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10월 26일을 잊을 수가 없다. 이용석 동지가 분신했던 날 말이다. 갑자기 “비정규직 차별 철폐하라!”라는 구호가 들렸고, 뒤이어 주변 사람들의 “그러지 마세요!”라는 절규가 들렸다. 나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울고만 있었다. 그저 넋이 나간 채로 서있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직 내 눈만이 마치 촬영 버튼이 눌려있는 카메라처럼 그 장면을 담아내고 있었다.
난 아직 그 날의 경험을 풀어낼 언어와 행동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먹먹함이 시시때때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건 꼭 죄지은 사람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는 듯한 격한 감정이기도 하다. 감히 그 분과 얼굴 맞대고 함께 살아온 다른 동지들의 마음에 비할까마는, 나 또한 쉽게 벗어버리지 못할 그런 짐을 마음에 얹은 것이긴 하다.
그 때부터 그리 길지 않은 기간동안은 곳곳에서 술렁거림이 있었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세 명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항거한 상황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들의 항거는 노동자들의 처절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어디 노동자들뿐인가. 이제 말하기조차 식상해져버린 이야기들이 주변에 널렸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아이 셋을 베란다 창으로 내던지고 자신도 투신한 한 어머니의 이야기. 그 가슴 아프고, 기막힌 이야기가 식상해져버리는 세상이다. 이 땅 민중의 삶에 무엇이 남았을까? 불안한 삶, 절망에 내몰린 삶, 벼랑 끝에 내몰린 삶, 죽음으로 내몰리는 삶... ‘삶’이라는 말이 불안, 절망, 벼랑, 파탄, 죽음... 이런 단어들로 설명되어야 하는 말이었던가.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죽음은 절박함이었고, 비참함이었고, 분노였다. 더 내어놓을 것도 없는 삶인데, 정권은 노동이 더 유연해져야 한다고 하고 나라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한다고 하며, 강성노조라 매도하여 벼랑 끝에 선 생존을 지키려는 싸움마저 말아야한다니, 그럼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민주화된 시대에 자살로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돌아가신 노동자들에 대한 모욕이고, 민중 전체에 대한 모욕이다. 도대체 삶을 버리고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 ‘대화와 타협’을 하면 뭐라도 줄 생각이 있었단 말인가? 노동자들의 죽음은 차라리 ‘인간답게 살겠다’는 의지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삶에서 강요되는 것이라곤 밑바닥을 향한 경쟁밖에 없는 삶을 인간의 삶이라 할까? 노동하고 생산하는 사람임에도 돈 가진 한 줌의 사람들에게 농락 당하는 삶, 인간의 삶을 지키기 위한 싸움조차 온갖 법과 물리력으로 봉쇄하며 기본적인 권리조차 잊고 살라는 강요가 난무하는 삶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거리의 투쟁들이 있었다. 더 이상 죽을 수 없기에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무수히 맞았다. 곤봉과 방패가 날아다녔고, 삼면을 검은 전경들에 둘러싸이고, 한 구석에 몰려 무수히 맞았다. 신고된 차선보다 한 차선 더 나갔다는 것이 우리가 맞은 이유였다. 우리의 삶에서 희망과 내일을 빼앗아간 사람들이 우리가 차선 하나 더 차지했다고 폭력을 휘둘렀다. 거리를 막아 교통혼잡을 야기하고 많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준다는 것이 우리가 맞은 이유였다. 그들이 말하는 ‘많은 시민’ 중에 우리는 없었다. 그 때 그 막히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또한 불안한 내일에 종종 걸음으로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민중이고 우리도 마찬가지건만, 그들은 우리와 시민 사이를 차단했다. 우리와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단지 그 순간에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투쟁에 함께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리고 우리가 집회를 하는 이유 중에는 이 차이를 넘어설 수 있는 만남과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가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들은 무서웠으리라. 신자유주의가 약속한 미래가 민중에게는 결코 장밋빛이 아니라는 진실이 드러날까봐, 그리고 민중들의 분노가 자신들이 관리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할까봐. 자신들의 무능과 민중에 대한 기만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를 고립시켰고 시민과 분리시켰으며, 그 순간 우리는 시민이 아니었다. 그저 몰아놓고 무자비하게 패도 되는 그런 존재였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집회 방송차보다 더 성능 좋은 방송차를 동원한 경찰은 우리의 집회가 ‘불법 시위’라고 선동하며 우리의 요구가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전에 나오는 방송 한 마디, “시민 여러분, 노동자들의 불법 집회를 곧 공권력이 해산시킬 것이니 시민들께서는 안전한 곳으로 피하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패려고 시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기까지... 129일을 35미터 고공 크레인 위에서 절규해도 누구 하나 쳐다보지 않았는데, 더 이상 살수가 없다고 그리 수많은 노동자, 농민, 서민들이 절규해도 정부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는데, 그래서 거리로 나선 것이 그리 잘못이었나 보다. 더 이상 맞을 수가 없어서, 고립되어 우리의 요구조차 발언하지 못하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어서 각목이 나왔고, 돌이 나왔다. 11월 9일에는 화염병도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폭도’로 매도당하고 있다.
10월 말, 11월 초 내가 거리에서, 그리고 나의 일상에서 느꼈던 것은 두려움. 우선은 맞는 게 너무 두려웠고, 그리고 이렇게 고립되어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아마도 무엇이든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절박함과 그러면 나는 또 수많은 활동가들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답답함이 내 두려움의 원인이었지 싶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도 나에게 해명되지 않았고, 여전히 나는 무섭다. 하지만 나 홀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조급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닐 거다. 나와 내 옆의 동지들이 함께, 그리고 오래 가야할 고통스러운 길이겠지.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길...PSSP
난 아직 그 날의 경험을 풀어낼 언어와 행동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먹먹함이 시시때때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건 꼭 죄지은 사람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는 듯한 격한 감정이기도 하다. 감히 그 분과 얼굴 맞대고 함께 살아온 다른 동지들의 마음에 비할까마는, 나 또한 쉽게 벗어버리지 못할 그런 짐을 마음에 얹은 것이긴 하다.
그 때부터 그리 길지 않은 기간동안은 곳곳에서 술렁거림이 있었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세 명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항거한 상황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들의 항거는 노동자들의 처절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어디 노동자들뿐인가. 이제 말하기조차 식상해져버린 이야기들이 주변에 널렸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아이 셋을 베란다 창으로 내던지고 자신도 투신한 한 어머니의 이야기. 그 가슴 아프고, 기막힌 이야기가 식상해져버리는 세상이다. 이 땅 민중의 삶에 무엇이 남았을까? 불안한 삶, 절망에 내몰린 삶, 벼랑 끝에 내몰린 삶, 죽음으로 내몰리는 삶... ‘삶’이라는 말이 불안, 절망, 벼랑, 파탄, 죽음... 이런 단어들로 설명되어야 하는 말이었던가.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죽음은 절박함이었고, 비참함이었고, 분노였다. 더 내어놓을 것도 없는 삶인데, 정권은 노동이 더 유연해져야 한다고 하고 나라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한다고 하며, 강성노조라 매도하여 벼랑 끝에 선 생존을 지키려는 싸움마저 말아야한다니, 그럼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민주화된 시대에 자살로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돌아가신 노동자들에 대한 모욕이고, 민중 전체에 대한 모욕이다. 도대체 삶을 버리고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 ‘대화와 타협’을 하면 뭐라도 줄 생각이 있었단 말인가? 노동자들의 죽음은 차라리 ‘인간답게 살겠다’는 의지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삶에서 강요되는 것이라곤 밑바닥을 향한 경쟁밖에 없는 삶을 인간의 삶이라 할까? 노동하고 생산하는 사람임에도 돈 가진 한 줌의 사람들에게 농락 당하는 삶, 인간의 삶을 지키기 위한 싸움조차 온갖 법과 물리력으로 봉쇄하며 기본적인 권리조차 잊고 살라는 강요가 난무하는 삶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거리의 투쟁들이 있었다. 더 이상 죽을 수 없기에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무수히 맞았다. 곤봉과 방패가 날아다녔고, 삼면을 검은 전경들에 둘러싸이고, 한 구석에 몰려 무수히 맞았다. 신고된 차선보다 한 차선 더 나갔다는 것이 우리가 맞은 이유였다. 우리의 삶에서 희망과 내일을 빼앗아간 사람들이 우리가 차선 하나 더 차지했다고 폭력을 휘둘렀다. 거리를 막아 교통혼잡을 야기하고 많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준다는 것이 우리가 맞은 이유였다. 그들이 말하는 ‘많은 시민’ 중에 우리는 없었다. 그 때 그 막히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또한 불안한 내일에 종종 걸음으로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민중이고 우리도 마찬가지건만, 그들은 우리와 시민 사이를 차단했다. 우리와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단지 그 순간에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투쟁에 함께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리고 우리가 집회를 하는 이유 중에는 이 차이를 넘어설 수 있는 만남과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가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들은 무서웠으리라. 신자유주의가 약속한 미래가 민중에게는 결코 장밋빛이 아니라는 진실이 드러날까봐, 그리고 민중들의 분노가 자신들이 관리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할까봐. 자신들의 무능과 민중에 대한 기만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를 고립시켰고 시민과 분리시켰으며, 그 순간 우리는 시민이 아니었다. 그저 몰아놓고 무자비하게 패도 되는 그런 존재였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집회 방송차보다 더 성능 좋은 방송차를 동원한 경찰은 우리의 집회가 ‘불법 시위’라고 선동하며 우리의 요구가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전에 나오는 방송 한 마디, “시민 여러분, 노동자들의 불법 집회를 곧 공권력이 해산시킬 것이니 시민들께서는 안전한 곳으로 피하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패려고 시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기까지... 129일을 35미터 고공 크레인 위에서 절규해도 누구 하나 쳐다보지 않았는데, 더 이상 살수가 없다고 그리 수많은 노동자, 농민, 서민들이 절규해도 정부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는데, 그래서 거리로 나선 것이 그리 잘못이었나 보다. 더 이상 맞을 수가 없어서, 고립되어 우리의 요구조차 발언하지 못하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어서 각목이 나왔고, 돌이 나왔다. 11월 9일에는 화염병도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폭도’로 매도당하고 있다.
10월 말, 11월 초 내가 거리에서, 그리고 나의 일상에서 느꼈던 것은 두려움. 우선은 맞는 게 너무 두려웠고, 그리고 이렇게 고립되어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아마도 무엇이든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절박함과 그러면 나는 또 수많은 활동가들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답답함이 내 두려움의 원인이었지 싶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도 나에게 해명되지 않았고, 여전히 나는 무섭다. 하지만 나 홀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조급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닐 거다. 나와 내 옆의 동지들이 함께, 그리고 오래 가야할 고통스러운 길이겠지.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길...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