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5.35호
그들의 역사, 우리의 역사-누가 5월 혁명과 6월 항쟁의 정신을 담지할 것인가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저 전두환 살인 집단에게 도청을 내준다면 우리는 죽어 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굳게 뭉쳐 싸워야 합니다‥‥”
-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죽어간 도청시민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故 윤상원 열사의 발언 中
무참히 살해당한 민주주의 혁명, 죽음으로 지켜낸 5월 혁명의 정신!
70년대 말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이 격해지고, YH사건, 부마항쟁 등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선 민중들의 저항이 분출했다. 마침내 10․26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피살되어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는 듯 했으나,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또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군사독재의 폭압에 억눌렸던 민중들은 군부의 재등장에 맞서 학생, 지식인, 노동자들 각계 각층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5월 16일 서울역에는 대학생, 시민 10만의 인파가 모여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으나, 대학생 간부들은 군부에게 정권탈취의 빌미를 주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시위를 중단, 통한(痛恨)의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러한 간부들의 기회주의적인 판단을 비웃듯이 5월 17일 ‘신군부’가 ‘계엄령 전국확대’를 단행함으로써 유신독재체제의 종말로 잠시간 열렸던 유화국면인 ‘80년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이와 함께 전국에 검거선풍이 몰아쳤고 주요 지점마다 계엄군이 증강 배치되었다.
그러나 5월 18일 광주의 학생들은 서울지역 학생 간부들의 기회주의적인 ‘서울역 회군’에도 불구하고 ‘신군부’의 ‘계엄령 전국확대’에 정면으로 맞섰다. ‘비상계엄철폐’를 외치는 전남대생에 대해 공수부대원들은 곤봉을 무차별적으로 난타하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야만적 폭력을 저질렀다. ‘신군부’에 맞서 학생들의 시위는 광주시 전역으로 확산되고, 시위 중심세력이 학생에서 시민으로 바뀌어 갔다. 언론에서는 광주 시민들을 불순세력이 개입된 ‘폭도’로 몰아붙였고, 계엄군들은 총검을 사용한 무참한 살육을 자행하였다. 광주 시민들은 무자비한 총검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탈취하고 무장을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공포의 유혈 진압을 조금도 멈추지 않았지만, 흩어지고 모이기를 되풀이하는 가운데 시위대열은 차츰 불어났고, 차량시위를 하는 등 투쟁은 한층 격렬해졌다. 이러한 시민군의 격렬한 투쟁에 밀려 계엄군은 도청에서 밀려 나가 한때 광주는 해방공동체를 이루었다. 계엄군의 봉쇄조치로 다른 지역과 차단되어 광주시민은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공급받을 수 없었지만, 자치조직과 무장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질서를 잡아 나갔다. 식량이 떨어진 이웃과 쌀을 나누었으며, 부녀자들은 주먹밥과 음료수를 이고 거리로 나와 곳곳에서 시민군에게 나누어주었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정성을 다하여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나이 어린 여학생들까지 헌혈에 앞장서 혈액은 남아 돌았다. 그렇게 광주는 군사파쇼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정서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신군부’ 계엄군은 ‘총기소지자는 26일 오전까지 국군통합병원 및 각 경찰서에 무기를 반납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다며 무력진압의 협박을 계속해 왔다. 재야인사를 중심으로 한 도청 수습위원회와 학생수습위원회가 투항주의적 자세로 시민군의 무기회수를 결정한 것에 대해 10만 광주시민 참가한 궐기대회에서 공개적 비판이 제기되고, 시민군 대표의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가 공개적으로 낭독됐다. 끝내 전두환 일파에게 굴복하지 않고 결사항전할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구성되어 새로운 지도부를 세우고, ①최규하 정부의 퇴진 ②계엄해제 ③전두환 처단 ④구속자 석방 ⑤시민 명예회복 및 사상자 피해보상 ⑥민주정부 수립 등을 목표로 투쟁할 것을 결정했다. 80년 5월 27일 새벽 2시 30분, 학생, 시민들이 7일째 점거하고 있던 도청에 비상이 떨어졌다. 계엄군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고교생, 너희들은 나가라. 우리가 싸울 테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래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라.” 그리고 시민군들은 도청을 사수하며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렇게 광주의 무명전사들은 살아서 전두환 군부에 굴복하지 않고, 죽음으로 군부의 억압과 폭력을 거부함으로서 무수히 죽어간 광주 시민들의 민주주의에의 열망을 끝내 지켜내고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5월 혁명정신’을 지키기 위한 살아남은 자들의 투쟁
전두환 신군부에게는 광주는 되살리고 싶지 않은 역사였다. 그저 그렇게 ‘불순분자가 개입된 폭도들의 난동’으로, ‘광주사태’로 영원히 묻어두고 싶었을 것이다. ‘5월 광주’의 실상이 알려지는 것 자체가 전두환 군사정권의 존립 자체를 뒤흔들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5월 광주는, 전두환 군부에 반대했지만 그저 광주의 죽음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살아남은 이들에게 뼈아픈 반성과 역사적 책무를 남겨주었다. 80년대 살아남은 이들은 5월 광주의 민중들의 봉기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패배한 것을 자신의 과오로 여겼고, 그러한 역사를 재현하지 않기 위해 광주의 패배를 반성하며 이념적, 조직적으로 급진적인 실천을 모색했다. 또한, 5월 광주는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운동진영에게 미제국주의의 본질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광주사태’라는 치욕적인 이름으로 불리우며 전두환 군부와 지배세력에 의해 잊혀지기를 강요당했던, 5월 광주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5월 혁명이 피로 진압된 80년은 전두환 일당의 폭력 탄압과 언론의 왜곡에 맞서 죽음으로 5월의 진실을 알리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5.18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이 살포되고, 기습시위를 전개하고, 수많은 청년. 학생. 노동자가 분신. 투신하는 등 80년은 죽음으로 정의를 밝혀 갔다. 항쟁을 진압한 계엄당국은 5월 29일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던 126구의 시신을 쓰레기차에 실어 광주시립공원묘지 제3묘역에 안장했다. 이후 망월동은 이 나라 민중운동의 성지가 되었으며 해가 거듭할수록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81년 5.18유족을 비롯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은 망월동에서 광주민중항쟁 1주기 추모식을 갖으려 했으나 경찰의 폭력 탄압으로 원천 봉쇄되었다. 유족인 정수만씨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82년 광주에 공수부대 및 계엄군의 투입을 허락한 장본인이 군의 작전명령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미연합 사령관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광주학살 배후조종 미국 반대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3월 김현장, 문부식씨 등은 부산 미문화원을 방화함으로써 광주학살에서 미국이 개입되어 있음을 전세계에 알렸다. 80년 5월 도청앞 분수대 위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개최하는 등 학생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 구속되었던 박관현(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씨가 교도소 당국의 비인간적인 처우를 개선할 것과 5.18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40여일 간의 단식투쟁을 벌이던 중 82년 5월 끝내 옥사했다. 전두환 정권은 박관현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여 고향인 영광에 강제매장했으며 88년 망월동으로 이장할 때도 운구차량을 탈취하는 폭력을 저질렀다.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광주사태 사후처리라는 명목 아래 관(官) 주도로 12월 ‘전남 지역개발 협의회’를 발족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는 기금을 망월동 묘지 이장 계획이나 어린이 대공원 건립 등에 사용하는 등 5.18을 희석시키기 위한 사업으로 일관했다. 특히 망월묘지가 민주화의 성지로 되어 가자 돈 몇 푼으로 망월동 묘지 이장을 계획, 당시 126기의 묘지 중 모두 26기의 묘지를 84년까지 이장하였으나 유가족 및 시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실패했다.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 속에서 맞이하였던 84년 5.18 민중항쟁 4주기 투쟁은 80년 이후 가장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여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 해 11월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문제가 주요한 초점으로 떠오르는 가운데 서울의 3개 대학 264명이 민정당사를 점거하는 등 반정부 투쟁이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1985년 5월 대학생 73명이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 광주학살의 배후 조종자로서 미국의 책임을 추궁했으나, 미국은 궁색한 답변으로 일관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12월 전남대, 전북대 학생 9명이 광주 미문화원을 점거했다. 5월 광주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86년 전두환 정권은 학살에 대한 책임은커녕 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광주를 직할시로 승격시키는 등 선심공세를 통해 광주항쟁을 은폐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87년 6월 항쟁, 군부독재 종식의 실패와 양 김씨의 정치적 배반
87년 부당한 헌법으로 군부통치를 지속할 속셈으로 발표된 전두환 군사독재의 4․13 호헌조치에 대한 각계의 투쟁이 확산되었다. 그러던 중 5월 18일 전국 각 대학에서 22.000여 학생들이 광주항쟁추모집회 및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5.18 민중항쟁 희생자 추모미사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사건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한 전국민적 분노를 일으켰고,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대중적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6월 9일 정권의 폭압적인 탄압으로 인해 연대생 이한열군 최루탄 파편상(7월 5일 사망)을 입을 것을 계기로 「6․10국민대회」를 전후해서 전국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지배세력의 강경책에 맞서 6.10 이후 명동농성과 전국적으로 계속된 시위는 군사파쇼를 더욱더 압박하였다. 6월 10일 밤부터 계속된 명동농성 투쟁은 6월 15일 자진 해산하였으나 전국적인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궁지에 몰린 군사정권은 6.29 선언이라는 기만적인 유화책을 내놓는다. 6.29 선언으로 보수야당이 투쟁전선에서 이탈하고, 투쟁은 급격히 소강되었다. 노태우가 제시한 ‘대통령 직선제’는 그 자체로 군사독재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양 김씨에게는 대권을 향한 재기의 발판이었다. 그렇게 6월 항쟁은 양 김씨의 배반과 민중운동의 불철저한 인식과 무능 속에서, 죽음으로 사수했던 80년 5월 혁명정신을 지키지 못한 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대선에서 노태우의 당선으로, 87년 6월을 달구었던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해방의 열망은 결국 군부독재의 합법적 승인으로 귀결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6.29 선언의 정치적 배경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한국문제의 해결을 위해 86년말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미 행정부 내의 한국관계 핵심 실무자들의 잇따른 방한이 있었다. 이들은 한국민의 불만이 한층 고조되어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폭발할 잠재력이 급격히 형성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당황했다. 미국은 2.7 박종철군 고문치사를 규탄하는 범국민적 대회가 열리던 그날 미 국무성 차관보 시거의 「전환기의 한국정치」라는 연설을 통해 전두환을 제거하려는 저들의 입장을 밝혔다. 그때 시거는 『그(전두환)는 더 이상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 은퇴정치가들의 집단에 합류할 것이다』이라고 말했다. 6.10규탄 전국대회 이후 다음날 미국무성의 오클리 부대변인은 한국사회에 대해 강도높은 우려를 나타냈으며 6월 항쟁이 고조되자 미국은 이제까지의 간접적인 공작에서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전두환이 시위진압에 군을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6월19일. 이한기 총리 『비상조치가 요구된다』고 발언)에 광주사태의 악몽에 시달리던 미국은 레이건의 편지와 시거 방한 등을 통해 군의 동원을 반대했다. 일설에 의하면 시거는 방한 중 6.29선언의 개요를 박세직을 통해 전달했다. 6.29선언이 나오기 몇 시간 전 슐츠는 미국 NBC TV와의 프로에 출현하여 『한국정부는 몇 가지 중요 문제에 관한 입장을 바꿔 지금 약속을 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 측의 장기적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고 말하여 6.29선언의 예고와 함께 이에 대한 미국의 노력을 강조했다. 한국에서 몇 시간 뒤 전두환은 부분적으로만 내용을 알고 있는 가운데 노태우는 6.29선언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의도대로 무난히 노태우 6공정권을 출범시켰던 것이다.
87년 당시 양 김씨는 후보단일화를 통한 군부독재 종식을 거듭 공언했었고, 동시에 자신이 후보단일화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지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패배한 5월을 딛고, 죽음으로 사수한 5월의 혁명정신을 끝내 움켜쥐지 못함으로 인해 민중운동은 양 김씨의 권력다툼 속에서 배제되었다. 87년 정치적 패배의 의미를 발빠르게 인식한 양 김씨는 민중운동과의 불안한 ‘동거관계’를 깨끗하게 청산하고 권력장악을 위한 현실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김영삼은 90년 노태우, 김종필 등 광주학살의 주범들과 3당 합당을 통해 보수대연합을 형성했고, 마침내 92년 대선에서 대권을 거머줬다. 김대중 또한 호남의 정서로 인해 보수대연합에는 끼지 못했지만, 97년 김종필, 박태준과 연합하여 대권을 거머쥐고 말았다. 군사파쇼 타도를 위한 민중들의 투쟁을 등에 업고 자신의 정치적 진출을 꾀하던 양 김씨는, 그들 스스로가 군사독재의 종식보다는 대권장악에 본심이 있음을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그리고, 군사파쇼와 학살의 주범들과 손을 잡음으로서 민중, 민주주의를 배신하면서 대권을 향한 행보를 내딛었다. 더욱 더 역설적인 것은 그 동안 무수한 민중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광주사태’, ‘폭동’으로 매도되었던 5월 혁명이, 87년 6월 항쟁에서 5월 혁명정신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개량적인 6.29 선언이라는 타협안에 굴복함으로서 비로소 제도적 인정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88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면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광주사태’는 국회 청문회 등을 거쳐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제도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
타락한 양김에 의한 5월 혁명과 6월 항쟁 죽이기
5월 광주는 87년 양 김씨의 민중,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으로 또다시 살육되었다. 우리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배신이 아니라 민중운동의 무능이다. ‘군사파쇼와 타협은 없다’며 죽어간 광주 시민군의 5월 혁명정신을 계승하여 군부독재의 종식으로 나아가지 못한 민중운동의 불철저한 인식과 무능에 의해 80년 5월의 패배가 87년에 재현된 것이다. 다만, 80년 5월이 군사파쇼에 맞서 죽음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다면, 87년 6월은 기만적인 6.29 선언에 스스로 무장해제되었다는 점이 차이일 것이다.
92년, 97년 학살자와 군사독재 세력과 손잡고 순차적으로 대권을 장악한 양 김씨는 민중,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배신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민주주의와 개혁정권으로 포장하기 위해 5․18과 6․10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고 동원했다.
5․18은 양 김씨에게 있어서 약한 고리가 아닐 수 없다. 5월 혁명이 죽음으로 거부했던 군사파쇼, 학살자와 한몸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이라는 핵심적 문제를 비껴 적정한 수준에서 형식적인 기념사업과 보상을 통해 피해가길 원했다. 그러나, 95년 12.12반란을 '용서'해 준 검찰과 그것이 옳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이어 5․18 내란을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결정은 100만명이 넘는 국민들의 전국적인 저항을 불러왔다. 이것은 5․18 특별법의 제정을 이끌어 냈고 마침내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내란 주모자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법처리 과정은 민중들의 저항에 직면하여 취한 조치이긴 하였으나, 김영삼 정권은 자신의 업적의 하나로써 5․18에 대한 진상 규명을 내세우고, 자신의 개혁적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5․18을 활용하였다. 이런 한계로 인해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도 밝혀지지 않았고, 내란 종료시점도 항소심과는 달리 비상계엄 해제일을 81년 1월 24일로 보아 내란에 의해 들어선 정부를 인정하였다. 김영삼은 5월 광주의 명백한 진실에 접근할수록 자신의 정당성이 부정된다는 것을 명백히 알았기 때문에 1997년 5월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망월동 묘역 성역화 사업 및 상무대 공원 조성 등의 기념사업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김대중의 경우, 98년 대통령 취임 직후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을 받은 광주 학살자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함으로써 또다시 5월 광주를 학살했다. 그리고 2002. 7. 27 광주 북구 망월동 5․18묘역은 ‘국립 5․18 묘지’로 승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써 광주는 양 김씨의 정치적 개혁성을 상징하는 수준에서 진상규명, 형식적 사법처리와 사면조치라는 해프닝으로 끝났고, 군사파쇼에 죽음으로 맞섰던 시민군들의 혁명정신은 ‘국립묘지’라는 화려한 호칭 속에 콘크리트 벽에 갇혀 버렸다.
반면 6월 항쟁은 이들에게 강한 고리가 아닐 수 없다. 6.29선언이라는 달콤한 타협안을 그들이 받아버린 순간, 민중운동 또한 군부독재 종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굴복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배신을 정당화하는 것은 손쉬운 것이었다. 6월 항쟁은 군부독재에 맞선 위대한 투쟁이었고, 그 투쟁의 성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으며, 그 민주화항쟁의 주역인 자신들의 정권은 개혁과 민주주의 정권이란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개혁의 이미지를 앞세우며 노동자, 민중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개혁’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노동유연화와 정리해고, 구조조정으로 노동자, 민중들의 삶의 권리를 박탈했던 것이다.
누가 5월 혁명과 6월 항쟁의 정신을 담지할 것인가
그들은 광주의 역사를 그렇게 차가운 콘크리트 벽안에 가두어 두었다. 6월 항쟁을 직선제라는 제도적 틀 속에 가두어 두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5월 광주는 분명 명확한 사상과 이념을 가지고 조직된 혁명은 아니었지만, 군부 계엄군의 폭거에 맞서 죽음으로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해방의 열망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보상과 요구의 충족과 맞바꿀 수 없는 숭고한 정신이다. 그것은 패배했지만, 영원한 가치로 운동 속에 살아있기 때문에 끝내 승리할 것이다. 87년 6월의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기만적인 6.29선언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들에게 6월은 자신의 대권을 위한 도구였으나, 민중들에게 6월은 직선제라는 제도로 갇히지 않는 민주주의와 해방에의 열망이었다. 그것은 6월 항쟁의 열기를 이은 7월, 8월, 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고, 계급대중운동의 성장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오늘의 현실을 보자. 전세계적인 자본주의 위기 속에 전쟁과 폭력과 야만이 우리를 한층 옥죄고 있다. 김대중 정권의 뒤를 이은 노무현 정권은 이러한 전쟁과 폭력의 질서, 신자유주의 질서를 그대로 수용하며, 개혁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가치를 움켜쥐고 민중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다. 민중운동은 이러한 엄혹한 정세에 제대로 된 대응을 조직하고 있지 못하다. 그것이 오늘날 5월 혁명과 6월 항쟁을 온전히 우리가 전취할 수 없는 조건일 것이다. 현실의 운동이 민중들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을 때, 현실의 억압과 폭력에 맞서 급진적, 민중적 운동을 형성할 때 비로소 온전히 그들의 정신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민중의 역사를 써나가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모색만이 콘크리트에 갇힌 열사들의 영혼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안이다. 지금도 무명전사들은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조국의 해방 없이 광주의 해결은 결코 없다고. PSSP
-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죽어간 도청시민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故 윤상원 열사의 발언 中
무참히 살해당한 민주주의 혁명, 죽음으로 지켜낸 5월 혁명의 정신!
70년대 말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이 격해지고, YH사건, 부마항쟁 등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선 민중들의 저항이 분출했다. 마침내 10․26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피살되어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는 듯 했으나,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또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군사독재의 폭압에 억눌렸던 민중들은 군부의 재등장에 맞서 학생, 지식인, 노동자들 각계 각층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5월 16일 서울역에는 대학생, 시민 10만의 인파가 모여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으나, 대학생 간부들은 군부에게 정권탈취의 빌미를 주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시위를 중단, 통한(痛恨)의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고 말았다. 이러한 간부들의 기회주의적인 판단을 비웃듯이 5월 17일 ‘신군부’가 ‘계엄령 전국확대’를 단행함으로써 유신독재체제의 종말로 잠시간 열렸던 유화국면인 ‘80년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이와 함께 전국에 검거선풍이 몰아쳤고 주요 지점마다 계엄군이 증강 배치되었다.
그러나 5월 18일 광주의 학생들은 서울지역 학생 간부들의 기회주의적인 ‘서울역 회군’에도 불구하고 ‘신군부’의 ‘계엄령 전국확대’에 정면으로 맞섰다. ‘비상계엄철폐’를 외치는 전남대생에 대해 공수부대원들은 곤봉을 무차별적으로 난타하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야만적 폭력을 저질렀다. ‘신군부’에 맞서 학생들의 시위는 광주시 전역으로 확산되고, 시위 중심세력이 학생에서 시민으로 바뀌어 갔다. 언론에서는 광주 시민들을 불순세력이 개입된 ‘폭도’로 몰아붙였고, 계엄군들은 총검을 사용한 무참한 살육을 자행하였다. 광주 시민들은 무자비한 총검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탈취하고 무장을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공포의 유혈 진압을 조금도 멈추지 않았지만, 흩어지고 모이기를 되풀이하는 가운데 시위대열은 차츰 불어났고, 차량시위를 하는 등 투쟁은 한층 격렬해졌다. 이러한 시민군의 격렬한 투쟁에 밀려 계엄군은 도청에서 밀려 나가 한때 광주는 해방공동체를 이루었다. 계엄군의 봉쇄조치로 다른 지역과 차단되어 광주시민은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공급받을 수 없었지만, 자치조직과 무장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질서를 잡아 나갔다. 식량이 떨어진 이웃과 쌀을 나누었으며, 부녀자들은 주먹밥과 음료수를 이고 거리로 나와 곳곳에서 시민군에게 나누어주었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정성을 다하여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나이 어린 여학생들까지 헌혈에 앞장서 혈액은 남아 돌았다. 그렇게 광주는 군사파쇼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정서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신군부’ 계엄군은 ‘총기소지자는 26일 오전까지 국군통합병원 및 각 경찰서에 무기를 반납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다며 무력진압의 협박을 계속해 왔다. 재야인사를 중심으로 한 도청 수습위원회와 학생수습위원회가 투항주의적 자세로 시민군의 무기회수를 결정한 것에 대해 10만 광주시민 참가한 궐기대회에서 공개적 비판이 제기되고, 시민군 대표의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가 공개적으로 낭독됐다. 끝내 전두환 일파에게 굴복하지 않고 결사항전할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구성되어 새로운 지도부를 세우고, ①최규하 정부의 퇴진 ②계엄해제 ③전두환 처단 ④구속자 석방 ⑤시민 명예회복 및 사상자 피해보상 ⑥민주정부 수립 등을 목표로 투쟁할 것을 결정했다. 80년 5월 27일 새벽 2시 30분, 학생, 시민들이 7일째 점거하고 있던 도청에 비상이 떨어졌다. 계엄군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고교생, 너희들은 나가라. 우리가 싸울 테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래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라.” 그리고 시민군들은 도청을 사수하며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렇게 광주의 무명전사들은 살아서 전두환 군부에 굴복하지 않고, 죽음으로 군부의 억압과 폭력을 거부함으로서 무수히 죽어간 광주 시민들의 민주주의에의 열망을 끝내 지켜내고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5월 혁명정신’을 지키기 위한 살아남은 자들의 투쟁
전두환 신군부에게는 광주는 되살리고 싶지 않은 역사였다. 그저 그렇게 ‘불순분자가 개입된 폭도들의 난동’으로, ‘광주사태’로 영원히 묻어두고 싶었을 것이다. ‘5월 광주’의 실상이 알려지는 것 자체가 전두환 군사정권의 존립 자체를 뒤흔들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5월 광주는, 전두환 군부에 반대했지만 그저 광주의 죽음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살아남은 이들에게 뼈아픈 반성과 역사적 책무를 남겨주었다. 80년대 살아남은 이들은 5월 광주의 민중들의 봉기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패배한 것을 자신의 과오로 여겼고, 그러한 역사를 재현하지 않기 위해 광주의 패배를 반성하며 이념적, 조직적으로 급진적인 실천을 모색했다. 또한, 5월 광주는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운동진영에게 미제국주의의 본질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광주사태’라는 치욕적인 이름으로 불리우며 전두환 군부와 지배세력에 의해 잊혀지기를 강요당했던, 5월 광주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5월 혁명이 피로 진압된 80년은 전두환 일당의 폭력 탄압과 언론의 왜곡에 맞서 죽음으로 5월의 진실을 알리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5.18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이 살포되고, 기습시위를 전개하고, 수많은 청년. 학생. 노동자가 분신. 투신하는 등 80년은 죽음으로 정의를 밝혀 갔다. 항쟁을 진압한 계엄당국은 5월 29일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던 126구의 시신을 쓰레기차에 실어 광주시립공원묘지 제3묘역에 안장했다. 이후 망월동은 이 나라 민중운동의 성지가 되었으며 해가 거듭할수록 민주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81년 5.18유족을 비롯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은 망월동에서 광주민중항쟁 1주기 추모식을 갖으려 했으나 경찰의 폭력 탄압으로 원천 봉쇄되었다. 유족인 정수만씨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82년 광주에 공수부대 및 계엄군의 투입을 허락한 장본인이 군의 작전명령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미연합 사령관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광주학살 배후조종 미국 반대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3월 김현장, 문부식씨 등은 부산 미문화원을 방화함으로써 광주학살에서 미국이 개입되어 있음을 전세계에 알렸다. 80년 5월 도청앞 분수대 위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개최하는 등 학생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 구속되었던 박관현(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씨가 교도소 당국의 비인간적인 처우를 개선할 것과 5.18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40여일 간의 단식투쟁을 벌이던 중 82년 5월 끝내 옥사했다. 전두환 정권은 박관현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여 고향인 영광에 강제매장했으며 88년 망월동으로 이장할 때도 운구차량을 탈취하는 폭력을 저질렀다.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광주사태 사후처리라는 명목 아래 관(官) 주도로 12월 ‘전남 지역개발 협의회’를 발족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는 기금을 망월동 묘지 이장 계획이나 어린이 대공원 건립 등에 사용하는 등 5.18을 희석시키기 위한 사업으로 일관했다. 특히 망월묘지가 민주화의 성지로 되어 가자 돈 몇 푼으로 망월동 묘지 이장을 계획, 당시 126기의 묘지 중 모두 26기의 묘지를 84년까지 이장하였으나 유가족 및 시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실패했다. 전두환 정권의 철권통치 속에서 맞이하였던 84년 5.18 민중항쟁 4주기 투쟁은 80년 이후 가장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여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 해 11월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문제가 주요한 초점으로 떠오르는 가운데 서울의 3개 대학 264명이 민정당사를 점거하는 등 반정부 투쟁이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1985년 5월 대학생 73명이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 광주학살의 배후 조종자로서 미국의 책임을 추궁했으나, 미국은 궁색한 답변으로 일관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12월 전남대, 전북대 학생 9명이 광주 미문화원을 점거했다. 5월 광주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86년 전두환 정권은 학살에 대한 책임은커녕 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광주를 직할시로 승격시키는 등 선심공세를 통해 광주항쟁을 은폐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87년 6월 항쟁, 군부독재 종식의 실패와 양 김씨의 정치적 배반
87년 부당한 헌법으로 군부통치를 지속할 속셈으로 발표된 전두환 군사독재의 4․13 호헌조치에 대한 각계의 투쟁이 확산되었다. 그러던 중 5월 18일 전국 각 대학에서 22.000여 학생들이 광주항쟁추모집회 및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5.18 민중항쟁 희생자 추모미사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사건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한 전국민적 분노를 일으켰고,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대중적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6월 9일 정권의 폭압적인 탄압으로 인해 연대생 이한열군 최루탄 파편상(7월 5일 사망)을 입을 것을 계기로 「6․10국민대회」를 전후해서 전국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지배세력의 강경책에 맞서 6.10 이후 명동농성과 전국적으로 계속된 시위는 군사파쇼를 더욱더 압박하였다. 6월 10일 밤부터 계속된 명동농성 투쟁은 6월 15일 자진 해산하였으나 전국적인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궁지에 몰린 군사정권은 6.29 선언이라는 기만적인 유화책을 내놓는다. 6.29 선언으로 보수야당이 투쟁전선에서 이탈하고, 투쟁은 급격히 소강되었다. 노태우가 제시한 ‘대통령 직선제’는 그 자체로 군사독재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양 김씨에게는 대권을 향한 재기의 발판이었다. 그렇게 6월 항쟁은 양 김씨의 배반과 민중운동의 불철저한 인식과 무능 속에서, 죽음으로 사수했던 80년 5월 혁명정신을 지키지 못한 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대선에서 노태우의 당선으로, 87년 6월을 달구었던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해방의 열망은 결국 군부독재의 합법적 승인으로 귀결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6.29 선언의 정치적 배경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한국문제의 해결을 위해 86년말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미 행정부 내의 한국관계 핵심 실무자들의 잇따른 방한이 있었다. 이들은 한국민의 불만이 한층 고조되어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폭발할 잠재력이 급격히 형성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당황했다. 미국은 2.7 박종철군 고문치사를 규탄하는 범국민적 대회가 열리던 그날 미 국무성 차관보 시거의 「전환기의 한국정치」라는 연설을 통해 전두환을 제거하려는 저들의 입장을 밝혔다. 그때 시거는 『그(전두환)는 더 이상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 은퇴정치가들의 집단에 합류할 것이다』이라고 말했다. 6.10규탄 전국대회 이후 다음날 미국무성의 오클리 부대변인은 한국사회에 대해 강도높은 우려를 나타냈으며 6월 항쟁이 고조되자 미국은 이제까지의 간접적인 공작에서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전두환이 시위진압에 군을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6월19일. 이한기 총리 『비상조치가 요구된다』고 발언)에 광주사태의 악몽에 시달리던 미국은 레이건의 편지와 시거 방한 등을 통해 군의 동원을 반대했다. 일설에 의하면 시거는 방한 중 6.29선언의 개요를 박세직을 통해 전달했다. 6.29선언이 나오기 몇 시간 전 슐츠는 미국 NBC TV와의 프로에 출현하여 『한국정부는 몇 가지 중요 문제에 관한 입장을 바꿔 지금 약속을 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 측의 장기적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고 말하여 6.29선언의 예고와 함께 이에 대한 미국의 노력을 강조했다. 한국에서 몇 시간 뒤 전두환은 부분적으로만 내용을 알고 있는 가운데 노태우는 6.29선언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의도대로 무난히 노태우 6공정권을 출범시켰던 것이다.
87년 당시 양 김씨는 후보단일화를 통한 군부독재 종식을 거듭 공언했었고, 동시에 자신이 후보단일화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지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패배한 5월을 딛고, 죽음으로 사수한 5월의 혁명정신을 끝내 움켜쥐지 못함으로 인해 민중운동은 양 김씨의 권력다툼 속에서 배제되었다. 87년 정치적 패배의 의미를 발빠르게 인식한 양 김씨는 민중운동과의 불안한 ‘동거관계’를 깨끗하게 청산하고 권력장악을 위한 현실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김영삼은 90년 노태우, 김종필 등 광주학살의 주범들과 3당 합당을 통해 보수대연합을 형성했고, 마침내 92년 대선에서 대권을 거머줬다. 김대중 또한 호남의 정서로 인해 보수대연합에는 끼지 못했지만, 97년 김종필, 박태준과 연합하여 대권을 거머쥐고 말았다. 군사파쇼 타도를 위한 민중들의 투쟁을 등에 업고 자신의 정치적 진출을 꾀하던 양 김씨는, 그들 스스로가 군사독재의 종식보다는 대권장악에 본심이 있음을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그리고, 군사파쇼와 학살의 주범들과 손을 잡음으로서 민중, 민주주의를 배신하면서 대권을 향한 행보를 내딛었다. 더욱 더 역설적인 것은 그 동안 무수한 민중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광주사태’, ‘폭동’으로 매도되었던 5월 혁명이, 87년 6월 항쟁에서 5월 혁명정신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개량적인 6.29 선언이라는 타협안에 굴복함으로서 비로소 제도적 인정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88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면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광주사태’는 국회 청문회 등을 거쳐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제도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
타락한 양김에 의한 5월 혁명과 6월 항쟁 죽이기
5월 광주는 87년 양 김씨의 민중,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으로 또다시 살육되었다. 우리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배신이 아니라 민중운동의 무능이다. ‘군사파쇼와 타협은 없다’며 죽어간 광주 시민군의 5월 혁명정신을 계승하여 군부독재의 종식으로 나아가지 못한 민중운동의 불철저한 인식과 무능에 의해 80년 5월의 패배가 87년에 재현된 것이다. 다만, 80년 5월이 군사파쇼에 맞서 죽음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다면, 87년 6월은 기만적인 6.29 선언에 스스로 무장해제되었다는 점이 차이일 것이다.
92년, 97년 학살자와 군사독재 세력과 손잡고 순차적으로 대권을 장악한 양 김씨는 민중,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배신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민주주의와 개혁정권으로 포장하기 위해 5․18과 6․10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고 동원했다.
5․18은 양 김씨에게 있어서 약한 고리가 아닐 수 없다. 5월 혁명이 죽음으로 거부했던 군사파쇼, 학살자와 한몸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이라는 핵심적 문제를 비껴 적정한 수준에서 형식적인 기념사업과 보상을 통해 피해가길 원했다. 그러나, 95년 12.12반란을 '용서'해 준 검찰과 그것이 옳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이어 5․18 내란을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결정은 100만명이 넘는 국민들의 전국적인 저항을 불러왔다. 이것은 5․18 특별법의 제정을 이끌어 냈고 마침내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내란 주모자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법처리 과정은 민중들의 저항에 직면하여 취한 조치이긴 하였으나, 김영삼 정권은 자신의 업적의 하나로써 5․18에 대한 진상 규명을 내세우고, 자신의 개혁적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5․18을 활용하였다. 이런 한계로 인해 발포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도 밝혀지지 않았고, 내란 종료시점도 항소심과는 달리 비상계엄 해제일을 81년 1월 24일로 보아 내란에 의해 들어선 정부를 인정하였다. 김영삼은 5월 광주의 명백한 진실에 접근할수록 자신의 정당성이 부정된다는 것을 명백히 알았기 때문에 1997년 5월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망월동 묘역 성역화 사업 및 상무대 공원 조성 등의 기념사업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김대중의 경우, 98년 대통령 취임 직후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을 받은 광주 학살자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함으로써 또다시 5월 광주를 학살했다. 그리고 2002. 7. 27 광주 북구 망월동 5․18묘역은 ‘국립 5․18 묘지’로 승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써 광주는 양 김씨의 정치적 개혁성을 상징하는 수준에서 진상규명, 형식적 사법처리와 사면조치라는 해프닝으로 끝났고, 군사파쇼에 죽음으로 맞섰던 시민군들의 혁명정신은 ‘국립묘지’라는 화려한 호칭 속에 콘크리트 벽에 갇혀 버렸다.
반면 6월 항쟁은 이들에게 강한 고리가 아닐 수 없다. 6.29선언이라는 달콤한 타협안을 그들이 받아버린 순간, 민중운동 또한 군부독재 종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굴복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배신을 정당화하는 것은 손쉬운 것이었다. 6월 항쟁은 군부독재에 맞선 위대한 투쟁이었고, 그 투쟁의 성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으며, 그 민주화항쟁의 주역인 자신들의 정권은 개혁과 민주주의 정권이란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개혁의 이미지를 앞세우며 노동자, 민중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개혁’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노동유연화와 정리해고, 구조조정으로 노동자, 민중들의 삶의 권리를 박탈했던 것이다.
누가 5월 혁명과 6월 항쟁의 정신을 담지할 것인가
그들은 광주의 역사를 그렇게 차가운 콘크리트 벽안에 가두어 두었다. 6월 항쟁을 직선제라는 제도적 틀 속에 가두어 두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5월 광주는 분명 명확한 사상과 이념을 가지고 조직된 혁명은 아니었지만, 군부 계엄군의 폭거에 맞서 죽음으로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해방의 열망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보상과 요구의 충족과 맞바꿀 수 없는 숭고한 정신이다. 그것은 패배했지만, 영원한 가치로 운동 속에 살아있기 때문에 끝내 승리할 것이다. 87년 6월의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기만적인 6.29선언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들에게 6월은 자신의 대권을 위한 도구였으나, 민중들에게 6월은 직선제라는 제도로 갇히지 않는 민주주의와 해방에의 열망이었다. 그것은 6월 항쟁의 열기를 이은 7월, 8월, 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고, 계급대중운동의 성장으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오늘의 현실을 보자. 전세계적인 자본주의 위기 속에 전쟁과 폭력과 야만이 우리를 한층 옥죄고 있다. 김대중 정권의 뒤를 이은 노무현 정권은 이러한 전쟁과 폭력의 질서, 신자유주의 질서를 그대로 수용하며, 개혁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가치를 움켜쥐고 민중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다. 민중운동은 이러한 엄혹한 정세에 제대로 된 대응을 조직하고 있지 못하다. 그것이 오늘날 5월 혁명과 6월 항쟁을 온전히 우리가 전취할 수 없는 조건일 것이다. 현실의 운동이 민중들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을 때, 현실의 억압과 폭력에 맞서 급진적, 민중적 운동을 형성할 때 비로소 온전히 그들의 정신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민중의 역사를 써나가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모색만이 콘크리트에 갇힌 열사들의 영혼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안이다. 지금도 무명전사들은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조국의 해방 없이 광주의 해결은 결코 없다고.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