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은 싸운다
* 월간「사회진보연대」는 두 차례(2003년 3월호와 9월호) 부안 핵폐기장 건설에 대한 글을 실었다. 2003년 3월호는 부안 핵폐기장 건설부지 선정의 문제점을 다룬 총괄적인 글이었다면 2003년 9월호는 투쟁 중에 드러난 쟁점과 투쟁의 의의를 다룬 글이었다. 이번에 실릴 글은 군수 폭행사건과 등교거부투쟁 등 새로이 등장한 쟁점들에 대한 간략한 입장과 남한 핵발전소 반대투쟁에 역사를 다룬다. 핵발전소 반대 투쟁 역사는 반핵부안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을 인용했다.
군수폭행사건, 하지만 투쟁은 계속된다.
9월 23일로 60일째를 맞이하는 촛불 집회는 군수 폭행(?)사건 이후에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군수폭행사건이라고 불리는 내소사 사건을 놓고 언론은 군수가 주민들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만을 초점으로 보도했다. 언론은 정권의 폭력으로 다친 주민들은 돌아보지 않았고 또한 주민을 볼모로 한 군수의 사기극도 다만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붙였을 뿐이었다. 군수 폭행사건 이후 부안에 행정과 언론은 없었다. 군수 폭력사건은 정부가 조직적으로 자행한 부안 군민에 대한 폭력에 비하면 입에 올릴만한 것도 아니다. 매일 수많은 주민들의 머리가 깨져나갔고 또 수많은 주민들이 군화발에 짓밟혔다. 군수 폭력사건은 이러한 일방적 폭력에 대한 주민들의 분노다. 우리는 군수 폭행사건 이면에 있었던 것들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부안군에서 투쟁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부안에서 실종된 행정과 치안이다. 부안의 행정은 군수가 저지른 사기극이 폭로되면서부터 부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주민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어야 할 군의 행정은 주민들을 억누르고 핵폐기장 건설 계획을 지속하는 일에만 골몰했다. 또한 주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경찰력은 주민들의 투쟁을 진압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 속에서 공권력이 행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가해자도 없는 그야말로 공포의 상황이 지속된 것이다. 하기에 부안에서 벌어진 군수폭행사건은 그 자체로 이미 그 이전의 누적된 주민들에 대한 폭력행사들을 담고 있다. 군수가 주장한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조건은 이미 군수 그리고 공권력이 제거한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주민들에 대한 폭행 그리고 정권과 언론이 합심한 부안 주민 죽이기 상황에서 대화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수 면담을 요구했던 주민들의 간절한 요구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던 군수가 새삼스레 대화를 언급한 것은 주민들을 자극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폭력사건을 부각시키면서 정부가 목적하는 것은 부안 투쟁의 소멸이겠지만 부안 주민들의 투쟁은 결코 그런 흠집 내기로 사그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핵폐기장 반대투쟁은 생명을 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생존권 투쟁이기 때문이다.
남한 핵폐기장 건설 반대 투쟁의 역사, 그리고 부안의 상황
고립된 상황이지만 부안에서 투쟁의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는 것은 지역사회에 핵폐기장 건설이 갖는 무게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10여 년 동안 핵폐기장 건설을 둘러싼 투쟁이 끊이지 않고 벌어졌다. 1989년에서 1990년 동안 일어났던 동해안 지역 핵폐기장 반대운동과 1990년에서 1991년까지 진행된 안면도 반핵투쟁 그리고 1994년에서 1995년까지 일어난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 등 지난 10여 년 동안 전국적으로 벌어진 핵폐기장 건설 반대투쟁은 한결같이 정부의 패배로 귀결되었다. 반핵투쟁이 이처럼 적극적인 양상을 띄는 이유는 사실상 핵폐기장 건설이라는 것은 해당 지역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 비록 언론에 의해 드러난 핵 발전의 폐해는 많지 않지만 핵 폐기물 자체가 이미 죽음을 말한다는 것은 여러 사례들로 충분히 밝혀진 사안이다. 게다가 부안은 군수가 저지른 황당한 사기극으로 다른 지역들과 달리 초반부터 총력투쟁의 양상을 띌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간 여러 투쟁들에 대해 갈팡질팡했던 노무현 정권이 부안을 제물로 강력한 공권력을 과시하려 했기 때문에 더없이 정당한 부안 반핵투쟁이 유례 없는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속에는 근 15년 가까이 끌어왔던 한수원의 핵발전 고집도 한 몫 함은 물론이다.
핵발전을 넘어 전력산업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를 끌어내야 한다
정부의 폭력적인 핵폐기장 건설 추진 배경에는 남한 전력산업의 기형적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부안 주민들의 투쟁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시종일관 핵폐기장 건설은 물러설 수 없는 국책사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독단 이면에 있는 것은 남한 전력 산업이 갖는 기형성 때문이다. 한수원을 중심으로 한 대단위 전력 생산 체계인 원자력과 수력 발전은 그 효용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대단위 전력생산은 불필요한 전력손실을 야기한다. 이는 전력 생산지와 소비지가 원거리일 수밖에 없는데서 발생한다. 또한 그로 인해 비단 발전소에서의 공해뿐만 아니라 고압 송전탑이 야기하는 환경파괴와 생명체에 대한 공격 그리고 원거리 송전으로 인한 전력 손실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부안의 투쟁은 이처럼 한수원을 중심으로 한 남한 전력 생산 체계가 가지고 있는 광범위한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부안 투쟁에 있어 당장 중요한 것은 물론 정부의 파렴치한 작태를 응징하는 것이고, 핵폐기장 건설계획을 백지화하는 것이지만, 지난 10여 년을 끌어왔던 핵폐기장 선정과 반대투쟁의 힘든 고리를 끊어내는 길은 남한 전력 산업 자체에 대한 발본적 문제제기 일 수 밖에 없다. 다시 돌아봐야 할 것은 핵폐기장 건설 반대 투쟁에서 드러난 정부의 일관된 논리이며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은 역사에서 더 이상 제 2 , 제3의 부안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부안위도핵폐기장백지화핵추방 범부안군민대책위원회(http://www.nonukebuan.or.kr) 홈페이지에 올라온 핵폐기장 후보지 지정 경과와 투쟁경과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핵폐기장 후보지 지정 경과
○ 89. 3 경북 영덕군 남정면■영일군 송나면■울진군 기성면 등 동해안 3개 지역을 핵폐기장 후보지 지정(동력자원부)
○ 90. 11. 3 충남 안면도 핵폐기장 후보지로 내정(과학기술부, 한겨레신문 특종 보도로 세상에 공개됨)
- 안면도 핵폐기장 밀실책임을 물어 정근모 과기부장관 경질,
- 기존의 일방 지정 방식에서 지역주민과의 협의로 공개적으로 핵폐기장을 추진하겠다는 정부 계획 발표
○ 91. 12. 24 강원 고성■양양, 경북 울진■영일, 전남 장흥, 충남 안면도 6곳을 핵폐기장 후보지로 발표(과학기술부)
○ 92-93 경남 양산과 울진 지역을 핵폐기장 유치지역으로 추진
○ 94. 12.22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 핵폐기장 후보지 발표(과학기술부)
○ 97. 1 핵폐기장 추진주체, 과학기술부⇒ 산업자원부(원자력연구소 ⇒ 한국전력공사)로 수행주체 이관
○ 98. 9 [방사성폐기물관리대책] 확정(제 249차 원자력위원회)
- 부지확보 : 유치공모 또는 사업자주도의 방식으로 확보(60만평 규모)
- 시설 건설 : 2008년까지 중■저 준위 폐기물 처분시설, 2016년까지 사용 후 연료 중간저장시설 준공
○ 2000. 4 부지확보 추진방안 수립 및 경과
- 공모방식에 의한 부지확보를 우선 추진
- 발전소주변지역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약 3천억 원 지원 조건 제시
- 부지 유치 공모 공고(2000.6)
○ 2002. 11 현재 부지 공모 경과
- 1년 간의 공식 공모기간(2000.6-2001.6) 동안 신청지역 1곳도 없음
- 그러나 영광■고창, 진도 등에서 한수원의 조직적 지원 하에 주민들의 유치활동이 전개되고 있음
- 서해안 1곳 추진에서 동해안, 서해안 각각 1곳에 핵폐기장 부지 선정할 것으로 방향 선회
○ 2003.2. 4 핵폐기장 후보지 4곳, 동해안 울진, 영덕, 서해안 영광, 고창 결정
○ 2004. 3 핵폐기장 최종 부지 동해안, 서해안 1곳 각각 결정 예정
▣ 핵폐기장 반대운동 경과
○ 최초의 승리 : 동해안 지역 핵폐기장 반대운동(1989년 - 90년)
- 89년 초 당시 동력자원부에 의해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 작업 중 동해안 일대 3개 지역(경북 영덕, 영일, 울진)이 핵폐기장 후보지 1,2,3 순위로 정해짐
- 한국에서 반핵운동이 태동되던 무렵에 시작된 최초의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1순위로 거론된 영덕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전개됨
- 어린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참여하는 대규모 주민 집회가 개최되고(인구 1만 여 명 가운데 3천 여 명 참여), 포항 강릉간 국도를 점거하는 식의 강력한 반대투쟁 전개
- 조직적 반대운동으로 정부의 후보지 선정 기도 저지, 국내 반핵운동 최초의 승리로 기록되며 향후 반핵운동에 큰 영향을 미침
○ 7일간의 항전 - 안면도 반핵투쟁(1990년 -91년)
-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 핵폐기장 부지 선정 전에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에 의해 부지 확보에 실패하게 된 정부(핵폐기장 선정 부처가 동력자원부에서 과학기술부로 바뀜)는 과학기술단지로 속여 충남 안면도를 비밀리에 핵폐기장 후보지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 신문사에 의해 밝혀짐
- 2만 여 명 밖에 되지 않는 안면도 주민들 중 1만 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규탄집회 연일 개최 등으로 저항, 동해안에서 밀린 정부는 섬 지역인 안면도를 육해공 작전을 동원, 강경하게 탄압
- 그러나 반대운동은 오히려 강화되어 파출소 방화, 중고생 등교거부 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물결은 안면도 반핵항전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남길 만큼 치열하게 전개됨
-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운동에 의해 밀실행정의 책임을 물어 과기부장관(정근모)이 경질됨으로서 일단락 됨
- 이후 과기부는 안면도를 핵폐기장 후보지로 지정하는 것에 포기하지 않고 지역주민들을 금품과 향응으로 회유하는 술책을 펼치며 공동체를 파괴하고 분열을 조장함
- 91년 7월 안면도 주민이 금품, 향응 제공 등으로 핵폐기장을 추진한 부도덕한 과기부의 행태를 양심선언으로 폭로함으로서 안면도 핵폐기장 추진 계획 완전히 백지화 됨
○ 반핵운동의 본격화 - 전국 동시다발 핵폐기장 반대운동(1991년- 94년)
- 동해안, 안면도에서 핵폐기장 부지 확보에 실패한 정부는 공개적으로 주민과 협의 하에 부지를 선정하겠다고 천명
- 안면도 핵폐기장 추진 과정에서 밀실행정과 금품제공 등으로 공신력을 잃은 정부는 직접 후보지 선정에 나서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 대학의 연구기관에게 후보지 용역의뢰를 맡겨 설명회, 여론조사 등을 거치는 작업을 진행.
- 92년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91년 12월, 핵폐기장 후보지 6곳(강원도 고성■양양, 경북 울진■영일, 전남 장흥, 충남 안면도)을 발표
- 정부는 12월 24일 연말을 기해 후보지를 발표함으로서 여론을 잠재우려 했으나 전국 6곳의 후보지 주민들이 동시다발로 경쟁적 반대운동 전개
- 당시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 계획에 맞서 환경단체와 주민대책위 중심으로 이미 결성된 바 있는 '전국핵발전소핵폐기장반대운동본부'가 후보지 발표를 기점으로 조직적 반대운동 전개(정부가 91년 5월 전국에 9곳의 핵발전소 신규 후보지 발표 시, 안면도와 고성 등의 지역이 핵폐기장과 핵발전소 후보지로 추진 된 바 있어 지역대책위 차원의 조직적 반대운동 준비가 되어 있었음)
- 6개 후보지 지역 중 경북 울진의 경우 23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군민대회가 열리고, 대표단이 삭발농성에 돌입하는 등의 범군민적 운동 전개
- 영일군의 경우에도 국도 점거 등의 강력한 반대운동 전개, 특히 영일군 청하 지역은 핵폐기장 추진세력이 안면도와 함께 최종 후보지로 끝까지 공을 들인 곳, 때문에 주민대책위는 굴업도가 후보지로 지정될 때까지 지속적 투쟁을 전개함
- 강원도 양양과 고성지역의 반대운동 또한 지역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등 기록을 갱신하는 집회를 연일 개최하며 반대운동 벌임
- 정부에 의해 백지화되었던 안면도의 경우 다시 후보지로 선정되자 더욱 강경한 투쟁 전개
- 전남 장흥의 경우엔, 앞서 언급된 신규 핵발전소 반대운동과 관련 9개 후보지 중 6개 후보지가 전남에 집중되어 있어, 이의 반대를 위한 전남지역 핵발전소 30기(6곳에 들어설 핵발전소 수) 반대대책위 등과 연계하여 운동을 벌임
- 당초 정부의 계획은 1곳의 집중적인 반대운동을 피하기 위해 후보지 6곳을 발표한 이후 연내에 1곳의 후보지를 선정하겠다는 계획이었지만 오히려 전국적인 반핵운동의 불길만 거세게 한 채 결국 연내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에 실패하게 됨
- 또한 92년 지방자치선거에 앞서 후보지를 선정하려 했으나 오히려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이듬해 지방선거에 까지 영향을 미쳐 울진지역에선 3선의 거물급 여당 국회의원을 낙선시키는 정치적 승리를 낳기도 함
○ 빛나는 승리 -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1994년-95년)
- 91년에도 핵폐기장 부지 선정에 실패한 정부는 이후 몇 년에 걸쳐 핵발전소가 가동중인 울진이나 경남 양산 고리핵발전소 주변지역 등의 주민들을 회유하여 핵폐기장 유치신청 작업등을 벌여왔지만 번번이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함
- 94년 12월 22일 정부는 주민들의 반대를 피해, 기존에 핵폐기장 후보지로 전혀 거론된 바 없는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9가구 소재)를 핵폐기장 후보지로 선정(12월 15일 MBC 9시 특종 보도로 정부의 계획이 사전에 알려짐)
- 정부는 주민반대운동을 막기 위해 인구가 적고 외딴 섬인 굴업도(인천에서 80킬로미터 거리)를 선정하고 덕적면 주민들에게 500억 원을 지원하겠다는 회유책을 내놓음
- 굴업도는 89년 동력자원부가 전국의 도서지역과 임해지역을 대상으로 한 핵폐기장 후보지 조사시 활성단층에 의해 부적합 지역으로 제외된 곳임. 주민반대에 부닥쳐 핵폐기장 후보지를 선정하지 못한 정부는 핵폐기장 후보지로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도 무시하고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를 무력화할 수 있는 외딴섬을 후보지로 지정함
- 굴업도는 덕적도(600여명 거주, 그나마 50대 이상이 90% 차지)를 어미 섬으로 하는 단 9가구가 거주하는 섬으로 덕적도에서 이틀에 한번 행정선이 운행되는 곳,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굴업도가 속한 덕적면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굴업도가 핵폐기장 부지가 되면 연구시설 등 핵폐기장 운영에 필요한 제반 시설은 덕적도에 설치가 될뿐더러 굴업도의 전주민은 이주되지만 핵시설 설치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덕적도 주민들에게 올 수밖에 없음)
- 정부는 주민들의 반대운동을 초기에 진압하기 위해 주민 수의 몇배가 되는 경찰 병력( 총경급을 단장으로 하는 경찰 10개 중대 1500명 규모의 "핵폐기물 처리장 관리경비단")을 섬에 상주시키며 주민운동을 탄압
- 또한 이때는 과거의 반대운동과 달리 91년 이후 몇 년간 지속적으로 신문방송과 각종 여론매체를 통해 핵폐기장의 필요성과 허위 이미지 광고가 나갔기 때문에, 핵폐기장 부지 지정이 불가피하다는 여론의 동조와 정부의 강경한 탄압 정책으로 인해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운동은 많은 곤란에 처함
- 그러한 가운데 서울 명동성당에서 32일간 농성, 인천 답동성당에서 172일간 농성 등 일년 내 내 거의 대부분을 농성으로 보낼 만큼 치열한 투쟁 전개, 이 과정에서 1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구속자가 발생함
- 굴업도의 경우 다른 지역의 반대운동과 달리 대도시 주변 지역에 핵폐기장 후보지가 지정됨으로서 학생들의 반대운동이 가세하여 반핵운동에 학생들의 조직적 연대운동이 전개됨
- 정부의 발표가 있은 지 1년여 만인 95년 11월 30일 과기부 차관이 기자회견을 열어 핵폐기장 부지 지정 백지화 발표
- 과거의 핵폐기장 반대운동과 달리 굴업도는 핵폐기장 후보지에서 정부에 의해 공식적인 핵폐기장 부지로 지정 고시된 곳이었기 때문에 운동의 승리는 더욱 값지며 덕적도라는 외딴 섬의 주민 600여명과 환경단체가 거대한 정부를 상대로 외롭게 싸운 반핵운동의 빛나는 승리
○ 굴업도 이후, 핵폐기장 반대운동(95년 이후- 현재까지)
- 굴업도 핵폐기장 백지화 이후 핵폐기장 부지 시행 주체를 이관받은 산자부와 한전은 98년 방사성폐기물관리대책 확정을 통해 부지선정 기준을 유치공모 또는 사업자 주도의 방식으로 전환하고 2000년 6월부터 1년에 걸쳐 3천억 원의 지원금 지원 조건을 제시하고 후보지 유치활동에 들어갔으나 단 1 곳도 신청지역을 확보하지 못함
- 그러나 유치 공모 과정에서 한수원이 핵폐기장 후보지 유치를 위한 금품 지원 및 조직적 지원 활동을 전개한 결과, 영광■진도 등에서 유치 서명운동 추진, 영광군의 경우 유권자 49,400명 중 21,636명이 찬성 서명(돈으로 서명자 사거나 사망자 및 부재자 상당수 포함됨)
- 한수원의 금품 지원과 해외시찰, 여론 조작 등의 조직적 작업에 의해 서명 작업이 진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영광 등의 상황은 과거 여타 지역의 미미한 유치운동 보다는 조직적인 유치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보임
- 현재 영광과 진도 등의 지역엔 핵폐기장반대대책위가 결성되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유치서명이 전개된 모든 지역의 군의회는 유치 청원을 반려함(유치 신청을 하기 위해서는 군의회의 승인이 필요함) PSSP
군수폭행사건, 하지만 투쟁은 계속된다.
9월 23일로 60일째를 맞이하는 촛불 집회는 군수 폭행(?)사건 이후에도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군수폭행사건이라고 불리는 내소사 사건을 놓고 언론은 군수가 주민들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만을 초점으로 보도했다. 언론은 정권의 폭력으로 다친 주민들은 돌아보지 않았고 또한 주민을 볼모로 한 군수의 사기극도 다만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붙였을 뿐이었다. 군수 폭행사건 이후 부안에 행정과 언론은 없었다. 군수 폭력사건은 정부가 조직적으로 자행한 부안 군민에 대한 폭력에 비하면 입에 올릴만한 것도 아니다. 매일 수많은 주민들의 머리가 깨져나갔고 또 수많은 주민들이 군화발에 짓밟혔다. 군수 폭력사건은 이러한 일방적 폭력에 대한 주민들의 분노다. 우리는 군수 폭행사건 이면에 있었던 것들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부안군에서 투쟁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부안에서 실종된 행정과 치안이다. 부안의 행정은 군수가 저지른 사기극이 폭로되면서부터 부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주민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어야 할 군의 행정은 주민들을 억누르고 핵폐기장 건설 계획을 지속하는 일에만 골몰했다. 또한 주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경찰력은 주민들의 투쟁을 진압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 속에서 공권력이 행한 폭력에 대해 아무런 가해자도 없는 그야말로 공포의 상황이 지속된 것이다. 하기에 부안에서 벌어진 군수폭행사건은 그 자체로 이미 그 이전의 누적된 주민들에 대한 폭력행사들을 담고 있다. 군수가 주장한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조건은 이미 군수 그리고 공권력이 제거한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주민들에 대한 폭행 그리고 정권과 언론이 합심한 부안 주민 죽이기 상황에서 대화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군수 면담을 요구했던 주민들의 간절한 요구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던 군수가 새삼스레 대화를 언급한 것은 주민들을 자극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폭력사건을 부각시키면서 정부가 목적하는 것은 부안 투쟁의 소멸이겠지만 부안 주민들의 투쟁은 결코 그런 흠집 내기로 사그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핵폐기장 반대투쟁은 생명을 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생존권 투쟁이기 때문이다.
남한 핵폐기장 건설 반대 투쟁의 역사, 그리고 부안의 상황
고립된 상황이지만 부안에서 투쟁의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는 것은 지역사회에 핵폐기장 건설이 갖는 무게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10여 년 동안 핵폐기장 건설을 둘러싼 투쟁이 끊이지 않고 벌어졌다. 1989년에서 1990년 동안 일어났던 동해안 지역 핵폐기장 반대운동과 1990년에서 1991년까지 진행된 안면도 반핵투쟁 그리고 1994년에서 1995년까지 일어난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 등 지난 10여 년 동안 전국적으로 벌어진 핵폐기장 건설 반대투쟁은 한결같이 정부의 패배로 귀결되었다. 반핵투쟁이 이처럼 적극적인 양상을 띄는 이유는 사실상 핵폐기장 건설이라는 것은 해당 지역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 비록 언론에 의해 드러난 핵 발전의 폐해는 많지 않지만 핵 폐기물 자체가 이미 죽음을 말한다는 것은 여러 사례들로 충분히 밝혀진 사안이다. 게다가 부안은 군수가 저지른 황당한 사기극으로 다른 지역들과 달리 초반부터 총력투쟁의 양상을 띌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간 여러 투쟁들에 대해 갈팡질팡했던 노무현 정권이 부안을 제물로 강력한 공권력을 과시하려 했기 때문에 더없이 정당한 부안 반핵투쟁이 유례 없는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속에는 근 15년 가까이 끌어왔던 한수원의 핵발전 고집도 한 몫 함은 물론이다.
핵발전을 넘어 전력산업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를 끌어내야 한다
정부의 폭력적인 핵폐기장 건설 추진 배경에는 남한 전력산업의 기형적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부안 주민들의 투쟁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시종일관 핵폐기장 건설은 물러설 수 없는 국책사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독단 이면에 있는 것은 남한 전력 산업이 갖는 기형성 때문이다. 한수원을 중심으로 한 대단위 전력 생산 체계인 원자력과 수력 발전은 그 효용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대단위 전력생산은 불필요한 전력손실을 야기한다. 이는 전력 생산지와 소비지가 원거리일 수밖에 없는데서 발생한다. 또한 그로 인해 비단 발전소에서의 공해뿐만 아니라 고압 송전탑이 야기하는 환경파괴와 생명체에 대한 공격 그리고 원거리 송전으로 인한 전력 손실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부안의 투쟁은 이처럼 한수원을 중심으로 한 남한 전력 생산 체계가 가지고 있는 광범위한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부안 투쟁에 있어 당장 중요한 것은 물론 정부의 파렴치한 작태를 응징하는 것이고, 핵폐기장 건설계획을 백지화하는 것이지만, 지난 10여 년을 끌어왔던 핵폐기장 선정과 반대투쟁의 힘든 고리를 끊어내는 길은 남한 전력 산업 자체에 대한 발본적 문제제기 일 수 밖에 없다. 다시 돌아봐야 할 것은 핵폐기장 건설 반대 투쟁에서 드러난 정부의 일관된 논리이며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은 역사에서 더 이상 제 2 , 제3의 부안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부안위도핵폐기장백지화핵추방 범부안군민대책위원회(http://www.nonukebuan.or.kr) 홈페이지에 올라온 핵폐기장 후보지 지정 경과와 투쟁경과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핵폐기장 후보지 지정 경과
○ 89. 3 경북 영덕군 남정면■영일군 송나면■울진군 기성면 등 동해안 3개 지역을 핵폐기장 후보지 지정(동력자원부)
○ 90. 11. 3 충남 안면도 핵폐기장 후보지로 내정(과학기술부, 한겨레신문 특종 보도로 세상에 공개됨)
- 안면도 핵폐기장 밀실책임을 물어 정근모 과기부장관 경질,
- 기존의 일방 지정 방식에서 지역주민과의 협의로 공개적으로 핵폐기장을 추진하겠다는 정부 계획 발표
○ 91. 12. 24 강원 고성■양양, 경북 울진■영일, 전남 장흥, 충남 안면도 6곳을 핵폐기장 후보지로 발표(과학기술부)
○ 92-93 경남 양산과 울진 지역을 핵폐기장 유치지역으로 추진
○ 94. 12.22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 핵폐기장 후보지 발표(과학기술부)
○ 97. 1 핵폐기장 추진주체, 과학기술부⇒ 산업자원부(원자력연구소 ⇒ 한국전력공사)로 수행주체 이관
○ 98. 9 [방사성폐기물관리대책] 확정(제 249차 원자력위원회)
- 부지확보 : 유치공모 또는 사업자주도의 방식으로 확보(60만평 규모)
- 시설 건설 : 2008년까지 중■저 준위 폐기물 처분시설, 2016년까지 사용 후 연료 중간저장시설 준공
○ 2000. 4 부지확보 추진방안 수립 및 경과
- 공모방식에 의한 부지확보를 우선 추진
- 발전소주변지역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약 3천억 원 지원 조건 제시
- 부지 유치 공모 공고(2000.6)
○ 2002. 11 현재 부지 공모 경과
- 1년 간의 공식 공모기간(2000.6-2001.6) 동안 신청지역 1곳도 없음
- 그러나 영광■고창, 진도 등에서 한수원의 조직적 지원 하에 주민들의 유치활동이 전개되고 있음
- 서해안 1곳 추진에서 동해안, 서해안 각각 1곳에 핵폐기장 부지 선정할 것으로 방향 선회
○ 2003.2. 4 핵폐기장 후보지 4곳, 동해안 울진, 영덕, 서해안 영광, 고창 결정
○ 2004. 3 핵폐기장 최종 부지 동해안, 서해안 1곳 각각 결정 예정
▣ 핵폐기장 반대운동 경과
○ 최초의 승리 : 동해안 지역 핵폐기장 반대운동(1989년 - 90년)
- 89년 초 당시 동력자원부에 의해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 작업 중 동해안 일대 3개 지역(경북 영덕, 영일, 울진)이 핵폐기장 후보지 1,2,3 순위로 정해짐
- 한국에서 반핵운동이 태동되던 무렵에 시작된 최초의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1순위로 거론된 영덕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전개됨
- 어린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참여하는 대규모 주민 집회가 개최되고(인구 1만 여 명 가운데 3천 여 명 참여), 포항 강릉간 국도를 점거하는 식의 강력한 반대투쟁 전개
- 조직적 반대운동으로 정부의 후보지 선정 기도 저지, 국내 반핵운동 최초의 승리로 기록되며 향후 반핵운동에 큰 영향을 미침
○ 7일간의 항전 - 안면도 반핵투쟁(1990년 -91년)
-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 핵폐기장 부지 선정 전에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에 의해 부지 확보에 실패하게 된 정부(핵폐기장 선정 부처가 동력자원부에서 과학기술부로 바뀜)는 과학기술단지로 속여 충남 안면도를 비밀리에 핵폐기장 후보지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 신문사에 의해 밝혀짐
- 2만 여 명 밖에 되지 않는 안면도 주민들 중 1만 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규탄집회 연일 개최 등으로 저항, 동해안에서 밀린 정부는 섬 지역인 안면도를 육해공 작전을 동원, 강경하게 탄압
- 그러나 반대운동은 오히려 강화되어 파출소 방화, 중고생 등교거부 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물결은 안면도 반핵항전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남길 만큼 치열하게 전개됨
-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운동에 의해 밀실행정의 책임을 물어 과기부장관(정근모)이 경질됨으로서 일단락 됨
- 이후 과기부는 안면도를 핵폐기장 후보지로 지정하는 것에 포기하지 않고 지역주민들을 금품과 향응으로 회유하는 술책을 펼치며 공동체를 파괴하고 분열을 조장함
- 91년 7월 안면도 주민이 금품, 향응 제공 등으로 핵폐기장을 추진한 부도덕한 과기부의 행태를 양심선언으로 폭로함으로서 안면도 핵폐기장 추진 계획 완전히 백지화 됨
○ 반핵운동의 본격화 - 전국 동시다발 핵폐기장 반대운동(1991년- 94년)
- 동해안, 안면도에서 핵폐기장 부지 확보에 실패한 정부는 공개적으로 주민과 협의 하에 부지를 선정하겠다고 천명
- 안면도 핵폐기장 추진 과정에서 밀실행정과 금품제공 등으로 공신력을 잃은 정부는 직접 후보지 선정에 나서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 대학의 연구기관에게 후보지 용역의뢰를 맡겨 설명회, 여론조사 등을 거치는 작업을 진행.
- 92년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91년 12월, 핵폐기장 후보지 6곳(강원도 고성■양양, 경북 울진■영일, 전남 장흥, 충남 안면도)을 발표
- 정부는 12월 24일 연말을 기해 후보지를 발표함으로서 여론을 잠재우려 했으나 전국 6곳의 후보지 주민들이 동시다발로 경쟁적 반대운동 전개
- 당시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 계획에 맞서 환경단체와 주민대책위 중심으로 이미 결성된 바 있는 '전국핵발전소핵폐기장반대운동본부'가 후보지 발표를 기점으로 조직적 반대운동 전개(정부가 91년 5월 전국에 9곳의 핵발전소 신규 후보지 발표 시, 안면도와 고성 등의 지역이 핵폐기장과 핵발전소 후보지로 추진 된 바 있어 지역대책위 차원의 조직적 반대운동 준비가 되어 있었음)
- 6개 후보지 지역 중 경북 울진의 경우 23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군민대회가 열리고, 대표단이 삭발농성에 돌입하는 등의 범군민적 운동 전개
- 영일군의 경우에도 국도 점거 등의 강력한 반대운동 전개, 특히 영일군 청하 지역은 핵폐기장 추진세력이 안면도와 함께 최종 후보지로 끝까지 공을 들인 곳, 때문에 주민대책위는 굴업도가 후보지로 지정될 때까지 지속적 투쟁을 전개함
- 강원도 양양과 고성지역의 반대운동 또한 지역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등 기록을 갱신하는 집회를 연일 개최하며 반대운동 벌임
- 정부에 의해 백지화되었던 안면도의 경우 다시 후보지로 선정되자 더욱 강경한 투쟁 전개
- 전남 장흥의 경우엔, 앞서 언급된 신규 핵발전소 반대운동과 관련 9개 후보지 중 6개 후보지가 전남에 집중되어 있어, 이의 반대를 위한 전남지역 핵발전소 30기(6곳에 들어설 핵발전소 수) 반대대책위 등과 연계하여 운동을 벌임
- 당초 정부의 계획은 1곳의 집중적인 반대운동을 피하기 위해 후보지 6곳을 발표한 이후 연내에 1곳의 후보지를 선정하겠다는 계획이었지만 오히려 전국적인 반핵운동의 불길만 거세게 한 채 결국 연내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에 실패하게 됨
- 또한 92년 지방자치선거에 앞서 후보지를 선정하려 했으나 오히려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이듬해 지방선거에 까지 영향을 미쳐 울진지역에선 3선의 거물급 여당 국회의원을 낙선시키는 정치적 승리를 낳기도 함
○ 빛나는 승리 -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1994년-95년)
- 91년에도 핵폐기장 부지 선정에 실패한 정부는 이후 몇 년에 걸쳐 핵발전소가 가동중인 울진이나 경남 양산 고리핵발전소 주변지역 등의 주민들을 회유하여 핵폐기장 유치신청 작업등을 벌여왔지만 번번이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함
- 94년 12월 22일 정부는 주민들의 반대를 피해, 기존에 핵폐기장 후보지로 전혀 거론된 바 없는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9가구 소재)를 핵폐기장 후보지로 선정(12월 15일 MBC 9시 특종 보도로 정부의 계획이 사전에 알려짐)
- 정부는 주민반대운동을 막기 위해 인구가 적고 외딴 섬인 굴업도(인천에서 80킬로미터 거리)를 선정하고 덕적면 주민들에게 500억 원을 지원하겠다는 회유책을 내놓음
- 굴업도는 89년 동력자원부가 전국의 도서지역과 임해지역을 대상으로 한 핵폐기장 후보지 조사시 활성단층에 의해 부적합 지역으로 제외된 곳임. 주민반대에 부닥쳐 핵폐기장 후보지를 선정하지 못한 정부는 핵폐기장 후보지로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도 무시하고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를 무력화할 수 있는 외딴섬을 후보지로 지정함
- 굴업도는 덕적도(600여명 거주, 그나마 50대 이상이 90% 차지)를 어미 섬으로 하는 단 9가구가 거주하는 섬으로 덕적도에서 이틀에 한번 행정선이 운행되는 곳,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굴업도가 속한 덕적면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굴업도가 핵폐기장 부지가 되면 연구시설 등 핵폐기장 운영에 필요한 제반 시설은 덕적도에 설치가 될뿐더러 굴업도의 전주민은 이주되지만 핵시설 설치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덕적도 주민들에게 올 수밖에 없음)
- 정부는 주민들의 반대운동을 초기에 진압하기 위해 주민 수의 몇배가 되는 경찰 병력( 총경급을 단장으로 하는 경찰 10개 중대 1500명 규모의 "핵폐기물 처리장 관리경비단")을 섬에 상주시키며 주민운동을 탄압
- 또한 이때는 과거의 반대운동과 달리 91년 이후 몇 년간 지속적으로 신문방송과 각종 여론매체를 통해 핵폐기장의 필요성과 허위 이미지 광고가 나갔기 때문에, 핵폐기장 부지 지정이 불가피하다는 여론의 동조와 정부의 강경한 탄압 정책으로 인해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대운동은 많은 곤란에 처함
- 그러한 가운데 서울 명동성당에서 32일간 농성, 인천 답동성당에서 172일간 농성 등 일년 내 내 거의 대부분을 농성으로 보낼 만큼 치열한 투쟁 전개, 이 과정에서 1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구속자가 발생함
- 굴업도의 경우 다른 지역의 반대운동과 달리 대도시 주변 지역에 핵폐기장 후보지가 지정됨으로서 학생들의 반대운동이 가세하여 반핵운동에 학생들의 조직적 연대운동이 전개됨
- 정부의 발표가 있은 지 1년여 만인 95년 11월 30일 과기부 차관이 기자회견을 열어 핵폐기장 부지 지정 백지화 발표
- 과거의 핵폐기장 반대운동과 달리 굴업도는 핵폐기장 후보지에서 정부에 의해 공식적인 핵폐기장 부지로 지정 고시된 곳이었기 때문에 운동의 승리는 더욱 값지며 덕적도라는 외딴 섬의 주민 600여명과 환경단체가 거대한 정부를 상대로 외롭게 싸운 반핵운동의 빛나는 승리
○ 굴업도 이후, 핵폐기장 반대운동(95년 이후- 현재까지)
- 굴업도 핵폐기장 백지화 이후 핵폐기장 부지 시행 주체를 이관받은 산자부와 한전은 98년 방사성폐기물관리대책 확정을 통해 부지선정 기준을 유치공모 또는 사업자 주도의 방식으로 전환하고 2000년 6월부터 1년에 걸쳐 3천억 원의 지원금 지원 조건을 제시하고 후보지 유치활동에 들어갔으나 단 1 곳도 신청지역을 확보하지 못함
- 그러나 유치 공모 과정에서 한수원이 핵폐기장 후보지 유치를 위한 금품 지원 및 조직적 지원 활동을 전개한 결과, 영광■진도 등에서 유치 서명운동 추진, 영광군의 경우 유권자 49,400명 중 21,636명이 찬성 서명(돈으로 서명자 사거나 사망자 및 부재자 상당수 포함됨)
- 한수원의 금품 지원과 해외시찰, 여론 조작 등의 조직적 작업에 의해 서명 작업이 진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영광 등의 상황은 과거 여타 지역의 미미한 유치운동 보다는 조직적인 유치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보임
- 현재 영광과 진도 등의 지역엔 핵폐기장반대대책위가 결성되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유치서명이 전개된 모든 지역의 군의회는 유치 청원을 반려함(유치 신청을 하기 위해서는 군의회의 승인이 필요함)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