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평의회와 국가
4. 노동계약, 위기, 그리고 조직화
평의회 운동 및 평의회 이론가들에게 제기된 가장 심각한 비난들은 노동 이데올로기다, 공장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다, 프루동주의다 라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마르크스는 끝까지 프루동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했을 것이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다. 혁명적 과정 동안 상품으로서 노동을 폐지하려는 객관적인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러나 이것은 이행 국면을 제거할 것이다) 혹은 노동을 모든 상품에 대한 일반적 등가물로 변형시키는 것이 분명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이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본의 점진적인 사회화를 사회주의와 혼동했기 때문에 비난했다.84) 노동력의 비용과 사회적 노동의 가치를 매개할 하나의 근본적 요소 속에서 화폐의 금으로, 노동화폐로의 점진적 변형은 경제학의 역사적 장에 서술된 바는 없지만, 두 상쟁하는 계급들 간의 권력관계
의 진동하는 사건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자본의 발전 사에서 자본이 노동계급운동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통제하고, 노동대중에게 이데올로기적-제도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을 때에만 취하는 자본의 필수적 경로이다. 이 때 형태 지배의 물신화된 표현으로서 화폐는 자본과 노동의 교환에서 ― 국가의 통제기능의 출현과 관련하여 ― 문제시되지 않는, 권위주의적인 중재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오직 이때에만 화폐와 임노동의 교환은 경향적으로 총체가 된다. 다시 말해 형태의 헤게모니는 "현실의 추상"(법률적 추상과 실질적 포섭 간의 이분법 속에서 표현되는) 과정 속에서 분리를 실행한다. 한편으로 생산자들은 "시민"(이를 통해 계급의 종별성은 보편적 평등으로 용해된다)으로 변형되며,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모든 시민들을 생산자로, 수행된 사회적 노동으로 측정된 소득의 수령자로 변형시킨다.85) 노동(공장의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적 노동으로 이해되는)에 대한 통제와 명령은 화폐적 안정성의 결정적 요소이자 유일한 보증자가 된다. 뮐러와 도위믹이 바라마지 않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공동체는 오직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통제 하에 있는 이러한 아주 일반적인 도식을 예견하고 배치할 때만 구체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권위주의 국가" 형태의 제도적 수준에서 표현되는 자본의 당연한 지배 신호 하에서 뉴딜부터 오늘날까지 작동해 왔다.
독일에서 1921년과 1923년 사이의 기간에 평의회 운동은 종종 이러한 역전을 수행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마르크의 붕괴 기간 동안 화폐와 노동을 연결시킴으로써 ―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복합적인 사회-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제도적 상호관련이다 ― 양자를 평행하게 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은 프루동에 친화적인 운동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케인즈86)를 예상하는 것, 즉 자본주의적인 반격에 대한 예상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 내에서 정치의 사실상의 우위를 실현하는 데 진정한 장애물로 드러났던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분리를 피함으로써 그
과정에 대한 보편적인 사회적 지도의 계기를 실천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미 지적되었듯이, 루드비히는 노조와 평의회 각각의 임무들을 반복하여 말함으로써, 평의회 이론가들이 제안한 노조의 "혁명화" 계획을 공격했다. 노조는 주어진 생산관계의 영역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수한 이익들 ― 상이한 업종과 "숙련"에 따라 분할되는 ― 을 대표하며 실천을 통해 자본이 지배하는 영역의 오직 극한까지만 이끌 수 있다. 반면 평의회는 이미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이동한 프롤레타리아의 대항권력 기관이었다.87) 그러나 도이믹과 뮐러가 제기한 문제는 독일혁명에 종별적인 실천적이고 조직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모호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본주의적 위기의 심화와 더불어 주체성이 혁명적 성장의 결정적 요인으로 출현했다고 경고했다. 적절히 해석하면 평의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임금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권력관계
를 조절하는 노조의 특권을 문제삼기 위해 스스로를 정치적 역량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다
시 말해 그것은 신생공화국의 불확실한 권력 균형을 지탱해 온 1919년 6월 뉘른베르크 노조
대회의 신중함을 폭발시키는 문제였다. 노동계약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헤게모니와 영토에
대한 자본주의적 힘의 거의 총체적인 지배 ―전적으로 분해된 중간 계급들의 자금과 처분권
을 여전히 통제할 수 있었던 금융 메커니즘에 대해 이러한 힘들이 행사한 통제에 의해 가능
하게 된 지배 ― 간의 권력과 중재의 결정적 지점들 중 하나였다.
1923년 위기의 전야에 칼 코르쉬는 공장 통제에서 영토에 대한 헤게모니(봉기주의적 지름길 뿐만 아니라 사민주의적인 "권력으로의 도정" 역시 비현실적인 것으로 판명된 이상)로의 이론적이며 조직적인 도약을 위해 노동조직과 노동계약과 같은 근본적 개념들에서 출발했다. 공장평의회를 위한 노동입법을 다룬 1922년의 글들에서 평의회에 관한 이론은 1919-1920년의 글들에 여전히 현존하던 급진 자유주의적 전통과의 최종적 연계를 절단한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코르쉬의 평의회-노조 기획의 기초를 이루는 반(反)국가주의를 없애기는커녕 보다 강화했다. 공장 문 안에 있는 루소적 자유들은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부상한 배경이 된 계급 현실들을 배신했다. 이것의 전형적 사례는 노동의 자유였다. 정확히 이 자유의 적용(파업 파괴)은 그것이 임금을 낮추기 때문에 보편적인 계급 이익을 거스르게 되었다. 따라서 이 "자유"를 거부하는 것은 계급적 연대를 위해 필수적이었다. 헌법이 공장을 등재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계급적 이익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노동계약은 노동자가 자신의 자유를 임금과 교환하여 상실했음을 의미했다.88) 그러므로 "산업 민주주의"의 확장은 오직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체계 자체를 기초짓는 노동계약을 자신들의 중심적 투쟁으로 배치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산업 민주주의와 노동계약은 공장 안에서 서로 대립했다. 자유로운 노동계약의 법률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형태가 지속되는 한, 평의회들은 착취의 결정적 형태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노동계약은 공장 안에서 게토화된 노동자 계급과 시민사회 사이의 제방이다. 코르쉬에 따르면 위기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반적인 물질적 이익들을 대표하는 것은 그 제방을 부수는 것 ― 바이마르가 승인한 입헌적 합법성을 파괴하는 것을 함축했다.89) 이행 과정을 관리하는 새로운 임무와 관련하여 노조 조직화의 지배적 형태인 "숙련 연합"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조직의 요구에 부적합해 보였다. 노조는 "숙련 연합"에서 "산업적 연합", 즉 개별 노동자의 "숙련" 자격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오직 특정한 공장이나 산업 조직에의 소속에 근거하여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혁명화"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변형은 또한 노조와 평의회간의 관계를 심원하게 변화시킬 것이었다. "공장평의회는 이제 더 이상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계급사회 안에서 '노동의 판매자'의 생활조건 방어 투쟁을 벌이는 노조의 단순하고 순수한 '보조 조직'이 아니라 아직은 계급의 적의 손아귀에 있지만 혁명적 투쟁을 통해 탈환되어 통제 및 결국에는 경제적·정치적으로 조직된 노동 계급의 배타적 관리 하에 두어야 할 기업과 산업분야들에 노조가 발판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전진적 위치'가 되어야 한다."90) 따라서 그것은 코르쉬에게 있어 노동 계약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 계약"을 산출하는 문제였다. 이번에는 국가의 입헌적 정점에서부터가 아니라 공장의 세포조직으로부터 시작하면서 말이다. 이번에도 그는 역시 (그의 소연한 정치적·이론적 발전 속에서 종종 그랬듯이) 정치 이론에서 조직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해결책에 관한 핵심 요점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그의 특출한 경험주의를 통해 그가 이해한 결정적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방법론적인 핵심이 없는 채로 그는 그것의 중요성에 거의 다다랐다. 공장 차원의 전략적 속성에 대한 강조(사민주의 내에서 암묵적인 위로부터의 정치에 대한 염려를 고려할 때 역사적으로 이해할 법한)는 그로 하여금 형태 지배의 사회적으로 총체화하는 특성, 상품의 물신숭배로부터 전혀 독립적이지 않으면서 재생산의 일반 과정에 대한 국가의 실재적 연관을 표현하는 동시에 은폐하고 신비화하는 법률적 추상의 복합적 구조에 눈멀게 했다. 결과적으로 코르쉬가 루소의 "사회계약"과 마르크스주의적 "시민사회" 개념을 종합함으로써 오히려 가치 이론 및 위기의 이론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1923년의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코르쉬의 평의회 이론은 국가와 정치의 문제(이행적 국면에서 중심적 지위를 점하는 경향이 있는)를 단순한 "외양"91)으로 폄하했는데, 당시 공산당은 유사한 내적 분할92), 의도에 관한 동일한 혼동, 그리고 당이 1921년 "3월 봉기"을 수행할 때와 동일한 전술적·전략적 준비부족 상태 속에서 태풍의 눈에 진입했다. 그럼에도 1923년 5월에서 11월까지 평의회 운동은 평의회 이론가들이 위기의 와중에 기대했었던 가장 낙관적인 것보다 더 성취하는데 성공했다. 즉 그것은 대규모 파업의 조직화에서 노조 지도부를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93) 일반화된 사회적 위기의 상황은 노동운동에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켰다.94)
노조 안에서, 평의회 이론가들이 제안한 그 어떤 것보다 더 불안정하고 급진적인 혁명이 발생했다. 노조 기부금의 가치를 소멸시킨 인플레이션은 조직의 모든 보조적이고 보복적인 능력을 박탈했다. 더욱이 인플레이션은 노조의 모든 계약적 권력을 빼앗았다. 고용주들과 함께 작성한 임금 계약은 급속한 통화가치 절하로 인해 불과 며칠 사이에 효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 노조의 탈퇴와 독일사민당(SPD)의 마비가 이어졌다.
사민주의의 실패는 계급에 기반한 정치적 기획을 정교화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리고 노조 전술에의 전적인 의존을 확인시켰다. 가장 거대한 서구 노동당이었던 것이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자율적인 조직적 수단들에 대한 스스로의 무관심과 적대감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기 시
작했다. 1923년에 평의회는 선거와 반란의 실패 후 다시금 그것의 생명력과 유효성을 증명했다. 쿠노(Cuno) 정권95)에 대항하여 평의회가 조직한 정치적 총파업은 그 운동의 정점을 표상했다. 정권은 퇴진해야만 했다.
위기의 시기 동안 투쟁의 발전은 노동계약의 법률적-부르주아적 형태 및 제도적 틀 내에서의 상대적 균형에 대한 평의회의 공세라는 코르쉬의 가설을 확증하는 듯 했다.96) 임금 조정과 일상적인 계약협상들의 사례들에서처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종속이 끝나자, 화폐 체계의 위기는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 지속되지 못하는 정치적 위기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낡은 물물교환 체계가 짧은 기간 동안 상품 유통에서 화폐를 대체할 수 있었지만, 자본과 노동의 "등가 교환"에서 화폐-형태를 대체할 수 있었던 물물교환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품을 수단으로 한 상품생산"은 치명적으로 교란되었다. 마르크스가 {요강}에 썼던 것처럼 "부르주아 사회의 기본적 전제는 노동이 무매개적으로 교환가치, 즉 화폐를 생산한다는 것이다."97) 자본주의 체계의 종별적 산물은 화폐형태를 취하는 가치이다. 자본주의 체계의 전반적인 정치적-제도적 틀의 기초를 흔드는 것은 정확히 화폐형태와 위기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독일의 노동 계급 편에서의 진정한 "동궁(冬宮) 점령" 이 객관적으로 지척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적 질서는 재수립되었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교환메커니즘, 화폐형태의 복권, 그리고 이것들에 의한 (재)생산 과정에 대한 어떤 통제와 관련해서도 국가와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대안적인 사회 정치적 방향의 문제는 진동하는 이행 국면을 뚫고 나아가기 위해 이러한 용어들로 의제에 놓였어야 했다.
그러나, 1921년 "3월 봉기"에서처럼,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적인 정치적 대안 속에서가 아니라, 기괴하고 파멸적인 함부르크 봉기98) 속에서 동궁을 얻으려 했다. 함부르크 봉기는 국가장치의 개조의 시작과 동시에 일반적인 자본주의적 반격의 시작을 특징지었다. 다른 수준에서 볼 때, 계급 운동과 정당 양자 모두 그들이 파악하지 못한 내재적 논리를 지닌 사건
들의 폭발적인 핵심 부분이었다. 경제적, 정치적 현실로 인해 당과 대중운동은, 새로운 혁명
적 전망을 결합하고 산출하는 것처럼 보이는 매 시점마다, 각자의 "영역"으로의 고립되고 헛된 "이데올로기적인 휴식처"로 내몰렸다. 그러나, 이들 이데올로기를 후진성의 순수하고 단순한 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일 것이다. 후진성은 독일 혁명의 실패가 궁극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용어인 것이다. 종종 "노동(자) 이데올로기"로 잘못 정의된 것을 통해, 독일의 노동자들은 이미 자본의 주도권에 의해 제거된 전문적인 계층화보다는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조건들과 스스로의 객관적인 정치적 가능성("정치적인" 것과 "사회적" 수준을 연결시킬 수 있는 대안적인 대중 조직의 부재 속에서)을 표현했다.99) 물론 "생산력주의"와 "자기관리"는 오늘날 납득할 수 있는 모호함과 의혹을 유발하는 용어들이다. 그러나 본질적 모순 및 이데올로기적 결점뿐만 아니라 서방 노동운동사에서 전례가 없는 권력에의 의지와 능력을 표출했던 계급적 요구와 조직적 형태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독해를 통해 현재의 위험을 몰아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100) 1920년대 독일에서, "통제"와 "자치"는 생산과정의 실현과 계획을 관통하고 다른 사회 집단들에 대해 헤게모니 계급으로 강화되어 생산과정으로부터 출현하고자 하는 노동 계급의 의지를 표현했다. 평의회운동은 이같은 야심찬 전망 속에서 운영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정치학과 조직이론으로 변형하는 것은 불가피한 만큼이나 어려운 시도였다.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의 견지에서뿐만 아니라 ― 레닌 스스
로 지적했듯 ― 전체 국제 노동운동에 대해서 말이다. 이 기획에 대한 대안은 확실히 "최소강령으로서 공산주의"가 아니라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이었고 뉴딜이었으며 나치즘이었다.101)
이 시점에서, 독일 노동운동이 1923년의 결정적 해에 노동, 화폐, 분배와 수입에 대한 현실적인 정치적 통제력을 발휘했을 실질적인 가능성에 대한 냉정하고 엄격한 분석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는 여기에서 다뤄질 수 없는 자료들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잘 알려진) 몇 가지 주된 요소만을 제안하는 데 그칠 것인데, 이것들은 본 작업의 맥락 안에서 전통적으로 그것에 부여되어 왔던 것과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1) 위기의 혹독함에 비하면, 실업자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1930년 당시 6,000,000 이상에 비해 약 600,000 정도. 그러므로 상품의 가격결정에서 결정적 요인은 주로 가변적이고 非고정적 자본인 노동자들의 노동이었다.102) (2) 마르크화를 안정화하려는 전략적 조치 속에서 중앙은행은 아래로부터 시작된 질서를 재구축했다. 그것은 더 이상 사적으로 발행된 화폐의 유통을 승인하지 않았다.103) (3) 그리하여 더 이상 중앙의 권력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산업자본가들은 점차로 상점과 공기업에서 통용되는 화폐 교환권을 발행함으로써 현장에서(in loco) 노동과 자본간의 교환을 조절해야만 했다. 화폐가 지나치게 폭락했기 때문에 관성적으로 노동자의 수중으로 떨어질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4) 자본가들은 즉시 이 같은 현상에서 잠재적인 위험을 알아차린 반면, 전반적으로 노동운동은 그들이 접수할 수도 있었던 사회적·정치적 틀을 통제할 수 있는 지렛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치경제학 비판은 당의 편에서 어떤 혁명적 기획으로부터도 엄격히 금지됐다.104) (5) 외국 통화에 대한 마르크의 조절에 관한 한, 중앙은행은 힐퍼딩의 오랜 공식을 따랐다: 1 달러 대 42억 마르크. 패배하고 거부당한 국가로서 독일은 이런 식으로 명백한 자본주의적 체제를 가지고 민족들의 공동체에 진입했는데, 이로써 구제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였다. 독일은 두 가지 가능한 길 중 하나로 거칠고 지난한 "이행 국면"을 해결했다.
5. '마르크스로의 회귀'와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위기': 바이마르에서 뉴딜까지
1920-1930년 "위대한 민중 혁명을 위한 모든 요인들"105)이 독일에서 재등장했을 때, 계급운동과 노동조직 사이의 간극은 매우 심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동적인 최후 몇 년 사이에 노동운동의 비극은 정확히 그 과정을 밟았고 사회 경제적 이론에 유용한 지표들을 제공했다. 제국주의와 붕괴에 관련된 프리쯔 스턴베르크(Fritz Sternberg)와 헨릭 그로스만(Henryk Grossmann) 간의 논쟁을 고려해 보라. 특히 자본주의 발전에 내재한 모순에 관한 분석을 정치경제학 비판에 근거하여 범주적 구조와 재연결하려는 그로스만의 방법론적 시도를. 또한 프리드리히 폴록(Friedrich Pollock)106) 같은 경제학자들이 수행한 소련과 "계획 경제" 같은 위기의 형태학에 관한 여러 작업, 혹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처럼, Zeitschrift f r Sozialforschung에서 Archiv fur die Geschishte des Sozialismus und der Arbeiterbewegung의 칼 그륀버그(Carl Grunberg)와 함께 20여년 동안 중요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온 사회철학자들의 근본적 분석들 역시 고려해보라. 이들 작업의 유효한 "분리"를 단순하게 비난함으로써 이것들을 쓸모 없는 현학적 작업으로 기각하려 드는 것은 난폭할 뿐만 아니라, 진부하다.107) 이들 작업의 "분리"는 사람들이 말하듯 그들의 '학문적 습성' 때문이 아니라, SPD와 KPD 간의 점증하는 분열이 야기한 정적 도식주의에 사로잡혀 이론과 운동의 관계에 치유할 수 없는 분열을 낳은 노동운동의 일반적인 정치적 파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뒤이어 스스로 이론적 반성으로 움츠러들었다.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방법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기반성이 초래된 것이다.108)
"평의회 좌파"의 관심이 전에는 생산과정 내에서의 자기-조직화에 놓이면서, (코르쉬의 예에서 봤던 것처럼) 위기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간과했다면, 이제는 정반대다. 위기와 체계의 붕괴로 이어지는 경제 법칙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특히 당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 그로스만의 작업에서) 노동과정의 분석과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자주-관리 테마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경향이 운동의 정체(그리고 이후의 결정적인 패배)가 초래한 수동적 태도, 즉 "경제주의적" 혹은 "파국론적" 변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강력한 방법론적 자각에 의해 지지됐다.109) 축적의 법칙과 자본주의 체계의 붕괴에 관한 주요 작업에서 그로스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마르크스 작업의 위대한 의미는 정확히 그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든 현상을 가치법칙에서 출발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110) "붕괴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 위기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 전제고, 위기이론은 내재적으로 붕괴이론에 연관된다. 양 문제에 대한 해법은 {자본}의 핵심 사상을 구성하는 마르크스의 축적 법칙에 나타나는데, 따라서 가치 법칙에 기초한다."111) 룩셈부르크가 개시한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더욱 견고한 방법론적 기초에 근거를 두었는데, 이는 위기에 관한 일반이론이 수정에 내재하는 위험을 피하도록 했다. 그로스만의 두 가지 근본적 기여는 다음과 같다. 위기 이론을 축적 이론과 가치이론에 직접 연결하고, 범주적 추상 과정을 "분리방법"으로 정의한 것이다. 붕괴 경향에 대한 경제적("객관적") 설명은 실재적 운동의 순수하고 단순한 "반영"으로 제시되지 않고, 범주적 전개의 수준에서 체계의 자기-모순적인 성격에 대한 연속적 근사치112)의 이해라는 추상적 표상으로 제시됐다.
그로스만의 설명 방법론이 가지는 변증법적 성격은 "붕괴 이론"과 혁명적 주체성에 관한 폴 마틱(Paul Mattick)과 판네쿠크(Pannekoek) 사이의 논쟁에서 폴 마틱에 의해 열렬히 옹호되었고, "평의회 공산주의자"의 이론적 기관인 R tekorrespondenz에서 실행되었다. 요컨대 판네쿠크는 그로스만에게 본질적으로 두 가지 비판을 가했다. (그로스만의 작업이) "순수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추론하려 들면서 "인간의 개입과 상관없이"113) 붕괴를 가상한 근거없는 시도라는 것, 그리고 계급투쟁을 "경제주의적 논쟁"으로 환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틱은 분명한 반비판을 통해, 판네쿠크가 어떻게 그로스만의 절차가 갖는 변증법적 성격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는지를 지적했다. 이는 정확히 (판네쿠크가) 스스로 경제학의 제한된(부르주아적) 개념에 갇혔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적인 정치경제학 비판의 방법론에 내재한 변증법은 "대립물들의 종합"이라는 기준의 극히 단순화된 적용 안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을 정의할 수 있는 근본적 계기를 추상적으로 분리하는 데 있다. 따라서 마틱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심지어 그로스만에게도 '순수히 경제적인' 문제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축적 법칙에 대한 분석에서 그는 방법론적 근거로 순수히 경제적인 전제조건 및 따라서 체계의 객관적 한계 지점을 이론적으로 이 해하는 데 이르는 정의로 스스로를 제한했다. 내적 모순으로 인해 자본주의 체계가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이론적 인식이, 실재적 붕괴가 자동적인 과정이며 인간과 독립적이라는 주장을 수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114) 생산과 재생산, 경제와 정치의 상호작용에 의해 정의되는 단일한 맥락은 자본주의 변형이 진행되는 주요 과정에서 핵심이 될 뿐 아니라, 혁명을 조직하는 모든 토론 혹은 기획의 불가피한 객관적 기초로 드러났다.
바이마르 독일에서 벌어진 이론적 논쟁의 마지막 번득임은 독일 공화국이 와해된 후에야 의미가 있게 되었고, 실질적으로 이미 전-유럽의 차원으로 투영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운동의 조직적 문제를 겨냥하거나 그에 맞게 기능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 뉴딜과 전제적인 파시스트 국가의 리바이어던 같은 구조에 직면했다. 이것이 수행된 분석의 주춧돌로서, 이제는 유명해진 Institut f r Sozialforschung에 결합한 일국의 지식인들을 포함하여, 마르크스주의 잡지 International Marxist Correspondence (훗날 Living Marxism 그리고 New Essay라 불린)에서 폴 마틱의 지도 아래 (코르쉬, 륄레, 그리고 판네쿠크를 포함한) 미국과 유럽의 많은 좌익 투사들과 이론가들의 정치적 작업과 연구를 협력, 조정하였다.115) 유럽에서 혁명의 패배 이후, 분석의 "객관주의"는 ― 다소간의 의식적인 방법론적 상대화를 통해 ― 당시부터 진행된 것인데,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는 훨씬 값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의 범주적·분석적 틀 안에서 동일한 동요와 양가성의 움츠림의 표현이었는데, 이는 심지어 1933년 이전까지 노동운동을 자기-파괴로 내몰았던 것이다.
운동이 공세적인 국면에 전술적·조직적 계기를 강조하는 것과 패배에 뒤이어 (자본주의의 발전과 경향들의 국지화에 대한 분석이라는) 과학적·이론적 계기를 강조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결선도 없다. 수립된 관계는 단일하고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전된 것이었다. 하지만 연관이 있긴 하며, 전제주의적 파시스트 국가의 코포러티즘적 특성에 의해 심히 왜곡되고 뒤얽혔다 해도 동일한 측면을 보존했다. 계급투쟁과 제도, "평의회",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 말이다. 독일 노동운동의 파국은 이론과 운동의 재전환 문제를 극적으로 제기했는데, 이는 후세들에게 종별적인 정치적(이고 이론적) 대답에 의해 충족된 종별적인 역사적 요구라기보다 하나의 유령 ― 10월의 비극적 역상 ― 을 남겨 두었다. 1929년 위기를 잇는 경제의 거대한 구조 변형에 직면하면서 노동운동은 오늘날이 되어서야 이 연관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정치경제학 비판과 위기 이론 그리고 (계급의식과 조직에 대한) "구성"의 이론을 결합하는 문제의 종별적인 형태를 가정하기에 이른 것은 그저 우연만은 아니다. 관련된 첫 번째 두 요소들에 관심을 집중하는 가운데, 그로스만과 마틱은 의식적으로 경제 분석의 객관적 측면을 추상적 분석으로(그러므로, 실물운동에 대한 단순한 경험적 기술이 아닌) 분리하면서, 당연한 귀결로 계급의식과 조직의 이론적 문제는 젖혀 두었다. 이것이 그들 노력의 역사적·정치적 한계로 보인다면, 이 문제(계급의식과 조직의 이론적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싸늘하고 황폐한 추상화"를 회피할 수 있는 손쉬운 지름길이 있다고 믿는 것 역시 완전한 환상이다.
만일 방법론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스스로의 "분리"를 의식하고 있는 이론이 무용하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정치의 물질성과 계급 조직의 실천으로 전환될 수 없다면, 이론에 의해 "개념화되지" 않은 실천 역시 혁명을 유발하는 것과 관련하여 완전한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론(과학적이고 분석적인, 맹목적으로 행동주의적이거나 교조주의적이지 않은)과 실천 관계가 통일성을 갖추면,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구걸을 그치고 위기의 위협적 진행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긴급한 역사적·형태학적인 종별성 속에서 출현할 것이다. 마틱이 재도입한116)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 하는 룩셈부르크적 대안은 계급투쟁의 파국적 본질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일련의 이론적·정치적 문제(와 임무)를 알려준다. 정치경제학 비판(자본주의 발전의 분석을 갱신하는)에 대한 일반적 재고(再考)로부터 경제와 정치, 계급투쟁과 제도, 그리고 대중운동의 역사적이고 주체적인 수준에서 벌어지는 실질적 상호작용의 복합성에 조응하는 조직적 형태의 차원으로 말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종합될 수 있다: 정치의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 독일 혁명의 비극적 궤적은 조직의 문제에 대한 실용적 구체화가 어떻게 계급운동 안에서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 주도권과 패배에 종속되는 무기력한 파멸로 귀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극히 밀접한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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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1850년 프루동은 그의 친구 다리몽에게 "사회주의 이념 안에 부르주아지를 위한 어떤 것이 있음을 보여줄 때가 왔다.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사회주의, 이것은 현 시점에서 반드시 완수되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P. J. Proudhon, Che Cos' la Propriet ? (Bari, 1967)에 부치는 Umberto Cerroni의 서문, p. ⅹⅵ.
85) Karl Marx,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 (Berlin, 1953), p. 65.
86) 케인즈의 개념과 프루동의 그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Dudley Dillard, "Keynes and Proudhon," Journal of Economic History (May, 1942)를 보라.
87) 루드비히의 형식은 노조운동과 공장평의회에 관한 코민테른 2차대회의 결의안을 예상했다. Cf. Ⅱ Congress del l'Internazionale Communista (Rome, 1970), pp 51-63 참조.
88) 그리하여 Arbeitsrecht f r Betriebsr le (1922) (Frankfurt am Main and Vienna, 1968)의 32페이지에서 칼 코르쉬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자본} 1권 4장 말미에서 마르크스는 '경제 거래'의 맥락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용어로는, '단순 유통이나 상품 교환의 영역으로부터') 우리가 상점, 공장, 혹은 그 안에서 궁극적으로 실재적 '생산'이나 상품의 창조가 발생해야만 하는 또다른 기업으로 변화할 때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의 변화를 능숙하게 묘사했다; 여기에서 참가자들 간의 관계는 더 이상 자유, 평등, 정의의 이념에 따라 전혀 조절되지 않고, 대신 전혀 다른 양상을 갖는다."
89) 같은 책, pp. 95-97: "[빌헬름 독일에서] 반동적인 기업주는 '기업 외부'로부터 노조 지도자와 교섭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반면, '자신의' 노동 위원회와 교섭하고 싶어했다... 그러므로, 노동 공동-참여에 대한 권리의 직접적 형태가 즉각적인 혁명 과정의 관점에 따라 가정하는 특정한 의미로부터 물러날 때까지, 우리는 '공장 평의회'를 노조 투쟁의 단순한 '보조 기관'으로 엄격히 종속시키려는 노조의 안간힘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오로지 평의회의 특정한 의미를 자본가와 노동자계급 간의 권력 투쟁의 결정적 국면에서의 생산에 대한 통제 기관으로 생각할 때에만, 그리고 평의회를 미래의 사회화된 경제의 책임있는 중심으로 볼 때에만,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는 방식은 전복될 것이다."
90) 같은 책, p. 97.
91) 코르쉬, Arbeitsrecht..., 위의 책, p 39: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투쟁은 이제 다만 외관상으로만 국가 통제(그리고 사회적 삶의 존속하는 상부구조에 대한 통제)를 그것의 목적으로 갖는다: 실질적으로는 경제 즉 노동의 조직화에 대한 통제가 목적이다."
92) 브랜들러의 지도력은 탈만, 피셔, 마슬로로 구성된 당의 좌익 반대파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다. Cf. Hajek, 위의 책, pp. 65-73.
93) 로젠베르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근대 독일의 역사에서, 1923년 여름만큼 사회주의 혁명에 적합했던 순간은 없었다. 평가절하의 소용돌이 안에서 질서, 소유권이나 합법성 따위의 모든 전통적 통념은 사라졌고, 루르 점령 이래 전개된 끔찍한 상황에 대해 사회주의자나 공화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었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형국이 참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전체 체계가 공포 속에서 종말을 맞을 것임을 아주 분명하게 느낀 것은 노동자계급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중간계급조차, 인플레이션 때문에 빈털터리가 된 후, 혁명적 흥분에 젖어들었고 자본가들의 폭리를 최종정산하길 바랬다.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들의 경우 그들 자신 인플레이션의 희생자로서, 현존 체계에 대항하는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대중운동에 대해 거의 역량을 쏟으려 들지 않았다 ― 그러므로 Reichswehr의 군인들이 투기꾼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굶주린 프롤레타리아 동지들에게 발포하려 들었다는 것은 매우 의
심스럽다." Rosenburg, 위의 책, pp. 143-144.
94) 로젠베르그에 따르면, "1923년을 거치면서 SPD의 힘은 꾸준히 감소했고, 당은 1919년의 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위기를 통과했다... 1922년 말까지 새로운 USPD가 여전히 독일 노동자들의 대다수를 사로잡았음에도, 대중들은 급격하게 공산당으로 이동했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반년 동안 관계는 완전하게 뒤집어져 1923년 여름에 이르면 KPD는 의심의 여지 없이 대다수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를 받았다." 같은 책, p. 145.
95) 구노의 중도 우파 정부는 사민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슈트레스만의 정부로 대체되었다. Cf. 로젠베르그, 같은 책, pp. 148ff.
96) 이는 샤흐트 박사의 위선적 관측에 의한 계급적 관점의 이면에 의해서도 입증되는 것 같았다. "1923년 가을에 예상치 못한 화폐의 평가절하가 독일의 사회구조 전체의 붕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정이 나았던 노동자 부인들은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쇼핑을 할 때 그녀들은 마르크화의 평가절하와 보조를 맞춰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남자들이 노동을 통해 번 돈은 심지어 봉급이 그날그날 맞춰지는 상황에 이르러서조차 주부들의 손에서 사라졌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는 평가절하를 중단하고 화폐를 안정화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나는 그같은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유리한 직업과 안정된 지위를 포기했다." Cf. Hialmar Schacht, Account Settled (London, 1949).
97) Marx, Grundrisse, 위의 책, p. 137. 여기에서 우리는 화폐형태의 외관상의 무매개성 때문에 발생하는 유혹을 반드시 뿌리쳐야 한다, 즉 우리는 화폐-위기 관계에 관한 정치적인 혁명적 강조를 피해야 한다. 그것은 화폐-형태의 과잉팽창을 통한 전복적 극복이 가능하다는 환상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화폐적 형태학은 물신숭배 ― 사회적 생산관계에 대한 형태의 지배 ― 의 일반적 문제틀에 연관되어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매개된 방식으로, 정치적 주제를 도입한다. 반면, 같은 페이지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화폐(교환가치) 안에서 개인의 대상화는 자연적 결정 속에서 제시되었다는 의미에서 그의 것이 아니고, 사회적 결정 (관계) 속에서 제시되었다는 의미에서 그의 것이며, 이는 이미 그에게 내재적이다."
98) 함부르크 봉기에 대해서는 A. Neuberg, Armed Insurrection (London 1970) pp. 81-104 를 보라.
99) 1924년 이후에야 자본은 계급구성에서 주요한 변형을 수행할 수 있었다. Cf. Arndt, 위의 책, pp. 32-38.
100) Cf. Olaf Ihlau, Die rote K mpfer.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r Arbeiterbewegung in der Weimarer Republik und im Dritten Reich (Meisenheim am Glan, 1969) pp. 85ff.
101) "금 통화의 포기와 함께, 독일에서는 새로운 통화 체계가 점차로 형성되었는데 퓌러는 ― 중요한 연설에서 ― 그것의 본질이 노동 통화라고 지적했다... 노동-통화의 단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화폐는 민족적 생산에 의해 충당된다. 나는 내가 생산할 수 있는 만큼의 화폐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노동-통화는 금-통화만큼의 안정성을 요구한다. 그것은 민족경제의 질서에 기초한다... 명백하게 신용과 생산, 화폐와 상품
사이의 균형은 노동-통화의 기초적 원칙이 아니다." J. Winschuh, Construzione della Nuova Europa (Florence, 1941) pp. 55-63 참조. 그러나 나치의 노동-통화의 원칙은 Winschuh가 지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했다. 1933년 5월 2일 ADGB에 소속된 "자유노조들"은 해산되었다. 5월 5일 노동전선의 대표 레이는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라이히의 모든 노동력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는 견해를 퓌러에게 표명했다. 나치 하에서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K. H. Roth, Die "andere" Arbeiterbewegung (Munich, 1974) pp. 101-156 를 보라.
102) 1922년은 전후 기간에 가장 낮은 실업을 기록했다. 1923년에 실업이 증가한 것은 주로 프랑스 점령군에 맞서 루르에서 수행한 "수동적 저항" 때문이었다. Cf. G. Albrecht, W rterbuch der Volkswissenschaft, Vol. 1 (Jena, 1931), pp. 171-181. 1924년이 지나서야 구조조정된 공장으로부터 노동자들이 점진적으로 배제되기 시작했다. 1923년이 되면, 독일 자본은 단지 테일러주의의 보다 "합리적"인 사용을 통해 노동에 대한 내포적 착취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테일러주의는 노동자들의 숙련을 단지 감소시킬 뿐이다 ―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노동자 평의회와 테일러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C. Petrid, "Il sistema Taylor e i Consigli dei produttori," in Ordine Nuovo (October 25, 1919) p. 178.
103) Schacht 위의 책, p.7
104) 도즈 플랜(1924년 4월)의 수립 이후 독일에서 미국 자본의 성공적인 투자에 대해서는 Sydney Brooks, America and Germany 1918-1925 (New York, 1925)를 보라.
105) Rosenberg. 앞의 책, p.211.
106) Cf. Giacomo Marramao가 편집한 {Teoria e Prassi dell'Economia di Piano} 선집 (Bari, 1973)에서 선택한 에세이들 참고.
107) 이들 피상적이고 조급한 자세는 N. Moszkowski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Sergio Bologna에 의해 옹호되었다. Per la Critica delle Teorie Moderne delle Crisi(Turin,1974), p.v.
108) Cf. Giacomo Marramao, "Political Economy and Critical Theory," Telos, 24 (Summer,1975), pp.56-80.
109) 그로스만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적인 저작으로는 Archiv fur die Geschichle des Sozialismus und der Arbeiterbewegung, ⅩⅣ(1929), pp.305-338 에 있는 "Die Aenderung des ursprunglichen Aufbauplans des Marxschen Kapital und ihre Ursachen"과 "Die Wert-Preis-Trasformation bei Marx und des Krisenproble." Zeitschrift fur Sozialforschung,Ⅰ(1932), pp.55-84 을 보라.
110) 헨릭 그로스만, Das Akkumulation-und Zusammenbruchsgesetz des kapitalistischen Systems (Leipzig, 1929), p.608.
111) 같은 책, P. 60.
112) Cf. 그로스만, "Wert-Preis-Transformation…",앞의 책, P.57 과 "Die Aenderung…",앞의 책, P.337 참고.
113) Anton Pannekoek, "Die Zusammenbruchstheorie des Kapitalismus." in Ratekorrespondenz, 1 (1934), 지금 재출간되고 있는 Korsch, Mattick, Pannekoek, [Zusammenbruchstheorie des Kapitalismus oder revolutionares Subjekt] (Berlin,1974), pp. 28 and 20.
114) Paul Mattick, "Zur Marxschen Akkumulation- und Zusammenbruchstheorie." in Ratekorrespondenz, 4 (1934), Korsch, Mattick, Pannekoek, 앞의 책 , pp.47-48.
115) 이 주제에 대해서는 Gabriella M. Bonacchi, "Teoria Marxista e Crisi : I Communisti dei Consigli tra New Deal e Fascismo." 를 보라. Karl Korsch, Hans Langerhaus and Paul Mattick 에 대한 소개로 Gabriella M. Bonacchi 와 Claudio Pozzoli가 편집한 [Capitalismo e Fascismo verso la Guerra],(Florence, 1976) 참고.
116) Cf. Paul Mattick, Marx e Kyunes(Bari,1972), P.433, 또한 Problemi del Socialismo, ⅩⅢ:1 (January-February, 1961), pp.95-104에 있는 Michale Lowy, "Il Significato Metodologico della Parola d'Ordine 'Socialismo o Barbarie'." 참고.
평의회 운동 및 평의회 이론가들에게 제기된 가장 심각한 비난들은 노동 이데올로기다, 공장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다, 프루동주의다 라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마르크스는 끝까지 프루동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했을 것이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다. 혁명적 과정 동안 상품으로서 노동을 폐지하려는 객관적인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러나 이것은 이행 국면을 제거할 것이다) 혹은 노동을 모든 상품에 대한 일반적 등가물로 변형시키는 것이 분명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이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본의 점진적인 사회화를 사회주의와 혼동했기 때문에 비난했다.84) 노동력의 비용과 사회적 노동의 가치를 매개할 하나의 근본적 요소 속에서 화폐의 금으로, 노동화폐로의 점진적 변형은 경제학의 역사적 장에 서술된 바는 없지만, 두 상쟁하는 계급들 간의 권력관계
의 진동하는 사건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자본의 발전 사에서 자본이 노동계급운동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통제하고, 노동대중에게 이데올로기적-제도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을 때에만 취하는 자본의 필수적 경로이다. 이 때 형태 지배의 물신화된 표현으로서 화폐는 자본과 노동의 교환에서 ― 국가의 통제기능의 출현과 관련하여 ― 문제시되지 않는, 권위주의적인 중재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오직 이때에만 화폐와 임노동의 교환은 경향적으로 총체가 된다. 다시 말해 형태의 헤게모니는 "현실의 추상"(법률적 추상과 실질적 포섭 간의 이분법 속에서 표현되는) 과정 속에서 분리를 실행한다. 한편으로 생산자들은 "시민"(이를 통해 계급의 종별성은 보편적 평등으로 용해된다)으로 변형되며,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모든 시민들을 생산자로, 수행된 사회적 노동으로 측정된 소득의 수령자로 변형시킨다.85) 노동(공장의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적 노동으로 이해되는)에 대한 통제와 명령은 화폐적 안정성의 결정적 요소이자 유일한 보증자가 된다. 뮐러와 도위믹이 바라마지 않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공동체는 오직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통제 하에 있는 이러한 아주 일반적인 도식을 예견하고 배치할 때만 구체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권위주의 국가" 형태의 제도적 수준에서 표현되는 자본의 당연한 지배 신호 하에서 뉴딜부터 오늘날까지 작동해 왔다.
독일에서 1921년과 1923년 사이의 기간에 평의회 운동은 종종 이러한 역전을 수행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마르크의 붕괴 기간 동안 화폐와 노동을 연결시킴으로써 ―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복합적인 사회-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제도적 상호관련이다 ― 양자를 평행하게 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은 프루동에 친화적인 운동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케인즈86)를 예상하는 것, 즉 자본주의적인 반격에 대한 예상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 내에서 정치의 사실상의 우위를 실현하는 데 진정한 장애물로 드러났던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분리를 피함으로써 그
과정에 대한 보편적인 사회적 지도의 계기를 실천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미 지적되었듯이, 루드비히는 노조와 평의회 각각의 임무들을 반복하여 말함으로써, 평의회 이론가들이 제안한 노조의 "혁명화" 계획을 공격했다. 노조는 주어진 생산관계의 영역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수한 이익들 ― 상이한 업종과 "숙련"에 따라 분할되는 ― 을 대표하며 실천을 통해 자본이 지배하는 영역의 오직 극한까지만 이끌 수 있다. 반면 평의회는 이미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이동한 프롤레타리아의 대항권력 기관이었다.87) 그러나 도이믹과 뮐러가 제기한 문제는 독일혁명에 종별적인 실천적이고 조직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모호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본주의적 위기의 심화와 더불어 주체성이 혁명적 성장의 결정적 요인으로 출현했다고 경고했다. 적절히 해석하면 평의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임금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권력관계
를 조절하는 노조의 특권을 문제삼기 위해 스스로를 정치적 역량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다
시 말해 그것은 신생공화국의 불확실한 권력 균형을 지탱해 온 1919년 6월 뉘른베르크 노조
대회의 신중함을 폭발시키는 문제였다. 노동계약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헤게모니와 영토에
대한 자본주의적 힘의 거의 총체적인 지배 ―전적으로 분해된 중간 계급들의 자금과 처분권
을 여전히 통제할 수 있었던 금융 메커니즘에 대해 이러한 힘들이 행사한 통제에 의해 가능
하게 된 지배 ― 간의 권력과 중재의 결정적 지점들 중 하나였다.
1923년 위기의 전야에 칼 코르쉬는 공장 통제에서 영토에 대한 헤게모니(봉기주의적 지름길 뿐만 아니라 사민주의적인 "권력으로의 도정" 역시 비현실적인 것으로 판명된 이상)로의 이론적이며 조직적인 도약을 위해 노동조직과 노동계약과 같은 근본적 개념들에서 출발했다. 공장평의회를 위한 노동입법을 다룬 1922년의 글들에서 평의회에 관한 이론은 1919-1920년의 글들에 여전히 현존하던 급진 자유주의적 전통과의 최종적 연계를 절단한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코르쉬의 평의회-노조 기획의 기초를 이루는 반(反)국가주의를 없애기는커녕 보다 강화했다. 공장 문 안에 있는 루소적 자유들은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부상한 배경이 된 계급 현실들을 배신했다. 이것의 전형적 사례는 노동의 자유였다. 정확히 이 자유의 적용(파업 파괴)은 그것이 임금을 낮추기 때문에 보편적인 계급 이익을 거스르게 되었다. 따라서 이 "자유"를 거부하는 것은 계급적 연대를 위해 필수적이었다. 헌법이 공장을 등재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계급적 이익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노동계약은 노동자가 자신의 자유를 임금과 교환하여 상실했음을 의미했다.88) 그러므로 "산업 민주주의"의 확장은 오직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체계 자체를 기초짓는 노동계약을 자신들의 중심적 투쟁으로 배치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산업 민주주의와 노동계약은 공장 안에서 서로 대립했다. 자유로운 노동계약의 법률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형태가 지속되는 한, 평의회들은 착취의 결정적 형태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노동계약은 공장 안에서 게토화된 노동자 계급과 시민사회 사이의 제방이다. 코르쉬에 따르면 위기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반적인 물질적 이익들을 대표하는 것은 그 제방을 부수는 것 ― 바이마르가 승인한 입헌적 합법성을 파괴하는 것을 함축했다.89) 이행 과정을 관리하는 새로운 임무와 관련하여 노조 조직화의 지배적 형태인 "숙련 연합"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조직의 요구에 부적합해 보였다. 노조는 "숙련 연합"에서 "산업적 연합", 즉 개별 노동자의 "숙련" 자격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오직 특정한 공장이나 산업 조직에의 소속에 근거하여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혁명화"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변형은 또한 노조와 평의회간의 관계를 심원하게 변화시킬 것이었다. "공장평의회는 이제 더 이상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계급사회 안에서 '노동의 판매자'의 생활조건 방어 투쟁을 벌이는 노조의 단순하고 순수한 '보조 조직'이 아니라 아직은 계급의 적의 손아귀에 있지만 혁명적 투쟁을 통해 탈환되어 통제 및 결국에는 경제적·정치적으로 조직된 노동 계급의 배타적 관리 하에 두어야 할 기업과 산업분야들에 노조가 발판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전진적 위치'가 되어야 한다."90) 따라서 그것은 코르쉬에게 있어 노동 계약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 계약"을 산출하는 문제였다. 이번에는 국가의 입헌적 정점에서부터가 아니라 공장의 세포조직으로부터 시작하면서 말이다. 이번에도 그는 역시 (그의 소연한 정치적·이론적 발전 속에서 종종 그랬듯이) 정치 이론에서 조직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해결책에 관한 핵심 요점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그의 특출한 경험주의를 통해 그가 이해한 결정적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방법론적인 핵심이 없는 채로 그는 그것의 중요성에 거의 다다랐다. 공장 차원의 전략적 속성에 대한 강조(사민주의 내에서 암묵적인 위로부터의 정치에 대한 염려를 고려할 때 역사적으로 이해할 법한)는 그로 하여금 형태 지배의 사회적으로 총체화하는 특성, 상품의 물신숭배로부터 전혀 독립적이지 않으면서 재생산의 일반 과정에 대한 국가의 실재적 연관을 표현하는 동시에 은폐하고 신비화하는 법률적 추상의 복합적 구조에 눈멀게 했다. 결과적으로 코르쉬가 루소의 "사회계약"과 마르크스주의적 "시민사회" 개념을 종합함으로써 오히려 가치 이론 및 위기의 이론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1923년의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코르쉬의 평의회 이론은 국가와 정치의 문제(이행적 국면에서 중심적 지위를 점하는 경향이 있는)를 단순한 "외양"91)으로 폄하했는데, 당시 공산당은 유사한 내적 분할92), 의도에 관한 동일한 혼동, 그리고 당이 1921년 "3월 봉기"을 수행할 때와 동일한 전술적·전략적 준비부족 상태 속에서 태풍의 눈에 진입했다. 그럼에도 1923년 5월에서 11월까지 평의회 운동은 평의회 이론가들이 위기의 와중에 기대했었던 가장 낙관적인 것보다 더 성취하는데 성공했다. 즉 그것은 대규모 파업의 조직화에서 노조 지도부를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93) 일반화된 사회적 위기의 상황은 노동운동에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켰다.94)
노조 안에서, 평의회 이론가들이 제안한 그 어떤 것보다 더 불안정하고 급진적인 혁명이 발생했다. 노조 기부금의 가치를 소멸시킨 인플레이션은 조직의 모든 보조적이고 보복적인 능력을 박탈했다. 더욱이 인플레이션은 노조의 모든 계약적 권력을 빼앗았다. 고용주들과 함께 작성한 임금 계약은 급속한 통화가치 절하로 인해 불과 며칠 사이에 효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 노조의 탈퇴와 독일사민당(SPD)의 마비가 이어졌다.
사민주의의 실패는 계급에 기반한 정치적 기획을 정교화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리고 노조 전술에의 전적인 의존을 확인시켰다. 가장 거대한 서구 노동당이었던 것이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자율적인 조직적 수단들에 대한 스스로의 무관심과 적대감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기 시
작했다. 1923년에 평의회는 선거와 반란의 실패 후 다시금 그것의 생명력과 유효성을 증명했다. 쿠노(Cuno) 정권95)에 대항하여 평의회가 조직한 정치적 총파업은 그 운동의 정점을 표상했다. 정권은 퇴진해야만 했다.
위기의 시기 동안 투쟁의 발전은 노동계약의 법률적-부르주아적 형태 및 제도적 틀 내에서의 상대적 균형에 대한 평의회의 공세라는 코르쉬의 가설을 확증하는 듯 했다.96) 임금 조정과 일상적인 계약협상들의 사례들에서처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종속이 끝나자, 화폐 체계의 위기는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 지속되지 못하는 정치적 위기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낡은 물물교환 체계가 짧은 기간 동안 상품 유통에서 화폐를 대체할 수 있었지만, 자본과 노동의 "등가 교환"에서 화폐-형태를 대체할 수 있었던 물물교환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품을 수단으로 한 상품생산"은 치명적으로 교란되었다. 마르크스가 {요강}에 썼던 것처럼 "부르주아 사회의 기본적 전제는 노동이 무매개적으로 교환가치, 즉 화폐를 생산한다는 것이다."97) 자본주의 체계의 종별적 산물은 화폐형태를 취하는 가치이다. 자본주의 체계의 전반적인 정치적-제도적 틀의 기초를 흔드는 것은 정확히 화폐형태와 위기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독일의 노동 계급 편에서의 진정한 "동궁(冬宮) 점령" 이 객관적으로 지척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적 질서는 재수립되었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교환메커니즘, 화폐형태의 복권, 그리고 이것들에 의한 (재)생산 과정에 대한 어떤 통제와 관련해서도 국가와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대안적인 사회 정치적 방향의 문제는 진동하는 이행 국면을 뚫고 나아가기 위해 이러한 용어들로 의제에 놓였어야 했다.
그러나, 1921년 "3월 봉기"에서처럼,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적인 정치적 대안 속에서가 아니라, 기괴하고 파멸적인 함부르크 봉기98) 속에서 동궁을 얻으려 했다. 함부르크 봉기는 국가장치의 개조의 시작과 동시에 일반적인 자본주의적 반격의 시작을 특징지었다. 다른 수준에서 볼 때, 계급 운동과 정당 양자 모두 그들이 파악하지 못한 내재적 논리를 지닌 사건
들의 폭발적인 핵심 부분이었다. 경제적, 정치적 현실로 인해 당과 대중운동은, 새로운 혁명
적 전망을 결합하고 산출하는 것처럼 보이는 매 시점마다, 각자의 "영역"으로의 고립되고 헛된 "이데올로기적인 휴식처"로 내몰렸다. 그러나, 이들 이데올로기를 후진성의 순수하고 단순한 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일 것이다. 후진성은 독일 혁명의 실패가 궁극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용어인 것이다. 종종 "노동(자) 이데올로기"로 잘못 정의된 것을 통해, 독일의 노동자들은 이미 자본의 주도권에 의해 제거된 전문적인 계층화보다는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조건들과 스스로의 객관적인 정치적 가능성("정치적인" 것과 "사회적" 수준을 연결시킬 수 있는 대안적인 대중 조직의 부재 속에서)을 표현했다.99) 물론 "생산력주의"와 "자기관리"는 오늘날 납득할 수 있는 모호함과 의혹을 유발하는 용어들이다. 그러나 본질적 모순 및 이데올로기적 결점뿐만 아니라 서방 노동운동사에서 전례가 없는 권력에의 의지와 능력을 표출했던 계급적 요구와 조직적 형태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독해를 통해 현재의 위험을 몰아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100) 1920년대 독일에서, "통제"와 "자치"는 생산과정의 실현과 계획을 관통하고 다른 사회 집단들에 대해 헤게모니 계급으로 강화되어 생산과정으로부터 출현하고자 하는 노동 계급의 의지를 표현했다. 평의회운동은 이같은 야심찬 전망 속에서 운영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정치학과 조직이론으로 변형하는 것은 불가피한 만큼이나 어려운 시도였다.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의 견지에서뿐만 아니라 ― 레닌 스스
로 지적했듯 ― 전체 국제 노동운동에 대해서 말이다. 이 기획에 대한 대안은 확실히 "최소강령으로서 공산주의"가 아니라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이었고 뉴딜이었으며 나치즘이었다.101)
이 시점에서, 독일 노동운동이 1923년의 결정적 해에 노동, 화폐, 분배와 수입에 대한 현실적인 정치적 통제력을 발휘했을 실질적인 가능성에 대한 냉정하고 엄격한 분석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는 여기에서 다뤄질 수 없는 자료들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잘 알려진) 몇 가지 주된 요소만을 제안하는 데 그칠 것인데, 이것들은 본 작업의 맥락 안에서 전통적으로 그것에 부여되어 왔던 것과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1) 위기의 혹독함에 비하면, 실업자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1930년 당시 6,000,000 이상에 비해 약 600,000 정도. 그러므로 상품의 가격결정에서 결정적 요인은 주로 가변적이고 非고정적 자본인 노동자들의 노동이었다.102) (2) 마르크화를 안정화하려는 전략적 조치 속에서 중앙은행은 아래로부터 시작된 질서를 재구축했다. 그것은 더 이상 사적으로 발행된 화폐의 유통을 승인하지 않았다.103) (3) 그리하여 더 이상 중앙의 권력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산업자본가들은 점차로 상점과 공기업에서 통용되는 화폐 교환권을 발행함으로써 현장에서(in loco) 노동과 자본간의 교환을 조절해야만 했다. 화폐가 지나치게 폭락했기 때문에 관성적으로 노동자의 수중으로 떨어질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4) 자본가들은 즉시 이 같은 현상에서 잠재적인 위험을 알아차린 반면, 전반적으로 노동운동은 그들이 접수할 수도 있었던 사회적·정치적 틀을 통제할 수 있는 지렛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치경제학 비판은 당의 편에서 어떤 혁명적 기획으로부터도 엄격히 금지됐다.104) (5) 외국 통화에 대한 마르크의 조절에 관한 한, 중앙은행은 힐퍼딩의 오랜 공식을 따랐다: 1 달러 대 42억 마르크. 패배하고 거부당한 국가로서 독일은 이런 식으로 명백한 자본주의적 체제를 가지고 민족들의 공동체에 진입했는데, 이로써 구제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였다. 독일은 두 가지 가능한 길 중 하나로 거칠고 지난한 "이행 국면"을 해결했다.
5. '마르크스로의 회귀'와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위기': 바이마르에서 뉴딜까지
1920-1930년 "위대한 민중 혁명을 위한 모든 요인들"105)이 독일에서 재등장했을 때, 계급운동과 노동조직 사이의 간극은 매우 심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동적인 최후 몇 년 사이에 노동운동의 비극은 정확히 그 과정을 밟았고 사회 경제적 이론에 유용한 지표들을 제공했다. 제국주의와 붕괴에 관련된 프리쯔 스턴베르크(Fritz Sternberg)와 헨릭 그로스만(Henryk Grossmann) 간의 논쟁을 고려해 보라. 특히 자본주의 발전에 내재한 모순에 관한 분석을 정치경제학 비판에 근거하여 범주적 구조와 재연결하려는 그로스만의 방법론적 시도를. 또한 프리드리히 폴록(Friedrich Pollock)106) 같은 경제학자들이 수행한 소련과 "계획 경제" 같은 위기의 형태학에 관한 여러 작업, 혹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처럼, Zeitschrift f r Sozialforschung에서 Archiv fur die Geschishte des Sozialismus und der Arbeiterbewegung의 칼 그륀버그(Carl Grunberg)와 함께 20여년 동안 중요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온 사회철학자들의 근본적 분석들 역시 고려해보라. 이들 작업의 유효한 "분리"를 단순하게 비난함으로써 이것들을 쓸모 없는 현학적 작업으로 기각하려 드는 것은 난폭할 뿐만 아니라, 진부하다.107) 이들 작업의 "분리"는 사람들이 말하듯 그들의 '학문적 습성' 때문이 아니라, SPD와 KPD 간의 점증하는 분열이 야기한 정적 도식주의에 사로잡혀 이론과 운동의 관계에 치유할 수 없는 분열을 낳은 노동운동의 일반적인 정치적 파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뒤이어 스스로 이론적 반성으로 움츠러들었다.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방법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기반성이 초래된 것이다.108)
"평의회 좌파"의 관심이 전에는 생산과정 내에서의 자기-조직화에 놓이면서, (코르쉬의 예에서 봤던 것처럼) 위기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간과했다면, 이제는 정반대다. 위기와 체계의 붕괴로 이어지는 경제 법칙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특히 당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 그로스만의 작업에서) 노동과정의 분석과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자주-관리 테마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경향이 운동의 정체(그리고 이후의 결정적인 패배)가 초래한 수동적 태도, 즉 "경제주의적" 혹은 "파국론적" 변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강력한 방법론적 자각에 의해 지지됐다.109) 축적의 법칙과 자본주의 체계의 붕괴에 관한 주요 작업에서 그로스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마르크스 작업의 위대한 의미는 정확히 그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든 현상을 가치법칙에서 출발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110) "붕괴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 위기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 전제고, 위기이론은 내재적으로 붕괴이론에 연관된다. 양 문제에 대한 해법은 {자본}의 핵심 사상을 구성하는 마르크스의 축적 법칙에 나타나는데, 따라서 가치 법칙에 기초한다."111) 룩셈부르크가 개시한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더욱 견고한 방법론적 기초에 근거를 두었는데, 이는 위기에 관한 일반이론이 수정에 내재하는 위험을 피하도록 했다. 그로스만의 두 가지 근본적 기여는 다음과 같다. 위기 이론을 축적 이론과 가치이론에 직접 연결하고, 범주적 추상 과정을 "분리방법"으로 정의한 것이다. 붕괴 경향에 대한 경제적("객관적") 설명은 실재적 운동의 순수하고 단순한 "반영"으로 제시되지 않고, 범주적 전개의 수준에서 체계의 자기-모순적인 성격에 대한 연속적 근사치112)의 이해라는 추상적 표상으로 제시됐다.
그로스만의 설명 방법론이 가지는 변증법적 성격은 "붕괴 이론"과 혁명적 주체성에 관한 폴 마틱(Paul Mattick)과 판네쿠크(Pannekoek) 사이의 논쟁에서 폴 마틱에 의해 열렬히 옹호되었고, "평의회 공산주의자"의 이론적 기관인 R tekorrespondenz에서 실행되었다. 요컨대 판네쿠크는 그로스만에게 본질적으로 두 가지 비판을 가했다. (그로스만의 작업이) "순수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추론하려 들면서 "인간의 개입과 상관없이"113) 붕괴를 가상한 근거없는 시도라는 것, 그리고 계급투쟁을 "경제주의적 논쟁"으로 환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틱은 분명한 반비판을 통해, 판네쿠크가 어떻게 그로스만의 절차가 갖는 변증법적 성격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는지를 지적했다. 이는 정확히 (판네쿠크가) 스스로 경제학의 제한된(부르주아적) 개념에 갇혔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적인 정치경제학 비판의 방법론에 내재한 변증법은 "대립물들의 종합"이라는 기준의 극히 단순화된 적용 안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을 정의할 수 있는 근본적 계기를 추상적으로 분리하는 데 있다. 따라서 마틱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심지어 그로스만에게도 '순수히 경제적인' 문제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축적 법칙에 대한 분석에서 그는 방법론적 근거로 순수히 경제적인 전제조건 및 따라서 체계의 객관적 한계 지점을 이론적으로 이 해하는 데 이르는 정의로 스스로를 제한했다. 내적 모순으로 인해 자본주의 체계가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이론적 인식이, 실재적 붕괴가 자동적인 과정이며 인간과 독립적이라는 주장을 수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114) 생산과 재생산, 경제와 정치의 상호작용에 의해 정의되는 단일한 맥락은 자본주의 변형이 진행되는 주요 과정에서 핵심이 될 뿐 아니라, 혁명을 조직하는 모든 토론 혹은 기획의 불가피한 객관적 기초로 드러났다.
바이마르 독일에서 벌어진 이론적 논쟁의 마지막 번득임은 독일 공화국이 와해된 후에야 의미가 있게 되었고, 실질적으로 이미 전-유럽의 차원으로 투영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운동의 조직적 문제를 겨냥하거나 그에 맞게 기능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 뉴딜과 전제적인 파시스트 국가의 리바이어던 같은 구조에 직면했다. 이것이 수행된 분석의 주춧돌로서, 이제는 유명해진 Institut f r Sozialforschung에 결합한 일국의 지식인들을 포함하여, 마르크스주의 잡지 International Marxist Correspondence (훗날 Living Marxism 그리고 New Essay라 불린)에서 폴 마틱의 지도 아래 (코르쉬, 륄레, 그리고 판네쿠크를 포함한) 미국과 유럽의 많은 좌익 투사들과 이론가들의 정치적 작업과 연구를 협력, 조정하였다.115) 유럽에서 혁명의 패배 이후, 분석의 "객관주의"는 ― 다소간의 의식적인 방법론적 상대화를 통해 ― 당시부터 진행된 것인데,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는 훨씬 값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의 범주적·분석적 틀 안에서 동일한 동요와 양가성의 움츠림의 표현이었는데, 이는 심지어 1933년 이전까지 노동운동을 자기-파괴로 내몰았던 것이다.
운동이 공세적인 국면에 전술적·조직적 계기를 강조하는 것과 패배에 뒤이어 (자본주의의 발전과 경향들의 국지화에 대한 분석이라는) 과학적·이론적 계기를 강조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결선도 없다. 수립된 관계는 단일하고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전된 것이었다. 하지만 연관이 있긴 하며, 전제주의적 파시스트 국가의 코포러티즘적 특성에 의해 심히 왜곡되고 뒤얽혔다 해도 동일한 측면을 보존했다. 계급투쟁과 제도, "평의회",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 말이다. 독일 노동운동의 파국은 이론과 운동의 재전환 문제를 극적으로 제기했는데, 이는 후세들에게 종별적인 정치적(이고 이론적) 대답에 의해 충족된 종별적인 역사적 요구라기보다 하나의 유령 ― 10월의 비극적 역상 ― 을 남겨 두었다. 1929년 위기를 잇는 경제의 거대한 구조 변형에 직면하면서 노동운동은 오늘날이 되어서야 이 연관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정치경제학 비판과 위기 이론 그리고 (계급의식과 조직에 대한) "구성"의 이론을 결합하는 문제의 종별적인 형태를 가정하기에 이른 것은 그저 우연만은 아니다. 관련된 첫 번째 두 요소들에 관심을 집중하는 가운데, 그로스만과 마틱은 의식적으로 경제 분석의 객관적 측면을 추상적 분석으로(그러므로, 실물운동에 대한 단순한 경험적 기술이 아닌) 분리하면서, 당연한 귀결로 계급의식과 조직의 이론적 문제는 젖혀 두었다. 이것이 그들 노력의 역사적·정치적 한계로 보인다면, 이 문제(계급의식과 조직의 이론적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싸늘하고 황폐한 추상화"를 회피할 수 있는 손쉬운 지름길이 있다고 믿는 것 역시 완전한 환상이다.
만일 방법론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스스로의 "분리"를 의식하고 있는 이론이 무용하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정치의 물질성과 계급 조직의 실천으로 전환될 수 없다면, 이론에 의해 "개념화되지" 않은 실천 역시 혁명을 유발하는 것과 관련하여 완전한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론(과학적이고 분석적인, 맹목적으로 행동주의적이거나 교조주의적이지 않은)과 실천 관계가 통일성을 갖추면,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구걸을 그치고 위기의 위협적 진행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긴급한 역사적·형태학적인 종별성 속에서 출현할 것이다. 마틱이 재도입한116)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 하는 룩셈부르크적 대안은 계급투쟁의 파국적 본질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일련의 이론적·정치적 문제(와 임무)를 알려준다. 정치경제학 비판(자본주의 발전의 분석을 갱신하는)에 대한 일반적 재고(再考)로부터 경제와 정치, 계급투쟁과 제도, 그리고 대중운동의 역사적이고 주체적인 수준에서 벌어지는 실질적 상호작용의 복합성에 조응하는 조직적 형태의 차원으로 말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종합될 수 있다: 정치의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 독일 혁명의 비극적 궤적은 조직의 문제에 대한 실용적 구체화가 어떻게 계급운동 안에서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 주도권과 패배에 종속되는 무기력한 파멸로 귀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극히 밀접한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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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1850년 프루동은 그의 친구 다리몽에게 "사회주의 이념 안에 부르주아지를 위한 어떤 것이 있음을 보여줄 때가 왔다.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사회주의, 이것은 현 시점에서 반드시 완수되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P. J. Proudhon, Che Cos' la Propriet ? (Bari, 1967)에 부치는 Umberto Cerroni의 서문, p. ⅹⅵ.
85) Karl Marx,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 (Berlin, 1953), p. 65.
86) 케인즈의 개념과 프루동의 그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Dudley Dillard, "Keynes and Proudhon," Journal of Economic History (May, 1942)를 보라.
87) 루드비히의 형식은 노조운동과 공장평의회에 관한 코민테른 2차대회의 결의안을 예상했다. Cf. Ⅱ Congress del l'Internazionale Communista (Rome, 1970), pp 51-63 참조.
88) 그리하여 Arbeitsrecht f r Betriebsr le (1922) (Frankfurt am Main and Vienna, 1968)의 32페이지에서 칼 코르쉬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자본} 1권 4장 말미에서 마르크스는 '경제 거래'의 맥락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용어로는, '단순 유통이나 상품 교환의 영역으로부터') 우리가 상점, 공장, 혹은 그 안에서 궁극적으로 실재적 '생산'이나 상품의 창조가 발생해야만 하는 또다른 기업으로 변화할 때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의 변화를 능숙하게 묘사했다; 여기에서 참가자들 간의 관계는 더 이상 자유, 평등, 정의의 이념에 따라 전혀 조절되지 않고, 대신 전혀 다른 양상을 갖는다."
89) 같은 책, pp. 95-97: "[빌헬름 독일에서] 반동적인 기업주는 '기업 외부'로부터 노조 지도자와 교섭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반면, '자신의' 노동 위원회와 교섭하고 싶어했다... 그러므로, 노동 공동-참여에 대한 권리의 직접적 형태가 즉각적인 혁명 과정의 관점에 따라 가정하는 특정한 의미로부터 물러날 때까지, 우리는 '공장 평의회'를 노조 투쟁의 단순한 '보조 기관'으로 엄격히 종속시키려는 노조의 안간힘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오로지 평의회의 특정한 의미를 자본가와 노동자계급 간의 권력 투쟁의 결정적 국면에서의 생산에 대한 통제 기관으로 생각할 때에만, 그리고 평의회를 미래의 사회화된 경제의 책임있는 중심으로 볼 때에만,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는 방식은 전복될 것이다."
90) 같은 책, p. 97.
91) 코르쉬, Arbeitsrecht..., 위의 책, p 39: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투쟁은 이제 다만 외관상으로만 국가 통제(그리고 사회적 삶의 존속하는 상부구조에 대한 통제)를 그것의 목적으로 갖는다: 실질적으로는 경제 즉 노동의 조직화에 대한 통제가 목적이다."
92) 브랜들러의 지도력은 탈만, 피셔, 마슬로로 구성된 당의 좌익 반대파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다. Cf. Hajek, 위의 책, pp. 65-73.
93) 로젠베르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근대 독일의 역사에서, 1923년 여름만큼 사회주의 혁명에 적합했던 순간은 없었다. 평가절하의 소용돌이 안에서 질서, 소유권이나 합법성 따위의 모든 전통적 통념은 사라졌고, 루르 점령 이래 전개된 끔찍한 상황에 대해 사회주의자나 공화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었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형국이 참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전체 체계가 공포 속에서 종말을 맞을 것임을 아주 분명하게 느낀 것은 노동자계급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중간계급조차, 인플레이션 때문에 빈털터리가 된 후, 혁명적 흥분에 젖어들었고 자본가들의 폭리를 최종정산하길 바랬다.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들의 경우 그들 자신 인플레이션의 희생자로서, 현존 체계에 대항하는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대중운동에 대해 거의 역량을 쏟으려 들지 않았다 ― 그러므로 Reichswehr의 군인들이 투기꾼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굶주린 프롤레타리아 동지들에게 발포하려 들었다는 것은 매우 의
심스럽다." Rosenburg, 위의 책, pp. 143-144.
94) 로젠베르그에 따르면, "1923년을 거치면서 SPD의 힘은 꾸준히 감소했고, 당은 1919년의 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위기를 통과했다... 1922년 말까지 새로운 USPD가 여전히 독일 노동자들의 대다수를 사로잡았음에도, 대중들은 급격하게 공산당으로 이동했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반년 동안 관계는 완전하게 뒤집어져 1923년 여름에 이르면 KPD는 의심의 여지 없이 대다수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를 받았다." 같은 책, p. 145.
95) 구노의 중도 우파 정부는 사민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슈트레스만의 정부로 대체되었다. Cf. 로젠베르그, 같은 책, pp. 148ff.
96) 이는 샤흐트 박사의 위선적 관측에 의한 계급적 관점의 이면에 의해서도 입증되는 것 같았다. "1923년 가을에 예상치 못한 화폐의 평가절하가 독일의 사회구조 전체의 붕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정이 나았던 노동자 부인들은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쇼핑을 할 때 그녀들은 마르크화의 평가절하와 보조를 맞춰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남자들이 노동을 통해 번 돈은 심지어 봉급이 그날그날 맞춰지는 상황에 이르러서조차 주부들의 손에서 사라졌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는 평가절하를 중단하고 화폐를 안정화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나는 그같은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유리한 직업과 안정된 지위를 포기했다." Cf. Hialmar Schacht, Account Settled (London, 1949).
97) Marx, Grundrisse, 위의 책, p. 137. 여기에서 우리는 화폐형태의 외관상의 무매개성 때문에 발생하는 유혹을 반드시 뿌리쳐야 한다, 즉 우리는 화폐-위기 관계에 관한 정치적인 혁명적 강조를 피해야 한다. 그것은 화폐-형태의 과잉팽창을 통한 전복적 극복이 가능하다는 환상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화폐적 형태학은 물신숭배 ― 사회적 생산관계에 대한 형태의 지배 ― 의 일반적 문제틀에 연관되어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매개된 방식으로, 정치적 주제를 도입한다. 반면, 같은 페이지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화폐(교환가치) 안에서 개인의 대상화는 자연적 결정 속에서 제시되었다는 의미에서 그의 것이 아니고, 사회적 결정 (관계) 속에서 제시되었다는 의미에서 그의 것이며, 이는 이미 그에게 내재적이다."
98) 함부르크 봉기에 대해서는 A. Neuberg, Armed Insurrection (London 1970) pp. 81-104 를 보라.
99) 1924년 이후에야 자본은 계급구성에서 주요한 변형을 수행할 수 있었다. Cf. Arndt, 위의 책, pp. 32-38.
100) Cf. Olaf Ihlau, Die rote K mpfer.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r Arbeiterbewegung in der Weimarer Republik und im Dritten Reich (Meisenheim am Glan, 1969) pp. 85ff.
101) "금 통화의 포기와 함께, 독일에서는 새로운 통화 체계가 점차로 형성되었는데 퓌러는 ― 중요한 연설에서 ― 그것의 본질이 노동 통화라고 지적했다... 노동-통화의 단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화폐는 민족적 생산에 의해 충당된다. 나는 내가 생산할 수 있는 만큼의 화폐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노동-통화는 금-통화만큼의 안정성을 요구한다. 그것은 민족경제의 질서에 기초한다... 명백하게 신용과 생산, 화폐와 상품
사이의 균형은 노동-통화의 기초적 원칙이 아니다." J. Winschuh, Construzione della Nuova Europa (Florence, 1941) pp. 55-63 참조. 그러나 나치의 노동-통화의 원칙은 Winschuh가 지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했다. 1933년 5월 2일 ADGB에 소속된 "자유노조들"은 해산되었다. 5월 5일 노동전선의 대표 레이는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라이히의 모든 노동력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는 견해를 퓌러에게 표명했다. 나치 하에서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K. H. Roth, Die "andere" Arbeiterbewegung (Munich, 1974) pp. 101-156 를 보라.
102) 1922년은 전후 기간에 가장 낮은 실업을 기록했다. 1923년에 실업이 증가한 것은 주로 프랑스 점령군에 맞서 루르에서 수행한 "수동적 저항" 때문이었다. Cf. G. Albrecht, W rterbuch der Volkswissenschaft, Vol. 1 (Jena, 1931), pp. 171-181. 1924년이 지나서야 구조조정된 공장으로부터 노동자들이 점진적으로 배제되기 시작했다. 1923년이 되면, 독일 자본은 단지 테일러주의의 보다 "합리적"인 사용을 통해 노동에 대한 내포적 착취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테일러주의는 노동자들의 숙련을 단지 감소시킬 뿐이다 ―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노동자 평의회와 테일러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C. Petrid, "Il sistema Taylor e i Consigli dei produttori," in Ordine Nuovo (October 25, 1919) p. 178.
103) Schacht 위의 책, p.7
104) 도즈 플랜(1924년 4월)의 수립 이후 독일에서 미국 자본의 성공적인 투자에 대해서는 Sydney Brooks, America and Germany 1918-1925 (New York, 1925)를 보라.
105) Rosenberg. 앞의 책, p.211.
106) Cf. Giacomo Marramao가 편집한 {Teoria e Prassi dell'Economia di Piano} 선집 (Bari, 1973)에서 선택한 에세이들 참고.
107) 이들 피상적이고 조급한 자세는 N. Moszkowski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Sergio Bologna에 의해 옹호되었다. Per la Critica delle Teorie Moderne delle Crisi(Turin,1974), p.v.
108) Cf. Giacomo Marramao, "Political Economy and Critical Theory," Telos, 24 (Summer,1975), pp.56-80.
109) 그로스만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적인 저작으로는 Archiv fur die Geschichle des Sozialismus und der Arbeiterbewegung, ⅩⅣ(1929), pp.305-338 에 있는 "Die Aenderung des ursprunglichen Aufbauplans des Marxschen Kapital und ihre Ursachen"과 "Die Wert-Preis-Trasformation bei Marx und des Krisenproble." Zeitschrift fur Sozialforschung,Ⅰ(1932), pp.55-84 을 보라.
110) 헨릭 그로스만, Das Akkumulation-und Zusammenbruchsgesetz des kapitalistischen Systems (Leipzig, 1929), p.608.
111) 같은 책, P. 60.
112) Cf. 그로스만, "Wert-Preis-Transformation…",앞의 책, P.57 과 "Die Aenderung…",앞의 책, P.337 참고.
113) Anton Pannekoek, "Die Zusammenbruchstheorie des Kapitalismus." in Ratekorrespondenz, 1 (1934), 지금 재출간되고 있는 Korsch, Mattick, Pannekoek, [Zusammenbruchstheorie des Kapitalismus oder revolutionares Subjekt] (Berlin,1974), pp. 28 and 20.
114) Paul Mattick, "Zur Marxschen Akkumulation- und Zusammenbruchstheorie." in Ratekorrespondenz, 4 (1934), Korsch, Mattick, Pannekoek, 앞의 책 , pp.47-48.
115) 이 주제에 대해서는 Gabriella M. Bonacchi, "Teoria Marxista e Crisi : I Communisti dei Consigli tra New Deal e Fascismo." 를 보라. Karl Korsch, Hans Langerhaus and Paul Mattick 에 대한 소개로 Gabriella M. Bonacchi 와 Claudio Pozzoli가 편집한 [Capitalismo e Fascismo verso la Guerra],(Florence, 1976) 참고.
116) Cf. Paul Mattick, Marx e Kyunes(Bari,1972), P.433, 또한 Problemi del Socialismo, ⅩⅢ:1 (January-February, 1961), pp.95-104에 있는 Michale Lowy, "Il Significato Metodologico della Parola d'Ordine 'Socialismo o Barbarie'."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