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주체로 세우기 위한 현시기 노동조합의 과제
"새로운 여성운동이 필요하다"
몇해 전부터 여성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는 많은 활동가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지난 2001년 여성노동법 개정 투쟁 과정에서 여성관련 단체들간의 이견이 불거지기 시작한 후부터라 하면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당시 주된 쟁점은 근로기준법 상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조항(근로기준법 63조, 68조, 69조, 70조)의 수정이 불가피한가, 막아내야 하는가 였으며 결론적으로 산전후휴가 연장, 육아휴직 급여지급, 간접차별 개념 도입 등 몇 가지 개선된 조치와 함께 임산부를 제외한 여성노동자 일반에 대한 야간, 휴일, 연장근로 제한이 완화되는 법개정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전반을 개정으로 볼 것인가, 개악으로 볼 것인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이같은 표면적 논쟁은 사실 한국사회 여성운동, 특히 여성노동자 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다른 견해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때부터 우리 사회 여성운동을 주도해온 기존의 흐름 - 그 운동의 주체, 방식,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셈이다. 더불어 김대중 정권에 이어 현 정부의 출범 이후까지 이제는 모든 국가 정책에 '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며, 여성인력의 활용을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여성문제에 대한 사회 제 세력의 관심이 높아져 가는 분위기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김대중 정권의 여성정책에 대한 평가, 그리고 예상되는 노무현 정권의 기조를 분석하여 자칫 여성운동이 간과하거나 빠지기 쉬운 오류를 짚어보는 것은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자. 또 기존의 여성운동 세력이 현 정부의 적극적인 견제세력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당장의 조건도 마찬가지로 치자. 다만 여성의 입으로 여성의 요구를 말하고, 여성의 행동으로 그것을 관철시킬 대중적인 힘을 형성하는 것은 우리 사회 여성운동의 지속적인 발전에 필요한 대전제가 아닌가. 이에 '새로운 여성운동'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부분은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여성의 목소리를 이끌어내고 그녀들의 집단적 행동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긴 서두를 열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러한 운동을 추진해야 하는 단위의 하나로서 노동조합, 민주노총이 놓인 현실을 들여다보고 어떠한 조치를 통해 자신이 놓인 주·객관적인 상황을 개선하고, 또 어떤 과제를 자임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민주노총 여성할당제 도입의 의미와 남겨진 과제
민주노총에 소속되어 있는 여성노동자는 대략 12만명. 정확한 내부 조사결과에 근거하지 않은, 노동부 통계자료에 근거한 추정치다. 이는 전체 조합원의 약 20%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비록 노동조합이라는 전체적인 틀로 묶여 있지만, 한국노총(여성조합원 약 163,510명, 2002 한국노총 조사결과)과 함께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많은 여성대중이 조직되어 있는 단위는 흔치 않다.
그러나 현재 민주노총 주요 의사결정기구의 여성조합원 비율을 보면 대의원 757명의 14.1%, 중앙위원은 6.3%이며, 한국노총도 여성대의원 2.8%, 여성중앙위원 0.6%으로 여성조합원 숫자에 비해 그 대표성이 떨어지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노동조합이 여성노동자가 겪는 고유한 문제에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노동조합 안에서 여성들의 주체적인 활동이 매우 부족하며 이를 어렵게 만드는 내부 조건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민주노총은 지난 2월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2005년부터 민주노총 임원 및 각 의사결정기구에 여성을 30%이상 할당하기 위한 세부 시행규정을 결정하였다. 2001년 7월 '민주노총의 임원(위원장 및 사무총장은 제외), 중앙위원, 대의원에 대해서는 30%이상의 여성할당제를 실시한다'는 규약 개정이 이루어진 후 1년 7개월 만의 일이다. 조직 내 여성할당제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각종 조사와 토론회 등 준비과정을 거쳐온 것까지 고려하면 거의 3년만의 결실이다.
이 결정이 내려진 2003년 2월은 이미 여성에 대한 적극적 조치의 필요성이 국가기관과 기업 등 우리 사회 전반에 많이 확산되어 있던 시점이긴 하다. 그러나 한 사회의 명실상부한 구성원이 되기까지 여성이 겪는 차별과 편견, 애초 출발부터 다른 여성의 현실을 고려하여 양성평등이 이루어질 때까지 여성에 대한 잠정적 우대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노동조합 내에서도 인정된 사례이기에 그 자체로 매우 의미있는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여성할당제의 한계에 대한 우려도 많다. 현장의 여성간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은 애초 이 제도의 '한계'가 아니라 이 제도가 놓인 그리고 이 제도를 통해 개선하려고 하는 '현실'이라 치고, '의사결정과정에 여성의 참여를 늘리는 것만으로 과연 얼마나 조직 내 여성문제의 비중을 높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들이다. 이것이 결코 여성할당제를 반대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지만 민주노총 내 여성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더 채워져야 할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 어찌 보면 앞으로 노동조합 안에서 여성을 주체로 세우기 위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시도는 여성할당제 시행이 결정된 그 순간부터 시작일지 모른다.
모든 노조활동에 '성인지적 관점'을
어찌되었든 여성할당제 시행을 통해 민주노총은 적어도 2004년 150명, 2005년 이후 220명(2002년 대의원수 기준) 이상의 여성대의원을 갖게 되었다. 수치로만 보더라도 현재 민주노총 여성위원회가 16개 산별연맹과 15개 시·도본부 중 일부 조직의 채 20명도 되지 않는 여성사업담당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중 여성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는 조직도 전교조 등 4개에 불과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큰 기대치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이들이 민주노총 의사결정기구 뿐 아니라 각자의 현장에서 여성사업 강화를 위한 의식적인 활동을 전개하길 기대한다면 더욱 희망적인 일이다. 그런 여성간부들이 보다 늘어날 수 있도록, 민주노총 가맹 산하조직부터 단위노조까지 여성할당제를 도입하고 여성조합원의 참여율을 높이는 것은 향후 몇 년간 민주노총의 중요한 사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할당제 시행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조직 전체가 여성문제에 대해 보다 능동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필수적이다. 노동조합 내에서 여성이 남성과는 또 다른 노조활동의 기반을 만들어 가는 것은 여성간부만의 몫도 아니며 그녀들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다시 말해 여성이며 노동자로서 가지는 이해와 요구를 있는 그대로 대변할 노동조합, 민주노총을 만드는 것 - 각종 성차별적 편견, 남성중심적인 노조운영과 문화, 가사노동, 육아의 부담을 넘어 모든 노동조합 활동에서 여성을 주체로 세우기 위한 기획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는 기존의 조직 운영 메커니즘 전반을 개선하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먼저 노동조합의 활동방향과 사업방침을 정하는 정책 기획 단계에 여성노동자의 요구가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지난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진행한 민주노총 여성조합원 설문조사 결과에서 드러나듯 현재 여성조합원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로 꼽히는 '보육문제 해결'이 얼마나 중요한 조직의 요구이자 정책과제로 제기되고 있는가.
더 일상활동으로 들어가서, 여성조합원이 노동조합 안에서 보조적인 역할만 하고 있지 않은지, 각종 투쟁과 집회에 여성조합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점검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비정규-미조직 노동자 조직사업에서 여성 비정규-미조직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가 특별히 모색되고 있는지, 각종 교육 참여시 여성조합원이 소외되고 있지는 않은지, 각종 선전홍보의 효과가 여성노동자에게 긍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각종 조사통계에 여성조합원의 생활실태와 의식이 드러나고 있는지, 여성노동자에게 안전한 작업환경 개선 방침이 마련되고 있는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활동에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별도의 고민이 진행되고 있는지 등.
이는 단지 성의 문제를 '여성사업'으로 일컬어지는 한 부문영역으로 다루는 것을 뛰어 넘어, 조직 전반이 양성을 아우르는 관점을 갖고 있는지 되묻는 질문이다. 이미 노동자 일반 - 사실상 남성성을 전제로 한, 결코 성중립적이지 않은 - 을 전제로 구성되어온 노동조합 활동의 메커니즘을 끊임없이 스스로 비판하며, 다소 부자연스러운(?) 노력을 통해 양성 모두에게 자연스러운 조직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 제정 이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며 여성정책의 주된 기조를 이루었고, 현 정권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이른바 '성인지적 정책'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성차별을 개선하는 효과보다 개별 여성에게 공적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전시행정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삶의 경험과 처지가 다르고 사회경제적인 지위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전제로, 남성과 여성의 특성과 차이를 반영하여 모든 정부 정책의 효과가 양성간에 형평성과 평등을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마인드는 우리 노동조합에서도 충분히 검토할 만 하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려한 정책을 내오지 않는다면 의도와 무관하게 과거로부터 이어온 차별을 유지하는 데 일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12일 [여성발전기본법시행령] 개정으로 국무총리 산하에 '여성정책조정회의'를 설치하여 여성정책을 보다 신속하게 결정·집행할 수 있게 하고 또한 모든 중앙부처 기획관리실장을 여성정책책임관으로 지정, 이들로 하여금 해당 부처의 여성정책을 종합·조정하고 분석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한 것과 유사하게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에 성인지적 관점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 개발은 매우 의미 있는 과제일 것이다.
여성운동 발전을 위한 보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조직의 메커니즘을 바꾸어 나가는 것과 함께 12만 여성조합원, 나아가 800만 여성노동자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노총으로 거듭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 사회 여성운동이 대중적 기반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강화, 발전하는데 노동자 전체 그리고 여성노동자를 대표하는 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이 자임해야 할 위상과 역할에 관한 중요한 문제이다. 대다수 여성을 불안정한 노동과 빈곤상태로 내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투쟁하는 전국적인 여성운동을 구축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여러 여성사회단체와 정치조직들의 연대를 이끌어 내는 것 역시 노동조합이 받아 안아야 할 대단히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과제는 여성 비정규-미조직 노동자 조직화일 것이다. 여성이면서 또한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고유한 경험이 여성노동자 조직화 과정에서 어떤 특성으로 나타나는지, 그녀들을 조직하는 데 효과적인 접근방식과 노조활동 방식은 무엇인지, 민주노총은 아직 충분한 노하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올해부터 비정규-미조직실을 신설하고 체계적인 비정규-미조직 노동자 조직화 사업에 돌입하는 단계에서 이 부분에 대한 경험과 성과를 축적할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루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성노동자 조직화를 담당할 전문 인력을 배치하는 것부터 앞으로의 구체적인 실천이 관건이다.
또한 중장기적으로 여성조합원의 결집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사는 지역, 속해있는 사업장, 업종은 달라도 여성으로서 겪는 동일한 현실에 기반해 요구를 모으고 보다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 전체 일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민주노총의 위상은 한층 제고될 것이다. 구체적인 여성조합원간 네트워크나 사업의 방식은 고민되어야 하겠지만, 여성위원회의 전국적 확대 강화 차원에서 각 지역과 사업장에 흩어져 있는 여성조합원들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조직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도를 바탕으로 여성노동 문제 뿐 아니라 여성폭력 근절, 호주제 등 성차별적 법제도 개선 등 우리 사회 여성문제 전반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응력을 높여낸다면 노동계급이 앞장서는 전국적인 여성운동을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걸음이 될 것이다.
나가며
마무리를 하자니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고민으로 나아가지 못한 생각들을 줄줄이 늘어놓은 것 같아 꺼림칙하다. 그러나 이런 고민의 출발은 또한 분명한 결론과 맞닿아 있다. 아래로부터, 대중으로부터 새로운 여성운동의 전형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 민주노조운동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임에 틀림없다. 더 이상 여성노동자의 70% 이상이 비정규직이며, 또한 대다수 영세사업장 노동자이며 신자유주의 하에서 더욱 열악한 조건에 내몰리고 있다는 '현실진단'을 반복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성에 대한 사회의 민감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대다수 여성의 지위와 권리는 향상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언제까지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의 다듬어지지 못한 고민이 더 많은 노동운동, 여성운동, 그리고 모든 진보운동에 임하는 활동가들에 의해 발전되고 구체화될 수 있길 바란다. PSSP
몇해 전부터 여성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는 많은 활동가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지난 2001년 여성노동법 개정 투쟁 과정에서 여성관련 단체들간의 이견이 불거지기 시작한 후부터라 하면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당시 주된 쟁점은 근로기준법 상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조항(근로기준법 63조, 68조, 69조, 70조)의 수정이 불가피한가, 막아내야 하는가 였으며 결론적으로 산전후휴가 연장, 육아휴직 급여지급, 간접차별 개념 도입 등 몇 가지 개선된 조치와 함께 임산부를 제외한 여성노동자 일반에 대한 야간, 휴일, 연장근로 제한이 완화되는 법개정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전반을 개정으로 볼 것인가, 개악으로 볼 것인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이같은 표면적 논쟁은 사실 한국사회 여성운동, 특히 여성노동자 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다른 견해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때부터 우리 사회 여성운동을 주도해온 기존의 흐름 - 그 운동의 주체, 방식,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셈이다. 더불어 김대중 정권에 이어 현 정부의 출범 이후까지 이제는 모든 국가 정책에 '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며, 여성인력의 활용을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여성문제에 대한 사회 제 세력의 관심이 높아져 가는 분위기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김대중 정권의 여성정책에 대한 평가, 그리고 예상되는 노무현 정권의 기조를 분석하여 자칫 여성운동이 간과하거나 빠지기 쉬운 오류를 짚어보는 것은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자. 또 기존의 여성운동 세력이 현 정부의 적극적인 견제세력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당장의 조건도 마찬가지로 치자. 다만 여성의 입으로 여성의 요구를 말하고, 여성의 행동으로 그것을 관철시킬 대중적인 힘을 형성하는 것은 우리 사회 여성운동의 지속적인 발전에 필요한 대전제가 아닌가. 이에 '새로운 여성운동'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부분은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여성의 목소리를 이끌어내고 그녀들의 집단적 행동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긴 서두를 열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러한 운동을 추진해야 하는 단위의 하나로서 노동조합, 민주노총이 놓인 현실을 들여다보고 어떠한 조치를 통해 자신이 놓인 주·객관적인 상황을 개선하고, 또 어떤 과제를 자임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민주노총 여성할당제 도입의 의미와 남겨진 과제
민주노총에 소속되어 있는 여성노동자는 대략 12만명. 정확한 내부 조사결과에 근거하지 않은, 노동부 통계자료에 근거한 추정치다. 이는 전체 조합원의 약 20%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비록 노동조합이라는 전체적인 틀로 묶여 있지만, 한국노총(여성조합원 약 163,510명, 2002 한국노총 조사결과)과 함께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많은 여성대중이 조직되어 있는 단위는 흔치 않다.
그러나 현재 민주노총 주요 의사결정기구의 여성조합원 비율을 보면 대의원 757명의 14.1%, 중앙위원은 6.3%이며, 한국노총도 여성대의원 2.8%, 여성중앙위원 0.6%으로 여성조합원 숫자에 비해 그 대표성이 떨어지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노동조합이 여성노동자가 겪는 고유한 문제에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노동조합 안에서 여성들의 주체적인 활동이 매우 부족하며 이를 어렵게 만드는 내부 조건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민주노총은 지난 2월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2005년부터 민주노총 임원 및 각 의사결정기구에 여성을 30%이상 할당하기 위한 세부 시행규정을 결정하였다. 2001년 7월 '민주노총의 임원(위원장 및 사무총장은 제외), 중앙위원, 대의원에 대해서는 30%이상의 여성할당제를 실시한다'는 규약 개정이 이루어진 후 1년 7개월 만의 일이다. 조직 내 여성할당제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각종 조사와 토론회 등 준비과정을 거쳐온 것까지 고려하면 거의 3년만의 결실이다.
이 결정이 내려진 2003년 2월은 이미 여성에 대한 적극적 조치의 필요성이 국가기관과 기업 등 우리 사회 전반에 많이 확산되어 있던 시점이긴 하다. 그러나 한 사회의 명실상부한 구성원이 되기까지 여성이 겪는 차별과 편견, 애초 출발부터 다른 여성의 현실을 고려하여 양성평등이 이루어질 때까지 여성에 대한 잠정적 우대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노동조합 내에서도 인정된 사례이기에 그 자체로 매우 의미있는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여성할당제의 한계에 대한 우려도 많다. 현장의 여성간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은 애초 이 제도의 '한계'가 아니라 이 제도가 놓인 그리고 이 제도를 통해 개선하려고 하는 '현실'이라 치고, '의사결정과정에 여성의 참여를 늘리는 것만으로 과연 얼마나 조직 내 여성문제의 비중을 높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들이다. 이것이 결코 여성할당제를 반대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지만 민주노총 내 여성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더 채워져야 할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 어찌 보면 앞으로 노동조합 안에서 여성을 주체로 세우기 위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시도는 여성할당제 시행이 결정된 그 순간부터 시작일지 모른다.
모든 노조활동에 '성인지적 관점'을
어찌되었든 여성할당제 시행을 통해 민주노총은 적어도 2004년 150명, 2005년 이후 220명(2002년 대의원수 기준) 이상의 여성대의원을 갖게 되었다. 수치로만 보더라도 현재 민주노총 여성위원회가 16개 산별연맹과 15개 시·도본부 중 일부 조직의 채 20명도 되지 않는 여성사업담당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중 여성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는 조직도 전교조 등 4개에 불과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큰 기대치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이들이 민주노총 의사결정기구 뿐 아니라 각자의 현장에서 여성사업 강화를 위한 의식적인 활동을 전개하길 기대한다면 더욱 희망적인 일이다. 그런 여성간부들이 보다 늘어날 수 있도록, 민주노총 가맹 산하조직부터 단위노조까지 여성할당제를 도입하고 여성조합원의 참여율을 높이는 것은 향후 몇 년간 민주노총의 중요한 사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할당제 시행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조직 전체가 여성문제에 대해 보다 능동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필수적이다. 노동조합 내에서 여성이 남성과는 또 다른 노조활동의 기반을 만들어 가는 것은 여성간부만의 몫도 아니며 그녀들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다시 말해 여성이며 노동자로서 가지는 이해와 요구를 있는 그대로 대변할 노동조합, 민주노총을 만드는 것 - 각종 성차별적 편견, 남성중심적인 노조운영과 문화, 가사노동, 육아의 부담을 넘어 모든 노동조합 활동에서 여성을 주체로 세우기 위한 기획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는 기존의 조직 운영 메커니즘 전반을 개선하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먼저 노동조합의 활동방향과 사업방침을 정하는 정책 기획 단계에 여성노동자의 요구가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지난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진행한 민주노총 여성조합원 설문조사 결과에서 드러나듯 현재 여성조합원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로 꼽히는 '보육문제 해결'이 얼마나 중요한 조직의 요구이자 정책과제로 제기되고 있는가.
더 일상활동으로 들어가서, 여성조합원이 노동조합 안에서 보조적인 역할만 하고 있지 않은지, 각종 투쟁과 집회에 여성조합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점검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비정규-미조직 노동자 조직사업에서 여성 비정규-미조직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가 특별히 모색되고 있는지, 각종 교육 참여시 여성조합원이 소외되고 있지는 않은지, 각종 선전홍보의 효과가 여성노동자에게 긍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각종 조사통계에 여성조합원의 생활실태와 의식이 드러나고 있는지, 여성노동자에게 안전한 작업환경 개선 방침이 마련되고 있는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활동에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별도의 고민이 진행되고 있는지 등.
이는 단지 성의 문제를 '여성사업'으로 일컬어지는 한 부문영역으로 다루는 것을 뛰어 넘어, 조직 전반이 양성을 아우르는 관점을 갖고 있는지 되묻는 질문이다. 이미 노동자 일반 - 사실상 남성성을 전제로 한, 결코 성중립적이지 않은 - 을 전제로 구성되어온 노동조합 활동의 메커니즘을 끊임없이 스스로 비판하며, 다소 부자연스러운(?) 노력을 통해 양성 모두에게 자연스러운 조직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 제정 이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며 여성정책의 주된 기조를 이루었고, 현 정권에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이른바 '성인지적 정책'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성차별을 개선하는 효과보다 개별 여성에게 공적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전시행정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삶의 경험과 처지가 다르고 사회경제적인 지위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전제로, 남성과 여성의 특성과 차이를 반영하여 모든 정부 정책의 효과가 양성간에 형평성과 평등을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마인드는 우리 노동조합에서도 충분히 검토할 만 하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려한 정책을 내오지 않는다면 의도와 무관하게 과거로부터 이어온 차별을 유지하는 데 일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12일 [여성발전기본법시행령] 개정으로 국무총리 산하에 '여성정책조정회의'를 설치하여 여성정책을 보다 신속하게 결정·집행할 수 있게 하고 또한 모든 중앙부처 기획관리실장을 여성정책책임관으로 지정, 이들로 하여금 해당 부처의 여성정책을 종합·조정하고 분석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한 것과 유사하게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에 성인지적 관점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 개발은 매우 의미 있는 과제일 것이다.
여성운동 발전을 위한 보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조직의 메커니즘을 바꾸어 나가는 것과 함께 12만 여성조합원, 나아가 800만 여성노동자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노총으로 거듭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 사회 여성운동이 대중적 기반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강화, 발전하는데 노동자 전체 그리고 여성노동자를 대표하는 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이 자임해야 할 위상과 역할에 관한 중요한 문제이다. 대다수 여성을 불안정한 노동과 빈곤상태로 내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투쟁하는 전국적인 여성운동을 구축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여러 여성사회단체와 정치조직들의 연대를 이끌어 내는 것 역시 노동조합이 받아 안아야 할 대단히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과제는 여성 비정규-미조직 노동자 조직화일 것이다. 여성이면서 또한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고유한 경험이 여성노동자 조직화 과정에서 어떤 특성으로 나타나는지, 그녀들을 조직하는 데 효과적인 접근방식과 노조활동 방식은 무엇인지, 민주노총은 아직 충분한 노하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올해부터 비정규-미조직실을 신설하고 체계적인 비정규-미조직 노동자 조직화 사업에 돌입하는 단계에서 이 부분에 대한 경험과 성과를 축적할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루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성노동자 조직화를 담당할 전문 인력을 배치하는 것부터 앞으로의 구체적인 실천이 관건이다.
또한 중장기적으로 여성조합원의 결집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사는 지역, 속해있는 사업장, 업종은 달라도 여성으로서 겪는 동일한 현실에 기반해 요구를 모으고 보다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 전체 일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민주노총의 위상은 한층 제고될 것이다. 구체적인 여성조합원간 네트워크나 사업의 방식은 고민되어야 하겠지만, 여성위원회의 전국적 확대 강화 차원에서 각 지역과 사업장에 흩어져 있는 여성조합원들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조직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도를 바탕으로 여성노동 문제 뿐 아니라 여성폭력 근절, 호주제 등 성차별적 법제도 개선 등 우리 사회 여성문제 전반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응력을 높여낸다면 노동계급이 앞장서는 전국적인 여성운동을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걸음이 될 것이다.
나가며
마무리를 하자니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고민으로 나아가지 못한 생각들을 줄줄이 늘어놓은 것 같아 꺼림칙하다. 그러나 이런 고민의 출발은 또한 분명한 결론과 맞닿아 있다. 아래로부터, 대중으로부터 새로운 여성운동의 전형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 민주노조운동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임에 틀림없다. 더 이상 여성노동자의 70% 이상이 비정규직이며, 또한 대다수 영세사업장 노동자이며 신자유주의 하에서 더욱 열악한 조건에 내몰리고 있다는 '현실진단'을 반복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성에 대한 사회의 민감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대다수 여성의 지위와 권리는 향상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언제까지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의 다듬어지지 못한 고민이 더 많은 노동운동, 여성운동, 그리고 모든 진보운동에 임하는 활동가들에 의해 발전되고 구체화될 수 있길 바란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