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3.33호

1992년, '들불의 노래'

박준도 | 사무처장
오늘 소개할 앨범은 노래공장 1집 「들불의 노래」다. 이를 예울림의 3집 「굳세어라 동지여」와 비교해보면 좀더 위치가 분명해지는데, 각기 대표곡에서 엿보이는 정치적 지향 탓이다. 「굳세어라 동지여」의 대표곡 '아! 민주정부'(예울림/조민하)가 민주대연합 전술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면, '민중의 노래'는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전술을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좀 더 세련되게 말하면, 이 둘은 '과학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현실을 바라봄으로써 작품의 이념적·예술적 질을 높이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만든 곡이란 이야기다.
이런 경향은 「들불의 노래」에서 좀더 극적인데, '이 땅의 민중 민주의 그 날은 눈물과 피의 꽃이 만발하리라……. 먼 훗날 노동 해방의 그 날은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 하리라' (들불의 노래), '과학의 당찬 머리를 모아 빈틈없는 전술 속에서 노동해방 전선으로 일치단결 하나로'(각성의 노래), '보수의 장벽을 깨고 유물사의 흐름 속에 진군하여라. 투쟁의 나라 위대한 노동자여……. 자본에 짓밟힌 내 조국에 노동해방 세상 위해……. 아 ~ 민중 민주주의여 ' (민중 민주주의여)
1992년 이 앨범이 세상에 나왔을 때 (특히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했던 정치세력에게서) 환호는 대단했는데, 당시 문화예술운동이 요구받은 두 가지를 모두 만족했기 때문이다. 계급적 토대를 분명히 하고 전투적인 문화투쟁으로 정치운동단계의 노동자투쟁에 복무하는 것, 그리고 이를 가장 대중적 양식, 대중의 편으로 되돌릴 수 있는 내용과 형식으로 드러내는 것 말이다. '민중의 민주주의'와 '노동해방', '민중후보 전술'을 분명히 내걸고, 대중들이 호감을 가질만한 음악에 혁명적 기운을 불어넣어 대중의 것으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운동진영의 상당한 호응에 비해 이 앨범의 음악적인 기여는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트로트 고고, 폴카, 발라드, 칼립소 등등 대중들에게 친숙한 리듬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익숙함을 드러내긴 했지만, 1990년「노동자 노래단 3집」에 비해 가사와 멜로디의 긴장감을 이용해서 주제의 표현력을 높인 것도 아니고, 화성진행의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민중의 노래'(김호철 작사, 작곡) 정도가 눈에 띄는데, 이제까지 투쟁가가 비장감으로 가득한 단조(minor)였다면 이 곡은 새로운 사회 건설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장조(major)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 이미 외국의 장조 투쟁가가 꽤 소개되었고 그래서 특별히 독창성이 보이는 것도 아니라며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민중가요의 창작수준을 고려해보면 지나친 혹평이다.

1987년 대중의 반역은 문화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촉발시켰다. 그리하여 대중조직에서 문화예술을 향유하려는 흐름이 형성되는데, 이른바 '문화패'-문예대중조직이 공장·학교 그리고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건설된 것이다. 당연히 이들 문화패는 노조나 학생회의 대중적 기반이었고, 대중운동과 밀접한 거리만큼 이들이 창작한 노래의 쟁점 선도력은 돋보였다. 이때 김호철, 윤민석, 조민하 등등 몇몇 재능 있는 사람들이 부각된 것이다. 그렇지만, 대중조직의 대중적 기반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음악이나 미술에 대한 대중의 권리'보다는 '노동조합이나 학생회의 문화적 영향력'이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정치운동으로 상승하는 것에 호응하는 문화운동'에 기여하길 원했던 문예 이론가들이 소개한 '당파성' 이론은 (대중운동이 아니라) 노조와 학생회를 매개로 변형되어 나타나기 일쑤였고(당-문화국에서 노조·학생회-문화국으로), 창작 원리로서 '당파적 리얼리즘'은 노조와 학생회가 요구하는 현장 창작으로 소급되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 논리가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문화산업의 대대적인 공세 앞에서는 무척 취약했다는 점이다. 트로트, 록 등 1980년대 부활·성장하는 이들 대중가요에 대한 비판에서 당파성 이론이 어느 만큼은 기여하긴 했는데, '모든 문화예술은 일정한 경향을 띄므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예술은 없으며 부르주아 예술이거나 프롤레타리아 예술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로 1980년대 당시 대중가요의 체제 내적인 성격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라드', '댄스음악'으로 상징되는 1990년대 문화산업의 대대적인 공세 앞에서 이는 더 이상 불가능했는데, 서태지로 상징하는 힙합 댄스음악의 '반정치적인 경향'을 두고 '체제 내적'이라는 말로 비난하기는 곤란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 대중음악의 발칙한 상상력에 기반한 많은 포스트주의자들은 민중가요의 정치적 진지함을 찬송가의 종교적 경건함으로 몰아붙이며 민중가요의 지위를 흔들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 록과 재즈의 정치적 복권이 이뤄진다. 바로 1990년대 록의 부활이다.

1990년대 초 민중문화운동진영이 제기한 '예술의 민중성'은 대중적 친화력이라는 말로 이해되었다. 트로트와 발라드의 재기 발랄한 활용을 놓고 잠시 소동이 일기는 하지만, 정치조직·노동조합·학생회는 잠정적으로 이에 손을 들었다. 점점 밀리는 대중적 영향력을 회복하는데,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1992년 민중후보 백기완과 함께 「들불의 노래」 전곡을 맘껏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92년은 여러모로 최종적이었는데, 1991년 '뜨거웠던 5월'의 대중적 패배에 따른 대중운동의 위기는 민중문화운동에게도 동일하게 드러났다. 1992년 대통령 선거가 계급투쟁의 패배에 대한 사후적 확인이라면 그 해 겨울에 민중가요의 정치적 기능은 시효를 다하게 된다. 바로 그 자리에 노래공장「들불의 노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이 한 장의 앨범을 끝냅니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지만, 이왕 시작한 것 '예술에 대한 대중의 권리'를 제기해보려 했는데, 뜻한 만큼 이루지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다음 기회가 또 있을 것입니다. 민중가요에 대해 좀더 알고 싶은 분들은 밥자유평등평화 사이트(http://bob.jinbo.net)에 가시면 됩니다. 여기서 소개했던(하고 싶었던) 것 보다 더 많은 앨범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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