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1-2.32호

뜨거운 동지애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김진균 | 사회진보연대 지도위원
여기에 이소선 여사께서 오시는 않았습니다만, 제가 이소선 여사를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의 일심 공판 대법정에서 처음 뵈었습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참 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법정에는 청계피복노조의 노동자들이 많이 방청하였습니다. 대중노동운동의 앞장에서 운동하였고 지금은 사이버노동대학을 운영하고 있는 김승호씨는 제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재직하던 때 학생이었는데 그가 운동에 앞장섰던 모습이 눈에 남아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에게 어떻게 노동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1970년의 전태일 분신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해 전태일 때문에 많은 젊은 학생들이 청계천으로 뛰어 갔습니다. 이소선 여사가 지금도 저를 만나면 첫 인사가 '김세균 교수 잘 있어요?'합니다. 이소선 어머니는 70년 당시 만났던 젊은이들을 기억하고 계신 것입니다.
71년 군사정권은 다음해의 유신을 준비하면서 전국에서 6천여 학생들을 징계하였는데 제가 있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도 16명을 제적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1987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만들 때 나중에 보니 71년의 사람들 중에서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출현하여 꾸린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민교협 학단협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전 영역에서 그 71년의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71년 당시 상대 학생이었고 제적된 김상곤 교수가 민교협의 기둥을 세웠고 지금도 교수노조의 사무총장을 맡고 소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민교협 공동의장인 손호철 교수도 71년의 사람입니다. 저는 87년 이 71년의 사람들을 무더기로 만나는 운이 있었습니다. 제가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기반이었습니다.
87년을 생각하면 참 아득합니다. 박종철이라는 학생의 고문치사은폐사건이 폭로되어 바야흐로 장기적 군사정권체제에 균열이 일어나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안보지배체제의 거대한 둑이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박종철이 고문받던 그 곳에 수많은 젊은이가 친구들의 이름을 말하라는 강압을 받으면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의 젊은이들이 또한 이 세상을 바꾸어 볼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또한 71년의 사람들의 뒤를 잇고 있습니다.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선생은 종철의 일주기 때에 뵙게 되었습니다. 이한열을 생각해도 가슴이 메어집니다. 강경대 때는 거리에서 살았습니다. 자식들 때문에 세계관이 바뀌고 사회운동에 태평양보다 넓은 마음으로 뛰어든 어머니-아버지가 유가협과 민가협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젊은이들의 운동을 떠받치는 터전이 되고 있습니다. 민교협 교수들은 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 자식들은 운동현장에서 알아 볼 수 없어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알아봅니다.
저는 학교 경내에 있는 4.19탑 앞에서보다도 박종철 김세진 이재호 등 젊은 학생들의 기념비 앞에 서면 더 가슴이 무거워집니다. 사람들은 저를 4.19세대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1960년 4월에 대학 마지막 학년이었습니다. 역사의식이 약했던 저는 4.19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61년 군사쿠테타을 맞이하여 그 세월, 청장년시기를 군부독재아래에서 살아 왔습니다. 4.19세대를 그냥 그때 그 학생들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는 터전을 경제개발과 독재의 체제에 흡입되어 살아갔습니다. 한편 4.19를 민중혁명이라 인식하고 혹은 남북통일의 대의를 위해 나섰던 4.19세력이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역사적 선각자였습니다. 장기적인 군부독재에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4월혁명의 대의를 살리고 전파하고자 노력한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이 88년에 사월혁명 30주년을 준비하자고 모여서 사월혁명연구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 분들이 저를 불려서 소장의 소임을 맡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저는 송구스럽게도 그 일을 맡아 30주년 기념행사를 치루고 4월혁명의 대의가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연결되도록 사월혁명연구소의 회원들과 마침 사무소를 함께 사용하던 민교협과 함께 노력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교수들은 좀 독특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전국적 규모의 교수 운동단체가 드뭅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특수적 성격의 발로이기도 하고 교수 지식인에게 주어지는 역사적 소임이 크고 이를 마다하지 않고 짊어진 교수들이 경이롭기도 합니다. 80년대의 변혁기를 그냥 지날 수 없는 그 시기에 전국의 교수들이 사회와 대학의 민주화 기치를 내세우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결성하여 한국의 정체성 규정과 지식의 내용을 규정하는 치열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감행했습니다. 저는 이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처음 일년간을 간사제로 하여 힘써 주신 오세철 김대환 유초하 교수들의 노고는 빛났습니다. 다음해 대표제를 채택하였는데 송기숙 교수, 김상기 교수가 나셨고 박영근, 김상곤, 여운승, 박거용 등등 빛나는 분들이 초기에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복무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안목이 투철하고 용기와 정의로운 자세를 갖춘 교수들과 연구자들이 엄혹한 군부독재아래서도 자라고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분들의 힘과 지혜에 저는 몸을 많이 의탁하였습니다. 연대의 기축을 생성-성장하고 있는 민중의 운동에 두었습니다.
민교협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생성한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전노협'을 지원하면서 연대의 폭을 넓혀 갔습니다. 당시 전노협을 만들었던 많은 선진노동자들의 투쟁은 한없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단병호 동지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더구나 97년 이후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의 미명하에 직장에서 내보내지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어 불안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문제가 지금 우리나라 현안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등장하였습니다.
민교협의 출범할 지음에 전국의 교사들이 참교육 이념을 내세우고 전교협을 만들고 이를 전교조로 성장 전화시켰습니다. 반지성적이고 반민주적인 군사독재는 이 교사들을 핍박하였습니다. 민교협 교수들은 전교조에 가입도하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초기의 윤영규. 정해숙 선생의 투쟁 선봉이 빛났고 이부영, 이수호 선생 및 여러 분들이 투쟁의 기운을 떠 받들었습니다. 이분을 보면 교육도 혁명과 투쟁을 함께 한다는 명제를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민교협이 노동 민중 통일 교육 법 여성 등의 여러 영역에서 연대를 해 왔듯이 저도 그 물결에 따라 연대의 영역에서 많이 다녔습니다. 삶의 바탕이 연대이듯이 운동의 바탕도 역시 연대입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이 인류에 참으로 불명예스럽게 감옥에서 평생을 보내는 장기수들을 양산하였습니다. 아무리 분단에 의하여 남북이 적대하는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양심이라는 차원에서 이 분들을 구제하는 어떤 방도도 그 장기수의 수감세월동안에 전혀 추구되지 않았습니다. 장기수분들이 즐겨 모였던 양심수후원의 자리에 보면 거기 나와 있는 60여명의 감옥 년수를 40년, 30년, 20년 그리고 부끄러워하는 10년을 셈해 보면 간단히 천년이 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기가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민족통일에서 우리가 진보적 세상을 꿈꾸어야 하는 그 가장 밑바탕에서는 인간에 대한 겸허한 자세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 깔려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남북의 통일과정에서 이 가치가 추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말하기조차 부끄럽게도 80년부터 4년간 해직되었습니다. 해직교수협의회가 늦게 결성되었지만 독재에 맞서기로 하였습니다. 84년 봄 해직교수들이 외부 단체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고 80년 광주를 비통한 마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저를 위해 후배들이 연구실을 장만해 주어서 거기서 내부 세미나도 하고 월례발표회도 하였는데, 여기에 참석했던 젊은 연구자들은 70년대 군사독재 하에서의 경제발전이 근대화 논자들이 설정한 민주화와 사회적 합리화를 가져온다는 명제가 부당하다는 것을 어떻게 검증하고 이를 극복할 이론적 지향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들어 났습니다. 이를 공론화하기 위하여 1984년 산업사회연구회 (지금은 산업사회학회)를 창설하여, 말하자면 '진보적이고 변혁적인 인식과 실천'을 토론하는 자리로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지금 학술단체협의회에 가입한 진보적 학회들이 연관하여 출현했던 것입니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반 그리고 중반에서 우리 젊은 학도들은 봉건적 유제와 식민지지배의 유물 그리고 장기적 군사독재가 엉켜서 현대 한국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틀과 그 유동적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상의 폭을 전지구적으로, 다시 말하면 부당하게 닫혀 놓았던 사회주의 국가의 사상과 이론 및 제3세계의 현실과 전망을 고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구나 우리 민족이 분단되어있다는 사실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한 치열한 인식의 과정을 지나면서 새롭게 탄생하는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변혁이론이 도입되고 추구되고 한편으로 '인식론적 투쟁'이 진행되는 동시에 이와 유기적 관계 설정을 고민하게 되는 변혁운동 그리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진행을 추진해야 했습니다. 많은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생성하여 이 소임을 맡았습니다. 아마도 80년대는 이전의 역사를 전복케 한 새로운 순환을 예기하는 것이었습니다. 87이후의 역사는 대중적이고 봉기적인 반독재투쟁을 사회의 여러 영역과 수준에서 적극적인 차원에서 민주화를 위해 조직화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조직화차원의 투쟁이 오히려 치열하고 끈질긴 것이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는 민족 통일 과제와 동시에 민족해방적 과제 그리고 계급운동을 통한 변혁적 과제를 중심에 놓고 '민족-민중 지향적 학문'을 주창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전략적으로 민중의 개념이 설정되기도 하였습니다. 민중과 민족, 민중과 계급의 관계가 정밀하게 검토되고 사회운동에서 이들이 유기적 긴장관계를 갖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과제는 일국적 수준에서만 검토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자본주의 일반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과 주변 그리고 반주변을 세계적 차원에서의 축적 문제를 천착하게 하였습니다. 이 축적에서 '국가'의 위상도 검토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과제는 우리 역사를 더 반공의 장벽에서 갇혀 두었던 현대사에 남북한 전체를 아울리게 하는 연구방향으로 인도하게 하였습니다.
90년대를 지나면서 변혁적 과제 혹은 계급-민중적 과제 혹은 민족적 과제가 마치 완화된 듯한 풍조가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저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통일을 통한 동아시아의 안정적이고 진보적 관계가 설정될 때까지는 '민족 지향적 인식'이 발전적이고 진보적인 맥락에서 추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편 한국이 더 철저하게 편입되었듯이 전 세계가 자본주의 획일적 체제에 편입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따라 투자 제국이 건설되고 있는 마당에 노동자와 일반 민중은 지구촌 어디를 떠돌아도 불안정한 삶에 내몰리고 있으므로 확대된 민중-계급의 패러다임도 동시에 진보적인 전망에서 추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 개인적으로 보면 비판적 근대론으로부터 80년대 중반 민중-계급론을 도입하여 민족사회학 내지 민중사회학 구성을 위해 노력했던 긴장을 지금도 놓칠 수 없습니다. 제가 위에서 널어놓은 정세에서는 민족/ 민중/계급의 개념을 더 활용하고자 합니다. 연구자는 학문의 길에서나 실천적 차원에서 채택하는 이론과 개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자본주의 모순이 지탱하거나 증폭하고 있는 사태에서는 자기가 채택하는 이론이나 개념이 우선 불안정한 삶에 내몰리고 있는 노동자 /민중에게 어떤 효과를 주고 있는가에 대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이를 위한 국가권력의 행사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인지 혹은 이를 알려 내고 억제하고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살펴야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지식인 -교수 -연구자의 윤리적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 노력해 보았고 또한 이런 차원에서 연구자들, 교수들 그리고 활동가들과 한 방향으로 갔던 길이 저 생애에 무척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노동/비노동 - 고용/비고용 / 임금소득/ 사회적 소득 - 생계와 안정된 삶의 터전이라는 인식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비정규직이 보편적 현상이라면 이를 안정적인 인간적 삶의 방식으로 이르게 하는 인식론적 문제가 제기되고 이를 위한 기획이 개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에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여성(이도 여러 차원에서 세분됩니다.) 어린이, 외국인 노동자, 탈북자, 동성연애자 등을 이 맥락에 놓고 사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젊은 활동가들이 모인 사회진보연대와 진보네트워크센터가 기존의 운동단체에 더 붙여져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제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제는 이 나이까지 학술적 차원이나 실천적 마당에서 저질은 허물이 당연히 있었습니다. 이를 너무 탓하지 마시고 그것을 살짝 밟고 넘어 가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민중대회에나 노동자 대회에서 인사하는 방식를 잠깐 빌리고자 합니다. "뜨거운 동지애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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