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정치개혁 전망
한국사회 최후의 '유보된 영역' 정치개혁?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만에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집권여당으로부터 당의 발전적 해체 제안이 나오고, 새 정부의 첫 총리 인선을 앞두고 대통령 당선자가 한껏 몸을 낮추어 야당을 찾아가 협조를 구하는 모습이 연출되는 등 16대 대통령 선거 이후 정치권의 모습은 과거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닌게 아니라, 대선 공간을 갈라 치기 했던 두 개의 거대 정당에서는 모두 당 개혁을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당의 체질과 골격을 탈바꿈하는 수준에서의 정당개혁 논의들을 진행중이다. 본격적인 선거 국면이라 볼 수 있는 작년 하반기 이후의 선거지형을 되돌아본다면 정치개혁이라 명명되는 이러한 흐름들의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낙선, 낙천 류의 선거공간 외부에서 벌어졌던 캠페인을 넘어서 노사모를 대표로 대중들의 자발적인 직접행동이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으로 나타났던 것이 16대 대통령 선거였다. 물론 이는 개혁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는 정치개혁의 필요성이 다른 한편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유력한 당선 후보의 선거공조가 선거전야가 되어서야 깨어져 나가는 사상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은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거의 최저치에 가까운 수준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무관심이라는 말로 쉽게 정리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지배정치가 느끼는 위기감은 이렇듯 몇 마디 말로써 손쉽게 정리될 만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이는 집권여당이나 야당, 심지어 이제 막 제도 정치권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 진보정당에도 공히 해당되는 문제이다. 더 많은 개혁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구호 속에 걸어온 지난 10여년 동안 적지 않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개혁에는 미치지 못했던 '유보된 영역'으로서의 정치개혁이 바야흐로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리고 벌써부터 민중운동 내 일부 세력들은 정치개혁 논의 속에서 자신의 운동전망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의 무망함은 이미 87년 투쟁의 성과를 자신의 개혁이미지의 형성에 완벽하게 동원해낸 노무현과 그의 당선의 주요 동력인 386들의 현재적 상태를 통해 드러났다. 여기서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민주화 이행의 시기'라 재해석된 87년 투쟁 이후의 일련의 정치개혁 차원의 흐름들을 살펴 볼 것이다. 또한 실패한 정부의 집권여당이 이제껏 경험해 본적이 없는 대중동원 방식을 통해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현재의 조건, 그로부터 정치개혁이 제기되는 맥락에 대해 간단히 검토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검토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인데, 민중운동의 부활, 대중투쟁의 강화와 자유주의적 정치개혁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민주투사, 5공 청산의 주역 노무현? 민중운동의 몰락과 자유주의의 정치적 승리
한국 부르주아 정치에 있어서 87년 6월 투쟁은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수렴되었다. 6월 투쟁 이후 국민투표에 의해 결정된 새 헌법의 채택이 당시까지 제정이래 아홉 번에 이른 헌법개정의 역사상 최초로 여야 간의 합의에 의해 가능했으며, 이로써 직접, 보통 선거에 의한 대통령의 선출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노태우 집권 초기인 88년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민정당이 국회의석 과반수를 차지하는데 실패하면서 형성된, 이 역시 역사상 최초인 여소야대 국면은 이후의 민주적 이행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있어 상당히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정지지형은 군사정권 하에서 행정부의 시녀로서 기능하던 국회의 기능이 정부에 대한 의회조사권의 발동과 같은 조치들에 의해 일정하게 정상화되는 것으로 비추어 졌으며, 그것이 절정이 5공 청문회와 같은 군사독재의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들이었다. 익히 알고 있듯이 노태우 정권 하의, 개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일련의 조치들은 90년의 삼당합당을 통한 거대여당의 부활로서 막을 내리게 되고, 이로써 민주적 이행의 문을 열어제치며 출범했다고 하는 한국사회 최후의 군부정권인 6공화국은 91년 투쟁의 불씨를 제공하는 것으로써, 즉 반동적 권력재편의 국면을 여는 것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국사회에 개혁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인 김영삼 정권 시기로 가면, 정치개혁은 급물살을 타게된다. 30년만의 문민정부 수립으로 들썩거렸던 당시를 돌아보면, 정치개혁 차원의 많은 조치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은 문민정부의 정통성 강화와 통치기반의 확립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당시의 일련의 조치들을 몇 가지로 분류해 보자면, 문민정권의 정통성 강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 과거 군사정권 하의 각종 초법적 권력기관들에 대한 개혁의 단행이다. 이 때 군, 검, 경 및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 졌는데, 전두환에 의해 조직된 군대파벌인 하나회를 해체하는 것을 비롯해, 군의 독점적 권한 하에 추진되었던 율곡사업에 대한 국정감사, 안기부법 개정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군사정권의 억압적 통치질서와 분리선을 긋고, 문민정권의 정통성을 획득하고자 했던 이러한 조치들은 상해임시정부로부터 그 연원을 가져오고, 4·19, 5·18을 민중혁명으로 복권시키는 한편에서의 직업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부정부패 척결 차원의 조치들도 대통령본인의 재산공개를 시작으로 공직자윤리법 개정 등을 통해 추진되나갔는데, 이의 백미는 정치자금의 투명화, 지하경제의 근절을 명분으로 했던 금융실명제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선거관련 법들의 전반적인 개정이 추진되었는데, 선거비용의 축소, 여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비례대표제의 개선 등을 포함하는 선거법의 개정, 국고보조금 중대의 방향으로 정치자금의 투명화를 골자로 하는 정치자금법의 개정, 지방선거법의 개정으로 지자제 선거를 부활시켰던 것 등이 그 내용이다. 또한 의회정치의 활성화와 정당개혁 차원의 조치들도 빠지지 않았는데,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부터 총무처의 역할을 대폭 축소한다거나 국회의 심의, 의결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으로 국회법 개정 등도 추진되었다. 그야말로 개혁의 드라이브라 할 만한 제도적 변화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집권여당에 의해 꼭두새벽에 관광버스를 대절하며 감행되었던 노동법, 안기부 법 날치기 통과, 끊이지 않았던 재벌들에 대한 시혜조치를 둘러싼 시비가 단지 법과 제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낡은 관행, 부르주아들의 도덕적 해이로 치부되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태우, 김영삼 정권 당시의 정치개혁이라는 것은 87년 투쟁의 성과를 '민주적 이행'이라는 이름 하에 제도정치 안으로 수렴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의 진전과 군부정치의 종식의 궤적에서 87년 투쟁과 같은 80년대 광범위하게 분출했던 대중들의 투쟁을 삭제해 나가는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김영삼 정권 당시 정치개혁 차원에서 금융실명제가 도입되었다는 측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이 정리해고 법제화(96년말 노동법 개악), 개방화조치(94년 우루과이 라운드)등을 통해 이미 김영삼 정권 당시부터 본격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정치개혁이라는 것이 문민정부의 정통성 확립 차원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만 설명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추진하기에 반공, 발전, 지역주의에 지나치게 길들여진 한국의 낡은 정치체제는 그다지 적합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노무현 당선 직후의 수많은 용비어천가들이 노무현에게 부여한 87년 민주투사, 5공 청문회스타라는 칭호는 민중운동의 몰락이 가져온 자유주의 세력의 정치적 승리가 불러온 비극으로 볼 수 있다.
김대중 미완의 개혁과 노무현의 개혁과제, 그리고 정치개혁
새삼스레 재론하지만, 국가의 실패로부터 작은 정부를 구현하고자 했던 신보수주의와는 다르게 정책개혁을 통해 새로운 경제정책과 통치체제를 구축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일컬어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IMF 구제금융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당선과 동시에 정권을 인수받으며 초법적 권한을 가지고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한국경제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체질개선을 위한 본격적인 정책개혁에 착수하였으며 이는 구조조정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축적의 위기에 빠진 자본의 금융적 확장에 조응하는 형태로 한국경제를 재조직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닌 이러한 정책개혁은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발생하는 계층간, 민족국가간, 인종간, 성별 갈등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사회적 배제와 갈등을 내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김대중 정권 구조조정 과정을 돌아본다면 이러한 사실은 명확한데, 부의 편중과 사회적 양극화에 따른 다양한 갈등들이 항상적으로 사회 문제화되었으며, 이는 집권 초반의 금모으기 류와 같은 국민동원방식으로만 관리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렇듯 근본적인 위기의 치유가 아닌 관리정책으로서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그에 적합한 통치체제 구축이 필수적이며, 이것이 불가능해 졌을 때 위기관리는 더 이상의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김대중 정권 초기를 돌아보자면, 386개혁세력들과 시민운동세력들을 대거 흡수해내는 방식으로 일정하게 신자유주의 통치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듯 해 보였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신자유주의 지지연합의 형성이라 했으며, 이로써 김영삼 문민정부가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개량적 운동세력들에 대한 체제 내로의 포섭이 일정하게 달성되는 것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지연합만으로 성공적인 개혁의 완수는 불가능했는데, 잊혀질만하면 터져나왔던 각종의 게이트나 경제위기 극복의 수혜가 일부 중산층에게로 집중되는 것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구조조정 정책의 효과와 지배계급의 정당성에 대한 회복불가능한 불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2001년 10월의 재보선과 2003년 6·13 총선에서 민주당의 참패를 불러왔는데, 이는 집권여당, 김대중식 개혁에 대한 지지철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당시의 낮은 투표율을 고려한다면 대중들의 회복되지 않는 삶의 위기가 결합되면서 정치일반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이 어느 때보다 팽배했던 것으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있어 관건이 실행 능력에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정치적 정당성의 확보와 안정적인 통치체제의 구축은 실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정치개혁에 있어서의 김대중 정권의 성적표는 역대 정권, 특히 앞서 살펴본 김영삼 정권 당시의 그것과 비교해도 극히 초라한 수준이다. 15대 대선 당시 내걸었던 정치개혁 관련 공약을 보면 자민련과의 공조상황에서 대부분의 내용이 행정부 개혁에 맞추어져 있으며, 실재로 추진된 것들은 시민단체를 앞세운 부패방지법제정이나 국가인권위원회법 제정 등과 같은 과거청산 류의 개혁입법 제정에 초점이 가 있었다.
이러한 김대중 정권의 비판적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당선된 노무현 정권 정책개혁에 있어 관건은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관리 지향적 정책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대중적 지지기반과 정치세력의 구축을 통해 통치체제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요컨대 김대중 정권 정책개혁 당시 위기 이전상황으로의 회기에 집중하면서 미쳐 손쓸 수 없었던 영역에 본격적으로 관리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다. 전자에 있어서는 당선 이후 인수위를 통해 쏟아져 나온 각종의 정책과제들을 통해 대강의 윤각은 드러난 셈이다. 예상했듯이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조치의 강화, 여성인력활용에 초점이 맞추어진 여성정책, 사회복지체계의 재조직 등이 여기에 대거 포함되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치영역인데, 각종 분야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에도 미달하는 수준의 개혁처방이 가해진, 가장 낙후된 형태로 남아있던 곳이 바로 여기이다.
현재까지 보여진 노무현 당선자의 정치개혁의 대한 의지는 단호하다. 1월 7일 인수위에서 발표한 10대 국정과제는 애초 8대 과제였던 것이 당선자의 지시에 의해 정치개혁과 과학기술 육성이 추가되는 형태로 수정되었다. 물론 인수위 설치 당시부터 당선자의 집적 지시에 의해 정무분과 산하에 정치개혁연구실을 신설하고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학자 임혁백, 정해구 등을 실장과 연구위원으로 선임한 바 있었다. 인수위 발표에 의하면 정치개혁연구실은 당선자의 국정철학과 공약실현을 뒷받침할 제도개선 방안을 연구, 특히 정당과 선거구제, 정치자금 등 정치관련 제도의 개선안을 만들어 정치권에 제안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 한다.
노무현 정부 정치개혁 전망,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현재적으로 노무현 정권이 추진할 정치개혁 구체적인 상을 예측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몰락의 핵심 계기가 되었던 각종의 금융비리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화된 형태의 부패방지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 부분은 김대중 정권 집권 말기의 개정된 부패방지법을 세부적으로 보완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며, 대선 당시 공약에서 한나라당과도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부패방지법개정의 맥락에서 실행해 나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정치권 전반의 관리능력을 제고하는 것과 민주당-노무현이 가지는 지역정당 이미지를 벗고 보다 안정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는 것에 있다. 이 역시 김대중 정권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권력 누수현상과 식물국회, 방탄국회를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현재 노무현의 정국구상과 민주, 한나라 양당 개혁특위의 논의 상황을 보자면, 이는 명확한 삼권분립에 기초하여 의회중심의 정치를 실현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고비용저효율의 정치체계의 주범으로 지목 받고 있는 현재의 정당구조를 혁신하는 것으로 수렴되고 있다.
대선 직후 각 당마다 실시된 각종 토론회 내용이나 개혁특위 논의 상황을 통해 보자면, 정당구조 전반의 혁신이 거론되는데, 주요 방향성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라 할 수 있다. 먼저, 원내정당화를 지향한다는 차원인데, 여기에는 지도체제의 개편 속에서 원내총무의 위상강화, 정책생산 및 합의 기능을 제고하기 위한 위원회 체계의 강화, 확대 등이 해당된다. 두 번째는 선거기능을 중심으로 정당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지구당 폐지 또는 연락사무소 수준으로의 축소, 중앙당의 선거대응능력 제고 및 규모 축소 등이 거론되고 있다. 세 번째는 권위주의적 정당구조를 혁신하는 차원으로 권력집중을 방지하는 방향으로 지도체제를 변화시키는 것, 상향식 공천의 제도화 등이 검토 중이다. 마지막은 국민참여에 개방적이고 당원중심의 정당형태를 지향하는 것으로 지난 대선에서 실험된 국민경선제의 제도화 또는 미국식 예비경선제의 도입, 진성당원확보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 정도면 거의 혁명적 수준의 정당개혁처럼 보일 수 있으나 우리가 보기에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민주, 한나라 양당의 개혁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치개혁의 필요성에 있어 절실함의 차이는 없을지언정, 강조점도 다르고 양립가능하지 않은 정책들이 분열증 적으로 나열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노무현-민주당의 경우 당선의 실재 동력이었던 386과 20대를 정당개혁을 통해 제도적으로 흡수하는 형태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김대중 정권처럼 이들의 지지와 이탈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상황을 방지하는 형태로 정당체제를 재편하는 것에 정치개혁의 궁극적 목적이 있다 할 것이다. 이는 미국식 양당체계로 가야한다는 거듭되는 노무현의 발언을 통해 확인되는바, 대선 당시의 구도로 보자면 '반창세력'들과 경제위기 상황에서조차도 부의 기득권을 상실해 본 경험이 없는 '안정희구 세력들'을 한나라당과 분할 관리한다는 전략인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김대중 지지세력과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세력에 대한 지지층으로 일정하게 고착화되어온 정치지형을 고려한다면, 안정성의 문제가 있지만 아주 불가능한 경로는 아니다. 물론 노무현 당선에 있어 이러한 지형과는 일정하게 다른 조건, 즉 386들과 인터넷 직접행동이라는 새로운 행동양식을 선보이고 있는 20대의 노무현에 대한 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김대중 정권 당시 386들이 보였던 갈지자걸음이 경제적 실리에 기반한 일시적 지지와 철회의 반복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원하는 보다 확실한 개혁의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것은 정치개혁의 전제라 할 수 있다. 대선 당시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지인 월가의 사상검증을 안전하게 통과했을 뿐 아니라, 노골적인 지지선언까지 받아냈던 노무현에게 출발의 조건은 비교적 나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20대인데, 월드컵-촛불시위-노무현 지지로 이어진 이들의 행동양식에서 자기표현, 문화세대라는 일종의 세대적 동질성 이외에는 이렇다할 정치적 동기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386과도 다르게 민주화 투쟁의 경험도, 일시적이나마 금융화의 수혜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저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이며,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전망도 이들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서 여론주도세력이며 여러 측면에서 사회중간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386들의 압도적 지지가 지속될 수 있다면 미국식 양당체제의 모사는 일정하게 가능할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한나라당의 경우 대선 실패 책임론을 둘러싼 당내갈등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정치개혁 방안을 놓고 당권 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으로 쟁점이 옮아가 있는 형국이다. 민주당에 비해 한나라당의 고민은 보다 근본적일 수밖에 없는데, 반공, 발전 전략 속에 유지되어온 보수주의 이념이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망에 적합한 형태로 재정립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에 처하게 된 것이다. 또한 87년 투쟁을 자신들의 개혁적 이미지의 상징조작에 동원하고 있는 386들로 인해 한나라당에게 덧씌워진, 민주주의를 지체시킨 장본인이라는 혐의를 탈피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서의 대중적 동의를 얻기가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정당개혁은 제왕적 총재, 계파정치로 상징되었던 지도체제를 개편하지 않고서는 여타의 개혁조치들이 대중적 설득력을 얻기가 힘든 상황이고 그만큼 상당한 당내 갈등과 진통의 과정을 동반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현재 진행중인 정치개혁, 정당개혁의 폭과 수위를 결정짓는 것은 2004년 총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무현-민주당으로서는 다수당의 지위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집권중반도 넘기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있는 것이고, 한나라당 역시 대선 패배 이후의 쇄신된 당지도력을 검증 받을 수 있는 일차관문인 셈이다. 그런 만큼 정치개혁 논의의 와중에도 구체적 방안과 속도조절을 놓고 양당 모두 당권 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이 첨예한 상황이고, 개혁특위로부터 제안되는 정책들이 다음날이 되면 주요 간부회의에서 철회, 유보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더욱이 개혁특위에서 논의되는 수준의 정당개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적청산, 세대교체 문제가 동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갈등은 총선결과에 의해서 일정하게 강제적 형태로 정리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쟁점은 선거구제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 선거법 개정에서 첨예하게 형성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호남정당을 벗어나 전국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한 민주당의 중대선거구제, 비례대표제와 한나라당의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비례대표제를 도입한다는 방침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예정대로라면 1월 중 국회정치개혁 특위를 통해 국회법, 정치자금법, 정당법, 선거법 등 일련의 정치관계법의 대폭 개정에 대한 합의를 이끈다는 양당간의 협의가 있었으나, 선거구제 문제의 타협여부에 따라, 일정수준에서의 합의가 충분히 가능한 나머지 쟁점들의 처리 수준을 결정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총선 전까지 일정수준에서의 정치개혁은 양당간의 합의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 하 민중운동,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정치권 전반이 정치개혁 논의에 당력을 쏟아 붓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 17일에는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10 여 개의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정치개혁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정치개혁연대)가 출범하였고, 29일에는 여기에 한나라당, 민주당 개혁파 의원 70여명이 가세한 가운데 가칭 '정치개혁추진범국민협의회의' 구성이 합의되었다. 참여연대를 대표로 각종 NGO 수장 급들이 이미 노무현 당선 직후 민주당과 인수위로 흡수되는 것을 보았던 상황에서 이는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이들의 활동 여하에 따라 정당-시민단체로 구성된 안정적인 정치개혁 기구가 국회 내에 신설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긴 시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지배계급의 정치개혁이라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능력을 제고하기 위한 안정적 지지기반과 통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그야말로 '개혁'적인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사가속화 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정치개혁 논의에 편승하여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주류화라는 재단 앞에 운동의 성과를 고스란히 바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해서이다. 87년, 91년 대중투쟁의 성과들이 지배계급의 정치적 정당성을 수립하는 것으로 수렴되는 과정에는 항상적으로 정치개혁이 동반되었으며, 이는 언제나 대중투쟁을 억압하는 것으로 결과했다. 더욱이 지금의 상황이 명확히 시민운동세력의 지배체제로의 흡수가 거의 완료되는 시점에 와 있다는 점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조건은 지속적으로 민중운동진영의 정치적, 계급적 이탈을 불러올 것이며, 지난 대선 당시 일부 노동조합 관료들의 투항선언으로 이미 충분히 가능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또한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진보정당과 노동조합간의 실용적 역할분담, 결과적으로는 노동운동의 실리주의를 고착화시키는 형태의 운동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 정당명부비례제표제의 도입으로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목전에 와 있는 상황에서 지배계급의 정치개혁 논의에 가담하여 현실 가능한 운동의 활로를 모색해 보겠다는 것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구조화시키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더욱이 노무현-민주당의 구상이 386, 20대들에 대한 제도정치로의 수렴을 목적으로 하는 현재 상황에서 지배정치의 정치개혁 논의에 가세하겠다는 것은 이들의 불안정한 삶과 그로부터 나타나는 지배정치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밑불로 던져 넣겠다는 것이다. 지난 김대중 정권 5년 간 민중운동 진영이 벌여온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를 노무현 정권의 등장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민중운동의 몰락의 끝을 기어이 보고야 말 것인가.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한 판단의 기로에 서 있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만에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집권여당으로부터 당의 발전적 해체 제안이 나오고, 새 정부의 첫 총리 인선을 앞두고 대통령 당선자가 한껏 몸을 낮추어 야당을 찾아가 협조를 구하는 모습이 연출되는 등 16대 대통령 선거 이후 정치권의 모습은 과거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닌게 아니라, 대선 공간을 갈라 치기 했던 두 개의 거대 정당에서는 모두 당 개혁을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당의 체질과 골격을 탈바꿈하는 수준에서의 정당개혁 논의들을 진행중이다. 본격적인 선거 국면이라 볼 수 있는 작년 하반기 이후의 선거지형을 되돌아본다면 정치개혁이라 명명되는 이러한 흐름들의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낙선, 낙천 류의 선거공간 외부에서 벌어졌던 캠페인을 넘어서 노사모를 대표로 대중들의 자발적인 직접행동이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으로 나타났던 것이 16대 대통령 선거였다. 물론 이는 개혁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는 정치개혁의 필요성이 다른 한편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유력한 당선 후보의 선거공조가 선거전야가 되어서야 깨어져 나가는 사상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은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거의 최저치에 가까운 수준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무관심이라는 말로 쉽게 정리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지배정치가 느끼는 위기감은 이렇듯 몇 마디 말로써 손쉽게 정리될 만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이는 집권여당이나 야당, 심지어 이제 막 제도 정치권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 진보정당에도 공히 해당되는 문제이다. 더 많은 개혁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구호 속에 걸어온 지난 10여년 동안 적지 않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개혁에는 미치지 못했던 '유보된 영역'으로서의 정치개혁이 바야흐로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리고 벌써부터 민중운동 내 일부 세력들은 정치개혁 논의 속에서 자신의 운동전망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의 무망함은 이미 87년 투쟁의 성과를 자신의 개혁이미지의 형성에 완벽하게 동원해낸 노무현과 그의 당선의 주요 동력인 386들의 현재적 상태를 통해 드러났다. 여기서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민주화 이행의 시기'라 재해석된 87년 투쟁 이후의 일련의 정치개혁 차원의 흐름들을 살펴 볼 것이다. 또한 실패한 정부의 집권여당이 이제껏 경험해 본적이 없는 대중동원 방식을 통해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현재의 조건, 그로부터 정치개혁이 제기되는 맥락에 대해 간단히 검토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검토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인데, 민중운동의 부활, 대중투쟁의 강화와 자유주의적 정치개혁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민주투사, 5공 청산의 주역 노무현? 민중운동의 몰락과 자유주의의 정치적 승리
한국 부르주아 정치에 있어서 87년 6월 투쟁은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수렴되었다. 6월 투쟁 이후 국민투표에 의해 결정된 새 헌법의 채택이 당시까지 제정이래 아홉 번에 이른 헌법개정의 역사상 최초로 여야 간의 합의에 의해 가능했으며, 이로써 직접, 보통 선거에 의한 대통령의 선출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노태우 집권 초기인 88년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민정당이 국회의석 과반수를 차지하는데 실패하면서 형성된, 이 역시 역사상 최초인 여소야대 국면은 이후의 민주적 이행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있어 상당히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정지지형은 군사정권 하에서 행정부의 시녀로서 기능하던 국회의 기능이 정부에 대한 의회조사권의 발동과 같은 조치들에 의해 일정하게 정상화되는 것으로 비추어 졌으며, 그것이 절정이 5공 청문회와 같은 군사독재의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들이었다. 익히 알고 있듯이 노태우 정권 하의, 개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일련의 조치들은 90년의 삼당합당을 통한 거대여당의 부활로서 막을 내리게 되고, 이로써 민주적 이행의 문을 열어제치며 출범했다고 하는 한국사회 최후의 군부정권인 6공화국은 91년 투쟁의 불씨를 제공하는 것으로써, 즉 반동적 권력재편의 국면을 여는 것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국사회에 개혁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인 김영삼 정권 시기로 가면, 정치개혁은 급물살을 타게된다. 30년만의 문민정부 수립으로 들썩거렸던 당시를 돌아보면, 정치개혁 차원의 많은 조치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은 문민정부의 정통성 강화와 통치기반의 확립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당시의 일련의 조치들을 몇 가지로 분류해 보자면, 문민정권의 정통성 강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 과거 군사정권 하의 각종 초법적 권력기관들에 대한 개혁의 단행이다. 이 때 군, 검, 경 및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 졌는데, 전두환에 의해 조직된 군대파벌인 하나회를 해체하는 것을 비롯해, 군의 독점적 권한 하에 추진되었던 율곡사업에 대한 국정감사, 안기부법 개정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군사정권의 억압적 통치질서와 분리선을 긋고, 문민정권의 정통성을 획득하고자 했던 이러한 조치들은 상해임시정부로부터 그 연원을 가져오고, 4·19, 5·18을 민중혁명으로 복권시키는 한편에서의 직업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부정부패 척결 차원의 조치들도 대통령본인의 재산공개를 시작으로 공직자윤리법 개정 등을 통해 추진되나갔는데, 이의 백미는 정치자금의 투명화, 지하경제의 근절을 명분으로 했던 금융실명제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선거관련 법들의 전반적인 개정이 추진되었는데, 선거비용의 축소, 여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비례대표제의 개선 등을 포함하는 선거법의 개정, 국고보조금 중대의 방향으로 정치자금의 투명화를 골자로 하는 정치자금법의 개정, 지방선거법의 개정으로 지자제 선거를 부활시켰던 것 등이 그 내용이다. 또한 의회정치의 활성화와 정당개혁 차원의 조치들도 빠지지 않았는데,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부터 총무처의 역할을 대폭 축소한다거나 국회의 심의, 의결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으로 국회법 개정 등도 추진되었다. 그야말로 개혁의 드라이브라 할 만한 제도적 변화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집권여당에 의해 꼭두새벽에 관광버스를 대절하며 감행되었던 노동법, 안기부 법 날치기 통과, 끊이지 않았던 재벌들에 대한 시혜조치를 둘러싼 시비가 단지 법과 제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낡은 관행, 부르주아들의 도덕적 해이로 치부되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태우, 김영삼 정권 당시의 정치개혁이라는 것은 87년 투쟁의 성과를 '민주적 이행'이라는 이름 하에 제도정치 안으로 수렴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의 진전과 군부정치의 종식의 궤적에서 87년 투쟁과 같은 80년대 광범위하게 분출했던 대중들의 투쟁을 삭제해 나가는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김영삼 정권 당시 정치개혁 차원에서 금융실명제가 도입되었다는 측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이 정리해고 법제화(96년말 노동법 개악), 개방화조치(94년 우루과이 라운드)등을 통해 이미 김영삼 정권 당시부터 본격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정치개혁이라는 것이 문민정부의 정통성 확립 차원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만 설명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추진하기에 반공, 발전, 지역주의에 지나치게 길들여진 한국의 낡은 정치체제는 그다지 적합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노무현 당선 직후의 수많은 용비어천가들이 노무현에게 부여한 87년 민주투사, 5공 청문회스타라는 칭호는 민중운동의 몰락이 가져온 자유주의 세력의 정치적 승리가 불러온 비극으로 볼 수 있다.
김대중 미완의 개혁과 노무현의 개혁과제, 그리고 정치개혁
새삼스레 재론하지만, 국가의 실패로부터 작은 정부를 구현하고자 했던 신보수주의와는 다르게 정책개혁을 통해 새로운 경제정책과 통치체제를 구축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일컬어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IMF 구제금융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당선과 동시에 정권을 인수받으며 초법적 권한을 가지고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한국경제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체질개선을 위한 본격적인 정책개혁에 착수하였으며 이는 구조조정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축적의 위기에 빠진 자본의 금융적 확장에 조응하는 형태로 한국경제를 재조직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닌 이러한 정책개혁은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발생하는 계층간, 민족국가간, 인종간, 성별 갈등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사회적 배제와 갈등을 내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김대중 정권 구조조정 과정을 돌아본다면 이러한 사실은 명확한데, 부의 편중과 사회적 양극화에 따른 다양한 갈등들이 항상적으로 사회 문제화되었으며, 이는 집권 초반의 금모으기 류와 같은 국민동원방식으로만 관리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렇듯 근본적인 위기의 치유가 아닌 관리정책으로서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그에 적합한 통치체제 구축이 필수적이며, 이것이 불가능해 졌을 때 위기관리는 더 이상의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김대중 정권 초기를 돌아보자면, 386개혁세력들과 시민운동세력들을 대거 흡수해내는 방식으로 일정하게 신자유주의 통치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듯 해 보였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신자유주의 지지연합의 형성이라 했으며, 이로써 김영삼 문민정부가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개량적 운동세력들에 대한 체제 내로의 포섭이 일정하게 달성되는 것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지연합만으로 성공적인 개혁의 완수는 불가능했는데, 잊혀질만하면 터져나왔던 각종의 게이트나 경제위기 극복의 수혜가 일부 중산층에게로 집중되는 것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구조조정 정책의 효과와 지배계급의 정당성에 대한 회복불가능한 불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2001년 10월의 재보선과 2003년 6·13 총선에서 민주당의 참패를 불러왔는데, 이는 집권여당, 김대중식 개혁에 대한 지지철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당시의 낮은 투표율을 고려한다면 대중들의 회복되지 않는 삶의 위기가 결합되면서 정치일반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이 어느 때보다 팽배했던 것으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있어 관건이 실행 능력에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정치적 정당성의 확보와 안정적인 통치체제의 구축은 실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정치개혁에 있어서의 김대중 정권의 성적표는 역대 정권, 특히 앞서 살펴본 김영삼 정권 당시의 그것과 비교해도 극히 초라한 수준이다. 15대 대선 당시 내걸었던 정치개혁 관련 공약을 보면 자민련과의 공조상황에서 대부분의 내용이 행정부 개혁에 맞추어져 있으며, 실재로 추진된 것들은 시민단체를 앞세운 부패방지법제정이나 국가인권위원회법 제정 등과 같은 과거청산 류의 개혁입법 제정에 초점이 가 있었다.
이러한 김대중 정권의 비판적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당선된 노무현 정권 정책개혁에 있어 관건은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관리 지향적 정책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대중적 지지기반과 정치세력의 구축을 통해 통치체제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요컨대 김대중 정권 정책개혁 당시 위기 이전상황으로의 회기에 집중하면서 미쳐 손쓸 수 없었던 영역에 본격적으로 관리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다. 전자에 있어서는 당선 이후 인수위를 통해 쏟아져 나온 각종의 정책과제들을 통해 대강의 윤각은 드러난 셈이다. 예상했듯이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조치의 강화, 여성인력활용에 초점이 맞추어진 여성정책, 사회복지체계의 재조직 등이 여기에 대거 포함되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치영역인데, 각종 분야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에도 미달하는 수준의 개혁처방이 가해진, 가장 낙후된 형태로 남아있던 곳이 바로 여기이다.
현재까지 보여진 노무현 당선자의 정치개혁의 대한 의지는 단호하다. 1월 7일 인수위에서 발표한 10대 국정과제는 애초 8대 과제였던 것이 당선자의 지시에 의해 정치개혁과 과학기술 육성이 추가되는 형태로 수정되었다. 물론 인수위 설치 당시부터 당선자의 집적 지시에 의해 정무분과 산하에 정치개혁연구실을 신설하고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학자 임혁백, 정해구 등을 실장과 연구위원으로 선임한 바 있었다. 인수위 발표에 의하면 정치개혁연구실은 당선자의 국정철학과 공약실현을 뒷받침할 제도개선 방안을 연구, 특히 정당과 선거구제, 정치자금 등 정치관련 제도의 개선안을 만들어 정치권에 제안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 한다.
노무현 정부 정치개혁 전망,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현재적으로 노무현 정권이 추진할 정치개혁 구체적인 상을 예측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몰락의 핵심 계기가 되었던 각종의 금융비리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화된 형태의 부패방지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 부분은 김대중 정권 집권 말기의 개정된 부패방지법을 세부적으로 보완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며, 대선 당시 공약에서 한나라당과도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부패방지법개정의 맥락에서 실행해 나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정치권 전반의 관리능력을 제고하는 것과 민주당-노무현이 가지는 지역정당 이미지를 벗고 보다 안정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는 것에 있다. 이 역시 김대중 정권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권력 누수현상과 식물국회, 방탄국회를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현재 노무현의 정국구상과 민주, 한나라 양당 개혁특위의 논의 상황을 보자면, 이는 명확한 삼권분립에 기초하여 의회중심의 정치를 실현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고비용저효율의 정치체계의 주범으로 지목 받고 있는 현재의 정당구조를 혁신하는 것으로 수렴되고 있다.
대선 직후 각 당마다 실시된 각종 토론회 내용이나 개혁특위 논의 상황을 통해 보자면, 정당구조 전반의 혁신이 거론되는데, 주요 방향성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라 할 수 있다. 먼저, 원내정당화를 지향한다는 차원인데, 여기에는 지도체제의 개편 속에서 원내총무의 위상강화, 정책생산 및 합의 기능을 제고하기 위한 위원회 체계의 강화, 확대 등이 해당된다. 두 번째는 선거기능을 중심으로 정당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지구당 폐지 또는 연락사무소 수준으로의 축소, 중앙당의 선거대응능력 제고 및 규모 축소 등이 거론되고 있다. 세 번째는 권위주의적 정당구조를 혁신하는 차원으로 권력집중을 방지하는 방향으로 지도체제를 변화시키는 것, 상향식 공천의 제도화 등이 검토 중이다. 마지막은 국민참여에 개방적이고 당원중심의 정당형태를 지향하는 것으로 지난 대선에서 실험된 국민경선제의 제도화 또는 미국식 예비경선제의 도입, 진성당원확보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 정도면 거의 혁명적 수준의 정당개혁처럼 보일 수 있으나 우리가 보기에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민주, 한나라 양당의 개혁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치개혁의 필요성에 있어 절실함의 차이는 없을지언정, 강조점도 다르고 양립가능하지 않은 정책들이 분열증 적으로 나열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노무현-민주당의 경우 당선의 실재 동력이었던 386과 20대를 정당개혁을 통해 제도적으로 흡수하는 형태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김대중 정권처럼 이들의 지지와 이탈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상황을 방지하는 형태로 정당체제를 재편하는 것에 정치개혁의 궁극적 목적이 있다 할 것이다. 이는 미국식 양당체계로 가야한다는 거듭되는 노무현의 발언을 통해 확인되는바, 대선 당시의 구도로 보자면 '반창세력'들과 경제위기 상황에서조차도 부의 기득권을 상실해 본 경험이 없는 '안정희구 세력들'을 한나라당과 분할 관리한다는 전략인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김대중 지지세력과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세력에 대한 지지층으로 일정하게 고착화되어온 정치지형을 고려한다면, 안정성의 문제가 있지만 아주 불가능한 경로는 아니다. 물론 노무현 당선에 있어 이러한 지형과는 일정하게 다른 조건, 즉 386들과 인터넷 직접행동이라는 새로운 행동양식을 선보이고 있는 20대의 노무현에 대한 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김대중 정권 당시 386들이 보였던 갈지자걸음이 경제적 실리에 기반한 일시적 지지와 철회의 반복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원하는 보다 확실한 개혁의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것은 정치개혁의 전제라 할 수 있다. 대선 당시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지인 월가의 사상검증을 안전하게 통과했을 뿐 아니라, 노골적인 지지선언까지 받아냈던 노무현에게 출발의 조건은 비교적 나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20대인데, 월드컵-촛불시위-노무현 지지로 이어진 이들의 행동양식에서 자기표현, 문화세대라는 일종의 세대적 동질성 이외에는 이렇다할 정치적 동기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386과도 다르게 민주화 투쟁의 경험도, 일시적이나마 금융화의 수혜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저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이며,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전망도 이들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서 여론주도세력이며 여러 측면에서 사회중간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386들의 압도적 지지가 지속될 수 있다면 미국식 양당체제의 모사는 일정하게 가능할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한나라당의 경우 대선 실패 책임론을 둘러싼 당내갈등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정치개혁 방안을 놓고 당권 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으로 쟁점이 옮아가 있는 형국이다. 민주당에 비해 한나라당의 고민은 보다 근본적일 수밖에 없는데, 반공, 발전 전략 속에 유지되어온 보수주의 이념이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망에 적합한 형태로 재정립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에 처하게 된 것이다. 또한 87년 투쟁을 자신들의 개혁적 이미지의 상징조작에 동원하고 있는 386들로 인해 한나라당에게 덧씌워진, 민주주의를 지체시킨 장본인이라는 혐의를 탈피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서의 대중적 동의를 얻기가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정당개혁은 제왕적 총재, 계파정치로 상징되었던 지도체제를 개편하지 않고서는 여타의 개혁조치들이 대중적 설득력을 얻기가 힘든 상황이고 그만큼 상당한 당내 갈등과 진통의 과정을 동반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현재 진행중인 정치개혁, 정당개혁의 폭과 수위를 결정짓는 것은 2004년 총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무현-민주당으로서는 다수당의 지위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집권중반도 넘기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있는 것이고, 한나라당 역시 대선 패배 이후의 쇄신된 당지도력을 검증 받을 수 있는 일차관문인 셈이다. 그런 만큼 정치개혁 논의의 와중에도 구체적 방안과 속도조절을 놓고 양당 모두 당권 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이 첨예한 상황이고, 개혁특위로부터 제안되는 정책들이 다음날이 되면 주요 간부회의에서 철회, 유보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더욱이 개혁특위에서 논의되는 수준의 정당개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적청산, 세대교체 문제가 동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갈등은 총선결과에 의해서 일정하게 강제적 형태로 정리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쟁점은 선거구제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 선거법 개정에서 첨예하게 형성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호남정당을 벗어나 전국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한 민주당의 중대선거구제, 비례대표제와 한나라당의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비례대표제를 도입한다는 방침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예정대로라면 1월 중 국회정치개혁 특위를 통해 국회법, 정치자금법, 정당법, 선거법 등 일련의 정치관계법의 대폭 개정에 대한 합의를 이끈다는 양당간의 협의가 있었으나, 선거구제 문제의 타협여부에 따라, 일정수준에서의 합의가 충분히 가능한 나머지 쟁점들의 처리 수준을 결정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총선 전까지 일정수준에서의 정치개혁은 양당간의 합의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 하 민중운동,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정치권 전반이 정치개혁 논의에 당력을 쏟아 붓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 17일에는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10 여 개의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정치개혁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정치개혁연대)가 출범하였고, 29일에는 여기에 한나라당, 민주당 개혁파 의원 70여명이 가세한 가운데 가칭 '정치개혁추진범국민협의회의' 구성이 합의되었다. 참여연대를 대표로 각종 NGO 수장 급들이 이미 노무현 당선 직후 민주당과 인수위로 흡수되는 것을 보았던 상황에서 이는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이들의 활동 여하에 따라 정당-시민단체로 구성된 안정적인 정치개혁 기구가 국회 내에 신설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긴 시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지배계급의 정치개혁이라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능력을 제고하기 위한 안정적 지지기반과 통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그야말로 '개혁'적인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사가속화 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정치개혁 논의에 편승하여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주류화라는 재단 앞에 운동의 성과를 고스란히 바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해서이다. 87년, 91년 대중투쟁의 성과들이 지배계급의 정치적 정당성을 수립하는 것으로 수렴되는 과정에는 항상적으로 정치개혁이 동반되었으며, 이는 언제나 대중투쟁을 억압하는 것으로 결과했다. 더욱이 지금의 상황이 명확히 시민운동세력의 지배체제로의 흡수가 거의 완료되는 시점에 와 있다는 점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조건은 지속적으로 민중운동진영의 정치적, 계급적 이탈을 불러올 것이며, 지난 대선 당시 일부 노동조합 관료들의 투항선언으로 이미 충분히 가능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또한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진보정당과 노동조합간의 실용적 역할분담, 결과적으로는 노동운동의 실리주의를 고착화시키는 형태의 운동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 정당명부비례제표제의 도입으로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목전에 와 있는 상황에서 지배계급의 정치개혁 논의에 가담하여 현실 가능한 운동의 활로를 모색해 보겠다는 것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구조화시키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더욱이 노무현-민주당의 구상이 386, 20대들에 대한 제도정치로의 수렴을 목적으로 하는 현재 상황에서 지배정치의 정치개혁 논의에 가세하겠다는 것은 이들의 불안정한 삶과 그로부터 나타나는 지배정치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밑불로 던져 넣겠다는 것이다. 지난 김대중 정권 5년 간 민중운동 진영이 벌여온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를 노무현 정권의 등장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민중운동의 몰락의 끝을 기어이 보고야 말 것인가.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한 판단의 기로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