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의 출범과 정책개혁 전망
첫 번째 질문. DJ는 몰락했지만 노무현은 어떻게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가? 노무현은 대중들의 희망을 특수한 방식으로 동원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정권은 IMF 경제개혁의 불가피성을 거듭 역설했지만 그가 약속한 환란 극복은 찾아오지 않았다. 수치상으로는 IMF 이전 상황으로 복귀했지만 민중들이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DJ정권의 부패비리는 민중들의 철저한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노무현-민주당은 '축제의 정치'를 제공하거나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서 지역 발전이라는 실리적 기대를 자극함으로써 대중들의 희망을 조직해냈다.
두 번째 질문. DJ의 경제개혁을 통해 도대체 무엇이 바뀐 것인가? 남한은 이제 '자본유치형' 국가로 변모했고, 이제는 금융화된 초민족적 법인기업(TNC)와 금융자본의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제 남은 일은 투자협정을 체결하고 동아시아의 무역자유화를 주도하고, 경제자유구역을 설치하는 식으로 오직 DJ가 닦아놓은 길로 달려나가는 것뿐이다. 금융개방과 TNC의 진입/이탈의 자유 보장은 오늘날 초민족적 자본의 편에서 볼 때 '억압할 수 없는 최저한도'이며, 새로운 수탈체제의 전제조건이다. 이는 노동운동을 비롯해 어떤 세력도 침범 불가능한 신성한 영역이 되었고, 노무현정권조차도 조금도 건드릴 수 없다.
세 번째 질문. 노무현 정책개혁의 핵심은 무엇인가? 동북아 중심지 구상은 중국을 고려한 남한의 전략적 선택이다. 조세감면/토지임대와 같은 방식으로 남한은 이제 더 이상 중국이나 다른 나라들과 경쟁할 수 없다. 기술 및 산업의 특화, 교육 경쟁력 강화, 여성인력 활용(인구감소·노령화의 대안), 사회안전망 구축이 정부 재정지출의 중심점이다. 그러나 '특화'는 곧 배제를 의미한다. 경쟁을 강화하고 살아남지 못한 자는 배제된다. 배제된 자의 불만 표출을 막기 위해 하향평준화된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 '사회안전망'이다.
네 번째 질문. 노무현 정권이 실패한다면 그 대안은 존재하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실로 답이 없다. 지배세력으로서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 외채위기가 재발한 남미의 경우는 국가의 붕괴, 사회의 해체로 이어졌다. 남한에서 경제위기가 재발한다면 이미 경제개방화가 대체로 완료된 상태이므로 그 결말을 예상할 수 없다. 이제 남한의 지배세력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자본유치'와 '위기관리'일 뿐이다. 특히 TNC와 금융자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안정적인 통치체제의 구축이 중요한데, 사회운동을 정책-로비형 NGO나 서비스형 NGO(사회복지의 중간전달자)으로 재편하여 정치체계 내로 포섭하는 게 현 정권의 목표다.
마지막 질문. 민중운동에게 미래는 존재하는가? 이 역시 실로 답이 없는데,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 민중적 대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다. 오늘날 지배세력은 신자유주의 개혁을 반대하는 노선은 모두 과거 사회주의나 (남미)파퓰리즘 식의 "국가주의적 중상주의"거나 "폐쇄경제"로의 퇴행이며, 그 실패는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냐고 단언하고 있다. 남한 사회에서의 '코포라티즘'(관리주의)과 '전투주의'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자의 주장에 영합하거나 회피하는 것이므로, 이 양자의 대립·반복은 민중운동의 '소멸'(!)을 의미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역시 세계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 속에서 그 수명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물론 옳지만, 그 문제의 강한 의미에서의 해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2000년 총선을 어떻게 회고할 수 있나?
회고해 보면 DJ의 당선과 IMF 경제개혁이 시작된 1997말부터 약 2년 반 후 치뤄진 2000년 4·13 총선은 매우 미묘한 시점에 벌어진 판이었다. 1999년 12월 김대중정권은 IMF 조기졸업을 선언했지만, 이후 대우재벌의 소멸로 이어지는 대우사태-증시폭락이 겹쳤다(특히 4월에는 연일 증시폭락이었다). 4월 10일 박지원 문광부장관과 박재규 통일부장관은 남북정상회담 합의 사실을 전격 발표했다. '총선시민연대'는 낙천낙선운동이 벌여 부정부패, 선거법위반, 반인권을 기준으로 낡은 정치인을 청산하자는 전국적 캠페인을 벌였고, 김대중정권은 병역·재산(납세)·전과기록 등 후보자 신상공개를 단행했다. 민주당은 DJ의 '지역구도 타파' 선언에서처럼 전국정당화를 내걸었고(특히 영남권 당선자 배출), '젊은 피'를 수도권 요충지에 출마시켰다. 이처럼 2000년 총선은 'IMF 경제개혁'의 현실을 놓고 정권에 대한 신임 여부를 묻는 판이자,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대사건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햇볕정책에 대한 판단을 묻는 판이자, 인물교체와 세대교체를 통한 낡은 정치관행의 청산이라는 정치적 이슈를 시험하는 판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모호했다. 먼저 투표율은 57%로 사상 최저수치를 기록했다(14대 71.9, 15대 63.9). 이는 유권자 2명 중 1명은 투표를 포기하거나 거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총선시민연대의 투표참여와 '바꿔' 캠페인이 언론에 집중 보도되었지만 대도시 지역의 투표율이 하락했고, 20-30대가 투표에 대거 불참한 것으로 드러났다. 투표 불참 또는 포기·거부가 (물론 야당에 대한 불신을 포함하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 야당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는 김대중정권이나 민주당에 대한 불만, 또는 당시 조성된 선거이슈에 대한 선택의 포기·거부로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에 한해서는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수도권과 충청권을 중심으로 30여개 지역에서 근소한 시소게임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한나라당은 9석이 증가한 133석, 민주당은 17석이 증가한 115석을 얻었다. 양자 모두 과반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정권출범 이후 이렇다할 활동이 아무 것도 없지만) 국회 제1당의 위치를 수호했다는 점에서 자축했다. 반면 민주당은 지역구 의석 차이를 16석으로 좁혔고 영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비등한 성과를 올렸다고 자축했다. 수도권/호남과 영남에서는 대립이 뚜렷했지만 충청, 강원, 제주 등 다른 지역에서는 자민련의 몰락만 분명했다. 한편 전체 당선자 중 초선의 비율은 41%였으며, 초·재선을 합치면 70.6%였다. '386' 후보는 대부분 지역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쳤고, 절반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은 지방에 비해 수도권에서 비교적 성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2000년 총선에서 나타난 남한사회의 갈등선은 매우 복합적이었다. 게다가 최악의 투표율이 문제였다. 이는 남한 사회가 전혀 안정적이지 않으며, 총선 이후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기 어렵다는 지표였다(특히 20-30대 투표율 저조). 이러한 복합적인 갈등은 이번 대선 결과로 드러나게 되었다.
김대중정권의 경제개혁과 새로운 수탈체제의 성립
1997-8년 남한의 외채전략은 IMF 구제금융을 통해 일시적인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고, 외국 채권은행들과 채무이행연기 협상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IMF가 부과한 구제금융의 '전제조건'으로서의 경제개혁이었다. 경제개혁의 목표는 과거 남한의 발전노선 즉 중화학 공업화, 수출산업 발전과 같이 '민족적 발전의 길'을 완전히 포기하고, 1980년대 이후 남미의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동일하게 '자본유치형 국가'로 탈바꿈한다는 것이었다("기업하기 좋은 나라", "Buy Korea").
따라서 남한의 경제개혁에서 핵심은 일차적으로는 ① 기업 퇴출, 인수합병, 해외매각, 워크아웃(재무구조개선) 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해 기업·금융 부문의 부실을 처리하며, 재벌의 계열분리(특히 상호지급보증 해소)를 통해 남한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5대 재벌의 부실확대를 막고, ② 국채를 발행해서 공적자금을 조성하고, 위기에 빠진 재벌·금융사에게 분배함으로써 '국가의 미래 재정'을 담보로 남한 경제위기의 폭발을 지연시키고, ③ 기업의 재무(금융)부문을 정리하고 직접금융중심으로 전환하여(글로벌 스탠다드), 결국 ④ 자본시장을 개방하여 이미 해외로 도피한 초민족자본을 다시 유인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⑤ 주식시장 부양책을 강구하여(저금리, 연기금 투입) 남한을 '신흥시장'(주식·채권시장)으로 육성하고, ⑥ 지역차원의 무역자유화와 금융·서비스분야 개방을 선도하고 투자협정과 같은 유인책을 통해 초민적자본의 직접투자(FDI)를 끌어들여 경제성장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⑦ 김대중정권은 IMF협약에는 빠져있던 정리해고제 도입을 자발적으로 수용하여 '노동신축화'라는 유인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⑧ 남한 재벌은 계열분리를 이루고 초민족적 법인기업(TNC)으로 변모하고 있다.
또한 워크아웃 제도가 일단락되면서 2001년 김대중정부가 내놓은 '상시개혁시스템'의 골자는 기업구조조정전문 투자회사를 설립하고, M&A시장을 활성화하며, 정크본드(투기등급채권) 시장을 육성한다는 것인데, 이는 기업퇴출이 '시장기능에 따라 강제적으로' 작동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IMF와 세계은행 주도로 남한에서 이루어진 경제개혁은 남한 경제의 일대전환과 새로운 수탈체제의 형성을 의미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일단 과잉자본의 처리라는 점에서 기존 생산설비와 고용의 지속적인 파괴를 의미했다(기업퇴출, 인수합병, 워크아웃,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특히 이 과정에서 자본시장 개방, 초민족자본의 진입/이탈에 대한 탈규제, 초민족자본의 금융기법 고도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국부유출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경로가 형성되었다(M&A, 이자소득, 환차익 등등). 또한 구조조정과 외국인투자(포트폴리오, 직접투자)는 기존 산업의 파괴와 산업특화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지역경제의 붕괴 또는 불균등화를 촉진하였다(특히 남한은 '농업포기'가 특징적이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는 다면적인 갈등과 불안을 심화시켰다 - 역설적이게도 건국이래 처음으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대규모로 해외이민을 떠나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대중정권에 대한 민심의 이반은 기본적으로는 'IMF 위기극복'의 불평등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노동과 불안정화, 수도권/지역의 격차 확대, 여성 빈곤의 심화는 그 주요한 양상이었다. 이는 2000년 총선 결과로 드러났다. 지역주의가 여전히 존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는 지역경제의 위기가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젊은 층의 투표율 저조는 IMF위기를 전후한 시점에서의 취업대란, 반(半)실업 등 그 세대의 삶의 불안을 반영한다.
노무현의 등장과 '반창연대'
집권 말기 DJ의 몰락은 매우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2001년 11월 DJ가 총재직을 사퇴하고 2002년 6월 TV생중계로 두아들의 구속에 대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할 때까지 그는 사태를 거의 제어할 수 없었다. 한나라당은 6·13 지방선거까지 이어지는 '연전연승'의 기세를 타고 쉽게 정권탈환을 손에 쥘 수 있을 듯 보였다. 노무현조차 국민경선을 통해 민주당 대선후보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DJ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고, 여론의 동향을 추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경선 승리 직후 노무현의 대선 구상 역시 불투명했다. 예컨대 "원칙과 상식", "국민통합" 등 추상적 구호를 내걸거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자"와 같이 정서에 호소할 뿐이었다. 6·13 지자체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어 전국 16개 광역단체장 자리 가운데 11곳 장악할 때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민주당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무현의 당선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와 개혁국민정당 발족을 통해서만 오직 가능했다. 노무현-정몽준의 단일화의 진실은 '반창 연대'의 실현 즉 '이회창에게 이길 수 있는 (젊은) 후보의 선택'이라는 게임에 있었다. 그러므로 노무현의 대선승리는 기본적으로 '네가티브' 전략에 기반한 것이며, 게임의 고유한 도박성과 시선집중이 주는 이득을 누린 결과다. 단일화는 '네가티브'와 '도박'이라는 두 다리 위에서 세대교체와 인적 청산, '낡은 정치 청산'을 대중적으로 이슈화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드디어 DJ를 정치의 풍경에서 제거하고 '죽은 인물'로 만들었고, 그들 대체할 인물이라는 대결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반면 개혁국민정당은 핵심적 지지층이 될 386세대의 정치적 집결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386세대에게 각인된 민주화운동에 있어서의 민정당-민자당-한나라당의 부정적 역할을 상기시켰고, 또한 기존의 NGO의 '정치중립' 방식을 뛰어 넘는 정치 참여를 고무했다.
결국 노무현의 등장은 이회창-한나라당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회창-한나라당은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유포한 수구와 기득권(+엘리트주의)의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했고, 북한과의 냉전적 대결양상을 '수줍게' 반복했다. 이에 비해 노무현은 세대교체와 인적청산을 통한 기득권과 부패를 해체하며 미국과의 평등한 동반자 관계를 만들며 중도적 개혁을 발전시킬 인물이라는 대립적 이미지를 창출했다(특히 TV토론에서 노무현은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 양자를 보수주의와 이상주의로 밀어내며 중도적-합리적 개혁이라는 이미지를 쌓고자 했다).
노무현 지지층의 이질성과 갈등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단순히 정치적의 풍경에서 DJ를 제거하고 이회창 대 노무현이라는 일대일 대립구도를 형성한 게 전부가 아니다. 노무현의 선거전략은 복합적이었고, 그에게 표를 던졌던 지지층도 이질적이었다. 노무현의 주요한 지지세력을 거칠게나마 도식화해보자.
첫째, 노무현에 대한 '실리주의적' 지지가 있었다. 남한의 증시부양은 'IT(정보산업)혁명', '벤처창업'이라는 바람을 타고 올라섰고, 벤처기업은 기존 경영조직·관행의 일반적 대안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지식산업', '고부가가치산업' 육성이라는 김대중정권의 전략에 따라 문화산업에 대한 지원확대도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벤처-금융업의 확대는 이른바 '386세대'를 일종의 '비즈니스네트워크'로 전환시켰다. 게다가 386세대는 남한에서의 물질적 성장을 경험하였고(삼저호황) 미국식 생활양식-소비문화의 확대를 '진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들의 결집은 '자기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DJ의 정책개혁이 노무현을 통해 보완되는 것을 지지했다. 한편 이 세대의 수많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자신의 경제적 이해가 기업경영진과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기업 내부의 권위주의적 '지배구조'에 대해 갈등에 처해 있으며, 이는 기득권이나 '고루함'(?)에 대해 강한 적대심을 유발한다. 따라서 경제적 자기 이해, 문화적 동질감에서 다른 집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결속력을 형성했다.
물론 DJ정권의 경제개혁과 노무현을 지지했던 집단 중에는 '개혁적 지식인'도 포함되어야 한다(이들은 노무현이 당선된다면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여기에 기술관료적인 NGO들도 포함될 수 있다. 한편 노동운동 내에서 노무현에 대한 공공연한 혹은 잠재된 현실주의적 지지도 존재한다. 노동자 대중의 일부는 대체로 IMF 이전 상황으로 복귀했고, 이는 현상유지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낳았다. 또한 DJ 당시에는 죽어 있었던 공식적인 대화채널을 정상화하고 사회적 위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존재한다(이는 민주당 및 민주노동당 양자 모두를 실용적으로 활용하려는 태도를 강화할 수 있다). 이처럼 386세대-화이트칼라-개혁적 지식인-노동운동 내 일부 상층은 DJ와 마찬가지로 노무현 역시 핵심적 지지층으로 육성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둘째, 청년층의 도시(룸펜)프롤레타리아(불안정 노동력층)의 일시적 지지가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전혀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이번 대선에서 20대 투표율은 47.8%였고, 지난 대선에 비해 약 15% 하락했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의 투표율 하락에 중요한 기여를 한 셈이다. 20대 청년노동자층은 IMF위기 당시 취업대란을 겪었고 신규 '노동시장' 진입에 있어서 크나큰 불안정성을 경험했다. 또한 오늘날 교육정책의 목표는 중심적 노동력과 주변적 노동력를 분화시키는 것이므로, 20대의 대부분은 '다기능화'라는 명목으로 다수 주변적 기능을 습득했다(저임금과 고용의 불안정). 소비확대라는 생활양식을 강요받았으나('10대 시장', '20대 시장') 미래는 극히 불투명했다. 이들은 삶의 조건이 불안정한만큼 사회적·정치적 의식도 불안정하다. 이번 대선에서 강력한 '반창' 정서가 작동했으나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종종 모순적이다(즉 진보/보수의 틀로 쉽게 포섭되지 않는다). 이들이 참여한 월드컵 거리응원이나 촛불시위 참여는 기성세대에게 위력적이었고 선거의 흐름을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무규정적 행동에는 쉽게 참여하지만 제도적 행동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선거에 참여하지 않거나, 노무현의 인기영합주의적인 제스쳐와 함께 이회창에 대한 차악으로서 선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지역경제의 위기 속에서 '지역감정'에 근거한 잠정적 지지가 있었다. 오늘날 지역감정의 물질적 토대는 구조조정 이후 심화된 지역경제의 위기이며 이것이 지역적 소외감으로 등장했다. 지역감정이 실리추구적인 감성에 기반한 것이라면 지역감정을 동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노무현은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서는 지역발전이라는 실리적 희망을 조작하여 지역감정을 동원, 장악한 것이다. 노무현은 호남 지역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DJ의 계승자로 제시했고,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스스로가 3김 이후 부산·경남을 대변할 정치지도자로 자임했고, 충청권에 대해서는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희망을 제시했다.
따라서 노무현 당선을 안정적인 지지연합의 구축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질적 집단의 이데올로기는 서로 갈등적이거나 대립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일시적 제휴를 표현하는 방식은 '새롭다', '활기차다' 등등의 정서적 호소를 넘어서지 못한다. 오히려 정책개혁의 전개과정에 따라 (각각 다른 이유로) 대중적 이반을 낳을 요인을 깔고 있다.
노무현의 정책개혁 전망
이제 노무현은 인물대결 구도의 선거전략을 마무리하고 남한에서의 정책개혁의 정당성을 '사후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태세로 돌입했다. 분명히 현재는 DJ처럼 대통령직에 취임하기 전부터 '비상경제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초헌법적인 권한을 휘둘러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은 아니다. 노무현은 IMF 경제개혁의 기초적 목표 즉 금융위기 직후 위기관리책를 넘어서, '경제성장-고용확대-빈곤감축'이라는 포괄적 정책목표를 내걸었다. 그리고 개혁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인수위를 구성하고 여러 정책검토사항에 대한 여론의 반응을 탐색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김대중정권의 정책기조의 유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남한의 경제구조는 이미 완전히 뒤바뀌었고, 이에 조응하여 재계-관료-학계의 태도도 수렴되었다 - 사실 김대중 집권 당시 한나라당의 기본 노선도 DJ 개혁에 대한 '비판적 지지'였다(예컨대 공적자금 오남용 비판, 구조조정에서 정부가 무리하게 기업을 압박하는 것에 대한 비판, 엄격한 상호주의에 입각한 남북관계 개선 등).
이제 남는 핵심 문제 중의 하나는 남한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동력을 창출하는 것이다. 김대중정권이 남한을 '자본유치형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했다면 노무현 정권은 실제로 대규모 외국인투자를 유치하는 게 관건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이 직면한 문제는 외국인투자유치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다. 현재 김대중정권에 이어 노무현이 들고 나온 '동북아 중심지'는 초민족기업의 세계경영전략에 대한 고려를 반영하는 남한의 적응책이다(즉 중국의 성장에 따른 중국진출을 위한 일종의 '관문'으로서 남한의 활용가치를 높이자는 구상). 따라서 노무현정권이 기본 과제는 4대부문 구조조정을 보완하여 (외국인투자자의 감시감독 수단을 제공하기 위한) 기업지배구조 개혁의 진척, 초민족기업의 활동범위를 확대시켜주기 위한 무역자유화와 투자협정 체결, 남한의 금융시스템의 불안을 완화하기 위한 금융사들의 대형화-겸업화 유도, 협조적 노사관계 구축을 위한 노사정합의기구 구성 등이 될 것이다. 또한 외국인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남한의 기술개발과 산업의 특화, 경제 인프라 구축, 평준화 해소와 교육개혁, 여성고급인력 활용 확대를 중심으로 정부 재정지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남한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정책개혁을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조건의 창출이다. 남한에서의 정책개혁은 DJ의 몰락을 통해 심대한 위기에 처했고, 차기 정권은 이러한 붕괴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게 사활적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개혁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재결집, 부패와 '도덕적 해이'가 재생산되는 정치-행정-사법구조의 혁신 또는 지배세력의 도덕성 재확립, (보수주의적 온정주의든, 또는 자유주의적 실용주의든 간에) 사회적 통합을 위한 정책적 보완 등이 관건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현실주의적 지지층을 핵심적인 지지기반으로 구축하여 개혁의 불가피성, 지속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고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개혁(특히 정당 개혁과 선거구제 개혁)을 통해 정치적 안정성을 획득하며 부패방지를 위한 정책적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또한 고용확대나 빈곤축소의 외형적 성과를 얻어내기 위한 미봉책을 모색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시도들은 YS-DJ와는 다른 세대의 주류 개혁세력 형성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민중운동의 미래
하지만 문제는 개혁의 진전 과정에서 실제적인 민중들의 삶의 양상이 될 것이다. 과연 남한의 경제개혁과 민중의 삶은 양립할 수 있을 것인가? '자본유치' 국가로 변모한 남한 경제는 세계경제위기로부터 안전한 '경제성장'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인가? 노무현정권은 그가 제시하는 각종 '사회통합'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가? 특히 DJ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근본적으로 불안한 조건 속에서 '사회통합'을 위해 노무현정권이 검토하는 실용적인 방식의 구상은 기본적으로 재정지출을 최소화하면서 갈등의 폭발을 지연하거나 조정하기 위한 형식적인 틀을 마련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구사될 정책은 민중들의 삶의 조건을 '하향평준화'하고 상위 20%에게는 안전과 소비의 '자유'를 부여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 인수위는 정책 아이템으로 입안하기 위한 각종 국가기구를 구성하면서 운동세력과 지식인 그룹을 포섭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다. 예컨대 국가차별시정위원회, 노사정위원회, 각종 정책자문기구 구성이 그러하다. 또한 '서비스형' NGO를 육성하여(정부·지역사회·민간 네트워크화 구상) 기존의 사회운동 그룹들을 재편성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중운동이 신자유주의에 적합한 방식으로 적응하고(스스로를 정책-로비형 또는 서비스제공형 NGO로 정립), 위기관리체계에 체계적으로 포섭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남한의 진보정당 운동은 정치개혁 흐름과 함께 지배정당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사회운동의 성격을 강화하고 전선형성에 기여할 것인가라는 고비를 맞이할 것이다.
오늘날 남한 민중운동은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IMF 경제개혁은 일단락되었고 남한의 경제구조는 완전히 변화하였다. 앞으로 다가올 노무현정권 5년이 나갈 방향도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노무현정권은 금융개방과 TNC의 진입/이탈의 자유 보장이라는 '성역'을 세우고, 신자유주의 반대의 목소리를 '국가주의적인 중상주의'나 '폐쇄경제'로 복귀하자는 주장이냐며, 이미 길이 닦인 그 방향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고 역설할 것이다. 또한 노무현은 김대중정권 초기와 같은 생산과 고용의 파괴라는 극단적 양상을 회피하고 고용확대-빈곤감축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전 정권과 '다르다'는 혼동을 생산할 것이다. 특히 노무현정권은 사회운동에 대한 지원(특히 사회적 위상 제고)을 민중에 대한 지원으로 '의도적으로' 혼동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조건은 남한에서의 '비판적' 운동의 소멸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 민중운동은 노무현의 정책개혁에 대해 김대중정권 초기보다 더욱 엄밀히 비판해야 할 시점에 섰다. 또한 정책개혁이 실제로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을 심화시키는 양상을 정확히 포착할 때에만 대중적 운동화의 발판이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고착화된 운동은 노무현정권 하에서 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곧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