로 레닌의 고백은 은연중에 자신이 "원시주의"에 관련되었던 방식을 드러낸다. 물론 레닌은 그러한 경향 내에서 매우 선진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당이라는 문제의 즉각적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6) 하지만 레닌은 여전히 혁명적 의식의 고양을 공장 투쟁의 자생적-기계적 결과로 보았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임무는 이런 자생적 현상을 촉진하는 것일 뿐이었다. 여기에서 기본적 계급 투쟁에 대한 의식성의 외재적 특성은 강조되지 않는다({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레닌의 원시적 자생(성)주의는 반대편 극단으로 나아간다: 비록 혁명적 의식이 지역적이거나 국제적인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 속에서만 출현하고 외부로부터 도입될 수 없다 하더라도,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기본적 계급 투쟁으로부터 의식성으로의 이행은 기계적이거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다. 이 과정은 변증법적이다. 그러한 변증법적 성격으로 인하여 그것의 귀결점은 기계적-자생적 전망에 따라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정치적 계급 의식은 오직 노동자 투쟁의 맥락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필연적인" 경우라 할 순 없다. 그 과정의 결과는 항상 잠재적일 뿐, 결코 선험적이지 않다(혹은 보증된 것도 아니다).
1897년의 전환과 {무엇을 할 것인가}에 선행하는 저작들
1897년 동안 초창기 러시아 노동운동 내에서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 1895-96년의 대파업들은 의미있는 성과 없이 종결되었다: 그것은 의식성도 정당도 낳지 못했다. 유일한 가시적 성과라곤 1년 후(1897)에 좌절될 공장 환경과 노동일에 관한 법령뿐이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행위는 의식을 앞지르는 법이니, 실천적으로 파탄났음에도 불구하고 원시성은 초기 사회민주주의 그룹들(그리고 써클들)의 의식 속에 단단히 뿌리박힌 채 존속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것은 스스로의 입장을 상세화·명료화하고 1895-96년의 경험을 제도화하려 함으로써, 경제주의의 정치 조류를 낳기도 했다.
반면 레닌은 순수히 경제적이고 노동조합적인 활동의 부적합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이리하여 그는 사건의 교훈을 기꺼이 배우는 위대한 혁명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장법의 도래와 함께 레닌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결론은 단호하리만치 부정적인 것이었다: 1895-96년 파업에 뒤따른 공장법은 고용주들에게 일련의 빠져나갈 구멍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 요구한 총노동시간을 본질적인 지점에서 변경하지 않았다. 따라서 운동의 주요 목표는 쟁취되지 못했다. 긍정적이었던 것은 정부가 비록 형식적이지만 양보를 강제받았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대중들이 하나의 정당,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 하에 그들의 결합된 요구를 제기할 때," 그리고 "정부가 더 이상 이런 식의 무의미한 양보로 대충 때울 수 없을 때," 기회는 올 것이다.19)
따라서 오직 당만이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에 적합한 정치적 성과를 보장할 수 있다. 이를 위한 필수조건은 이미 현존하고 있다. 운동이 지역의 경계를 넘어 전국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당 없이는 단순한 노동조합 투쟁조차 다만 무의미한 양보를 낳을 뿐이다. 이제 경제적이고 노동조합주의적인 투쟁의 맥락에서조차 정치적 계기의 자율성은 물론 당의 본질적 중요성이 전에 없이 강조된다.
1897년 말에 이르러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임무}라는 매우 중요한 팜플렛에서 동일한 문제를 다시 다루고 명료화했다. 1895-96년 시기의 저작에서는 경제 투쟁의 필연적 귀결이자 반영이며, 따라서 사실상 그것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정치 투쟁의 중요성과 자율성이 강조된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쓴다: "경제적인 선동과 정치적인 선동 모두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식을 발전시키는 데 동등하게 필요하다; 경제적 선동과 정치적 선동 모두 러시아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을 지도하는 데 동등하게 필요한데, 왜냐하면 모든 계급 투쟁은 정치 투쟁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치 의식과 정치 투쟁이 여전히 경제 투쟁의 자생적이고 기계적인 반영으로 간주되었다면, 정치적 계기의 자율적 중요성을 힘주어 말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예견하면서, 경제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과의 배타적인 갈등에 돌입하는 반면, 정치 투쟁에서는 인구의 모든 다른 계급들과 접촉하게 된다는 점도 지적한다.20)
그러나 {임무}는 아직 과도기적 저작이다. 왜냐하면 경제 투쟁이 아직 정치 투쟁에 종속({무엇을 할 것인가}에서처럼)되지 않고, 동등하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의식성은 정치-경제적 영역과 독립적으로 그것을 발전시키는 일군의 부르주아 지식인들에 의해 외부로부터 프롤레타리아에게 도입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닌은 지식인들이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헤게모니화되어야 한다고(따라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담지자로 간주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 다소 비관적인 분석을 제시한다: "교육받은 자들 그리고 '인텔리겐챠'는 일반적으로 사고와 지식을 박해하는 전제정의 야만적 경찰 독재에 맞서 반역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물질적 이해 때문에 인텔리겐챠는 전제정과 부르주아지에 결박되며, 비일관적이고 타협하도록, 공직의 봉급이나 이윤의 일부 혹은 배당금 따위를 위해 대항적이고 혁명적인 열정을 팔아치우도록 강제 받는다."21) 1897년 이후 러시아의 상황은 정체되었다. 1898년에 아래로부터 당을 건설하고자 하는 써클들의 '원시적' 시도는 기껏해야 다양한 형태의 자생주의를 포괄하는 완전히 탈-중심화되고 자율적인 써클들의 분산된 동맹만을 만들고 실패했다.22)
결국 레닌은 유사한 운동의 필요를 인식한 다른 지식인들처럼 자생주의에 맞선 논쟁을 개시했는데, 이는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와 2차 당 대회(실질적으로는 1차)에서 절정에 이른다. 1895년과 1899년 동안 레닌은 투옥되었다가 망명길에 올랐다. 정치활동으로부터 절연된 상태에서 ― 그러나 그는 러시아의 상황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었고, 그 속에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저술했다 ― , 레닌은 아마도 자연스레 정치적-이론적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끌렸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요소는 러시아의 상황이 전술한 바와 같지 않았다면, 따라서 모든 형태의 자생주의에 맞선 가차없는 투쟁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별로 중요치 않았을 것이다. 1899년 {라보차야 가제타}에 실린 기사에서 레닌은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계기의 본질적 본성에 관한 테제를 정정하고 정교화하면서, 그것 없이는 심지어 경제적인 영역에서조차 노동조합 투쟁은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23)
당시 레닌의 가장 중요한 논문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내 퇴행적 경향"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퇴행적 경향은 자생주의이다. 이 저작에서 그는 실질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기본적 테제들을 예상하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이미 {무엇을 할 것인가}의 근본 가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원래 사회주의와 노동자 계급 운동은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따로따로 존재했다. 노동자들은 자본가에 맞서 싸우면서 파업과 조합을 조직했고,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 운동에서 한발 물러서 동시대 자본주의 내지 부르주아 사회 체계를 비판하고 그것을 다른 체계, 즉 더 우월한 사회주의 체계에 의해 대체할 것을 요구하는 교설들을 정식화했다. 노동-계급 운동과 사회주의의 분리는 서로에게 유약함과 저발전을 초래했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유리된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은, 유토피아나 실제 삶에 아무 효과도 미치지 못하는 미망에 지나지 않았다; 당대의 선진적 과학에 의해 계몽되지 못한 노동-계급 운동은 사소하고 파편화된 신세를 면치 못했으며, 정치적 중요성을 결여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통합된 사회민주주의 운동 안에서 사회주의와 노동-계급 운동을 융합시키려 하는 요구가 전 유럽 국가에서 점증한다. 이러한 융합이 발생하면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은 유산 계급에 의한 착취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적 투쟁이 되고, 사회주의(적) 노동자 운동의 보다 우월한 형태로 진화된다 ― 독자적인 노동자 계급 사회민주주의 정당.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운동과의 융합으로 인도함으로써,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헌을 했다: 그들은 융합의 필연성을 설명하는 혁명적 이론을 창안했고, 사회주의자들에게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투쟁을 조직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24) {무엇을 할 것인가}의 기본적 테제들은 여기에 분명하게 예견되어 있다: 노동 계급의 외부에서 획득되는 혁명적 의식; 홀로 떨어져 있을 때,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조합적 한계를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혁명적 과학을 만들어 내고 프롤레타리아에게 "그것을 증여하는" 사회주의적 경향을 지닌 마르크스와 엥겔스 같은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필요하다는 것.
같은 시기의 다른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는 레닌이 러시아 노동 운동의 문제들(자생주의에 맞선 투쟁)에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보여 준다. 러시아 노동 운동의 문제들은 카우츠키의 이론적 기여보다 레닌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카우츠키는 1900년과 1914년 사이의 모든 국제 사회민주주의자들 내에서 막대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25) 카우츠키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혁명적 조직의 문제들과 계급 투쟁의 결과를 다룰 때 '정치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레닌에게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노동 운동에 지배적인 경제주의와 러시아 노동 운동의 발전에 주된 장애물을 물리치는 무기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내부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카우츠키의 일반적인 이론적 입장들을 수용·정정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레닌과 유사한 실천적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고 이후에 {이스크라}에서 레닌의 동료가 될 마르토프의 정치적 영향도 마찬가지다. 레닌은 그로부터 몇 페이지를 인용하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역사적 정교화를 빌어왔다.26)
이제 레닌의 생애로 돌아가 보자: 1900년에 복역을 마친 후, 그는 해외로 나가 사회민주주의 망명자에 가담하였다.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은 그 자체로 그의 입장을 강화했다: 레닌이 가담했던 {이스크라} 지식인들의 분위기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써클의 원시성을 격퇴할 것을 목표의 하나로 삼고 있었다. {이스크라}는 형편없었던 1898년 써클 동맹을 대체하기 위해 진정으로 집중화된 당을 구성할 작정이었다. 1898년의 아래로부터의 건설 경험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당은 위로부터 건설되어야 했다. {이스크라} 지식인 그룹은 각 써클에 이론적 의식성과 조직을 도입함으로써 러시아의 현실 외부에서 써클의 원시성을 격퇴시켜야 했다.
다시 말해 레닌과 이스크라의 상황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기본 테제들에 가장 적합한 모델을 배태했던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러시아의 상황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901년의 서신에서 레닌은 자생주의 및 무엇보다 그것의 뿌리로서 써클들의 원시성을 격퇴시킬 필요성을 되풀이했다.27) 이와 같은 상황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이스크라} 그룹의 외재적 개입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형태의 자생주의에 맞선 가치 없는 투쟁을 위한 때는 무르익었다. 1902년 마침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출간되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는 사회민주주의적 의식이 있을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 의식은 외부로부터 노동자들에게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나라의 역사를 통해 입증된 바, 노동자 계급은 그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노동조합적 의식, 즉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고용주에 대항하여 싸우고 정부로 하여금 필요한 노동법을 통과시키도록 노력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는 신념 만을 발전시킬 수 있을 뿐이다. 반면 사회주의 이론은 유산계급의 교육받은 대표자, 즉 지식인들이 만든 철학·역사학·경제학의 제 이론으로부터 성장해 나왔다. 현대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사회적 지위로 보면 부르주아 지식인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학설은 노동운동의 자생적 성장과는 완전히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다. 그것은 혁명적·사회주의적 지식인의 사상 발전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로서 발생했던 것이다."28)
레닌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위의 구절 직후에 유사한 관점을 설명하는 긴 구절을 카우츠키로부터 인용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카우츠키의 극단적 명제를 완화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사회민주주의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하며,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했다.29) 따라서 당은 일단의 외부적 요소들(부르주아 지식인)나 프롤레타리아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사람들(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함으로써 지식인으로 간주되게 되는 노동자들, 즉 노동계급에 외재적인)로 구성된다.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존재조건과 공장관계에 갇혀 있는 한 사회에 대한 전반적 통찰을 요청하는 혁명적 의식에 이를 수 없고, 기껏 해야 부르주아지에 종속된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인 노동조합주의적인 정치 의식에 머물 뿐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당은 활동적으로 통일된 자신의 기능을 소진하지 않는다: 단번에 주어지는 메타-역사적인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레닌은 "정력적 정신을 가진 10명의 사람들"의 힘에 근거해서 강고하게 집중된 당을 통해, 투쟁의 와중에서 대중들을 지도하고 교육시키고 정치화할 것을 강조했다. 당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은 대중들을 지도하고 의식을 부여하는 이 끊임없는 역할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더욱이 1902년에 이와 같은 조직 모델의 비민주적인 특성은 단순히 러시아적 상황(사회민주주의의 불법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이 하나의 요인이기는 했지만, 레닌은 사실상 민주적 원리의 적용이 "현 사회에서 매우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과 독일의 노동운동에 관련된 카우츠키와 웹의 저작을 인용한 것에서 유추해 보건대, 이 맥락에서 그는 러시아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일반을 지칭한다. 요컨대 레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만일 "민주적 원칙의 적용이 매우 상대적"인 게 사실이라면, 대중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직접 통제는 토대에 대해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는 전문화된 기능들의 필요성을 제거하지 않는다(레닌의 예에 따르자면: 국회의원 언론인, 조합에서의 보험 전문가).
따라서 종종 지적되었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는 종국에도 객체가 될 뿐, 역사의 주체는 아니다. 보통 소위 정통 레닌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이 지적될 때마다 분노로 펄쩍 뛴다. 그러나 이것이 레닌의 담론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만일 어떤 계급이 그것 스스로의 의식과 혁명적 조직을 정교화할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들을 다른 계급들로부터 차용할 수밖에 없다면, 그 계급은 다른 계급들에 종속적일 뿐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데 주체가 될 수 없다. 기껏 해야 다른 계급들에게 조종되는 도구가 될 뿐이다. 말의 강한 의미에서 혁명적 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혁명적 과정을 조직하고 지도할 수 있어야 하고, 같은 말이지만 종속적인 태도로 단순가담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역사유물론의 창시자들(또한 다른 곳에서의 레닌 그 자신, 트로츠키, 그리고 마오)은 쁘띠적이고 중간적인 부르주아지들이 근본적으로 혁명적 계급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자주 강조했던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에서 동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스스로를 해방시킴으로써 다른 계급들도 함께 해방시키는 프롤레타리아를 따를 때에만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헤게모니화될 수 있으며 사회주의 혁명에 가담할 수 있다. 요컨대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자율적인 계급이다.
반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쁘띠적이고 중간적인 부르주아지에 실질적으로 동화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율적 혁명 역량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는 노동조합주의(즉 그것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지식인들이 도래할 때까지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받아들이는)를 실천하기 십상이다. 이 도식에서 근본적 계급은 한편에서 부르주아지이고, 다른 한편에서 혁명적 지식인이다(그러나 지식인이 계급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중간에는 쁘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함께 있는데, 이들은 부르주아에 종속된 노동조합주의와 지식인들에 의해 부여된 혁명적 의식 사이에서 동요한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가 잠재적·본능적으로 혁명적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은 의식과 조직의 담지자인 지식인들에 의해 현실성으로 전화하기 전까지, 다만 잠재적일 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와 마르크스주의
의심할 여지 없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는 마르크스주의, 적어도 1845년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성숙기 저작들과 충돌한다. '철학의 빈곤'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경제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의 과학적 대변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론가다. 아직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계급으로 구성할 정도로 충분히 발전해 있지 못한 한, 따라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 자체가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지 않는 한, … 이 이론가들은 공상가들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나 역사가 전진하고 역사와 더불어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 보다 선명히 모습을 드러냄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과학을 찾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서 진행되는 것을 설명하고 그것의 매개체가 되기만 하면 된다."30)
마르크스에게서, 이론가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조합원에서 혁명가로, 그리하여 이전에 없던 혁명적 상황을 혁명적인 무엇으로 만드는 프롤레타리아트로 변형하지 않는다.31) 여전히 중요하긴 하지만, 이론가는 오히려 벌어진 혁명 투쟁의 과정을 분명하게 하는 훨씬 겸손한 역할을 할 뿐이다.
1880년, 죽기 몇 년 전에 마르크스는 다시 다음과 같이 썼다. "신의 뜻을 따르는 구원자가 아니라, 오직 그들 자신만이 강력한 처방책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사회적 궁핍을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32) 노동자들이 자신들만 남겨진 채 노예 상태로 남거나, 잘해야 노동조합 의식(마르크스 또한 이것에 정치 투쟁이 결합되지 않는 한 제대로 된 처방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33)에 이를 운명이라면, 그리하여 그가 이를 분명히 견지했다면 이것을 쓸 수 없었을 것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의 지식인들과 같은 "신의 뜻에 따른 구원자들"에 호소해야 했었을 것이다. 어쨌든, 마르크스의 이 구절은 오직 제1차 인터내셔널 기념비의 도입부에 포함된 유명한 명제와 부합할 뿐이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일이어야 한다."34)
'철학의 빈곤'으로 돌아가서, 마르크스가 노동 계급이 "대자적" 계급(즉 혁명적 계급)으로 발전하는 것에 대해 다루는 것을 살펴 보자: "우리가 단지 그 몇몇 국면들만을 지적했던 투쟁 속에서 이 대중은 결합하고 자신을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한다. 대중이 옹호하는 이해는 계급의 이해가 된다. 그런데 계급 대 계급의 투쟁은 정치 투쟁이다."35)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들은 노동조합 및 차티스트 정치운동의 발전과 더불어 스스로를 "대자적 계급"의 수준까지 끌어 올렸다. 이같은 역사적 과정은 부르주아 "사회주의자" 지식인의 영향권 밖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자신은 이들 지식인이 노동계급을 방문하여 그들이 당이나 노동조합으로 연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러나 노동계급은 지식인들을 무시하였다), 어떻게 반혁명적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분석했다.36)
게다가 영국의 노동운동은, 적어도 1847년까지는, 단순한 경제적 운동이 아니었다. 사실 (대중적으로 강력히 전개되었던) 차티즘은 정치적 제 권리 및 완전한 민주헌법의 쟁취(몇 가지는 반(半)귀족적 성격을 띤 1840년의 영국에서 대단히 혁명적이었다) 등과 같은, 말의 강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요구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요구는 노동조합주의적 정책에 관한 레닌주의적 개념에 포섭될 수 없다. 사실 레닌에 따르면 자유 및 정치적 권리가 결여된 나라에서 이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인 투쟁인데, 왜냐하면 정치적 권리를 완전히 획득함에 따라 노동 계급이 그들의 투쟁을 가차없이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37)
영국에 대한 책에서 엥겔스는, 영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부르주아 분파들과 노동자들이 갈라선 것은, 부르주아에 대해 독립적으로 프롤레타리아가 쟁취한 계급-정치적 입장이 표현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차티즘과 사회주의의 희망적 융합의 경우, 노동 계급 외부에 있는 지식인 엘리트의 행동을 통해서 달성될 순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차티즘의 사회주의로의 접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상공업의 현재의 활황에 뒤이어 늦어도 1847년까지는 일어날 것이며 필시 내년에는 일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는 다음의 공황, 격렬하고 맹위를 떨친다는 점에서 이전의 모든 공황들을 뛰어넘을 이 공황은 빈궁 때문에 점점 더 노동자들을 정치적 구제 수단 대신에 사회적 구제 수단으로 이끌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헌장을 관철시킬 것이며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때까지는, 자신들이 헌장에 의해서 성취할 수 있는 많은 것, 지금은 아직 조금밖에 모르고 있는 많은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38)
여기에서 엥겔스는 일종의 기계적 낙관주의의 혐의를 받을 만 하다. 그러나 그는 차티즘이 부르주아로부터 독립적임을 인지했고 차티즘이 사회주의와 융합할 것을 고대했다.39) 하지만, 그러한 융합은 프롤레타리아트(엥겔스에 따르면, 그들은 차티즘과 함께 이미 부르주아지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해 있었다)의 외부에 있는 엘리트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사태들의 발전 결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1847년의 공황은 노동자들이, 획득된 정치적 권리의 사회적(전복적) 사용을 스스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혁명적 기반을 공유하는 차티즘과 사회주의의 융합을 결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엥겔스는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이 차티스트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차적인 문제이다. 만약 다음과 같은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이 사회주의자들은 대단히 온건하고 평화적이다. 그들은 공개적인 설득 이외의 어떠한 방법도 거부하는 한에 있어서, 현존 관계들이 아무리 나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승인한다. 그런데 동시에 이 사회주의자들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그들은 그들의 원리들의 오늘날의 형식으로는 공개적 설득을 결코 달성할 수 없게 된다."40) 이미 살펴 본 것처럼, 2년 후에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제안들을 무시하고 실재적인 계급 투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에 관한 마르크스의 글을 보자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율적이고 자생적인 혁명 역량은 어떤 중앙집권적이거나 외재적인 지도 없이 전개되는 것으로 보인다.41)
이 모든 것은 레닌의 주장, 즉 대중들은 의식과 조직을 도입해 줄 지식인들의 외재적 지도가 없는 한 노동조합주의와 경제 투쟁을 넘어설 수 없다는 주장과는 대조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논리적·역사적 모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은 1870년경 짜르 제국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이유는, 지식인들의 머릿 속에 고이 모셔진 "순수한" 사상의 불가피한 발전이 아니라, 한정된 내부의 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러시아에 깊은 영향을 미친 파리 꼬뮌 같은 사건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한 내적 조건은 러시아 경제의 초창기 자본주의 구조(아직 지배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및 그에 동반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의 결과이다.42) 약간 늦기는 했지만, 러시아 역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계급 투쟁이라는 유럽적 경로에 막 진입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현실과 연관된 역사적·사회적 요소들의 이같은 상호작용이야말로,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계급 투쟁의 이론적 표현이자 귀결로서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증폭시킨 원인이었다. 당시 마르크스·엥겔스와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 밀도 있는 서신교환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서신교환 중에 빈번하게 등장한 주제는 대체로 동일하다: 러시아도 서유럽의 경로를 밟을 것인가? 많은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시작했고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에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러시아에서조차 마르크스주의가 확산된 것은 종별적인 물질적, 사회-역사적 요인들 때문이지,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개념의 발전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해명되지 않은 것이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을 정교화한 지식인들이 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것을 제공하는가? 카우츠키는 이와 같은 의식의 변화는 객관적 조건이 허용할 때 발생한다(얼마나 명쾌한가!)고 말했고, 레닌은 단순히 카우츠키를 인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비껴 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로 전환되는 현상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고찰했다: "결국 계급 투쟁이 결정에 가까워지는 시기에는 지배 계급 내부, 낡은 사회 전체 내부에서의 해체 과정이 너무나 격렬하고 너무나 날카로운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지배 계급의 한 작은 부분이 지배 계급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는 혁명적 계급, 즉 그 손안에 미래를 움켜쥔 계급과 한편이 된다. 그런 까닭에 과거에 귀족의 일부가 부르주아지에게로 넘어갔던 것처럼, 현재 부르주아지의 일부, 그리고 특히 역사 운동 전체의 이론적 이해에 도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 중의 일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43)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은 아주 명확하다: 혁명적 위기(프롤레타리아트의 압박에 의해 야기된)의 상황에서 자신이 "패배한" 계급의 일부임을 깨닫고 진보적인 계급의 편으로 넘어오는 이데올로그들이 존재한다. 이것이 전부다.
사회적 이동의 유사한 과정은 "노동조합주의적"인 투쟁을 통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유형의 투쟁으로는 혁명적 위기가 발생하지 않음을 마르크스는 잘 알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정당의 본질적 특성이 {선언} 전반에서 제시되는 것이다. 분명히, 계급 투쟁이 절정에 달하고 낡은 사회가 거칠고 격렬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으로 혁명적인 도전자로 완연히 등장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부르주아지와 귀족 사이의 역사적 투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몇 해 전 마르크스가 혁명적 이론가들(부르주아 출신이든,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든)에 관하여 말했던 것은 이를 순차적으로 증명한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머리 밖에서 일어난 혁명적 운동을 기록할 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만이 역사유물론의 원칙과 유일하게 일치한다. {선언}의 모델이 개별적인 역사적 상황에 맞게 조정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이런 식으로, 러시아에서도 최소한 초기 국면에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견디기 어려운 압력 때문에 지식인들이 부르주아지의 편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편으로 넘어 오는 일이 발생했다(1870년에 계급 투쟁은 이제 막 초기 국면이었을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것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례(제 1인터내셔널, 파리 꼬뮌)의 결과였다. 이런 사례들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발전을 깨닫기 시작한 지식인들에게, 심지어 그곳(러시아)에서조차 미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것임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이 경우에조차 이론은 현존하는 역사적, 정치적 그리고 혁명적인 운동과 연관되서 발전한 것이지, 자연적이고 불가피한 개념적 발전의 결과는 아니었던 것이다.
레닌과 카우츠키에게 돌아가 보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된다: 한편에는 홀로 남겨져 있을 때 어떤 혁명적 행동도 할 수 없는(단지 노동조합주의인)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혁명적인 도전을 받지 않아 유래없이 굳건한 권력을 갖는 부르주아지가 있다. 이 시점에서 몇몇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자신의 계급을 떠나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혁명적 의식을 도입한다: 레닌은 이 과정이 어떻게 또는 왜 발생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부르주아지의 가장 지적인 분파가 자신의 계급(그리고 자신의 특권)을 파괴한다. 프롤레타리아를 활력 없고 다만 본능적이고 잠재적으로만 파괴적인 대중에서 일단의 혁명가로 변형시킴으로써.
한발 더 나아가, 마르크스나 엥겔스와는 달리 레닌은 지식인이 프롤레타리아트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외적인 상황에서 "정치적인" 방식 즉 지식인으로 당에 가담함으로써 자신의 계급을 떠나는 것은 오히려 노동자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투쟁은 부르주아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 냈지만 프롤레타리아에 가담하지는 않는 집단에 의해 지도된다. 이 점에서 레닌과 카우츠키의 테제는 칼 만하임의 유토피아적 정식화를 선취하는 것 같은데, 이에 따르면 독자적인 사회 집단(지식인들)이 사회에 있으면서, 고통받는 인간애와 진리, 그리고 정의의 대변인이 됨으로써 사회를 교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입장의 저열한 관념론은 너무 명백해서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다. 이상한 일이지만,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 만하임의 테제는 격렬히 공격하면서도, {무엇을 할 것인가?}는 아직까지도 탁월한 과학적 저작으로 여긴다. 반면 노동 운동의 역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들을 거부하는 사례들로 넘쳐난다.
차티스트 운동의 경험과 프랑스에서 1848-1849년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더 최근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나온 지 3년 후 러시아의 노동 운동은 소비에트의 경험을 통해 그 자생적 혁명 역량을 입증했다. 사실 초기에 볼셰비키는 이 자생적인 대중-추동적 현상에 외부적, 적대적이었다.44) 유사하게 대중들은 말할 나위 없이 사회-민주주의의 (심지어 간접적인) 영향권 밖에 있었다. 심지어 대중들에 가담한 볼셰비키 노동자들조차 "개인 자격으로" 그렇게 했는데, 당이 소비에트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 탁월하게 혁명적인 기관들은 당에게 혁명의 길을 보여 준 대중들의 업적이었다.45)
똑같은 일이 1936년 스페인의 노동자·농민 평의회에서 발생했는데, 이들은 어떠한 혁명적 지도의 영향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46) 중국의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1926-27년에 그들은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는데, 이는 창건 당시부터 제 3인터내셔널의 지도 하에 있었기 때문에 국민당의 휘하로 들어가는 방침을 채택했던 중국공산당과는 대조적이었다.47) 1936년과 1968년에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건 역시 같은 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곳에서 당들의 "혁명적" 지도는 대중들의 "노동조합주의" 앞에서 아주 우아하게 스스로를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48)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둘러싼 사회-민주주의의 논쟁
처음에는, 레닌의 책은 최소한 {이스크라} 그룹 안에서는 별다른 논쟁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분열은 1903년 제2차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당대회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외관상으로는 하찮은 기술적 문제로 야기된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분열은 {이스크라} 그룹 안에 당에 대한 상이한 관점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룹 전체적으로는 경제주의를 격퇴하고 진정한 정치정당(1898년 이후로 단지 종이 위에만 존재했던)의 조속한 조직화를 옹호했지만, {이스크라} 그룹의 몇몇은 의회 및 선거투쟁에 특히 적합한 서구 사회민주주의 대중정당의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요컨대 이 그룹은 절대주의 이후 시대와 이어지는 의회 및 선거투쟁을 대비하려 한 것이다. 레닌의 엘리트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전망은 이러한 합법적인 의회주의 관점(마르토프)와 대립되었다. 분열 이후 멘셰비키는 그 원인을 {무엇을 할 것인가?}의 이론적 입장과 결부시켜 설명하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경제주의자들을 물리친다는 멘셰비키의 목적과 일치했기 때문에, 원래는 공격받지 않았었다.
분열 이후 레닌의 입장은 점점 더 곤란해지게 됐다: 그의 입지는 매우 좁아지고 당의 지도자들 대부분(마르토프, 페트로세프, V. 자술리치, 악셀로드, 젊은 트로츠키, 그리고 플레하노프)은 그를 반대했다. 레닌이 도움을 기대했던 카우츠키({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정확히 독일의 관점에 근거하지 않았는가?)는 그를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레닌을 격렬히 공격했던 룩셈부르크에 대한 레닌의 회답49)을 출판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1905년에 쓴 편지50)에서 레닌이 쓰라리게 인지했던 것처럼, 모든 국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멘셰비키와 같은 편이었다. 계속해서 공격을 받는 그런 상황에서, 레닌이 한발 물러서서 말썽 많고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 테제들의 어조를 낮추려 했던 것은 수긍이 갈 만 하다.
1904년,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사회 집단인지 지적함으로써 레닌을 비난했던 악셀로드의 공격에 응수하면서, 레닌은 그것은 물론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당의 관료주의적 중앙집중화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 신뢰할 수 없는 집단들을, 공장생활을 통해 집중화에 이미 익숙해진 프롤레타리아트의 제어 밑에 두기 위해서 말이다.51) 이 맥락에서는 당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하는 일단의 지식인들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구원자이기는커녕 신뢰할 수 없고 외부적인 집단으로 간주되는 비밀 아나키스트 쁘띠 부르주아의 관료주의52)에 대항해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보인다.53)
이 지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논쟁에 뛰어 든다. 그녀가 레닌에게 제기한 혐의는 관료주의적 집중제와 대중에 대한 온정주의였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의 활동은 이와는 매우 다른 조건하에서 이루어진다. 사회민주당은 역사적으로 기본계급의 투쟁으로부터 출현한다. 그리고 잇따른 변증법적 모순에 따라 당이 형성되고 발전되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 군대는 투쟁 그 자체의 과정 속에서 충원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당 조직의 활동과 프롤레타리아가 투쟁목표를 더욱 의식해가는 것과 투쟁 그 자체는 연대기적으로나 기계적으로 분리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54) 룩셈부르크의 입장은 명백히 마르크스·엥겔스의 관점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최소한 이론은 노동 투쟁의 과정 속에서 탄생하고 그것과의 연관 속에서 확산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경험과도 일치한다.55)
레닌에 대한 그녀의 비판은 정확하다. 레닌을 블랑키에 비유한 것을 포함하여 그렇다. 레닌과 저 위대한 프랑스 혁명가와는 다른 점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당이 대중들과 끊임없이 접촉해야 한다고 (비록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이 접촉이 다소 온정주의적이긴 했지만)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상가는 한 가지 점에는 완전히 일치했다: 그들은 모두 의식과 조직을 곧 이어 결합될 대중들의 투쟁에 일시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고려했다. 룩셈부르크의 공격에 대한 레닌의 회답은 당황스럽고 혼란스럽다. 그는 룩셈부르크가 제기한 원칙적 문제들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다. 그는 블랑키주의라는 혐의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다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활동에서 기술적인 사항이나 주변적 문제들을 다룰 뿐이다. 그런데, 악셀로드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레닌이 외재적 의식과 당의 "인텔리주의적" 특성의 문제에 관하여 이미 본질적으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여기에서 그의 침묵은 징후적이다: 그는 더 이상 {무엇을 할 것인가?}의 극단적인 테제들을 공개적으로 방어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악셀로드를 반박했던 이전 주장들의 강조점을 정정하면서,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에 적합한 조직형태로서 관료주의를 방어하려고도 않고, 당내에서 중앙위원회가 지방위원회와 대회위(congress)에 대해 절대적이고 관료적인 지배권을 가지는 것이 어째서 전적으로 온당하지는 않은가를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레닌은 이전에 "정력적 정신을 가진 10명의 사람들"의 규정을 명확히 강조했는 바, 지방위원회는 이들의 세세한 명령에 따라야 한다. 또한 그는, 러시아와 다른 비전제적인 국가에서도 프롤레타리아 조직 안의 민주주의의 "대단히 상대적인" 특성을 강조했었다.56) 확실히 여기에서 그는 목표를 정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1905년 7월에 레닌은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 중 하나로 꼽히는 {두 가지 전술}을 썼다. 이 저작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혁명기에 지도자와 대중들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지도자의 임무는 "대중들의 자생적인 혁명 활동"에 길을 밝혀주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57) 그런데 "대중들의 자생적인 혁명 활동"이라는 구절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맥락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생적인 활동은 다만 노동조합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1905년 1-2월 후 러시아에서 펼쳐지는 대중들의 자율적인 혁명적 창조성에 직면하고 나서, 1902년의 테제들을 계속 고수하는 것은 오류이거나, 차라리 미친 짓이었을 것이다. 레닌은 점차 이를 깨닫기 시작했는데, 비록 그의 "전환"이 처음에는 다만 혼란하고 함축적이었을 뿐이었다 하더라도 이는 사실이다. 더욱이 대중들의 자생적인 압력의 끊임없는 성장이 있었다: 10월에 첫 번째 소비에트가 출현했는데, 하지만 볼셰비키는 그것이 비-당(파)적인 대중조직이라는 이유로 그것에 가담하지 않았다. 당시에 레닌은 스톡홀롬에 있으면서, 다만 소비에트 현상의 단편적인 소식만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스웨덴의 망명지에서 그는 당과 볼셰비키 분파가 소비에트에 가담하게 하기 위해 볼셰비키 신문인 {신생활}에 기고하였다: 이것이 바로 전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