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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9.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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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인티파다에 비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회

엄한진 |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팔레스타인의 상황에 대해 세계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인식보다는 언론이 주기적으로 환기시키는 폭력성 그 자체, 그리고 단기적인 상황변화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러한 반응은 여러 요인들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팔레스타인 문제 자체에서 그것의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모순해결에 관건이 되는 요소들에는 변화가 없이 주기적으로 반복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적 역량을 갖춘 사회운동과 이념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간 전지구적, 지역적 요인들에 치중해서 다소 소홀히 다루어진 팔레스타인 사회와 이스라엘 사회의 내적 요인, 특히 90년대 이후 두 사회의 변동양상을 통해 인티파다와 샤론 정부의 강경노선의 배경,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의 정체와 폭력의 악순환 현상을 이해해보려 한다.

2차 인티파다의 양상

올해 팔레스타인의 사건일지를 보면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주기적인 양상의 변화가 있었다. 2월 중순에서 3월 중순, 5월, 그리고 8월 중순 이후의 시기에는 주로 이라크의 상황과 연관되어 양측의 대결이 격렬했고 이라크침공이 전개되고 있던 4월이나 샤론이 유보적인 방식으로나마 평화이정표를 수용하고 이행의 의지를 보인 6월에는 그나마 상황이 호전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사건의 전개를 보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져 버린 일련의 시나리오를 재확인할 수 있다.
중동평화 이정표(로드맵)가 마련된 2002년 12월에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두 주요 세력, 즉 이슬람주의 단체인 하마스, 그리고 아라파트가 속했던 민족주의 단체인 파타에 의한 유대인 정착촌 공격이 있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서 이스라엘군의 공격, 자치지구에 대한 봉쇄조치, 테러혐의자 체포와 암살, 이 과정에서의 가옥파괴가 있었다. 4월 24일과 29일의 테러는 팔레스타인 정부의 구성 직후, 그리고 아바스의 총리임명 직후에 일어났다. 6월 29일에는 하마스, 지하드, 파타 모두 휴전을 선언하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북쪽의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살라와 에딘을 잇는 도로의 소통을 재개하였고 곧이어 자치정부가 자치지구의 통제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7,8월은 양측 모두의 휴전 위반으로 사태가 악화되었다. 급기야 8월 19일에 있은 서예루살렘 자살폭탄테러에 대해 이스라엘이 자치지구 봉쇄를 강화하고 서안지구의 나플루즈, 제닌, 툴카렘 공습, 하마스 지도자 살해와 조직원 체포, 가옥파괴 등의 방식으로 대응하고 아바스 총리조차 하마스, 지하드와의 접촉을 단절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에 하마스는 자살폭탄테러로 대응하였다.

이 전형적인 사례들에서 우리는 약속 불이행과 그 근저에 깔려있는 상대에 대한 강한 불신, 그리고 폭력의 악순환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분노를 야기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살폭탄테러 등 극단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게끔 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부당한 대응을 세계적으로 정당화하는 효과를 낳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기구나 조약의 권고사항에 대한 팔레스타인측의 위반이나 미실행을 근거로 평화협상의 재개를 거부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또한 공습 등 군사행동으로 수시로 하마스에 가까운 주민들을 자극하는 것은 이렇게 자극받은 상태에 있는 주민들이 테러를 예방하려는 팔레스타인 경찰의 노력을 수용할 수 없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평화협상 진전의 조건이 형성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불신은 또한 자치정부와 팔레스타인 민중, 그리고 하마스간에도 존재하여 자치정부의 비폭력에 대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폭력적 상황이 전개되곤 하였다.

1, 2차 인티파다의 비교

2000년 가을에 시작된 인티파다는 위의 전개양상에서 알 수 있듯이 표면상으로는 1980년대 말에 시작된 인티파다(1987-1993)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1차 인티파다에 비해 폭력성이 심해진 점이다. 2차 인티파다는 지금까지 3년간 3천여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었다. 이것은 1차 인티파다(1987-1993)의 첫 3년간 희생자의 두배에 해당된다. 또 다른 차이는 이제 저항운동 세력, 특히 하마스에 대한 전략이 치고 빠지는 일회적 타격에서 인적, 물적 기반을 체계적으로 타격하는 보다 장기적인 작전들로 전환한 점이다.

먼저 촉발된 계기를 보면, 1차의 경우에는 이스라엘군 지프차에 의한 교통사고 사망(4명 사망)을 의도적인 것이라고 간주한 팔레스타인인들이 자발라의 한 검문소를 타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2차의 경우에도 이스라엘의 자극적인 행동이 계기가 되었는데 샤론의 알 아크사 사원 광장 방문에 대한 분노의 표시에 이스라엘군이 탄압으로 대응하면서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시대적 배경을 보면, 1차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의 변화와 팔레스타인문제에 대한 세계의 무관심이 그 배경에 있었다. 이 사건은 그 이전까지 이스라엘 점령지 외부, 즉 인접 아랍국가들에 근거지를 두고 전개되어 온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이 점령지 내부에서도, 그리고 대중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는 역으로 아랍국가들이 미․유럽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호전으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을 줄여 팔레스타인 외부에 근거지를 두고 전개된 이스라엘 압박전략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말해준다. 또한 1차 인티파다는 당시 동구의 변화, 그리고 이란,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등 냉전과 연관된 소련 인접국들에 관심을 빼앗기고, 유가폭락 및 새 유전 발견 등으로 상대적으로 중동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었고, 70년대 중반이래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한 주변 아랍국들의 명시적, 암묵적 인정, 그리고 그에 따른 이스라엘의 정치․군사적 안정 등의 요인들로 인해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실질적 해결에 무관심했던 당시 세계에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상징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2차 인티파다는 무엇보다도 그간의 평화협상에 대한 환멸의 표시였고, 평화협상의 산물로 등장한 자치정부체제의 부패와 무능력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러한 불신은 인티파다에 대한 자치정부의 애매한 태도로 인해 더욱 확고해졌다. 자치정부는 초기에는 탄압이 가져올 대중의 이반이 두려워 적극적 대응을 자제했으나 이후 이스라엘과 국제적 압력으로 강경한 태도로 선회하게 된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해 대다수 팔레스타인인들은 더욱 실망하게 되고 아라파트를 더 이상 자신들의 대변자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즉 2차 인티파다 이후 팔 자치정부의 제한된 행동반경이 명백히 드러남에 따라 자치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게 된 것이다. 협상을 통한 팔레스타인 문제해결에 대한 기대가 약화되고 자치정부의 정당성과 지도력이 약해지면서 결국 폭력만이 유효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강화된 것이다.

주체의 구성에서 2차 인티파다는 1차 인티파다 당시의 지도자들과 청년들, 이 두 세대가 섞여 있다. 그리고 2차는 1차에 비해 전반적으로 시위참여자가 감소한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 즉 빈민층 청년들이 주로 참여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렇게 이전보다 계급적 성격이 두드러진 것은 자치가 시행된 이후 심화된 불평등, 자치지역 경제의 와해와 이로 인한 사회해체의 가속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저항과 탄압의 양상에서 2차 인티파다는 새로운 면을 보이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1994년 자치정부체제가 형성되면서 창출된 새로운 구조적 조건에 기인한다. 즉 1차 때는 이스라엘의 지배에 반대하는, 이 지배를 대상으로 한 전사회적 투쟁(공공기관, 기업가 타격, 불매운동)이 가능했는데, 이제 이스라엘이 물러간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대상으로 하는 직접공격이 어려워지고, 더욱이 인티파다 이후 이스라엘군의 재진입으로 점령지 내부와 외부가 분리되면서 대중적인 투쟁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양측의 대결이 군사적 양상을 더 강하게 띠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또한 자치정부의 구성이 의미하는 폭력의 제도화와 독점의 상황에 따른 것이기도 한다. 즉 자치정부에 의한 폭력의 독점으로 이제 저항운동은 자생적이고 국지적인, 즉 미조직된 저항, 그리고 이 저항의 군사화라는 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아래에서는 이상에서 살펴본 2차 인티파다의 태동과 양상을 설명해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회의 내적 요인들을 살펴보겠다.

평화협상과 자치정부 수립이라는 정치적 계기와 저항운동의 변화

자치정부체제는 1차 인티파다에 가담했던 두 주요 세력인 파타와 하마스가 상이한 정치적 선택을 하게끔 하였다. 파타의 대다수는 자치정부를 지지하고 경찰로 고용되는 등 제도권에 편입함으로써 저항운동을 마감하게 된다. 제도권에 편입되고 예전에는 누리지 못하던 혜택을 입게된 이들에게 이제 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아닌 상황의 안정화였다. 이렇게 존재와 의식의 전환을 겪게 된 파타는 자치정부에서 배제되어 불만이 고조된 하마스와 심한 갈등관계에 놓이게 된다.
현재 진행되는 평화협상 과정과 자치체제를 비판하는 하마스 조직원들은 특히 1996년 초부터 자치정부와 이스라엘군의 적극적인, 즉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탄압에 시달려 왔다. 이들이 겪게된 또 다른 어려움은 평화협상 이후 예전과 달리 전사는 테러리스트로 여겨지고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주창하는 자들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이 혼란은 조직 내부의 분열과 조직역량의 전반적 약화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대중의 요구를 반영하고 상황변화에 적절히 대처하는데 있어서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저항운동의 혼돈 상황은 파타의 경우에도 없지 않아 2002년 초부터 이스라엘군의 탄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파타의 하부가 상부로부터 자율화, 급진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제도권내에서의 요구투쟁과 군사화, 그리고 팔레스타인 경찰이 통제와 관용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자생적 폭동이 증가하고 자살폭탄테러가 하마스나 지하드의 지도부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과 같은 현상들은 바로 평화협상과 자치정부의 수립 이후 팔레스타인 정치의 두 주요 세력이 겪고 있는 급격한 변동에 크게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티파다는 자치정부 수립 이후 표면화된 팔레스타인 사회의 내부모순 또는 분화를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였다. 즉 한편으로는 신․구세대 운동가들간의 갈등, 파타로 대변되는 민족주의자와 하마스 등의 이슬람주의자들간의 갈등,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분화와 불평등의 심화를 드러내주었다.

사회운동의 저발전과 인티파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은 많은 소수민족의 저항운동에서처럼 가두투쟁이나 테러의 양상을 띤다. 이것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자치정부체제의 효과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보다 근본적원인에 기인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자치지구의 경제적 기반의 부재이다. 평화협상과정에서 기대된 경제원조가 지지부진하고 준내전 상황으로 경제활동은 마비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의 고용문제에 무관심한 상황에서 최근 부쩍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었다. 바로 이 경제적 토대의 부재가 조직적인 계급운동의 미약한 발전을 설명해준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군의 강한 탄압이 정치사회운동의 저발전을 심화시켰다. 통행금지 등 수십년간 반복되어온 이스라엘의 통제 조치들과 혹독한 탄압은 민중의 실천가능성을 제약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팔레스타인내에서의 운동진영의 단결, 그리고 정당하고 효과적인 운동방식의 개발은 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팔레스타인 사회운동의 저발전, 그리고 폭동과 테러의 (사회운동)문화는 이스라엘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그 연원을 두고 그 이후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른 역사적 산물이지, 이슬람 또는 이슬람사회에 고유한 어떤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변동과 샤론의 강경노선

팔레스타인에 대한 샤론의 강경노선의 배경에는 미국과 유럽의 대중동관계와 이 지역 국가들간의 역학관계 등 지역적 요인이 중요하다. 이라크전쟁과 팔레스타인의 사건전개가 보여주는 연관성이 이를 잘 입증해준다. 그러나 이하에서는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지만 다소 간과된 이스라엘 사회 내적 요인을 통해 샤론 정권의 팔레스타인정책을 설명해본다.

팔레스타인분쟁이 격화되는 것을 볼 때면 우리는 이라크전쟁의 부시처럼 샤론이라는 인물에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실제로 그는 알 아크사 사원 광장의 방문으로 2차 인티파다 유발하였고, 자살폭탄테러를 이용하여 오슬로조약을 파기하고, 급기야는 자치정부를 공격하고 자치지구를 재점령하였다. 또한 그는 2001년 9.11테러에 대해 언급하면서 “누구에게나 각자의 빈 라덴이 있고 우리에게 그것은 아라파트다”라며 부시의 반테러 전쟁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연관시키려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국민의 의식분열적 성격을 이용하여 이라크전쟁을 걸프전의 충격을 되살리는 식으로, 즉 이스라엘 국민의 공포를 자극하는 식으로 이용하였다. 이와 같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서 샤론과 그의 동료들의 비중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래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요인, 즉 이스라엘의 사회변동의 양상, 즉 사회경제적 변화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통해 샤론 정부의 팔레스타인정책과 2000년 이후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의 사회경제적 위기와 극우파의 부상

현재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구조적인 위기에 처해있다. 그 배경에는 심각한 경제위기, 러시아 유대인의 대량이민 등에 따른 종족적 이질성 증대,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 시온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약화에 따른 정체성 위기 등의 급격한 사회변동이 존재한다.
먼저 2차 인티파다 이후의 사태전개는 이스라엘 자체의 경제와 사회의 위기와 연관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현재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건국이래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 외국자본의 유입 감소, 아랍시장의 상실, 관광산업 붕괴, 군과 정착촌 경비에 크게 기인하는 재정적자, 11%를 넘는 실업률,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고조를 겪고 있다.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150만명이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고 있고 부패와 투기로 극소수의 부는 증대하는 등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물론 다른 곳에서처럼 경제위기의 폐해는 소수집단,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아랍지역 출신 유대인,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아랍인, 최근의 동구이민에게 집중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회경제적 위기가 부분적으로 인티파다 이후의 정세에 기인한 바도 있지만 이 위기는 훨씬 전부터 진행되어 온 것으로, 샤론의 강경책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요인이다. 여기서 우리는 쉽게 경제위기와 극우파의 부상을 떠올릴 수 있다. 세계화로 상징되는 1980년대 이후의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의 피해자들을 토양으로 번성한 극우 정치세력과 극단적인 종교세력을 낳았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1996년 네타냐후의 승리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입장이나 경제노선이 아니라 배제된 집단의 연합, 이들의 동원을 통해, 이들의 박해와 박탈감을 정치화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우파와 종교세력이 의회의 2/3를 차지한 것도 평화가 아닌 전쟁, 공존이 아닌 분리라는 이들의 정치노선 그 자체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지지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최근의 선거참여 실태를 보면 이스라엘인의 절반은 민주적 정치제도에 무관심하다. 결국 원초적 요소를 토대로 하는 근본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안전(security)이데올로기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 위기와 시온주의의 급진화
1960년대 말까지 이스라엘은 시온주의적인 국민적 정체성이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시민종교, 노동운동을 토대로 하는 노동당 중심의 국가주의였다. 그러다가 70년대가 되면 이스라엘-아랍분쟁의 격화에 힘입어, 그리고 이 시기부터 본격화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의 편입을 배경으로 신시온주의가 부상한다. 신시온주의는 근대적인 국민적 정체성, 시민성보다 선민사상이 강한 민족적 정체성을 주창한다. 이 이데올로기와 이를 주창하는 정치세력은 특히 당시부터 본격화된 정착촌 확대, 아시아, 아프리카 이민의 급증 등 종족간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이를 이용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즉 점령지에서의 유대인의 존재를 정당화, 확대하면서 성장하였다. 이 흐름의 부상에 이어 80년대에는 집단보다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고, 시민성을 강조하고 이스라엘의 예외성을 비판하며 다원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포스트시온주의가 대두된다. 이 흐름은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 요소가 강했던 기존의 시온주의에서 부차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위의 근대적 가치와 제도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 흐름은 이-팔 분쟁이 다소 소강상태였던 80년대에 세속적 지식인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90년대 이후 지금까지는 러시아 유대인들의 대량이주와 경제위기 등이 낳은 정체성과 사회통합의 위기 속에서 위의 두 흐름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2차 인티파다, 평화이정표와 팔레스타인 문제

그러면 2차 인티파다와 이를 둘러싼 최근의 사건 전개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아래에서는 이 문제를 중동평화 이정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2002년 12월 말, 미국, 러시아, 유럽연합, 유엔이 공동으로 채택한 평화이정표는 2003년 잠정적인 국경을 가진 팔 국가 창설, 2005년 최종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폭력적 상황을 종식시킴으로써만이 실현가능한데 이를 위해 팔레스타인 당국은 정치개혁을 지속하고, 이스라엘은 2000년 9월 28일 이후 점령지로부터 군대를 철수하며 정착촌 건설을 중지한다는 것이 이정표의 핵심적 내용이다.

이정표와 샤론 정부의 저항
지금까지의 이행 상황을 보면 팔레스타인 측은 마흐무드 아바스의 수상 임명 등 개혁을 이행하고 있으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제도와 일상생활에 대한 파괴를 지속하고 있다. 2003년 5월 25일 샤론은 뒤늦게나마 이정표를 수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팔레스타인 측과 달리 14개 유보조항을 단 수용이었다. 이 유보조항을 빌미로 샤론 정부는 오히려 이정표 실현을 저지하려 하였다. 먼저 이정표 실현의 전제로 제시된 팔레스타인의 정치개혁에 대해서 샤론은 2003년 1월 20일로 예정되었던 의회선거, 대통령선거를 여러 방식의 방해를 통해 치르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주민이 원하는 자치정부의 민주화를 샤론이 저지한 것은 선거와 정치개혁이 결과적으로 아라파트의 지위를 회복시켜 분열상황에 처해있는 팔레스타인 정치세력의 힘을 강화시킬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관건인 유대인 정착촌 철수문제 역시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정착촌이 팔레스타인인들 속에 위치하면서 한편으로는 평화가 불가능함을 인식시켜 평화와 공존의 꿈을 버리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 땅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효과를 냄으로써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을 포함하는 국가의 창설에 대한 정당성과 가능성을 약화시키려 한다.

“안전벽”, “대량이주전략”: 극단으로 가는 길
샤론 정부는 2차 인티파다 이후 점령한 지역으로부터의 철수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민족간 공존의 전망과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안전벽” 건설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미 전기장벽이 1차 인티파다 기간 중 설치된 바가 있는데 안전벽이 의미하는 것은 안전을 위해 이스라엘 지역을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단절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샤론 정권이 생각하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유대인 정착촌에 포위된, 자력방어 능력이 없는, 자체의 경제기반이 없는 국가, 유대인 자신들이 근대 유럽에서 경험했던 게토, 그보다 훨씬 비인간적인 조건의 국가인 것이다.
최근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지가 확산되고 있는 대량이주 전략에서 우리는 안전벽 설치가 추진하고 있는 종족간 문제의 극단적인 해결, 즉 분리라는 전략이 일부 극단적인 세력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량이주 전략은 아랍국가들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주시키는 전략으로 현재 당국의 수수방관 속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아랍인들이 사라지면 테러는 사라진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나찌를 정점으로 하는 무수한 근대의 대량이주와 학살, 그리고 보다 최근의 것으로는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의 운명을 떠올리게 된다.

비관적인 평화실현
현재 팔레스타인분쟁은 이정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그간 이정표는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정표의 이행이 지지부진한 것은 미국의 대이라크전략 수행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 이정표의 주된 배경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더 멀리로는 70년대 이후 이스라엘-아랍간, 그리고 90년대 이-팔간의 평화협상 과정이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적 해결과 거의 무관하게 진행되어 온 것을 회고하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이정표 실현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은 지금 팔레스타인 당국에게 적용하는 것과 동일한 잣대를 가지고 이스라엘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지 않고 있으며 이정표의 진행상황을 점검할 기준을 마련하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는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면서 이 지역에 대한 경제적 통합에만 몰두하고 있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력해져 있는 바로 이 상황에서 샤론의 강경노선은 아무런 저항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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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국제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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