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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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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의혹 사태의 전망

공성식 | 정책부장
현재의 북한 핵의혹 사태는 여러모로 10년 전 위기 상황과 여러 모로 비교가 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국은 핵무기 등의 대량파괴무기를 생산함으로써 한반도 및 지역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북한이라고 주장하며 북한에게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의 군사적인 위협이야말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라며 북한의 핵의혹의 해소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연계하여 협상을 시도하고 있다. 1년 반 동안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 속으로 몰아 넣는 대가를 치르며 합의를 이루어 냈음에도, 10년이 지난 지금 동일한 문제가 다시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결국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위기(전쟁)와 협상(평화)의 반복 속에서 지속적으로 출현하는 해결되지 않는 갈등(들)이다.
그런데 지난 10년이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북한의 핵문제에 대한 남한 정부의 접근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93년 위기 당시 막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은 '북핵의 선결'을 대북정책의 최우선적인 기조로 삼고, 이를 위해 경제협력을 중단하고 북한에 대한 군사적인 압박을 강화하였다. 더구나 남한이 배제된 가운데 북-미간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하는 것을 제어하고자 이후 협상국면에서도 북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며 대북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확보하려 애를 썼다. 한편, 현재의 사태에 대한 남한 정부의 행보는 10년 전과 사뭇 다르다. 김대중 대통령 및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북핵의 선결'이라는 원칙은 유지하되, 이 문제를 남북 간의 경제교류와는 분리하여 다룸으로서 오히려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북-미간의 갈등을 제어하려 하고 있다. 나아가 북-미간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이 사태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이런 남한의 변화된 대응이 10년 전과 다른 해결을 가져 올 수 있을까? 북한의 핵을 둘러싼 한반도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설령 이후 해결을 위한 결정적인 조건을 만들어 내는데 결국 실패한 지난 10년을 뛰어 넘는 해결을 가져 올 것인가? 지속적으로 출현하는 위기가 한반도 민중의 절멸의 가능성마저 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핵의혹이 제기된 배경: 제네바합의의 위기
2003년을 전후하여 제네바합의의 이행 문제를 둘러싸고 북-미간의 갈등이 격화되리라는 것은 예상되었던 일이다. 제네바합의에 따르면, 2003년까지 미국은 북한에 2,000메가와트 경수로를 제공해야 하며, 경수로의 주요 핵심부품의 이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북한은 모든 핵물질에 대한 IAEA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공사지연으로 인하여 2003년까지 핵심부품을 인도하기로 한 약속이 지켜질 가망성이 매우 희박해지면서 제네바합의의 이행과 책임방기를 둘러싼 북-미간의 공방이 예상되었다.
미국 정부는 제네바합의를 두 가지 측면에서 고의적으로 '위반'하였다. 하나는 관계정상화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면서 경수로 건설을 실질적으로 지연시킨 것이다. 미국이 제네바합의 이행을 고의적으로 방기한 것은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에너지-식량위기와 김일성 주석 사망 등을 빌미로 '북한붕괴론' 또는 '연착륙론' 등을 적극적으로 유포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북한의 체제가 비교적 안정화되는 모습을 보이자 미국은 제네바합의를 기반으로 협상과 군사력이라는 이중의 경로로 북한의 군사력을 해체하고 점진적으로 북한의 '시장개혁'을 유도한다는 전략으로 선회하게 된다.(페리 프로세스)
그런데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상황은 다시 변화하게 된다.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의 제어 혹은 감축을 효과적으로 이루어내는데 실패했고 오히려 협상의 주도권만 북한에게 내주었다고 비판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제네바합의에 대해, 다루고 있는 의제가 불충분 할 뿐 아니라 북한의 실질적인 군사력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 왔다. 즉, 제네바합의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추가적인 핵의혹의 해소, 미사일 개발 및 수출 문제, 재래식 무기 등과 같은 위협에 대한 북한의 개선을 추구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한-미-일 공조의 강화를 통해 남-북관계, 북-일관계의 진전 속도를 조절하여 대북협상력을 높이고 북한의 개선조치에 대한 보상의 책임을 분산시키려고 하였다. 더구나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 하에 수립된 소위 테러지원국 혹은 불량국가에 대한 보다 강경한 압박과 급격한 변화의 추진이라는 세계적 차원의 전략은 미국의 대북정책 자체를 급속도로 경색시켜 왔다.(악의 축 발언, 선제핵공격 가능성의 언급)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들고 나온 카드가 북한의 '농축우라늄 핵개발 프로그램'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 문제를 활용하여 제네바합의의 이행을 방기해온 자신의 책임을 북한에게 전가하고, 제네바합의에서 다루지 않는 추가적인 핵문제나 미사일-재래식전력의 투명성 확보 또는 감축요구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을 형성하려 했다. 또한 북한의 핵문제를 가지고 남북관계, 북일관계의 진전을 제어하고 이후 자신의 협상력을 극대화하려 했다.
북한이 북미회담에서 새로운 핵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의혹을 시인했는지, 시인했다면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북한과 미국 측에서 나온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3일 켈리 대북특사가 관련 의혹을 제기하자, 다음 날 북한은 이 문제를 포함하는 새로운 협상을 제기했다고 한다. 이후 북한은 "미국의 가중되는 핵압살 위협에 대처해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 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있다는 것을 말해줬다."며 핵의혹을 시인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리고 미국이 불가침 조약을 통해 북한에 대한 핵공격계획 중단을 포함한 불가침을 법적으로 확약한다면 미국의 핵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사찰과 검증조치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은 과거 일본인 납치의혹을 인정하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일본과의 수교를 추진하려고 했고, 경제개혁조치의 실행 신의주 경제특구, 개성공단의 추진 등 개혁·개방의 실험적 모색 등을 통해 경제재건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는 '발전'의 문제보다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그런데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와 정치적 안정이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특히 북-일 수교에 따른 보상금 차원의 일본의 원조와 일본 자본의 유치는 관건적인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미국의 압박에 맞서 역으로 이를 활용하여 미국의 불가침에 대한 약속을 통해 안보상의 위협을 해결하고, 추가적인 관계정상화를 이루어내 경제재건 프로그램의 토대를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전략의 이면에는 9·11 테러 이후 가중되는 미국의 압박과 미국의 대 테러 전쟁의 다음 표적이 자신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따라서 지금의 사태는 단지 새로운 핵 개발 프로그램의 처리를 둘러싼 북-미 양자간의 충돌이 아니라, 제네바합의 이후 지난 10년 간 계속되어 왔던 북-미 관계의 교착상황에서 유지, 온존되어 온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제네바합의의 '평화와 안전'은 미국에게는 자신의 동아시아에서의 정치·군사적 영향력이 유지되는 한에서의 평화와 안전이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이 위협으로 여기고 있는 자신의 군사력을 협상의 카드로 활용하여 체제의 안전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미국의 패권적 전략으로부터 체제를 방어해야 하는 또 다른 현실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해왔다. 그렇게 위기는 계속 되어 왔던 것이다.

국면의 진전: 대립에서 협상으로?
북-미는 사건의 발발 이후 지금까지 '제네바합의'의 파기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해왔다. 미국은 지금의 문제는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위반하고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시도함으로 발생한 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이에 따르면 문제의 해결은 북한이 스스로 잘못된 행동을 중단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핵심적인 부분인 셈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핵의혹을 부정하면서 미국의 주도 하에 중유공급이 중단되자 에너지 생산을 명분으로 동결되었던 핵 시설의 봉인을 해제하고, 원자로 가동을 준비하는 한편, NPT를 탈퇴하였다.
그런데 작년 연말을 거치면서 부시 행정부의 입장이 조금씩 선회하기 시작했다. 1월 15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계획을 폐기하면 에너지와 식량지원 계획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하루 전날에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1994년 북-미간의 제네바합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며, 원자로가 아닌 다른 형태의 발전소를 건설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나섰다.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북-미 불가침조약'에 대해서도, 북한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다른 형태의 문서 보장의 가능성도 계속 언급되고 있다. '선(先)핵계획폐기'라는 원칙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이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없을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협상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북핵사태가 협상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지만 이는 성급한 추측이다. 현재 부시 행정부의 전략은 '잠정적으로' 사태의 진전 속도를 제어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1>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핵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엄격한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북한의 어떤 제안에 대해서도 무시하거나 최소한의 대응을 하는 한편, 2>북한의 핵개발이 진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엔이나 IAEA 등의 국제기구나 국가 간의 외교적인 수단을 활용하고, 3>이후 대화나 협상의 가능성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되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으며, 4>새로운 한국 정부 및 일본 등과의 공동의 행보를 재조율하는 4가지 축에서의 대응을 해 왔다. 이는 1월 22일 존 볼튼 미 국무부 차관의 방한 당시 "더 이상의 상황악화를 방지하고 외교적 해결노력을 지원하는 데 최우선 목표를 두기로" 남한 정부와 합의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이 사태의 지연을 중점에 두고 외교적 수단으로 북한을 압박하는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몇 가지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라크 문제에 대한 고려이다. 유엔무기사찰단의 보고서 제출 시한이 27일로 예정되어 있는 상황임에도 국제적으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를 얻을만한 이라크의 '중대한 위반'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이라크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대 여론도 높아져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핵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남한과 일본 및 주변국들과의 관계에 대한 고려이다. 세계적인 경제 침체 상황에서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통해 이 지역의 새로운 경제활력을 개척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동북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이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만을 고수했을 경우 동맹국 및 협력국과의 마찰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의 진행을 제어하는 가운데 이후 대응책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더욱이 북핵사태가 장기화되는 것 자체가 북한에게는 제재와 비슷한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당장 에너지 위기가 초래될 수도 있고, 남북관계와 북일관계의 진전 역시 교착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코너에 몰린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 들일 수도 있고, 혹은 북한이 핵시위의 수위를 높인다면 이후 강경한 대응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 미국의 계산인 것이다.

남한 정부의 '주도적 역할'의 의미와 한계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역할이 주시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당사자는 북핵문제의 해결과정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이러한 의지는 1월 7일 한, 미, 일 삼자의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에서 중재안을 내놓으며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남한 정부는 미국,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EU) 등과 의견을 조율하며 이 안을 다듬어왔으며,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월 27일 평양에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임특사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북한을 방문, 북한이 먼저 농축우라늄및 플루토늄 핵 개발을 포기하면 북미 협상 및 에너지·식량 지원을 추진하는 '선(先)조치 후(後)협상 및 지원'의 2단계 중재안을 전달할 방침이다. 특히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북-미 불가침조약에 대해, 부시 미 대통령의 대북 체제보장 서한을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이 보증하는 러시아측 중재안에 이를 미 의회 혹은 유엔 등이 추가적으로 지지·보장하는 '투(two) 트랙' 안전보장 방안을 제시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북한이 핵 의혹을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해소할 경우 중유 등 포괄적인 에너지 지원을 추진하고 대대적인 북한에 대한 투자를 지원하는 방안도 제시할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24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정동영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특사가 핵의혹 해소에 대한 대가로 '북한판 마셜플랜'을 추진할 계획이 있음을 밝힌 것과 관련하여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북한판 마셜플랜'은 노무현 당선자가 새로운 경제성장의 비전으로 제시한, 남한을 '동북아경제 허브(중심)'로 육성하겠다는 전략과 밀접히 관련이 있다. 이는 한국을 동북아 물류, 금융, 교역의 국제중심지로 키우겠다는 거대한 그림이다. 현재까지 윤곽을 드러낸 노무현 당선자의 구상은, 시베리아의 풍부한 가스전을 남북, 일본, 중국으로 공급하는 파이프 라인 구축, 남북한을 관통하는 철도망 복원을 통한 시베리아 및 중국과의 철도망 연결 등 도로·교통 인프라 구축, 정보통신 네트워크의 구축 등이며 이를 위해 동북아개발은행을 다국적 기구로 창설하여 국제적인 투자를 유지하고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북한판 마셜플랜'이란 바로 이런 연장선상에서 동북아개발은행이 북한 재건에 필요한 특별기금을 조성·관리하는 한편 남북한, 미·일·중·러 등이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하여, 북한 사회간접자본과 에너지재건 사업을 추진하는 북한의 경제재건 계획이다. 러시아 역시 동해선 복원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일본 역시 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북-일 수교의 추진과 맞물려 비슷한 구상을 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동북아경제 허브 구상 중 핵심적인 부분인 북한을 통과하는 시베리아 가스 파이프라인의 구축은 제네바합의에 의해 약속된 경수로를 대체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되어 왔으며 원자로가 아닌 다른 형태의 에너지 제공을 원하는 부시 행정부의 이해와도 일치한다. 결국 북한에게 보다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단기적으로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내 북미협상의 조건을 만들고 장기적으로 '북한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겠다는 의도이다.
이런 제안에 대해 북한은 어떠한 답을 할 것인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북한 역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외부에서의 자금의 유입을 무엇보다 바라고 있으며 이를 위해 실험적인 개혁·개방을 조심스럽게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으로서도 솔깃한 제안 일 수 있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가 체제의 안전성을 급격하게 훼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 제안은 북한이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일 수 있다. 더구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적인 침체 속에 중심국의 경제 위기를 주변국으로 떠넘기거나 완전히 배제하는 방식으로 기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의 편입은 그 자체로 북한에게 또 다른 재앙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의 남한 정부의 행보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한계는 미국의 정책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미국과 남한 사이에 차이점이 드러나고 있지만, 남한의 대북정책이 미국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강화한다는 전망 하에서 이루어지는 한 그 차이는 같은 전망을 이루기 위한 역할분담 혹은 보완적인 방식에 불과하다. 남한 정부는 여전히 지금의 위기가 북한의 핵의혹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서 미국의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하지 못하며, '한반도의 비핵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김대중 정부 그리고 노무현 차기 정부가 그리고 있는 한반도의 평화는, 미국의 군사적 위상과 역할의 변화 없는, 다시 말해 제국주의적 군사력 하의 평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가 언제든지 뒤집힐 수도 있다는 점을 오늘날 우리는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남한 민중운동의 과제
정치적 협상을 통해 현재의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덧붙여 과연 93년 위기의 해결로서 제네바합의가 가져 왔던 '평화'가 무엇이었는지, 왜 다시 동일한 상황이 10년이 지난 후에도 반복되어서 나타나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제네바합의가 천명했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은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유일한 군사적·정치적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태도에 의해 계속해서 위협받아 왔다. 남한 정부가 이에 대해 명확한 반대의 입장을 가지지 않는 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미국의 이해가 달성될 수 있도록 상황을 조절하는 것일 뿐이다. 겉으로, 그리고 10년 전의 위기에 비해 남한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북한 역시 미국을 모방하여 군사적 대결구도를 증폭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크게 높일 뿐만 아니라, 북한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경쟁의 회오리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미국의 강압적인 전략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스스로의 최소한의 정당성마저 잃을 위험이 있다.
따라서 지속되는 한반도의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한 남한 민중운동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의 선제(핵)공격의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폭로하며, 현재 사태의 책임은 제네바합의를 지속적으로 위반하며 한반도의 위기 가능성을 증폭시켜온 미국에게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미국의 선제(핵)공격 옵션의 포기, 북-미 불가침 조약 체결을 통해 현재의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미국을 비롯하여 남한 정부에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촛불시위와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반전운동의 두 가지의 흐름과 긴밀하게 연계되어야 한다. 현재 촛불시위는 특히 북한의 핵의혹이라는 문제와 결합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지만(노무현 당선자의 자제발언 등) 바로 이 점에서 (역으로) 촛불시위가 더욱 급진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북핵문제의 본질이 적극적으로 토론되고 민중적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에서 한반도 평화의 진정한 적이 미국과 동맹자인 한국의 지배계급이라는 점이 분명해 질 것이다. 전쟁광 김정일을 제어해야 한다는 저들의 주장에 대해서 민중들이 전쟁광 부시를 제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맞서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촛불시위는 미국의 패권적·군사주의적 전략을 반대하는 반미-반전투쟁으로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국제적인 반전운동과 맞물리면서 2003년 미국의 패권적 군사주의적 노선을 저지하는 전지구적 전선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작년부터 '이라크에서 또 다른 미선이와 효순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많은 호응을 얻어 왔다. 동포의 무참한 죽음에서 출발한 남한 민중들의 분노는 이라크 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을 보면서 국제적인 반폭력 운동으로 확장될 수 있다.
평화는 그것을 염원하는 행위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단지, 전쟁을 조장하는 세력과 제도들, 가공할 전쟁도구들을 제어하기 위한 민중의 권력을 형성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주제어
정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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