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시대 위에 선 지휘자들
고난의 시대 위에 선 지휘자들
빌헤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angler, 1866~1954)
20세기 초반 대표적인 지휘자 두 사람을 손꼽으라면 대개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를 꼽는다. 앞사람이 지휘자의 주관적 감정과 상황을 배격하고 악보에 충실하려 했다면, 뒷사람은 해석의 독창성을 옹호했다. 사실 지휘계에서는 토스카니니가 이단에 가까울텐데, 그만큼 뵐로-니키쉬-푸르트뱅글러를 잇는 독일 후기 낭만주의 계보가 막강했다는 뜻이다.
푸르트뱅글러는 1922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1933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총감독 및 수석 지휘자를 맡으면서 독일-오스트리아 지휘계의 최정상에 서지만, 1934년 전위적인 음악 작곡가이자 유태인 아내를 둔 힌데미트의 오페라 공연 초연을 놓고 나치와 대립하다 모든 자리에서 실각하고 만다. 정치가 예술에 간섭한다며 나치를 힐난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했기 때문이다. 다음해 나치 선전상 괴벨스에게 '비정치적인 예술가로 독일에 남겠다'고 약속하고 다시 베를린 필로 복귀한다. 이 복귀를 두고 그가 나치에 협력하기로 한 것 아니냐는 말이 떠돌기 시작한다.
토마스만이 히믈러(SS 우두머리)의 독일에서 어떻게 베토벤이 연주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히믈러의 독일보다 베토벤이 더 필요한 곳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라며 대꾸했다는 일화가 있다. 진의야 어찌되었든 그는 1940년 "오늘 독일의 행동이 독일 거장의 음악에 담겨있다"며 프랑스, 네덜란드 등 독일 점령지로 연주회를 떠나기도 하고, 1942년 히틀러의 생일 만찬 자리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하기도 한다. 물론, 그는 유태인 음악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고, 이 역시 사실이다. 1945년 2월 연합군 폭격과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망명했으며, 1947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에야 베를린 필에 복귀할 수 있었다.
푸르트뱅글러의 진가는 베토벤 교향곡 연주에 있다. 그의 베토벤 해석은 짙은 낭만성과 영웅적인 호소력으로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1954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지휘자 칼 뵘은 "누가 이제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할 것인가"라며 개탄했다고 하는데, 누구나 이 말에 수긍할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 중에서도 그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하 [합창]) 연주는, 스테레오를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최고의 명연으로 손꼽히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1942년 전시 실황 녹음과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 개막 실황공연은 비길 데가 없을 정도다. 1951년 폐허가 된 독일 땅에서 바이로이트 합창단과 함께 부른 합창 교향곡은 정말로 '환희의 송가'라 불릴 만 했다. 울림은 컸으며, 둥글고 유장했다. 고난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찬연한 소리 앞에서 무릎을 끓고, 두 손을 모아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할 일이었다. 이에 비하면 1942년 녹음은 마치 [교향곡 5번 운명]을 듣고 있는 것 아니냐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격렬했다. 내면에 침잠했던 분노를 내뿜는 듯, 그래서 너무나도 위풍 당당한 직선적인 소리-'고난의 송가'. 이를 재치 있게 비유하면, '고난을 넘어 환희의 소리' 바로 [합창]이 되는 셈인데, 진정, 그의 개인사처럼 그의 [합창]이 인류의 합창이 된 것이다.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1876∼1962)
지휘계의 성자로 불리는 그는 보통 독일적인 전통 위에서 토스카니니의 즉물적인 해석을 종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20세기 초반 지휘자 세 명을 꼽으라면 그도 이 영광의 대열에 속한다. 예술가로서는 불행히도 그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다. 말러의 제자로서 그의 후원과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신의 균형잡힌 해석으로 1929년 푸르트뱅글러의 뒤를 이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다. 1933년 나치는 유태인의 모든 활동을 금하였고, 이 때문에 그는 나치에게 쫓겨난 뒤 빈으로 옮겼다. 1936년 빈 국립 가극장 음악 감독이 되면서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그는 프랑스로 발길을 돌렸지만 이마저도 나치의 프랑스 침공으로 여의치 않게 된다. 1939년 결국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당시 그의 나이 63세였다. 1941년 뉴욕 필하모니의 객원지휘자로 활동하면서 1957년 은퇴할 때까지 그는 대서양을 오가며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한다. 1958년 난립하는 스튜디오를 통폐합하면서 명실상부한 음반사로 부상하던 CBS는, 그의 음반을 취입할 목적으로 (거의 그만을 위한)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콜롬비아 오케스트라다. 그는 만년에 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그의 주요한 레퍼토리인 모차르트, 말러의 녹음에 열중하였고, 이는 1961년 죽기 전해까지 계속된다.
스스로 확신했고, 남들 역시 인정한 것처럼 그는 "모차르트를 모차르트답게 연주"했고, 모차르트 음악의 "아름다움과 완벽함, 고귀함과 쾌활함, 순수함 속의 천사같은 세계"를 노래했다. 특히 그가 연주한 모차르트의 후기 교향곡(교향곡 39번, 40번, 41번)은 앞서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처럼 절대적 명연으로 남아있다. 특히 [교향곡 40번] g단조는 오늘날 모차르트답지 않은 단조로 된 교향곡(다른 곡에서도 그렇듯 고전주의적이지 않은)이어서 낭만주의자들에게 더욱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이 곡에서는 발터와 콜롬비아의 앙상블이 눈부시다. 물결을 타며 "노래"하듯 흘러나오는 소리가 공간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듣는 이에게 평온함과 사색의 여유를 준다. 명상과 사유 - 이 앨범에는 그의 또 다른 절대적 명연으로 알려진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도 들어 있어 그의 온화하고 고매한 인품의 흔적을 느낄 수 있으며, 더더욱 아늑하고 평온한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발터는 물질주의를 대단히 혐오하였고, 정신의 고귀함을 추구했다. 그래서 "전쟁이나 혁명, 정치적 개조-1차 대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학과 음악, 학문과 인간성이 자신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었던, 그래서 "우리의 음악이 생겨난 세계, 인간 정신의 위대한 업적이 만들어 낸 세계"를 가꾸는 데 일생을 바쳐왔다. 정신주의의 추구, 예술을 위한 예술, 그리하여 '신학에서 미학으로'를 목표로 하는 부르주아 미학의 윤곽을 그리면서 브루노 발터의 앙상블을 떠올리는 것이 그리 부당하진 않으리라. 이렇게 볼 때 그가, 물질주의에 대한 스스로의 혐오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자화된 음악, 상품화된 음악의 현실(음반시장)에 만년을 맡긴 것은 아이러니라기보다 오히려 '미학의 종말'에 가까운 셈이다.
쿠르트 잔데를링(Kurt Sanderling, 1912~)
독일에서 잔데를링의 음악 경력은 가수 연습 코치가 전부인데, 그나마 이조차 1933년 아리안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그만둬야 했다. 1936년 (특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는 소련으로 망명을 떠났으며, 모스크바 방송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로 데뷔한다. 1941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있으면서, 므라빈스키와 함께 사회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를 이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이 심화되고, 베를린 분단이 기정 사실화되자, 베를린 전체의 지원 아래 있던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단원들 상당수가 서베를린에 살고 있었던 까닭에, 이들이 연주하러 동베를린으로 올 수 없게 된 것이다. 동베를린에 거주하는 수많은 젊은-거의 초심자들이었던 음악인들이 위기에 빠진 이 오케스트라를 살리려고 자원하는데, 이때 이들을 가르쳐 이 오케스트라를 구원한 사람이 바로 잔데를링이다. 당시 그는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상태였고, 소련의 음악 정책상으로도 그에겐 동독으로 돌아와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7년 동안 베를린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로 있으면서 그는 이 오케스트라를 서독의 카라얀-베를린 필하모니에 필적하는 오케스트라로 만들었다. 1964년에는 3년간 드레스덴 국립 교향악단의 지휘도 맡으며,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등 동독의 유수한 교향악단을 이끌고 서방세계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1979년 동경의 Nippon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정기객원 지휘자가 되면서 그의 연주 여행은 이제 동서를 넘나드는데,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LA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활동하다 90세가 되는 2002년 올해 은퇴하였다.
그의 레퍼토리는 대단히 넓으며, 동시대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쇼스타코비치 - 생전의 쇼스타코비치를 기억하는 살아있는 지휘자여서 그는 종종 상당히 곤란한 질문을 받는다. 쇼스타코비치가 서방으로 망명했다면 그의 음악이 어땠을까 따위... - 는 물론, 시벨리우스와 말러 전통의 베토벤, 브람스까지 매우 풍부한 레퍼토리로 연주하는데, 오늘 함께 소개하는 그의 앨범은 브람스의 교향곡이다. 브람스 자신 '그러나 베토벤(!)'을 내세우며, 내면화된 형식미를 강조해선지 모르지만 나머지 교향곡과 달리 [교향곡 1번]만큼은 '어둠에서 광명으로'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브람스의 굉장히 강조된 논리적인 형식과 내면적인 이상을 잔데를링은 상당히 냉정한 태도로 그리고 있다. 차분히 진행되는 전개 때문에 브람스 특유의 극적인 구조를 기대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은데, 그 때문에 그의 브람스는 앞서 지휘자들의 브람스와 비교되며 논란의 대상이 된다.
* * *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는 공연하는데만 사흘(대략 15시간)이 걸리는 대작이다. 이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행사가 바로 바이로이트 축제다. 바그너는 독일의 국민 음악적 전통이 없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옛 독일의 환상-게르만 신화-을 불러오는데 모든 노력을 다했다. 아마도 이 때문에 나치 역시 이를 예의 주시하였으며, 나치 정권 아래 바이로이트 축제는 나치의 선전장이 되었고, 패전 직후 바이로이트 축제는 미군정의 탈나치화 정책에 따라 바로 중단되었다.
1947년 유럽 전후 복구 계획으로 마샬플랜 즉, (서부)독일을 중심으로 서유럽 집단 안보체제, 경제통합체를 건설하는 계획이 수립되는데, 이에 따라 "독일의 재건이 방해받지 않는 선에서 탈나치화가 이뤄져야 한다"-즉, 나치처벌보다 독일 경제 재건이 우선된다는 것이 공언된다. 그리하여 같은 해 '면책특권'(억압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나치에 동조하였다는 증명)이 발부되면서, 전범 재판은 신속하게 종결된다. 푸르트뱅글러, 카라얀은 이때 '면책특권'을 받았으며,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도 부활하게 된다. 바로 이 부활하는 행사에서 푸르트뱅글러가 개막 공연으로 베토벤의 [합창]을 연주하고, 카라얀은 본 공연으로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니벨룽겐의 반지]를 지휘한다. 그 해는 마샬플랜의 성공을 가늠하는 해였고, 그래서 서방 세계의 모든 사람이 이 공연을 주목하였으며, 이 둘은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소리로 바이로이트 콘서트홀을 울렸다. 이 엄청난 두 실황공연을 녹음한 앨범은 독자들이 알고 있듯, 그리고 예측하는 대로 기념비적인 '불후의 명반'이 되었다.
알려진 대로 푸르트뱅글러는 끝까지 '비정치적인 예술가'를 고집했고 그의 이런 음악적 신념은 고상한 신흥세력에 의해 충분히 지지 받았다. 사실,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는 독일 시민사회의 정치이데올로기가 일정하게 실패한 데 잇따른 것이기도 한데, 그리하여 음악에서는 이것이 브람스의 내면화로(사실, 브람스의 심포니는 베토벤 심포니와 정확히 반대다), 바그너의 과대망상(니체마저 진저리를 친)으로 드러난다. 형식미와 내용미 논쟁을 벌이면서 말이다. 정치와 무관한 예술이란 사실 현실을 외면한(혹은 외면하고 싶은) 예술이고, 1920~30년대 전쟁과 혁명의 격정을 지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된다. 바로 '예술을 위한 예술'로.
이렇게 해서 어느덧 베토벤은 '귀먹고 불우한 환경에 처한 작곡가의 위대한 인간 승리'-[합창]을 노래한 작곡자가 되고, 푸르트뱅글러는 '나치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영광'-[합창]을 노래한 지휘자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클래식을 인간의 고매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나 듣는 음악으로 숭배(혹은 경멸)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 이들이 지휘하고 연주하며 듣고 감상하는 음악이 되었다. 너무 정상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과정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빌헤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angler, 1866~1954)
20세기 초반 대표적인 지휘자 두 사람을 손꼽으라면 대개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를 꼽는다. 앞사람이 지휘자의 주관적 감정과 상황을 배격하고 악보에 충실하려 했다면, 뒷사람은 해석의 독창성을 옹호했다. 사실 지휘계에서는 토스카니니가 이단에 가까울텐데, 그만큼 뵐로-니키쉬-푸르트뱅글러를 잇는 독일 후기 낭만주의 계보가 막강했다는 뜻이다.
푸르트뱅글러는 1922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1933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총감독 및 수석 지휘자를 맡으면서 독일-오스트리아 지휘계의 최정상에 서지만, 1934년 전위적인 음악 작곡가이자 유태인 아내를 둔 힌데미트의 오페라 공연 초연을 놓고 나치와 대립하다 모든 자리에서 실각하고 만다. 정치가 예술에 간섭한다며 나치를 힐난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했기 때문이다. 다음해 나치 선전상 괴벨스에게 '비정치적인 예술가로 독일에 남겠다'고 약속하고 다시 베를린 필로 복귀한다. 이 복귀를 두고 그가 나치에 협력하기로 한 것 아니냐는 말이 떠돌기 시작한다.
토마스만이 히믈러(SS 우두머리)의 독일에서 어떻게 베토벤이 연주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히믈러의 독일보다 베토벤이 더 필요한 곳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라며 대꾸했다는 일화가 있다. 진의야 어찌되었든 그는 1940년 "오늘 독일의 행동이 독일 거장의 음악에 담겨있다"며 프랑스, 네덜란드 등 독일 점령지로 연주회를 떠나기도 하고, 1942년 히틀러의 생일 만찬 자리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하기도 한다. 물론, 그는 유태인 음악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고, 이 역시 사실이다. 1945년 2월 연합군 폭격과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망명했으며, 1947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에야 베를린 필에 복귀할 수 있었다.
푸르트뱅글러의 진가는 베토벤 교향곡 연주에 있다. 그의 베토벤 해석은 짙은 낭만성과 영웅적인 호소력으로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 1954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지휘자 칼 뵘은 "누가 이제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할 것인가"라며 개탄했다고 하는데, 누구나 이 말에 수긍할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 중에서도 그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하 [합창]) 연주는, 스테레오를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최고의 명연으로 손꼽히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1942년 전시 실황 녹음과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 개막 실황공연은 비길 데가 없을 정도다. 1951년 폐허가 된 독일 땅에서 바이로이트 합창단과 함께 부른 합창 교향곡은 정말로 '환희의 송가'라 불릴 만 했다. 울림은 컸으며, 둥글고 유장했다. 고난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찬연한 소리 앞에서 무릎을 끓고, 두 손을 모아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할 일이었다. 이에 비하면 1942년 녹음은 마치 [교향곡 5번 운명]을 듣고 있는 것 아니냐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격렬했다. 내면에 침잠했던 분노를 내뿜는 듯, 그래서 너무나도 위풍 당당한 직선적인 소리-'고난의 송가'. 이를 재치 있게 비유하면, '고난을 넘어 환희의 소리' 바로 [합창]이 되는 셈인데, 진정, 그의 개인사처럼 그의 [합창]이 인류의 합창이 된 것이다.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1876∼1962)
지휘계의 성자로 불리는 그는 보통 독일적인 전통 위에서 토스카니니의 즉물적인 해석을 종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20세기 초반 지휘자 세 명을 꼽으라면 그도 이 영광의 대열에 속한다. 예술가로서는 불행히도 그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다. 말러의 제자로서 그의 후원과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신의 균형잡힌 해석으로 1929년 푸르트뱅글러의 뒤를 이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다. 1933년 나치는 유태인의 모든 활동을 금하였고, 이 때문에 그는 나치에게 쫓겨난 뒤 빈으로 옮겼다. 1936년 빈 국립 가극장 음악 감독이 되면서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그는 프랑스로 발길을 돌렸지만 이마저도 나치의 프랑스 침공으로 여의치 않게 된다. 1939년 결국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당시 그의 나이 63세였다. 1941년 뉴욕 필하모니의 객원지휘자로 활동하면서 1957년 은퇴할 때까지 그는 대서양을 오가며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한다. 1958년 난립하는 스튜디오를 통폐합하면서 명실상부한 음반사로 부상하던 CBS는, 그의 음반을 취입할 목적으로 (거의 그만을 위한)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콜롬비아 오케스트라다. 그는 만년에 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그의 주요한 레퍼토리인 모차르트, 말러의 녹음에 열중하였고, 이는 1961년 죽기 전해까지 계속된다.
스스로 확신했고, 남들 역시 인정한 것처럼 그는 "모차르트를 모차르트답게 연주"했고, 모차르트 음악의 "아름다움과 완벽함, 고귀함과 쾌활함, 순수함 속의 천사같은 세계"를 노래했다. 특히 그가 연주한 모차르트의 후기 교향곡(교향곡 39번, 40번, 41번)은 앞서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처럼 절대적 명연으로 남아있다. 특히 [교향곡 40번] g단조는 오늘날 모차르트답지 않은 단조로 된 교향곡(다른 곡에서도 그렇듯 고전주의적이지 않은)이어서 낭만주의자들에게 더욱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이 곡에서는 발터와 콜롬비아의 앙상블이 눈부시다. 물결을 타며 "노래"하듯 흘러나오는 소리가 공간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듣는 이에게 평온함과 사색의 여유를 준다. 명상과 사유 - 이 앨범에는 그의 또 다른 절대적 명연으로 알려진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도 들어 있어 그의 온화하고 고매한 인품의 흔적을 느낄 수 있으며, 더더욱 아늑하고 평온한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발터는 물질주의를 대단히 혐오하였고, 정신의 고귀함을 추구했다. 그래서 "전쟁이나 혁명, 정치적 개조-1차 대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학과 음악, 학문과 인간성이 자신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었던, 그래서 "우리의 음악이 생겨난 세계, 인간 정신의 위대한 업적이 만들어 낸 세계"를 가꾸는 데 일생을 바쳐왔다. 정신주의의 추구, 예술을 위한 예술, 그리하여 '신학에서 미학으로'를 목표로 하는 부르주아 미학의 윤곽을 그리면서 브루노 발터의 앙상블을 떠올리는 것이 그리 부당하진 않으리라. 이렇게 볼 때 그가, 물질주의에 대한 스스로의 혐오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자화된 음악, 상품화된 음악의 현실(음반시장)에 만년을 맡긴 것은 아이러니라기보다 오히려 '미학의 종말'에 가까운 셈이다.
쿠르트 잔데를링(Kurt Sanderling, 1912~)
독일에서 잔데를링의 음악 경력은 가수 연습 코치가 전부인데, 그나마 이조차 1933년 아리안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그만둬야 했다. 1936년 (특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는 소련으로 망명을 떠났으며, 모스크바 방송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로 데뷔한다. 1941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있으면서, 므라빈스키와 함께 사회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를 이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이 심화되고, 베를린 분단이 기정 사실화되자, 베를린 전체의 지원 아래 있던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단원들 상당수가 서베를린에 살고 있었던 까닭에, 이들이 연주하러 동베를린으로 올 수 없게 된 것이다. 동베를린에 거주하는 수많은 젊은-거의 초심자들이었던 음악인들이 위기에 빠진 이 오케스트라를 살리려고 자원하는데, 이때 이들을 가르쳐 이 오케스트라를 구원한 사람이 바로 잔데를링이다. 당시 그는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상태였고, 소련의 음악 정책상으로도 그에겐 동독으로 돌아와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7년 동안 베를린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로 있으면서 그는 이 오케스트라를 서독의 카라얀-베를린 필하모니에 필적하는 오케스트라로 만들었다. 1964년에는 3년간 드레스덴 국립 교향악단의 지휘도 맡으며,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등 동독의 유수한 교향악단을 이끌고 서방세계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1979년 동경의 Nippon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정기객원 지휘자가 되면서 그의 연주 여행은 이제 동서를 넘나드는데,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LA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활동하다 90세가 되는 2002년 올해 은퇴하였다.
그의 레퍼토리는 대단히 넓으며, 동시대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쇼스타코비치 - 생전의 쇼스타코비치를 기억하는 살아있는 지휘자여서 그는 종종 상당히 곤란한 질문을 받는다. 쇼스타코비치가 서방으로 망명했다면 그의 음악이 어땠을까 따위... - 는 물론, 시벨리우스와 말러 전통의 베토벤, 브람스까지 매우 풍부한 레퍼토리로 연주하는데, 오늘 함께 소개하는 그의 앨범은 브람스의 교향곡이다. 브람스 자신 '그러나 베토벤(!)'을 내세우며, 내면화된 형식미를 강조해선지 모르지만 나머지 교향곡과 달리 [교향곡 1번]만큼은 '어둠에서 광명으로'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브람스의 굉장히 강조된 논리적인 형식과 내면적인 이상을 잔데를링은 상당히 냉정한 태도로 그리고 있다. 차분히 진행되는 전개 때문에 브람스 특유의 극적인 구조를 기대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은데, 그 때문에 그의 브람스는 앞서 지휘자들의 브람스와 비교되며 논란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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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는 공연하는데만 사흘(대략 15시간)이 걸리는 대작이다. 이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행사가 바로 바이로이트 축제다. 바그너는 독일의 국민 음악적 전통이 없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옛 독일의 환상-게르만 신화-을 불러오는데 모든 노력을 다했다. 아마도 이 때문에 나치 역시 이를 예의 주시하였으며, 나치 정권 아래 바이로이트 축제는 나치의 선전장이 되었고, 패전 직후 바이로이트 축제는 미군정의 탈나치화 정책에 따라 바로 중단되었다.
1947년 유럽 전후 복구 계획으로 마샬플랜 즉, (서부)독일을 중심으로 서유럽 집단 안보체제, 경제통합체를 건설하는 계획이 수립되는데, 이에 따라 "독일의 재건이 방해받지 않는 선에서 탈나치화가 이뤄져야 한다"-즉, 나치처벌보다 독일 경제 재건이 우선된다는 것이 공언된다. 그리하여 같은 해 '면책특권'(억압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나치에 동조하였다는 증명)이 발부되면서, 전범 재판은 신속하게 종결된다. 푸르트뱅글러, 카라얀은 이때 '면책특권'을 받았으며,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도 부활하게 된다. 바로 이 부활하는 행사에서 푸르트뱅글러가 개막 공연으로 베토벤의 [합창]을 연주하고, 카라얀은 본 공연으로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니벨룽겐의 반지]를 지휘한다. 그 해는 마샬플랜의 성공을 가늠하는 해였고, 그래서 서방 세계의 모든 사람이 이 공연을 주목하였으며, 이 둘은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소리로 바이로이트 콘서트홀을 울렸다. 이 엄청난 두 실황공연을 녹음한 앨범은 독자들이 알고 있듯, 그리고 예측하는 대로 기념비적인 '불후의 명반'이 되었다.
알려진 대로 푸르트뱅글러는 끝까지 '비정치적인 예술가'를 고집했고 그의 이런 음악적 신념은 고상한 신흥세력에 의해 충분히 지지 받았다. 사실,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는 독일 시민사회의 정치이데올로기가 일정하게 실패한 데 잇따른 것이기도 한데, 그리하여 음악에서는 이것이 브람스의 내면화로(사실, 브람스의 심포니는 베토벤 심포니와 정확히 반대다), 바그너의 과대망상(니체마저 진저리를 친)으로 드러난다. 형식미와 내용미 논쟁을 벌이면서 말이다. 정치와 무관한 예술이란 사실 현실을 외면한(혹은 외면하고 싶은) 예술이고, 1920~30년대 전쟁과 혁명의 격정을 지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가속된다. 바로 '예술을 위한 예술'로.
이렇게 해서 어느덧 베토벤은 '귀먹고 불우한 환경에 처한 작곡가의 위대한 인간 승리'-[합창]을 노래한 작곡자가 되고, 푸르트뱅글러는 '나치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영광'-[합창]을 노래한 지휘자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클래식을 인간의 고매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나 듣는 음악으로 숭배(혹은 경멸)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 이들이 지휘하고 연주하며 듣고 감상하는 음악이 되었다. 너무 정상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과정이라고 보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