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희망을 세계화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단면들
멕시코 칸쿤 공항 입국심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하얀 뙤약볕과 한국에서 몇 년만에 있을까 말까 하는 후텁지근한 더위가 우릴 맞이할 뿐이었다. WTO(세계무역기구) 회의를 무산시키러 온 시위대를 너무 홀대(?)하는 것은 아닌가? 캐나다 입국 때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우리는 칸쿤에 들어오기 전 비행기 티켓 문제로 캐나다에서 며칠을 보내야 했는데, 캐나다 밴쿠버 공항을 들어갈 때 입국 심사대를 거쳐 공항 이민국까지 가서 서너 시간의 혹독한 심문을 받았던 것이다. 당연히도 멕시코 들어가기는 ‘장난이 아닐 것’이라며 이 궁리 저 궁리 머리를 쥐어짜며 회의를 했는데 그 작전회의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려 허망하기까지 했다.
캐나다 입국과정이 그렇게 까다로웠던 것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테러용의자나 반WTO 시위대를 색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캐나다를 통한 미국 밀입국 용의자를 걸러내기 차원이었던 것임을 현지 가이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민국 공무원에 의하면 미국의 압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잘사는 미국 식민지’ 캐나다는 따를 수밖에. 잘 사는 나라들에서는 자기네끼리 잘살겠노라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입국을 기를 쓰고 막고, 못사는 나라에서는 누구든 ‘어서옵쇼’ 한다.
‘자본 이동의 자유화’를 소리 높여 외치는 선진제국들은 ‘노동력 이동의 자유화’는 기를 쓰고 막는다. 현재의 WTO 협상의제(‘도하개발 아젠다’) 중 하나인 서비스 협상에서 대부분의 개도국들은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Mode 4)을 요구하고 있는데 선진제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짐을 풀고 WTO 긱료회의가 열리는 호텔지역의 반대편(민중포럼과 시위는 주로 여기에서 진행되었다) 지역의 한 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사회운동조직 총회 말미에 참석하여 저번 세계사회포럼에서 안면을 튼 세계 소농조직 비아 캄페시나(농민의 길)의 몇몇 활동가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예상과는 달리 너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민중포럼이 잘 조직이 안되고 있다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이후 특별한 일정이 없어 시내구경을 갔다. 시내 곳곳에서는 아메리카 전역에서 온 백인 관광객을 상대로 길거리를 배회하면서 원색 뜨개질 제품들을 팔고 있는 조그맣고 까무잡잡한 마야 원주민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계적인 휴양지 칸쿤의 주인은 멕시코인들이 아니었다. 호텔과 같은 휴양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메리카 전역에서 몰려든 부자 백인들이었다. 백인 남성들은 호텔 안에서나 밖에서나 대개 웃옷을 벗고 벌겋게 태운 상체를 드러내고 다녔다.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로 멕시코 인구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메스티조들은 언제나 근무복을 입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일 뿐이었다. 나프타 반대 시위에도 참여했다는 캐나다 밴쿠버 호텔 한 노동자가 ‘칸쿤은 어글리 아메리카(추한 아메리카)’라 한 말이 생각이 났다. 부자 백인들이나 멕시코인들이나 다 길가에 축 늘어진 야자수처럼 생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자 백인들은 무료해 보였고 멕시코 서비스 노동자들은 주눅 들고 지쳐 보였다. 방콕의 관광지와 호텔시설이 태국인의 것이 아닌 것처럼 120개나 되는 세계 유수의 호텔이 밀집해 있는 칸쿤은 멕시코인들의 휴양지는 아니었다.
WTO 공식 회의장은 호텔지역 안에 있었는데 우리가 도착한 날부터 2중 3중의 철제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있었다. 철제 바리케이드가 회의장 주변 사방을 둘러 쳐진 것은 ‘시애틀투쟁’ 이후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미주자유무역협정(ALCA 또는 FTAA) 정상회의 때부터였던 것 같다. 회의장소로 록키 산맥 안이나 카타르 도하 같은 섬 등 시위대의 접근을 차단하기에 용이한 곳으로 선정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누구 말대로 세계의 모든 것을 소유한 강대국과 초국적 자본들이 2중 3중의 철제 바리케이드와 수만의 경찰력에 의지해서 민중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한 채 외딴 곳에서 회의를 하는 것이야말로 세계화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회의장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한 단면인 ‘담장 도시’를 실물로 보여주고 있었다.
‘비아 캄페시나’
8일부터 ‘비아 캄페시나’ 주최의 농업관련 사전 토론회가 있었다. 우리는 개막식만 참여하였다. 오후에 반전을 주제로 한 사회운동총회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번 칸쿤 투쟁의 주력대오 ‘비아 캄페시나’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올해 초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였다. 운 좋게도 국제 소농 원주민 운동 조직인 ‘비아 캄페시나’ 초청을 받은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간부 도우미로 부문별 사전대회의 하나인 농민대회부터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포럼기간 동안 우리같이 ‘비아 캄페시나’의 공식 초청을 받은 200여명의 각 국 농민운동 대표자들은 두 수도원에서 지냈고, 브라질의 MST(땅없는 농업노동자들)를 비롯하여 중남미의 5천여 농민들은 커다란 체육관에서 숙식을 하였다. 이 ‘풍찬노숙(風餐露宿)’을 위해 어떤 칠레농민들은 3-4일간 걸려 버스를 타고 왔다고 했다. 이들 모두는 불편한 잠자리와 변변치 못한 식사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체육관 등에서 각종 토론회와 문화행사를 풍성하게 개최하였고, 라틴아메리카 자유무역지대(ALCA)와 이라크전쟁 반대시위의 주력대오였다.
이들은 언제나 농업의 상징색인 녹색 모자를 쓰고 녹색 스카프를 두르고 다녔다. 최대규모의 조직화된 대오였다. 지금은 정권의 성격이 변질되어 가고 있지만 에콰도르와 브라질에서 이들 소농들에 힘입어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진보정권이 들어섰고, 볼리비아 선거에서는 반미 반신자유주의 기치를 내건 농민이 직접 출마해 선전했던 터라 사기도 충만해 있었다.
나는 포럼 기간 중에 토지점거에 성공해 그럴듯한 공동체를 건설해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MST 정착촌에 가서 약 1,500여명이나 되는 이들과 함께 춤과 음악이 곁들여진 풍성한 야외 식사를 할 기회를 가졌다. 거기에는 이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자유, 평등, 협동, 우애의 미래사회가 이미 있었다. 포럼이 끝난 뒤에는 토지점거를 준비하고 있는 열악하디 열악한 대규모 비닐 판자촌을 돌아볼 기회를 가지기도 하였는데 이들 역시 토지를 점거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꾸리게 될 앞날에 대한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이번 칸쿤투쟁의 주력도 ‘비아 캄페시나’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허름한 체육관처럼 보이는 지역 문화회관에서 사전대회를 열었고, 집단 노숙을 하고 공동으로 식사를 해결하였으며, 녹색 모자를 쓰고 녹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이들은 세계적인 곡물 메이져와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WTO에 대항하여, 그리고 미국-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동지배에 맞서 토지에 대한 권리, 식량주권, 식품안전성, 유전자조작 반대, 생명특허에 대한 반대 등을 내걸고 싸우고 있었다. 농업협상이 주된 의제였고, 이경해 열사의 죽음이 있었긴 하였지만 농민이 주력인 한국참가단과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의 소농 원주민이 없었다면 칸쿤투쟁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운동에서의 ‘비아 캄페시나’의 주도성은 내년 초 인도에서 열리는 세계사회포럼에서도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비아 캄페시나’ 지도자 중의 하나인 온두라스 농민 대표에 의하면, 인도에는 ‘비아 캄페시나’에 가맹해 있는 한 농민조직이 있는데 그 조직규모가 천만 명에 이른다니까 말이다.
그런데 ‘비아 캄페시나’ 운동은 자본주의가 채 발전하지 않은 나라나 지역의, 아직 소멸하지 않은 소농들의 허망한 몸부림일까? 최소한 멕시코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멕시코의 한 인권변호사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르길, 소농 운동이자 원주민 운동인 사파티스타 운동을 ‘우리 멕시코 시민 사회의 90%가 지지하고 있다, 노사협력체제에 길들여진 노조는 부패해 있다, 제도혁명당에서 갈라져 나온 인사들과 구 공산당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주혁명당도 가짜 좌파다, 그러나 사파티스타 운동은 전진하고 있다’. 멕시코 운동세력의 주된 구호가 ‘사파타 비베 비베(사파타 만세)’인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세계전역을 충분히 자본주의화하지 못한 채 위기에 빠져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요하고 있는 세계자본주의의 강력한 비판자로 바야흐로 국제 소농운동 조직 ‘비아 캄페시나’가 부상하고 있다. 여기에 이경해 열사의 죽음을 부여안은 한국의 농민운동이 함께 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겠다.
멕시칸 타임
사회운동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황실이 조직위에서 파악한 장소인 ‘엑스 팔랑께’(‘전 유적지’)를 가는데 한참 헤맸다. 이 택시 운전사는 여기라 했는데 가보니 아니었고 저 택시 운전사는 저기라 했는데 가보니 이번에도 아니었다. 누가 제 3의 장소를 알려주었다.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헤맬 수 없다며 한 두 사람만 가서 확실히 확인한 후에 움직이자고 했다. 대표로 뽑혀서 ‘엑스 팔랑께’로 갔더니 허름한 체육관 같은 데인데 인기척이 없었다. 또 잘못 왔구나 하고 허탈해 하고 있는데 벨기에 청년 하나도 그 체육관을 기웃기웃하고 있었다. 그 친구 왈 이곳이 틀림이 없단다. 그리고 4시에 열릴 예정이던 회의가 5시에 열리는 것으로 바뀌었단다. 시계를 보니 5시 20분. 그럼 왜 사람들이 없냐고 하니, 여기 사람들 30분 늦는 것은 보통이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잔다. 과연 약 10분 뒤에 주최측이 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에 유적지(엑스 빨랑께)인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란다. 부실한 조직위 같으니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시간도 늦고 통역도 없고 대중적인 토론회가 아니니 오지 않는 게 좋다고 연락을 했다. 회의가 간단히 끝나 주최측의 한사람으로 보이는 이에게 다가가 왜 이렇게 시간이 안 지켜 지냐고 넌지시 따졌더니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이다. 같은 장소에서 열린 민중포럼 전야제격인 ‘칸쿤 참가자들 인사나누기’ 프로그램까지 참가하고 숙소에 들어왔다.
멕시코에서 행사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1시간 가량은 늦어졌다. 사회운동총회가 그랬고 농민행사가 그랬다. 이 멕시코 늑장부리기 문화에 대해 네덜란드 사람하고 같이 죽이 맞아 흉까지 본 적이 있었다. 시간엄수가 사회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한 모습이라고 결론을 짓긴 했지만 말이다. 한국에 와서 멕시코 전문가 이성형 선생을 만나서 들은 바에 의하면 멕시코에서 파티나 집 초대에 응할 때는 약 45분 정도 늦게 가야 예의란다. 주최측에 준비 시간을 주어야 한다나.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문화는 미국 등 몇 나라뿐이란다. 그러고 보니 브라질 사회포럼도 비슷했던 것 같다.
민중포럼
9일은 ‘세계화에 대한 포럼’에 월든 벨로, 반다나 쉬바, 마드 벌로 등 한국에도 알려진 유명인사들이 나온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엘 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장소를 찾아가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숙소에서 걸어가도 될 정도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렸는데 호텔 직원, 거리의 칸쿤 시민들이 잘못 알려주어서 반대편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포럼 장소를 알게 되어 다시 되돌아가려는데 학생 시위대가 바리케이드에서 경찰하고 대치하고 있다는 이유로 10분이면 갈 거리를 약 1시간 동안 빙 둘러서 버스를 타고 갔다. 설상가상인 것은 거의 다 갈 지점에서 교통통제를 한다고 버스를 내려 걸어가란다. 35도가 넘는 더위 속을 약 40분간을 걸었다. 캐나다 마드 벌로 등의 물 사유화에 관한 이야기 등을 듣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는 중간에 연사 마드 벌로를 인터뷰했고, 가족농 보호운동을 하고 생태 농업을 지향하면서 브라질 MST 등 비아 캄페시나와 연대하는 미국 ‘푸드 퍼스트’(식량 제일주의)의 공동 집행위원장 미탈을 인터뷰하였다. 미탈은 이번 칸쿤회의는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미국과 EU가 보조금 삭감 등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개도국들이 격앙되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탈의 예상은 14일 현실로 드러났다.
11일 오전에는 민주노총이 대거 참가한 ‘남반구노조연대회의’ 주최 노동관련 토론회가 있었고, 오후에는 내가 발제자의 한 사람으로 나선 ‘전쟁과 무역’ 포럼이 있었다. 한국 참가단들은 이경해씨가 돌아가신 10일 이후로는 텐트를 치고 매일 촛불 집회를 하느라고 포럼에 거의 참가를 하지 못했다. 꼭 필요한 곳에만 갔고, 내가 발제한 ‘전쟁과 무역’ 포럼은 나 혼자만 참석하였다.
내 발제는 매우 딱딱하게 진행되었다. 사회자가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발제 전에 이경해 씨에 대한 묵념을 1분간 진행하여 회의장이 숙연해 진 데다, 영어가 신통치 않아 남들이 하듯이 즉석에서 청중과 대화하듯이 발제를 한 게 아니라 준비된 긴 발제문을 죽 읽어가니 회의장 안이 더욱 고요해졌다. ‘무장한 세계화’와 북핵위기를 이론적 역사적으로 접근한 것이어서 다른 발제자들의 발제들과는 달리 내용도 무거웠다. 애초부터 발제를 잘 하기는 힘들었지만 어떻든 좀 실망해서 회의장을 그냥 빠져나오려니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발제문을 달란다. 아휴 고마워라! 그리고 멕시코 반전단체 출신 세 사람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 단체에 와서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했다. 자신이 없기도 하고 텐트로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메일만 교환하고 그냥 돌아왔다.
한국참가자들이 많은 포럼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일부가 포럼에서의 토론들이 원론적이라 평가를 한다. 내 의견도 동일하다. 그래서 세계사회포럼 같은 데를 가보면 토론장보다는 바깥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다. 각국에서의 투쟁경험들, 투쟁에서의 쟁점들이 교류되고 논의가 되면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사람들이 토론에 진지하게 임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언어문제도 있다.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언제나 생기는 문제인 통역이 매끄럽게 처리되는 회의가 별로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언어적으로 고립된 한국 사람들에겐 통역문제는 특히 심각하다.
이경해씨 그리고 투쟁
10일은 WTO 공식회의 개막에 맞춰 농민시위가 있었다. 한국참가단 모두는 시위에 참가하였다. 농민들은 WTO해체를 상징하는 상여를 메고 갔다. 그리고 바리케이드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이경해 열사의 자결이 있었다. 농민대오를 제외한 참가자들은 이경해씨가 온 줄도 몰랐다가 좀 당황했고 설마 돌아가시기까지 하겠는가 했는데 진짜 돌아가셨다. 이경해씨가 지난 3월 제네바에서 24일간 단식하면서 뿌린 다음과 같은 글이 독립미디어센터 등을 통해 공개되면서 그는 칸쿤투쟁의 중심 인물이 되어갔다.
이제 진실을 말하라, 그리고 농업을 WTO에서 제외시켜라
나는 56세, 한국에서 온 농민이며, 젊은 시절 희망을 가지고 동료들과 농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보자 노력하였던, 그러나 결국 실패만을 거듭한 많은 농촌지도자중 하나이다.
우리는 우루과이라운드가 끝나고 곧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더 이상 우리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우리는 나약하게도 수백년 대대로 살아왔던 우리의 고향 농촌이 큰 파도로 붕괴되는 것을 그냥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적극적으로 그 큰 파도의 근본과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자 하였다.
(․․․)
일찍이 농사짓기를 포기한 농민들은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였고 이러한 악순환을 벗어나고자 끝까지 노력했던 농민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부채로 도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개중에 운이 좋은 사람들은 더 갈 수 있지만 종래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나는 하룻밤 새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나버린 친구의 날고 오래된 빈집을 돌아보고 그저 돌아오기만 바랄 뿐 어찌할 수 없었다. 한번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비관,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집에 달려간 적이 있었지만 역시 그 부인의 울부짖음 소리만 들을 뿐 어찌할 수 없었다. 당신이라면 어떤 기분이었겠는가?
(․․․)
나는 지금, 인류는 지금 극소수 강대국과 그 대리인인 세계무역기구(WTO)와 이를 돕는 국제기금 그리고 다국적 기업의 상업적 로비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반인류적이고 농민말살적인, 반환경적이고, 비민주적인 세계화의 위험에 빠져있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즉시 이를 중단시켜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 허구적인 신자유주위가 세계 각지의 다양한 농업을 말살시킬 것이며, 이로써 모든 인류에게 재앙이 초래될 수도 있음을.
나는 단호히 말하건대, 우루과이라운드는 몇몇 야망에 찬 정치집단들이 다국적 기업과 외눈박이 학자연하는 자들과 동조하여 자기들의 골치 아픈 농업문제를 다른 나라에 떠넘긴 한 판 사기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진실을 말하라. 그리고 원점으로 돌아가 농업을 WTO에서 제외시켜라.
10일 병원에서의 촛불추모를 시작으로 매일 촛불집회가 계속되었다. 10일 저녁 ‘비아 캄페시나’가 머물고 있는 체육관에서의 마야 원주민들 주도로 진행된 긴 미사, 11일 집회에서 사회자의 ‘평화를 갈구한다’는 발언에 ‘현재 세계에 평화는 없다’는 인도네시아 농민대표 사라기씨의 일갈, 12일 세찬 비바람 속에서 진행된 촛불 집회, ‘비아 캄페시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온두라스 농민대표 라파엘의 ‘이경해 동지는 WTO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발언, 밤새 내리는 빗 속 텐트에서 들이치는 비를 피해가면서 잔 잠 등이 기억이 남는다. 집회는 공공연맹 김건태 동지의 기타 반주와 한국 참가단의 장중한 투쟁의 노래, ‘삶이 보이는 창’의 송경동 동지의 추모시가 어우러져 작은 문화제 모습을 띠었다. 다음은 집회에서 낭송된 송경동씨의 추모시들 중 하나다.
당신은 야속한 사람
- 이경해 열사를 추모하며(9/12 칸쿤에서)
송경동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칸쿤에 나는 새를
칸쿤에 피는 꽃을
칸쿤에 부는 바람을
칸쿤에 내리는 비를
나무를 기둥 삼아 만든 집 지붕에
떨어진 씨앗이 또 나무가 되어
지붕에 나무를 키우는 자연 속의 집들을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망치와 정으로 콘크리트를 깨고 있는 멕시코의 어린 노동자를
온 몸에 혁대를 걸고 와
하나에 10 페소를 말하며
짠한 미소를 짓는 노점의 여인을
아,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죽고 일제히 빛을 터뜨리는
카메라 후레쉬 불빛을
운전기사도 길 가던 청년도
호객을 하는 사내도
모두 꼬레아를 물으며
엄지손가락을 들고 눈물짓는 것을
아,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그 철책에서
오른 손을 들어 빼어든
칼로 당신의 왼편 가슴을 찌를 때
찌르며 툭 떨어질 때
세계의 모든 양심과
세계의 모든 생명들이
또 다시 한번 치를 떨고
이를 갈고 눈물을 떨구었다는 것을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
권력은 민중에게
사랑은 연인에게
자연은 자연에게
되․돌․려․달․라․는
당․신․의․소․망
한국투쟁단은 계속적인 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고 한국어는 집회 공식언어가 되었다. 이경해씨가 돌아가신 바리케이드 앞에는 텐트가 설치되어 각 국 활동가들의 집결지(‘캠프 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가 되었다. ‘캠프 리’에는 여기저기서 갖고 온 물과 음식이 넘쳐났다. 이경해씨가 돌아가신 현장에는 촛불과 꽃, 그리고 추모글과 플래카드로 뒤덥혔는데, 그 중에는 환경주의자라 알려진 칸쿤 시장이 보낸 꽃다발과 위로의 말도 있었다.
11일에는 ‘캠프 리’로 언론이 쇄도하였다. 오전에는 통역이 없어서 내가 언론을 상대했는데 10군데도 넘은 것으로 기억한다. 언론은 자결 이유, 한국농민의 처한 상황, 가족 사항 등을 주로 물었는데 서구언론들은 이경해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심지어는 한국참가단이 이경해씨의 계획을 사전에 알았느냐, 또 다른 자살 가능성은 없느냐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질문들도 있었다. 반면 칸쿤투쟁에 참여한 각 국 활동가들은 한국 사람만 보면 위로의 말을 전하고, 눈인사를 하거나 어깨를 쓰다듬거나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우리 모두는 상주 아닌 상주가 되었다.
13일에는 또다시 커다란 집회가 있었다. 그런데 대중적인 집회말고 또 다른 ‘택’이 있었다. 컨벤션센터 진입투쟁이었는데 나도 여기로 가게 되었다. 애초에 듣기로는 한국투쟁단, ‘비아 캄페시나’, 학생 등 약 50여명이 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검문에 걸려 못 들어왔고 ‘비아캄페시나’ 간부 2-3인을 제외하고는 전부 한국투쟁단이었다. 물론 한국투쟁단 일부도 진입에 성공하지 못했다. 전체 15명 정도. 우리는 컨벤션센타 앞에서 약 5분간 구호를 외치다가 옆 주차장으로 경찰에 의해 떠밀려 그곳에서 약 두어 시간 구호를 외치고 투쟁가를 부르면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와중에 나는 안경과 모자를 잃어버렸고 어떤 농민 간부는 신발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투쟁은 예상과는 달리 바리케이드 밖에서의 투쟁이 훨씬 역동적이고 아슬아슬했다고 한다. 철제 바리케이드를 여성참가자들이 커터기로 자르고, 전농이 밤을 세워 꼰 두꺼운 동아줄로 바리케이드를 힘을 합쳐 넘어뜨리고, 경찰과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에 들어가고...
14일 WTO 각료회의는 아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결렬되었고 그 이후 이경해씨는 칸쿤을 떠나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치며
이번 칸쿤 WTO 협상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거대 곡물메이저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과 EU 등 선진제국들은 자신의 국내시장은 유형, 무형으로 보호하고 개도국의 무역과 투자에 대해서는 자유화를 원하는 중상주의적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거대 농업기업을 가진 일부 개도국은 농업에서의 자유화를 주장한 반면 투자 경쟁정책 등 새로운 이슈에 있어서는 제국주의적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보수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최빈개도국들은 무망하게도 ‘개발’라운드라는 허명에 기대 선진제국에게 이러저러한 개발이슈를 제기하였다. 그 결과는 WTO 협상의 결렬이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국가간 일국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각 국 나름의 대응의 결과다.
그러나 협상 결렬이 개도국과, 소농을 비롯한 전세계 민중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보수주의적 반대를 넘어 ‘밑으로부터의 세계화’, ‘대안적 세계화’를 추구해야 할 시점이다.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전 세계에 걸쳐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한 이견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자들은 복종과 냉소주의, 어리석음, 전쟁, 파괴, 그리고 죽음 등을 세계화하려 합니다. 아래 있는 사람들은 저항과 희망, 창조성, 지성, 상상력, 삶, 추억,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의 건설을 세계화하려 합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이경해씨의 죽음을 딛고 ‘저항과 희망을 세계화할’ 책임은 이번 칸쿤 투쟁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투쟁의 선봉으로 떠오른 한국의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에도 적지 않을 것이다.PSSP
멕시코 칸쿤 공항 입국심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하얀 뙤약볕과 한국에서 몇 년만에 있을까 말까 하는 후텁지근한 더위가 우릴 맞이할 뿐이었다. WTO(세계무역기구) 회의를 무산시키러 온 시위대를 너무 홀대(?)하는 것은 아닌가? 캐나다 입국 때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우리는 칸쿤에 들어오기 전 비행기 티켓 문제로 캐나다에서 며칠을 보내야 했는데, 캐나다 밴쿠버 공항을 들어갈 때 입국 심사대를 거쳐 공항 이민국까지 가서 서너 시간의 혹독한 심문을 받았던 것이다. 당연히도 멕시코 들어가기는 ‘장난이 아닐 것’이라며 이 궁리 저 궁리 머리를 쥐어짜며 회의를 했는데 그 작전회의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려 허망하기까지 했다.
캐나다 입국과정이 그렇게 까다로웠던 것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테러용의자나 반WTO 시위대를 색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캐나다를 통한 미국 밀입국 용의자를 걸러내기 차원이었던 것임을 현지 가이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민국 공무원에 의하면 미국의 압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잘사는 미국 식민지’ 캐나다는 따를 수밖에. 잘 사는 나라들에서는 자기네끼리 잘살겠노라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입국을 기를 쓰고 막고, 못사는 나라에서는 누구든 ‘어서옵쇼’ 한다.
‘자본 이동의 자유화’를 소리 높여 외치는 선진제국들은 ‘노동력 이동의 자유화’는 기를 쓰고 막는다. 현재의 WTO 협상의제(‘도하개발 아젠다’) 중 하나인 서비스 협상에서 대부분의 개도국들은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Mode 4)을 요구하고 있는데 선진제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짐을 풀고 WTO 긱료회의가 열리는 호텔지역의 반대편(민중포럼과 시위는 주로 여기에서 진행되었다) 지역의 한 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사회운동조직 총회 말미에 참석하여 저번 세계사회포럼에서 안면을 튼 세계 소농조직 비아 캄페시나(농민의 길)의 몇몇 활동가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예상과는 달리 너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민중포럼이 잘 조직이 안되고 있다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이후 특별한 일정이 없어 시내구경을 갔다. 시내 곳곳에서는 아메리카 전역에서 온 백인 관광객을 상대로 길거리를 배회하면서 원색 뜨개질 제품들을 팔고 있는 조그맣고 까무잡잡한 마야 원주민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계적인 휴양지 칸쿤의 주인은 멕시코인들이 아니었다. 호텔과 같은 휴양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메리카 전역에서 몰려든 부자 백인들이었다. 백인 남성들은 호텔 안에서나 밖에서나 대개 웃옷을 벗고 벌겋게 태운 상체를 드러내고 다녔다.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로 멕시코 인구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메스티조들은 언제나 근무복을 입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일 뿐이었다. 나프타 반대 시위에도 참여했다는 캐나다 밴쿠버 호텔 한 노동자가 ‘칸쿤은 어글리 아메리카(추한 아메리카)’라 한 말이 생각이 났다. 부자 백인들이나 멕시코인들이나 다 길가에 축 늘어진 야자수처럼 생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자 백인들은 무료해 보였고 멕시코 서비스 노동자들은 주눅 들고 지쳐 보였다. 방콕의 관광지와 호텔시설이 태국인의 것이 아닌 것처럼 120개나 되는 세계 유수의 호텔이 밀집해 있는 칸쿤은 멕시코인들의 휴양지는 아니었다.
WTO 공식 회의장은 호텔지역 안에 있었는데 우리가 도착한 날부터 2중 3중의 철제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있었다. 철제 바리케이드가 회의장 주변 사방을 둘러 쳐진 것은 ‘시애틀투쟁’ 이후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미주자유무역협정(ALCA 또는 FTAA) 정상회의 때부터였던 것 같다. 회의장소로 록키 산맥 안이나 카타르 도하 같은 섬 등 시위대의 접근을 차단하기에 용이한 곳으로 선정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누구 말대로 세계의 모든 것을 소유한 강대국과 초국적 자본들이 2중 3중의 철제 바리케이드와 수만의 경찰력에 의지해서 민중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한 채 외딴 곳에서 회의를 하는 것이야말로 세계화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회의장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한 단면인 ‘담장 도시’를 실물로 보여주고 있었다.
‘비아 캄페시나’
8일부터 ‘비아 캄페시나’ 주최의 농업관련 사전 토론회가 있었다. 우리는 개막식만 참여하였다. 오후에 반전을 주제로 한 사회운동총회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번 칸쿤 투쟁의 주력대오 ‘비아 캄페시나’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올해 초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였다. 운 좋게도 국제 소농 원주민 운동 조직인 ‘비아 캄페시나’ 초청을 받은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간부 도우미로 부문별 사전대회의 하나인 농민대회부터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포럼기간 동안 우리같이 ‘비아 캄페시나’의 공식 초청을 받은 200여명의 각 국 농민운동 대표자들은 두 수도원에서 지냈고, 브라질의 MST(땅없는 농업노동자들)를 비롯하여 중남미의 5천여 농민들은 커다란 체육관에서 숙식을 하였다. 이 ‘풍찬노숙(風餐露宿)’을 위해 어떤 칠레농민들은 3-4일간 걸려 버스를 타고 왔다고 했다. 이들 모두는 불편한 잠자리와 변변치 못한 식사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체육관 등에서 각종 토론회와 문화행사를 풍성하게 개최하였고, 라틴아메리카 자유무역지대(ALCA)와 이라크전쟁 반대시위의 주력대오였다.
이들은 언제나 농업의 상징색인 녹색 모자를 쓰고 녹색 스카프를 두르고 다녔다. 최대규모의 조직화된 대오였다. 지금은 정권의 성격이 변질되어 가고 있지만 에콰도르와 브라질에서 이들 소농들에 힘입어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진보정권이 들어섰고, 볼리비아 선거에서는 반미 반신자유주의 기치를 내건 농민이 직접 출마해 선전했던 터라 사기도 충만해 있었다.
나는 포럼 기간 중에 토지점거에 성공해 그럴듯한 공동체를 건설해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MST 정착촌에 가서 약 1,500여명이나 되는 이들과 함께 춤과 음악이 곁들여진 풍성한 야외 식사를 할 기회를 가졌다. 거기에는 이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자유, 평등, 협동, 우애의 미래사회가 이미 있었다. 포럼이 끝난 뒤에는 토지점거를 준비하고 있는 열악하디 열악한 대규모 비닐 판자촌을 돌아볼 기회를 가지기도 하였는데 이들 역시 토지를 점거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꾸리게 될 앞날에 대한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이번 칸쿤투쟁의 주력도 ‘비아 캄페시나’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허름한 체육관처럼 보이는 지역 문화회관에서 사전대회를 열었고, 집단 노숙을 하고 공동으로 식사를 해결하였으며, 녹색 모자를 쓰고 녹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이들은 세계적인 곡물 메이져와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WTO에 대항하여, 그리고 미국-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동지배에 맞서 토지에 대한 권리, 식량주권, 식품안전성, 유전자조작 반대, 생명특허에 대한 반대 등을 내걸고 싸우고 있었다. 농업협상이 주된 의제였고, 이경해 열사의 죽음이 있었긴 하였지만 농민이 주력인 한국참가단과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의 소농 원주민이 없었다면 칸쿤투쟁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운동에서의 ‘비아 캄페시나’의 주도성은 내년 초 인도에서 열리는 세계사회포럼에서도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비아 캄페시나’ 지도자 중의 하나인 온두라스 농민 대표에 의하면, 인도에는 ‘비아 캄페시나’에 가맹해 있는 한 농민조직이 있는데 그 조직규모가 천만 명에 이른다니까 말이다.
그런데 ‘비아 캄페시나’ 운동은 자본주의가 채 발전하지 않은 나라나 지역의, 아직 소멸하지 않은 소농들의 허망한 몸부림일까? 최소한 멕시코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멕시코의 한 인권변호사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르길, 소농 운동이자 원주민 운동인 사파티스타 운동을 ‘우리 멕시코 시민 사회의 90%가 지지하고 있다, 노사협력체제에 길들여진 노조는 부패해 있다, 제도혁명당에서 갈라져 나온 인사들과 구 공산당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주혁명당도 가짜 좌파다, 그러나 사파티스타 운동은 전진하고 있다’. 멕시코 운동세력의 주된 구호가 ‘사파타 비베 비베(사파타 만세)’인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세계전역을 충분히 자본주의화하지 못한 채 위기에 빠져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요하고 있는 세계자본주의의 강력한 비판자로 바야흐로 국제 소농운동 조직 ‘비아 캄페시나’가 부상하고 있다. 여기에 이경해 열사의 죽음을 부여안은 한국의 농민운동이 함께 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겠다.
멕시칸 타임
사회운동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황실이 조직위에서 파악한 장소인 ‘엑스 팔랑께’(‘전 유적지’)를 가는데 한참 헤맸다. 이 택시 운전사는 여기라 했는데 가보니 아니었고 저 택시 운전사는 저기라 했는데 가보니 이번에도 아니었다. 누가 제 3의 장소를 알려주었다.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헤맬 수 없다며 한 두 사람만 가서 확실히 확인한 후에 움직이자고 했다. 대표로 뽑혀서 ‘엑스 팔랑께’로 갔더니 허름한 체육관 같은 데인데 인기척이 없었다. 또 잘못 왔구나 하고 허탈해 하고 있는데 벨기에 청년 하나도 그 체육관을 기웃기웃하고 있었다. 그 친구 왈 이곳이 틀림이 없단다. 그리고 4시에 열릴 예정이던 회의가 5시에 열리는 것으로 바뀌었단다. 시계를 보니 5시 20분. 그럼 왜 사람들이 없냐고 하니, 여기 사람들 30분 늦는 것은 보통이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잔다. 과연 약 10분 뒤에 주최측이 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에 유적지(엑스 빨랑께)인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란다. 부실한 조직위 같으니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시간도 늦고 통역도 없고 대중적인 토론회가 아니니 오지 않는 게 좋다고 연락을 했다. 회의가 간단히 끝나 주최측의 한사람으로 보이는 이에게 다가가 왜 이렇게 시간이 안 지켜 지냐고 넌지시 따졌더니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이다. 같은 장소에서 열린 민중포럼 전야제격인 ‘칸쿤 참가자들 인사나누기’ 프로그램까지 참가하고 숙소에 들어왔다.
멕시코에서 행사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1시간 가량은 늦어졌다. 사회운동총회가 그랬고 농민행사가 그랬다. 이 멕시코 늑장부리기 문화에 대해 네덜란드 사람하고 같이 죽이 맞아 흉까지 본 적이 있었다. 시간엄수가 사회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한 모습이라고 결론을 짓긴 했지만 말이다. 한국에 와서 멕시코 전문가 이성형 선생을 만나서 들은 바에 의하면 멕시코에서 파티나 집 초대에 응할 때는 약 45분 정도 늦게 가야 예의란다. 주최측에 준비 시간을 주어야 한다나.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문화는 미국 등 몇 나라뿐이란다. 그러고 보니 브라질 사회포럼도 비슷했던 것 같다.
민중포럼
9일은 ‘세계화에 대한 포럼’에 월든 벨로, 반다나 쉬바, 마드 벌로 등 한국에도 알려진 유명인사들이 나온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엘 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장소를 찾아가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숙소에서 걸어가도 될 정도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렸는데 호텔 직원, 거리의 칸쿤 시민들이 잘못 알려주어서 반대편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포럼 장소를 알게 되어 다시 되돌아가려는데 학생 시위대가 바리케이드에서 경찰하고 대치하고 있다는 이유로 10분이면 갈 거리를 약 1시간 동안 빙 둘러서 버스를 타고 갔다. 설상가상인 것은 거의 다 갈 지점에서 교통통제를 한다고 버스를 내려 걸어가란다. 35도가 넘는 더위 속을 약 40분간을 걸었다. 캐나다 마드 벌로 등의 물 사유화에 관한 이야기 등을 듣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는 중간에 연사 마드 벌로를 인터뷰했고, 가족농 보호운동을 하고 생태 농업을 지향하면서 브라질 MST 등 비아 캄페시나와 연대하는 미국 ‘푸드 퍼스트’(식량 제일주의)의 공동 집행위원장 미탈을 인터뷰하였다. 미탈은 이번 칸쿤회의는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미국과 EU가 보조금 삭감 등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개도국들이 격앙되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탈의 예상은 14일 현실로 드러났다.
11일 오전에는 민주노총이 대거 참가한 ‘남반구노조연대회의’ 주최 노동관련 토론회가 있었고, 오후에는 내가 발제자의 한 사람으로 나선 ‘전쟁과 무역’ 포럼이 있었다. 한국 참가단들은 이경해씨가 돌아가신 10일 이후로는 텐트를 치고 매일 촛불 집회를 하느라고 포럼에 거의 참가를 하지 못했다. 꼭 필요한 곳에만 갔고, 내가 발제한 ‘전쟁과 무역’ 포럼은 나 혼자만 참석하였다.
내 발제는 매우 딱딱하게 진행되었다. 사회자가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발제 전에 이경해 씨에 대한 묵념을 1분간 진행하여 회의장이 숙연해 진 데다, 영어가 신통치 않아 남들이 하듯이 즉석에서 청중과 대화하듯이 발제를 한 게 아니라 준비된 긴 발제문을 죽 읽어가니 회의장 안이 더욱 고요해졌다. ‘무장한 세계화’와 북핵위기를 이론적 역사적으로 접근한 것이어서 다른 발제자들의 발제들과는 달리 내용도 무거웠다. 애초부터 발제를 잘 하기는 힘들었지만 어떻든 좀 실망해서 회의장을 그냥 빠져나오려니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발제문을 달란다. 아휴 고마워라! 그리고 멕시코 반전단체 출신 세 사람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 단체에 와서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했다. 자신이 없기도 하고 텐트로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메일만 교환하고 그냥 돌아왔다.
한국참가자들이 많은 포럼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일부가 포럼에서의 토론들이 원론적이라 평가를 한다. 내 의견도 동일하다. 그래서 세계사회포럼 같은 데를 가보면 토론장보다는 바깥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다. 각국에서의 투쟁경험들, 투쟁에서의 쟁점들이 교류되고 논의가 되면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사람들이 토론에 진지하게 임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언어문제도 있다.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언제나 생기는 문제인 통역이 매끄럽게 처리되는 회의가 별로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언어적으로 고립된 한국 사람들에겐 통역문제는 특히 심각하다.
이경해씨 그리고 투쟁
10일은 WTO 공식회의 개막에 맞춰 농민시위가 있었다. 한국참가단 모두는 시위에 참가하였다. 농민들은 WTO해체를 상징하는 상여를 메고 갔다. 그리고 바리케이드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이경해 열사의 자결이 있었다. 농민대오를 제외한 참가자들은 이경해씨가 온 줄도 몰랐다가 좀 당황했고 설마 돌아가시기까지 하겠는가 했는데 진짜 돌아가셨다. 이경해씨가 지난 3월 제네바에서 24일간 단식하면서 뿌린 다음과 같은 글이 독립미디어센터 등을 통해 공개되면서 그는 칸쿤투쟁의 중심 인물이 되어갔다.
이제 진실을 말하라, 그리고 농업을 WTO에서 제외시켜라
나는 56세, 한국에서 온 농민이며, 젊은 시절 희망을 가지고 동료들과 농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보자 노력하였던, 그러나 결국 실패만을 거듭한 많은 농촌지도자중 하나이다.
우리는 우루과이라운드가 끝나고 곧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더 이상 우리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우리는 나약하게도 수백년 대대로 살아왔던 우리의 고향 농촌이 큰 파도로 붕괴되는 것을 그냥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적극적으로 그 큰 파도의 근본과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자 하였다.
(․․․)
일찍이 농사짓기를 포기한 농민들은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였고 이러한 악순환을 벗어나고자 끝까지 노력했던 농민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부채로 도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개중에 운이 좋은 사람들은 더 갈 수 있지만 종래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나는 하룻밤 새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나버린 친구의 날고 오래된 빈집을 돌아보고 그저 돌아오기만 바랄 뿐 어찌할 수 없었다. 한번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비관,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집에 달려간 적이 있었지만 역시 그 부인의 울부짖음 소리만 들을 뿐 어찌할 수 없었다. 당신이라면 어떤 기분이었겠는가?
(․․․)
나는 지금, 인류는 지금 극소수 강대국과 그 대리인인 세계무역기구(WTO)와 이를 돕는 국제기금 그리고 다국적 기업의 상업적 로비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반인류적이고 농민말살적인, 반환경적이고, 비민주적인 세계화의 위험에 빠져있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즉시 이를 중단시켜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 허구적인 신자유주위가 세계 각지의 다양한 농업을 말살시킬 것이며, 이로써 모든 인류에게 재앙이 초래될 수도 있음을.
나는 단호히 말하건대, 우루과이라운드는 몇몇 야망에 찬 정치집단들이 다국적 기업과 외눈박이 학자연하는 자들과 동조하여 자기들의 골치 아픈 농업문제를 다른 나라에 떠넘긴 한 판 사기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진실을 말하라. 그리고 원점으로 돌아가 농업을 WTO에서 제외시켜라.
10일 병원에서의 촛불추모를 시작으로 매일 촛불집회가 계속되었다. 10일 저녁 ‘비아 캄페시나’가 머물고 있는 체육관에서의 마야 원주민들 주도로 진행된 긴 미사, 11일 집회에서 사회자의 ‘평화를 갈구한다’는 발언에 ‘현재 세계에 평화는 없다’는 인도네시아 농민대표 사라기씨의 일갈, 12일 세찬 비바람 속에서 진행된 촛불 집회, ‘비아 캄페시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온두라스 농민대표 라파엘의 ‘이경해 동지는 WTO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발언, 밤새 내리는 빗 속 텐트에서 들이치는 비를 피해가면서 잔 잠 등이 기억이 남는다. 집회는 공공연맹 김건태 동지의 기타 반주와 한국 참가단의 장중한 투쟁의 노래, ‘삶이 보이는 창’의 송경동 동지의 추모시가 어우러져 작은 문화제 모습을 띠었다. 다음은 집회에서 낭송된 송경동씨의 추모시들 중 하나다.
당신은 야속한 사람
- 이경해 열사를 추모하며(9/12 칸쿤에서)
송경동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칸쿤에 나는 새를
칸쿤에 피는 꽃을
칸쿤에 부는 바람을
칸쿤에 내리는 비를
나무를 기둥 삼아 만든 집 지붕에
떨어진 씨앗이 또 나무가 되어
지붕에 나무를 키우는 자연 속의 집들을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망치와 정으로 콘크리트를 깨고 있는 멕시코의 어린 노동자를
온 몸에 혁대를 걸고 와
하나에 10 페소를 말하며
짠한 미소를 짓는 노점의 여인을
아,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죽고 일제히 빛을 터뜨리는
카메라 후레쉬 불빛을
운전기사도 길 가던 청년도
호객을 하는 사내도
모두 꼬레아를 물으며
엄지손가락을 들고 눈물짓는 것을
아,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그 철책에서
오른 손을 들어 빼어든
칼로 당신의 왼편 가슴을 찌를 때
찌르며 툭 떨어질 때
세계의 모든 양심과
세계의 모든 생명들이
또 다시 한번 치를 떨고
이를 갈고 눈물을 떨구었다는 것을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
권력은 민중에게
사랑은 연인에게
자연은 자연에게
되․돌․려․달․라․는
당․신․의․소․망
한국투쟁단은 계속적인 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고 한국어는 집회 공식언어가 되었다. 이경해씨가 돌아가신 바리케이드 앞에는 텐트가 설치되어 각 국 활동가들의 집결지(‘캠프 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가 되었다. ‘캠프 리’에는 여기저기서 갖고 온 물과 음식이 넘쳐났다. 이경해씨가 돌아가신 현장에는 촛불과 꽃, 그리고 추모글과 플래카드로 뒤덥혔는데, 그 중에는 환경주의자라 알려진 칸쿤 시장이 보낸 꽃다발과 위로의 말도 있었다.
11일에는 ‘캠프 리’로 언론이 쇄도하였다. 오전에는 통역이 없어서 내가 언론을 상대했는데 10군데도 넘은 것으로 기억한다. 언론은 자결 이유, 한국농민의 처한 상황, 가족 사항 등을 주로 물었는데 서구언론들은 이경해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심지어는 한국참가단이 이경해씨의 계획을 사전에 알았느냐, 또 다른 자살 가능성은 없느냐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질문들도 있었다. 반면 칸쿤투쟁에 참여한 각 국 활동가들은 한국 사람만 보면 위로의 말을 전하고, 눈인사를 하거나 어깨를 쓰다듬거나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우리 모두는 상주 아닌 상주가 되었다.
13일에는 또다시 커다란 집회가 있었다. 그런데 대중적인 집회말고 또 다른 ‘택’이 있었다. 컨벤션센터 진입투쟁이었는데 나도 여기로 가게 되었다. 애초에 듣기로는 한국투쟁단, ‘비아 캄페시나’, 학생 등 약 50여명이 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검문에 걸려 못 들어왔고 ‘비아캄페시나’ 간부 2-3인을 제외하고는 전부 한국투쟁단이었다. 물론 한국투쟁단 일부도 진입에 성공하지 못했다. 전체 15명 정도. 우리는 컨벤션센타 앞에서 약 5분간 구호를 외치다가 옆 주차장으로 경찰에 의해 떠밀려 그곳에서 약 두어 시간 구호를 외치고 투쟁가를 부르면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와중에 나는 안경과 모자를 잃어버렸고 어떤 농민 간부는 신발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투쟁은 예상과는 달리 바리케이드 밖에서의 투쟁이 훨씬 역동적이고 아슬아슬했다고 한다. 철제 바리케이드를 여성참가자들이 커터기로 자르고, 전농이 밤을 세워 꼰 두꺼운 동아줄로 바리케이드를 힘을 합쳐 넘어뜨리고, 경찰과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에 들어가고...
14일 WTO 각료회의는 아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결렬되었고 그 이후 이경해씨는 칸쿤을 떠나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치며
이번 칸쿤 WTO 협상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거대 곡물메이저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과 EU 등 선진제국들은 자신의 국내시장은 유형, 무형으로 보호하고 개도국의 무역과 투자에 대해서는 자유화를 원하는 중상주의적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거대 농업기업을 가진 일부 개도국은 농업에서의 자유화를 주장한 반면 투자 경쟁정책 등 새로운 이슈에 있어서는 제국주의적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보수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최빈개도국들은 무망하게도 ‘개발’라운드라는 허명에 기대 선진제국에게 이러저러한 개발이슈를 제기하였다. 그 결과는 WTO 협상의 결렬이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국가간 일국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각 국 나름의 대응의 결과다.
그러나 협상 결렬이 개도국과, 소농을 비롯한 전세계 민중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보수주의적 반대를 넘어 ‘밑으로부터의 세계화’, ‘대안적 세계화’를 추구해야 할 시점이다.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전 세계에 걸쳐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한 이견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자들은 복종과 냉소주의, 어리석음, 전쟁, 파괴, 그리고 죽음 등을 세계화하려 합니다. 아래 있는 사람들은 저항과 희망, 창조성, 지성, 상상력, 삶, 추억,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의 건설을 세계화하려 합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이경해씨의 죽음을 딛고 ‘저항과 희망을 세계화할’ 책임은 이번 칸쿤 투쟁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투쟁의 선봉으로 떠오른 한국의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에도 적지 않을 것이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