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투쟁의 대중화와 운동진영의 과제
1. 글을 시작하며
지난 11월 30일 저녁, 종묘에서 민중대회 정리집회를 마치고 광화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긴장되면서도 빨라지고 있었다. 과연 몇 명이나 모였을까?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광화문 촛불시위가 처음 있던 날이다. 드디어 광화문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촛불의 행렬! 정말 오래 만에 맛보는 감격과 흥분이었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2천여 명의 중·고등학생과 네티즌들에 대한 고마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진출하는 대중의 역동성!
우리나라는 반미투쟁의 무풍지대에서 열풍지대로, 태풍지대로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살인미군에 대한 주한미군의 무죄평결 이후 폭발하는 대중들의 분노는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현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의정부에서는 사회단체회원과 학생들이 현수막을 들고 미2사단을 휘젓고 다녔고, 연예인들이 집단적으로 시국선언에 나서는가 하면 대통령후보들이 '부시의 직접사과와 소파개정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서약서를 여중생 범대위 앞으로 보내오고 있다. 5년 전 대통령 후보들이 미국의 압력에 굴종하여 IMF와의 합의를 준수하겠다고 서약하던 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 글에서는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대중적인 반미투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또 반미투쟁의 승리를 위한 과제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반미투쟁의 대중화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1)반미투쟁은 80, 90년대의 선도적 투쟁을 거쳐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 투쟁을 계기로 대중적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80년 광주민중항쟁 때 당시 투쟁주체들은 미국의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한 것을 미국이 광주를 도와주러 온 것으로 착각했다. 이처럼 우리 민중은 한국전쟁이후 친미적이었고 미국 문제는 성역이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민중들로 하여금 미국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전환적 계기가 되었다. 80년대 청년학생들은 부산미문화원방화투쟁, 분신투쟁 등 자신의 몸을 던지는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서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 문제를 제기해 나갔다. 이어 90년대에도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주한미군철수를 구호로 하는 선도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같은 8∼90년대 선도적 반미투쟁은 2000년부터 본격화된 대중적인 반미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데 반미투쟁은 1999년 후반부터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사회운동세력들은 미군의 야만적 살인범죄, 매향리 주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미군의 야만적 폭격연습, 노근리 등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학살만행의 폭로 등의 주한미군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몸을 던져 그 해결을 촉구하는 투쟁을 벌여나갔다.
특히 매향리 미군 폭격장 폐쇄투쟁은 매향리 주민들의 참상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국민들 속에서 광범한 호응을 이끌어 내며 강고한 대중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마을 주민들은 물론이고 노동자가 조직적으로 결합하고 청년, 학생, 종교인, 시민단체까지 참여하였다. 이 투쟁은 주한미군기지로 고통받고 있는 다른 지역들 가령 파주, 평택, 군산, 부평 등에서 미군기지반환 투쟁을 촉발시켰다.
매향리 투쟁 이후에도 반미투쟁은 한미소파 개정투쟁, MD저지 투쟁, 부시방한 반대투쟁, F-15K 도입 저지투쟁, WTO시장개방·신자유주의 분쇄 투쟁 등 줄기차게 수행되었다.
이제 반미투쟁은 미군에 의한 두 여중생 살인사건을 계기로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범국민적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군 무죄판결 무효, 살인미군 한국 법정 처벌, 부시 사과, 한미소파 개정 투쟁은 대중적 반미투쟁사에서 새로운 획을 긋는 것이자 7∼80년대의 반독재 민주항쟁에서 반미민중항쟁으로의 발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반미투쟁이 대중화 된 요인
반미투쟁이 대중화된 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대중들 속에서 반미자주의식이 급속히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반미자주의식을 갖게 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1999년 후반부터 전개된 강고한 반미투쟁이 미친 영향 때문이다. 생활적 요구에 기초한 반미투쟁이 대중 속에서 전개됨으로써 대중들은 이제 여러 가지 사안에 관한 반미투쟁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반미투쟁을 범죄시하며 대중과 분리시키려는 정권과 미국의 의도도 거부하고 있다.
대중들의 반미자주의식은 8∼90년대의 사회민주화투쟁의 주체로 참여함으로써 이뤄낸 민중의식의 성장과 민주적 권리의 확대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 노근리나 매향리 주민들은 이전에는 빨갱이로 몰릴까봐 감히 미군 문제를 제기할 엄두조차도 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민주화투쟁은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당하기만 했던 피해주민들로 하여금 당당하게 항의, 투쟁할 수 있도록 추동하였다. 88년에 매향리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대책위를 결성하고 폭격장폐쇄 투쟁을 벌인 것은 그 좋은 예다.
반미투쟁의 대중화 요인으로는 다음으로, 운동주체들이 주객관 정세와 대중의 상태에 대한 과학적 판단에 기초하여 투쟁 과제를 올바로 설정하고, 대중과 함께하는 투쟁을 전개한 것을 들 수 있다.
운동주체들은 주한미군철수라는 선언적 구호에만 머물렀던 학생 중심의 선도적 투쟁을 극복하고 주한미군철수의 기본 관점을 확고히 하되 정세와 대중의 구체적 요구에 근거한 반미사안을 투쟁과제로 설정하고 대중적 투쟁방식을 구사하였다.
1999년 후반과 2000년에는 매향리 등 미군폭격장 폐쇄투쟁, 환경오염 규탄투쟁, 소파개정투쟁, 양민학살진상규명투쟁 등을, 2001년에는 부시정권의 등장에 맞춰 MD저지투쟁과 미국의 침략전쟁 저지투쟁을, 2002년에는 부시의 한반도 전쟁책동 저지 투쟁과 LPP 재협상 투쟁, F-15K 도입 저지 투쟁, 두 여중생 사건 투쟁, 덕수궁터 미대사관 신축 저지투쟁을 위와 같은 관점과 방식으로 전개함으로써 성과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정세와 대중의 요구에 근거한 실천투쟁 과정에서 '주한미군 철수'라는 선전적 구호는 구체적인 과제들과 결합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대중 자신의 요구로 받아들여져 가고 있다. 이로써 미군철수 요구에 대한 입장 차이를 둘러싼 소모적 논란이 종식되고 반미투쟁의 정치적 통일성도 크게 높아졌다.
운동주체들의 강고한 투쟁 또한, 반미투쟁의 대중화를 이뤄낸 중요한 요인이다. 운동주체들은 정권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구속에 굴하지 않고 몸을 던지는 투쟁들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그림자 투쟁과 같은 창조적 투쟁방식도 개발하였다. 바로 이같은 헌신적이고 강고한 반미투쟁이 일상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반미사안이 지속적인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고 대중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반미투쟁이 대중화되게 된 요인으로는 또한, 6·15 남북공동선언과 남북 교류, 협력의 확대라고 하는 새로운 통일정세를 들 수 있다. 지난 아시안게임 때 보여진 것처럼 남북의 화해와 통일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이른바 남침을 억제하기 위해 주한미군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무너져 내리고 있으며 민중들 속에서 미국은 자신의 국익을 위해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가고 있고 주한미군철수가 공론화 되고 있다. 이 같은 높아진 민중들의 자주의식과 통일의식은 미국에 대해서도 이전시기의 불평등하고 굴욕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반미투쟁이 대중화, 일상화된 요인의 하나로는 인터넷의 영향력을 들 수 있다. 예전에는 제도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으면 묻혀 지나갔던 사안들이 인터넷을 통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그와 함께 오노 사건 시기까지 온라인 상에서의 정보공유와 사이버시위에 머물던 네티즌들은 F-15K 도입반대투쟁 때부터 오프라인으로 나와 가두홍보를 하기에 이르렀으며 여중생 투쟁에서는 자발적인 대중투쟁을 조직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반미투쟁의 대중화 요인으로는 미국의 도를 넘는 오만하고 일방주의적인 행태를 들 수 있다. '요즘 미국이 하는 것을 보면 반미감정을 확산시키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촌평처럼 미군의 점령군적 사고방식과 행동이 한국민의 자주의식 성장에 소재와 조건을 제공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 주권과 국민 자존심을 짓밟는 오만한 태도는 북에 대한 일방적인 악의 축 규정, 미군의 살인미군에 대한 미군의 무죄평결, 의정부 미 2사단에 진입한 청년 학생들에 대한 형사처벌 요구, 덕수궁터 미대사관과 직원아파트 신축 기도 등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이러한 미국의 오만하고 일방적인 자세가 대중의 분노를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3. 반미투쟁의 승리를 위하여 해결해야 할 과제
반미투쟁은 대중화, 일상화라고 하는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었으며, 강고한 투쟁 과정에서 부분적 승리를 쟁취하기도 하였다.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투쟁의 경우 육상사격장의 폐쇄를 이끌어냈고 주민들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에서 승소하였다. F-15K 도입저지 투쟁은 비록 저지에는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2억 달러의 가격을 삭감하여 민중들의 어깨를 적으나마 덜어주기도 하였다. 여중생 투쟁의 경우, 비록 기만적이긴 하지만 부시의 간접 유감표명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미군 무죄판결 무효화와 살인미군 처벌, 소파 전면개정, 그리고 용산·매향리·파주 등 미군기지 전면 반환 투쟁, 신자유주의 분쇄 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아가 미국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반미투쟁을 더욱 발전시켜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다.
우선 반미투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미투쟁의 주력군인 노, 농, 빈 등 기층민중들이 투쟁의 확고한 주체로 나서야 한다. 반미투쟁이 각계각층이 고루 참여하는 대중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 학생 등 각각에 대해서 보면 아직 소수의 대중들만이 참가하고 있다. 노동자대표들은 가끔 반미집회에 참여해서 "이제야 참여하게 되서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는 고백을 하고는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격렬한 공세 앞에서 생존권을 사수하고 자신의 조직을 사수하는데 아직 힘겨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판단된다. 신자유주의 공세를 퍼붓는 미국계 초국적 자본의 경제적 지배를 뒷받침하는 물질적 토대, 물리적 힘은 바로 주한미군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배이기 때문에 기층민중들은 미국의 군사적 지배를 척결하기 위한 투쟁을 자신의 중심적 과제로 받아 안아야 한다.
반미투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또한 민중운동진영의 헌신적인 투쟁자세와 관점이 바로 서 있어야 한다. 특히 제기된 사안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상당수 운동단체들이 사건이 대중적으로 공분을 일으키고 언론에서 계속 다룰 때는 투쟁에 동참하고 관심을 보이다가, 미국을 대상으로 한 투쟁의 속성상 투쟁이 장기화되고 지지부진해지면 관심도 떨어지고 또 다른 이슈로 발걸음을 옮겨가는 잘못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잘못된 풍토가 혁신되지 않고서는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승리도 쟁취할 수 없다.
또한 운동진영의 정치적, 실천적 통일성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층민중들이 반미투쟁의 주체로 나서기 위해서는 민족자주진영이 민중들의 생존권투쟁,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유주의반대투쟁과 반미투쟁은 상호 대립되거나 선택적인 사안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둘 다 미국을 반대하는 투쟁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한미군철수투쟁이 승리하는 것은 기층 민중들이 주력부대로 나설 때만이 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학생들이 노학연대 선봉대를 결성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의미가 있었는데, 민족자주진영은 헌신적으로 반신자유주의투쟁에 함께 함으로써 민중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으면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단지 경제적 요구에 머무르지 않고 반제투쟁으로 상승 발전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반미투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선전홍보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미관계에 대해 과학적이고 체계적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미군범죄와 범죄를 저지른 미군의 오만함에 대한 규탄에 머무르지 않고 미국이 어떻게 한국을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지를 대중들이 알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대중들의 즉자적 분노는 오노 사건 이후 미국제품불매운동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맥도날드 햄버거와 코카콜라로 대표되는 미국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즉자적으로 제안하는 대중들의 의식의 제한성을 방관할 것이 아니라 미국이 어떻게 신자유주의를 관철하면서 우리 경제를 약탈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여야 한다. 여중생을 죽인 주한미군의 모국인 미국의 초국적 자본이 어떻게 우리 민중을 서서히 죽어가게 하고 있는가를 대중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대중의식화에 있어서 창조적 모색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PSSP
지난 11월 30일 저녁, 종묘에서 민중대회 정리집회를 마치고 광화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긴장되면서도 빨라지고 있었다. 과연 몇 명이나 모였을까?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광화문 촛불시위가 처음 있던 날이다. 드디어 광화문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촛불의 행렬! 정말 오래 만에 맛보는 감격과 흥분이었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2천여 명의 중·고등학생과 네티즌들에 대한 고마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진출하는 대중의 역동성!
우리나라는 반미투쟁의 무풍지대에서 열풍지대로, 태풍지대로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살인미군에 대한 주한미군의 무죄평결 이후 폭발하는 대중들의 분노는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현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의정부에서는 사회단체회원과 학생들이 현수막을 들고 미2사단을 휘젓고 다녔고, 연예인들이 집단적으로 시국선언에 나서는가 하면 대통령후보들이 '부시의 직접사과와 소파개정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서약서를 여중생 범대위 앞으로 보내오고 있다. 5년 전 대통령 후보들이 미국의 압력에 굴종하여 IMF와의 합의를 준수하겠다고 서약하던 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 글에서는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대중적인 반미투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또 반미투쟁의 승리를 위한 과제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반미투쟁의 대중화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1)반미투쟁은 80, 90년대의 선도적 투쟁을 거쳐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 투쟁을 계기로 대중적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80년 광주민중항쟁 때 당시 투쟁주체들은 미국의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한 것을 미국이 광주를 도와주러 온 것으로 착각했다. 이처럼 우리 민중은 한국전쟁이후 친미적이었고 미국 문제는 성역이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민중들로 하여금 미국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전환적 계기가 되었다. 80년대 청년학생들은 부산미문화원방화투쟁, 분신투쟁 등 자신의 몸을 던지는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서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 문제를 제기해 나갔다. 이어 90년대에도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주한미군철수를 구호로 하는 선도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같은 8∼90년대 선도적 반미투쟁은 2000년부터 본격화된 대중적인 반미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데 반미투쟁은 1999년 후반부터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사회운동세력들은 미군의 야만적 살인범죄, 매향리 주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미군의 야만적 폭격연습, 노근리 등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학살만행의 폭로 등의 주한미군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몸을 던져 그 해결을 촉구하는 투쟁을 벌여나갔다.
특히 매향리 미군 폭격장 폐쇄투쟁은 매향리 주민들의 참상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국민들 속에서 광범한 호응을 이끌어 내며 강고한 대중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마을 주민들은 물론이고 노동자가 조직적으로 결합하고 청년, 학생, 종교인, 시민단체까지 참여하였다. 이 투쟁은 주한미군기지로 고통받고 있는 다른 지역들 가령 파주, 평택, 군산, 부평 등에서 미군기지반환 투쟁을 촉발시켰다.
매향리 투쟁 이후에도 반미투쟁은 한미소파 개정투쟁, MD저지 투쟁, 부시방한 반대투쟁, F-15K 도입 저지투쟁, WTO시장개방·신자유주의 분쇄 투쟁 등 줄기차게 수행되었다.
이제 반미투쟁은 미군에 의한 두 여중생 살인사건을 계기로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범국민적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군 무죄판결 무효, 살인미군 한국 법정 처벌, 부시 사과, 한미소파 개정 투쟁은 대중적 반미투쟁사에서 새로운 획을 긋는 것이자 7∼80년대의 반독재 민주항쟁에서 반미민중항쟁으로의 발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반미투쟁이 대중화 된 요인
반미투쟁이 대중화된 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대중들 속에서 반미자주의식이 급속히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반미자주의식을 갖게 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1999년 후반부터 전개된 강고한 반미투쟁이 미친 영향 때문이다. 생활적 요구에 기초한 반미투쟁이 대중 속에서 전개됨으로써 대중들은 이제 여러 가지 사안에 관한 반미투쟁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반미투쟁을 범죄시하며 대중과 분리시키려는 정권과 미국의 의도도 거부하고 있다.
대중들의 반미자주의식은 8∼90년대의 사회민주화투쟁의 주체로 참여함으로써 이뤄낸 민중의식의 성장과 민주적 권리의 확대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 노근리나 매향리 주민들은 이전에는 빨갱이로 몰릴까봐 감히 미군 문제를 제기할 엄두조차도 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민주화투쟁은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당하기만 했던 피해주민들로 하여금 당당하게 항의, 투쟁할 수 있도록 추동하였다. 88년에 매향리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대책위를 결성하고 폭격장폐쇄 투쟁을 벌인 것은 그 좋은 예다.
반미투쟁의 대중화 요인으로는 다음으로, 운동주체들이 주객관 정세와 대중의 상태에 대한 과학적 판단에 기초하여 투쟁 과제를 올바로 설정하고, 대중과 함께하는 투쟁을 전개한 것을 들 수 있다.
운동주체들은 주한미군철수라는 선언적 구호에만 머물렀던 학생 중심의 선도적 투쟁을 극복하고 주한미군철수의 기본 관점을 확고히 하되 정세와 대중의 구체적 요구에 근거한 반미사안을 투쟁과제로 설정하고 대중적 투쟁방식을 구사하였다.
1999년 후반과 2000년에는 매향리 등 미군폭격장 폐쇄투쟁, 환경오염 규탄투쟁, 소파개정투쟁, 양민학살진상규명투쟁 등을, 2001년에는 부시정권의 등장에 맞춰 MD저지투쟁과 미국의 침략전쟁 저지투쟁을, 2002년에는 부시의 한반도 전쟁책동 저지 투쟁과 LPP 재협상 투쟁, F-15K 도입 저지 투쟁, 두 여중생 사건 투쟁, 덕수궁터 미대사관 신축 저지투쟁을 위와 같은 관점과 방식으로 전개함으로써 성과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정세와 대중의 요구에 근거한 실천투쟁 과정에서 '주한미군 철수'라는 선전적 구호는 구체적인 과제들과 결합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대중 자신의 요구로 받아들여져 가고 있다. 이로써 미군철수 요구에 대한 입장 차이를 둘러싼 소모적 논란이 종식되고 반미투쟁의 정치적 통일성도 크게 높아졌다.
운동주체들의 강고한 투쟁 또한, 반미투쟁의 대중화를 이뤄낸 중요한 요인이다. 운동주체들은 정권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구속에 굴하지 않고 몸을 던지는 투쟁들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그림자 투쟁과 같은 창조적 투쟁방식도 개발하였다. 바로 이같은 헌신적이고 강고한 반미투쟁이 일상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반미사안이 지속적인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고 대중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반미투쟁이 대중화되게 된 요인으로는 또한, 6·15 남북공동선언과 남북 교류, 협력의 확대라고 하는 새로운 통일정세를 들 수 있다. 지난 아시안게임 때 보여진 것처럼 남북의 화해와 통일의 기운이 높아지면서 이른바 남침을 억제하기 위해 주한미군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무너져 내리고 있으며 민중들 속에서 미국은 자신의 국익을 위해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가고 있고 주한미군철수가 공론화 되고 있다. 이 같은 높아진 민중들의 자주의식과 통일의식은 미국에 대해서도 이전시기의 불평등하고 굴욕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반미투쟁이 대중화, 일상화된 요인의 하나로는 인터넷의 영향력을 들 수 있다. 예전에는 제도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으면 묻혀 지나갔던 사안들이 인터넷을 통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그와 함께 오노 사건 시기까지 온라인 상에서의 정보공유와 사이버시위에 머물던 네티즌들은 F-15K 도입반대투쟁 때부터 오프라인으로 나와 가두홍보를 하기에 이르렀으며 여중생 투쟁에서는 자발적인 대중투쟁을 조직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반미투쟁의 대중화 요인으로는 미국의 도를 넘는 오만하고 일방주의적인 행태를 들 수 있다. '요즘 미국이 하는 것을 보면 반미감정을 확산시키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촌평처럼 미군의 점령군적 사고방식과 행동이 한국민의 자주의식 성장에 소재와 조건을 제공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 주권과 국민 자존심을 짓밟는 오만한 태도는 북에 대한 일방적인 악의 축 규정, 미군의 살인미군에 대한 미군의 무죄평결, 의정부 미 2사단에 진입한 청년 학생들에 대한 형사처벌 요구, 덕수궁터 미대사관과 직원아파트 신축 기도 등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이러한 미국의 오만하고 일방적인 자세가 대중의 분노를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3. 반미투쟁의 승리를 위하여 해결해야 할 과제
반미투쟁은 대중화, 일상화라고 하는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었으며, 강고한 투쟁 과정에서 부분적 승리를 쟁취하기도 하였다.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투쟁의 경우 육상사격장의 폐쇄를 이끌어냈고 주민들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에서 승소하였다. F-15K 도입저지 투쟁은 비록 저지에는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2억 달러의 가격을 삭감하여 민중들의 어깨를 적으나마 덜어주기도 하였다. 여중생 투쟁의 경우, 비록 기만적이긴 하지만 부시의 간접 유감표명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미군 무죄판결 무효화와 살인미군 처벌, 소파 전면개정, 그리고 용산·매향리·파주 등 미군기지 전면 반환 투쟁, 신자유주의 분쇄 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아가 미국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반미투쟁을 더욱 발전시켜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다.
우선 반미투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미투쟁의 주력군인 노, 농, 빈 등 기층민중들이 투쟁의 확고한 주체로 나서야 한다. 반미투쟁이 각계각층이 고루 참여하는 대중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 학생 등 각각에 대해서 보면 아직 소수의 대중들만이 참가하고 있다. 노동자대표들은 가끔 반미집회에 참여해서 "이제야 참여하게 되서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는 고백을 하고는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격렬한 공세 앞에서 생존권을 사수하고 자신의 조직을 사수하는데 아직 힘겨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판단된다. 신자유주의 공세를 퍼붓는 미국계 초국적 자본의 경제적 지배를 뒷받침하는 물질적 토대, 물리적 힘은 바로 주한미군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배이기 때문에 기층민중들은 미국의 군사적 지배를 척결하기 위한 투쟁을 자신의 중심적 과제로 받아 안아야 한다.
반미투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또한 민중운동진영의 헌신적인 투쟁자세와 관점이 바로 서 있어야 한다. 특히 제기된 사안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상당수 운동단체들이 사건이 대중적으로 공분을 일으키고 언론에서 계속 다룰 때는 투쟁에 동참하고 관심을 보이다가, 미국을 대상으로 한 투쟁의 속성상 투쟁이 장기화되고 지지부진해지면 관심도 떨어지고 또 다른 이슈로 발걸음을 옮겨가는 잘못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잘못된 풍토가 혁신되지 않고서는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승리도 쟁취할 수 없다.
또한 운동진영의 정치적, 실천적 통일성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층민중들이 반미투쟁의 주체로 나서기 위해서는 민족자주진영이 민중들의 생존권투쟁,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유주의반대투쟁과 반미투쟁은 상호 대립되거나 선택적인 사안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둘 다 미국을 반대하는 투쟁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한미군철수투쟁이 승리하는 것은 기층 민중들이 주력부대로 나설 때만이 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학생들이 노학연대 선봉대를 결성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의미가 있었는데, 민족자주진영은 헌신적으로 반신자유주의투쟁에 함께 함으로써 민중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으면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단지 경제적 요구에 머무르지 않고 반제투쟁으로 상승 발전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반미투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선전홍보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미관계에 대해 과학적이고 체계적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미군범죄와 범죄를 저지른 미군의 오만함에 대한 규탄에 머무르지 않고 미국이 어떻게 한국을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지를 대중들이 알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대중들의 즉자적 분노는 오노 사건 이후 미국제품불매운동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맥도날드 햄버거와 코카콜라로 대표되는 미국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즉자적으로 제안하는 대중들의 의식의 제한성을 방관할 것이 아니라 미국이 어떻게 신자유주의를 관철하면서 우리 경제를 약탈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여야 한다. 여중생을 죽인 주한미군의 모국인 미국의 초국적 자본이 어떻게 우리 민중을 서서히 죽어가게 하고 있는가를 대중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대중의식화에 있어서 창조적 모색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