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5.35호

국가 소유에 대한 재론

최원 | 회원, 미국 뉴스쿨 대학 철학 박사과정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막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파업을 하루 앞두고 사측과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철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이에 대한 평가는 다른 분들께 맡긴다). 이 싸움에 연루되었던 몇몇 사안들 중에 가장 중심이 되었던 것은 철도 사유화에 대한 반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슈가 제기되자 “좌파” 일각에서는 비록 공공산업의 사유화는 잘못된 것일지라도 그 대안이 국유화일 수는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국유화를 주장하는 것은 ‘국가주의’의 덫에 걸려드는 것이며 개개인들(“노동자와 시민”)의 역능을 증가시키기는커녕 그들의 소외를 야기할 뿐이라는 것이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서 발견될 수 있는 국유화의 폐해(관료제적 국가자본주의)가 바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로 채택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만한 주장은 국가 소유(state property)와 사적 소유(private property)의 대립은 허구적이며, 전자는 또 다른 사적 소유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는 개인적 소유(individual property)를 실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특히 주목되는 이유는 그것이 에티엔 발리바르에 의해 제출되었던 입장과 일견 유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유사입장 속에 종종 ‘기회주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글에서 발리바르가 작성한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의 전망: 인권의 정치와 정치의 탈소외」라는 글에 포함된 작은 절, “소유란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재검토하고 이를 통해 ‘국가 소유’를 특정한 방식으로 복권시키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이 텍스트에서 발리바르는 두 가지 소유의 변증법을 논한다. 소유와 정치의 부정적이고 외재적인 변증법과 그 양자의 내재적인 변증법 말이다. 소유의 외재적인 변증법 쪽에서는 정치(생존권, 노동권 등)가 소유에 반대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인데, 전자는 인권을 사적 소유권과 완전히 동일시한다면 후자는 인권을 단지 부르주아적 기만(‘보편적’ 인간의 허구성)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 바깥에서 집단적 소유의 기획을 제출한다. 다른 한 편, 소유의 내재적인 변증법 쪽에서는 정치가 반대로 소유 안에서 자신의 내적인 위치를 찾는 것으로 나타난다. 내재적 변증법은 다시 두 가지 방향으로 개방되는데, 첫 번째 방향이 사적 소유와 집단적 소유의 대당을 문제삼고 사적 소유로부터 개인적 소유를 구별하는 일에 관련된다면, 두 번째 방향은 “보편적 소유”로서 인류의 공동 유산 및 지적 소유의 문제가 어떻게 ‘총체적 점유’의 원칙을 제한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일에 관련된다.
여기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일차적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첫 번째 방향이다. 즉 사적 소유, 집단적 소유, 개인적 소유의 관계 및 차이를 규명하는 것 말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사적 소유란 단순히 한 개인에 의한 물의 소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들이 ‘사적 소유자’라는 배타적이며 제한적인 범주 속에 들어와서 이러한 조건으로 이러저러한 대상, 이러저러한 권리 또는 권력을 배타적으로 영유할 수 있는 것이다.” (93쪽) 그런데 이렇게 보자마자, 소유의 주체가 개인인가 개인들의 합으로서 집단인가라는 질문은 그 중요성을 상실하며(왜냐하면 양자 모두 결국 ‘사적 소유자’라는 동일한 법적 주체로 기능하므로), ‘영유의 배타성’ 여부가 오히려 본질적인 측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영유의 배타성을 주장하는 소유의 주체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상관없이 ‘사적 소유자’로 간주될 수 있다. 심지어 국가에 의한 소유조차 사적 소유로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즉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는 국가에 의한 ‘모든’ 소유가 사적 소유라는 말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동일한 논리에 의해서 우리는 정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그것이 영유의 배타성의 원리에 따라 조직되는 것이 아닌 한에서, 국가 소유는 집단적 소유(또는 ‘사적 집단적 소유’)가 아닌 “개인적 소유”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왜 발리바르가 “집단적 소유 또는 특히 국가적 소유는 그 자체로서 사적 소유와 다른 어떤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사적 소유로서의 국가 소유’라는 범주에서 “‘공적 서비스’의 책임, 목적, 제약과 관련되는” 국가 소유의 경우는 제외되어야 한다는 유보조항을 다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94쪽).
여기서 발리바르가 국가 소유의 고유한 위험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국가 소유 일반을 기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또 ‘공적 서비스’로부터 사적인 성격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기능을 국가로부터 분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자연적, 문화적 대상들의 사용, 전화, 향유에 관한 활동의 사회적 조직화에 있어 중요한 것은 소유의 초개인적(transindividual) 측면이 개인들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순수한 외적 제약으로 되돌아오는 것(마르크스는 이를 ‘개별노동자들에 맞서는 자본의 제권력’이라고 말했다)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유화를 포함한) “형식적인 집단화”는 이러한 개인들의 ‘소외’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집단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원론 속에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단 하나의 소유형태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양자 사이에 어떤 타협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사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일관된 집단적 소유나 일관된 사적 소유를 고집할 수 없었으며 모두 ‘복합적 소유’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해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타협을 수행함에 있어서조차 사적 소유와 집단적 소유 가운데 무엇이 근본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가라는 식으로 논쟁이 지속된다면 문제는 영원히 풀릴 수 없게 된다.
이 점을 명확히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법적 소유형태 가운데 근본적으로 ‘악한’ 하나의 소유형태를 제거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사적인 것의 제거도 공적인 것의 제거도 문제가 아니며, 공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을 분리시켜 전자를 비(非)국가적인 집단의 기능으로 출현시키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특히 발리바르가 그 자체로 ‘사적’일 수 있는 ‘집단적 소유’라는 범주에 의해 단지 국가 소유만을 지칭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 진다. 도대체 공적인 것을 어떤 종류의 집단적 소유도 도입하지 않고 구성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또 집단적 소유 자체가 기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형태 가운데 하나인 국가 소유는 왜 반드시 회피되어야 하는가? 억지스러울 따름이다.
결국 사정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우리는 이 문제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만일 발리바르의 주장의 핵심이 소유를 ‘법의 영역’으로부터 ‘정치의 영역’으로 이전시키는 것에 있다면, 이는 명백히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대당에 입각하여 법적 소유권을 전자에서 후자로 이전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 없다. 반대로 그것은 이러저러한 국가 소유를 명확한 정치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 한복판에 (소유에 관련된) 개인들의 정치적 발언권과 통제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제도 및 대항제도들을 구축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그 자체로 국가장치들의 급진적 변혁(transformation)의 과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적어도 ‘국가 소유’가 관련되는 한에서, 나는 문제의 해결책이 근본적으로 ‘국가의 민주화’라는 방향 속에서 추구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소유의 내재적 변증법의 두 번째 방향, 즉 ‘보편적 소유’의 방향에서 다시 이 문제가 논의될 수 있다. 사적 소유의 당파와 공적 소유의 당파, 또는 ‘소유권’의 당파와 ‘노동권’의 당파가 양자택일적으로 대립하면서 일종의 거울게임에 연루될 때 망각되는 점은 대립의 양쪽 진영이 모두 물에 대한 ‘배타적 처분권’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총체적 점유’(대상에 대한 완전한 장악)의 원칙은 정확히 이러한 배타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환경과 같은 인류의 공동 유산 및 독점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지적 재산 등으로 인해 이러한 총체적 점유의 원칙이 실패하게 되는 곳에서 ‘보편적 소유’의 문제설정이 도출되어 나오는데, 이러한 소유에는 ‘통일된 인류’라는 허구적 주체 이외에 어떤 소유 주체도 있을 수 없다. 전근대적이고 허구적인 ‘고귀한 소유’(초월자에 의한 모든 것의 소유)가 그 안에서 전혀 세속적이고 내재적인 방식으로 복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보편적 소유는 ‘공적인 영유’ 개념을 초과하며, 국가나 심지어 초민족적인 국가에 의한 소유와도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보편적 소유의 등장은 기존의 소유형태들의 내재적 한계들을 드러내면서 ‘유적 소유’라는 통념을 다시 출현시키고 있지만, 이러한 보편적 소유의 등장이 그렇다고 기존의 소유형태들을 폐지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사적 소유에 대한 계기적인 반대물들--소유권의 전부 또는 일부의 국가로의 이전을 자신들의 유효성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생존권과 노동권--이 뚜렷이 등장하면서 사회생활을 양극화시켰던 소유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적대들”(102쪽)을 폐지하진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보기보다 매우 강한 테제다. 그것은 모든 소유형태들이 최종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테제다. 그는 하나의 소유형태가 결코 다른 하나의 소유형태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심지어 사적 소유라는 배타적 형태조차 사회로부터 완전히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제거가 가능하다고 믿게되는 순간 우리는 즉시 다시 소유의 외재적 변증법 속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확히 자유주의(사적 소유만이 있다)와 사회주의(집단적 소유만이 있다)의 대립이 형성되었던 그 오래된 방식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발리바르의 테제는 사적 소유형태와 집단적 소유형태라는 ‘배타적’ 소유형태들을 역사 속에서 대체할 어떤 새로운 개인적․초개인적 ‘소유형태’를 제출하려고 시도하는 것조차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적 소유’란 정의상(by definition) 어떤 하나의 “소유형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소유형태는 법적인 형태일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 점을 지속적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개인적 소유나 초개인적 소유의 획기적으로 다른 새로운 ‘형태’가 무엇이냐 라는 잘못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개인적․초개인적 소유란 어떤 새로운 소유형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강한 의미에서 “소유의 정치화”를 표현한다. 그것은 차별적인 소유형태들(공적이거나 사적인, 배타적이거나 비배타적인 다양한 형태들) 사이에 항상 이미 정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정치 그 자체를 그러한 소유형태들 사이의 영속적인 매개로 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는 새로운 소유형태들의 발명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발명되어야 하며, 이러한 발명 속에서 아마도 우리는 소유의 정치화 및 민주화의 또 다른 수단들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 개인적․초개인적 소유란 그렇게 발명되어지는 그 어떤 특정한 소유형태와도 최종적으로 동일시될 수 없다.
공적 서비스에 관련된 산업들의 사유화 반대 투쟁은 왜 정당한가? 왜냐하면 그러한 투쟁들은 그 자체로 노동권과 생존권 등의 문제를 소유의 한복판에서 내재적인 방식으로 제기하려는 노동자들의 정치, 즉 ‘노동의 정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생산수단의 국유화’라는 식의 구(舊)사회주의국가에서 시도된 총체적인 집단주의적 소유의 제도화하고는 별 상관이 없다. 그 두 가지를 착각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바로 자본이다! 사유화 반대 투쟁은 노동력의 재생산 과정을 공격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노동자성 그 자체를 파괴하려는 자본의 음모가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너무나도 올바른 투쟁으로 자리매김될 수밖에 없다. 수익성의 저하를 이유로 들어 공적인 것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마저 포기하려드는 자본과 국가에게 노동자들의 존엄성을 다시 인식시키기 위한 투쟁이 또한 해당 기업 노동자들만의 투쟁이 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국영기업 사유화 반대 투쟁이 일어날 때마다 여기저기서 그러한 투쟁을 단순한 밥그릇 싸움에 불과한 것으로 흑색선전하기 위한 시도들이 고개를 쳐드는 것을 보곤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밥그릇 싸움으로 왜곡되는 것을 막고 그것을 ‘정치화’시킬 수 있는 길은 바로 ‘일하는 시민들’의 연대투쟁을 통해서만 찾아질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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