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된 계급의 램프 들여다보기
<b>전노협의 주가상승, 그 이면에는?</b>
전노협 정신을 계승하자. 근래 유행하는 말이다. 95년 민주노총이 출범하면서 ‘죽은개’취급받던 ‘시대착오’(?)적인 노동운동의 대명사인 전노협이 ‘21세기 산별의 시대’(?)를 앞두고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 물론 전노협이 외교적 언사 속에서까지 죽은 개 취급 받았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95년 민주노총 출범 훨씬 이전부터 전노협은 어떤 ‘특정한 노동운동의 한 조류’로 취급되었고 경향성의 하나로 취급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경향성은 ‘전투적 조합주의’라고 불리워졌고, 그러한 노선에 대한 강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92년 박승옥 씨가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제기했던 ‘사회발전적 노동운동론’은 그 일례이다.
비판론자들은 이후 이어진 노동운동 위기논쟁에서 당시 노동운동을 위기로 규정했고, 그 위기의 원인을 시대착오적인 전노협 노선으로 지목했다. 이미 그 시절부터 전노협은‘복날을 앞둔 개’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노협 정신이라니? 죽은 개가 살아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물론 아니다. 산별노조와 진보정당만이 위(?)로부터 공식적(!)으로 뇌까려지는 노선이다. 그나마도 90년 전노협 건설 때처럼 대중적 토론 속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노협 정신’은 지난 2월 금속연맹 선거 때 세 후보자가 선거용 멘트로 쓰면서 회자되었다. 공익 광고 정도다. 따라서 ‘전노협 정신’운운하는 것은 모두 ‘열심히 하겠다’는 정도로 취급되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전노협 정신이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 시절의 광폭한 팟쇼적 탄압과 야만의 폭력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중은 왜 그 시절에 대한 강한 향수를 가지는가? 단순한 복고 열풍인가? 아니면 뭔가 특별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지금은 부재한 그 어떤 에너지가 간직된 시공간의 다른 이름이 혹 ‘전노협’이란 말로 응축되어 봉인된 것이 아닐까?
전노협 시대의 핵심엔 마창노련이 있었다. 한때 노동운동의 메카라고 불리워졌던 ‘그곳’에서 ‘그때’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갈무리에서 출간된 {내사랑 마창노련}에는 ‘전노협 정신’의 그 무엇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걸 캐내는 건 독자의 독해력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닌 ‘역사와 기록문학’의 절충형태(필자 김하경 씨와의 인터뷰, 마산 MBC 99.7.2)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행간에서 우리가 간취할 것이 더 많을런지도 모른다. ‘고착된 정사(正史)’의 심연 속에서 상상력을 끌어내는 재해석의 고단함이란 얼마나 힘겨운가? 우리는 89년 창원대로 대투쟁에서 콜타르 드럼통에 불을 붙였던 1만 여명의 청년 노동자를 가능한 한 가까이에서 만나야 하지 않는가? 그들에게 직접 마이크를 들이대고 생생한 증언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박스 100여 개가 넘는 분량의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노보와 회의록, 잡지와 기관지, 보고서와 문서들, 인터뷰와 신문이 그 원천이다. <font color="#0099cc"><각주1: 일차사료를 3년 반 동안 거의 혼자서 정리한 필자의 노고는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1차사료 수집에 게으르고 남이 써놓은 글을 대충 인용하거나 이론틀을 빌어오는 한국의 풍토에서 아마도 그런 ‘하찮은 일‘(?)에 3년을 꼬박 바칠 ‘고급두뇌‘는 없었나 보다. 수십 년 동안 연구에 매진하는 서구 노동사가(勞動史家)의 자세가 젊은 연구자들에게 있었다면 아마도 한국의 노동사는 지금쯤 모종의 결실을 맺었을런지 모른다. ‘현실에 뿌리 박은 학문‘은 선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노협의 트럭 한 대 분의 엄청난 자료가 몰지각한 민주노총 실무자들에 의해서 폐지수집상에게 넘겨졌다는 사실에만 분개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료가 있다한들 남이 분류, 정리해주길 기다리는 연구자들의 자세 역시 징치되어야만 한다.></font>
전국적 정세와 울산, 부산, 거제 등 인근의 투쟁을 놓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합원의 역동성과 기발한 전술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그러한 조합원들의 ‘직설화법’들이다.
지하로 잠적한 그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산별노조의 껍데기 그림표와 진보정당의 자기도취적인 플랜은 노동자계급을 기만하고 통제하며 굴절시키는 장치에 불과할 것이다.
<b>전술의 판례집!</b>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노동자 대중의 지혜와 행동이 응집된 전술과 투쟁들이다.
88년 7월 7일 마산의 한국소와 구사대와 마창노련 노동자들이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마창노련 노동자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구사대의 테러는 계속되었고 한국TC에서도 구타, 폭행과“자궁을 수박처럼 쪼개버려”와 같은 폭언이 난무했다. 마창노련 차원에서 정방대가 조직되고 ‘구사대의 씨를 말릴 때까지’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구사대와의 투쟁 과정에서 마창노련 의장이 구속되자 구사대만행규탄투쟁은 구속자석방투쟁으로 전환되었고 7월 15일부터 7월 27일까지 매일 1천∼3천 명이 가두투쟁에 돌입했다. 그 결과 구속된 마창노련 의장이 석방되었다.
이러한 연대의 정신은 89년 세신실업 투쟁으로 이어진다.
새벽 5시 세신실업 200명의 구사대가 농성중인 조합원들을 테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침에 출근하던 마창노련 노동자 700명이 달려와 구사대를 진압(?)했다. 마창노련 노동자들은 정방대에 의해 체포된(?) 구사대와 경찰에 연행된 노조간부 10명의 교환에도 성공했다.
이러한 마창노련의 투쟁들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것은 다채로운 전술들이다.
첫째 파업 프로그램으로는 돼지잡기, 체육대회, 공동체놀이, 장기자랑, 노가바 경연대회, 악덕경영자 고사지내기, 장례식, 화형식, 횃불집회, 일일찻집, 가족의 밤, 비디오 상영, 촌극, 웅변대회, 1분 발언, 풍물강습, 편지쓰기, 공동 판화제작와 같은 다양한 방식이 채택되었다.
둘째 준법투쟁으로는 깃달기, 작업복 뒤집어 입기, 각종 증명서 발급받기, 공단 내 타 마창노련 사업장과 점심식사 같이 하기, 매시간 정각마다 일손 놓고 노래부르고 구호외치기, 구두 신고 사복입고 작업하기, 1인 1벽보 붙이기, 배식구 하나만 이용하여 점심먹기, 한 화장실만 이용하기, 한 공중전화 이용하여 부모님께 전화하기, 신협통장 찾기, 단체로 소화제 타먹기, 전원 조퇴하여 야유회 갖기, 조합원에게 망언을 한 회사간부 또는 사장실 앞에 식사를 마친 식판 갖다놓기, 짬밥 본관 앞 투척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셋째 좀 더 적극적인 투쟁전술들을 들 수 있다. 마창노련 정방대는 봉술훈련과 화염병투척훈련도 했으며, 임금인상 타결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강제사직자 복직투쟁을 한 노조도 있었으며, 꽃병 투척 대회, 사과탄 투척 훈련 등이 있다. 심지어는 위수령이 검토되던 상황에서 사내의 전차와 탱크를 몰고 밖으로 나가자는 제안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전술은 91년에 처음 등장한 자본측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대한 대응이었다. 노조간부의 엄청난 심리적 위축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천문학적 액수의 손배소송에 대해 부산의 한진중공업 노조는 ‘소송고지 보조참가’전술로 맞섰다.(95.2.22.) 소송고지 보조참가 전술이란 손해배상청구를 당한 피고가 함께 파업에 동참했던 동료 조합원 전원 또는 일부도 소송과 관련이 있다며 이들을 상대로 법원에 소송고지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결국 몇 명의 간부만 피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 다수가 피고가 되게 하는 전술이다. 이날 심리에는 조합원 404명이 피고 보조참가인 자격으로 참가하여 출석을 부르는 데만 1시간 30분이 소요되어 재판에도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공민권 행사의 일환으로 법정에 출두하게 됨으로써 유급으로 합법적인 파업을 하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결국 소송고지 전술을 통해 노조 무력화의 전술을 오히려 노조의 조직력, 단결력 강화의 계기로 활용한 것이다.
<b>폭동을 막는 총파업?</b>
전술의 배제는 대중의 배제와 잇닿아 있다.
민주노총 시대 노동운동의 구체적인 양태는 많이 바뀌었다. 산별연맹의 중앙집권적인 조직틀은 체계적으로 정비되었고 이제 그야말로 노동운동의 거대한 몸집은 그 외형을 갖추었다. 노보 제작 도구가 타이프에서 매킨토시로 바뀐 것의 차이보다도 더 큰 어떤 변화가 있었고 그것을 혹자는 ‘발전’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실무가 세련화되고 업무량이 폭증한 것 이상으로 잃어버린 그 무엇도 있다. 활동가는 과중한 실무에 쫓기는 ‘운동공학도’에 불과하며 운동노동이라는 소외된 노동에 매몰되고 있다. 정작 노동자를 만나기 힘들다. 실무 책임자들의 점들만이 연결되어 있는 것 뿐이다.
그러나 예전, 그 시원(始原) 같은 마창노련의 투쟁의 바탕엔 수많은 조직적 바탕이 있었고 작은 소조모임이 있었다. 살아있는 풀뿌리였으며 대중은 그 가운데서 자신을 발산했다. 그러나 지금은 거대한 노동운동의 망 가운데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공고하게 구축된 권력이 있다. 그리하여 조합원은 그 권력에 의해 통제되고 동원되고 있다는 느낌, 그들의 것이었던 노동조합이 외려 그들의 의사와 행위를 굴절시키고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 아니 심지어는 ‘배신’조차 갖가지 이데올로기적 가공을 통해 ‘역사적 결단’이었다는 식으로 날조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조합원 대중이 겪게 되는 정신분열증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노동조합이 노동자를 체계적으로 배신할 때 그들의 침묵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들 스스로로 하여금 그들을 대표하게 하였던 87년 이후 전노협시대의 대표성(representation)은 이제 껍데기 뿐인 대표성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학생운동에서의 대리주의적 경향의 붕괴와 맞물려 진행되었던 이 과정은 ‘대중’을 역사의 무대 뒤로 잠적하게 만들었던 과정이었다.
98년 현대자동차와 99년 지하철-공공부문 총파업의 공통점이 있다면, 파업기간동안 조합원은 방치되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만 동원되었으며, 대중의 자발적인 투쟁의 조직은 통제되었다. 조합원은 그저 텐트에서 술과 고스톱, 낮잠으로 시간을 때웠고, 자동차 정방대와 가족대책위, 식당 아주머니들의 목소리는 분쇄되었다. 방치된 조합원들에게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철저히 보안에 부쳐졌고 결국 조합 집행부가 조합원도 모르는 사이에 퇴각 결정을 내렸다.
‘폭동을 막는 총파업’이라는 민주노총의 선전문구는 현재의 노동운동이 이 체제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광주에서의 80년 봉기때 자발적으로 총을 들었던 시민군에게 총기를 반납하고 평화적으로 협상하자는 대책위의 강압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99년 노동자들은 총파업의 날개 아래서 ‘폭동급에 준하는 전술’의 포기를 강요당했고 이렇게 전술의 배제로써 조합원의 행동은 립 서비스로 일관하는 지도부의 휘하에 포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노동운동의 역사란 지도부의 지침과 통제에 반하는 대중의 직접행동이 있었기에 이만큼의 진전이라도 있었던 것이다. 87년 789노동자대투쟁 당시 10만의 노동자가 울산시청까지 진격하는 그 감격적인 장면은 사실 가두진출을 끝까지 막으려 했던 지도부의 의사와 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마창노련 조합원 모두 감동적으로 떠올리는 89년 창원대로 대투쟁에서 1만 여명의 노동자들이 길가에 쌓아 있던 콜타르 드럼통에 불붙여 폭파시키면서 가투를 전개했다는 사실이 지금의 민주노총 관점에서 보자면 ‘폭동’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대중의 전술적 상상력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는 램프 안에 갇힌채 신음하는 거인 ‘지니’를 만나야 한다. 그 봉인을 떼어내야만 한다. ‘운동’이란 이름으로 운동을 질곡시키는 이 모순적 상황을 뛰어넘어야 한다. {내사랑 마창노련}은 그 ‘지니’가 파랗게 생생했던 시절을 엿볼 수 있는 불온한(?) 자료이며 그간 87년 이후 시도조차 되지 못했던 노동사의 한 부분을 메꾸는 자료가 된다.
<b>봉인(封印)</b>
92년 이후, 즉 이 책의 하권부터는 요상한, 망측한, 그리고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사건들이 등장한다. 한국노동당 추진위원 서명 파문, 정기대의원대회의 무산과 연기, 마창공투본 구성 실패, 투쟁회피 경향, 전노협 위원장 자유경선 과정에서의 문제, 마창노련 내 대립과 분열 등이 그것들이다.
이 책은 확실히 상권과 하권의 느낌이 다르다. 상권이 박진감 넘치고 드라마틱한 데 반해, 하권은 다소 지루하고 안타깝다. 그것은 92년 이후 노동운동이 겪었던 탄압, 분열, 혼란 등을 반영한다. 노동운동 내부의 권력을 둘러싼 투쟁들이 권력과 자본의 유려하게 다듬어진 공세와 맞물리면서 증폭되고 점차 관료세력이 형성되어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때마다 마창노련 조합원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감동적 과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역동성은 일시적으로 ‘활성단층’을 뚫고 솟구친 마그마였다.
지면 위에선 지배세력 내부의 투쟁을 닮아 있는 정쟁(政爭)이 벌어지고 있었고 대중은 지면 아래로 침잠하였다. 그 지면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순간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파의 구도로 재단되고 그 게임의 룰대로 행동할 것이 강요된 듯하다. 대중은 냉소했다.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무력했고 스스로 함구하는 것을 생존전략으로 택한 듯했다. 그래서 위에서 벌어진 일은 위에서 해결(?)됐다. 그건 정치력과 쪽수, 다시 말해 권력자원의 수량적 비교가 결정적인 게임의 룰이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대중의 의지는 여전히 노동운동의 근원적인 저변을 형성하긴 하지만 역동적 분출은 산별연맹, 민주노총의 대의원대회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체제 하에서 알량한 숫자의 대의원들에 의해서만 ‘간혹’분출될 뿐이다. 이 강고한 봉인은 도저히 깰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98년 현대자동차 노조가 식당 아주머니들을 내보내는 선에서 사측과 합의하자 벌어진 집회에서 분노한 한 조합원이 ‘내가 바로 노동조합의 주인인 조합원’이라며 발언을 요청하고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김광식 위원장은 ‘대소위원 밟아서 의견을 올려라!’하며 일축했고 그 즉시 조합원은 ‘올라가야 말이지!’라고 내뱉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김광식 위원장은 할 말을 잃었다.
김광식 위원장을 욕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단사, 지역연맹, 지역 민주노총, 산별연맹, 민주노총으로 올라가는 그 대의제의 위계화된 피라미드 구조하에 갇혀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며, 삼각뿔의 그 안정된 구도만큼이나 육중한 무게감에 짓눌려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 무게감은 때로 자기검열로 나타난다.
대기업 구조조정의 관문이었던 98 현대자동차 투쟁의 패배가,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관건이었던 99 지하철-공공부문 총파업의 패배가 ‘승리적 관점’에서 윤색될 때 그에 어긋나는 모든 얘기는 특정 정파로부터 오염된 언사, 대세의 흐름을 거스르고 조직적 명예를 실추시키는 망언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응집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 하고 따라서 일차사료로 활용되는 문서, 기록물들에서조차 철저히 봉쇄된다.
대의제만은 아니다. 99년 45월 총파업은 투쟁일정대로 움직여졌을 뿐이며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는 달력 속 일정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노동조합과 산별연맹이 조합원의 투쟁의지를 반쯤 받아 안고 반쯤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들게 하며, 정해진 수순대로 타협을 밟아나갔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한다. 5월에 만연했던 여러 가지 공모론들, 즉 공권력 투입을 지하철노조 측에서 요청했다는 둥, 누가 국민회의나 청와대랑 골프회동을 가졌다는 둥, 청와대에서 합의를 다 봤었다는 등의 얘기들이 항간에 회자되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정황이 깊게 작용했다. 물론 이런 공모론은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공모론이 물증은 없고 정황적 추측만 있고 사실 여부야 당사자들만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파업정국에서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던 얘기들 전부를 왜곡보도라고 보지 않는 이 공모론 확산의 배경 속의 조합원들이 가지는 불신과 냉소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도 그들 목소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며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일 것이기 때문이다.
<b>베일에 싸인 계급</b>
무엇보다 {내사랑 마창노련}은 소설보다 재밌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안타깝기도 하다. 만약 꼭 마창노련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거나 직접 몸담아 봤거나 그 언저리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고통과 연민, 안타까움과 쾌감의 정도가 클 것이다. 하물며 마창노련 조합원들이라면 어떻겠는가. 마창지역 조합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갖는 감동과 애정은 대단하다.
자기 조합이 나온 부분과 아는 사람 이름, 자신이 참여했던 집회와 가투를 제일 먼저 찾아본다고 한다. 3-40대가 된 그들이 20대였던 지난 시절 자신들의 열정을 되돌아 본다는 것은 지금의 현실과 그 시절을 강하게 대비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연구자들에게도 이 책은 가치있을 수 있다. 13권짜리 {전노협 백서}가 주로 중앙의 회의, 결정, 정책 입안 등을 담고 있다면 {내사랑 마창노련}은 실제 그것이 지역과 현장에서 어떻게 집행되고 투쟁이 벌어졌는가 하는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책을 읽으면서 안또니오 네그리, 알렉스 가따리, E.P. 톰슨을 떠올리는 건 꼭 엉뚱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계급대중의 살아있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목격되는 경험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투성, 단호함, 단순성, 비타협성의 결정체인 노동자는 너무나 일면적이지 않는가.
계급, 우리는 아직 그 베일에 싸인 신비로운 모습을 잘 모른다.<font color="#0099cc"><각주2: 1기 민주노총 지도부를 내려보냈던 민주노총 대대회(98.2.9.)라든가, 99년 공공부문 투쟁에 대한 대중적 평가를 반영하는 이번 공공연맹 대의원대회(99.7.1.) 같은 것들이 바로 그 잠시 활동을 재개한 휴화산들이다.></font>
전노협 정신을 계승하자. 근래 유행하는 말이다. 95년 민주노총이 출범하면서 ‘죽은개’취급받던 ‘시대착오’(?)적인 노동운동의 대명사인 전노협이 ‘21세기 산별의 시대’(?)를 앞두고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 물론 전노협이 외교적 언사 속에서까지 죽은 개 취급 받았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95년 민주노총 출범 훨씬 이전부터 전노협은 어떤 ‘특정한 노동운동의 한 조류’로 취급되었고 경향성의 하나로 취급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경향성은 ‘전투적 조합주의’라고 불리워졌고, 그러한 노선에 대한 강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92년 박승옥 씨가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제기했던 ‘사회발전적 노동운동론’은 그 일례이다.
비판론자들은 이후 이어진 노동운동 위기논쟁에서 당시 노동운동을 위기로 규정했고, 그 위기의 원인을 시대착오적인 전노협 노선으로 지목했다. 이미 그 시절부터 전노협은‘복날을 앞둔 개’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노협 정신이라니? 죽은 개가 살아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물론 아니다. 산별노조와 진보정당만이 위(?)로부터 공식적(!)으로 뇌까려지는 노선이다. 그나마도 90년 전노협 건설 때처럼 대중적 토론 속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노협 정신’은 지난 2월 금속연맹 선거 때 세 후보자가 선거용 멘트로 쓰면서 회자되었다. 공익 광고 정도다. 따라서 ‘전노협 정신’운운하는 것은 모두 ‘열심히 하겠다’는 정도로 취급되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전노협 정신이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 시절의 광폭한 팟쇼적 탄압과 야만의 폭력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중은 왜 그 시절에 대한 강한 향수를 가지는가? 단순한 복고 열풍인가? 아니면 뭔가 특별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지금은 부재한 그 어떤 에너지가 간직된 시공간의 다른 이름이 혹 ‘전노협’이란 말로 응축되어 봉인된 것이 아닐까?
전노협 시대의 핵심엔 마창노련이 있었다. 한때 노동운동의 메카라고 불리워졌던 ‘그곳’에서 ‘그때’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갈무리에서 출간된 {내사랑 마창노련}에는 ‘전노협 정신’의 그 무엇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걸 캐내는 건 독자의 독해력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본격적인 연구서가 아닌 ‘역사와 기록문학’의 절충형태(필자 김하경 씨와의 인터뷰, 마산 MBC 99.7.2)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행간에서 우리가 간취할 것이 더 많을런지도 모른다. ‘고착된 정사(正史)’의 심연 속에서 상상력을 끌어내는 재해석의 고단함이란 얼마나 힘겨운가? 우리는 89년 창원대로 대투쟁에서 콜타르 드럼통에 불을 붙였던 1만 여명의 청년 노동자를 가능한 한 가까이에서 만나야 하지 않는가? 그들에게 직접 마이크를 들이대고 생생한 증언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박스 100여 개가 넘는 분량의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노보와 회의록, 잡지와 기관지, 보고서와 문서들, 인터뷰와 신문이 그 원천이다. <font color="#0099cc"><각주1: 일차사료를 3년 반 동안 거의 혼자서 정리한 필자의 노고는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1차사료 수집에 게으르고 남이 써놓은 글을 대충 인용하거나 이론틀을 빌어오는 한국의 풍토에서 아마도 그런 ‘하찮은 일‘(?)에 3년을 꼬박 바칠 ‘고급두뇌‘는 없었나 보다. 수십 년 동안 연구에 매진하는 서구 노동사가(勞動史家)의 자세가 젊은 연구자들에게 있었다면 아마도 한국의 노동사는 지금쯤 모종의 결실을 맺었을런지 모른다. ‘현실에 뿌리 박은 학문‘은 선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노협의 트럭 한 대 분의 엄청난 자료가 몰지각한 민주노총 실무자들에 의해서 폐지수집상에게 넘겨졌다는 사실에만 분개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료가 있다한들 남이 분류, 정리해주길 기다리는 연구자들의 자세 역시 징치되어야만 한다.></font>
전국적 정세와 울산, 부산, 거제 등 인근의 투쟁을 놓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합원의 역동성과 기발한 전술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그러한 조합원들의 ‘직설화법’들이다.
지하로 잠적한 그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산별노조의 껍데기 그림표와 진보정당의 자기도취적인 플랜은 노동자계급을 기만하고 통제하며 굴절시키는 장치에 불과할 것이다.
<b>전술의 판례집!</b>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노동자 대중의 지혜와 행동이 응집된 전술과 투쟁들이다.
88년 7월 7일 마산의 한국소와 구사대와 마창노련 노동자들이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마창노련 노동자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구사대의 테러는 계속되었고 한국TC에서도 구타, 폭행과“자궁을 수박처럼 쪼개버려”와 같은 폭언이 난무했다. 마창노련 차원에서 정방대가 조직되고 ‘구사대의 씨를 말릴 때까지’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구사대와의 투쟁 과정에서 마창노련 의장이 구속되자 구사대만행규탄투쟁은 구속자석방투쟁으로 전환되었고 7월 15일부터 7월 27일까지 매일 1천∼3천 명이 가두투쟁에 돌입했다. 그 결과 구속된 마창노련 의장이 석방되었다.
이러한 연대의 정신은 89년 세신실업 투쟁으로 이어진다.
새벽 5시 세신실업 200명의 구사대가 농성중인 조합원들을 테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침에 출근하던 마창노련 노동자 700명이 달려와 구사대를 진압(?)했다. 마창노련 노동자들은 정방대에 의해 체포된(?) 구사대와 경찰에 연행된 노조간부 10명의 교환에도 성공했다.
이러한 마창노련의 투쟁들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것은 다채로운 전술들이다.
첫째 파업 프로그램으로는 돼지잡기, 체육대회, 공동체놀이, 장기자랑, 노가바 경연대회, 악덕경영자 고사지내기, 장례식, 화형식, 횃불집회, 일일찻집, 가족의 밤, 비디오 상영, 촌극, 웅변대회, 1분 발언, 풍물강습, 편지쓰기, 공동 판화제작와 같은 다양한 방식이 채택되었다.
둘째 준법투쟁으로는 깃달기, 작업복 뒤집어 입기, 각종 증명서 발급받기, 공단 내 타 마창노련 사업장과 점심식사 같이 하기, 매시간 정각마다 일손 놓고 노래부르고 구호외치기, 구두 신고 사복입고 작업하기, 1인 1벽보 붙이기, 배식구 하나만 이용하여 점심먹기, 한 화장실만 이용하기, 한 공중전화 이용하여 부모님께 전화하기, 신협통장 찾기, 단체로 소화제 타먹기, 전원 조퇴하여 야유회 갖기, 조합원에게 망언을 한 회사간부 또는 사장실 앞에 식사를 마친 식판 갖다놓기, 짬밥 본관 앞 투척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셋째 좀 더 적극적인 투쟁전술들을 들 수 있다. 마창노련 정방대는 봉술훈련과 화염병투척훈련도 했으며, 임금인상 타결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강제사직자 복직투쟁을 한 노조도 있었으며, 꽃병 투척 대회, 사과탄 투척 훈련 등이 있다. 심지어는 위수령이 검토되던 상황에서 사내의 전차와 탱크를 몰고 밖으로 나가자는 제안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전술은 91년에 처음 등장한 자본측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대한 대응이었다. 노조간부의 엄청난 심리적 위축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천문학적 액수의 손배소송에 대해 부산의 한진중공업 노조는 ‘소송고지 보조참가’전술로 맞섰다.(95.2.22.) 소송고지 보조참가 전술이란 손해배상청구를 당한 피고가 함께 파업에 동참했던 동료 조합원 전원 또는 일부도 소송과 관련이 있다며 이들을 상대로 법원에 소송고지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결국 몇 명의 간부만 피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 다수가 피고가 되게 하는 전술이다. 이날 심리에는 조합원 404명이 피고 보조참가인 자격으로 참가하여 출석을 부르는 데만 1시간 30분이 소요되어 재판에도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공민권 행사의 일환으로 법정에 출두하게 됨으로써 유급으로 합법적인 파업을 하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결국 소송고지 전술을 통해 노조 무력화의 전술을 오히려 노조의 조직력, 단결력 강화의 계기로 활용한 것이다.
<b>폭동을 막는 총파업?</b>
전술의 배제는 대중의 배제와 잇닿아 있다.
민주노총 시대 노동운동의 구체적인 양태는 많이 바뀌었다. 산별연맹의 중앙집권적인 조직틀은 체계적으로 정비되었고 이제 그야말로 노동운동의 거대한 몸집은 그 외형을 갖추었다. 노보 제작 도구가 타이프에서 매킨토시로 바뀐 것의 차이보다도 더 큰 어떤 변화가 있었고 그것을 혹자는 ‘발전’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실무가 세련화되고 업무량이 폭증한 것 이상으로 잃어버린 그 무엇도 있다. 활동가는 과중한 실무에 쫓기는 ‘운동공학도’에 불과하며 운동노동이라는 소외된 노동에 매몰되고 있다. 정작 노동자를 만나기 힘들다. 실무 책임자들의 점들만이 연결되어 있는 것 뿐이다.
그러나 예전, 그 시원(始原) 같은 마창노련의 투쟁의 바탕엔 수많은 조직적 바탕이 있었고 작은 소조모임이 있었다. 살아있는 풀뿌리였으며 대중은 그 가운데서 자신을 발산했다. 그러나 지금은 거대한 노동운동의 망 가운데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공고하게 구축된 권력이 있다. 그리하여 조합원은 그 권력에 의해 통제되고 동원되고 있다는 느낌, 그들의 것이었던 노동조합이 외려 그들의 의사와 행위를 굴절시키고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 아니 심지어는 ‘배신’조차 갖가지 이데올로기적 가공을 통해 ‘역사적 결단’이었다는 식으로 날조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조합원 대중이 겪게 되는 정신분열증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노동조합이 노동자를 체계적으로 배신할 때 그들의 침묵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들 스스로로 하여금 그들을 대표하게 하였던 87년 이후 전노협시대의 대표성(representation)은 이제 껍데기 뿐인 대표성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학생운동에서의 대리주의적 경향의 붕괴와 맞물려 진행되었던 이 과정은 ‘대중’을 역사의 무대 뒤로 잠적하게 만들었던 과정이었다.
98년 현대자동차와 99년 지하철-공공부문 총파업의 공통점이 있다면, 파업기간동안 조합원은 방치되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만 동원되었으며, 대중의 자발적인 투쟁의 조직은 통제되었다. 조합원은 그저 텐트에서 술과 고스톱, 낮잠으로 시간을 때웠고, 자동차 정방대와 가족대책위, 식당 아주머니들의 목소리는 분쇄되었다. 방치된 조합원들에게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철저히 보안에 부쳐졌고 결국 조합 집행부가 조합원도 모르는 사이에 퇴각 결정을 내렸다.
‘폭동을 막는 총파업’이라는 민주노총의 선전문구는 현재의 노동운동이 이 체제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광주에서의 80년 봉기때 자발적으로 총을 들었던 시민군에게 총기를 반납하고 평화적으로 협상하자는 대책위의 강압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99년 노동자들은 총파업의 날개 아래서 ‘폭동급에 준하는 전술’의 포기를 강요당했고 이렇게 전술의 배제로써 조합원의 행동은 립 서비스로 일관하는 지도부의 휘하에 포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노동운동의 역사란 지도부의 지침과 통제에 반하는 대중의 직접행동이 있었기에 이만큼의 진전이라도 있었던 것이다. 87년 789노동자대투쟁 당시 10만의 노동자가 울산시청까지 진격하는 그 감격적인 장면은 사실 가두진출을 끝까지 막으려 했던 지도부의 의사와 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마창노련 조합원 모두 감동적으로 떠올리는 89년 창원대로 대투쟁에서 1만 여명의 노동자들이 길가에 쌓아 있던 콜타르 드럼통에 불붙여 폭파시키면서 가투를 전개했다는 사실이 지금의 민주노총 관점에서 보자면 ‘폭동’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대중의 전술적 상상력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는 램프 안에 갇힌채 신음하는 거인 ‘지니’를 만나야 한다. 그 봉인을 떼어내야만 한다. ‘운동’이란 이름으로 운동을 질곡시키는 이 모순적 상황을 뛰어넘어야 한다. {내사랑 마창노련}은 그 ‘지니’가 파랗게 생생했던 시절을 엿볼 수 있는 불온한(?) 자료이며 그간 87년 이후 시도조차 되지 못했던 노동사의 한 부분을 메꾸는 자료가 된다.
<b>봉인(封印)</b>
92년 이후, 즉 이 책의 하권부터는 요상한, 망측한, 그리고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사건들이 등장한다. 한국노동당 추진위원 서명 파문, 정기대의원대회의 무산과 연기, 마창공투본 구성 실패, 투쟁회피 경향, 전노협 위원장 자유경선 과정에서의 문제, 마창노련 내 대립과 분열 등이 그것들이다.
이 책은 확실히 상권과 하권의 느낌이 다르다. 상권이 박진감 넘치고 드라마틱한 데 반해, 하권은 다소 지루하고 안타깝다. 그것은 92년 이후 노동운동이 겪었던 탄압, 분열, 혼란 등을 반영한다. 노동운동 내부의 권력을 둘러싼 투쟁들이 권력과 자본의 유려하게 다듬어진 공세와 맞물리면서 증폭되고 점차 관료세력이 형성되어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때마다 마창노련 조합원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감동적 과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역동성은 일시적으로 ‘활성단층’을 뚫고 솟구친 마그마였다.
지면 위에선 지배세력 내부의 투쟁을 닮아 있는 정쟁(政爭)이 벌어지고 있었고 대중은 지면 아래로 침잠하였다. 그 지면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순간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파의 구도로 재단되고 그 게임의 룰대로 행동할 것이 강요된 듯하다. 대중은 냉소했다.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무력했고 스스로 함구하는 것을 생존전략으로 택한 듯했다. 그래서 위에서 벌어진 일은 위에서 해결(?)됐다. 그건 정치력과 쪽수, 다시 말해 권력자원의 수량적 비교가 결정적인 게임의 룰이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대중의 의지는 여전히 노동운동의 근원적인 저변을 형성하긴 하지만 역동적 분출은 산별연맹, 민주노총의 대의원대회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체제 하에서 알량한 숫자의 대의원들에 의해서만 ‘간혹’분출될 뿐이다. 이 강고한 봉인은 도저히 깰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98년 현대자동차 노조가 식당 아주머니들을 내보내는 선에서 사측과 합의하자 벌어진 집회에서 분노한 한 조합원이 ‘내가 바로 노동조합의 주인인 조합원’이라며 발언을 요청하고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김광식 위원장은 ‘대소위원 밟아서 의견을 올려라!’하며 일축했고 그 즉시 조합원은 ‘올라가야 말이지!’라고 내뱉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김광식 위원장은 할 말을 잃었다.
김광식 위원장을 욕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단사, 지역연맹, 지역 민주노총, 산별연맹, 민주노총으로 올라가는 그 대의제의 위계화된 피라미드 구조하에 갇혀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며, 삼각뿔의 그 안정된 구도만큼이나 육중한 무게감에 짓눌려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 무게감은 때로 자기검열로 나타난다.
대기업 구조조정의 관문이었던 98 현대자동차 투쟁의 패배가,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관건이었던 99 지하철-공공부문 총파업의 패배가 ‘승리적 관점’에서 윤색될 때 그에 어긋나는 모든 얘기는 특정 정파로부터 오염된 언사, 대세의 흐름을 거스르고 조직적 명예를 실추시키는 망언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응집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 하고 따라서 일차사료로 활용되는 문서, 기록물들에서조차 철저히 봉쇄된다.
대의제만은 아니다. 99년 45월 총파업은 투쟁일정대로 움직여졌을 뿐이며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는 달력 속 일정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노동조합과 산별연맹이 조합원의 투쟁의지를 반쯤 받아 안고 반쯤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들게 하며, 정해진 수순대로 타협을 밟아나갔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한다. 5월에 만연했던 여러 가지 공모론들, 즉 공권력 투입을 지하철노조 측에서 요청했다는 둥, 누가 국민회의나 청와대랑 골프회동을 가졌다는 둥, 청와대에서 합의를 다 봤었다는 등의 얘기들이 항간에 회자되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정황이 깊게 작용했다. 물론 이런 공모론은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공모론이 물증은 없고 정황적 추측만 있고 사실 여부야 당사자들만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파업정국에서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던 얘기들 전부를 왜곡보도라고 보지 않는 이 공모론 확산의 배경 속의 조합원들이 가지는 불신과 냉소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도 그들 목소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며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일 것이기 때문이다.
<b>베일에 싸인 계급</b>
무엇보다 {내사랑 마창노련}은 소설보다 재밌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안타깝기도 하다. 만약 꼭 마창노련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거나 직접 몸담아 봤거나 그 언저리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고통과 연민, 안타까움과 쾌감의 정도가 클 것이다. 하물며 마창노련 조합원들이라면 어떻겠는가. 마창지역 조합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갖는 감동과 애정은 대단하다.
자기 조합이 나온 부분과 아는 사람 이름, 자신이 참여했던 집회와 가투를 제일 먼저 찾아본다고 한다. 3-40대가 된 그들이 20대였던 지난 시절 자신들의 열정을 되돌아 본다는 것은 지금의 현실과 그 시절을 강하게 대비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연구자들에게도 이 책은 가치있을 수 있다. 13권짜리 {전노협 백서}가 주로 중앙의 회의, 결정, 정책 입안 등을 담고 있다면 {내사랑 마창노련}은 실제 그것이 지역과 현장에서 어떻게 집행되고 투쟁이 벌어졌는가 하는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책을 읽으면서 안또니오 네그리, 알렉스 가따리, E.P. 톰슨을 떠올리는 건 꼭 엉뚱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계급대중의 살아있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목격되는 경험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투성, 단호함, 단순성, 비타협성의 결정체인 노동자는 너무나 일면적이지 않는가.
계급, 우리는 아직 그 베일에 싸인 신비로운 모습을 잘 모른다.<font color="#0099cc"><각주2: 1기 민주노총 지도부를 내려보냈던 민주노총 대대회(98.2.9.)라든가, 99년 공공부문 투쟁에 대한 대중적 평가를 반영하는 이번 공공연맹 대의원대회(99.7.1.) 같은 것들이 바로 그 잠시 활동을 재개한 휴화산들이다.></fo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