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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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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

최원 | 사회진보연대 회원, 미국 뉴스쿨 대학 철학박사과정
주지하다시피 87년 투쟁은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상징을 통해 대중의 무의식을 움직일 수 있었고 일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형식적이거나 혹은 심지어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더 이상 대중의 무의식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포스트-민주주의적인 상황'이라는 것이 (시간의 편차는 있다고 할지라도) 반주변을 통해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제임스 페트라스의 말처럼, 각국에 민선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통치의 메커니즘은 일관된 폭력의 적용을 통한 정권수립 및 유지로부터 선거를 통한 정권수립 이후의 폭력의 적용이라는 방식으로 변모해왔으며, 이것이 대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적어도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확보했다는 환상을 품도록 만들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술책이 대중들을 속이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타협/왜곡되어 제도화되었던 것은 역사를 통해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니며, 대중들은 항상 다시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의 보편성을 전도시킴으로써 평등-자유를 위한 새로운 투쟁에 나섰던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이후에는 항상 또 다른 민주주의의 '상징'이 가능했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대중들은 다시 투쟁에 나서지 않는가? 신자유주의 하에서 대중들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오히려 정치로부터 점점 등을 돌리며, 자신에게 강제되는 경제적, 비경제적 곤란들을 스스로의 정치적 투쟁의 조직화를 통해서 돌파해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비가역적으로 포스트-정치적인 시대에 진입한 것처럼 보이며 더 이상의 정치(어쨌든 '대중정치')를 꿈꾸는 것은 오지도 않을 '고도를 기다리며' 아귀가 맞지 않는 말이나 서로 주고받는 실존주의적인 부조리극을 연기하는 일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진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우경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실리주의"가 문제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진단은 사실 동어반복적이다. 왜냐하면 실리주의가 곧 우경화며 그것은 결과일 뿐 원인에 대한 진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간다면, 우리는 이제 단순히 대중들의 '의지 없음'을 개탄하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질문은 더욱 더 당혹스러운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분명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조건들은 끊임없이 악화되고 있으며 노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정하다. 즉 문제의 실리주의란 주어진 "떡고물"이 다소간 풍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실리주의가 아니라, 도망칠 곳 없는 막다른 골목(그 너머에는 실업이나 계약직 등이 기다리고 있다)에 내몰릴 때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떡고물"은 여기서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경쟁하는)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상대적인 "떡고물"로서만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적인 노동분할정책(유연화!)의 발톱이 할퀴고 간 자리마다 굴러 떨어지면 다시 기어오르지 못할 깊은 골짜기가 패인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벼랑 끝에 매달린다. "노동귀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역을 간신히 관리하는 노동자들과 그 틈에 끼지 못해 이리 저리 철새처럼 이동하는 반(半)노동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실리주의가 불가능해져야 하는 곳에서 오히려 실리주의가 자라 나오고 있다. 실리주의가 문제라고? 진정 그러한가?
다른 한 편, 점점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및 주변화된 노동, 성노동, 가사노동 사이를 전전해야 하는 여성들, 또 삼엄한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최소한의 노동권마저 모두 포기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죽음과 같은 노동을 하루하루 견뎌 가는 이주 노동자들은 어떠한가? (산발적인 투쟁이 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들 또한 싸움의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왜 민주주의라는 상징은 그들을 집단적으로 호출하지 못하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들의 전형적인 대답은 전국적인 전선 조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다시 우리가 좀처럼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할 논리적인 순환이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선체를 조직하기 위해 우리가 참조하는 것은 '대중정치'인데, 대다수의 대중들은 싸움에 나서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즉, 대중정치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선 전선체가 필요하고 전선체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선 대중정치가 필요하다. 끝없는 순환, 끝없는 반복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를 '포스트-민주주의적인 상황'으로 묘사한다면, 적어도 그것은 근원적인 방식으로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현재의 곤란들은 단순히 세련된 통치술의 등장 때문만이 아니며 어떤 전국적인 규모의 전선조직의 부재 때문만도 아니다. (그 두 가지 이유들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면서도) 나는 여기서 이러한 상황의 진정한 원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황의 현상학적 묘사의 관점 자체를 국내적인 차원으로부터 국제적인(진정 세계적인) 차원으로 전위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우리는 현재 보여지는 신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 계급의 대응, 그들의 계급투쟁이 완전히 새로운 문턱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신자유주의를 단지 자본축적의 위기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대응이라고 보는 것만으로는 여전히 불충분할 것 같다. 반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 계급 스스로가 어떻게 자신이 만들어낸 착취 전략들에 의해 거꾸로 규정되며 심지어 '해체'되기 시작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이제까지 (적어도 최근까지) 모든 부르주아지는 민족-국가에 결합된 '국가부르주아지'였다. "국가장치들"이야말로 노동과정의 모든 곳에 침투하여 그들의 "지배"를 보장해온 물질성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알튀세르가 말하듯) 규범과 기술적 숙련을 위한 훈육을 위해서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삶 그 자체를 '살만한 것'으로 상상하도록 항상 조작하는 이러한 "국가장치들"의 개입 없이는 노동력이 아예 상품으로 등장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국가는 (적어도 19세기 말 이래) 핵심적으로 민족-국가였고, 따라서 민족-국가는 자본의 외부가 아니라 그것의 절대적인 내부였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그랬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신자유주의가 핵심적으로 해체해 나가고 있는 것이 또한 이것이다. 결국 변하는 것은 단순히 착취를 조직했던 과거의 이러저러한 형태들이 아니라, 정확히 그러한 착취가 조직되는 단위로서 민족-국가 그 자체다. 그렇다면 역으로 민족-국가의 해체(상대화)의 분명한 결과가 국가부르주아지, 즉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 그 자체의 해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왜냐하면 세계 부르주아지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 부르주아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권력의 중심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알튀세르는 최후에 쓴 어떤 글에서 그 중심이 "전세계 투기꾼들의 지갑 속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가장 중요한" 나라도 "가장 제국주의적"인 나라도 그 중심이 아니다.
여기 퍼즐의 한 조각이 있다. 세계 권력의 중심이 부재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저항 자체가 모호해진다. 비록 민족-국가가 여전히 이러저러한 정세 하에서 투쟁의 집중적인 과녁으로 나타날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더 이상 반-체제 운동의 성공을 위한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될 수 없다(주지하다시피 브라질 페테당의 변질은 핵심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반제의 측면에서 접근한다고 그 중심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G7 정상회담이나 세계은행 회의장 앞에서의 시위들이 있지만, 이는 점점 성과도 요점도 없는 싸움들로 변하고 실질적인 압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결국 세계 부르주아지가 없다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도 없다는 것만이 지속적으로 확인된다.
더 나아가서 민족-국가의 해체가 민주주의의 요구 그 자체를 곤란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사회주의적인 대안이 파산한 것과 더불어 사민주의적인 모델이 위기에 빠지고 미국적 자유주의(계급타협적 케인즈주의)는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에서 입증된다. 혹자는 신자유주의를 자유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라고 간주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관념은 신자유주의가 애초에 미국적 자유주의의 불가능성의 확인으로 등장했다는 점만 기억해도 그 기만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신자유주의는 또 다른 정치의 모델이 아니라 정확히 '반(反)정치'의 모델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계화된 세계'의 현실적 출현 속에서 좌우를 막론한 정치의 모델들이 '공멸'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치적 모델들이 공히 전제하고 있던 것이 바로 민족-국가라는 단위였기 때문이다. 진정 맑스주의의 위기, 사민주의적 복지국가의 위기, 미국적 자유주의의 위기, 이 삼자 모두가 신자유주의의 출현이 가시화된 70년대에 동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우리를 섬뜩하게 만드는 바가 있지 않은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사실 이야기는 거꾸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계급적대 자체가 자신의 일정한 형태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민족-국가의 경계 내에서였고, 그 만큼의 정치적 모델들로 드러났던 중심(동서를 막론하고)의 민주주의들이란 그러한 계급투쟁이 다소간 해결된 것의 결과(물론 모순은 결정적으로 "위성국들"이나 "제 3세계" 쪽을 향해 전위되었다)였을 뿐이다. 그런데 민족적 경계들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계급적대 그 자체가 가시권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자본은 한 지역 내에서 계급적 양보를 강제 당하기보다는 계급투쟁 그 자체를 포기하고 다른 지역의 노동력을 향해 '탈주'한다. 노동력 재생산 과정의 '생략'이 발생하고, "노동의 자본에 의한 실질적인 포섭"은 오직 제한된 일부 노동자들(소위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만 유효하도록 "구조조정"되며, 그로부터 밀려난 인구들에 대해서는 역으로 '노동의 자본에 의한 실질적인 파괴'가 조직된다. 극단적인 노동분할, 극단적인 유연화 속에서 더 이상 '착취'는 사치스러운 말이다. 반대로 여기서 문제는 착취 그 자체로부터의 '배제'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배제를 "적대의 유령"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민주주의 혹은 평등-자유 테제가 변함없는 진리로 재등장할 수 있는 것이 언제나 지배이데올로기의 '전도' 효과를 통해서였다면, 지금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더 이상 대중을 호출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세계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란 더 이상 어떤 보편성에 입각한 헤게모니의 확보를 목표로 한다기보다는, 차라리 민주주의의 포기를 선언(따라서 유사-카스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잉여권리"를 누리면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부유한 국가의 부유한 사람들, 착취 가능한 인구로 분류되어 간신히 자신의 재생산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착취 불가능한 인구로 분류되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마침내 쓰레기통에 내버려지는 "일회용 인간들"의 카스트들 말이다)하고 각국의 대중들에게 '세계화에 편입되거나 죽거나'의 길만을 열어놓은 채 양자택일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과거 냉전 당시에는 도망칠 다른 진영이라도 있었다면, 이제는 빠져나갈 어떤 구멍도 남아있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진정 헤겔적이라기 보다는 푸코적인 의미에서의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된다! 만일 극단적인 폭력의 한계상황이 바로 정치(혹은 정치의 주체)가 사라지는 상황이기도 하다면, 현재 우리가 포스트-민주주의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는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한가? 아마도 이러한 극단적인 폭력에 맞서는 길을 우리가 찾지 못한다면 당분간은 그럴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반성을 통과하면서 단지 우울함만을 느낀다면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해야할 것 같다. 첫 째, 우리가 당면한 싸움의 성격은 단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는 문제'를 훨씬 초과한다. 둘 째, 시민권의 근본적 개조를 통해 한 편으로 자본의 미친 탈주들을 막고, 다른 한 편으로 이동/이주하는 노동인구들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각국의 시민권 자체에 동시에 각인시켜야 한다. 세 째, 각종의 배제들을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비정규직의 철폐, 여성노동의 주변화 철폐, 각종 소수자들의 시민권으로부터의 배제의 철폐를 반드시 관철시켜야 한다. 시민들의 존엄을 국가에 재인식시켜야 하며 그것을 통해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가 가능해지는 정치의 공간을 다시 한 번 열어 젖혀야 한다. 네 째,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우리는 '반(反)폭력'의 국제주의적인 연대를 실질적으로 구성해내야 한다. 국제주의적 연대 없는 고립된 투쟁들은 항상 다시 '세계화에 편입되거나 죽거나'의 양자택일에 몰리게 될 것이고, 따라서 민족주의는 그 어떤 형태로도 우리에게 불가능한 전략이며 그 자체로 반동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현재적인 '계급투쟁' 혹은 '계급 없는 투쟁'(발리바르)의 유일하게 효과적인 형태는 폭력과 배제에 반대하는 국제주의적인 다중(多衆)의 연대를 형성하는 투쟁일 수 있을 뿐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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