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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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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정치개혁론 비판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을 중심으로

장진범 | 편집부장
들어가며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87년 이후 투표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급기야 2002년 8월 1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이르러 30% 이하까지 떨어졌다는 사실은, 지배정치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지배정치의 '정상적' 메커니즘이, 정당에 의한 '대표'를 매개로 시민의 '참여'를 동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상황은 지배정치의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 위협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와 함께 소위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문제점을 들어 기존 정당들이 앞 다투어 정당개혁과 관련한 논의를 벌이고 있고, 민주노동당 등도 이러한 논의에 동참하고 있다. 바야흐로 정치개혁은 전 국민적 의제가 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김대중 정권 당시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는 대표적 이데올로그 최장집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라는 상징적 제목의 저서를 통해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의 기본 골격을 교과서적으로 제시했다. 이것이 현실에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정치개혁과 100% 부합하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그것들의 이론적 참조점이 되는 것은 분명한 것 같고, 그런 한에서 현실적 효과 역시 생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장집의 논의를 통해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의 이론적 근거들을 살펴보고, 그것의 논리적 결함 및 정치적 모순을 비판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최장집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신자유주의 정치개혁 및 그에 공명하는 논의들에 공통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장집의 논의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하나의 사례로서의 의의를 가지며, 그에 대한 비판은 신자유주의 정치개혁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일반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민주주의는 위기다
최장집은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를 '사회적 기반이 없는 정치적 대표체제와 이에 대표되지 못하고 저항하고 있는 비투표유권자 사이의 균열'이라는 문제 틀에 입각해 파악한다. 이 같은 균열의 주된 원인은 냉전반공주의의 헤게모니에 의해 장악된 보수독점의 정치적 대표체제에 있다. 이로부터 계급구조화의 심화와 중산층 중심 사회의 해체, 교육과 계급구조화, 지방의 배제와 초집중화, 냉전반공주의의 미시적 결과 등의 사회적 결과가 따라 나온다.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민주화가 역설적으로 정치 위기의 구성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진단이다. 그에 따르면 권위주의 정권의 집권 엘리트들은 밑으로부터의 불만과 도전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한편으로 저항의 계기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면서도, 다른 한편 위로부터 그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할 줄 알았다. 반면 민주화 이후 국가와 정당체제 그리고 민주 세력은 현실적 문제들과의 대면을 회피하는 데 민주화의 정당성을 이용하는 안락한 보수주의에 젖어, 사회와의 균열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장집은 어쨌든 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최선의 정치체제이므로, 해결책으로 (권위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행위로 규정되는) 민주화에 의해 가능해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다양한 제도적이고 규범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핵심은 정당(체계)개혁이며, 후자의 핵심은 자유주의적·공화주의적 유산의 계몽이다.

정당경쟁을 통한 갈등의 사회화
왜 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최선의 정치체제인가? 최장집의 대답은, 민주주의가 권위주의와 달리 사회적 갈등을 억압하지 않는, 다시 말해 갈등을 정치의 틀 안으로 통합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는 제도라는 것이다.
왜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이 정당(체계)인가? 최장집의 대답은, 사회적 갈등과 균열을 정치의 영역에서 표출·대표하며, 이에 기반을 둔 대안을 조직하여 선거에서 경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완화시키고 통합하는 것이 바로 정당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최장집은 민주주의 개혁의 핵심 원리로 갈등의 사유화에서 갈등의 사회화를 제시한다. '갈등의 사유화'는 정치 엘리트들이 한 사회의 지배적 사회 갈등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당선과 재선에 유리한 갈등만을 선택적으로 동원하는 형태를 지칭한다. '갈등의 사회화'는 한 사회의 중요하지만 억압되어 있던 갈등들이 정당경쟁을 매개로 정치의 영역에 진입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로부터 정당(체계)개혁이 민주주의 개혁의 핵심이라는 주장이 더욱 분명해진다. '갈등의 사회화'를 가능케 하는 핵심 매개가 정당경쟁이기 때문이다. 최장집은 정당경쟁을 통해 다양한 갈등들이 정치의 영역에 진입하게 될 때, 또한 기존의 정당들이 이를 무시할 경우 새로운 정당이 용이하게 만들어질 수 있게 될 때, 보수적 정당 간의 끝없는 저질경쟁은 멈추도록 강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또한 유권자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호'의 표출을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이유에서 최장집은 '결선투표제'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여 기존의 보수 독점적 양당체제를 해체하고, 온건한 다당제로의 전환 및 정책 중심의 경쟁과 연합으로의 유인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상의 과정이 궁극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고 통합하는 데 기여한다는 주장이 이어진다. "끓는 주전자처럼, 김이 빠져나갈 구멍이 있으면 터지지 않지만, 물은 끓고 있는데 다른 출구가 없으면 갑자기 터지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말이다. 또한 정당의 대표체계를 보다 확장함으로써 그것이 반영하는 사회균열의 범위와 기반을 확장하면, 정당간 갈등의 강도는 완화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애당초 갈등의 강도가 높았던 까닭은 갈등의 범위가 매우 좁았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 규범의 문제설정
이상에서 최장집은 민주주의 제도의 본질로 다원적 갈등과 경쟁을 특권화 한다. 하지만 즉각 다음과 같은 고전적 비판이 고개를 든다: 다원적 갈등과 경쟁이 조정되지 않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적인 상태로 이끌릴 위험은 없는가?
규범의 문제설정이 나오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최장집에 따르면 무정부적인 다원주의와 (롤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성적으로 구성된 전반적 이념의 다원성"의 체계는 엄격히 구별된다. 시민사회는 공적 이성을 매개하여 국가라는 보다 높은 단위 속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즉 사회는 정치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이 공적 이성을 최장집은 '시민적 휴머니즘', 혹은 공화주의라 부른다. 이것의 핵심 내용은 공공선에 대한 헌신, 공적 결정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모든 시민이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지 않고 권리와 혜택을 누리는 시민권의 원리, 시민적 덕에 대한 강조 등이다. 한편 민주주의에서 정당의 필수불가결성이라는 주장이 다시 한번 반복되는데, 왜냐하면 최장집의 정의에 따르면 정당은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최장집은 자유주의 전통의 영유를 '의식개혁' 차원에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개인들이 그 스스로의 가치와 내면의 정신세계를 갖지 못하고, 바깥에 존재하는 가치와 기준에 의해 그리고 여론의 헤게모니적인 힘에 의해 휩쓸리고 동원될 때,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타락하기 쉽다. 민주주의는 사회구조의 다원주의와 아울러 가치와 이념의 다원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을 때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개인적 자아의 내면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 이러한 가치와 이념의 다원성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비판 1 - 위기의 진정한 원인
최장집을 비롯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 내지 그들과 공명하는 논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한자본주의의 위기와 지배정치의 위기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최장집이 시장/국가 식의 허구적 대당을 사용한다면, 참여연대의 조희연이나 심지어 민주노동당의 일각에서조차 남한자본주의의 '정상화'(즉 선진화)에 대해 지체되는 '후진성'으로서 지배정치의 문제점을 진단한다. 후자의 경우 소위 일반민주주의(GD)론의 악명 높은 '독점강화/종속약화' 테제를 계승하는 가운데, 남한자본주의가 정상화됨에 따라 지배정치 역시 변화를 강제 받을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보다 '순수한' 계급정치가 출현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제출한다.
하지만 양자 모두 남한자본주의의 변화 양상을 전혀 몰이해하고 있고, 이 때문에 지배정치의 변화 역시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최장집이 지배정치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은, 실은 박정희 시대부터 있었던 고질적인 문제들이다. 만일 그렇다면 진정한 질문은, 왜 그것이 하필이면 지금에 와서 이런 방식으로 표출되는가 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최장집은 민주화로 인한 '안락한 보수주의'를 든다. 이것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상술하겠거니와, 이는 무엇보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환상적 인상을 체계적으로 재생산한다는 문제점을 가진다. 이것을 직접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바로 남한자본주의의 변화양상에 대한 몰이해다.
오늘날의 지배정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모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박정희 정권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일 수 있었다면, 그 비결은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에 있다. 최장집 스스로 인정하듯, 고도성장이 동반하는 거시적 자원배분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즉 발전주의가 가능했던 것이 관건이었다. 이것이 최장집이 비난해 마지않는 냉전반공주의와 내재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음을 지적해 두자. 한국전쟁을 끝으로 좌익들이 말살되고 반공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형성되어 정책적 실행가능성이 확보되지 않았던들, 더욱 결정적으로는 냉전 하에서 쇼케이스를 건설하려는 미국의 지정학적 전략이 없었던들, 발전주의는 가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박정희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경제주의의 한 형태로서) 발전주의였으며, 어쩌면 단정 수립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지속하는 유일한 지배적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현재 지배정치가 위기에 빠진 것은 그것을 심층에서 지지하던 발전주의가 종언을 고했기 때문이고, 이는 남한자본주의가 이윤율의 저하 경향에 대해 더 이상 반작용을 조직할 수 없게 된 것, 그리고 냉전이 해소됨에 따라 미국의 전략이 변경된 것의 결과다. 이렇게 볼 때 냉전반공주의 헤게모니 하에 있는 보수독점의 정치체제,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진 민주화 이후의 '안락한 보수주의'는 오늘날 전개되는 지배정치 위기의 주요 측면이라 보기 어렵다.
관련해서 남한자본주의의 '정상화'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가자. 이들은 이에 따라 지배정치 안에서 자유주의가 헤게모니를 장악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간의 경합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현재 남한자본주의는 '정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중심의 금융 세계화에 종속적으로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금융화는 브로델이 말한 것처럼 체계의 가을, 겉은 단풍처럼 화려해 보이지만 안으로는 발전 동력을 상실함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붕괴 가능성이 높아지는 국면이다. 이에 조응하여 자유주의 역시 (물질적 팽창 시기와는 달리) 상대적 진보성을 상실하고 타락하는 바, 우리는 이것을 신자유주의라 불러 왔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자유주의가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자유주의 헤게모니 하에 있던 민주주의가 그것으로부터 이탈하는 상황이 초래됨으로써 자유주의의 타락은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헤게모니를 장악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지며, 사실상 자유주의의 좌익적 판본에 불과한 '진보주의'는 신자유주의 쪽으로 기울 것인가 아니면 자유주의 헤게모니로부터 단절하면서 보다 급진화될 것인가 하는 선택을 강제 받게 된다.
이렇게 보면 자유주의 헤게모니에 편승하면서 그것의 좌익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신자유주의에 대해 이론적인 동시에 실천적인 입장을 단호히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갈등요소는 다음번에 올 경제위기의 성격이다. 만일 97년 경제위기가 재벌체제의 모순과 신자유주의 개혁의 효과가 뒤얽혀 나타난 것이었다면, 다가올 경제위기는 신자유주의 개혁을 충실히 이행한 결과 탄생한 새로운 수탈체제의 불안정성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97년 당시 신자유주의자들이 경제위기의 책임을 재벌체제에 전가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자신들의 책임을 면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세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면, 다음번에는 그들 스스로가 책임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 국면이며, 동시에 그것에 편승하면서 신자유주의와 사민주의를 절충하려는 진보주의 역시 위기에 빠뜨린다. 남한자본주의의 위기가 (진보주의 역시 그것의 일부를 이루는) 지배정치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릴 수밖에 없다면, 지배정치에 개입하는 방식은 훨씬 더 엄밀해져야 한다. 특히 남한자본주의 및 지배정치의 위기의 책임을 나눠 갖는 방식이어선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탈체제의 불안정성을 집요하게 쟁점화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진보주의의 그것과 다른 것은, 체계의 위기를 발본적으로 비판하느냐 체계에 과부하를 거느냐 간의 차이와 같다. 후자의 경우 자본주의의 물질적 팽창 국면에서 상대적 진보성을 담보하는 자유주의에 대해 차별성을 획득하기 위해 진보주의가 취하는 전형적 전략인데, 이는 자본주의가 일반적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표상될 뿐만 아니라 더 나쁘게는 위기의 책임을 회피하고 이를 피지배계급에게 전가하려는 지배계급에 의해 전도되어 위기의 원인으로 표상되는 도착적 위험을 갖는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정상화'로 인해 계급대립이 보다 '순수한' 형태로 표출될 것이라는 안일한 견해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일반적 위기 국면에서 운동의 방식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실증적인 대안이 있는 것처럼 선전하면서 대중을 기만하다가 위기의 책임을 떠맡는 것이 결코 아닌, 지배계급과 민중운동 공히 답을 갖고 있지 않은 객관적 문제를 그 자체로 출현시켜 대중들 스스로 발본적으로 사고·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그 과정에서 그/녀들이 스스로 생산한 가능성에 힘입어 운동의 새로운 동력을 구성해 가는 것이어야 한다.
이상의 맥락에서 지배정치 위기의 구성적 요소로서, 민주화 이후의 '안락한 보수주의'라는 최장집의 진단을 평가해 보자.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민주화라는 운동을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한 계기, 그것을 성립시키기 위해 권위주의 체제를 무너뜨린 행동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운동의 시간은 제도의 시간에 자리를 내어주고, 이제 후자가 주도권을 잡게 된다. 하지만 운동과 제도는 이렇듯 선형적인 방식으로 나눠질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제도 변화의 동력은 운동에서 나온다. 민주주의 제도가 '안락한 보수주의'로 귀결된 주요 원인은, 제도를 변화시키기 위한 종별적인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제도의 변화를 강제할 운동이 본래적으로 많은 한계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려는 노력 역시 80년대 말 90년대 초를 거치면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87년 6월 항쟁은 최장집도 분석하는 것처럼 많은 한계를 갖고 있었다. 80년 5월 이후 70년대식 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집요한 노력이 기울여지긴 했지만, 87년 6월 당시까지는 자유주의 헤게모니 하의 민주주의 운동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민주주의는 내적 분화를 겪기 시작하여 자유민주주의와 민중민주주의의 투쟁이 바야흐로 개시되었는바, 한국전쟁 이후 사실상 최초로 자유주의를 훨씬 초과하는 급진적 이데올로기가 광범위하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후자는 이론적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7·8·9 대투쟁으로 표출된 노동자운동과 결합하려 했으나, 그것이 암묵적 참조점으로 삼았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겪게 된 각종 혼란 및 이를 틈탄 국가의 탄압으로 인해 급속히 쇠퇴했다. 이 같은 공백은 자유민주주의와 NGO 운동에 의해 점거되었는데, 양대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87년 6월 항쟁으로부터 연원하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이용함으로써 남한의 국가이데올로기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10년, 현재 남한민주주의가 처한 위기의 주된 원인이다. 이는 최장집이 주장하는 것처럼 제도개혁, 그 중에서도 정치개혁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남한자본주의가 처한 일반적 위기 상태를 정확히 직면하면서, 기존의 발전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발전전략을 제출하거나, 체계 자체를 발본적으로 지양하는 이행의 전망을 이론적·운동적으로 구성하지 않는 한, 몇몇 제도를 손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심지어 우리는 정치개혁이 오히려 정치의 위기를 가속화시킬 수조차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남한자본주의의 발전 및 이제는 생존 자체가 절대절명의 쟁점으로 부상한 상황에서 그것에 대한 현실적 처방(그것이 비록 미봉적이라 할지라도)을 동반하지 않는 도덕적 개혁이란 오히려 대중들의 환멸만을 증폭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오늘날 지배계급에게 일종의 상수 같은 것이다. 신자유주의 비판은 자본주의 안에 존재하는 가능한 몇 가지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야만적이지만 유일한 대안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와 구별되는 자유주의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려는 시도는 물론이거니와, 이행의 전망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서 신자유주의와 경합하려는 진보주의의 시도 역시 완전히 불가능하다.

비판 2 - 조정될 수 없는 갈등 혹은 갈등을 조정할 수 없는 국가
위에서 살펴보았듯 최장집은 제도로서 민주주의를 갈등과 체계적으로 연관시킨다. 이 같은 접근은 통합을 선험적으로 특권화 하는 접근보다는 확실히 나은 점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다만 그런 식의 접근이 갖는 맹점과 모순에 대해 간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보수주의자들이라면(그런데 보수주의자들에게도 일말의 진실은 있다) 이런 식의 접근이 지나친 낙관주의라 비판할 것이다. 다원적 갈등과 경쟁이 조절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장집이 규범의 문제설정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앞서 지적하였거니와, 그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후술하겠다. 여기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매개의 문제설정, 그리고 그것의 담지자로서 정당의 특권화다. 즉 최장집은 모든 갈등과 경쟁을 무조건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매개될 수 있는 갈등과 경쟁을 승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모든 갈등과 경쟁이 매개될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오히려 조절의 한 계기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선험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 즉, 적어도 기존의 체계를 유지하는 한, 조절할 수 없는 갈등이 있을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이 '적대'라고 불렀던 것이 그 한 사례로서,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 체계의 지양을 해결책으로 요구한다.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란 실제로는 이와 같이 위험한 적대를 균등하고 다원적인 갈등들 중의 하나로 변형함으로써 그것과의 실재적 대면을 회피하는 한 방식이라 봐야 한다.
헤겔 이후의 자유주의, 특히 최장집이 명시적으로 거론하는 롤스 식의 자유주의는 국가에게 이런 매개의 역할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 같은 해결책을 최장집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분석에 따르자면 남한의 국가는 이런 역할을 수행할 만한 자격이나 역량을 역사적으로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금융 세계화에 종속적으로 편입되면서 국가 자체가 매개의 능력을 경향적으로 상실한다는 문제가 덧붙여진다. 이렇게 된다면 기존의 국가는 물론, 정당체계를 개혁하여 다원적인 갈등들을 국가 수준에 다룬다 할지라도 갈등이 조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한층 현실화된다. 금융 세계화에 개별 민족국가가 종속적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기능은 법률적인 것으로 후퇴하고 정치는 영토를 관리하는 기술들의 조합으로 축소된다. 이와 동반되어 민족국가가 더 이상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정치는 필연적으로 세계화의 제약이나 (금융)시장 등과 같은 정치 외적 논리들에 복종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광범위하게 유포된다. 오늘날 지배정치의 위기는 이상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이 같은 경향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금융 세계화에 저항하지 않는 한 개별 민족국가의 역량이 심각하게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가가 대중들의 갈등을 실질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문제라기보다는, 반영한다 하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잠재적 역량 자체를 결여하고 있다는 대중적 통념, 그가 '안락한 보수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이로부터 나오는 대중의 심각한 정치적 수동화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사회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최장집은 적어도 이 분석에 관해서만큼은 솔직한데, 시민사회 역시 민주화 이후 이익추구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대안이 되기 어렵다. 국가와 시민사회를 공히 관통하는 냉전반공주의 및 '안락한 보수주의'를 극복할 동력을 찾아내는 것이 문제인데, 국가/시민사회의 대당 속에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매개의 매개가 될 수 있는 환상적 공간을 찾는 식으로 논리가 전개된다. 국가와 경제를 매개하는 곳으로서 시민사회, 다시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곳으로서 정당,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악무한적 순환.
권위주의와 시장주의를 절충함으로써 대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양자를 매개할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도 없으므로, 그가 최종적으로 기대는 곳은 선험적 규범이다. 결국 모든 모순이 집약되는 곳은 이곳이다.

비판 3 - 규범의 폭력
결론부터 말하자면 규범의 문제설정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규범의 도출이 어떤 초월론적 권위에 의한 것이거나 같은 얘기지만 자의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대중에게 관철시키는 것이 매우 곤란하다는 것이다. 루소 이후의 모든 근대 정치철학은 규범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찾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다. 하지만 (루소의 뒤를 이어 칸트가 말했던 것처럼) 이상적 인간과 경험적 인간은 항상 괴리되어 있으며, 어느 쪽을 특권화 하느냐 에 따라 이상주의와 비관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할 수밖에 없다.
최장집 역시 이 도식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우리가 일상 속에서 늘 보는 경험적 개인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합리적이며 보다 높은 도덕적 자아를 갖는 개인으로 볼 것이냐 에 따라 자유의 개념이 달라질 수 있다. 루소로부터 시작하여 칸트, 훔볼트,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낭만주의 내지는 관념론적 전통에서 나타나는 교육/교양 개념이 후자의 대표적 예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전통에서는 교육과 이성의 계발을 통한 개인성과 자아의 실현을 중심적인 요소로 삼는다." 그러나 '경험적 인간'이 소멸하지 않는 한 문제의 확정적인 해결책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이 때문에 모든 규범론은 그것을 ('경험적 인간'으로서) 대중에게 강제하기 위한 폭력과 규율을 동반한다. 최장집이 규범의 대표적 사례로 드는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는, 공화적 덕을 갖춘 시민을 형성하는 것이든 자제력과 내면성을 갖춘 다원적 개인들을 형성하는 것이든, 결국 특정한 방식으로 대중을 규율하려는 시도다. 규범의 문제설정은 대중들의 수동성 및 (대항)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폭력과 규율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것은 특정한 시기에 대중들의 수동성 및 (대항)폭력이 강화되는 원인을 사고하려는 노력을 결여하고 있으며, 때문에 대중들의 수동성과 (대항)폭력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기 일쑤다. 이것은 정치적 모순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인식의 결여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포괄되어야 하는 대중들의 경험이, 규범의 문제설정을 통해서는 제대로 반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규범의 문제설정은 '이상적 인간'의 능력으로서 이성이나 합리성(혹은 부르주아적인 '교양')을 전제한다. 하지만 대중들은, 특히 종속된 계급의 구성원들은, 구조적 불평등과 배제로 인해 스스로의 실존에 대한 지배력을 충분히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이상적 인간'과 긍정적으로 동일화하기 어렵다. 또한 이 같은 전제에 입각해 만들어진 규범은 대중들의 요구나 열망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왜곡하여 몰인식하게 만든다. 대중들이 규범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반면 대중들이 일상을 경험하는 방식은 차라리 부정적이다. 즉 자신들의 인격적 통합성을 부정하는 폭력을 겪으면서 그것에 저항하는 억압할 수 없는 최소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발견하는 경향을 갖는다. 동일한 구조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대중들이 그것을 제거하고 보편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집합적으로 투쟁할 때, 그/녀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집합적 주체를 구성한다. 이것이야말로 규범이 전제하는 '이상적 인간'과 구별되는,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의 잊혀진 기원이다.
이 같은 주체성은 외부로부터 주입되거나 계몽될 수 없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오직 운동을 통해서만 생산되며, 이러한 주체성에 의해서만 대중의 역량과 권리가 보존될 수 있다. 우리가 계속 운동을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규범이나 제도 일반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규범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개조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운동의 이니셔티브를 인정하고 그로부터 생산되는 주체성의 존엄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가며 -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
최장집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지속·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민주화다. 운동 및 그로부터 생산되는 주체성 없이 민주주의라는 상징-제도는 무력화되거나 심지어 민중을 억압하는 데 사용될 수조차 있다. 노무현의 취임식에서 울려 퍼진 '상록수'는 이것의 비극적 사례가 아니겠는가? 운동의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어떤 모독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다시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 '대중 스스로의 운동', 그리고 그것 속으로 소멸하기 위한 우리의 계획.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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