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42호
탈민족적 공간의 데모스(Demos)
냉전이 종결되고 아메리카 헤게모니 아래서 단극화 된 세계질서가 출현한 이후, 1970년대에 개시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민족국가의 일반화에 기초해 있던 전후 국가간 체계가 더 이상 세계질서를 표현할 수 없도록 만드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동질적인 인민으로 구성된 민족이라는 신화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만큼 민족경계는 삼투되었고, 자본과 인적 자원의 지구적 이동은 “우리”가 “타자”와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강제했다.
하지만 여기서 ‘타자’라는 단일 범주는 다소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자 자체가 하나의 동일한 종류가 아니라는 점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한 편에는, 여권이나 다국적 시민권을 보유하고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일반 시민들의 권리를 명백히 초과하는 특권을 누리는 새로운 종류의 초민족적 귀족으로서의 ‘타자’가 있다(예컨대, 이들은 자유무역지대에서 그 국가의 노동법을 준수하지 않고 노동자와 심지어 ‘하인’을 고용하도록 허용된다). 다른 한 편에는 “불법이주자”(Sans-Papiers)로 낙인찍혀 경찰에 의한 인간사냥과 언제든 추방될 수 있다는 위협 속에 살면서, 법으로부터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참을 수 없는 초과착취와 폭력에 자신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타자’가 있다. 한 때 다소간 민주적이라 믿어졌던 사회들 내로 유사-신분제적 질서가 명백하게 다시 도입된다. 단적으로 말해,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건설할 것인가, 더욱 근본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탈민족적 공간 내에서 민주주의의 정치적 주체로서 ‘데모스’(Demos)란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점점 다급해지고 있다. 일군의 코스모폴리탄적 자유주의의 사상가들은 평등과 자유라는 민주적 이상(ideal)을 다시 한번 보다 확장된 규모에서 제도화할 수 있는 초민족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 이제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문제를 해결해 주기보다는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곤란한 질문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공동체를 소박하게 정의하자면, 그것은 공통된 것(the common)을 구성하여 “우리”라는 동일성(identity)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라는 동일성은 항상 “타자”에 대한 차이를 통해서만 가공되므로,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경계선들(borders)의 다양한 제도화로 나타난다. 이때 공동체의 경계선들이란 지리적인 성격만 갖는 것이 아니라 상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인민의 가슴에 그어지는 ‘내적인 경계선들’은 오히려 후자의 측면에서 조직된다. 종교적, 언어적, 인종적 차이들이 “타자”와 구별되는 “우리”를 생산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등장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며, ‘공동체’와 ‘에스노스’(ethnos: 인종, 문화, 역사적 견지에서 인정되는 하나의 집단) 사이의 관련이 문제로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초민족적 공동체의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중심에서 공동체와 에스노스의 관련이라는 질문을 다시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동체를 에스노스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 있을까? 공동체주의자들(communitarians)은 궁극적으로 이 양자를 분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초민족적 공동체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혹은 심지어 해로운 것으로 본다. 반면, 코스모폴리탄적 자유주의자들은 그 양자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논리적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며, 에스노스에 더 이상 기대지 않은 초민족적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본다.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에스노스가 극단적인 배제와 폭력을 낳는 중심적인 원인이었다면, 에스노스를 특정한 방식으로 극복하는 초민족적 공동체의 건설은 적어도 ‘민주적 정의’를 실현하는데 유리한 조건들을 마련해줄 수 있으리라고 코스모폴리탄주의자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이렇게 선명한 외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주의자들과 코스모폴리탄적 자유주의자들은 은연중에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즉, 에스노스란 결정적으로 민족과 관련되기 때문에, 민족적 수준을 넘어서는 다민족적 공동체의 구성은 에스노스의 극복을 의미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공동체’라는 통념 자체(민족 공동체 뿐 아니라 공동체 일반)가 에스노스와 불가분의 것이라면, 초민족적 공동체 건설이 문화적 특수성들을 파괴할 것이라는 공동체주의자들의 우려는 부질없는 것이 되며, 초민족적 공동체의 건설이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정의를 약속할 것이라는 코스모폴리탄주의자들의 낙관도 근거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면에서, 유럽 시민권과 관련하여 마스트리히트 조약(Maastricht Treaty, 1993)이 달성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날카롭게 지적하듯,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오직 유럽 내의 민족국가에서 이미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유럽의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유럽적 구성(constitution)으로부터 수많은 이주자들을 배제했다. 따라서 초민족적 공동체의 시민권의 실제적 출현과 함께 나타난 것은 에스노스라는 요소의 제거나 몰락이 아니라, 그것의 초민족적 수준으로의 ‘전위’와 그에 따른 제도적 인종주의의 출현이었다. 발리바르는 이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유럽적 아파르트헤이드” 또는 “아파르트헤이드로서의 유럽 시민권”이라 칭한 바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데모스와 에스노스의 관계를 고찰하고, 이를 통해 두 가지 상호연관된 가설을 제시할 것이다. 첫 번째 가설: 데모스와 에스노스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지만, 변증법적인 방식으로는 구별 가능하며, 이 때 데모스는 에스노스의 부정(the negative)이라 정의될 수 있다. 두 번째 가설: 초민족적인 민주적 주권권력의 구성은 동시적인 초민족적 대항권력의 구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1. 민주주의의 역설(The Paradox of Democracy)
「서언: 민주주의 이론과 경계선 문제」라는 글에서 프레데릭 웰런(Frederick G. Whelan)은 민주주의 이론의 근본적인 문제를 논한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 항상 개인들(시민들)로 이루어진 규정된 공동체―인민(a people)―를 참조”하지만, 민주주의의 이론 그 자체는 “민주체(the democratic body) 혹은 시민체(citizenry)”에 관한 만족할 만한 정의를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설’은 데모스가 민주적인 방식으로는 정의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참여적 원칙이나 집단적 의사 결정을 위한 다수결의 원칙 등은 모두 논리적으로 데모스의 존재를 가정하기 때문에, 그 원칙들은 데모스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데에 활용될 수가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역설에 관한 적어도 두 가지의 상이한 답변이 각각 공동체주의와 코스모폴리탄적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발견된다. 나는 전자에 관해서는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를, 그리고 후자에 관해서는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를 고려할 것이다. 먼저 왈저에 관해 간략히 논한 후 하버마스에 관해 좀 더 상세히 논해보도록 하자.
1) 마이클 왈저는 『정의의 영역들』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민주주의의 역설에 이론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는 먼저 “분배적 정의라는 관념은 하나의 한정된 세계를 전제”하며, 분배되어야 할 ‘일차적 사회적 기본재(primary good)’는 다름 아닌 공동체의 성원권(membership)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 같은 일차적 분배의 원칙들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로 직접 나아가지 않고, 대신 질문을 바꿔 ‘공동체의 성원권을 “우리”는 대체 어떤 외부인들에게 부여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러한 대안적 질문은 “타자”의 포함과 배제라는 문제를 결정할 배타적 권리를 가지고 있는 “우리”라는 존재가 항상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리하여 왈저는 곧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회적 기본재로서 성원권은 우리의 이해에 따라 구성된다. 그것의 가치는 우리의 작업과 대화에 의해 확고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원권 분배의 책임자다(우리가 아니면 누가 책임자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사이에서 분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것이다.”
여기서 왈저가 말하는 “우리”란 물론 데모스가 아니라 에스노스다. 비록 그가 데모스라는 통념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에스노스가 데모스의 필연적인 사전조건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그럴듯한 공동체주의의 주장이다. 하지만 왈저가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민족국가들의 불멸성으로 자신의 주장을 발전시킬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대해 쉽게 가할 수 있는 비판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탈민족적 공간 내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더 이상 타당치 않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의제기는 내가 보기에 충분히 비판적이지 못할 것 같다. 그것은 왈저 이론의 ‘합리적 핵심’(즉 공동체와 에스노스 간의 밀접한 내적 관련―우리는 이것이 코스모폴리탄주의자들의 논의를 끊임없이 궁지에 몰아넣을 것이라는 점을 앞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을 놓치고 단지 경험주의적인 반박을 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왈저에게 있어 차라리 문제는 앞서 우리가 공동체주의자들의 입장과 관련하여 지적했듯이 에스노스를 오직 민족국가와만 부당하게 동일시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에스노스가 현존하는 민족국가 이상의 수준에서도 여전히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다. 이는 거꾸로 민족적 수준에서 발견되는 에스노스를 그가 ‘허구적인 것’ 혹은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비록 그것이 물질성과 강제력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기원과 연속성 속에서 자라 나온 ‘실체적인 것’(the substantial)으로 본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사고가 생물학주의의 성격을 띠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유기체주의의 일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2) 반면, 위르겐 하버마스는 ‘전(前)정치적(prepolitical)’인 ‘인종문화’(혹은 단적으로 ‘민속’)에 대립된 ‘정치문화’라는 관념을 가공하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의 역설’을 피하려고 한다. 하버마스는 두 가지 종류의 문화를 구별함으로써 데모스의 사전조건이 반드시 인종적 성격을 지닐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가 말하는 정치문화란 다음과 같다. “한 나라의 정치문화는 그것의 헌정(constitution)을 둘러싸고 결정(crystallize)된다. 각각의 민족적 문화는 헌정적 원칙들에 관한 독특한 해석을 발전시키는데, 이러한 원칙들―예컨대 인민주권(popular sovereignty)과 인권―은 다른 공화주의적 헌정들 안에도 그 나라의 고유한 민족역사의 배경에 따라 동일하게 구현되어 있는 원칙들이다.” 이로부터 ‘민족주의(nationalism)’와 구별되는 하버마스의 “헌정적 애국주의(constitutional patriotism)”의 주장이 따라 나온다. 근대 민족국가들은 세대를 거쳐 상속되는 인종문화를 참조하지 않고는 개인 성원들 간의 충분한 연대를 생산할 수 없었지만, 공동체와 에스노스 간에 필연적인 논리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주장은 세계화가 진전된 오늘날 우리는 인종적 요소에 더 이상 기대지 않은 초민족적 정치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의 통합적 힘은 ‘헌정적 애국주의’로부터 주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역설에 대한 하버마스의 답변은 분명하다. 비록 데모스가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요소들의 간섭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데모스가 본래 에스노스에 의존적인 것은 아니며, 정치문화에 연루된 차이들로 인해 다양한 데모스들이 그 자신의 종별성을 갖게 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는 매우 영리한 주장임에 분명하다. 자유주의자들이 역사와 문화적 맥락들(헤겔이 말하는 ‘인륜’)을 무시하고 개인을 추상화한다는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을 피하면서, 동시에 인종적 요소를 데모스로부터 추방하는 길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의 비판가들이 흔히 지적하는 문제는 헌정적 애국주의가 공동체를 와해시키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강한 사회적 유대(bond)를 생산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하버마스는, “민주적 시민권은, 그 자신이 사람들에 의해 선호되는 생활형태들의 물질적 조건들을 실현하는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한에서만 … 그 통합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한다. 하버마스가 여기서 “선호되는 생활형태들의 물질적 조건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개인적 권리들과 정치참여의 권리들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권리들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장점은 초민족적 공동체란 오직 그것이 민족국가들보다 더 민주적일 경우에만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하버마스에게 있어 진정한 장애물은 성원들 간에 시민적 연대를 어떻게 생성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초민족적 공동체로부터 누구를, 어떤 기준에 의해 비성원으로 배제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나오는 것 같다. 「탈민족적 성좌(星座)와 민주주의의 미래」라는 글에서 하버마스는 지구적 공동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는데, 이는 정확히 자신을 민주적이라고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정치적 공동체란 정의상 성원과 비성원 사이의 특정한 구별을 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에게 있어 세계 시민을 모두 포괄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일종의 형용모순인 셈이다. ‘배제’는 공동체의 통념에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며, 그렇다면 문제는 누군가를 단지 그/녀의 정치문화―즉,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원칙들에 관한 특정한 개인적 해석―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성원으로 배제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하버마스의 성원자격 개념은 너무 엷고 동시에 너무 두텁다. 그것은 너무 엷은데, 왜냐하면 자유주의적 원칙에 대한 해석상의 다양성에 기초한 그 같은 배제의 제도화는 다른 정치문화를 지닌 사람들로 하여금 비정치적인 필요(예컨대 경제적 필요) 때문에 자신의 해석을 변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만큼 두터운 장벽을 쌓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너무 두터운데, 왜냐하면 그 같은 배제의 제도화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데 오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형제도’(미국과 유럽을 비교한다면)나 ‘낙태(abortion)’에 관한 어떤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그 사람을 공동체로부터 배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혹은 어떤 사람의 정치적 해석이 부분적으로 주어진 공동체의 그것과 수렴하지만 부분적으로 달라진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개인은 공동체의 성원인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하버마스가 주장하듯 모든 공동체는 비성원의 배제에 기초해 있다고 한다면, 에스노스와 완전히 분리된 공동체란 있을 수 없다.
사실, 하버마스 자신이 초민족적인 유럽 공동체 건설을 위한 인종문화적 요소를 다시 들여놓고 있다(왈저와 관련해 이미 지적했듯이, 모든 종류의 ‘인종성’이란 허구적이며, 인위적으로 구성되어 결코 존재한 적도 없는 과거를 향해 회고적으로 투사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그것은 바로 유럽 공통언어의 구성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초민족적인 매스 미디어는 이미 작은 규모의 몇몇 국가에서 실행하고 있듯 민족적 교육 체제들이 공통언어의 기초를 마련해주는 한에서만 이러한 다성적 의사소통의 맥락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비록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공통언어란 외국어이겠지만 말이다.” 또 다른 글에서, 그는 이러한 공통언어가 유럽에서는 “우선적인 제 2외국어로서의 영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공통언어를 갖는다는 것이 반드시 공통의 인종문화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언어란 결코 순수한 “의사소통”을 위한 추상적인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고집해야 할 것 같다. 단지 “헌정적 원칙들에 관한 독특한 해석”에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민족의 문학적/비문학적 역사 전체에 연결된 문화적 배경을 얼마간 이해하지 않고 언어를 배울 수는 없는 법이다. 사실 이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하버마스 자신이 언급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씨비타스’(civitas, 시민)에 대비되는 ‘나찌오’(natio, 민족)라는 말의 고대 로마적 사용법에서 유래하는] 어원적 의미는 중세를 거쳐 근대 초기까지 ‘나찌오’와 ‘링구아’(lingua, 언어)가 서로 등가적인 것으로 취급될 때마다 지속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물론 민족언어와 더불어 유럽의 공통언어를 하나 더 배운다는 것은 모든 민족어들을 폐지하고 하나의 유럽어로 통일한다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 나는 하버마스에 반대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 실천적 효과가 의심할 바 없이 공식적 유럽어의 확립일 것이라는 점 또한 진실이다. 이러한 유럽어의 제도화는 비-유럽인들(아랍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등)에 대한 방벽을 유럽주변에 쌓음으로써 유럽을 문화적 요새로 만들 것이며, 또한 “범-유럽적 공론장”에 강력한 언어적 위계질서를 도입할 것이다. 하버마스 자신이 시인하듯, 이러한 공통언어의 형성 없이 범-유럽적 공론장이라는 것이 쉽게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열린 공간을 가장한다고 할지라도, 공론장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간은 인종적인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오늘 피히테의 「독일 민족에게 고함」을 다시 읽는 것은 상당히 도움이 된다.
독일인과 튜톤족의 후손인 다른 민족들 사이의 완전한 대비의 원인은 … 언어의 변화다 … 이는 원래의 언어를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사용한 사람들의 옛 조상이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이 언어가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모든 중요함이 다 들어 있다. 왜냐하면 언어가 사람에 의해 형성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람이 언어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가 초민족적 공동체들의 이론적 모델을 구성하면서 겪는 곤란들은 데모스를 에스노스로부터 완전히 끊어 놓기에 무척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우리가 왈저와 같은 공동체주의적 관점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 절에서 나는 또 다른 자유주의자인 실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의 입장을 고찰하면서, 민주주의의 역설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한 길을 탐색해 볼 것이다.
2. 운동하는 데모스(The Demos in Movements)
「시민권의 전화: 현 유럽의 사례」라는 글에서 벤하비브는 민주주의의 역설을 이중적으로 전위시킨다. 먼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갈등으로, 그리고 두 번째로 자기-구성(self-constitution)이라는 통념에 내재적인 갈등으로. 첫 번째 전위와 관련하여,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경 자유주의자들은 일련의 인권들을 지킬 것을 사전에 약속하게 만들어 주권을 제약하길 원하는 반면, 강경 민주주의자들은 이 같은 권리의 전정치적(prepolitical)인 이해를 거부하고 그 권리들이―특정한 한계 내에서일지라도―주권적 인민에 의한 재협상과 재해석에 열려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는 인권들이나 자유주의적 원칙들이 강경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전정치적인 것으로 고려된다는 점에 주목한다(이 같은 입장은 하버마스의 것과는 선명하게 구별된다―이 점에 관해 곧 재론하겠다). 벤하비브 자신의 생각에 관해 말하자면, 그녀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중적 책임이 정치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모순으로 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모순의 작동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작업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모순은 매개를, 즉 두 대립된 측면이 서로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소를 필요로 한다. 벤하비브에 따르면, 이러한 매개는 다름 아닌 ‘민주적 주권’ 개념 안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두 번째 전위가 나온다. “(자기-입법의) 이러한 과정 내에서 가공되는 것은 자기-통치의 일반법만이 아니다. 이 법에 의해 스스로를 구속하는 공동체는 동시에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스스로를 정의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경계선은 공민적(civic)일 뿐 아니라 영토적(territorial)이다.” 따라서 벤하비브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자기-구성이라는 통념은 항상 자기-입법 뿐 아니라 경계선의 자기-결정이라는 두 가지 본질적 구성요소를 지닌다. 그래서 민주적 주권은 피할 수 없이 자체 내에 자신의 논리적 안티-테제(후자의 측면에서 유래하는)를 포함하게 되며, 이는 곧 배제의 특정한 제도화로 귀결된다. 벤하비브가 공민적 경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컨대 여성, 무산자, 노예들에 대한 내적 배제가 작동하는 경계들이고, 그녀가 영토적 경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외국인과 이주민들에 대한 외적 배제를 실현하는 경계들이다.
그런데 벤하비브에 따르면, 바로 이 경계들이야말로 자유주의적 원칙들(인권의 원칙)이 개입해서 공동체의 성원자격을 “내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종별적인 장소를 이룬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모순이 민주적 주권 개념의 한복판에 삽입된다. 벤하비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주적 주권은 세 가지 허구를 초래한다. 1) 동질적 인민, 2) 자기-폐쇄적이고 토착적인 영토, 그리고 3) 인민이 법을 준수하는 자(subject)일 뿐 아니라 또한 법의 저자(author)이기도 하다는 허구가 그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허구는 명확히 에스노스에 관련되는 반면, 오직 세 번째 허구만이 데모스에 관련된다. 그리고 이 세 번째 허구야말로 첫 두 허구를 탈구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원칙들은 자기-입법이라는 이 세 번째 허구에 스스로를 접목시킴으로써 공동체의 성원자격에 관련된 첫 두 허구를 내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갖게 되는 상(像)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동태적인 것이다. 민주적 주권에 내재적인 배제들(그것이 공민적 배제든 영토적 배제든)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인민의 동일성(identity)이 결코 고정된 것으로 사고되어서는 안되며, 반대로 진행과정 속에서 항상 변형 가능한 것으로 사고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변형을 벤하비브는 “헌정적 자기-창출”이라고 부른다.
벤하비브의 역동적 구성 관념은 민주주의의 역설을 사고하는데 있어 진정한 돌파구를 열어낸다. 하버마스와는 달리, 그녀는 결코 에스노스와 데모스 사이의 최종적 분리를 가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모든 민주적 자기-구성(그것이 민족적 수준에서 일어나든 초민족적 수준에서 일어나든)은 그 양자의 모순을 반드시 포함할 수밖에 없으며 민주주의란 바로 이 같은 모순을 지속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러한 벤하비브의 주장에도 여전히 중대한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이미 살펴봤듯이 그녀는 민주적 주권의 세 번째 허구를 자유주의적 원칙이 개입할 수 있는 장소로 사고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자기-입법의 세 번째 허구로부터 그 내용을 비워내고 그것을 자유주의의 선험적, 초월적 규범 원칙들로 대체할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벤하비브가 또한 세 번째 허구를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이라 부른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결국 세 번째 “허구”를 자유주의적 원칙들로 대체한다면, 억압되는 것은 바로 데모스의 목소리인 셈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미리 주어진 자유주의의 원칙들을 단조롭게 반복하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다. 벤하비브가 이미 지적했듯이, 자유주의의 원칙들이 강경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전정치적인 것으로 거부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이 진정으로 해결되거나 완화되었다기보다는 단지 다른 곳으로 전위되었을 뿐이 아닌가하고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벤하비브가 자유주의의 규범들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하는, 에스노스를 탈구시키는 긍정적 기능을 상실하지 않고,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을 정치적으로 재규정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나의 관점에서,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이 참조하는 이상성(ideality)은 일련의 도덕적이거나 사법적인 규범들이 결코 아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될 때, 이 원칙은 기존의 공동체(이 공동체가 공민적 공동체를 지시하든 영토적 공동체를 지시하든)에 이미 속해 있는 자들의 목소리를 위한 원칙으로 즉시 환원된다. “법 앞에서 만인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사법적 자유주의의 원칙은 평등과 자유의 원칙을 단순한 ‘법’으로 제한하고 온전한 성원으로 인정된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는 조직원칙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벤하비브가 말하는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 안에 끈질기게 남아 있다. ‘인민은 법을 준수하는 자일 뿐 아니라 법의 저자이기도 하다’라고 벤하비브가 말할 때, 그녀가 “인민”이라는 말을 통해 가리키는 것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에스노스에 관련되어 있는 두 가지 허구와 데모스에 관련된 세 번째 허구가 여전히 논리적인 수준에서조차 완전한 방식으로 분리되지 않고 있음이 이러한 모호성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이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가”라는 루소의 유명한 질문―이 질문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역설’의 최초의 정식화라고 볼 수 있으며, 루소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무한한 논리적 순환 속에 빠져든 바 있다―이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의 한 복판에서 다시 출현한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곤란에 직접 맞서는 유일한 길은 데모스를 잠정적으로 공동체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 혹은 공동체의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지시하는 범주로 정의하는 것이다.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이 고려하는 이상성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정식화되어야 한다.
여전히 혹자는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이 비록 사법적 자유주의의 원칙을 참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도덕적 자유주의의 원칙을 참조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가? 벤하비브 자신의 용어로 그것은 “인류 전체로 확장되는 맥락-초월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인 성격을 갖는 인권의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코스모폴리탄적인 도덕 규범들이 내가 위에서 말한 부정적 이상성이라는 것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벤하비브의 도덕적 규범에 대한 강조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녀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타자의 포함(inclusion of the other)’이라는 전략이다(이 점에서 그녀는 명백하게 하버마스의 입장으로 복귀한다). 그리하여 코스모폴리탄적인 도덕적 규범은 일차적으로 공동체의 내부인을 위한 사고와 행위의 지침을 이룬다. 따라서 벤하비브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녀가 여전히 외부인이라기 보다는 내부인의 위치에 서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놀랍지 않다. “우리는 배제된 자들이 배제와 포함의 규칙을 결정하는 사람들 내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이 역설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지속적이고 다면적인 민주적 상호작용을 통해 이 구별을 보다 유연하고 협상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의 구별을 보다 유연하고 협상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의 일차적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벤하비브의 관점에서는 분명히 내부인들이다(그리하여, 왈저의 질문이 되돌아온다: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책임자란 말인가”).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그녀에게 외부인들의 목소리는 포함과 배제의 규칙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들을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따라서 그 규칙들은 단지 어느 정도로까지만 “협상 가능”할 것이다). 정 반대로, 부정적 이상성에 함축된 전략은 타자 자신의 목소리를 강제하는 전략이다(이것이 바로 “노동자들의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의 일이다”라고 마르크스가 말했을 때 그가 또한 염두에 두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정적 이상성은 역사상의 이러저러한 (‘구성적’이라기보다는) ‘봉기적’인 순간들을 반영한다.
하지만, 나의 의도는 ‘누가 정치적 행동의 일차적 주체인가’에 답하는 벤하비브의 입장을 단순히 전도시키는 것에 있지 않다. 진정으로 결정적인 것은 이미 현존하는 공동체의 보편성 내로 ‘타자의 포함’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에 배제된 자들이 가져다주는 차이들을 수용하지 않고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새로운 종류의 보편성을 발명하는 일이다. 물론 이러한 발명은 외부인들이 내부인들과 다양한 연대와 동맹을 형성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배제된 자들의 정치적 행동의 목표는 기존의 공동체에 대한 일방적인 정복(conquest)이 아니라 그것의 해체(deconstructuion)일 수밖에 없게 된다.
데모스와 에스노스는 서로에게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지만, 이들은 변증법적인 방식으로는 구별 가능하며 이 때 데모스는 에스노스의 부정(the negative)이라 정의될 수 있다. 벤하비브는 민주주의의 역설을 과정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되 어떤 궁극적인 이론적 해결책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런 벤하비브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배제와 포함의 구별을 유연하고 협상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배제된 자들이 기존의 보편성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녀의 주장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역설적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법을 쓰거나 다시 써야할 저자는 일차적으로 배제된 자들 자신이라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점에서, 민주주의의 역설은 약화되지 않고 정반대로 강화된다. 왜냐하면 이제 민주적 ‘자기-구성’이라는 개념은 자기 자신의 ‘해체’(‘파괴’는 아니라고 할지라도)라는 지울 수 없는 계기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왈저와 하버마스의 관점에 동시에 맞설 수 있게 된다. 왈저는 분배되어야 할 사회의 일차적 기본재는 공동체의 성원권이라고 주장하고, 하버마스는 스스로를 민주적이라고 이해하는 공동체는 반드시 성원과 비성원의 구별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주의자들과 코스모폴리탄적인 자유주의자들은 공히 시민권을 법적 지위(legal status)의 문제로서만 고려하고 있다. 그들의 논쟁 자체가 억압하고 있는 것은 운동하는 데모스(에스노스로부터 스스로를 역동적으로 차별화시키는 데모스라는 의미뿐 아니라 정치적 운동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는 데모스라는 의미에서)다. 하지만 시민권은 단순하게 분배되어야할 일차적 기본재만으로 규정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개인들에게 부여될 수 있는 법적 지위만으로 규정될 수도 없다. 반대로, 발리바르가 말하듯, 시민권이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이는 ‘의무를 전제하지 않는 권리’로 한나 아렌트는 이를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 불렀고, 자크 데리다는 이를 “해체불가능한 정의”라고 불렀다)를 표현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대중들 자신의 집단적이고 정치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의 차원을 반드시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3. 결론: 대항권력의 초민족화
『민주적 정의』라는 책에서 이안 샤피로(Ian Shapiro)는 훌륭하게 정치(특히 민주적인 정치)는 어떻게 합의(consensus)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어떻게 이견(dissensus)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의 방향전환은 우리가 ‘해체’의 민주주의의 역설을 진정 생산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들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제도화되어야 하는 것은 합의들이라기 보다는 갈등들 자체인 것이다. 이와 같은 갈등의 제도화는 발리바르가 ‘씨빌리테’(civilité)라는 자신의 개념을 통해 지시하고자 하는 것과 이론적 친화성을 갖는다. 정치가 극단적 폭력으로 인해 절대적으로 불가능해지지 않도록 만드는 조건들을 창출하고 유지하기 위한 특별한 종류의 정치로서 씨빌리테의 정치가 결코 본질적으로 ‘평화주의’(pacifism)적이지 않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발리바르는 이렇게 말한다. ““씨빌리테”는 반드시 사회 내에서의 “갈등”과 “적대”의 억압이라는 관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마치 “갈등”과 “적대”가 항상 폭력의 싹이며 그 반대는 아니라는 듯 말이다. 우리가 논할 극단적 폭력의 (대부분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상당부분은 (지구적 규모에서 법과 질서[즉, ‘지구적 통치성’―인용자]를 위한 정책의 구현은 말할 것도 없고) “합의”와 “평화”에 대한 맹목적인 정치적 선호의 결과이다.” 씨빌리테의 정치는 그리하여 갈등의 적절한 작동의 조건들이 무엇인가를 규정하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발리바르는 이러한 갈등의 범주 안에 물리적 힘을 동반하는 갈등을 포함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적 공간이 때때로 대중들의 물리적 힘에 의해 열릴 수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갈등의 동학에 기초한 유일한 종류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민주적 공동체’라는 표현은 형용모순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는데, 왜냐하면 ‘공동체’라는 것은 그것이 다양성을 허용할 때조차 그것들을 제약하는 특정한 동일성(identity)과 정상성(normality)의 제도화(하버마스도 공동체를 동일성에 연관시킨다)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최종분석에서, 정치적 주권 권력의 초민족적 수준에서의 구성은 (그것이 민주적인 것이기 위해서는) 초민족적 대항권력의 구성이 다소간 동일한 정도로 달성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오직 그 때에만, 권력과 대항권력의 긴장이 초민족적 수준에서 제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공론장의 초민족화」라는 글에서 초민족적 사회 운동은 기본적으로 대항권력이기 때문에 “그것의 효율성은 일반 이해(general interest) 속에서 행동하도록 제약될 수 있는 제도화된 주권권력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주장하듯, 권력이 없다면 대항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관점을 전도시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지 않을까? 즉, 주권 권력의 효율성이야말로 대항권력의 성공적인 구성에 근본적으로 의존한다고 말이다. 적어도 이는 후자가 전자에 의존적인 것과 동일한 정도로, 혹은 그 이상으로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프레이저는 ‘일반이해’ 속에서 행동하도록 제약된 특정한 종류의 주권권력(즉 민주적 주권권력)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초민족적인 주권권력이 (심지어는 유럽에서조차)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가 고려한다면, 사실 대항권력의 초민족화를 논하는 것이 약간 이상하게 느껴질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초민족적 주권권력의 부재, 혹은 분산된 성격으로 인해, 다양한 정치적 결정 과정에 개입할 것을 목표로 하는 다면적인 대항권력이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미 잘 규정된 초민족적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면, 오히려 초민족적 대항권력은 그 공동체의 경계 내에 갇히기 쉬울 것이다(과거의 사회운동들이 민족적 공간 내에 갇혔듯이 말이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 잘 규정된 초민족적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초민족적이거나 심지어 초대륙적인 사회운동의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가 여전히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계선의 위를 살아가는 이주민들과 그/녀들의 가족 문제는 최대의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초민족적 주권권력의 구성과 대항권력의 구성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시민권을 초민족화하면서 우리가 그것을 보다 민주적인 것으로 변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초민족적 대항권력 구성의 실패는 곧 초민족적 주권권력의 민주적 개조를 추동할 수 있는 실제적 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은 지배계급(그것이 민족적이든 초민족적이든)의 실천의지(practical will)의 선의와 합리성에 의존하는 길뿐이다. 사실 현재 상황에서 만일 초민족적 주권권력이 구성된다면, 이에 대해 더 많은 통제력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바로 ‘귀족으로서의 타자’, 즉 초민족적 자본가들이 아니겠는가? 사회운동이 결핍되어 있는 상황에서 초민족적 주권권력의 제도화를 강조하는 것은 ‘지구적 통치성’을 확보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시도와 공명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특히 이는 발리바르가 지적하듯 ‘법’과 ‘질서’, ‘평화’와 ‘합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함으로써 더 극단적인 폭력을 불러오는 위험까지 갖는다는 점을 우리가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근대의 역사가 극명하게 보여줬듯이, 대규모의 극단적 폭력이 발발하는 것은 차라리 새로운 종류의 주권권력들이 출현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PSSP
하지만 여기서 ‘타자’라는 단일 범주는 다소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자 자체가 하나의 동일한 종류가 아니라는 점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한 편에는, 여권이나 다국적 시민권을 보유하고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일반 시민들의 권리를 명백히 초과하는 특권을 누리는 새로운 종류의 초민족적 귀족으로서의 ‘타자’가 있다(예컨대, 이들은 자유무역지대에서 그 국가의 노동법을 준수하지 않고 노동자와 심지어 ‘하인’을 고용하도록 허용된다). 다른 한 편에는 “불법이주자”(Sans-Papiers)로 낙인찍혀 경찰에 의한 인간사냥과 언제든 추방될 수 있다는 위협 속에 살면서, 법으로부터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참을 수 없는 초과착취와 폭력에 자신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타자’가 있다. 한 때 다소간 민주적이라 믿어졌던 사회들 내로 유사-신분제적 질서가 명백하게 다시 도입된다. 단적으로 말해,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건설할 것인가, 더욱 근본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탈민족적 공간 내에서 민주주의의 정치적 주체로서 ‘데모스’(Demos)란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점점 다급해지고 있다. 일군의 코스모폴리탄적 자유주의의 사상가들은 평등과 자유라는 민주적 이상(ideal)을 다시 한번 보다 확장된 규모에서 제도화할 수 있는 초민족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 이제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문제를 해결해 주기보다는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곤란한 질문을 우리에게 제기한다.
공동체를 소박하게 정의하자면, 그것은 공통된 것(the common)을 구성하여 “우리”라는 동일성(identity)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라는 동일성은 항상 “타자”에 대한 차이를 통해서만 가공되므로,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경계선들(borders)의 다양한 제도화로 나타난다. 이때 공동체의 경계선들이란 지리적인 성격만 갖는 것이 아니라 상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인민의 가슴에 그어지는 ‘내적인 경계선들’은 오히려 후자의 측면에서 조직된다. 종교적, 언어적, 인종적 차이들이 “타자”와 구별되는 “우리”를 생산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등장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며, ‘공동체’와 ‘에스노스’(ethnos: 인종, 문화, 역사적 견지에서 인정되는 하나의 집단) 사이의 관련이 문제로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초민족적 공동체의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중심에서 공동체와 에스노스의 관련이라는 질문을 다시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동체를 에스노스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 있을까? 공동체주의자들(communitarians)은 궁극적으로 이 양자를 분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초민족적 공동체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혹은 심지어 해로운 것으로 본다. 반면, 코스모폴리탄적 자유주의자들은 그 양자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논리적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며, 에스노스에 더 이상 기대지 않은 초민족적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본다.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에스노스가 극단적인 배제와 폭력을 낳는 중심적인 원인이었다면, 에스노스를 특정한 방식으로 극복하는 초민족적 공동체의 건설은 적어도 ‘민주적 정의’를 실현하는데 유리한 조건들을 마련해줄 수 있으리라고 코스모폴리탄주의자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이렇게 선명한 외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주의자들과 코스모폴리탄적 자유주의자들은 은연중에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즉, 에스노스란 결정적으로 민족과 관련되기 때문에, 민족적 수준을 넘어서는 다민족적 공동체의 구성은 에스노스의 극복을 의미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공동체’라는 통념 자체(민족 공동체 뿐 아니라 공동체 일반)가 에스노스와 불가분의 것이라면, 초민족적 공동체 건설이 문화적 특수성들을 파괴할 것이라는 공동체주의자들의 우려는 부질없는 것이 되며, 초민족적 공동체의 건설이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정의를 약속할 것이라는 코스모폴리탄주의자들의 낙관도 근거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면에서, 유럽 시민권과 관련하여 마스트리히트 조약(Maastricht Treaty, 1993)이 달성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날카롭게 지적하듯,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오직 유럽 내의 민족국가에서 이미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유럽의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유럽적 구성(constitution)으로부터 수많은 이주자들을 배제했다. 따라서 초민족적 공동체의 시민권의 실제적 출현과 함께 나타난 것은 에스노스라는 요소의 제거나 몰락이 아니라, 그것의 초민족적 수준으로의 ‘전위’와 그에 따른 제도적 인종주의의 출현이었다. 발리바르는 이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유럽적 아파르트헤이드” 또는 “아파르트헤이드로서의 유럽 시민권”이라 칭한 바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데모스와 에스노스의 관계를 고찰하고, 이를 통해 두 가지 상호연관된 가설을 제시할 것이다. 첫 번째 가설: 데모스와 에스노스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지만, 변증법적인 방식으로는 구별 가능하며, 이 때 데모스는 에스노스의 부정(the negative)이라 정의될 수 있다. 두 번째 가설: 초민족적인 민주적 주권권력의 구성은 동시적인 초민족적 대항권력의 구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1. 민주주의의 역설(The Paradox of Democracy)
「서언: 민주주의 이론과 경계선 문제」라는 글에서 프레데릭 웰런(Frederick G. Whelan)은 민주주의 이론의 근본적인 문제를 논한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 항상 개인들(시민들)로 이루어진 규정된 공동체―인민(a people)―를 참조”하지만, 민주주의의 이론 그 자체는 “민주체(the democratic body) 혹은 시민체(citizenry)”에 관한 만족할 만한 정의를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설’은 데모스가 민주적인 방식으로는 정의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참여적 원칙이나 집단적 의사 결정을 위한 다수결의 원칙 등은 모두 논리적으로 데모스의 존재를 가정하기 때문에, 그 원칙들은 데모스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데에 활용될 수가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역설에 관한 적어도 두 가지의 상이한 답변이 각각 공동체주의와 코스모폴리탄적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발견된다. 나는 전자에 관해서는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를, 그리고 후자에 관해서는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를 고려할 것이다. 먼저 왈저에 관해 간략히 논한 후 하버마스에 관해 좀 더 상세히 논해보도록 하자.
1) 마이클 왈저는 『정의의 영역들』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민주주의의 역설에 이론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는 먼저 “분배적 정의라는 관념은 하나의 한정된 세계를 전제”하며, 분배되어야 할 ‘일차적 사회적 기본재(primary good)’는 다름 아닌 공동체의 성원권(membership)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 같은 일차적 분배의 원칙들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로 직접 나아가지 않고, 대신 질문을 바꿔 ‘공동체의 성원권을 “우리”는 대체 어떤 외부인들에게 부여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러한 대안적 질문은 “타자”의 포함과 배제라는 문제를 결정할 배타적 권리를 가지고 있는 “우리”라는 존재가 항상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리하여 왈저는 곧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회적 기본재로서 성원권은 우리의 이해에 따라 구성된다. 그것의 가치는 우리의 작업과 대화에 의해 확고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원권 분배의 책임자다(우리가 아니면 누가 책임자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사이에서 분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것이다.”
여기서 왈저가 말하는 “우리”란 물론 데모스가 아니라 에스노스다. 비록 그가 데모스라는 통념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에스노스가 데모스의 필연적인 사전조건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그럴듯한 공동체주의의 주장이다. 하지만 왈저가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민족국가들의 불멸성으로 자신의 주장을 발전시킬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대해 쉽게 가할 수 있는 비판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탈민족적 공간 내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더 이상 타당치 않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의제기는 내가 보기에 충분히 비판적이지 못할 것 같다. 그것은 왈저 이론의 ‘합리적 핵심’(즉 공동체와 에스노스 간의 밀접한 내적 관련―우리는 이것이 코스모폴리탄주의자들의 논의를 끊임없이 궁지에 몰아넣을 것이라는 점을 앞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을 놓치고 단지 경험주의적인 반박을 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왈저에게 있어 차라리 문제는 앞서 우리가 공동체주의자들의 입장과 관련하여 지적했듯이 에스노스를 오직 민족국가와만 부당하게 동일시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는 에스노스가 현존하는 민족국가 이상의 수준에서도 여전히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다. 이는 거꾸로 민족적 수준에서 발견되는 에스노스를 그가 ‘허구적인 것’ 혹은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비록 그것이 물질성과 강제력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기원과 연속성 속에서 자라 나온 ‘실체적인 것’(the substantial)으로 본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사고가 생물학주의의 성격을 띠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유기체주의의 일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2) 반면, 위르겐 하버마스는 ‘전(前)정치적(prepolitical)’인 ‘인종문화’(혹은 단적으로 ‘민속’)에 대립된 ‘정치문화’라는 관념을 가공하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의 역설’을 피하려고 한다. 하버마스는 두 가지 종류의 문화를 구별함으로써 데모스의 사전조건이 반드시 인종적 성격을 지닐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가 말하는 정치문화란 다음과 같다. “한 나라의 정치문화는 그것의 헌정(constitution)을 둘러싸고 결정(crystallize)된다. 각각의 민족적 문화는 헌정적 원칙들에 관한 독특한 해석을 발전시키는데, 이러한 원칙들―예컨대 인민주권(popular sovereignty)과 인권―은 다른 공화주의적 헌정들 안에도 그 나라의 고유한 민족역사의 배경에 따라 동일하게 구현되어 있는 원칙들이다.” 이로부터 ‘민족주의(nationalism)’와 구별되는 하버마스의 “헌정적 애국주의(constitutional patriotism)”의 주장이 따라 나온다. 근대 민족국가들은 세대를 거쳐 상속되는 인종문화를 참조하지 않고는 개인 성원들 간의 충분한 연대를 생산할 수 없었지만, 공동체와 에스노스 간에 필연적인 논리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주장은 세계화가 진전된 오늘날 우리는 인종적 요소에 더 이상 기대지 않은 초민족적 정치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의 통합적 힘은 ‘헌정적 애국주의’로부터 주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역설에 대한 하버마스의 답변은 분명하다. 비록 데모스가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요소들의 간섭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데모스가 본래 에스노스에 의존적인 것은 아니며, 정치문화에 연루된 차이들로 인해 다양한 데모스들이 그 자신의 종별성을 갖게 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는 매우 영리한 주장임에 분명하다. 자유주의자들이 역사와 문화적 맥락들(헤겔이 말하는 ‘인륜’)을 무시하고 개인을 추상화한다는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을 피하면서, 동시에 인종적 요소를 데모스로부터 추방하는 길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의 비판가들이 흔히 지적하는 문제는 헌정적 애국주의가 공동체를 와해시키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강한 사회적 유대(bond)를 생산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하버마스는, “민주적 시민권은, 그 자신이 사람들에 의해 선호되는 생활형태들의 물질적 조건들을 실현하는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한에서만 … 그 통합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한다. 하버마스가 여기서 “선호되는 생활형태들의 물질적 조건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개인적 권리들과 정치참여의 권리들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권리들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장점은 초민족적 공동체란 오직 그것이 민족국가들보다 더 민주적일 경우에만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하버마스에게 있어 진정한 장애물은 성원들 간에 시민적 연대를 어떻게 생성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초민족적 공동체로부터 누구를, 어떤 기준에 의해 비성원으로 배제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나오는 것 같다. 「탈민족적 성좌(星座)와 민주주의의 미래」라는 글에서 하버마스는 지구적 공동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는데, 이는 정확히 자신을 민주적이라고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정치적 공동체란 정의상 성원과 비성원 사이의 특정한 구별을 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에게 있어 세계 시민을 모두 포괄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일종의 형용모순인 셈이다. ‘배제’는 공동체의 통념에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며, 그렇다면 문제는 누군가를 단지 그/녀의 정치문화―즉,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원칙들에 관한 특정한 개인적 해석―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성원으로 배제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하버마스의 성원자격 개념은 너무 엷고 동시에 너무 두텁다. 그것은 너무 엷은데, 왜냐하면 자유주의적 원칙에 대한 해석상의 다양성에 기초한 그 같은 배제의 제도화는 다른 정치문화를 지닌 사람들로 하여금 비정치적인 필요(예컨대 경제적 필요) 때문에 자신의 해석을 변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만큼 두터운 장벽을 쌓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너무 두터운데, 왜냐하면 그 같은 배제의 제도화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데 오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형제도’(미국과 유럽을 비교한다면)나 ‘낙태(abortion)’에 관한 어떤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그 사람을 공동체로부터 배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혹은 어떤 사람의 정치적 해석이 부분적으로 주어진 공동체의 그것과 수렴하지만 부분적으로 달라진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개인은 공동체의 성원인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하버마스가 주장하듯 모든 공동체는 비성원의 배제에 기초해 있다고 한다면, 에스노스와 완전히 분리된 공동체란 있을 수 없다.
사실, 하버마스 자신이 초민족적인 유럽 공동체 건설을 위한 인종문화적 요소를 다시 들여놓고 있다(왈저와 관련해 이미 지적했듯이, 모든 종류의 ‘인종성’이란 허구적이며, 인위적으로 구성되어 결코 존재한 적도 없는 과거를 향해 회고적으로 투사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그것은 바로 유럽 공통언어의 구성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초민족적인 매스 미디어는 이미 작은 규모의 몇몇 국가에서 실행하고 있듯 민족적 교육 체제들이 공통언어의 기초를 마련해주는 한에서만 이러한 다성적 의사소통의 맥락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비록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공통언어란 외국어이겠지만 말이다.” 또 다른 글에서, 그는 이러한 공통언어가 유럽에서는 “우선적인 제 2외국어로서의 영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공통언어를 갖는다는 것이 반드시 공통의 인종문화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언어란 결코 순수한 “의사소통”을 위한 추상적인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고집해야 할 것 같다. 단지 “헌정적 원칙들에 관한 독특한 해석”에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민족의 문학적/비문학적 역사 전체에 연결된 문화적 배경을 얼마간 이해하지 않고 언어를 배울 수는 없는 법이다. 사실 이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하버마스 자신이 언급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씨비타스’(civitas, 시민)에 대비되는 ‘나찌오’(natio, 민족)라는 말의 고대 로마적 사용법에서 유래하는] 어원적 의미는 중세를 거쳐 근대 초기까지 ‘나찌오’와 ‘링구아’(lingua, 언어)가 서로 등가적인 것으로 취급될 때마다 지속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물론 민족언어와 더불어 유럽의 공통언어를 하나 더 배운다는 것은 모든 민족어들을 폐지하고 하나의 유럽어로 통일한다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 나는 하버마스에 반대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 실천적 효과가 의심할 바 없이 공식적 유럽어의 확립일 것이라는 점 또한 진실이다. 이러한 유럽어의 제도화는 비-유럽인들(아랍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등)에 대한 방벽을 유럽주변에 쌓음으로써 유럽을 문화적 요새로 만들 것이며, 또한 “범-유럽적 공론장”에 강력한 언어적 위계질서를 도입할 것이다. 하버마스 자신이 시인하듯, 이러한 공통언어의 형성 없이 범-유럽적 공론장이라는 것이 쉽게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열린 공간을 가장한다고 할지라도, 공론장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간은 인종적인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오늘 피히테의 「독일 민족에게 고함」을 다시 읽는 것은 상당히 도움이 된다.
독일인과 튜톤족의 후손인 다른 민족들 사이의 완전한 대비의 원인은 … 언어의 변화다 … 이는 원래의 언어를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사용한 사람들의 옛 조상이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이 언어가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모든 중요함이 다 들어 있다. 왜냐하면 언어가 사람에 의해 형성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람이 언어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가 초민족적 공동체들의 이론적 모델을 구성하면서 겪는 곤란들은 데모스를 에스노스로부터 완전히 끊어 놓기에 무척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우리가 왈저와 같은 공동체주의적 관점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 절에서 나는 또 다른 자유주의자인 실라 벤하비브(Seyla Benhabib)의 입장을 고찰하면서, 민주주의의 역설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한 길을 탐색해 볼 것이다.
2. 운동하는 데모스(The Demos in Movements)
「시민권의 전화: 현 유럽의 사례」라는 글에서 벤하비브는 민주주의의 역설을 이중적으로 전위시킨다. 먼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갈등으로, 그리고 두 번째로 자기-구성(self-constitution)이라는 통념에 내재적인 갈등으로. 첫 번째 전위와 관련하여,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경 자유주의자들은 일련의 인권들을 지킬 것을 사전에 약속하게 만들어 주권을 제약하길 원하는 반면, 강경 민주주의자들은 이 같은 권리의 전정치적(prepolitical)인 이해를 거부하고 그 권리들이―특정한 한계 내에서일지라도―주권적 인민에 의한 재협상과 재해석에 열려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는 인권들이나 자유주의적 원칙들이 강경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전정치적인 것으로 고려된다는 점에 주목한다(이 같은 입장은 하버마스의 것과는 선명하게 구별된다―이 점에 관해 곧 재론하겠다). 벤하비브 자신의 생각에 관해 말하자면, 그녀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중적 책임이 정치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모순으로 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모순의 작동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작업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모순은 매개를, 즉 두 대립된 측면이 서로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소를 필요로 한다. 벤하비브에 따르면, 이러한 매개는 다름 아닌 ‘민주적 주권’ 개념 안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두 번째 전위가 나온다. “(자기-입법의) 이러한 과정 내에서 가공되는 것은 자기-통치의 일반법만이 아니다. 이 법에 의해 스스로를 구속하는 공동체는 동시에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스스로를 정의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경계선은 공민적(civic)일 뿐 아니라 영토적(territorial)이다.” 따라서 벤하비브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자기-구성이라는 통념은 항상 자기-입법 뿐 아니라 경계선의 자기-결정이라는 두 가지 본질적 구성요소를 지닌다. 그래서 민주적 주권은 피할 수 없이 자체 내에 자신의 논리적 안티-테제(후자의 측면에서 유래하는)를 포함하게 되며, 이는 곧 배제의 특정한 제도화로 귀결된다. 벤하비브가 공민적 경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컨대 여성, 무산자, 노예들에 대한 내적 배제가 작동하는 경계들이고, 그녀가 영토적 경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외국인과 이주민들에 대한 외적 배제를 실현하는 경계들이다.
그런데 벤하비브에 따르면, 바로 이 경계들이야말로 자유주의적 원칙들(인권의 원칙)이 개입해서 공동체의 성원자격을 “내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종별적인 장소를 이룬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모순이 민주적 주권 개념의 한복판에 삽입된다. 벤하비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주적 주권은 세 가지 허구를 초래한다. 1) 동질적 인민, 2) 자기-폐쇄적이고 토착적인 영토, 그리고 3) 인민이 법을 준수하는 자(subject)일 뿐 아니라 또한 법의 저자(author)이기도 하다는 허구가 그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허구는 명확히 에스노스에 관련되는 반면, 오직 세 번째 허구만이 데모스에 관련된다. 그리고 이 세 번째 허구야말로 첫 두 허구를 탈구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원칙들은 자기-입법이라는 이 세 번째 허구에 스스로를 접목시킴으로써 공동체의 성원자격에 관련된 첫 두 허구를 내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갖게 되는 상(像)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동태적인 것이다. 민주적 주권에 내재적인 배제들(그것이 공민적 배제든 영토적 배제든)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인민의 동일성(identity)이 결코 고정된 것으로 사고되어서는 안되며, 반대로 진행과정 속에서 항상 변형 가능한 것으로 사고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변형을 벤하비브는 “헌정적 자기-창출”이라고 부른다.
벤하비브의 역동적 구성 관념은 민주주의의 역설을 사고하는데 있어 진정한 돌파구를 열어낸다. 하버마스와는 달리, 그녀는 결코 에스노스와 데모스 사이의 최종적 분리를 가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모든 민주적 자기-구성(그것이 민족적 수준에서 일어나든 초민족적 수준에서 일어나든)은 그 양자의 모순을 반드시 포함할 수밖에 없으며 민주주의란 바로 이 같은 모순을 지속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러한 벤하비브의 주장에도 여전히 중대한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이미 살펴봤듯이 그녀는 민주적 주권의 세 번째 허구를 자유주의적 원칙이 개입할 수 있는 장소로 사고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자기-입법의 세 번째 허구로부터 그 내용을 비워내고 그것을 자유주의의 선험적, 초월적 규범 원칙들로 대체할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벤하비브가 또한 세 번째 허구를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이라 부른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결국 세 번째 “허구”를 자유주의적 원칙들로 대체한다면, 억압되는 것은 바로 데모스의 목소리인 셈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미리 주어진 자유주의의 원칙들을 단조롭게 반복하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다. 벤하비브가 이미 지적했듯이, 자유주의의 원칙들이 강경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전정치적인 것으로 거부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이 진정으로 해결되거나 완화되었다기보다는 단지 다른 곳으로 전위되었을 뿐이 아닌가하고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벤하비브가 자유주의의 규범들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하는, 에스노스를 탈구시키는 긍정적 기능을 상실하지 않고,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을 정치적으로 재규정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나의 관점에서,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이 참조하는 이상성(ideality)은 일련의 도덕적이거나 사법적인 규범들이 결코 아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될 때, 이 원칙은 기존의 공동체(이 공동체가 공민적 공동체를 지시하든 영토적 공동체를 지시하든)에 이미 속해 있는 자들의 목소리를 위한 원칙으로 즉시 환원된다. “법 앞에서 만인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사법적 자유주의의 원칙은 평등과 자유의 원칙을 단순한 ‘법’으로 제한하고 온전한 성원으로 인정된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는 조직원칙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벤하비브가 말하는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 안에 끈질기게 남아 있다. ‘인민은 법을 준수하는 자일 뿐 아니라 법의 저자이기도 하다’라고 벤하비브가 말할 때, 그녀가 “인민”이라는 말을 통해 가리키는 것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에스노스에 관련되어 있는 두 가지 허구와 데모스에 관련된 세 번째 허구가 여전히 논리적인 수준에서조차 완전한 방식으로 분리되지 않고 있음이 이러한 모호성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이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가”라는 루소의 유명한 질문―이 질문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역설’의 최초의 정식화라고 볼 수 있으며, 루소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무한한 논리적 순환 속에 빠져든 바 있다―이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의 한 복판에서 다시 출현한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곤란에 직접 맞서는 유일한 길은 데모스를 잠정적으로 공동체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 혹은 공동체의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지시하는 범주로 정의하는 것이다.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이 고려하는 이상성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정식화되어야 한다.
여전히 혹자는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민주적 목소리의 원칙이 비록 사법적 자유주의의 원칙을 참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도덕적 자유주의의 원칙을 참조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가? 벤하비브 자신의 용어로 그것은 “인류 전체로 확장되는 맥락-초월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인 성격을 갖는 인권의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코스모폴리탄적인 도덕 규범들이 내가 위에서 말한 부정적 이상성이라는 것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벤하비브의 도덕적 규범에 대한 강조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녀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타자의 포함(inclusion of the other)’이라는 전략이다(이 점에서 그녀는 명백하게 하버마스의 입장으로 복귀한다). 그리하여 코스모폴리탄적인 도덕적 규범은 일차적으로 공동체의 내부인을 위한 사고와 행위의 지침을 이룬다. 따라서 벤하비브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녀가 여전히 외부인이라기 보다는 내부인의 위치에 서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놀랍지 않다. “우리는 배제된 자들이 배제와 포함의 규칙을 결정하는 사람들 내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이 역설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지속적이고 다면적인 민주적 상호작용을 통해 이 구별을 보다 유연하고 협상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의 구별을 보다 유연하고 협상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의 일차적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벤하비브의 관점에서는 분명히 내부인들이다(그리하여, 왈저의 질문이 되돌아온다: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책임자란 말인가”).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그녀에게 외부인들의 목소리는 포함과 배제의 규칙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들을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따라서 그 규칙들은 단지 어느 정도로까지만 “협상 가능”할 것이다). 정 반대로, 부정적 이상성에 함축된 전략은 타자 자신의 목소리를 강제하는 전략이다(이것이 바로 “노동자들의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의 일이다”라고 마르크스가 말했을 때 그가 또한 염두에 두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정적 이상성은 역사상의 이러저러한 (‘구성적’이라기보다는) ‘봉기적’인 순간들을 반영한다.
하지만, 나의 의도는 ‘누가 정치적 행동의 일차적 주체인가’에 답하는 벤하비브의 입장을 단순히 전도시키는 것에 있지 않다. 진정으로 결정적인 것은 이미 현존하는 공동체의 보편성 내로 ‘타자의 포함’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에 배제된 자들이 가져다주는 차이들을 수용하지 않고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새로운 종류의 보편성을 발명하는 일이다. 물론 이러한 발명은 외부인들이 내부인들과 다양한 연대와 동맹을 형성하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배제된 자들의 정치적 행동의 목표는 기존의 공동체에 대한 일방적인 정복(conquest)이 아니라 그것의 해체(deconstructuion)일 수밖에 없게 된다.
데모스와 에스노스는 서로에게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지만, 이들은 변증법적인 방식으로는 구별 가능하며 이 때 데모스는 에스노스의 부정(the negative)이라 정의될 수 있다. 벤하비브는 민주주의의 역설을 과정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되 어떤 궁극적인 이론적 해결책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런 벤하비브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배제와 포함의 구별을 유연하고 협상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배제된 자들이 기존의 보편성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녀의 주장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역설적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법을 쓰거나 다시 써야할 저자는 일차적으로 배제된 자들 자신이라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점에서, 민주주의의 역설은 약화되지 않고 정반대로 강화된다. 왜냐하면 이제 민주적 ‘자기-구성’이라는 개념은 자기 자신의 ‘해체’(‘파괴’는 아니라고 할지라도)라는 지울 수 없는 계기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왈저와 하버마스의 관점에 동시에 맞설 수 있게 된다. 왈저는 분배되어야 할 사회의 일차적 기본재는 공동체의 성원권이라고 주장하고, 하버마스는 스스로를 민주적이라고 이해하는 공동체는 반드시 성원과 비성원의 구별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주의자들과 코스모폴리탄적인 자유주의자들은 공히 시민권을 법적 지위(legal status)의 문제로서만 고려하고 있다. 그들의 논쟁 자체가 억압하고 있는 것은 운동하는 데모스(에스노스로부터 스스로를 역동적으로 차별화시키는 데모스라는 의미뿐 아니라 정치적 운동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는 데모스라는 의미에서)다. 하지만 시민권은 단순하게 분배되어야할 일차적 기본재만으로 규정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개인들에게 부여될 수 있는 법적 지위만으로 규정될 수도 없다. 반대로, 발리바르가 말하듯, 시민권이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이는 ‘의무를 전제하지 않는 권리’로 한나 아렌트는 이를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 불렀고, 자크 데리다는 이를 “해체불가능한 정의”라고 불렀다)를 표현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대중들 자신의 집단적이고 정치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의 차원을 반드시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3. 결론: 대항권력의 초민족화
『민주적 정의』라는 책에서 이안 샤피로(Ian Shapiro)는 훌륭하게 정치(특히 민주적인 정치)는 어떻게 합의(consensus)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어떻게 이견(dissensus)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의 방향전환은 우리가 ‘해체’의 민주주의의 역설을 진정 생산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들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제도화되어야 하는 것은 합의들이라기 보다는 갈등들 자체인 것이다. 이와 같은 갈등의 제도화는 발리바르가 ‘씨빌리테’(civilité)라는 자신의 개념을 통해 지시하고자 하는 것과 이론적 친화성을 갖는다. 정치가 극단적 폭력으로 인해 절대적으로 불가능해지지 않도록 만드는 조건들을 창출하고 유지하기 위한 특별한 종류의 정치로서 씨빌리테의 정치가 결코 본질적으로 ‘평화주의’(pacifism)적이지 않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발리바르는 이렇게 말한다. ““씨빌리테”는 반드시 사회 내에서의 “갈등”과 “적대”의 억압이라는 관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마치 “갈등”과 “적대”가 항상 폭력의 싹이며 그 반대는 아니라는 듯 말이다. 우리가 논할 극단적 폭력의 (대부분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상당부분은 (지구적 규모에서 법과 질서[즉, ‘지구적 통치성’―인용자]를 위한 정책의 구현은 말할 것도 없고) “합의”와 “평화”에 대한 맹목적인 정치적 선호의 결과이다.” 씨빌리테의 정치는 그리하여 갈등의 적절한 작동의 조건들이 무엇인가를 규정하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발리바르는 이러한 갈등의 범주 안에 물리적 힘을 동반하는 갈등을 포함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적 공간이 때때로 대중들의 물리적 힘에 의해 열릴 수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갈등의 동학에 기초한 유일한 종류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민주적 공동체’라는 표현은 형용모순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는데, 왜냐하면 ‘공동체’라는 것은 그것이 다양성을 허용할 때조차 그것들을 제약하는 특정한 동일성(identity)과 정상성(normality)의 제도화(하버마스도 공동체를 동일성에 연관시킨다)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최종분석에서, 정치적 주권 권력의 초민족적 수준에서의 구성은 (그것이 민주적인 것이기 위해서는) 초민족적 대항권력의 구성이 다소간 동일한 정도로 달성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오직 그 때에만, 권력과 대항권력의 긴장이 초민족적 수준에서 제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공론장의 초민족화」라는 글에서 초민족적 사회 운동은 기본적으로 대항권력이기 때문에 “그것의 효율성은 일반 이해(general interest) 속에서 행동하도록 제약될 수 있는 제도화된 주권권력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주장하듯, 권력이 없다면 대항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관점을 전도시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지 않을까? 즉, 주권 권력의 효율성이야말로 대항권력의 성공적인 구성에 근본적으로 의존한다고 말이다. 적어도 이는 후자가 전자에 의존적인 것과 동일한 정도로, 혹은 그 이상으로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프레이저는 ‘일반이해’ 속에서 행동하도록 제약된 특정한 종류의 주권권력(즉 민주적 주권권력)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초민족적인 주권권력이 (심지어는 유럽에서조차)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가 고려한다면, 사실 대항권력의 초민족화를 논하는 것이 약간 이상하게 느껴질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초민족적 주권권력의 부재, 혹은 분산된 성격으로 인해, 다양한 정치적 결정 과정에 개입할 것을 목표로 하는 다면적인 대항권력이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미 잘 규정된 초민족적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면, 오히려 초민족적 대항권력은 그 공동체의 경계 내에 갇히기 쉬울 것이다(과거의 사회운동들이 민족적 공간 내에 갇혔듯이 말이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 잘 규정된 초민족적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초민족적이거나 심지어 초대륙적인 사회운동의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가 여전히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계선의 위를 살아가는 이주민들과 그/녀들의 가족 문제는 최대의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초민족적 주권권력의 구성과 대항권력의 구성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시민권을 초민족화하면서 우리가 그것을 보다 민주적인 것으로 변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초민족적 대항권력 구성의 실패는 곧 초민족적 주권권력의 민주적 개조를 추동할 수 있는 실제적 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은 지배계급(그것이 민족적이든 초민족적이든)의 실천의지(practical will)의 선의와 합리성에 의존하는 길뿐이다. 사실 현재 상황에서 만일 초민족적 주권권력이 구성된다면, 이에 대해 더 많은 통제력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바로 ‘귀족으로서의 타자’, 즉 초민족적 자본가들이 아니겠는가? 사회운동이 결핍되어 있는 상황에서 초민족적 주권권력의 제도화를 강조하는 것은 ‘지구적 통치성’을 확보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시도와 공명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특히 이는 발리바르가 지적하듯 ‘법’과 ‘질서’, ‘평화’와 ‘합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함으로써 더 극단적인 폭력을 불러오는 위험까지 갖는다는 점을 우리가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근대의 역사가 극명하게 보여줬듯이, 대규모의 극단적 폭력이 발발하는 것은 차라리 새로운 종류의 주권권력들이 출현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