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뒤섞임_ 태국의 사회운동
본 글은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민주노총 국제국에서 진행한 아시아의 노동/사회 운동에 대한 조사 프로젝트의 활동 중 일부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4월에 첫 회의를 시작으로 하여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에 대해 사전 조사 작업과 제반 실무 작업을 거친 후 7-8월에 2개의 팀으로 나눠서 조사를 진행했으며, 본인은 태국과 말레이시아 각 국가에서 15개 정도의 노동조합과 단체를 방문, 조사했다. 각 사회운동 진영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념적 스펙트럼과 상관없이, 넓은 의미에서 진보적이라고 불릴만한 단체들을 두루 방문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취지를 현지에서 일정 조율과 추가적 단체 선정을 담당한 조직들에게 전달했으나, 전체 운동 지형을 모두 접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수도권(방콕, 쿠알라 룸푸르)에만 머물러 지방 지역, 혹은 제2, 3의 도시의 운동 상황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도 이번 조사의 한계다. 또한 운동 지형을 본인이 재구성을 한 것이기에 필자의 관점 또한 어느 정도 녹아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사’ 프로젝트라고는 하지만, 이번 사업은 단순한 실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유로 그동안 아시아 ‘지역’ 차원에서 미진했던 연대의 틀을 잡고 이를 활성화하기 위한 장기적인 프로그램의 첫 단추로 사고하는 것에 대해서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만큼, 연대의 대상을 모색하는 것이 주요 목적 중에 하나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출발하기 전의 논의 과정에서, 그리고 현지 조사중에도 연대의 원칙, 앞으로의 연대 활동의 매개와 의제들, 그리고 이러한 연대를 실현시키고 위한 전략들은 고민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단, 말레이시아와 태국에서 만나본 많은 활동가들과 그들의 처한 물질적/역사적 조건과 상황을 보면서 지금까지의 연대와 관련해서 사고했던 폭을 단순한 사회나 지역, 혹은 국가라는 공간적인 범위에서, 시간적인 축까지도 포괄할 수 있도록 확장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97-98년도의 아시아 외환위기로 대표되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공세와 지금도 지역에서 엄청난 고통을 야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저항은 모두에게 현재 진행형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역사적 배경과 축적된 경험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상이한 현실 인식,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예측, 희망은 서로 공통점도 있고 겹치기도 했지만 차이점과 갈등, 그리고 어긋남도 분명히 존재했다. 연대가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 상호소통과 공통의 인식을 요구한다면, 단순히 타 공간에 대한 일차원적인 이해뿐만이 아니라 이질적인 집단 사이의 이러한 ‘역사적 시간’ 관념에 대한 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바로 이 차원에서 아래의 사회운동에 대한 소개도 한국의 입장에서 타국을 바라봤을 때 발생하는 시공간 차원에서의 겹침과 엇갈림, 그리고 공통분모와 차이들을 염두에 두고 서술하고자 한다.
태국
과거에서..
남한만큼 역사의 질곡이 많은 국가가 있겠냐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동남아시아의 과거도 결코 순탄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남북전쟁과 분단이라는 격동기 한가운데서 수많은 좌익들이 입산을 택한 지 약 30년 후, 즉 70년대 말에 태국의 공산당은 조직의 활동가들에게 농촌과 산악 지역으로의 무장 침투 지침을 전달했다. 그 배경에는 쿠바의 혁명이나 인접 국가 베트남의 경험이 작용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태국 공산당을 주도했던 것이 마오주의 경향이었던 것으로 미뤄 봤을 때 중국 공산당의 영향이 더 큰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때부터 80년대 초까지는 당시의 군부 정권이 농촌 지역과 지방의 산 속에 있는 태국 공산당을 색출하였는데, 그 결과는 공산당에게 참담한 것이었다. 현재는 진보 진영에서도 역사적 오류로 평가되고 있는 이 사건은, 외부의 지원에 대한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산업화가 막 시작되고 있었던 시점에서 지지 기반이었던 노동계급과 자신의 현장인 산업 지역을 등지고 입산한 선택이 이후의 민간인에 대한 테러와 같은 전술적 오류와 겹치면서 대중과 괴리를 야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그 결과로 태국의 좌익 운동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후에 커다란 공백기를 맞게 된다. 이의 가장 큰 대가는 당시 대규모로 형성되던 노동자 계급에서 급진화의 가능성이 사라지게 된 점일 것이다. 좌익의 역사는 이들에게도 단절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태국 공산당의 활동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성장한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농촌 지역에 투신하면서 20여 년 동안의 활동의 성과로 분출하게 된 것이 바로 남한에도 많이 소개된 Assembly of the Poor(이 명칭은 다양한 용어로 우리나라에 번역되었으나 ‘빈민(들의)회의’가 가장 정확한 번역이다)이다. 태국의 가장 역동적인 사회운동으로 널리 평가받고 있는 이 조직은 농민/빈민 운동이 중심 세력이고, 전체 민중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7,80년대 농촌 지역에서의 반 게릴라 작전에 대한 반감과 급속한 산업화 과정, 댐 건설 등으로 인하여 삶의 조건들이 피폐해진 농민, 어민, 빈민들이 결성한 느슨한 투쟁 연대체로서, 80년대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도 나타난 극심한 불평등과 생존권 박탈, 그리고 권위주의 정권들의 탄압 등, 응축된 모순들이 90년대에 폭발하면서 이들은 대규모 투쟁들을 전개하게 된다. 이들은 정부의 댐 건설 계획을 백지화시킨 경험도 있고, 97년에는 1만 여 명(최대 3만)이 3개월 동안 방콕 도심에서 '민중 중심의 개발'을 기치로 집회를 매일 치루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이들의 요구들 중 일부를 수용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나 대부분이 여전히 논의 중이라고 이 조직의 사무국 활동가들은 전했다. 이들이 또한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단순히 개발 문제에만 집중하는 않고 지역 공동체의 자치, 자원에 대한 통제권, 민주적 기본권, 정치제도의 개혁, 노동자의 생활조건과 작업 환경 개선, 생태주의적 개발, 도시 빈민 문제 등을 포괄하는 운동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 의제의 다양성이 역설적으로 반증하고 있듯이, 90년대 중/후반 이들의 투쟁들은 이념적 통일성, 구체적 목표, 단일한 지도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정부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었던 여러 개의 상이한 집단과 조직들이 임시적으로 결성한 ‘회의’에 불과하다. 이들의 요구안도 그래서 합의된 정세인식에서 도출된 전술이 아니라, 이 연대체에 참여했던 집단들의 요구를 나열한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장기간의 투쟁 끝에 정부가 일부 요구들을 수용하는 시늉을 보였을 때, 많은 이들이 다시 자신의 일터와 마을로 돌아가게 되었고, 운동은 침체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의 조직은 현장에서의 교육을 꾸준히 진행하는 동시에 ‘빈민회의’에서 보다 강고한 연대체로의 조직 개편을 시도하고 있다. 이 작업이 단기간 내에 큰 성과를 이루기는 힘들 것으로 보이지만, 최소한 사무국 차원에서는 반세계화 운동, 민영화 반대 운동, 악법 철폐 운동 등에서 꾸준히 다른 분야의 운동들과 연대하고 소통하고, 이것을 조직 내부로 확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직의 희망적인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현재로...
위에서 서술했던 역사적 배경과 정부의 노동계에 대한 분열, 회유, 탄압 정책의 결과로 태국의 노동운동 상황은 현재 처참하다. 인구 6300만에 단 30만 명 정도만이 노동조합에 소속(3%의 조직률)되어 있었고, 이들마저도 9개의 노총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다(모두가 조합원 1만-2만 정도). 이중 그나마 대표성을 인정받는, 국제자유노련(ICFTU) 소속의 두 노총은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 지도부가 법정 분쟁 중이었고, 노동조합 운영은 중단된 상태였다.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내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노조를 설립하게 되고, 조합원 수와 상관없이 돈은 지급되기 때문에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산별이나 노조들이 많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또한 노사정위원회도 사안별로 운영이 되는데(약 20개 존재), 이 내에서의 투표권도 관련된 (역시 조합원 수에 상관없이)각 노조 대표에게 부여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노동조합들이 난립할 수밖에 없고, 이들의 사무실은 대부분 비어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위의 조건에서, 태국의 노동계급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97년도에 바트화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아시아 외환위기가 닥쳤다. 이후 ‘11개 악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도입되는데, 한국과 태국이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실행에 있어서 모범 국가로 꼽힐 정도로 태국의 탁신 정부도 이를 충실히 추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대중 투쟁의 전통이 있고, 조직률이 높은 공공부문 노조는 인력 감축과 민영화에 반대하여 방문 당시에도 시위를 조직하는 중이었으며, 노동 운동의 개혁과 통합을 위한 흐름도 주도하고 있었다. 사적 부문에서도 사회운동 조직들과의 연대 속에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전개하고자 노력하는 세력들 또한 존재했다. 그 첫째가 CLIST라는 노동조합 지원/교육 단체로서, 이들은 약 30개의 노조와 사회운동단체들이 집결해 있는 민주노조연합(Democratic Trade Union Alliance)을 결성,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현장 중심의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단체였다. 이 지역의 많은 단체와는 달리, 해외 재단이나 거대 비정부기구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지 않았으며, 초기부터 노동운동에 깊숙이 관여하고 조직하면서 현장 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이 건설한 조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태국 노동 캠페인(Thai Labour Campaign)이라는 조직이 있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분야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로서, 일부 분야에서는 현장에 개입하고 있었다. 다만 CLIST와 차이가 있다면 이 조직은 다국적 기업 대응, 반세계화 캠페인 조직, 각종 이슈 선전 홍보 등의 활동으로 보다 전형적인 비정부기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해외 단체들과의 활발한 교류에도 집중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Walden Bello가 소장으로 있는 Focus on the Global South와 노동 관련 연구소를 방문했으나, 전자는 이미 많은 저서와 글을 통해서 알려져 있고, 후자는 태국의 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관계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위노조들 또한 여럿을 방문했는데, 필자가 겪은 일 중 하나가 의미심장하기에 전한다. 방콕의 북쪽 공단 지역의 한 노동자 조직을 방문했을 당시, 방문한 팀원들이 한국의 투쟁 사례들에 대한 질문을 받던 중에 한 여성 노동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태국에는 비정규직과 관련해서 두개의 파가 존재한다. 한 파는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다른 쪽은 비정규직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 잘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가?” 필자는 당황하는 동시에 전율했다. 한국에서도 정형화된 ‘답’이 없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결국 민주노총의 공식 입장만 얘기를 했다), 이질적인 공간에서 ‘현재’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 완전히도 동일함에, 서로 다른 과거의 짓누름과 미래의 전망에서 완전히 독립된 현실을 확인할 수 있기에 전율했다. 우리는 같음을!
그리고 미래..
태국은 경제 개발에 있어서 한국과는 다른 전략을 택하여, 자국 시장의 개방 시기도 남한에 비해서 빨랐고, 그 폭도 훨씬 넓었다. 외자유치에도 한국보다 훨씬 일찍부터 적극적이었고 해외 자본이 자국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높다. 그리하여 개방화와 자유화의 폐해가 훨씬 진척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면에서는 우리 사회에 지금 진행 중인,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막지 못한다면 나타날 수도 있는 양상들을 엿볼 수도 있었다. 우선 그 첫째가 위의 경제 구조와 관광 산업의 활성화,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 일자리 감소와 높은 실업률로 야기된 비공식부문의 높은 비중이다.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직원들, 영세사업장 노동자들, 소규모 자영업 종사자들, 파견 근로자, 그리고 가내노동 등이 그 대표적 사례들인데, 우리나라와 다르게 가내노동이 태국에서는 생산라인의 일부분으로 완전히 편재되어 있다. 비용 절감을 위한 하청화 과정에 가내노동까지 편입된 것이다. 이들은 집 내에서 개별적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완전히 파편화되어 있고, 노동법의 적용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임금도 턱없이 적다. 노동 집약 산업에서 비용 절감의 일환으로 등장한 제도인데, 하청 라인이 하도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의 생산품이 최종적으로 어느 기업의 제품으로 납품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들과 관련하여 (국내에서도 최근 추진되고 있는) 지역노조로의 조직화, 최저임금 보장, 노동기본권 인정 등 각종 정책적, 제도적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Homenet이라는 그룹도 태국 비정부기구 중 하나였다.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어디까지 가고 있는지를 반증하는 조직인데, 이들은 아시아 지역의 여성 단체들의 네트워크인 CAW(Committee for Asian Women)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현재 국내에서 통과될 수도 있는 경제특구법과 관련해서 이와 유사한 제도인 자유무역구역(Free Trade Zone)이 태국에서는 이미 정착되어 운영 중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구역들도 경제특구법의 내용과 유사하게 해외진출 기업들에게 각종 인프라의 무상 제공, 세제 혜택, 여러 가지 규제 완화와 같은 온갖 특혜들이 주어지고 있었다. 태국에서는 이러한 지역이 약 20여 곳이 존재를 하고 명목상으로는 노조 조직화가 가능하다. 실제로 12군대에는 노조가 있는 사업장이 존재하나, 이 지역 내에서 노동조합 조직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노동 관련 조직들의 활동가들에게 문의한 결과, 실제 상은 달랐다. 즉, 거주 지역과는 멀리 떨어진 곳들이 선정되어 노동자들이 통근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작업장들도 그 내부에 분산화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하청화와 비정규직의 비율도 더 높아서 노조 조직이 매우 힘들다는 것이었다. 또한 대부분 외국 기업들이거나, 중요 산업의 기업들이기 때문에 노조 설립에 대한 방해 공작이나 탄압이 다른 곳에 비해 심하고, 이를 고발해도 해당 당국의 대응이 미온적이라고 이들은 말했다. 온갖 유무형의 제약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금 다른 맥락에서, 섹스 산업에서 일을 하는 여성 단체에 대한 소개이다. 남한에서도 성매매와 관련해서 각종 재활 프로그램이나 지원 단체들이 존재하지만, 태국에서는 이들의 재활이나 교육을 넘어서서 노동권과 기본권을 쟁취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는 단체가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논쟁 지형이 조금 달라서 태국의 사례를 직수입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쟁점으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만큼 소개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Empower라고 하는 이 조직은 우선 남한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따지자면, 성매매 산업의 여성들과 성 관련 업계에서 노동을 하는 여성들을 구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일종의 대응 전술인 샘인데, 성매매는 태국에서도 워낙 논란이 심하기 때문에, 각종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 유흥업소의 댄서들, 안마 업소의 종사자들 등은 성 관련 산업에서 노동을 하는 노동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섹스 워커라고 칭한다. 이러한 분리에 기반하여 이 조직에서는 섹스 워커들을 위한 노동 기본권과 노동조합 가입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즉, Empower는 이들의 노동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었고, 성매매와 관련해서는 다른 비정부기구나 종교 단체처럼 재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피임, 외국어와 호신술에 관한 교육, 그리고 피해에 대한 상담 등을 해주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선택권은 인정하되, 그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보는 사례들을 방지하자는 취지다.
태국과 남한의 민중은 비행기로 6시간 걸리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점을 떠나서, 서로 다른 역사와 과거, 이로 인한 현재에 대한 인식의 차이, 그리고 상이한 미래에 대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각자의 역사적 시간에 대한 관념은 서로 긴장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자본과 세계화라는 물질적인 조건과 교차를 하기 때문에 한국의 활동가들은 태국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치나 비관의 뒤섞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테다. 우리나라 70년대의 주요 산업인 섬유, 의류, 화학 공장들의 여성 노동자들에서부터 오늘날의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의 문제, 그리고 자유무역구역 속의 노동 현실에까지, 우리에게 동시대적이지 않은 것이 같이 존재하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서로 다른 경험과 전망들을... 역사적 배경의 차이가 우리 모두를 규정하고 있는 현실적 조건이라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공통의 조건과 연대의 기반을 발굴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현재의 과제이다. 미래에 대한 절망, 혹은 희망은 우리의 실천이 이 과제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을 것이다. PSSP
참고> 영문 홈페이지가 있는 조직들:
Committee for Asian Women:
Thai Labour Campaign:
Homenet(국제 네트워크 본부): http://www.homenetww.org.uk/
Focus on the Global South:
‘조사’ 프로젝트라고는 하지만, 이번 사업은 단순한 실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유로 그동안 아시아 ‘지역’ 차원에서 미진했던 연대의 틀을 잡고 이를 활성화하기 위한 장기적인 프로그램의 첫 단추로 사고하는 것에 대해서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만큼, 연대의 대상을 모색하는 것이 주요 목적 중에 하나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출발하기 전의 논의 과정에서, 그리고 현지 조사중에도 연대의 원칙, 앞으로의 연대 활동의 매개와 의제들, 그리고 이러한 연대를 실현시키고 위한 전략들은 고민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단, 말레이시아와 태국에서 만나본 많은 활동가들과 그들의 처한 물질적/역사적 조건과 상황을 보면서 지금까지의 연대와 관련해서 사고했던 폭을 단순한 사회나 지역, 혹은 국가라는 공간적인 범위에서, 시간적인 축까지도 포괄할 수 있도록 확장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97-98년도의 아시아 외환위기로 대표되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공세와 지금도 지역에서 엄청난 고통을 야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저항은 모두에게 현재 진행형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역사적 배경과 축적된 경험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상이한 현실 인식,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예측, 희망은 서로 공통점도 있고 겹치기도 했지만 차이점과 갈등, 그리고 어긋남도 분명히 존재했다. 연대가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 상호소통과 공통의 인식을 요구한다면, 단순히 타 공간에 대한 일차원적인 이해뿐만이 아니라 이질적인 집단 사이의 이러한 ‘역사적 시간’ 관념에 대한 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바로 이 차원에서 아래의 사회운동에 대한 소개도 한국의 입장에서 타국을 바라봤을 때 발생하는 시공간 차원에서의 겹침과 엇갈림, 그리고 공통분모와 차이들을 염두에 두고 서술하고자 한다.
태국
과거에서..
남한만큼 역사의 질곡이 많은 국가가 있겠냐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동남아시아의 과거도 결코 순탄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남북전쟁과 분단이라는 격동기 한가운데서 수많은 좌익들이 입산을 택한 지 약 30년 후, 즉 70년대 말에 태국의 공산당은 조직의 활동가들에게 농촌과 산악 지역으로의 무장 침투 지침을 전달했다. 그 배경에는 쿠바의 혁명이나 인접 국가 베트남의 경험이 작용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태국 공산당을 주도했던 것이 마오주의 경향이었던 것으로 미뤄 봤을 때 중국 공산당의 영향이 더 큰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때부터 80년대 초까지는 당시의 군부 정권이 농촌 지역과 지방의 산 속에 있는 태국 공산당을 색출하였는데, 그 결과는 공산당에게 참담한 것이었다. 현재는 진보 진영에서도 역사적 오류로 평가되고 있는 이 사건은, 외부의 지원에 대한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산업화가 막 시작되고 있었던 시점에서 지지 기반이었던 노동계급과 자신의 현장인 산업 지역을 등지고 입산한 선택이 이후의 민간인에 대한 테러와 같은 전술적 오류와 겹치면서 대중과 괴리를 야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그 결과로 태국의 좌익 운동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후에 커다란 공백기를 맞게 된다. 이의 가장 큰 대가는 당시 대규모로 형성되던 노동자 계급에서 급진화의 가능성이 사라지게 된 점일 것이다. 좌익의 역사는 이들에게도 단절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태국 공산당의 활동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성장한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농촌 지역에 투신하면서 20여 년 동안의 활동의 성과로 분출하게 된 것이 바로 남한에도 많이 소개된 Assembly of the Poor(이 명칭은 다양한 용어로 우리나라에 번역되었으나 ‘빈민(들의)회의’가 가장 정확한 번역이다)이다. 태국의 가장 역동적인 사회운동으로 널리 평가받고 있는 이 조직은 농민/빈민 운동이 중심 세력이고, 전체 민중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7,80년대 농촌 지역에서의 반 게릴라 작전에 대한 반감과 급속한 산업화 과정, 댐 건설 등으로 인하여 삶의 조건들이 피폐해진 농민, 어민, 빈민들이 결성한 느슨한 투쟁 연대체로서, 80년대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도 나타난 극심한 불평등과 생존권 박탈, 그리고 권위주의 정권들의 탄압 등, 응축된 모순들이 90년대에 폭발하면서 이들은 대규모 투쟁들을 전개하게 된다. 이들은 정부의 댐 건설 계획을 백지화시킨 경험도 있고, 97년에는 1만 여 명(최대 3만)이 3개월 동안 방콕 도심에서 '민중 중심의 개발'을 기치로 집회를 매일 치루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이들의 요구들 중 일부를 수용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나 대부분이 여전히 논의 중이라고 이 조직의 사무국 활동가들은 전했다. 이들이 또한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단순히 개발 문제에만 집중하는 않고 지역 공동체의 자치, 자원에 대한 통제권, 민주적 기본권, 정치제도의 개혁, 노동자의 생활조건과 작업 환경 개선, 생태주의적 개발, 도시 빈민 문제 등을 포괄하는 운동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 의제의 다양성이 역설적으로 반증하고 있듯이, 90년대 중/후반 이들의 투쟁들은 이념적 통일성, 구체적 목표, 단일한 지도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정부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었던 여러 개의 상이한 집단과 조직들이 임시적으로 결성한 ‘회의’에 불과하다. 이들의 요구안도 그래서 합의된 정세인식에서 도출된 전술이 아니라, 이 연대체에 참여했던 집단들의 요구를 나열한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장기간의 투쟁 끝에 정부가 일부 요구들을 수용하는 시늉을 보였을 때, 많은 이들이 다시 자신의 일터와 마을로 돌아가게 되었고, 운동은 침체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의 조직은 현장에서의 교육을 꾸준히 진행하는 동시에 ‘빈민회의’에서 보다 강고한 연대체로의 조직 개편을 시도하고 있다. 이 작업이 단기간 내에 큰 성과를 이루기는 힘들 것으로 보이지만, 최소한 사무국 차원에서는 반세계화 운동, 민영화 반대 운동, 악법 철폐 운동 등에서 꾸준히 다른 분야의 운동들과 연대하고 소통하고, 이것을 조직 내부로 확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직의 희망적인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현재로...
위에서 서술했던 역사적 배경과 정부의 노동계에 대한 분열, 회유, 탄압 정책의 결과로 태국의 노동운동 상황은 현재 처참하다. 인구 6300만에 단 30만 명 정도만이 노동조합에 소속(3%의 조직률)되어 있었고, 이들마저도 9개의 노총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다(모두가 조합원 1만-2만 정도). 이중 그나마 대표성을 인정받는, 국제자유노련(ICFTU) 소속의 두 노총은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 지도부가 법정 분쟁 중이었고, 노동조합 운영은 중단된 상태였다.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내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노조를 설립하게 되고, 조합원 수와 상관없이 돈은 지급되기 때문에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산별이나 노조들이 많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또한 노사정위원회도 사안별로 운영이 되는데(약 20개 존재), 이 내에서의 투표권도 관련된 (역시 조합원 수에 상관없이)각 노조 대표에게 부여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노동조합들이 난립할 수밖에 없고, 이들의 사무실은 대부분 비어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위의 조건에서, 태국의 노동계급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97년도에 바트화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아시아 외환위기가 닥쳤다. 이후 ‘11개 악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도입되는데, 한국과 태국이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실행에 있어서 모범 국가로 꼽힐 정도로 태국의 탁신 정부도 이를 충실히 추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대중 투쟁의 전통이 있고, 조직률이 높은 공공부문 노조는 인력 감축과 민영화에 반대하여 방문 당시에도 시위를 조직하는 중이었으며, 노동 운동의 개혁과 통합을 위한 흐름도 주도하고 있었다. 사적 부문에서도 사회운동 조직들과의 연대 속에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전개하고자 노력하는 세력들 또한 존재했다. 그 첫째가 CLIST라는 노동조합 지원/교육 단체로서, 이들은 약 30개의 노조와 사회운동단체들이 집결해 있는 민주노조연합(Democratic Trade Union Alliance)을 결성,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현장 중심의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단체였다. 이 지역의 많은 단체와는 달리, 해외 재단이나 거대 비정부기구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지 않았으며, 초기부터 노동운동에 깊숙이 관여하고 조직하면서 현장 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이 건설한 조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태국 노동 캠페인(Thai Labour Campaign)이라는 조직이 있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분야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로서, 일부 분야에서는 현장에 개입하고 있었다. 다만 CLIST와 차이가 있다면 이 조직은 다국적 기업 대응, 반세계화 캠페인 조직, 각종 이슈 선전 홍보 등의 활동으로 보다 전형적인 비정부기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해외 단체들과의 활발한 교류에도 집중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Walden Bello가 소장으로 있는 Focus on the Global South와 노동 관련 연구소를 방문했으나, 전자는 이미 많은 저서와 글을 통해서 알려져 있고, 후자는 태국의 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관계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위노조들 또한 여럿을 방문했는데, 필자가 겪은 일 중 하나가 의미심장하기에 전한다. 방콕의 북쪽 공단 지역의 한 노동자 조직을 방문했을 당시, 방문한 팀원들이 한국의 투쟁 사례들에 대한 질문을 받던 중에 한 여성 노동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태국에는 비정규직과 관련해서 두개의 파가 존재한다. 한 파는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다른 쪽은 비정규직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 잘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가?” 필자는 당황하는 동시에 전율했다. 한국에서도 정형화된 ‘답’이 없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결국 민주노총의 공식 입장만 얘기를 했다), 이질적인 공간에서 ‘현재’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 완전히도 동일함에, 서로 다른 과거의 짓누름과 미래의 전망에서 완전히 독립된 현실을 확인할 수 있기에 전율했다. 우리는 같음을!
그리고 미래..
태국은 경제 개발에 있어서 한국과는 다른 전략을 택하여, 자국 시장의 개방 시기도 남한에 비해서 빨랐고, 그 폭도 훨씬 넓었다. 외자유치에도 한국보다 훨씬 일찍부터 적극적이었고 해외 자본이 자국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높다. 그리하여 개방화와 자유화의 폐해가 훨씬 진척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면에서는 우리 사회에 지금 진행 중인,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막지 못한다면 나타날 수도 있는 양상들을 엿볼 수도 있었다. 우선 그 첫째가 위의 경제 구조와 관광 산업의 활성화,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 일자리 감소와 높은 실업률로 야기된 비공식부문의 높은 비중이다.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직원들, 영세사업장 노동자들, 소규모 자영업 종사자들, 파견 근로자, 그리고 가내노동 등이 그 대표적 사례들인데, 우리나라와 다르게 가내노동이 태국에서는 생산라인의 일부분으로 완전히 편재되어 있다. 비용 절감을 위한 하청화 과정에 가내노동까지 편입된 것이다. 이들은 집 내에서 개별적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완전히 파편화되어 있고, 노동법의 적용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임금도 턱없이 적다. 노동 집약 산업에서 비용 절감의 일환으로 등장한 제도인데, 하청 라인이 하도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의 생산품이 최종적으로 어느 기업의 제품으로 납품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들과 관련하여 (국내에서도 최근 추진되고 있는) 지역노조로의 조직화, 최저임금 보장, 노동기본권 인정 등 각종 정책적, 제도적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Homenet이라는 그룹도 태국 비정부기구 중 하나였다.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어디까지 가고 있는지를 반증하는 조직인데, 이들은 아시아 지역의 여성 단체들의 네트워크인 CAW(Committee for Asian Women)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현재 국내에서 통과될 수도 있는 경제특구법과 관련해서 이와 유사한 제도인 자유무역구역(Free Trade Zone)이 태국에서는 이미 정착되어 운영 중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구역들도 경제특구법의 내용과 유사하게 해외진출 기업들에게 각종 인프라의 무상 제공, 세제 혜택, 여러 가지 규제 완화와 같은 온갖 특혜들이 주어지고 있었다. 태국에서는 이러한 지역이 약 20여 곳이 존재를 하고 명목상으로는 노조 조직화가 가능하다. 실제로 12군대에는 노조가 있는 사업장이 존재하나, 이 지역 내에서 노동조합 조직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노동 관련 조직들의 활동가들에게 문의한 결과, 실제 상은 달랐다. 즉, 거주 지역과는 멀리 떨어진 곳들이 선정되어 노동자들이 통근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작업장들도 그 내부에 분산화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하청화와 비정규직의 비율도 더 높아서 노조 조직이 매우 힘들다는 것이었다. 또한 대부분 외국 기업들이거나, 중요 산업의 기업들이기 때문에 노조 설립에 대한 방해 공작이나 탄압이 다른 곳에 비해 심하고, 이를 고발해도 해당 당국의 대응이 미온적이라고 이들은 말했다. 온갖 유무형의 제약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금 다른 맥락에서, 섹스 산업에서 일을 하는 여성 단체에 대한 소개이다. 남한에서도 성매매와 관련해서 각종 재활 프로그램이나 지원 단체들이 존재하지만, 태국에서는 이들의 재활이나 교육을 넘어서서 노동권과 기본권을 쟁취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는 단체가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논쟁 지형이 조금 달라서 태국의 사례를 직수입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쟁점으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만큼 소개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Empower라고 하는 이 조직은 우선 남한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따지자면, 성매매 산업의 여성들과 성 관련 업계에서 노동을 하는 여성들을 구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일종의 대응 전술인 샘인데, 성매매는 태국에서도 워낙 논란이 심하기 때문에, 각종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 유흥업소의 댄서들, 안마 업소의 종사자들 등은 성 관련 산업에서 노동을 하는 노동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섹스 워커라고 칭한다. 이러한 분리에 기반하여 이 조직에서는 섹스 워커들을 위한 노동 기본권과 노동조합 가입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즉, Empower는 이들의 노동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었고, 성매매와 관련해서는 다른 비정부기구나 종교 단체처럼 재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피임, 외국어와 호신술에 관한 교육, 그리고 피해에 대한 상담 등을 해주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선택권은 인정하되, 그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보는 사례들을 방지하자는 취지다.
태국과 남한의 민중은 비행기로 6시간 걸리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점을 떠나서, 서로 다른 역사와 과거, 이로 인한 현재에 대한 인식의 차이, 그리고 상이한 미래에 대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각자의 역사적 시간에 대한 관념은 서로 긴장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자본과 세계화라는 물질적인 조건과 교차를 하기 때문에 한국의 활동가들은 태국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치나 비관의 뒤섞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테다. 우리나라 70년대의 주요 산업인 섬유, 의류, 화학 공장들의 여성 노동자들에서부터 오늘날의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의 문제, 그리고 자유무역구역 속의 노동 현실에까지, 우리에게 동시대적이지 않은 것이 같이 존재하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서로 다른 경험과 전망들을... 역사적 배경의 차이가 우리 모두를 규정하고 있는 현실적 조건이라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공통의 조건과 연대의 기반을 발굴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현재의 과제이다. 미래에 대한 절망, 혹은 희망은 우리의 실천이 이 과제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을 것이다. PSSP
참고> 영문 홈페이지가 있는 조직들:
Committee for Asian Women:
Thai Labour Campaign:
Homenet(국제 네트워크 본부): http://www.homenetww.org.uk/
Focus on the Global Sou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