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세계사회운동
대안세계화 운동과 세계사회포럼을 중심으로
세계화로 인하여 오히려 새로운 사회운동이 출현하고 있는가? ‘반세계화’ 운동이라고 부르는 현재의 운동이 바로 우리의 관심사다. 반세계화 운동은 금융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관한 국가(․당)들의 무기력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민들의 자율적인 운동의 출현을 의미하는가? 나아가 반세계화 운동은 기존의 운동들(동방의 국가들과 서방의 당들의 사회주의를 포함하여)이 제기하거나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무엇이었는가를 사회운동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가? 오늘날 세계사회포럼 내외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토론은 이 문제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다
1. 세계사회포럼의 출발점
세계사회포럼의 출발점은 남미와 유럽의 사회운동, NGO, 지식인 그룹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참가가 대중적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포럼의 프로세스가 확대될 수 있었던 데에는 남미에서의 새로운 세대 대중운동의 형성과 유럽의 다양한 정치 분파들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남미의 새로운 세대 대중운동은 남미 전역에서 형성되고 있는 농민(․인디오) 운동의 성장을 배경으로 한다. 남미의 농민(․인디오) 운동은 일차적으로 ‘토지(농지)’의 문제로부터 출발했지만, 그것이 사회운동으로 확산되면서 FTAA(아메리카자유무역지대) 창설, 외채, 자연자원의 사유화와 같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정책 프로그램이 야기하는 복합적인 문제들이 극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남미의 농민․인디오 운동은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인민의 자율적인 운동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반세계화 운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유럽에서 사회주의 국가와 당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을 새롭게 재건하려는 오랜 기간의 모색이 있었다. 그 중 일부의 경향은 세계화를 비판하는 사회운동들의 활성화에 전략적 가치를 부여하고, 반세계화 운동의 확산에 힘을 쏟았다. ‘반세계화’로 모인 사회운동 경향의 형성이 세계적, 지역적 차원에서 사회적 갈등을 재 활성화함으로써 ‘정치의 부활’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미 유럽의 ‘좌파’ 정당들이 미국식 모델을 무력하게 추종하며 정당성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특히 ‘유권자’들이 부정적․소극적 수동성), 기성 ‘좌파’ 정당과의 ‘공동집권’이라는 미망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의 과제며, 오히려 사회운동과의 교류를 활성화하고 노동자운동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재건을 위한 가장 최선의 대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반세계화운동과 세계사회포럼의 확산의 주축이 되었던 운동, 세력은 기존의 각 지역-국가들의 주류 운동과는 출발점의 위치가 달랐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첫 번째 세계사회포럼부터 주류 노동운동의 참여는 저조했다. 라틴 아메리카 노동운동 조직의 참여가 미진했고, 유럽에서도 이탈리아 노동조합총연맹(CGIL)을 제외하곤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1990년대 초반까지 주류의 위치를 차지했던 운동은 어떤 곤경에 처해 있던 것인가? 남미의 상황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2. 1990년대 남미의 정당: 상파울루 포럼
1990년 7월 브라질 노동자당(PT)의 초청으로 모인 남미 48개의 정당, 전선체의 대표들이 상파울루 포럼(Sao Paulo Forum)을 설립한다.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엘살바도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 멕시코 ‘민주혁명당’, 우루과이 ‘확대전선’, 볼리비아 ‘자유볼리바르운동’, 페루 통일좌파, 아이티 라발라스운동, 쿠바 공산당 등 남미의 주요한 정당, 전선체들을 총망라한 것이었다.
특히 상파울루 포럼의 두 날개는 게릴라조직에서 정치정당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는 조직과, 남미의 ‘떠오르는 별’로 각광을 받던 브라질 노동자당이었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과 파라분도 마트리 민족해방전선 등은 게릴라 투쟁의 시기를 지나 ‘평화협상’의 단계를 거쳐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의 시기 동안 합법적인 정당으로 전환했고, 브라질 노동자당은 사회운동(전투적 노동조합운동, 기초공동체 운동)의 성장을 기반으로 해 선거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상파울루 포럼의 창립자들은, 포럼의 특별한 의미는 무장투쟁에 개입했던 세력들과 선거에 참여하는 세력들이 정치적 토론을 교환하고, 서구의 좌파들이 소홀히 다루던 남반부의 고유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당시의 시점은 소련과 동유럽이 사회주의 블록이 동반 붕괴하는 때였고, 이는 상파울루 포럼의 노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참가 조직들의 노선의 대체적인 경향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였다. 먼저, “민주주의 없이 혁명 없다”는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정치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경제적 민주주의와 특히 조직생활의 민주주의를 강조하였다. 둘째, 따라서 정치-사회적 다원주의, 선거를 통한 경쟁을 표방했다. 셋째, 무장투쟁 물신주의를 거부했다. 대체로 1980년대 무장투쟁을 전개해온 그룹은 무장투쟁의 역할을 ‘공개영역으로 투쟁의 이전하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재조정하였다. 넷째, 이데올로기적 대립보다는 구체적인 정책과 목표의 형성을 과제로 설정했다. 다섯째, 노동자, 농민을 넘어서 민중 다수를 결합하는 다계급적, 민족적 강령을 구성해야한가고 주장했다. 여섯째, 전위주의와 수직주의의 종식을 표방했다, 즉 혁명조직의 역할은 다양한 부문들과 세력들의 활동이 접합되도록 지원하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브라질 노동자당은 노동조합을 포함한 모든 사회운동의 자율성이 침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을 채택했고, 엘살바도르 파라분도 마트리 민족해방전선은 “새로운 다원주의적 상황에서,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운동들에 의해 공유되는 광범위한 지도 부위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며, 이는 일종의 집합 전위 또는 공동 전위(collective or shared vanguard)를 의미한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러한 포럼의 노선은 1990년대 초반 선거에서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보였고, 브라질, 우루과이, 엘살바도르는 그 주역으로 여겨졌다. 우루과이의 확대전선은 1990년 몬테비데오의 시장직을 획득했고, 1989년 파라과이는 "만인을 위한 아순시온" 연합이 수도의 시정부를 장악했다. 1990년 아이티에서는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직에 당선되었다. 특히 브라질의 노동자당의 성공 사례가 돋보였다. 이처럼 낙관적인 분위기에서 1993-96년 사이 각 나라의 주요 선거 일정이 다가오면서, 포럼의 활동은 대안 강령 특히 경제부문 강령을 마련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논의가 처음 제안될 당시의 대안강령의 대략적 윤곽을 보면, ‘혼합경제’와 ‘라틴아메리카 경제통합’이었다. 즉 생산수단의 국유화 대신에 소유와 부의 민주화를 추구하자는 것이었는데, 국유, 사유, 혼합소유, 협동조합 소유 등 연합적 생산형태와 생산자들의 연대를 실현하고, 국가는 투자, 축적, 분배의 조절을 돕고 농업개혁을 포함하여 구조개혁을 단행하고, 중소기업의 장려를 통해 국내시장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 나라에서 이러한 강령이 성공을 거두는 게 라틴 아메리카의 협력과 통합을 촉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진행될수록 상파울루 포럼은 점차 두 개의 주요 경향으로 나누어졌다. 한편으로는 ‘현실주의적’ 활동을 주장하면서 세계화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을 개혁의 수준에 제한하는 경향(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수용, 세계은행과의 지원 협상)과 제도정치에 대한 참여를 확대하면서도 사회주의적 지향과 계급적 자주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포럼은 합의에 기반 하여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게 점점 어려워졌고, 거대 정당들로 구성된 작업반에서 다듬어진 문건들은 매우 추상적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국부에 대한 사회화와 통제, 외국인 투자, 거시경제 안정성, 각국 통화 및 경제 균형의 강화와 같은 문제에 관한 정책에 관한 합의를 이룰 수 없었다.
따라서 포럼의 활기는 감소하고, 공동의 "대안강령"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으로의 수렴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미 정당들의 신자유주의로의 수렴은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강령의 형성이 실패한 궁극적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대중운동으로부터 독자화(분리)된 ‘정치계급’의 운동이 실패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정치정당과 대중적 토대의 부적응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정치계급’은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권력의 보전과 사회경제적 ‘현상유지’를 위한 실용적 방편을 찾는 방향으로 쉽게 경도된다. 그들은 자신이 ‘혁명적’인 정당이며 따라서 안전판이 될 수 있다고 부당하게 전제하면서, 국제금융기구와 초민족 자본에게 권력을 대폭 이양하는 것을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해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또한 대안강령의 실패는 사회변혁에 관한 경험주의적 접근, 즉 사회모델의 이론적 구성과 적용이라는 기존의 접근 방식을 되풀이한 결과일 수 있다. 정당의 엘리트들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모델은 ‘사회운동의 자율적 요구와 상호조정’을 참조하기보다는, 선거승리를 위한 캠페인 기술과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정치계급의 독자화와 사회변화에 관한 경험주의적 접근은 동전의 양면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강화될수록 정치정당과 사회운동의 결합은 더욱 곤란해졌다. 정당의 정치적 활동은 감소하고 제도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당 활동가들의 활동도 선거일로 좁혀져서, 선거홍보를 위한 여러 사소한 행동으로 축소된다. 정당이 선거에 관해 부르주아와 똑같은 기술을 사용하고(심지어 ‘개인숭배’를 자극), 당의 재정과 활동이 정부기구, 의회, 지방정부, 선거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간부에게 의존하면서 활동가들의 역할이 모호해진다. 둘째, 정치정당은 새로운 사회 주체의 잠재력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폐쇄적인 이념적 틀을 고수하고, 사회운동에 대해 권위주의적 스타일로 접근한다. 그러나 사회운동들은 ‘지도를 받는 것’을 어색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화제에 민감하다. 사회운동들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어야하며, 또한 한정된 다수가 소수에게 의지를 관철시키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회운동이 요구하는 방식은 대개 좌파운동 조직과 당들을 괴롭혀온 비참한 내부적 분열을 막고 중대한 오류를 피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 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적 차원의 구조적 조건이 어느 곳에서도 항상 작용하기 때문이다. 상파울루 포럼을 구성했던 정당, 전선체들이 생각했던 운동의 노선은 각 민족국가들의 발전과 주권의 재건, 그것의 합으로서 라틴아메리카의 변화였다. 그러나 이미 상파울루 포럼이 창설된 시점은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와 함께, 세계자본주의 체계로부터 민족적 ‘이탈’(분리) 전략은 그 전망이 극히 불투명해진 때였다.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운동에 대한 선차적 폭력(예컨대 미국의 ‘저강도전쟁’의 압력)은 항상 실존을 위협하는 요인이었고,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상파울루 포럼은 정치적, 사회적 운동의 내적이며 외적인 요인을 동시에 전진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현상유지와 방어를 위해 10 여 년 간의 시간을 단지 ‘인내’한 것이었다.
3. ‘반세계화운동’(대안세계화운동)과 세계사회포럼
1990년대 세계화의 제도적 실행은 ‘워싱턴 컨센서스’와 IMF와 세계은행, WTO와 같은 국제 금융, 무역기구의 강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1980년대 이후 세계 각 지역에서 외채․금융위기가 발생했지만, 이는 더욱 정교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프로그램을 낳았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고, 금융위기는 세계 각 지역으로 감염되거나, 재발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의 성장기(곧 민족국가간 체계의 성립기)와는 극히 이질적인 현상이었다. IMF/세계은행이 주도하는 ‘외채위기 관리’(즉 경제구조조정)와 WTO와 자유무역지대의 출범이 재촉한 ‘무역, 투자의 자유화’는 세계의 운동들이 직면한 중대한 이슈의 출현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주변부 지역은 ‘투자자유화’와 ‘자본도피’라는 양날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초민족 기업은 활동 범위가 확대되면서 ‘지식에 대한 소유권’, ‘생명, 자원에 대한 소유권’을 배타적으로 확대, 보장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는 주변부 인민의 빈곤과 무권리 상태와 날카롭게 대비되었다. 또한 구조조정의 효과가 여성에게 집중되고(빈곤) 이에 수반하는 성의 상품화(성매매)는 확산되었다. 시민권의 제한, 노동권의 축소, (교육․의료와 같은) ‘공공서비스의 사유화’는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물론 이러한 현실은 중심부와 주변부의 사회운동이 양자가 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세계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화에 대한 양자의 입장이 처음으로 표출된 계기는 1999년 WTO 3차 각료회의가 열린 시애틀에서 벌어진 투쟁에서였다. 시애틀 투쟁은 실제로 회의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 이후 그와 유사하게 신자유주의 의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제금융기관의 회의나 선진국 정상회의 등 정부간 회의에 대응하기 위한 일련의 시위들이 계속 벌어졌다. 바로 이 시위에 ‘반세계화’ 운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시애틀에서 투쟁이 막 벌어질 때만 하더라도, WTO에 반대한다는 측면에서 운동들이 서로 비슷해 보일 수 있었지만, 그 이유는 각자 틀렸다. 주변부 국가는 ‘미국화’(Americanization)로부터 자기 민족에게 고유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담론이었다면, 미국에서는 (특히 노동운동은) ‘보호주의’(protectionist)의 목소리가 매우 컸다. 단적으로 "멕시코나 중국이 일자리를 훔쳐가고, 환경기준을 하락시킨다“는 것이었다. 또한 시애틀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미국노총(AFL-CIO)에게는 중국의 WTO 가입 반대가 중대한 동기였다. 미국노총이 내세운 주장은 중국이 WTO에 가입하게 되면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제공을 통해 중국의 엘리트들이 대중을 억압하게 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중국의 WTO 가입을 반대하는(곧 배제하려는) 담론은 사실상 국수주의-보호무역주의(그리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인식의 차이가 유지된다면, 공동의 운동은 사실 불가능한 것이다.
시애틀투쟁 이후 벌어진 일련의 ‘반세계화’ 시위와 회의들은, 그 과정에서 제기된 이슈와 대안들을 토론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세계사회포럼을 낳았다. 하지만 세계사회포럼은 참여자들의 구성, 조직화 방식과 형태, 주요 이슈라는 모든 측면에서 그 이전의 유사한 국제적 조직들과는 다른 특징을 포함하였다. 구성을 보면, 그 이전시기에 출현했던 모든 유형의 운동들이 참여했고, 지방-지역-민족-초민족적 형태로 조직된 집단들도 포함되었다. 형태상 특이한 점은 총괄적인 상부구조를 만들지 않고, 활동을 전개해 나가려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남과 북의 운동이 사회포럼을 통해 결합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이다.
반세계화 시위에 참여한 운동들과 그들이 제시한 이슈의 다양성만큼 포럼이 다루는 주제는 광범위하였다. 첫 번째 세계사회포럼(2001년)을 준비하였던 조직위원회가 제시한 주제는 ①부의 생산과 사회의 재생산, ②부에 대한 접근과 지속성, ③시민사회와 공적 영역, ④새로운 사회의 정치권력 윤리 등이었다. 하지만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화제는 무엇보다도 WTO, 외채지불, 금융통제와 같이 반세계화운동과 함께 제기된 문제와 ‘토지개혁’, ‘FTAA 가입’ 등 남미의 현안 이슈였다. 세계사회포럼에서 주요한 화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포럼을 주도했던 일부 단체들을 중심으로 작성되었던 <호소문>을 살펴보는 게 유용하다.
▪ 세계사회운동국제총회(네트워크)의 호소문
첫 번째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한 수많은 단체들 중 MST, CUT, CGIL, ATTAC, 세계여성행진, 포커스 온 글로벌 사우스(Focus on Global South), 쥬빌리2000 등 7개 단체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관한 주요 쟁점들에 대한 기본 입장과 활동 목록을 마련하고자 <동원을 위한 호소문>(Call for Mobilization)을 작성하고, 그 초안을 검토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조직했다. 7개 단체 외에 세계 여러 단체들이 모인 총회는 두 번째 사회포럼에서도 2차 호소문을 발표했고, 2003년에는 3차 호소문과 함께 ‘세계사회운동네크워크’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이 발효한 호소문은 운동의 일반적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포럼 참여자들의 거대한 다양성, 즉 참여자들 사이에 여성과 남성, 청년과 성인, 원주민과 농촌인과 도시인, 노동자와 실업자, 노숙자, 퇴직자, 학생, 이민자, 상이한 신조․피부색, 성적 지향의 차이가 있지만, 이 다양성이 운동의 힘이며 통일성의 토대다. 세계화가 강화하는 여성 차별적 가부장제, 인종차별, 종족학살, 생태파괴와 인민의 건강․생활조건 악화를 반대한다. 외채 ‘탕감’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사회-생태적 착취에 대한 배상이 이루어져야 하며, 금융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금융거래세를 도입하고, 조세피난처를 폐지해야한다. 자원과 공공재의 사유화, 노동기본권의 박탈, 자유무역과 FTAA 의한 농민-노동자-지방기업의 주변화를 반대하고, 민주적 토지개혁의 이루어져야 하며, 생명에 대한 특허권이 폐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군비경쟁과 무기거래, 국내문제에 관한 외국의 군사개입을 반대한다 등등.
사회운동 총회의 호소문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조건 속에서 사회운동들이 ‘모든 인민들의 권리’(즉 인권이자 시민권)에 대한 요구들의 목록을 재 작성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가 ①상호배제적인 권리가 아니라 상호증식적/상호확장적 권리며, ②따라서 “보편화”(확장)될 수 있으며, ③인민들의 자율적인 운동을 통해 쟁취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사회운동의 (자율적이며, 보편적이며, 상호증식적인) 접합을 모색하는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구조나 제도의 변혁은 여전히 남는 문제이며, 그러한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제안과 토론은 자연스럽게 요청될 수밖에 없다.
▪ 경제적 제도적 변화를 위한 제안들
따라서 2002년 사회포럼에서는 여러 단체들이 경제․제도적 변화를 위한 그 이전보다 구체화된 제안들을 제출하였다. 반세계화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여러 방식으로 표현된 주요한 견해들을 살펴보자.
1) 국제금융․무역기구의 전화: 적극적이거나 수동적인 방법들을 통해 WTO나 IMF/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를 a) 해체하거나 b) 중립화하거나(예를 들어 IMF를 자본 유입과 환율변화를 모니터링 하는 단순한 연구기관으로 전환), c)그들의 권력을 근본적으로 축소하고 국제기구나 합의, 지역적 그룹들이 감독하는 다른 행위자들의 결합으로 전환하자는 제안. 그 대안으로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국제노동기구(ILO), 경제블록(메르코수르, SADCC, ASEAN 등)을 강화하고, 새로운 세계적-지역적 기구들을 창설할 것을 주장한다.
2) 금융거래과세: 민족적 정책수단, 국제적 회계 수단을 통해 민족국가로의 자본유입에 관한 통제를 회복하고 증진하자는 제안. 금융거래 기간에 반비례하는 과세율 부과하여 투기를 억제하며, 해외직접투자에 다양하게 과세하며, 초민족적 기업의 이윤에 과세하고, 모든 금융시장에 특정한 통제를 강화하고, “세금피난처”를 제거하고, 은행해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금융위기에 책임이 있는 사적인 행위자가 그 결과를 책임지게 하며, 국제금융기관(IMF와 세계은행)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것을 주장한다.
3) 제3세계 외채탕감: 이는 제3세계 국가의 경제 구조의 형성을 위해 불가결한 요소라는 제안.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중단하고, 부분적으로 자기충족적인 탄탄한 내부적 경제적 기초의 구축하고(이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된 지역의 창설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는 내생적 발전모델을 낳으며, 내부시장을 강화하고, 지역금융을 위한 지역의 저축기금을 창설할 수 있으며, 부를 재분배하기 위한 조세를 비롯한 장치를 마련할 수 있으며, 소농을 위한 토지개혁과 주택을 위한 도시개혁을 도입할 수 있다), 이에 기반한 무역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4) 농업개혁의 전환: 토지에 관한 권리는 누가 ‘소유’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누가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제안. 집단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 사이의 관계를 수정하고, 사회적인 토지관리 메커니즘을 개발할 것, 빈농/소농의 조직이 생산을 조정할 수 있는 지역적 능력을 발전시킬 것, 핵심 작물에 대한 관세보호를 실시할 것을 주장한다.
5) 물의 상품화와 사유화에 대한 반대 (댐에 대한 반대)
6) 초민족기업에 대한 감시: <기업책임성에 관한 기본협정> 창설을 통해 초민족 기업에 관한 통제를 제안한다. 대안적이며, 소규모-지방적 기업의 연합을 통한 상품과 서비스 제공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할 것을 주장한다.
물론 세계사회포럼에서의 이러한 제안들은 아직 추상적인 구호와 아이디어를 다소 구체화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안들은 그것을 ‘어떻게’ 즉 어떤 방식으로 실현해나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남기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사회포럼에 관한 복합적인 논점을 낳고 있다.
4. 대안세계화운동의 쟁점
▪ 혁명이냐 개량이냐?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이, ‘반세계화’(대안세계화)를 위한 요구들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그 방식의 문제를 두고 세계사회포럼의 참가 그룹들이 ‘개량주의’와 ‘급진주의’가 양극화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평가가 한편에서 제기되고 있다. 즉 포럼의 한 축인 개량주의자들은 ‘세계화의 인간화’라는 약속을 보증 받기 위해 세계은행이나 다른 국제금융기관에 대한 로비나 협상에 주력하고 있고, 다른 한 축인 급진주의자들은 ‘개량’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국주의나 그 ‘보호국’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입장을 지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먼저 경제․제도적 변화를 위한 제안들 자체를 기존의 “개량주의”라는 잣대로 판별할 수 있느냐는 점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제안들이 개량주의라고 비판하려면, 역으로 무엇이 혁명적인가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제안들의 특징은 ‘민족적 이탈’ 전략과도 분명히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다. 오히려 제안들은 세계적 수준의 전략과 지방적 전략, 그리고 지역적 전략의 요소들을 포괄하여 세계자본주의 체계의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의 사회 변혁의 계기들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사회주의 국가, 당들의 전략―민족적 이탈, 사회모델의 적용, 정당과 정치혁명 등 혁명에 관한 통념을 형성했던―과 차별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한 요구를 그 기준으로 “개량주의인가 아닌가”라는 기준으로 쉽게 나눌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개량주의’라는 비판에서 제대로 읽어야 할 대목은 있는데, 그 요구를 펼치는 운동이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 가라는 질문에 관한 것이다. 즉 그러한 운동이 국제적․국가별 코포라티즘적인 운동 노선에 의존하고 있는 가라는 문제다. 대중운동은 종종 자기 방어적인 운동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개량주의/혁명주의라는 잣대로 일반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운동이 ‘자기중심적 실리주의’에 집착하는가 또는 보편적 인민의 사회적 요구에 입각한 것인가 따라서 “계급 형성적인 운동인가”라는 평가는 항상 가능한데, 이는 코포라티즘의 문제인 것이다.
▪ 정당(정파성)인가 사회운동인가?
또 한편으로는 세계사회포럼을 NGO가 주도하면서 포럼이 배제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들은 “시민사회”를 강조하며, 세계사회포럼에 정당과 정부의 참여를 거부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활동을 ‘시민사회’의 영역으로 국한하면서, 국가에 대해서는 고작 자유주의 틀 내의 비판에 머물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NGO들은 국가, 정부, 의회, 정당에 대해서는 ‘거부’의 태도를 보이면서도, 세계은행이나 초민족 기업과는 협력관계를 맺거나 경제지원을 전달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주로 수행함으로써 사실은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의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는 비판이 줄곧 제기되고 있다.
물론 이처럼 NGO 운동이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유지하기 위한 위기관리체계의 일원으로 기능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비판이 가능한 문제이다. 그러나 사회운동이 정당에 대해 자율성을 형성하는 문제는 별도의 문제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오늘날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이 ‘정당의 분열’을 반영하여 대립하는 상황이 오히려 운동의 공동의 지반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좌초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선거정치를 매개로 하는 정당들의 대립은 분명한 노선의 차이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종종 이데올로기적 선전의 수사나 이미지에 기댄 것이며, 또한 선거에서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대중운동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분할’하려는 경향을 낳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은 사회운동의 주도성을 강화하면서, 운동의 전진을 위한 공동의 지반을 창설하는 게 적합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 새로운 국제주의인가?
근대 이후 역사적 운동들에서 국제주의는 항상 존재해왔고 운동의 노선에 스며있던 이념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세계시민’의 형성(코스모폴리탄주의)을 예상했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체계는 노동자와 여성의 시민권을 배제하였고, 특히 세계자본주의의 민족적 분할(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은 광대한 시민-이하의 인구를 창조했다. 따라서 국제주의의 이념은 일차적으로는 ‘민족주의’에 관해서 정의되었고(물론 그것의 완전한 ‘거부’인지 완전한 ‘실현’인지는 모호했다), 노동자운동의 국제주의, 쇼비니즘과 인종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을 가리켰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통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참여 문제를 놓고 노동자운동의 비극적 분열이 있었고, 이는 동시에 노동자운동이 민족국가의 체계에 (분할되어) 포섭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냉전과 양대 진영의 형성은 한편에서는 반공주의․코포라티즘적인 국제 노동운동의 포섭(․분할) 체계를, 다른 한편에서는 볼세비즘의 민주집중제(사실상 중앙집중제)를 모방하는 당의 국제주의와 그 위기(중소분쟁)를 낳았다. 또한 제3세계주의는 양대 진영의 경쟁에서 그 틈새를 찾아보려는 민족적 발전을 위한 대안전략으로 출발하였으나, 양대 진영의 압력 속에서 전망을 소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이후 국제주의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운동들의 출현은 오랜 기간 지체되어 있었던 셈이다.
하기에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라는 동시대적인 조건에서, 대안세계화 운동의 출현은 국제주의의 부활, 또는 그 이념과 운동을 다시 정의하는 계기가 될 것인가가 토론의 쟁점이다. 먼저 세계사회포럼은 사회운동들의 고유성 또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운동들의 윤리(문화)라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국가(․당)의 국제주의가 아니라 자율적인 사회운동들의 수평적 교통으로서의 국제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여러 국제주의의 ‘변용’들과의 차별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국제주의 지향이 공동의 투쟁 속에서 우애를 고양하고, 공통의 이념을 발견하려는 과정 속에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국제주의의 형성 과정은 곧 인민들의 사회운동들의 공통의 이념과 윤리 양자 모두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대안세계화운동과 포럼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쟁점 외에도 수많은 토론의 과제가 있다. 세계사회포럼의 구조와 형식, 주제를 어떻게 개선하여 사회운동의 이념과 활동계획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증진할 것인가의 문제는 최우선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포럼의 프로세스에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인가도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국제주의에 대한 일반적 지향 속에서도, 지역(예를 들어 아랍, 남미, 남아프리타, 동아시아, 유럽과 같이) 차원에서 그 지역의 고유한 사회적․문화적 문제들과 결부된 사회운동의 지향과 가치, 공동의 운동 노선을 형성하는데 기여할 것 인가도 구체적으로 접근해야할 중대한 과제다.PSSP
1. 세계사회포럼의 출발점
세계사회포럼의 출발점은 남미와 유럽의 사회운동, NGO, 지식인 그룹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참가가 대중적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포럼의 프로세스가 확대될 수 있었던 데에는 남미에서의 새로운 세대 대중운동의 형성과 유럽의 다양한 정치 분파들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남미의 새로운 세대 대중운동은 남미 전역에서 형성되고 있는 농민(․인디오) 운동의 성장을 배경으로 한다. 남미의 농민(․인디오) 운동은 일차적으로 ‘토지(농지)’의 문제로부터 출발했지만, 그것이 사회운동으로 확산되면서 FTAA(아메리카자유무역지대) 창설, 외채, 자연자원의 사유화와 같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정책 프로그램이 야기하는 복합적인 문제들이 극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남미의 농민․인디오 운동은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인민의 자율적인 운동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반세계화 운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유럽에서 사회주의 국가와 당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을 새롭게 재건하려는 오랜 기간의 모색이 있었다. 그 중 일부의 경향은 세계화를 비판하는 사회운동들의 활성화에 전략적 가치를 부여하고, 반세계화 운동의 확산에 힘을 쏟았다. ‘반세계화’로 모인 사회운동 경향의 형성이 세계적, 지역적 차원에서 사회적 갈등을 재 활성화함으로써 ‘정치의 부활’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미 유럽의 ‘좌파’ 정당들이 미국식 모델을 무력하게 추종하며 정당성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특히 ‘유권자’들이 부정적․소극적 수동성), 기성 ‘좌파’ 정당과의 ‘공동집권’이라는 미망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의 과제며, 오히려 사회운동과의 교류를 활성화하고 노동자운동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재건을 위한 가장 최선의 대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반세계화운동과 세계사회포럼의 확산의 주축이 되었던 운동, 세력은 기존의 각 지역-국가들의 주류 운동과는 출발점의 위치가 달랐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첫 번째 세계사회포럼부터 주류 노동운동의 참여는 저조했다. 라틴 아메리카 노동운동 조직의 참여가 미진했고, 유럽에서도 이탈리아 노동조합총연맹(CGIL)을 제외하곤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1990년대 초반까지 주류의 위치를 차지했던 운동은 어떤 곤경에 처해 있던 것인가? 남미의 상황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2. 1990년대 남미의 정당: 상파울루 포럼
1990년 7월 브라질 노동자당(PT)의 초청으로 모인 남미 48개의 정당, 전선체의 대표들이 상파울루 포럼(Sao Paulo Forum)을 설립한다.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엘살바도르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 멕시코 ‘민주혁명당’, 우루과이 ‘확대전선’, 볼리비아 ‘자유볼리바르운동’, 페루 통일좌파, 아이티 라발라스운동, 쿠바 공산당 등 남미의 주요한 정당, 전선체들을 총망라한 것이었다.
특히 상파울루 포럼의 두 날개는 게릴라조직에서 정치정당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는 조직과, 남미의 ‘떠오르는 별’로 각광을 받던 브라질 노동자당이었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과 파라분도 마트리 민족해방전선 등은 게릴라 투쟁의 시기를 지나 ‘평화협상’의 단계를 거쳐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의 시기 동안 합법적인 정당으로 전환했고, 브라질 노동자당은 사회운동(전투적 노동조합운동, 기초공동체 운동)의 성장을 기반으로 해 선거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상파울루 포럼의 창립자들은, 포럼의 특별한 의미는 무장투쟁에 개입했던 세력들과 선거에 참여하는 세력들이 정치적 토론을 교환하고, 서구의 좌파들이 소홀히 다루던 남반부의 고유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당시의 시점은 소련과 동유럽이 사회주의 블록이 동반 붕괴하는 때였고, 이는 상파울루 포럼의 노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참가 조직들의 노선의 대체적인 경향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였다. 먼저, “민주주의 없이 혁명 없다”는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정치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경제적 민주주의와 특히 조직생활의 민주주의를 강조하였다. 둘째, 따라서 정치-사회적 다원주의, 선거를 통한 경쟁을 표방했다. 셋째, 무장투쟁 물신주의를 거부했다. 대체로 1980년대 무장투쟁을 전개해온 그룹은 무장투쟁의 역할을 ‘공개영역으로 투쟁의 이전하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재조정하였다. 넷째, 이데올로기적 대립보다는 구체적인 정책과 목표의 형성을 과제로 설정했다. 다섯째, 노동자, 농민을 넘어서 민중 다수를 결합하는 다계급적, 민족적 강령을 구성해야한가고 주장했다. 여섯째, 전위주의와 수직주의의 종식을 표방했다, 즉 혁명조직의 역할은 다양한 부문들과 세력들의 활동이 접합되도록 지원하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브라질 노동자당은 노동조합을 포함한 모든 사회운동의 자율성이 침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을 채택했고, 엘살바도르 파라분도 마트리 민족해방전선은 “새로운 다원주의적 상황에서,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운동들에 의해 공유되는 광범위한 지도 부위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며, 이는 일종의 집합 전위 또는 공동 전위(collective or shared vanguard)를 의미한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러한 포럼의 노선은 1990년대 초반 선거에서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보였고, 브라질, 우루과이, 엘살바도르는 그 주역으로 여겨졌다. 우루과이의 확대전선은 1990년 몬테비데오의 시장직을 획득했고, 1989년 파라과이는 "만인을 위한 아순시온" 연합이 수도의 시정부를 장악했다. 1990년 아이티에서는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직에 당선되었다. 특히 브라질의 노동자당의 성공 사례가 돋보였다. 이처럼 낙관적인 분위기에서 1993-96년 사이 각 나라의 주요 선거 일정이 다가오면서, 포럼의 활동은 대안 강령 특히 경제부문 강령을 마련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논의가 처음 제안될 당시의 대안강령의 대략적 윤곽을 보면, ‘혼합경제’와 ‘라틴아메리카 경제통합’이었다. 즉 생산수단의 국유화 대신에 소유와 부의 민주화를 추구하자는 것이었는데, 국유, 사유, 혼합소유, 협동조합 소유 등 연합적 생산형태와 생산자들의 연대를 실현하고, 국가는 투자, 축적, 분배의 조절을 돕고 농업개혁을 포함하여 구조개혁을 단행하고, 중소기업의 장려를 통해 국내시장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 나라에서 이러한 강령이 성공을 거두는 게 라틴 아메리카의 협력과 통합을 촉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진행될수록 상파울루 포럼은 점차 두 개의 주요 경향으로 나누어졌다. 한편으로는 ‘현실주의적’ 활동을 주장하면서 세계화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을 개혁의 수준에 제한하는 경향(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수용, 세계은행과의 지원 협상)과 제도정치에 대한 참여를 확대하면서도 사회주의적 지향과 계급적 자주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포럼은 합의에 기반 하여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게 점점 어려워졌고, 거대 정당들로 구성된 작업반에서 다듬어진 문건들은 매우 추상적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국부에 대한 사회화와 통제, 외국인 투자, 거시경제 안정성, 각국 통화 및 경제 균형의 강화와 같은 문제에 관한 정책에 관한 합의를 이룰 수 없었다.
따라서 포럼의 활기는 감소하고, 공동의 "대안강령"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으로의 수렴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미 정당들의 신자유주의로의 수렴은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강령의 형성이 실패한 궁극적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대중운동으로부터 독자화(분리)된 ‘정치계급’의 운동이 실패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정치정당과 대중적 토대의 부적응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정치계급’은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권력의 보전과 사회경제적 ‘현상유지’를 위한 실용적 방편을 찾는 방향으로 쉽게 경도된다. 그들은 자신이 ‘혁명적’인 정당이며 따라서 안전판이 될 수 있다고 부당하게 전제하면서, 국제금융기구와 초민족 자본에게 권력을 대폭 이양하는 것을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해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또한 대안강령의 실패는 사회변혁에 관한 경험주의적 접근, 즉 사회모델의 이론적 구성과 적용이라는 기존의 접근 방식을 되풀이한 결과일 수 있다. 정당의 엘리트들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모델은 ‘사회운동의 자율적 요구와 상호조정’을 참조하기보다는, 선거승리를 위한 캠페인 기술과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정치계급의 독자화와 사회변화에 관한 경험주의적 접근은 동전의 양면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이 강화될수록 정치정당과 사회운동의 결합은 더욱 곤란해졌다. 정당의 정치적 활동은 감소하고 제도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당 활동가들의 활동도 선거일로 좁혀져서, 선거홍보를 위한 여러 사소한 행동으로 축소된다. 정당이 선거에 관해 부르주아와 똑같은 기술을 사용하고(심지어 ‘개인숭배’를 자극), 당의 재정과 활동이 정부기구, 의회, 지방정부, 선거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간부에게 의존하면서 활동가들의 역할이 모호해진다. 둘째, 정치정당은 새로운 사회 주체의 잠재력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폐쇄적인 이념적 틀을 고수하고, 사회운동에 대해 권위주의적 스타일로 접근한다. 그러나 사회운동들은 ‘지도를 받는 것’을 어색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화제에 민감하다. 사회운동들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민주적 참여가 보장되어야하며, 또한 한정된 다수가 소수에게 의지를 관철시키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회운동이 요구하는 방식은 대개 좌파운동 조직과 당들을 괴롭혀온 비참한 내부적 분열을 막고 중대한 오류를 피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 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적 차원의 구조적 조건이 어느 곳에서도 항상 작용하기 때문이다. 상파울루 포럼을 구성했던 정당, 전선체들이 생각했던 운동의 노선은 각 민족국가들의 발전과 주권의 재건, 그것의 합으로서 라틴아메리카의 변화였다. 그러나 이미 상파울루 포럼이 창설된 시점은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와 함께, 세계자본주의 체계로부터 민족적 ‘이탈’(분리) 전략은 그 전망이 극히 불투명해진 때였다.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운동에 대한 선차적 폭력(예컨대 미국의 ‘저강도전쟁’의 압력)은 항상 실존을 위협하는 요인이었고,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상파울루 포럼은 정치적, 사회적 운동의 내적이며 외적인 요인을 동시에 전진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현상유지와 방어를 위해 10 여 년 간의 시간을 단지 ‘인내’한 것이었다.
3. ‘반세계화운동’(대안세계화운동)과 세계사회포럼
1990년대 세계화의 제도적 실행은 ‘워싱턴 컨센서스’와 IMF와 세계은행, WTO와 같은 국제 금융, 무역기구의 강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1980년대 이후 세계 각 지역에서 외채․금융위기가 발생했지만, 이는 더욱 정교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프로그램을 낳았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고, 금융위기는 세계 각 지역으로 감염되거나, 재발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의 성장기(곧 민족국가간 체계의 성립기)와는 극히 이질적인 현상이었다. IMF/세계은행이 주도하는 ‘외채위기 관리’(즉 경제구조조정)와 WTO와 자유무역지대의 출범이 재촉한 ‘무역, 투자의 자유화’는 세계의 운동들이 직면한 중대한 이슈의 출현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주변부 지역은 ‘투자자유화’와 ‘자본도피’라는 양날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초민족 기업은 활동 범위가 확대되면서 ‘지식에 대한 소유권’, ‘생명, 자원에 대한 소유권’을 배타적으로 확대, 보장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는 주변부 인민의 빈곤과 무권리 상태와 날카롭게 대비되었다. 또한 구조조정의 효과가 여성에게 집중되고(빈곤) 이에 수반하는 성의 상품화(성매매)는 확산되었다. 시민권의 제한, 노동권의 축소, (교육․의료와 같은) ‘공공서비스의 사유화’는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물론 이러한 현실은 중심부와 주변부의 사회운동이 양자가 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세계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화에 대한 양자의 입장이 처음으로 표출된 계기는 1999년 WTO 3차 각료회의가 열린 시애틀에서 벌어진 투쟁에서였다. 시애틀 투쟁은 실제로 회의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 이후 그와 유사하게 신자유주의 의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제금융기관의 회의나 선진국 정상회의 등 정부간 회의에 대응하기 위한 일련의 시위들이 계속 벌어졌다. 바로 이 시위에 ‘반세계화’ 운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시애틀에서 투쟁이 막 벌어질 때만 하더라도, WTO에 반대한다는 측면에서 운동들이 서로 비슷해 보일 수 있었지만, 그 이유는 각자 틀렸다. 주변부 국가는 ‘미국화’(Americanization)로부터 자기 민족에게 고유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담론이었다면, 미국에서는 (특히 노동운동은) ‘보호주의’(protectionist)의 목소리가 매우 컸다. 단적으로 "멕시코나 중국이 일자리를 훔쳐가고, 환경기준을 하락시킨다“는 것이었다. 또한 시애틀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미국노총(AFL-CIO)에게는 중국의 WTO 가입 반대가 중대한 동기였다. 미국노총이 내세운 주장은 중국이 WTO에 가입하게 되면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제공을 통해 중국의 엘리트들이 대중을 억압하게 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중국의 WTO 가입을 반대하는(곧 배제하려는) 담론은 사실상 국수주의-보호무역주의(그리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인식의 차이가 유지된다면, 공동의 운동은 사실 불가능한 것이다.
시애틀투쟁 이후 벌어진 일련의 ‘반세계화’ 시위와 회의들은, 그 과정에서 제기된 이슈와 대안들을 토론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세계사회포럼을 낳았다. 하지만 세계사회포럼은 참여자들의 구성, 조직화 방식과 형태, 주요 이슈라는 모든 측면에서 그 이전의 유사한 국제적 조직들과는 다른 특징을 포함하였다. 구성을 보면, 그 이전시기에 출현했던 모든 유형의 운동들이 참여했고, 지방-지역-민족-초민족적 형태로 조직된 집단들도 포함되었다. 형태상 특이한 점은 총괄적인 상부구조를 만들지 않고, 활동을 전개해 나가려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남과 북의 운동이 사회포럼을 통해 결합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이다.
반세계화 시위에 참여한 운동들과 그들이 제시한 이슈의 다양성만큼 포럼이 다루는 주제는 광범위하였다. 첫 번째 세계사회포럼(2001년)을 준비하였던 조직위원회가 제시한 주제는 ①부의 생산과 사회의 재생산, ②부에 대한 접근과 지속성, ③시민사회와 공적 영역, ④새로운 사회의 정치권력 윤리 등이었다. 하지만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화제는 무엇보다도 WTO, 외채지불, 금융통제와 같이 반세계화운동과 함께 제기된 문제와 ‘토지개혁’, ‘FTAA 가입’ 등 남미의 현안 이슈였다. 세계사회포럼에서 주요한 화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포럼을 주도했던 일부 단체들을 중심으로 작성되었던 <호소문>을 살펴보는 게 유용하다.
▪ 세계사회운동국제총회(네트워크)의 호소문
첫 번째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한 수많은 단체들 중 MST, CUT, CGIL, ATTAC, 세계여성행진, 포커스 온 글로벌 사우스(Focus on Global South), 쥬빌리2000 등 7개 단체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관한 주요 쟁점들에 대한 기본 입장과 활동 목록을 마련하고자 <동원을 위한 호소문>(Call for Mobilization)을 작성하고, 그 초안을 검토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조직했다. 7개 단체 외에 세계 여러 단체들이 모인 총회는 두 번째 사회포럼에서도 2차 호소문을 발표했고, 2003년에는 3차 호소문과 함께 ‘세계사회운동네크워크’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이 발효한 호소문은 운동의 일반적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포럼 참여자들의 거대한 다양성, 즉 참여자들 사이에 여성과 남성, 청년과 성인, 원주민과 농촌인과 도시인, 노동자와 실업자, 노숙자, 퇴직자, 학생, 이민자, 상이한 신조․피부색, 성적 지향의 차이가 있지만, 이 다양성이 운동의 힘이며 통일성의 토대다. 세계화가 강화하는 여성 차별적 가부장제, 인종차별, 종족학살, 생태파괴와 인민의 건강․생활조건 악화를 반대한다. 외채 ‘탕감’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사회-생태적 착취에 대한 배상이 이루어져야 하며, 금융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금융거래세를 도입하고, 조세피난처를 폐지해야한다. 자원과 공공재의 사유화, 노동기본권의 박탈, 자유무역과 FTAA 의한 농민-노동자-지방기업의 주변화를 반대하고, 민주적 토지개혁의 이루어져야 하며, 생명에 대한 특허권이 폐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군비경쟁과 무기거래, 국내문제에 관한 외국의 군사개입을 반대한다 등등.
사회운동 총회의 호소문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조건 속에서 사회운동들이 ‘모든 인민들의 권리’(즉 인권이자 시민권)에 대한 요구들의 목록을 재 작성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가 ①상호배제적인 권리가 아니라 상호증식적/상호확장적 권리며, ②따라서 “보편화”(확장)될 수 있으며, ③인민들의 자율적인 운동을 통해 쟁취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사회운동의 (자율적이며, 보편적이며, 상호증식적인) 접합을 모색하는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구조나 제도의 변혁은 여전히 남는 문제이며, 그러한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제안과 토론은 자연스럽게 요청될 수밖에 없다.
▪ 경제적 제도적 변화를 위한 제안들
따라서 2002년 사회포럼에서는 여러 단체들이 경제․제도적 변화를 위한 그 이전보다 구체화된 제안들을 제출하였다. 반세계화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여러 방식으로 표현된 주요한 견해들을 살펴보자.
1) 국제금융․무역기구의 전화: 적극적이거나 수동적인 방법들을 통해 WTO나 IMF/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를 a) 해체하거나 b) 중립화하거나(예를 들어 IMF를 자본 유입과 환율변화를 모니터링 하는 단순한 연구기관으로 전환), c)그들의 권력을 근본적으로 축소하고 국제기구나 합의, 지역적 그룹들이 감독하는 다른 행위자들의 결합으로 전환하자는 제안. 그 대안으로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국제노동기구(ILO), 경제블록(메르코수르, SADCC, ASEAN 등)을 강화하고, 새로운 세계적-지역적 기구들을 창설할 것을 주장한다.
2) 금융거래과세: 민족적 정책수단, 국제적 회계 수단을 통해 민족국가로의 자본유입에 관한 통제를 회복하고 증진하자는 제안. 금융거래 기간에 반비례하는 과세율 부과하여 투기를 억제하며, 해외직접투자에 다양하게 과세하며, 초민족적 기업의 이윤에 과세하고, 모든 금융시장에 특정한 통제를 강화하고, “세금피난처”를 제거하고, 은행해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금융위기에 책임이 있는 사적인 행위자가 그 결과를 책임지게 하며, 국제금융기관(IMF와 세계은행)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것을 주장한다.
3) 제3세계 외채탕감: 이는 제3세계 국가의 경제 구조의 형성을 위해 불가결한 요소라는 제안.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중단하고, 부분적으로 자기충족적인 탄탄한 내부적 경제적 기초의 구축하고(이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된 지역의 창설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는 내생적 발전모델을 낳으며, 내부시장을 강화하고, 지역금융을 위한 지역의 저축기금을 창설할 수 있으며, 부를 재분배하기 위한 조세를 비롯한 장치를 마련할 수 있으며, 소농을 위한 토지개혁과 주택을 위한 도시개혁을 도입할 수 있다), 이에 기반한 무역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4) 농업개혁의 전환: 토지에 관한 권리는 누가 ‘소유’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누가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제안. 집단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 사이의 관계를 수정하고, 사회적인 토지관리 메커니즘을 개발할 것, 빈농/소농의 조직이 생산을 조정할 수 있는 지역적 능력을 발전시킬 것, 핵심 작물에 대한 관세보호를 실시할 것을 주장한다.
5) 물의 상품화와 사유화에 대한 반대 (댐에 대한 반대)
6) 초민족기업에 대한 감시: <기업책임성에 관한 기본협정> 창설을 통해 초민족 기업에 관한 통제를 제안한다. 대안적이며, 소규모-지방적 기업의 연합을 통한 상품과 서비스 제공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할 것을 주장한다.
물론 세계사회포럼에서의 이러한 제안들은 아직 추상적인 구호와 아이디어를 다소 구체화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안들은 그것을 ‘어떻게’ 즉 어떤 방식으로 실현해나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남기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사회포럼에 관한 복합적인 논점을 낳고 있다.
4. 대안세계화운동의 쟁점
▪ 혁명이냐 개량이냐?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이, ‘반세계화’(대안세계화)를 위한 요구들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그 방식의 문제를 두고 세계사회포럼의 참가 그룹들이 ‘개량주의’와 ‘급진주의’가 양극화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평가가 한편에서 제기되고 있다. 즉 포럼의 한 축인 개량주의자들은 ‘세계화의 인간화’라는 약속을 보증 받기 위해 세계은행이나 다른 국제금융기관에 대한 로비나 협상에 주력하고 있고, 다른 한 축인 급진주의자들은 ‘개량’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국주의나 그 ‘보호국’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입장을 지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먼저 경제․제도적 변화를 위한 제안들 자체를 기존의 “개량주의”라는 잣대로 판별할 수 있느냐는 점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제안들이 개량주의라고 비판하려면, 역으로 무엇이 혁명적인가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제안들의 특징은 ‘민족적 이탈’ 전략과도 분명히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다. 오히려 제안들은 세계적 수준의 전략과 지방적 전략, 그리고 지역적 전략의 요소들을 포괄하여 세계자본주의 체계의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의 사회 변혁의 계기들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사회주의 국가, 당들의 전략―민족적 이탈, 사회모델의 적용, 정당과 정치혁명 등 혁명에 관한 통념을 형성했던―과 차별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한 요구를 그 기준으로 “개량주의인가 아닌가”라는 기준으로 쉽게 나눌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개량주의’라는 비판에서 제대로 읽어야 할 대목은 있는데, 그 요구를 펼치는 운동이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 가라는 질문에 관한 것이다. 즉 그러한 운동이 국제적․국가별 코포라티즘적인 운동 노선에 의존하고 있는 가라는 문제다. 대중운동은 종종 자기 방어적인 운동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개량주의/혁명주의라는 잣대로 일반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 운동이 ‘자기중심적 실리주의’에 집착하는가 또는 보편적 인민의 사회적 요구에 입각한 것인가 따라서 “계급 형성적인 운동인가”라는 평가는 항상 가능한데, 이는 코포라티즘의 문제인 것이다.
▪ 정당(정파성)인가 사회운동인가?
또 한편으로는 세계사회포럼을 NGO가 주도하면서 포럼이 배제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들은 “시민사회”를 강조하며, 세계사회포럼에 정당과 정부의 참여를 거부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활동을 ‘시민사회’의 영역으로 국한하면서, 국가에 대해서는 고작 자유주의 틀 내의 비판에 머물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NGO들은 국가, 정부, 의회, 정당에 대해서는 ‘거부’의 태도를 보이면서도, 세계은행이나 초민족 기업과는 협력관계를 맺거나 경제지원을 전달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주로 수행함으로써 사실은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의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는 비판이 줄곧 제기되고 있다.
물론 이처럼 NGO 운동이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유지하기 위한 위기관리체계의 일원으로 기능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비판이 가능한 문제이다. 그러나 사회운동이 정당에 대해 자율성을 형성하는 문제는 별도의 문제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오늘날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이 ‘정당의 분열’을 반영하여 대립하는 상황이 오히려 운동의 공동의 지반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좌초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선거정치를 매개로 하는 정당들의 대립은 분명한 노선의 차이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종종 이데올로기적 선전의 수사나 이미지에 기댄 것이며, 또한 선거에서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대중운동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분할’하려는 경향을 낳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은 사회운동의 주도성을 강화하면서, 운동의 전진을 위한 공동의 지반을 창설하는 게 적합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 새로운 국제주의인가?
근대 이후 역사적 운동들에서 국제주의는 항상 존재해왔고 운동의 노선에 스며있던 이념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세계시민’의 형성(코스모폴리탄주의)을 예상했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체계는 노동자와 여성의 시민권을 배제하였고, 특히 세계자본주의의 민족적 분할(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은 광대한 시민-이하의 인구를 창조했다. 따라서 국제주의의 이념은 일차적으로는 ‘민족주의’에 관해서 정의되었고(물론 그것의 완전한 ‘거부’인지 완전한 ‘실현’인지는 모호했다), 노동자운동의 국제주의, 쇼비니즘과 인종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을 가리켰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통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참여 문제를 놓고 노동자운동의 비극적 분열이 있었고, 이는 동시에 노동자운동이 민족국가의 체계에 (분할되어) 포섭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냉전과 양대 진영의 형성은 한편에서는 반공주의․코포라티즘적인 국제 노동운동의 포섭(․분할) 체계를, 다른 한편에서는 볼세비즘의 민주집중제(사실상 중앙집중제)를 모방하는 당의 국제주의와 그 위기(중소분쟁)를 낳았다. 또한 제3세계주의는 양대 진영의 경쟁에서 그 틈새를 찾아보려는 민족적 발전을 위한 대안전략으로 출발하였으나, 양대 진영의 압력 속에서 전망을 소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이후 국제주의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운동들의 출현은 오랜 기간 지체되어 있었던 셈이다.
하기에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라는 동시대적인 조건에서, 대안세계화 운동의 출현은 국제주의의 부활, 또는 그 이념과 운동을 다시 정의하는 계기가 될 것인가가 토론의 쟁점이다. 먼저 세계사회포럼은 사회운동들의 고유성 또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운동들의 윤리(문화)라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국가(․당)의 국제주의가 아니라 자율적인 사회운동들의 수평적 교통으로서의 국제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20세기의 여러 국제주의의 ‘변용’들과의 차별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국제주의 지향이 공동의 투쟁 속에서 우애를 고양하고, 공통의 이념을 발견하려는 과정 속에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국제주의의 형성 과정은 곧 인민들의 사회운동들의 공통의 이념과 윤리 양자 모두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대안세계화운동과 포럼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쟁점 외에도 수많은 토론의 과제가 있다. 세계사회포럼의 구조와 형식, 주제를 어떻게 개선하여 사회운동의 이념과 활동계획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증진할 것인가의 문제는 최우선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포럼의 프로세스에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인가도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국제주의에 대한 일반적 지향 속에서도, 지역(예를 들어 아랍, 남미, 남아프리타, 동아시아, 유럽과 같이) 차원에서 그 지역의 고유한 사회적․문화적 문제들과 결부된 사회운동의 지향과 가치, 공동의 운동 노선을 형성하는데 기여할 것 인가도 구체적으로 접근해야할 중대한 과제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