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와 미국 핵무기위협의 현재성 -미국의 핵선제 공격 옵션은 NPT와 제네바 합의를 위협한다.
북한이 1994년 제네바합의에 따라 동결된 영변지역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과는 별개로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우라늄 농축기술을 연구해 온 것을 시인함으로써 한반도에서 핵문제 파문이 다시금 번지고 있다. 북-미 제네바합의는 영변지역의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 문제를 다뤘기 때문에 북한의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 계획은 합의문을 넘어서는 새로운 쟁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협상이나 포괄적인 협상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미국이 제네바합의가 이미 붕괴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1994년 이전의 위기 상황으로 시계를 되돌리는 행동일 뿐이다.
1994년 북미관계가 미국에 의한 대북 선제공격이 신중히 검토될 정도로 치닫게 된 중요한 계기는 1993년 북한의 NPT(핵비확산조약) 탈퇴였다. 미국은 NPT가 세계적인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며 북한이 이를 반드시 수용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러하지 않다. (핵무기를 보유했을 가능성이 거의 희박한 이라크, 이란, 북한 등과 달리) 핵보유국인 중국과 프랑스는 아직 NPT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NPT는 핵보유국인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전혀 제약을 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핵위협이나 핵공격을 제재할 수단이 없다. 오히려 미국의 핵정책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기능을 하며, 따라서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비핵국가의 핵무기 개발 욕구를 자극할 뿐이다. 그러므로 NPT체제는 반핵(反核)을 염원하는 세계 인민들의 요구를 실행하는데 근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핵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50년대 이후 미국의 핵정책의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 미국이 그동안 한반도에 가해온 핵위협의 실체를 파악한다면 오늘날 미국이 제시하는 핵문제 해결책이 왜 궁극적으로 위선적일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냉전시기 동안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할 계획을 구축해왔음을 밝히며, 왜 북한은 자신의 핵무기개발 계획 포기와 함께 미국의 핵무기 위협 및 사용의 중단을 확실히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가를 검토한다.
한국전쟁과 미국의 원자폭탄 계획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가 즉각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핵무기를 통해 어떻게 우위를 확보할 것인가 또는 도래할지도 모르는 세계적인 규모의 전면적인 핵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미국 국가안보위원회 일부 의원은 소련과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A-데이(원폭공격일)의 예상일을 1952년으로 앞당겨야 한다고 곧장 주장하는가하면, 트루먼 대통령은 핵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원폭부품을 대서양 건너 영국으로 실어보내는 것을 비밀리에 승인했다(전후 최초로 핵무기의 해외 반출이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할 것이냐를 구체적으로 처음 검토한 것은 1950년 11월이었다. 맥아더가 삼팔선을 넘어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대공세를 취하고 중국군이 참전하게 되자, '크리스마스는 본국에서'라는 맥아더의 구호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 전쟁은 확대일로를 걷게되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맥아더 사령부는 "적국의 계속되는 군사적 개입을 위축시키거나, 한국에서 유엔군의 철수를 돕기 위한 요인으로서 원폭의 사용 가능성"을 정부에 건의해줄 것을 비밀리에 요청하였다. 또한 미국 내에서는 소련에 대한 '예방적' 공격의 필요성을 공공연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예방적 공격을 주장하는 논리는 간단했다. "소련이 핵강대국이 되는 것을 막는 수단으로서 예방전쟁이 부도덕한 행위인가. 아니면 전제주의적 독재체제가 자유세계를 파괴할 수도 있는 수단을 개발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부도덕한가?" 그리하여 트루먼 대통령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블라디보스톡, 봉천, 북경, 상해, 여순, 대련, 오데싸, 스탈린그라드 등 소련과 중국의 모든 주요 도시와 항구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계획을 진지하게 검토기에 이른다(1952년 1월).
하지만 트루먼은 중국을 공격하는 계획을 결국 포기하였다. 여러 정황 요인이 존재했다. 한반도에는 원폭을 통해 결정적인 효과를 볼만한 군사목표가 별로 없다는 점(이미 모두 파괴되었다는 점), 미국의 핵공격을 (소련의 보복공격을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가 반대했다는 점, 부산이나 일본에 대한 소련의 보복 공격이 가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결정적인 이유는 중국을 공격하는 것이 미국의 핵보유고를 급속하게 고갈시킬 위험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미국 내에서 새롭게 마련되고 있던 '셰이크다운(Shakedown)'이라는 전쟁계획의 수행을 어렵게 만들 수 있었다. (이 계획은 미국의 원자폭탄 생산능력의 급격한 향상에 힘입었다. 미국은 1개월에 여러 개의 원자폭탄을 생산할 수 있게 되자 수백 개의 원자폭탄으로 소련을 총체적으로 파괴하는 계획을 세웠다.)
1952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트루먼에게 해임되었던 맥아더는 다시금 원자폭탄 투하의 필요성을 건의한다. "적군의 집결지들과 북한 내의 시설들에 원폭을 투하하고 압록강에서 남쪽에 이르는 주요 보급로와 통신망을 봉쇄하기 위해 적절한 방사능 물질을 뿌리며 한반도 양쪽 해안에 육·해군을 상륙시키자"는 것이었다. 즉 수백 년에 걸쳐 북한과 남한을 단절시키게 될 원폭폐기물로 이루어진 치명적인 '방사능지대'를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게다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될 무렵 펜타곤은 280mm 곡사포로 발사될 수 있는 축소형 원폭인 마크IX와 W-19를 개발한다. 따라서 새롭게 개발된 전술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유럽에서 벌어질 셰이크다운 계획(전면적인 핵전쟁)에 필요한 핵무기 비축량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전술핵무기 개발을 주도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핵전쟁이 국지전으로 봉쇄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전면적인 핵전쟁의 위험성을 더욱 확대한 결과를 낳았다.) 또한 미국은 1952년 10월 소련보다 먼저 수소폭탄 시험에 성공한다.
그리하여 미국 합참본부는 결국 한반도에서 핵무기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1953년 1월 로스알모스의 원자력연구소에서는 한국에서 사용하기 적당한 핵무기 실험에 성공하였다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953년 5월 미국 합참본부는 <한국의 상황과 관련된 작전과정(분석)>이라는 극비보고서에서 "만약 휴전협상이 실패하고 해결을 보기 위하여 전쟁을 확대하기로 결정된다면" 그 때에는 원폭이 사용되어야 하며, "원자폭탄의 광범위한 전략적 및 전술적 사용이 최대의 기습과 최대의 충격"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도 이 보고서를 승인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전후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1968년 1월 미국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 바다에서 활동하다가 북한 해군에게 나포되는 극히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당시 남한에 주둔해 있던 미군 신예 팬텀기 부대가 푸에블로호의 SOS를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왜 SOS에 응하지 않았는가를 미국 의회에서 조사하는 가운데 중대한 사실이 드러났다. 신예 팬텀기들이 전술핵무기를 장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출격할 수 없었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만약 이들이 출격할 경우 한반도의 위기상황이 극도로 고조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당시 출판된 기사에 따르면 남한에는 12대의 팬텀 F-4전투기가 있었으며, 이 중 절반은 중대한 위기 시에 즉각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경계태세에 있었고 나머지는 이 전투기들이 고장을 일으켰을 때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대기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남한에 미국의 핵무기가 배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사시 즉각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기 위해 상시 경계태세에 돌입해 있었다는 사실을 미국 정부가 간접적으로라도 처음으로 인정하는 계기였다.
냉전시기 동안 미국 정부는 어떤 지역에 어떤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느냐의 여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NCND)의 정책으로 일관했다. (1988년에도 슐츠 미국무장관은 정당총재들과의 대담 자리에서 한 야당총재가 우리 영토에 미국의 핵무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라고 요구하자, 미국 정부의 '전략적 입장과 원칙'이라며 확인을 거부했던 유명한 사건을 상기할 수 있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는 "상호합의에 의하여 북미합중국이 그 육해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인접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북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국 정부는 어떤 무기를 언제 어디에서 들여오는지 물어볼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한반도에서 핵무기 사용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미국 정부에 있으며, 따라서 한반도에서 핵무기 사용 결정은 15개국과 협의해야 하는 유럽보다 훨씬 용이하다(1983년 미국 전 합참의장 에드워드 마이어 장군의 발언).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핵무기 문제에 대해 남한은 전혀 '무권리' 상태인 것이다.
미국은 1960년대 소련과의 핵전쟁계획을 마련하는데 분주했지만, 한편 제3세계 분쟁지역에서는 상대방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해서도 핵을 사용할 의사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베트남전 패배의 여파로 미국은 한반도에서 핵 의존도를 높이는 방향을 선택했다. 1975년 당시 미국 국방장관 슐레진저는 "어떠한 선택도 배제하지 않는다"라면서 한반도에서 핵을 계속 보유할 것이며, 북한에 대하여 불특정한 공격에 핵공격으로 보복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이는 1976년 북한을 가상의 적으로 하는 팀스피리트 한미합동훈련의 개시로 구체화되었다. 1976년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두 명의 미군이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B-52 폭격기를 DMZ까지 비행시키는 작전을 감행하여 북한에 대한 위협을 가했다. 그 후로 미국은 B-52의 모의 폭격비행을 월 1∼2회 실행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1977년에는 카터 대통령과 브라운 국방장관은 한반도에서 핵 선제공격 원칙이 미국의 정책이라는 점을 거듭 밝혔으며, 1978년에는 팀스피리트 훈련 중에 핵공격능력을 갖춘 렌스미사일을 배치하였다. (1976년에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 총수는 F-4전폭기, 야포, 지대공미사일, 지대지미사일, 핵지뢰를 합하여 최소한 총 600-700개로 추산되었다.)
1990년대 북한의 <한반도비핵화선언>과 <핵안전협정> 서명
북한은 1950년대 초반 소련과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면서 핵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은 소련의 핵연구소에 과학자를 파견하였고, 수년 후에는 영변에 원자력연구센터를 설립하였다. 소련에서 0.1MW 임계시설과 2 MW IRT-2000을 구입하여 영변에 설치하였으며, IRT-2000은 1965년부터 가동되었다. 또한 북한은 소련의 기술 지원과 자체 연구를 통해 자력으로 5 MWe 흑연로를 영변에 건설하여 1987년부터 가동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북한이 어느 시점에서 핵무기 개발을 결심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1970년대 미국이 남한에서 핵무기 의존도를 높이며 팀스피리트 훈련을 개시하고, 남한의 군사비 지출이 월등해지며 박정희정권이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섰던 1970후반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1991년 가을 미국 부시정부가 남한에서의 전술핵무기 폐기를 선언하면서 북한은 핵개발 정책을 수정한다. 북한은 1991년 말 남북기본합의서 서명했으며, 핵무기뿐만 아니라 재처리시설도 포기하는 남북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책에 관한 선언>에도 서명했다. 1992년 신년사에서 김일성 주석은 "북한은 핵무기개발의 능력도 의사도 없다"고 밝혔으며 플루토늄을 추출해내는 재처리 시설로 의심받아온 방사화학실험실 건설도 중단했다. 1992년 초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전면안전협정을 체결했다. 1992년 5월부터 국제원자력기구는 가동중이거나 건설중인 16개 핵시설에 대한 사찰활동을 시작했다. 이에 준하여 1992년 미국은 팀스피리트훈련을 중단했다.
하지만 1992년 가을부터 핵사찰의 범위와 수준을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간에 첨예한 갈등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10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서는 1993년부터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북한이 IAEA의 핵사찰을 협조적으로 진행했고 앞으로 거부할 뚜렷할 의사를 밝히기도 전의 상황이었다. IAEA는 핵폐기물을 은닉, 저장하고 있는 2개의 미신고시설이 있다고 주장하며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이 평화적 핵이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며 1993년 3월 팀스피리트 강행하며 주한미군 2단계 철수를 동결했다. 북한은 1993년 NPT를 탈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발생한 것은 단지 두 곳의 '미신고시설'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발생했던 갈등에 기반을 둔다. 북한은 핵무기계획을 폐기하면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했지만, 1992년 4월 미 국무부는 사실상 이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즉 '북한과 미국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핵문제해결, 남북한 관계개선, 미군 유해 송환, 테러 포기 등 지금까지 요구해온 조건(이른바 솔로몬의 5개항)과 함께, 탄도미사일과 미사일 수출 중지, 인권상황 개선이라는 두 조건을 북한 쪽에 추가로 제시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핵무기 위협도 중단되지 않았다. 1992년 12월에 발표된 <한반도비핵화선언>은 한국에 의한 핵무기의 제조, 보유, 배비, 저장, 사용을 금하고 있을 뿐 외국 핵무기의 한국 내 반입이나 사용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따라서 북한은 특정지역내의 '관계국가'의 핵무기의 생산, 실험, 보유, 반입을 공동으로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처럼 한반도비핵화선언이 미국의 핵무기 위협이나 사용에 전혀 제약을 가하지 못했고, 이는 미국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미국은 이 시기 동안에도 괌 섬의 공중전술핵무기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핵우산을 유지하며 유사시 핵무기를 사용하는 핵선제사용 옵션을 한반도에서 유지한다는 정책을 누차 확인했다. 따라서 북한은 NPT 복귀만으로는 핵위협의 중단이나 관계개선 요구를 실현시킬 수 없었고, 따라서 제네바합의 형식으로 이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잡으려 한 것이다.
NPT 체제의 양면성
NPT는 1968년 7월 UN에서 채택되어 1970년 3월에 발효하였다. 이미 1966년 후반부터 미소의 타협이 진전되어 1967년 초에는 미소간에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소 초안의 심의를 맡았던 제네바 군축위원회에서 비핵보유국이 특히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핵의 평화적 이용도 금지된다는 점, 핵보유국의 핵군축 의무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점, 비핵보유국의 핵활동에 대한 사찰이 자주권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점, 비핵보유국의 안전보장에 문제가 있다는 점, 기한 25년이 너무 길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수정된 안의 특징은 NPT는 군사적인 목적의 핵무기 생산은 억제하고 평화목적의 핵활동은 장려한다는 이중적 구조를 취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평화적인 목적과 군사적인 목적은 핵기술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를 감시하기 위한 사찰제도를 도입하였다. 또 하나는 핵보유 여부에 따라 핵보유국과 비핵보유국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조약 의무를 부과한다는 점이다. 핵무기보유국은 '수직적 비확산'이라고 하여 비핵무기국에 대하여 핵무기를 이양하지 않을 의무를 지며 단계적으로 핵무기를 축소할 약속을 하였다. 비핵무기국은 '수평적 비확산'이라고 하여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고 핵무기국에서 수령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결국 미국, 소련 등 5개 핵보유국은 기존의 핵기득권을 허용 받게 되었다.
하지만 비핵무기국이 제기한 문제점들은 대부분 유지되거나 공허한 약속으로 그쳤다. NPT의 실질적인 불평등성은 논리상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드러났다. NPT는 핵무기국이 단계적으로 핵군비를 축소한다는 약속을 이행하며 핵공격 위협을 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비핵무기국이 핵의 '평화로운 이용'을 위한 공평한 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논점도 있으나 이는 반핵이라는 오늘 논의에서 부적절하다.) 단편적으로 핵무기국의 핵무기 제조과정은 IAEA의 사찰 대상이 전혀 될 수 없는 형편이다. 비핵무기국가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잣대로 생각해본다면, 미국의 첨단 핵무기 제조 과정 역시 인류의 핵무기로부터의 안전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부시정부가 최근 발표한 <핵태세보고서>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도 선제 핵공격을 가할 수 있으며 그 명시적인 대상의 하나로 북한을 지목하고 있다. 또한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 핵무기를 개발하고 전략핵무기의 보유 상태를 혁신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이는 2000년에 열렸던 NPT 6차 평가회의에서 핵무기의 완전한 제거를 합의했던 것과 양립 불가능하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NPT체제의 결함을 극적으로 확대한다. (또한 북미 제네바합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쟁점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핵무기개발을 원하는가?
따라서 북한이 NPT체제로 복귀한다고 해서 그 안전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제네바합의는 북한이 미국이 상호 실천해야 할 내용을 명문화하였다. 즉 미국과 북한이 한반도비핵지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은 자신의 핵무기 위협 또는 사용을 중단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보증하며 북한은 한반도비핵지대화선언의 이행을 단계적으로 실행한다는 점을 동시에 약속하였다. 또한 북한의 영변지역 핵시설에 대한 동결과 함께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희망은 클린턴정부 동안 실현되지 않았다. 제네바합의는 북미간의 그야말로 '합의'일 뿐이며 어떤 구속력을 갖지는 않았다. 클린턴정부는 제네바합의이행을 고의적으로 방기함으로써 북한의 희망을 묵살했다. 물론 클린턴정부는 동아시아 전략을 고려하며 북한의 '개혁'보다는 '안정성'을 선호했으므로, 집권 말기 페리보고서를 작성하며 사태의 수습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페리보고서는 북한을 무리하게 압박하여 예측불가능한 위기가 도래하는 것보다는 대화를 통한 현상유지를 바탕으로 북한의 핵-미사일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가는데 초점을 맞췄다. 이에 반해 현재 부시 정부는 '반테러전쟁'을 거치며 "매파 개입"(hawk engagement)으로 노선을 전환하는 중이다. 북한과의 갈등을 유발해 북한의 "정신적 타락"을 부추기고 북한의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잠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미국을 모방하여 군사적 대결구도를 증폭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크게 높일 뿐만 아니라, 북한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경쟁의 회오리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전쟁을 거쳐 50여 년 동안 한반도에서 핵무기 위협을 가한 미국의 정당성을 그 아래로부터 허무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사후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게 될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농축우라늄 기술을 개발한다는 미국의 의혹을 시인한 후 이 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위해 '북미 불가침조약'을 체결할 것을 촉구했다(동시에 북한은 "미국은 1957년 6월 신무기의 반입을 금지한 정전협정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남조선에 핵무기를 끌어들이겠다고 선포"하고 미국이 북한을 핵으로 위협하면서 한반도 핵문제가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역사적인 핵위협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반도 핵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와 같은 방식으로 북한에 당장 군사적 위협을 가하지는 않되 동시에 대화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미국은 북한과 대화를 진행할 경우, 왜 이라크와는 대화하지 않느냐는 국내 여론이 형성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결국 미국은 핵위협과 핵사용을 통한 '승리하는 핵전쟁'이라는 동일한 일방주의적 원칙과 NPT체제의 위선적인 활용을 통해 북한과 이라크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PSSP
<참고자료>
이영희·임재경 편, {반핵: 핵위기의 구조와 한반도}, 1988, 창작과비평사
이삼성, [북미합의 이후에 대하여],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 1995, 당대
황영채, {NPT, 어떤 조약인가}, 1995, 한울
한국원자력연구소 원자력통제기술센터, {북한핵문제와 경수로 사업: 북미기본합의 5년에 대한 기술 평가}, 1999, http://www.tcnc.kaeri.re.kr/ebooks_k.htm (2002.11.1 검색)
1994년 북미관계가 미국에 의한 대북 선제공격이 신중히 검토될 정도로 치닫게 된 중요한 계기는 1993년 북한의 NPT(핵비확산조약) 탈퇴였다. 미국은 NPT가 세계적인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며 북한이 이를 반드시 수용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러하지 않다. (핵무기를 보유했을 가능성이 거의 희박한 이라크, 이란, 북한 등과 달리) 핵보유국인 중국과 프랑스는 아직 NPT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NPT는 핵보유국인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전혀 제약을 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핵위협이나 핵공격을 제재할 수단이 없다. 오히려 미국의 핵정책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기능을 하며, 따라서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비핵국가의 핵무기 개발 욕구를 자극할 뿐이다. 그러므로 NPT체제는 반핵(反核)을 염원하는 세계 인민들의 요구를 실행하는데 근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핵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50년대 이후 미국의 핵정책의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 미국이 그동안 한반도에 가해온 핵위협의 실체를 파악한다면 오늘날 미국이 제시하는 핵문제 해결책이 왜 궁극적으로 위선적일 수밖에 없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냉전시기 동안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할 계획을 구축해왔음을 밝히며, 왜 북한은 자신의 핵무기개발 계획 포기와 함께 미국의 핵무기 위협 및 사용의 중단을 확실히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가를 검토한다.
한국전쟁과 미국의 원자폭탄 계획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가 즉각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핵무기를 통해 어떻게 우위를 확보할 것인가 또는 도래할지도 모르는 세계적인 규모의 전면적인 핵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미국 국가안보위원회 일부 의원은 소련과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A-데이(원폭공격일)의 예상일을 1952년으로 앞당겨야 한다고 곧장 주장하는가하면, 트루먼 대통령은 핵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원폭부품을 대서양 건너 영국으로 실어보내는 것을 비밀리에 승인했다(전후 최초로 핵무기의 해외 반출이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할 것이냐를 구체적으로 처음 검토한 것은 1950년 11월이었다. 맥아더가 삼팔선을 넘어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대공세를 취하고 중국군이 참전하게 되자, '크리스마스는 본국에서'라는 맥아더의 구호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 전쟁은 확대일로를 걷게되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맥아더 사령부는 "적국의 계속되는 군사적 개입을 위축시키거나, 한국에서 유엔군의 철수를 돕기 위한 요인으로서 원폭의 사용 가능성"을 정부에 건의해줄 것을 비밀리에 요청하였다. 또한 미국 내에서는 소련에 대한 '예방적' 공격의 필요성을 공공연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예방적 공격을 주장하는 논리는 간단했다. "소련이 핵강대국이 되는 것을 막는 수단으로서 예방전쟁이 부도덕한 행위인가. 아니면 전제주의적 독재체제가 자유세계를 파괴할 수도 있는 수단을 개발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부도덕한가?" 그리하여 트루먼 대통령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블라디보스톡, 봉천, 북경, 상해, 여순, 대련, 오데싸, 스탈린그라드 등 소련과 중국의 모든 주요 도시와 항구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계획을 진지하게 검토기에 이른다(1952년 1월).
하지만 트루먼은 중국을 공격하는 계획을 결국 포기하였다. 여러 정황 요인이 존재했다. 한반도에는 원폭을 통해 결정적인 효과를 볼만한 군사목표가 별로 없다는 점(이미 모두 파괴되었다는 점), 미국의 핵공격을 (소련의 보복공격을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가 반대했다는 점, 부산이나 일본에 대한 소련의 보복 공격이 가해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결정적인 이유는 중국을 공격하는 것이 미국의 핵보유고를 급속하게 고갈시킬 위험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미국 내에서 새롭게 마련되고 있던 '셰이크다운(Shakedown)'이라는 전쟁계획의 수행을 어렵게 만들 수 있었다. (이 계획은 미국의 원자폭탄 생산능력의 급격한 향상에 힘입었다. 미국은 1개월에 여러 개의 원자폭탄을 생산할 수 있게 되자 수백 개의 원자폭탄으로 소련을 총체적으로 파괴하는 계획을 세웠다.)
1952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트루먼에게 해임되었던 맥아더는 다시금 원자폭탄 투하의 필요성을 건의한다. "적군의 집결지들과 북한 내의 시설들에 원폭을 투하하고 압록강에서 남쪽에 이르는 주요 보급로와 통신망을 봉쇄하기 위해 적절한 방사능 물질을 뿌리며 한반도 양쪽 해안에 육·해군을 상륙시키자"는 것이었다. 즉 수백 년에 걸쳐 북한과 남한을 단절시키게 될 원폭폐기물로 이루어진 치명적인 '방사능지대'를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게다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될 무렵 펜타곤은 280mm 곡사포로 발사될 수 있는 축소형 원폭인 마크IX와 W-19를 개발한다. 따라서 새롭게 개발된 전술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유럽에서 벌어질 셰이크다운 계획(전면적인 핵전쟁)에 필요한 핵무기 비축량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전술핵무기 개발을 주도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핵전쟁이 국지전으로 봉쇄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전면적인 핵전쟁의 위험성을 더욱 확대한 결과를 낳았다.) 또한 미국은 1952년 10월 소련보다 먼저 수소폭탄 시험에 성공한다.
그리하여 미국 합참본부는 결국 한반도에서 핵무기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1953년 1월 로스알모스의 원자력연구소에서는 한국에서 사용하기 적당한 핵무기 실험에 성공하였다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953년 5월 미국 합참본부는 <한국의 상황과 관련된 작전과정(분석)>이라는 극비보고서에서 "만약 휴전협상이 실패하고 해결을 보기 위하여 전쟁을 확대하기로 결정된다면" 그 때에는 원폭이 사용되어야 하며, "원자폭탄의 광범위한 전략적 및 전술적 사용이 최대의 기습과 최대의 충격"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도 이 보고서를 승인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전후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1968년 1월 미국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 바다에서 활동하다가 북한 해군에게 나포되는 극히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당시 남한에 주둔해 있던 미군 신예 팬텀기 부대가 푸에블로호의 SOS를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왜 SOS에 응하지 않았는가를 미국 의회에서 조사하는 가운데 중대한 사실이 드러났다. 신예 팬텀기들이 전술핵무기를 장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출격할 수 없었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만약 이들이 출격할 경우 한반도의 위기상황이 극도로 고조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당시 출판된 기사에 따르면 남한에는 12대의 팬텀 F-4전투기가 있었으며, 이 중 절반은 중대한 위기 시에 즉각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경계태세에 있었고 나머지는 이 전투기들이 고장을 일으켰을 때 그것을 대체하기 위해 대기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남한에 미국의 핵무기가 배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사시 즉각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기 위해 상시 경계태세에 돌입해 있었다는 사실을 미국 정부가 간접적으로라도 처음으로 인정하는 계기였다.
냉전시기 동안 미국 정부는 어떤 지역에 어떤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느냐의 여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NCND)의 정책으로 일관했다. (1988년에도 슐츠 미국무장관은 정당총재들과의 대담 자리에서 한 야당총재가 우리 영토에 미국의 핵무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라고 요구하자, 미국 정부의 '전략적 입장과 원칙'이라며 확인을 거부했던 유명한 사건을 상기할 수 있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는 "상호합의에 의하여 북미합중국이 그 육해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인접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북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국 정부는 어떤 무기를 언제 어디에서 들여오는지 물어볼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한반도에서 핵무기 사용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미국 정부에 있으며, 따라서 한반도에서 핵무기 사용 결정은 15개국과 협의해야 하는 유럽보다 훨씬 용이하다(1983년 미국 전 합참의장 에드워드 마이어 장군의 발언).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핵무기 문제에 대해 남한은 전혀 '무권리' 상태인 것이다.
미국은 1960년대 소련과의 핵전쟁계획을 마련하는데 분주했지만, 한편 제3세계 분쟁지역에서는 상대방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해서도 핵을 사용할 의사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베트남전 패배의 여파로 미국은 한반도에서 핵 의존도를 높이는 방향을 선택했다. 1975년 당시 미국 국방장관 슐레진저는 "어떠한 선택도 배제하지 않는다"라면서 한반도에서 핵을 계속 보유할 것이며, 북한에 대하여 불특정한 공격에 핵공격으로 보복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이는 1976년 북한을 가상의 적으로 하는 팀스피리트 한미합동훈련의 개시로 구체화되었다. 1976년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두 명의 미군이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B-52 폭격기를 DMZ까지 비행시키는 작전을 감행하여 북한에 대한 위협을 가했다. 그 후로 미국은 B-52의 모의 폭격비행을 월 1∼2회 실행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1977년에는 카터 대통령과 브라운 국방장관은 한반도에서 핵 선제공격 원칙이 미국의 정책이라는 점을 거듭 밝혔으며, 1978년에는 팀스피리트 훈련 중에 핵공격능력을 갖춘 렌스미사일을 배치하였다. (1976년에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 총수는 F-4전폭기, 야포, 지대공미사일, 지대지미사일, 핵지뢰를 합하여 최소한 총 600-700개로 추산되었다.)
1990년대 북한의 <한반도비핵화선언>과 <핵안전협정> 서명
북한은 1950년대 초반 소련과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면서 핵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은 소련의 핵연구소에 과학자를 파견하였고, 수년 후에는 영변에 원자력연구센터를 설립하였다. 소련에서 0.1MW 임계시설과 2 MW IRT-2000을 구입하여 영변에 설치하였으며, IRT-2000은 1965년부터 가동되었다. 또한 북한은 소련의 기술 지원과 자체 연구를 통해 자력으로 5 MWe 흑연로를 영변에 건설하여 1987년부터 가동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북한이 어느 시점에서 핵무기 개발을 결심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1970년대 미국이 남한에서 핵무기 의존도를 높이며 팀스피리트 훈련을 개시하고, 남한의 군사비 지출이 월등해지며 박정희정권이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섰던 1970후반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1991년 가을 미국 부시정부가 남한에서의 전술핵무기 폐기를 선언하면서 북한은 핵개발 정책을 수정한다. 북한은 1991년 말 남북기본합의서 서명했으며, 핵무기뿐만 아니라 재처리시설도 포기하는 남북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책에 관한 선언>에도 서명했다. 1992년 신년사에서 김일성 주석은 "북한은 핵무기개발의 능력도 의사도 없다"고 밝혔으며 플루토늄을 추출해내는 재처리 시설로 의심받아온 방사화학실험실 건설도 중단했다. 1992년 초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전면안전협정을 체결했다. 1992년 5월부터 국제원자력기구는 가동중이거나 건설중인 16개 핵시설에 대한 사찰활동을 시작했다. 이에 준하여 1992년 미국은 팀스피리트훈련을 중단했다.
하지만 1992년 가을부터 핵사찰의 범위와 수준을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간에 첨예한 갈등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10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서는 1993년부터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북한이 IAEA의 핵사찰을 협조적으로 진행했고 앞으로 거부할 뚜렷할 의사를 밝히기도 전의 상황이었다. IAEA는 핵폐기물을 은닉, 저장하고 있는 2개의 미신고시설이 있다고 주장하며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이 평화적 핵이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며 1993년 3월 팀스피리트 강행하며 주한미군 2단계 철수를 동결했다. 북한은 1993년 NPT를 탈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발생한 것은 단지 두 곳의 '미신고시설'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발생했던 갈등에 기반을 둔다. 북한은 핵무기계획을 폐기하면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했지만, 1992년 4월 미 국무부는 사실상 이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즉 '북한과 미국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핵문제해결, 남북한 관계개선, 미군 유해 송환, 테러 포기 등 지금까지 요구해온 조건(이른바 솔로몬의 5개항)과 함께, 탄도미사일과 미사일 수출 중지, 인권상황 개선이라는 두 조건을 북한 쪽에 추가로 제시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핵무기 위협도 중단되지 않았다. 1992년 12월에 발표된 <한반도비핵화선언>은 한국에 의한 핵무기의 제조, 보유, 배비, 저장, 사용을 금하고 있을 뿐 외국 핵무기의 한국 내 반입이나 사용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따라서 북한은 특정지역내의 '관계국가'의 핵무기의 생산, 실험, 보유, 반입을 공동으로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처럼 한반도비핵화선언이 미국의 핵무기 위협이나 사용에 전혀 제약을 가하지 못했고, 이는 미국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미국은 이 시기 동안에도 괌 섬의 공중전술핵무기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핵우산을 유지하며 유사시 핵무기를 사용하는 핵선제사용 옵션을 한반도에서 유지한다는 정책을 누차 확인했다. 따라서 북한은 NPT 복귀만으로는 핵위협의 중단이나 관계개선 요구를 실현시킬 수 없었고, 따라서 제네바합의 형식으로 이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잡으려 한 것이다.
NPT 체제의 양면성
NPT는 1968년 7월 UN에서 채택되어 1970년 3월에 발효하였다. 이미 1966년 후반부터 미소의 타협이 진전되어 1967년 초에는 미소간에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소 초안의 심의를 맡았던 제네바 군축위원회에서 비핵보유국이 특히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핵의 평화적 이용도 금지된다는 점, 핵보유국의 핵군축 의무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점, 비핵보유국의 핵활동에 대한 사찰이 자주권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점, 비핵보유국의 안전보장에 문제가 있다는 점, 기한 25년이 너무 길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수정된 안의 특징은 NPT는 군사적인 목적의 핵무기 생산은 억제하고 평화목적의 핵활동은 장려한다는 이중적 구조를 취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평화적인 목적과 군사적인 목적은 핵기술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를 감시하기 위한 사찰제도를 도입하였다. 또 하나는 핵보유 여부에 따라 핵보유국과 비핵보유국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조약 의무를 부과한다는 점이다. 핵무기보유국은 '수직적 비확산'이라고 하여 비핵무기국에 대하여 핵무기를 이양하지 않을 의무를 지며 단계적으로 핵무기를 축소할 약속을 하였다. 비핵무기국은 '수평적 비확산'이라고 하여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고 핵무기국에서 수령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결국 미국, 소련 등 5개 핵보유국은 기존의 핵기득권을 허용 받게 되었다.
하지만 비핵무기국이 제기한 문제점들은 대부분 유지되거나 공허한 약속으로 그쳤다. NPT의 실질적인 불평등성은 논리상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드러났다. NPT는 핵무기국이 단계적으로 핵군비를 축소한다는 약속을 이행하며 핵공격 위협을 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비핵무기국이 핵의 '평화로운 이용'을 위한 공평한 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논점도 있으나 이는 반핵이라는 오늘 논의에서 부적절하다.) 단편적으로 핵무기국의 핵무기 제조과정은 IAEA의 사찰 대상이 전혀 될 수 없는 형편이다. 비핵무기국가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잣대로 생각해본다면, 미국의 첨단 핵무기 제조 과정 역시 인류의 핵무기로부터의 안전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부시정부가 최근 발표한 <핵태세보고서>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도 선제 핵공격을 가할 수 있으며 그 명시적인 대상의 하나로 북한을 지목하고 있다. 또한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 핵무기를 개발하고 전략핵무기의 보유 상태를 혁신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이는 2000년에 열렸던 NPT 6차 평가회의에서 핵무기의 완전한 제거를 합의했던 것과 양립 불가능하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NPT체제의 결함을 극적으로 확대한다. (또한 북미 제네바합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쟁점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핵무기개발을 원하는가?
따라서 북한이 NPT체제로 복귀한다고 해서 그 안전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제네바합의는 북한이 미국이 상호 실천해야 할 내용을 명문화하였다. 즉 미국과 북한이 한반도비핵지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은 자신의 핵무기 위협 또는 사용을 중단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보증하며 북한은 한반도비핵지대화선언의 이행을 단계적으로 실행한다는 점을 동시에 약속하였다. 또한 북한의 영변지역 핵시설에 대한 동결과 함께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희망은 클린턴정부 동안 실현되지 않았다. 제네바합의는 북미간의 그야말로 '합의'일 뿐이며 어떤 구속력을 갖지는 않았다. 클린턴정부는 제네바합의이행을 고의적으로 방기함으로써 북한의 희망을 묵살했다. 물론 클린턴정부는 동아시아 전략을 고려하며 북한의 '개혁'보다는 '안정성'을 선호했으므로, 집권 말기 페리보고서를 작성하며 사태의 수습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페리보고서는 북한을 무리하게 압박하여 예측불가능한 위기가 도래하는 것보다는 대화를 통한 현상유지를 바탕으로 북한의 핵-미사일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가는데 초점을 맞췄다. 이에 반해 현재 부시 정부는 '반테러전쟁'을 거치며 "매파 개입"(hawk engagement)으로 노선을 전환하는 중이다. 북한과의 갈등을 유발해 북한의 "정신적 타락"을 부추기고 북한의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잠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미국을 모방하여 군사적 대결구도를 증폭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크게 높일 뿐만 아니라, 북한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경쟁의 회오리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전쟁을 거쳐 50여 년 동안 한반도에서 핵무기 위협을 가한 미국의 정당성을 그 아래로부터 허무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사후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게 될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농축우라늄 기술을 개발한다는 미국의 의혹을 시인한 후 이 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위해 '북미 불가침조약'을 체결할 것을 촉구했다(동시에 북한은 "미국은 1957년 6월 신무기의 반입을 금지한 정전협정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 남조선에 핵무기를 끌어들이겠다고 선포"하고 미국이 북한을 핵으로 위협하면서 한반도 핵문제가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역사적인 핵위협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반도 핵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와 같은 방식으로 북한에 당장 군사적 위협을 가하지는 않되 동시에 대화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미국은 북한과 대화를 진행할 경우, 왜 이라크와는 대화하지 않느냐는 국내 여론이 형성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결국 미국은 핵위협과 핵사용을 통한 '승리하는 핵전쟁'이라는 동일한 일방주의적 원칙과 NPT체제의 위선적인 활용을 통해 북한과 이라크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PSSP
<참고자료>
이영희·임재경 편, {반핵: 핵위기의 구조와 한반도}, 1988, 창작과비평사
이삼성, [북미합의 이후에 대하여],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 1995, 당대
황영채, {NPT, 어떤 조약인가}, 1995, 한울
한국원자력연구소 원자력통제기술센터, {북한핵문제와 경수로 사업: 북미기본합의 5년에 대한 기술 평가}, 1999, http://www.tcnc.kaeri.re.kr/ebooks_k.htm (2002.11.1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