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잔치, 그들만의 게임, 그러나....
<b>- 선거법 협상과 그 결과를 바라보며-</b>
선거법은 제도정치권의 여러 가지 게임규칙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 게임의 주체가 정치정당과 국민이라는 점에서 다른 게임룰과는 다른, 보다 특별한 지위를 지닌 규칙이다.
A정당을 지지하는 국민도 있고 B정당을, C정당을 지지하는 국민도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이러저러한 정당을 지지하는 국민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국민들이, 스스로를 무당파라고 규정한다. 이들에 대한 속단은 금물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특정정당을 지지하면서도 명분상 내세우기 힘든 이유로 인해 - 그 대표적인 예가 지역정당에 대한 지지일 것이다 - 내놓고 말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사람들까지를 포함하여, 내세울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으면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b>문제는 내세울 수 있는 그 '무엇',</b>
동의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스스로 그 '무엇'이 무엇인지 정식화하지 못한다. 그래서, 투표장에 가서 기권을 하고, 아예 투표장에 가지 않는 것이다. 일상의 삶을 부지런히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일찌기 러시아의 모 혁명가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숨어 있는 불만을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말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너무나 당연한 명제이며, 그런 점에서 그는 탁월한 정치가이다. '정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대한민국에서 가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논외로 한다면, '정치'란 이러저러한 삶의 불만을 '조직'의 이름으로 대표하고, 조직하고, 그 '조직'간에 '조직'의 이름을 걸고,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삶과 명예, 미래를 걸고 투쟁하는 것이다.
<b>지금 대한민국의 국회에서 </b>
정당의 이름을 걸고 싸우고 있는 그들도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이 대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를 뿐이다. 그들이 안이한 자세로 이 싸움에 임하고 있다고 절대로 속단하지 말라. 그들은 국회 밖에서 몰아치는 태풍 속을 꿋꿋히 버텨나가면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자세로 이 싸움에 임하고 있다. 그들의 '정치적 삶과 미래'를 걸고서.
'총선 시민연대'의 요구사항은 상식적으로 너무나도 당연한, 그래서 80%가 넘는 국민이 지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들의 요구가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떻게 이용당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적 요소를 요구하는 이들의 요구가 당당하게 국회에서 거부당했다는 것이다.
'우리 이외에는 아무도 국회에 들어오지 말라'는 이들의 강력한 메세지를 새겨 들어야 한다. 지켜야할 그 무엇이 위태로울수록 반격은 거센 법이다. 이들은 80%이상의 국민적 지지와 '내놓고' 싸워야 할 만큼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전경련이 비공개석상에서 '노동계'의 정치진출을 우려하며 정치활동을 개시하겠다고 협박을 했던 것이나, 제도권 정당들이 전자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색깔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시켜야 했던 과정은 그들의 위기의식이 어느 수위에 다달아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1인 2투표제로 상징되는 선거법개정안은 그 자체로 볼 때 '그들'만의 게임규칙을 바꾸는 것이며, 있을 수 있는(혹은 없을 수도 있는) 부수적 효과로 그들이 인정하는 '우리'가 아닌 세력이 제도권 내로 진입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있을 수 있는(혹은 없을 수도 있는) 최소한의 기회조차도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직시한 것이다.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b>그러나 상황에 대한 낙관 또한 금물이다.</b>
불만은 조직되지 않으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조직되지 않는 불만은 잠복한다. 우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역사에서 이것을 경험했다.
박정희가 이십여년을 권좌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저변에 흐르는 불만이 없어서였겠는가. 박정희 집권시기 동안, 제도권 야당은 몇 번이나 집권에 다가갔다. 80년 신군부 쿠데타 이후 제도권 야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의 지지율을 넘긴 적도 있었다. 그 때, 이들을 지지해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지금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역정당체제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고, 이 땅에 살고 있고 선거에 참여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역투표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선거 때마다 지역투표를 하고 있다고 매도되는 사람들이 과연 불만이 없어서였겠는가? '그들'만의 국회를, 정부를 지지해서였겠는가?
<b>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b>
또 그것이 옳다. 다만 선거 때 자신이 유일하게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표현으로 기표소에 들어가 얄팍한 종이에 한 표를 찍는 행위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면 기권을 하는 것이고, 그래도 기표소에 들어가는 것이 옳다고,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정치교육을 수용하는 사람이면 혹시나 하는 기대로 그 중에 나은 사람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다. 자신의 불만을 조직하는 최선의 대안이 없을 때, 사람들은 누구라도 차선을 택한다. 그리고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거법이라는 게임룰은 중요하다. 이러저러한 자신의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제도화된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고, 또 그 결과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 혹은 다른 사람들이 표출한 전체적인 결과에 의해 다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A정당이 ○%를 얻었다, 몇 석을 얻었다는 것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생각해 보라.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A정당에 표를 던졌는데 A정당의 득표율이 50%를 넘었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나의 표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A정당에 동의를 한다는 제도정치권의, 언론의 최면에 걸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모두 나와 같은 억지춘향 식의 지지를 보냈을 수도 있는 데 말이다. 그렇게 이 땅의 사람들은 몇십년을 보냈다.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b>불만은 누군가 조직하지 않으면 </b>
결코 표출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 의해 강제된 규칙이라 하더라도 그 규칙이 미치는 영향은, 그 규칙이 만들어지는 데 아무런 이해관계도 갖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두 미치게 된다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모 이론가가 일상생활 속에서 '진지전'을 얘기했을 때, 그는 결코 '정치적 사고'를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 한 번의 정치적 기회를 잘 활용하기 위해 '진지전'을 얘기한 것이다.
선거법은 제도정치권의 여러 가지 게임규칙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 게임의 주체가 정치정당과 국민이라는 점에서 다른 게임룰과는 다른, 보다 특별한 지위를 지닌 규칙이다.
A정당을 지지하는 국민도 있고 B정당을, C정당을 지지하는 국민도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이러저러한 정당을 지지하는 국민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국민들이, 스스로를 무당파라고 규정한다. 이들에 대한 속단은 금물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특정정당을 지지하면서도 명분상 내세우기 힘든 이유로 인해 - 그 대표적인 예가 지역정당에 대한 지지일 것이다 - 내놓고 말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사람들까지를 포함하여, 내세울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으면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b>문제는 내세울 수 있는 그 '무엇',</b>
동의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스스로 그 '무엇'이 무엇인지 정식화하지 못한다. 그래서, 투표장에 가서 기권을 하고, 아예 투표장에 가지 않는 것이다. 일상의 삶을 부지런히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일찌기 러시아의 모 혁명가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숨어 있는 불만을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말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너무나 당연한 명제이며, 그런 점에서 그는 탁월한 정치가이다. '정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대한민국에서 가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논외로 한다면, '정치'란 이러저러한 삶의 불만을 '조직'의 이름으로 대표하고, 조직하고, 그 '조직'간에 '조직'의 이름을 걸고,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삶과 명예, 미래를 걸고 투쟁하는 것이다.
<b>지금 대한민국의 국회에서 </b>
정당의 이름을 걸고 싸우고 있는 그들도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이 대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를 뿐이다. 그들이 안이한 자세로 이 싸움에 임하고 있다고 절대로 속단하지 말라. 그들은 국회 밖에서 몰아치는 태풍 속을 꿋꿋히 버텨나가면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자세로 이 싸움에 임하고 있다. 그들의 '정치적 삶과 미래'를 걸고서.
'총선 시민연대'의 요구사항은 상식적으로 너무나도 당연한, 그래서 80%가 넘는 국민이 지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들의 요구가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떻게 이용당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적 요소를 요구하는 이들의 요구가 당당하게 국회에서 거부당했다는 것이다.
'우리 이외에는 아무도 국회에 들어오지 말라'는 이들의 강력한 메세지를 새겨 들어야 한다. 지켜야할 그 무엇이 위태로울수록 반격은 거센 법이다. 이들은 80%이상의 국민적 지지와 '내놓고' 싸워야 할 만큼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전경련이 비공개석상에서 '노동계'의 정치진출을 우려하며 정치활동을 개시하겠다고 협박을 했던 것이나, 제도권 정당들이 전자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색깔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시켜야 했던 과정은 그들의 위기의식이 어느 수위에 다달아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1인 2투표제로 상징되는 선거법개정안은 그 자체로 볼 때 '그들'만의 게임규칙을 바꾸는 것이며, 있을 수 있는(혹은 없을 수도 있는) 부수적 효과로 그들이 인정하는 '우리'가 아닌 세력이 제도권 내로 진입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있을 수 있는(혹은 없을 수도 있는) 최소한의 기회조차도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직시한 것이다.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b>그러나 상황에 대한 낙관 또한 금물이다.</b>
불만은 조직되지 않으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조직되지 않는 불만은 잠복한다. 우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역사에서 이것을 경험했다.
박정희가 이십여년을 권좌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저변에 흐르는 불만이 없어서였겠는가. 박정희 집권시기 동안, 제도권 야당은 몇 번이나 집권에 다가갔다. 80년 신군부 쿠데타 이후 제도권 야당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의 지지율을 넘긴 적도 있었다. 그 때, 이들을 지지해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지금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역정당체제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고, 이 땅에 살고 있고 선거에 참여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역투표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선거 때마다 지역투표를 하고 있다고 매도되는 사람들이 과연 불만이 없어서였겠는가? '그들'만의 국회를, 정부를 지지해서였겠는가?
<b>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b>
또 그것이 옳다. 다만 선거 때 자신이 유일하게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표현으로 기표소에 들어가 얄팍한 종이에 한 표를 찍는 행위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면 기권을 하는 것이고, 그래도 기표소에 들어가는 것이 옳다고,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정치교육을 수용하는 사람이면 혹시나 하는 기대로 그 중에 나은 사람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다. 자신의 불만을 조직하는 최선의 대안이 없을 때, 사람들은 누구라도 차선을 택한다. 그리고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거법이라는 게임룰은 중요하다. 이러저러한 자신의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제도화된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고, 또 그 결과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 혹은 다른 사람들이 표출한 전체적인 결과에 의해 다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A정당이 ○%를 얻었다, 몇 석을 얻었다는 것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생각해 보라.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A정당에 표를 던졌는데 A정당의 득표율이 50%를 넘었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나의 표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A정당에 동의를 한다는 제도정치권의, 언론의 최면에 걸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모두 나와 같은 억지춘향 식의 지지를 보냈을 수도 있는 데 말이다. 그렇게 이 땅의 사람들은 몇십년을 보냈다.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b>불만은 누군가 조직하지 않으면 </b>
결코 표출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 의해 강제된 규칙이라 하더라도 그 규칙이 미치는 영향은, 그 규칙이 만들어지는 데 아무런 이해관계도 갖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두 미치게 된다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모 이론가가 일상생활 속에서 '진지전'을 얘기했을 때, 그는 결코 '정치적 사고'를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 한 번의 정치적 기회를 잘 활용하기 위해 '진지전'을 얘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