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정치(公民政治)의 밑돌을 괴자
<b>골프가방엔 골프채가 없다!</b>
신창원의 검거소식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날이었다. 시민의 지팡이이자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을 비웃어대던 신창원은 아주 흔한 체크무늬의 골프가방과 함께 검거되었다. 바로 뒤를 이어, 만원짜리로 빼곡히 2억원이 들어간다는 신종 뇌물접수용 골프가방과 함께 임창렬 경기도지사가 구속되었다. 흉흉한 뉴스속보의 대미는 IMF 이후 멍들대로 멍든 사회의 한줄기 희망이었던 세리의 골프가방으로 장식되었다. 사회악의 대명사로 등장한 흉악범, 장래를 촉망받던 정치인, 스포츠계의 여왕, 그들에게 존재할 법하지 않은 공통점이 있었다니...
하지만 어설픈 골프가방이란 형식을 뛰어넘어 본다면 가방에 뒤얽힌 비밀은 바로 드러난다. 골프가방엔 골프채가 없다! 항간에 의적으로까지 비유되던 신창원을 높이 평가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사회와 제도에 대한 불만을 저항으로 표출할만한 재주가 없는 그러나 개인기(?)만은 뛰어난 한 인간의 어설픈 저항의 결과가 그것이었다면, 권모술수와 비리만이 난무하는 정치권에서, 더구나 구조조정이라는 액션 뒷면의 거래에 초연하지 못한 어리석은 정치인의 결과가 그것이었다면, 우울한 사회의 스트레스를 오직 스포츠 정도에서 해소할 수밖에 없는 한국인의 자화상이 이것이라면, 그 어설프고 우스운 공통점은 하나의 결론으로 치닫는다. 위기에 몰린 자본주의의 추악한 자화상과 골프가방! 지나친 비약인가?
<b>구조조정의 실체는?</b>
경제회생, 국가경쟁력 강화, 효율성 증대의 기치를 드높이며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우리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실체는 철저한 시장주의적 해법과 경쟁의 원리에 있으며 이를 위해 한국사회는 구조조정에 시달리고 있다. 빅딜, 퇴출, 연쇄부도의 명백한 결론은 실업이요, 고용불안인 것이다. 노동권, 시민권, 공공성이라는, 시민의 투쟁을 통해 형식적으로나마 정착된 인간의 권리는 경제위기 이데올로기 속에 무참히 짓밟힌다.
구조조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부문의 축소, 즉 공적영역, 공공성의 축소로 집약된다. 이미 복지국가의 실패라는 이름으로 서구 유럽을 휩쓸었던 A급 태풍이 한국사회와 아시아, 제 3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전력과 통신, 국가 기간산업의 매각은 당연히 소비자의 부담을 격상시킨다. 소주와 위스키의 세율을 문제시하는 한미투자협정에 의해 소주를 마실 자유마저도 박탈당한다. 경쟁력없는 국산영화는 스크린쿼터제의 폐지에 의해 몰락한다. 농어촌의 아이들은 학교조차 다닐 수 없다.
당장 내일조차 부담스러운 서민들은 기약할 수 없는 연금과 보험에 시달리며, ARS 모금으로 간신히 지탱하는 '개밥에 도토리' 실업정책에 허탈해할 뿐이다. 의료보험료의 인상과 저질의 의료서비스는 국민의 건강권을 무참히 외면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실체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b>억울하면 돈 벌어라?</b>
자본의 탐욕은 저임금 정책을 유지하던 기본적 서비스와 최소한의 공적 영역조차도 부담스러워 한다. 물론 공적 영역이란 영구불변한 것도 아니요, 공공재란 이름 역시 태생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공적 영역은 인민의 투쟁에 의해, 자본과 권력의 의도에 의해 역사적으로 형성되었을 뿐이다. 자본주의 초기, 국가는 공공성의 이름으로 서민의 세를 모아 발전소를 세우고 철도를 깔고 댐을 건설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전화, 통신, 항공우주, 인터넷을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수십조, 수백조라는 그 엄청난 재원은 민중의 노동에 의해 창출되었고, 이것이 민중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산골 벽지에 전기가 켜지던 날, 외화벌이를 위해 타국에 나간 자식들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 들어오던 그 날, 민중들은 자신들의 노동의 힘에 감격했던 것이다. 건강과 교육과 같은 사회적 권리는 그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어야 한다. 나아가 '노동의 자유'와 '노동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은 단호할 뿐이다.
거래하라! 구매하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향유할 가치가 있다! 자본의 논리는 간단하다. 비효율적이고 관료적인 공적 영역은 사적 영역으로 전환할 때만이, 시장의 경쟁원리에 따를 때만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으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거대해진 자본은 그 수혜자인 공적영역을 이제는 새로운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공적 서비스나 인민의 권리와 같은 거추장스러운 부담은 '위기'라는 호들갑으로 순진한 국민의 '등을 치는' 것으로 해결해 버리고자 한다.
<b>고생하면 복이 오나?</b>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고통과 절망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악착같은 신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고통과 절망을 제공한 자가 선동하는 환상이기도 하다. 구조조정에도 말없이 견디고, 생존이 위태로워도 이악물고 참아내는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 민중의 현실은 '고통'의 연속일 뿐 '감래'의 열매는 극소수의 자본과 권력에게 주어질 뿐이다. 반전이 필요하다.
부실대재벌을 살리는데 100조원이 넘는 민중의 혈세를 쏟아부으면서, 최소한의 민중건강권을 지키는데 필요한 2조원에는 온갖 인색을 떠는 현실을 반전시켜야 한다. 정리해고 반대와 구조조정 저지로 일어섰던 그 힘으로, 자본과 권력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는 당연한 권리, 공적 권리를 지켜내고 확장시켜야 한다. 그러나 실업극복국민운동으로 구멍난 국가영역을 메워주는 식으로는, 소액주주운동으로 자본이 원하는 세상을 앞당겨주는 식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망한 기업을 인수하고 임금과 복지의 대가로 우리사주조합을 만드는 식은, 개별 기업을 넘어서는 '노동의 미래'를 창조하지 못하기에 역부족이다.
신창원의 검거소식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날이었다. 시민의 지팡이이자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을 비웃어대던 신창원은 아주 흔한 체크무늬의 골프가방과 함께 검거되었다. 바로 뒤를 이어, 만원짜리로 빼곡히 2억원이 들어간다는 신종 뇌물접수용 골프가방과 함께 임창렬 경기도지사가 구속되었다. 흉흉한 뉴스속보의 대미는 IMF 이후 멍들대로 멍든 사회의 한줄기 희망이었던 세리의 골프가방으로 장식되었다. 사회악의 대명사로 등장한 흉악범, 장래를 촉망받던 정치인, 스포츠계의 여왕, 그들에게 존재할 법하지 않은 공통점이 있었다니...
하지만 어설픈 골프가방이란 형식을 뛰어넘어 본다면 가방에 뒤얽힌 비밀은 바로 드러난다. 골프가방엔 골프채가 없다! 항간에 의적으로까지 비유되던 신창원을 높이 평가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사회와 제도에 대한 불만을 저항으로 표출할만한 재주가 없는 그러나 개인기(?)만은 뛰어난 한 인간의 어설픈 저항의 결과가 그것이었다면, 권모술수와 비리만이 난무하는 정치권에서, 더구나 구조조정이라는 액션 뒷면의 거래에 초연하지 못한 어리석은 정치인의 결과가 그것이었다면, 우울한 사회의 스트레스를 오직 스포츠 정도에서 해소할 수밖에 없는 한국인의 자화상이 이것이라면, 그 어설프고 우스운 공통점은 하나의 결론으로 치닫는다. 위기에 몰린 자본주의의 추악한 자화상과 골프가방! 지나친 비약인가?
<b>구조조정의 실체는?</b>
경제회생, 국가경쟁력 강화, 효율성 증대의 기치를 드높이며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우리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실체는 철저한 시장주의적 해법과 경쟁의 원리에 있으며 이를 위해 한국사회는 구조조정에 시달리고 있다. 빅딜, 퇴출, 연쇄부도의 명백한 결론은 실업이요, 고용불안인 것이다. 노동권, 시민권, 공공성이라는, 시민의 투쟁을 통해 형식적으로나마 정착된 인간의 권리는 경제위기 이데올로기 속에 무참히 짓밟힌다.
구조조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부문의 축소, 즉 공적영역, 공공성의 축소로 집약된다. 이미 복지국가의 실패라는 이름으로 서구 유럽을 휩쓸었던 A급 태풍이 한국사회와 아시아, 제 3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전력과 통신, 국가 기간산업의 매각은 당연히 소비자의 부담을 격상시킨다. 소주와 위스키의 세율을 문제시하는 한미투자협정에 의해 소주를 마실 자유마저도 박탈당한다. 경쟁력없는 국산영화는 스크린쿼터제의 폐지에 의해 몰락한다. 농어촌의 아이들은 학교조차 다닐 수 없다.
당장 내일조차 부담스러운 서민들은 기약할 수 없는 연금과 보험에 시달리며, ARS 모금으로 간신히 지탱하는 '개밥에 도토리' 실업정책에 허탈해할 뿐이다. 의료보험료의 인상과 저질의 의료서비스는 국민의 건강권을 무참히 외면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실체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b>억울하면 돈 벌어라?</b>
자본의 탐욕은 저임금 정책을 유지하던 기본적 서비스와 최소한의 공적 영역조차도 부담스러워 한다. 물론 공적 영역이란 영구불변한 것도 아니요, 공공재란 이름 역시 태생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공적 영역은 인민의 투쟁에 의해, 자본과 권력의 의도에 의해 역사적으로 형성되었을 뿐이다. 자본주의 초기, 국가는 공공성의 이름으로 서민의 세를 모아 발전소를 세우고 철도를 깔고 댐을 건설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전화, 통신, 항공우주, 인터넷을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수십조, 수백조라는 그 엄청난 재원은 민중의 노동에 의해 창출되었고, 이것이 민중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산골 벽지에 전기가 켜지던 날, 외화벌이를 위해 타국에 나간 자식들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 들어오던 그 날, 민중들은 자신들의 노동의 힘에 감격했던 것이다. 건강과 교육과 같은 사회적 권리는 그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어야 한다. 나아가 '노동의 자유'와 '노동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은 단호할 뿐이다.
거래하라! 구매하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향유할 가치가 있다! 자본의 논리는 간단하다. 비효율적이고 관료적인 공적 영역은 사적 영역으로 전환할 때만이, 시장의 경쟁원리에 따를 때만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으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거대해진 자본은 그 수혜자인 공적영역을 이제는 새로운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공적 서비스나 인민의 권리와 같은 거추장스러운 부담은 '위기'라는 호들갑으로 순진한 국민의 '등을 치는' 것으로 해결해 버리고자 한다.
<b>고생하면 복이 오나?</b>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고통과 절망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악착같은 신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고통과 절망을 제공한 자가 선동하는 환상이기도 하다. 구조조정에도 말없이 견디고, 생존이 위태로워도 이악물고 참아내는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 민중의 현실은 '고통'의 연속일 뿐 '감래'의 열매는 극소수의 자본과 권력에게 주어질 뿐이다. 반전이 필요하다.
부실대재벌을 살리는데 100조원이 넘는 민중의 혈세를 쏟아부으면서, 최소한의 민중건강권을 지키는데 필요한 2조원에는 온갖 인색을 떠는 현실을 반전시켜야 한다. 정리해고 반대와 구조조정 저지로 일어섰던 그 힘으로, 자본과 권력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는 당연한 권리, 공적 권리를 지켜내고 확장시켜야 한다. 그러나 실업극복국민운동으로 구멍난 국가영역을 메워주는 식으로는, 소액주주운동으로 자본이 원하는 세상을 앞당겨주는 식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망한 기업을 인수하고 임금과 복지의 대가로 우리사주조합을 만드는 식은, 개별 기업을 넘어서는 '노동의 미래'를 창조하지 못하기에 역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