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의 폭풍속에서 당선된 브라질 노동자당 - 과연 폭풍을 헤치고 나갈 수 있을까?
지난 27일, 남미 최대 국가 브라질에서 최초로 선거를 통한 좌파정당이 집권하면서 "노동자 대통령"이 탄생했다. "룰라"라 불리는 노동자당(PT)의 루이스 이냐시오 다 실바가 8천3백 만 표 중 61.5%를 얻어 집권당 사회민주당(PSDB)의 조제 세하 후보를 누르고 기록적인 압승을 거둔 것이다. 룰라는 지난 6일에 실시된 1차 투표에서 3천9백만 표(46%), 세하는 1천9백만 표(23%), 사회당(PSB) 소속 리우데자네이루 주지사 안토니 가로티뉴는 17%, 그리고 민중사회당(PPS)의 시루 고메스는 12%를 얻어 결선투표는 룰라와 세하 간 경쟁이었다.
1차 투표 결과가 나오자 좌파의 당선을 우려하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압박으로 주가폭락과 채권가격 하락 그리고 환율급등 등 룰라에게 여러 가지 악재가 작용했었다. 그러나, 룰라가 긴축 재정, 인플레이션 억제, 외채 상환 등을 다시 천명하는 한편, 고메스와 가로티뉴, 그리고 브라질 산업자본가들을 비롯해 정·재·학계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얻어내면서 결선투표에서 무난하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번 선거는 지난 8년 동안 집권했던 페르난도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패배와 이에 따른 우파의 분열, 신자유주의에 대한 브라질 민중들의 환멸 그리고 초국적 금융자본을 달래면서 분열된 우파를 포섭한 룰라의 전략이 성공한 결과라 평가할 수 있다.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정책, 외채의 악순환과 브라질 경제의 파탄
1994년부터 2002년까지 브라질 대통령직을 역임한 "맑스주의" 사회학자 카르도수는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93년 중반에 재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브라질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1994년 초, 브래디플랜(Brady Plan)을 통해 브라질은 IMF와 국제채권단으로부터 국가예산을 외채 상환으로 유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외채 상환 연기를 협상해냈다. 카르도수는 이런 새로운 예산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고, 사회비상기금(Social Emergency Fund)을 조성했다. 물론 이 사회비상기금은 정부의 예산삭감액으로 충당되는 것으로, 이는 곧 사회보장정책의 대대적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브라질의 예산과 정부 조직이 국제채권단의 이해를 대변하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게 되었으며,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었다는 면에서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미셸 초스도프스키, [빈곤의 세계화], 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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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장관으로서의 "성과"에 힘입어 카르도수는 1994년 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 때부터 IMF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브라질 경제을 대대적으로 수술하기 시작했다. 그는 "헤알 계획(Plano Real)"이라는 일련의 정책을 도입하는 데, 이는 헤알이라는 새로운 화폐단위를 도입하고 달러에 고정시켜 5,000%나 되던 인플레를 안정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초기 얼마 동안은 인플레 억제에 성공해 인플레를 두 자리 숫자로 안정시켰다. 그러나 국제채권자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가운데 수입 촉진과 자본시장 자유화를 통해 초국적 자본을 적극 유치하면서 이미 해외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취약해질 대로 취약해진 브라질 경제는 더더욱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초국적 자본이 대량 유입되어 화폐가 오히려 평가절상되었고, 이는 결국 무역 및 자본수지 적자로 이어졌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 더 많이 빌렸고 자본 도피를 막기 위해 이자율을 대폭 높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오히려 외채 부담만 증가시켜 경제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 뿐, 경제위기의 악순환은 지속됐다.
1998년에 IMF가 다시 한 번 개입해 총체적 위기를 유보시키면서 초국적 자본을 안전지대로 유도했고, 이 속에서 카르도수가 대통령으로 재당선되어 국제채권국 및 금융기구들과의 호의적 관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카드도수는 경제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통신과 전력 등 주요 공기업을 사유화했고 외채 상환을 위해 공공서비스를 더욱 감축했다. 그러나 외채 부담은 줄어들지 않아 카르도수 정권 하에서 공공채무가 GDP의 30%에서 60%로 증가하였고, 외채는 사상 최대 규모인 2,600억 달러에 달했다. 2000년도 수출 대 외채 비율은 442.2%에 달아 심지어 세계은행이 HIPC(*편집자 주: 외채과다 빈곤국, Heavily Indepted Poor Country)가 유지 가능한 수준으로 지정한 150%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헤알도 1994년 달러에 대해 1:1로 맞춰졌었는데 올해가 되자 그 가치가 4배나 떨어졌다.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브라질 민중들에게 처참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현재 4천 5백만 명이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으며 실업율은 21% 수준이다. 현재 브라질 인구 3%가 토지 3분의 2를 차지하는 반면, 2천 3백 만 명이 임시 농업노동을 통해 간신히 생활하고 있다. 게다가 브라질은 남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세금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 구조는 워낙 퇴행적이라 부유층은 한 자리 숫자의 세금을 내는 반면, 빈곤한 가구는 무려 20%나 넘는 세금을 국가에 내야 한다. 물론, 민중들이 내는 이런 혈세는 고스란히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외채를 상환하는데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신자유주의의 공격이 빈민에게만 가해진 것은 아니다. 철저히 국제채권단에 의해 조정되고 그들의 이윤 축적에 복무한 브라질 시장의 자유화 및 개방화는 사실상 브라질 국내 경제의 탈산업화를 가져왔고, 높은 이자율은 제조업에 큰 부담이 되었다. 또한 자본자유화로 인한 화폐의 가치 인상은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을 크게 위축시켰고 내수는 내수대로 무너졌다. 카르도수로부터 외면당해 위기에 처한 브라질의 국내 제조업 산업자본가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고, 오히려 "내수 중심의 민족적 국가 경제 개발"을 천명한 룰라에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노동자당은 지난 2월, 자유당(LP)의 조세 알렌카를 대통령 선거 부후보로 추대했다. 알렌카는 전국산업연맹 부회장이며 개인 재산이 5억 달러에 이르는 억만장자이다. 그는 코르테미나스라는 브라질의 가장 큰 섬유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시장 개방화로 피해를 입은 민족 자본가를 대표하는 인물인 것이다. 물론, 노동자당 내 일부를 비롯한 좌파진영은 자유당이 지배엘리트로 구성되어 있고 기독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런 동맹을 비판했으나, 2002년도 대통령 선거에서 이런 민족 산업자본가들과의 연대는 카르도수가 후임자로 내정한 세하를 누르고 노동자당이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민주적 사회주의? 민족적 자본주의?
브라질 노동자당은 그야말로 노동자계급 정당이다. 60∼70년대 군사정권이 추진한 경제부흥계획이 노동착취와 탄압으로 이어지자 1978년 상베르나르두에 있는 SAAB에서 총파업이 시작되었고 그 열기가 브라질 전역으로 퍼졌다. 그 속에서 룰라가 이끌던 ABC 지역 금속노동자들은 노동자계급 정당 창당을 위한 계획을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1980년 2월 10일 상파울루에서 창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애초부터 노동자당은 사회주의를 목표로 표방했으며 무토지농민운동(MST)이나 노동자단일동맹(CUT) 등 거대 대중운동들을 정당의 기반으로 삼았다. 물론, 민주적 사회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완성된 전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1989년 선거에서 노동자당은 외채 이자지불 중지, 사유화 반대, 사회보장 지출 증대, 무토지 농민을 위한 토지 개혁 등 급진적 정책을 내세웠다. 그리고 노동자당이 집권한 브라질 최대 도시인 상파울로와 리우그란데두술 주(州)를 비롯해 5개 주 187개 기초 지자체에서 실시한 참여예산제 등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런데 1998년 선거부터 그러한 노동자당이 변하기 시작했고, 3번의 고배를 마신 후 승리를 거둔 이번 선거에서 노동자당은 사실상 "우경화"의 최고조에 이르렀다. 노동자당은 "좌파 통합, 우파 분열, 대선 승리" 전략이라 불리는 "좌우연합 전술"{{) 이승철, "노동자 후보, 사장과 손잡다", 한겨레21 2002년 10월 10일 자
}}을 구사하면서 두 개의 공산당(PCB, PCdoB)과 동맹을 맺는 한편, 우파인 자유당도 포섭했다.
이번 선거에서 룰라가 내세운 정책은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한다.{{) Roger Burbach, "Has Lula Sold Out?", www.americas.org
}} 첫째는 "참여적 국가 운영"으로, 지역 수준의 참여민주주의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이다. 지역마다 지역의회를 구성해 경제, 사회, 정치, 문화, 환경 정책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고 브라질리아의 중앙정부 기관들과 직접 협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는 "전략적 국가 운영"으로,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결별을 선언한 가운데 교육 및 보건 등 민중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국내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IMF, 유엔, 세계은행과 WTO의 민주화를 요구하고, 쿠바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노동자당 정책의 핵심 내용이다.
첫째와 둘째를 관통하는 중요한 맥은 물론 사회주의 정당인 만큼 5,000 만 명에 달하는 빈곤층을 위한 일자리 창출, 사회안정, 세제 개편, 주택 보급, 교육 및 보건의료 혜택 확충, 토지 개혁 등 민중의 생활 조건 개선을 위한 재분배 정책이다. 그러나 또 한 하나는 "내수 중심의 민족적 국가 경제 개발"이다. 즉, 해외자본을 유치하되 투기가 아닌 "건강한 투자"로 유도해 생산과 일자리를 확충하고 국내 산업을 육성해 경제 성장과 민생 안정을 이룩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해외자본을 생산부문에 유치하기 위해 선거전에 이미 GM이나 폭스바겐 등과 협의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무역 조건 재협상을 통해 국내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강화{{) 주류 언론에서는 룰라가 "보호무역"을 주장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미국 등의 국가들이 "자유무역"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이런 전제는 사실상 국제적인 무역 불평등을 은폐하기 위한 논리인데, 미국은 사실상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제3세계 상품을 봉쇄하면서 오히려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시장을 자유화하고 개방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룰라가 문제제기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지점이며, 미국도 브라질 상품에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 수출 촉진 정책을 통해 무역수지를 개선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자율 억제를 통해 국내 기업의 대출 및 투자 활동을 활성화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최저임금도 현재 200헤알(약 8만원)에서 2006년까지 2배로 인상해 국내 소비를 활성화겠다는 계획이다.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그리고 해외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룰라는 "조심스러운 정부 지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며, 1990년대의 시장경제 개혁 조치들을 존중하고, 3%의 재정흑자를 통해 (IMF는 3.75%를 요구했으나 룰라의 안에 만족하는 듯하다) 채무 상환을 이행하겠다고 하는 등 외채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더불어 추가적 사유화에는 반대하나 이미 사유화된 기업을 재국유화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최근 사회운동들이 FTAA에 관한 비공식 총투표를 실시했다. 브라질에서 약 천 만 명이 투표했으며, 96%가 FTAA에 반대한다는 결과가 나와, 남미 민중들이 소위 "자유무역"을 내세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얼마나 불신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놓고 있다. 즉, 룰라가 FTAA 자체에 반대하는 지의 여부는 모호하며 다만 현재의 무역체제가 미국 중심으로 설정되어 FTAA의 세부적 조건에 반대한다는 정도를 밝히고 있다.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군사 쿠데타가 이를 타도하곤 하는 남미의 역사와 미국이 "대테러전쟁"을 명목으로 펼치고 있는 군사적 강경 정책을 의식해서인지, 그는 자본 뿐 아니라 군대를 안심시켰다. 선거 기간 동안 그는 군 관료들과 만나 브라질이 1998년에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한 것을 후회한다고 하며, 현 병력을 유지하고 무기산업에 투자를 유치해 브라질을 "경제적, 기술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렇듯, 룰라는 과연 제대로 어울리는 지의 여부가 불분명한 두 개의 축 -평등한 재분배와 경제 성장- 을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노동 대 자본"의 전선이 아니라 "투기자본 대 반(反)투기자본"{{) 이승철, 위와 같은 글
}}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즉, 카르도수 집권 하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해를 입은 민족자본가와 중산계급 그리고 빈민까지 아울러, 신자유주의에 대한 범계급적 반감을 범계급적 민족주의로 돌파하려는 것이다. IMF를 비롯한 국제채권단을 달래면서 말이다. 물론, 이런 우경화와 포퓰리즘은 노동자당 내부에서 뿐 아니라 좌파 진영에서 상당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제임스 페트라스는 "직접행동과 선거정치를 결합한 풀뿌리 운동들의 연대로 시작한 노동자당이 중간계급 전문가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이 지배하는 관료주의적 정당이 되었으며, 선거 캠페인과 정권을 잡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그리고 "민중이 아닌 은행에 복무하고자 한다"며 노동자당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James Petras, "Brazil: Neo-Liberalism, crises and electoral politics", www.rebeli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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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초국적 금융자본과의 줄다리기
룰라는 당선 확정 후 첫 공식성명에서 "국제적인 임무를 존중하고 반인플레 정책을 유지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금융시장도 이에 만족한 지 룰라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헤알화의 가치가 5% 오르고, 주가도 급등했다. 그러나 룰라의 이러한 "우경화" 또는 "좌우연합전술"은 그에게 승리를 선사해줬지만, 역설적이게도 승리 이후 룰라에게 큰 질곡이자 최악의 경우 브라질 경제와 함께 그가 몰락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올해 8월 IMF는 브라질에 대한 구제금융 총 300억 달러 중 60억 달러를 먼저 지원하고 나머지 240억은 2003년에 구조조정 이행 성과에 따라 지급하기로 카르도수 정부와 합의했다. IMF와의 합의를 파기하고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지 않는 이상, 룰라는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 현재로서 룰라는 재정흑자를 통해 "국제적 임무를 존중"하겠다며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 IMF 구제금융은 타이밍과 의도를 봤을 때 1998년 11월 IMF가 경제위기에 직면한 브라질에 415억 달러를 지급했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당시 1998년 구제금융은 사실상 총체적인 경제 몰락을 카르도수가 집권할 때까지 유보함으로써 해외 투자자들이 자본을 도피시킬 시간적 여유를 부여해 경제가 연착륙할 수 있도록 하고, 더불어 유력한 당선자였던 카르도수가 지속적으로 경제 구조조정을 단행하도록 강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초국적 금융자본에게 안전망을 형성해주고 룰라로 하여금 친민중적 정책보다 채권자 -특히 시티 그룹, HSBC, JP 모건 등 미국 및 유럽의 초국적 금융자본- 에 대한 의무를 더욱 중요시하도록 강제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얼마 전에 진행된 제 57차 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나온 공동성명서는 브라질 경제개혁 가속화를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IMF와 국제채권단, 그리고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룰라의 당선을 어느 정도 "허용"한 것이 결코 그의 정책 -그것이 좌파적인 것이든 우파적인 것이든- 을 액면 그대로 환영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엄청난 규모의 외채와 경제위기의 위험으로 룰라를 일정 정도 견제하고 그럼으로써 브라질 민중들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초국적 자본은 룰라가 그의 본심이 무엇이든 간에 그의 "좌파적 성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을 것이며 그래서 자체적으로 몰락하거나 아니면 친신자유주의적 "제 3의길"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시카고대학 자유주의 경제학자 게리 베커는 룰라의 인기를 오랜 보수당 집권 끝에 영국 "신"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집권한 배경에 비유하면서 보수적 정권보다 오히려 노동조합의 신뢰를 얻고 있는 룰라가 노동의 유연화를 달성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며, 룰라의 승리를 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Gary S. Becker, "Brazil: If Lula Wins, Free Markets Will Survive", [Business Week] 2002년 10월 21일 자
}} 그리고 세계은행 총재 제임스 울펜슨도 "지난 7, 8년 간 내 경험에 의하면 악마나 혁명가, 무엇으로든 묘사되었던 사람이 집권하기만 하면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룰라는 경험이 많고 주위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여유 있게 말했다.{{) Matthew Flynn, "For Lula and the PT, Winning Brazil's Elections Not the Biggest Challenge After All", Interhemispheric Resource Center
}} 물론, 우파 경제학자들의 이런 발언은 좌파의 전세계적 "패배"를 증명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전술일 수 있겠지만, 룰라의 실제 행보를 봤을 때 이런 비유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초국적 자본과 제국주의 국가들이 견제하려는 것은 룰라나 노동자당 그 자체라기보다 브라질 민중들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한쪽에서 룰라를 견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쪽에는 변화를 갈망하는 브라질 민중들과 룰라가 다시 "좌경화"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세력이 있다. 룰라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노동자당 내부에서 나오고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당의 지지기반인 MST와 CUT 등 사회운동들에서도 나오고 있다. 특히 MST와 같은 사회운동들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으며, 이들은 노동자당을 압박하고 나아가 초국적 자본에 맞서는 세력이다.
룰라는 과연 폭풍을 헤치고 나갈 수 있을까
노동자당이 현재 내놓은 정책을 개혁이라 평가하든 변혁이라 평가하든, 룰라의 당선이 전세계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룰라가 브라질 헌정 사상 첫 좌파 대통령이라는 점, 그 자신이 노동자 출신이며 그가 이끄는 노동자당은 노동자 투쟁 속에서 피어난 노동자계급 정당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며, 더군다나 20년 전만 해도 총선에서 3.1%를 득표하던 군소정당이 꾸준한 지방자치 경험을 기반으로 오늘날까지 성장했다는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지난 10년 넘게 노동자당은 전국 200여 개에 달하는 기초 지자체에서 그야말로 풀뿌리 참여민주주주를 실천해왔으며, 대중성을 강하게 유지해왔다. 물론, 최근의 우경화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브라질 노동자당은 교조적 스탈린주의도, 개량적 사회민주주의도 뛰어넘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래로부터의 정당"이라는 점에서 전세계 좌파진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룰라의 당선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민중들의 거부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증명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최근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로 좌파적 성향의 정당들이 집권을 하는 (때로는 오히려 극우의 세력화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전세계적인 추세로 봤을 때, "세계 9위 경제대국"에서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이 민중들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사실은 연이은 경제위기에 허덕이고 있는 기타 남미 좌파와 더 넓게는 전세계의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큰 촉매제 역할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룰라가 당선되자 쿠바,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이 함께 남미의 "선의 축"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 축"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제3세계 국가의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볼 만하다. 그리고 노동자당이 13년 간 집권한 포르투알레그레는 지난 2년 동안 (그리고 내년에도) 세계사회포럼을 개최하면서 반신자유주의 국제연대 전선을 강화하는 "대회합의 장"으로 역할했는데, 이제 포르투알레그레 시가 아니라 브라질 전체가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중심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세계 사회운동 진영 내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룰라의 당선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상당함에도, 향후 룰라가 넘어야 할 산은 너무나도 많다. 룰라는 너무나 큰 문제를 유산으로 받았는데 과연 그 부담을 견딜 수 있을까. 외채 위기를 지랫대로 삼아 브라질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제하려는 IMF 및 초국적 자본이 한 쪽에, "룰라만이 높은 실업률과 빈부격차, 생계난 등을 해결할 수 있다... 그가 서민들을 위해 좋은 정책을 펼칠 것"을 기대하는 대중이 다른 한 쪽에 있는 상황을 룰라는 어떻게 저울질할 것인가가 브라질 정치, 경제, 사회적 미래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룰라는 갈림길에 서있다. 현재로서는 "두 마리 토끼 다 잡겠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그가 초국적 자본과 타협하고 궁핍한 브라질 민중들을 외면할 경우, 노동자당은 정치적 위기는 물론이고 심화된 외채의 악순환을 직면하게 것이다. 실제로 MST와 CUT는 두 조직의 지도부 모두가 공식적으로 노동자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지만 기층에서는 룰라에 대한 비판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특히 MST의 경우, 노동자당 집권 지역에서도 토지 점거운동을 벌이거나 노동자당이 점거 활동에 대해 명확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아 갈등이 직접 일어나기도 했고, 최근에 진행된 FTAA 총투표에 대한 후원을 노동자당이 거부해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노동자당은 선거 기간에 공무원 연금제도를 하향조절해야 한다고 발언해 CUT 내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는 공무원 노동자들로부터 반발을 사는 등, 향후 CUT 내 PT파와 비PT파 간, 그리고 CUT와 노동자당 간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러나 만약 그가 민중들 편에 서서 그들이 진정 원하는 정치를 펼칠 경우 초국적 자본과 제국주의 국가들이 "보복"할 것이라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여러 번 증명된 바이다. 한국의 한 일간지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한 애널리스트가 룰라에 대해 "극도로 불안해진 투자자들의 심리를 되돌려야 한다"고 한 말이 "조언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기대에 조금이라고 미치지 못하면 B+에 부정적 감시대상으로 지정된 이 나라의 신용등급을 언제든 부도수준으로 깎아내릴 준비가 돼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고 보도했다.{{) [매일경제], 2002년 10월 29일 자
}} 그리고 남미의 역사를 봤을 때, 미국 등의 국가들이 "썩은 사과"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불사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여러 정치논평가들이 우려하고 있다.
선거는 끝났지만 브라질의 미래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룰라가 자신의 당선 그 자체가 가지는 의의를 잘 살리면서 경제위기의 폭풍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지의 여부는 그와 노동자당이 향후 어떤 길로 들어설 것인가에 달려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룰라만의 과제가 아니다. 룰라가 초국적 금융자본과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는 경제위기에 효과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투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만약 룰라가 민중들을 "배반"한다면 그에 맞서서도 싸우는 것- 은 결국 브라질 민중들과 이들의 세력화, 그리고 브라질 민중들과의 전세계 민중운동 진영의 국제연대가 될 것이다. PSSP
1차 투표 결과가 나오자 좌파의 당선을 우려하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압박으로 주가폭락과 채권가격 하락 그리고 환율급등 등 룰라에게 여러 가지 악재가 작용했었다. 그러나, 룰라가 긴축 재정, 인플레이션 억제, 외채 상환 등을 다시 천명하는 한편, 고메스와 가로티뉴, 그리고 브라질 산업자본가들을 비롯해 정·재·학계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얻어내면서 결선투표에서 무난하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번 선거는 지난 8년 동안 집권했던 페르난도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패배와 이에 따른 우파의 분열, 신자유주의에 대한 브라질 민중들의 환멸 그리고 초국적 금융자본을 달래면서 분열된 우파를 포섭한 룰라의 전략이 성공한 결과라 평가할 수 있다.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정책, 외채의 악순환과 브라질 경제의 파탄
1994년부터 2002년까지 브라질 대통령직을 역임한 "맑스주의" 사회학자 카르도수는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93년 중반에 재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브라질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제하기 시작했다. 1994년 초, 브래디플랜(Brady Plan)을 통해 브라질은 IMF와 국제채권단으로부터 국가예산을 외채 상환으로 유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외채 상환 연기를 협상해냈다. 카르도수는 이런 새로운 예산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고, 사회비상기금(Social Emergency Fund)을 조성했다. 물론 이 사회비상기금은 정부의 예산삭감액으로 충당되는 것으로, 이는 곧 사회보장정책의 대대적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브라질의 예산과 정부 조직이 국제채권단의 이해를 대변하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게 되었으며,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었다는 면에서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미셸 초스도프스키, [빈곤의 세계화], 당대
}}
재무장관으로서의 "성과"에 힘입어 카르도수는 1994년 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 때부터 IMF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브라질 경제을 대대적으로 수술하기 시작했다. 그는 "헤알 계획(Plano Real)"이라는 일련의 정책을 도입하는 데, 이는 헤알이라는 새로운 화폐단위를 도입하고 달러에 고정시켜 5,000%나 되던 인플레를 안정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초기 얼마 동안은 인플레 억제에 성공해 인플레를 두 자리 숫자로 안정시켰다. 그러나 국제채권자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가운데 수입 촉진과 자본시장 자유화를 통해 초국적 자본을 적극 유치하면서 이미 해외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취약해질 대로 취약해진 브라질 경제는 더더욱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초국적 자본이 대량 유입되어 화폐가 오히려 평가절상되었고, 이는 결국 무역 및 자본수지 적자로 이어졌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 더 많이 빌렸고 자본 도피를 막기 위해 이자율을 대폭 높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오히려 외채 부담만 증가시켜 경제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 뿐, 경제위기의 악순환은 지속됐다.
1998년에 IMF가 다시 한 번 개입해 총체적 위기를 유보시키면서 초국적 자본을 안전지대로 유도했고, 이 속에서 카르도수가 대통령으로 재당선되어 국제채권국 및 금융기구들과의 호의적 관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카드도수는 경제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통신과 전력 등 주요 공기업을 사유화했고 외채 상환을 위해 공공서비스를 더욱 감축했다. 그러나 외채 부담은 줄어들지 않아 카르도수 정권 하에서 공공채무가 GDP의 30%에서 60%로 증가하였고, 외채는 사상 최대 규모인 2,600억 달러에 달했다. 2000년도 수출 대 외채 비율은 442.2%에 달아 심지어 세계은행이 HIPC(*편집자 주: 외채과다 빈곤국, Heavily Indepted Poor Country)가 유지 가능한 수준으로 지정한 150%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헤알도 1994년 달러에 대해 1:1로 맞춰졌었는데 올해가 되자 그 가치가 4배나 떨어졌다.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브라질 민중들에게 처참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현재 4천 5백만 명이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으며 실업율은 21% 수준이다. 현재 브라질 인구 3%가 토지 3분의 2를 차지하는 반면, 2천 3백 만 명이 임시 농업노동을 통해 간신히 생활하고 있다. 게다가 브라질은 남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세금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 구조는 워낙 퇴행적이라 부유층은 한 자리 숫자의 세금을 내는 반면, 빈곤한 가구는 무려 20%나 넘는 세금을 국가에 내야 한다. 물론, 민중들이 내는 이런 혈세는 고스란히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외채를 상환하는데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신자유주의의 공격이 빈민에게만 가해진 것은 아니다. 철저히 국제채권단에 의해 조정되고 그들의 이윤 축적에 복무한 브라질 시장의 자유화 및 개방화는 사실상 브라질 국내 경제의 탈산업화를 가져왔고, 높은 이자율은 제조업에 큰 부담이 되었다. 또한 자본자유화로 인한 화폐의 가치 인상은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을 크게 위축시켰고 내수는 내수대로 무너졌다. 카르도수로부터 외면당해 위기에 처한 브라질의 국내 제조업 산업자본가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고, 오히려 "내수 중심의 민족적 국가 경제 개발"을 천명한 룰라에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노동자당은 지난 2월, 자유당(LP)의 조세 알렌카를 대통령 선거 부후보로 추대했다. 알렌카는 전국산업연맹 부회장이며 개인 재산이 5억 달러에 이르는 억만장자이다. 그는 코르테미나스라는 브라질의 가장 큰 섬유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시장 개방화로 피해를 입은 민족 자본가를 대표하는 인물인 것이다. 물론, 노동자당 내 일부를 비롯한 좌파진영은 자유당이 지배엘리트로 구성되어 있고 기독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런 동맹을 비판했으나, 2002년도 대통령 선거에서 이런 민족 산업자본가들과의 연대는 카르도수가 후임자로 내정한 세하를 누르고 노동자당이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민주적 사회주의? 민족적 자본주의?
브라질 노동자당은 그야말로 노동자계급 정당이다. 60∼70년대 군사정권이 추진한 경제부흥계획이 노동착취와 탄압으로 이어지자 1978년 상베르나르두에 있는 SAAB에서 총파업이 시작되었고 그 열기가 브라질 전역으로 퍼졌다. 그 속에서 룰라가 이끌던 ABC 지역 금속노동자들은 노동자계급 정당 창당을 위한 계획을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1980년 2월 10일 상파울루에서 창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애초부터 노동자당은 사회주의를 목표로 표방했으며 무토지농민운동(MST)이나 노동자단일동맹(CUT) 등 거대 대중운동들을 정당의 기반으로 삼았다. 물론, 민주적 사회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완성된 전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1989년 선거에서 노동자당은 외채 이자지불 중지, 사유화 반대, 사회보장 지출 증대, 무토지 농민을 위한 토지 개혁 등 급진적 정책을 내세웠다. 그리고 노동자당이 집권한 브라질 최대 도시인 상파울로와 리우그란데두술 주(州)를 비롯해 5개 주 187개 기초 지자체에서 실시한 참여예산제 등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런데 1998년 선거부터 그러한 노동자당이 변하기 시작했고, 3번의 고배를 마신 후 승리를 거둔 이번 선거에서 노동자당은 사실상 "우경화"의 최고조에 이르렀다. 노동자당은 "좌파 통합, 우파 분열, 대선 승리" 전략이라 불리는 "좌우연합 전술"{{) 이승철, "노동자 후보, 사장과 손잡다", 한겨레21 2002년 10월 10일 자
}}을 구사하면서 두 개의 공산당(PCB, PCdoB)과 동맹을 맺는 한편, 우파인 자유당도 포섭했다.
이번 선거에서 룰라가 내세운 정책은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한다.{{) Roger Burbach, "Has Lula Sold Out?", www.americas.org
}} 첫째는 "참여적 국가 운영"으로, 지역 수준의 참여민주주의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이다. 지역마다 지역의회를 구성해 경제, 사회, 정치, 문화, 환경 정책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고 브라질리아의 중앙정부 기관들과 직접 협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는 "전략적 국가 운영"으로,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결별을 선언한 가운데 교육 및 보건 등 민중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국내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IMF, 유엔, 세계은행과 WTO의 민주화를 요구하고, 쿠바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노동자당 정책의 핵심 내용이다.
첫째와 둘째를 관통하는 중요한 맥은 물론 사회주의 정당인 만큼 5,000 만 명에 달하는 빈곤층을 위한 일자리 창출, 사회안정, 세제 개편, 주택 보급, 교육 및 보건의료 혜택 확충, 토지 개혁 등 민중의 생활 조건 개선을 위한 재분배 정책이다. 그러나 또 한 하나는 "내수 중심의 민족적 국가 경제 개발"이다. 즉, 해외자본을 유치하되 투기가 아닌 "건강한 투자"로 유도해 생산과 일자리를 확충하고 국내 산업을 육성해 경제 성장과 민생 안정을 이룩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해외자본을 생산부문에 유치하기 위해 선거전에 이미 GM이나 폭스바겐 등과 협의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무역 조건 재협상을 통해 국내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강화{{) 주류 언론에서는 룰라가 "보호무역"을 주장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미국 등의 국가들이 "자유무역"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주장이다. 이런 전제는 사실상 국제적인 무역 불평등을 은폐하기 위한 논리인데, 미국은 사실상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제3세계 상품을 봉쇄하면서 오히려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시장을 자유화하고 개방하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룰라가 문제제기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지점이며, 미국도 브라질 상품에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 수출 촉진 정책을 통해 무역수지를 개선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자율 억제를 통해 국내 기업의 대출 및 투자 활동을 활성화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최저임금도 현재 200헤알(약 8만원)에서 2006년까지 2배로 인상해 국내 소비를 활성화겠다는 계획이다.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그리고 해외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룰라는 "조심스러운 정부 지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며, 1990년대의 시장경제 개혁 조치들을 존중하고, 3%의 재정흑자를 통해 (IMF는 3.75%를 요구했으나 룰라의 안에 만족하는 듯하다) 채무 상환을 이행하겠다고 하는 등 외채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더불어 추가적 사유화에는 반대하나 이미 사유화된 기업을 재국유화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최근 사회운동들이 FTAA에 관한 비공식 총투표를 실시했다. 브라질에서 약 천 만 명이 투표했으며, 96%가 FTAA에 반대한다는 결과가 나와, 남미 민중들이 소위 "자유무역"을 내세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얼마나 불신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놓고 있다. 즉, 룰라가 FTAA 자체에 반대하는 지의 여부는 모호하며 다만 현재의 무역체제가 미국 중심으로 설정되어 FTAA의 세부적 조건에 반대한다는 정도를 밝히고 있다.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군사 쿠데타가 이를 타도하곤 하는 남미의 역사와 미국이 "대테러전쟁"을 명목으로 펼치고 있는 군사적 강경 정책을 의식해서인지, 그는 자본 뿐 아니라 군대를 안심시켰다. 선거 기간 동안 그는 군 관료들과 만나 브라질이 1998년에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한 것을 후회한다고 하며, 현 병력을 유지하고 무기산업에 투자를 유치해 브라질을 "경제적, 기술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렇듯, 룰라는 과연 제대로 어울리는 지의 여부가 불분명한 두 개의 축 -평등한 재분배와 경제 성장- 을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노동 대 자본"의 전선이 아니라 "투기자본 대 반(反)투기자본"{{) 이승철, 위와 같은 글
}}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즉, 카르도수 집권 하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해를 입은 민족자본가와 중산계급 그리고 빈민까지 아울러, 신자유주의에 대한 범계급적 반감을 범계급적 민족주의로 돌파하려는 것이다. IMF를 비롯한 국제채권단을 달래면서 말이다. 물론, 이런 우경화와 포퓰리즘은 노동자당 내부에서 뿐 아니라 좌파 진영에서 상당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제임스 페트라스는 "직접행동과 선거정치를 결합한 풀뿌리 운동들의 연대로 시작한 노동자당이 중간계급 전문가들과 노동조합 관료들이 지배하는 관료주의적 정당이 되었으며, 선거 캠페인과 정권을 잡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그리고 "민중이 아닌 은행에 복무하고자 한다"며 노동자당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James Petras, "Brazil: Neo-Liberalism, crises and electoral politics", www.rebelion.org
}}
IMF·초국적 금융자본과의 줄다리기
룰라는 당선 확정 후 첫 공식성명에서 "국제적인 임무를 존중하고 반인플레 정책을 유지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금융시장도 이에 만족한 지 룰라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헤알화의 가치가 5% 오르고, 주가도 급등했다. 그러나 룰라의 이러한 "우경화" 또는 "좌우연합전술"은 그에게 승리를 선사해줬지만, 역설적이게도 승리 이후 룰라에게 큰 질곡이자 최악의 경우 브라질 경제와 함께 그가 몰락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올해 8월 IMF는 브라질에 대한 구제금융 총 300억 달러 중 60억 달러를 먼저 지원하고 나머지 240억은 2003년에 구조조정 이행 성과에 따라 지급하기로 카르도수 정부와 합의했다. IMF와의 합의를 파기하고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지 않는 이상, 룰라는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 현재로서 룰라는 재정흑자를 통해 "국제적 임무를 존중"하겠다며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 IMF 구제금융은 타이밍과 의도를 봤을 때 1998년 11월 IMF가 경제위기에 직면한 브라질에 415억 달러를 지급했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당시 1998년 구제금융은 사실상 총체적인 경제 몰락을 카르도수가 집권할 때까지 유보함으로써 해외 투자자들이 자본을 도피시킬 시간적 여유를 부여해 경제가 연착륙할 수 있도록 하고, 더불어 유력한 당선자였던 카르도수가 지속적으로 경제 구조조정을 단행하도록 강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초국적 금융자본에게 안전망을 형성해주고 룰라로 하여금 친민중적 정책보다 채권자 -특히 시티 그룹, HSBC, JP 모건 등 미국 및 유럽의 초국적 금융자본- 에 대한 의무를 더욱 중요시하도록 강제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얼마 전에 진행된 제 57차 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나온 공동성명서는 브라질 경제개혁 가속화를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IMF와 국제채권단, 그리고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룰라의 당선을 어느 정도 "허용"한 것이 결코 그의 정책 -그것이 좌파적인 것이든 우파적인 것이든- 을 액면 그대로 환영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엄청난 규모의 외채와 경제위기의 위험으로 룰라를 일정 정도 견제하고 그럼으로써 브라질 민중들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초국적 자본은 룰라가 그의 본심이 무엇이든 간에 그의 "좌파적 성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을 것이며 그래서 자체적으로 몰락하거나 아니면 친신자유주의적 "제 3의길"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시카고대학 자유주의 경제학자 게리 베커는 룰라의 인기를 오랜 보수당 집권 끝에 영국 "신"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집권한 배경에 비유하면서 보수적 정권보다 오히려 노동조합의 신뢰를 얻고 있는 룰라가 노동의 유연화를 달성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며, 룰라의 승리를 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Gary S. Becker, "Brazil: If Lula Wins, Free Markets Will Survive", [Business Week] 2002년 10월 21일 자
}} 그리고 세계은행 총재 제임스 울펜슨도 "지난 7, 8년 간 내 경험에 의하면 악마나 혁명가, 무엇으로든 묘사되었던 사람이 집권하기만 하면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룰라는 경험이 많고 주위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여유 있게 말했다.{{) Matthew Flynn, "For Lula and the PT, Winning Brazil's Elections Not the Biggest Challenge After All", Interhemispheric Resource Center
}} 물론, 우파 경제학자들의 이런 발언은 좌파의 전세계적 "패배"를 증명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전술일 수 있겠지만, 룰라의 실제 행보를 봤을 때 이런 비유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초국적 자본과 제국주의 국가들이 견제하려는 것은 룰라나 노동자당 그 자체라기보다 브라질 민중들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한쪽에서 룰라를 견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쪽에는 변화를 갈망하는 브라질 민중들과 룰라가 다시 "좌경화"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세력이 있다. 룰라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노동자당 내부에서 나오고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당의 지지기반인 MST와 CUT 등 사회운동들에서도 나오고 있다. 특히 MST와 같은 사회운동들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으며, 이들은 노동자당을 압박하고 나아가 초국적 자본에 맞서는 세력이다.
룰라는 과연 폭풍을 헤치고 나갈 수 있을까
노동자당이 현재 내놓은 정책을 개혁이라 평가하든 변혁이라 평가하든, 룰라의 당선이 전세계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룰라가 브라질 헌정 사상 첫 좌파 대통령이라는 점, 그 자신이 노동자 출신이며 그가 이끄는 노동자당은 노동자 투쟁 속에서 피어난 노동자계급 정당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며, 더군다나 20년 전만 해도 총선에서 3.1%를 득표하던 군소정당이 꾸준한 지방자치 경험을 기반으로 오늘날까지 성장했다는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지난 10년 넘게 노동자당은 전국 200여 개에 달하는 기초 지자체에서 그야말로 풀뿌리 참여민주주주를 실천해왔으며, 대중성을 강하게 유지해왔다. 물론, 최근의 우경화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브라질 노동자당은 교조적 스탈린주의도, 개량적 사회민주주의도 뛰어넘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래로부터의 정당"이라는 점에서 전세계 좌파진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룰라의 당선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민중들의 거부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증명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최근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로 좌파적 성향의 정당들이 집권을 하는 (때로는 오히려 극우의 세력화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전세계적인 추세로 봤을 때, "세계 9위 경제대국"에서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이 민중들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사실은 연이은 경제위기에 허덕이고 있는 기타 남미 좌파와 더 넓게는 전세계의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큰 촉매제 역할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룰라가 당선되자 쿠바,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이 함께 남미의 "선의 축"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 축"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제3세계 국가의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볼 만하다. 그리고 노동자당이 13년 간 집권한 포르투알레그레는 지난 2년 동안 (그리고 내년에도) 세계사회포럼을 개최하면서 반신자유주의 국제연대 전선을 강화하는 "대회합의 장"으로 역할했는데, 이제 포르투알레그레 시가 아니라 브라질 전체가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중심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세계 사회운동 진영 내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룰라의 당선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상당함에도, 향후 룰라가 넘어야 할 산은 너무나도 많다. 룰라는 너무나 큰 문제를 유산으로 받았는데 과연 그 부담을 견딜 수 있을까. 외채 위기를 지랫대로 삼아 브라질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제하려는 IMF 및 초국적 자본이 한 쪽에, "룰라만이 높은 실업률과 빈부격차, 생계난 등을 해결할 수 있다... 그가 서민들을 위해 좋은 정책을 펼칠 것"을 기대하는 대중이 다른 한 쪽에 있는 상황을 룰라는 어떻게 저울질할 것인가가 브라질 정치, 경제, 사회적 미래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룰라는 갈림길에 서있다. 현재로서는 "두 마리 토끼 다 잡겠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그가 초국적 자본과 타협하고 궁핍한 브라질 민중들을 외면할 경우, 노동자당은 정치적 위기는 물론이고 심화된 외채의 악순환을 직면하게 것이다. 실제로 MST와 CUT는 두 조직의 지도부 모두가 공식적으로 노동자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지만 기층에서는 룰라에 대한 비판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특히 MST의 경우, 노동자당 집권 지역에서도 토지 점거운동을 벌이거나 노동자당이 점거 활동에 대해 명확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아 갈등이 직접 일어나기도 했고, 최근에 진행된 FTAA 총투표에 대한 후원을 노동자당이 거부해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노동자당은 선거 기간에 공무원 연금제도를 하향조절해야 한다고 발언해 CUT 내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는 공무원 노동자들로부터 반발을 사는 등, 향후 CUT 내 PT파와 비PT파 간, 그리고 CUT와 노동자당 간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러나 만약 그가 민중들 편에 서서 그들이 진정 원하는 정치를 펼칠 경우 초국적 자본과 제국주의 국가들이 "보복"할 것이라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여러 번 증명된 바이다. 한국의 한 일간지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한 애널리스트가 룰라에 대해 "극도로 불안해진 투자자들의 심리를 되돌려야 한다"고 한 말이 "조언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기대에 조금이라고 미치지 못하면 B+에 부정적 감시대상으로 지정된 이 나라의 신용등급을 언제든 부도수준으로 깎아내릴 준비가 돼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고 보도했다.{{) [매일경제], 2002년 10월 29일 자
}} 그리고 남미의 역사를 봤을 때, 미국 등의 국가들이 "썩은 사과"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불사할 수도 있다는 점을 여러 정치논평가들이 우려하고 있다.
선거는 끝났지만 브라질의 미래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룰라가 자신의 당선 그 자체가 가지는 의의를 잘 살리면서 경제위기의 폭풍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지의 여부는 그와 노동자당이 향후 어떤 길로 들어설 것인가에 달려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룰라만의 과제가 아니다. 룰라가 초국적 금융자본과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는 경제위기에 효과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투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만약 룰라가 민중들을 "배반"한다면 그에 맞서서도 싸우는 것- 은 결국 브라질 민중들과 이들의 세력화, 그리고 브라질 민중들과의 전세계 민중운동 진영의 국제연대가 될 것이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