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42호
2004년 정세전망- 노무현 정권의 '참여적 발전'에 대한 전망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노무현 정권은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미래에 대한 전망과 대안의 부재는 노무현 정권의 조건이다. ‘참여적 발전(참여와 발전의 결합)’이란 참여라는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대중을 동원하고, 전망과 정책의 부재를 참여로 대체하려는 노무현 정권의 전략이다.
노무현 정권의 정책은 동북아 중심으로 성장, 번영한다는 구상으로 수렴된다. 이의 핵심은 자본유치이다. 그러나 지난 해 극심한 경기침체와 가계파산, 생계형 자살 증가와 같은 삶의 불안은 노무현의 구상의 실효성에 의구심을 낳았다. 자본도 노동도 강력한 불만을 제기했으며,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었다. 결국 노무현은 자신의 재신임을 내걸고, 일정정도의 정국주도력을 장악했지만 각종 사회갈등과 지배세력 내의 갈등을 관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이제 노무현은 “투자활성화를 통한 성장잠재력 창출 - 일자리 창출”이라는 정책 방향을 내놓고, 위기관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적극적인 외자유치와 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위한 제반 여건을 조성하기(대외개방, 노동 유연화, 금융시장 안정화 등) 위해 모든 경제․사회 정책이 구상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대중의 기본권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따라서 갈등과 저항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이를 관리하기 위한 사회통합 정책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금의 위기는 경제위기로 국한되지 않는 사회의 해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를 동반하고 있다. 가족의 해체, 교육의 붕괴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중첩되는 현상이면서 동시에 대중의 삶의 고통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원인이다. 더군다나 가족과 교육은 대중의 삶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대부분 ‘사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공동체 자체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대중의 실리주의를 더욱 자극한다(포섭에 대한 기대와 배제에 대한 공포). 실리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 코퍼러티즘적인 협약에 대한 대중의 선호-행정기구와 각각의 대중의 실리(소위 이익집단)가 직접 갈등을 조율하고 타협하는 방식-가 일반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선 정당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정당정치는 행정부의 관리 방식의 효율성에 미달하는 무능력한 것이고, 대중은 자신의 삶에서 의회정치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정치적 안정성의 확보는 지배세력들에게 사활적인 과제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정치개혁의 목적은 효율적인 위기관리, 갈등조정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정당의 역할을 조정하는 것이다. 정당은 기존의 이념지향을 벗어나서 전국정당, 무지개 정당이 되어야 한다. 모든 국민을 아우를 수 있어야 위기관리와 갈등 조절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의 ‘참여적 발전’은 대중을 동원하고 동시에 대중들의 불만과 갈등이 급진적으로 전화될 수 있는 능동적 요소를 무력화하는 전략이지만, 이 역시 모순과 갈등의 여지가 많다. 참여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대중을 동원하고, 이러한 동원이 대안과 전망의 부재를 메꾸어 사회의 통합을 이뤄내고자 한다. 하지만 참여의 논리가 극도의 실리주의에 기초하기 때문에(참여한 자만이 수혜를 얻을 수 있다는), 참여를 통한 합의는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결론을 낳을 뿐이다. 오히려 갈등은 증폭되고, 다양한 요구들이 충돌하며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지만 정권에게는 ‘참여’ 자체가 중요한 것인데, 이미 참여는 책임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운동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민중운동이 노무현 정권의 ‘참여적 발전’의 동원 대상에서 제외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민중운동 내부, 노동자 대중 내부의 분할을 심화시키고, 일부를 포섭하는 것은 정권에게 중요한 과제다. 좋았던(?) 옛날을 미래의 전망으로 갖는 것은 정권과 지배세력의 관리방식과 공명하는 것이다. 대중의 실리적인 요구에 기반을 둔 이런 대응은 대중의 운동에 대한 불신과 대중의 수동성을 증가시킬 뿐이다. 현재의 위기가 이러한 실리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현재 대중이 겪고 있는 고통과 삶의 해체가 운동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어떻게 이들의 불만을 능동적으로 조직할 것인지를 차분히 고민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정치과정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은 이질적인 지지층들을 일시적으로 규합해서 수권에 성공했다. 이는 서로 다른 집단들의 이해와 요구를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노무현 자신이라는 희망의 조작을 통해 가능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비전과 정책방향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철저히 신자유주의 개혁 방향에 자신의 조타수를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조건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은 국민의 갈등과 불만을 야기했지만, 노무현 정권은 그들의 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으며 국민들의 불만과 불안에서 비롯되는 혼란을 수습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당선 직후 터져 나온 대통령 측근 비리 문제는 대선자금 문제, 불법정치자금 문제로 일파만파 되었다. 물론 이런 무능과 부정부패는 노무현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라는 현 상황에서 위기를 봉합하고, 지연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대안이나 비전도 제시할 수 없는 지배세력 전반이 직면한 문제이다. 이 문제의 근간에는 삶의 파탄과 사회의 해체에 직면한 노동자 대중의 불만이 놓여있으며, 따라서 핵심은 어떻게 이 불만을 관리(혹은 조직화)할 것인가이다.
이러한 노무현 정권의 대응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으로 비롯된 소위 ‘재신임 사태’다. 경제위기와 이로부터 다양한 갈등과 불만들이 드러나고 동시에 지배계급 내부의 각 분파간의 갈등 또한 첨예해진 상황에서 노무현은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시했다. 재신임 선언은 “대통령 자신과 국가의 위기,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협박에 다름 아니었다. 허나 이 ‘국민협박극’은 역설적이게도 ‘국민투표’라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가장 민주적인 기제를 통해 이루어질 판이었으니, 이만큼 노무현 정권이 말하는 ‘참여’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결국, 노무현이 말하는 ‘참여’란 비전과 대안이 없는 지배계급의 무능을 참여를 통해 국민과 대중에게로 전가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을 참여시켜 합의를 도출하는 것, 이 합의로 비전과 대안의 부재를 대체하는 것이 ‘참여’ 논리의 핵심이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참여에는 경계가 이미 정해져있다. 당연히도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어떻게 잘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가 그 기준이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 혹은 동의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은 배제된다.
‘참여’를 매개로 한 노무현 정권의 정치과정은 이후 더욱 강화될 것이다. 17대 총선에는 노무현의 재신임 문제가 달려있다. 정권의 사활이 걸린 이번 총선에서 알맹이 없는 선심성 공약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그것이 결국 ‘공약’일 뿐인 조건에서 ‘참여’는 더욱 강조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말해온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은 요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협약 체결’이라는 내용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현재 대중들의 삶의 문제가 되고 있는 실업의 문제를 노동자들을 참여시키는 가운데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상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라는 점이 문제다. 그리고 현재 있는 일자리를 쪼개는 방식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지만, 정권과 지배세력은 이 이상의 방안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로부터 또 다시 갈등은 촉발되겠지만, 정권은 계속해서 ‘참여’를 통한 합의를 강조할테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력들에겐 폭력과 배제가 남겨질 것이다.
한국 사회가 처해있는 조건과 노무현 정권의 정책 전망
자본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기 위해 지속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은 이미 주어진 방향성이다. 지난 1년 노무현이 갈팡질팡하는 행보 속에서도 계속해서 제출했던 각종 로드맵은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이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기본 구상이다. 애초에 노무현은 ‘동북아 중심 국가 실현’을 한국 사회 발전 전략으로 내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동북아 중심 국가의 핵심에는 외국인 자본 유치가 필수적인 바, 자본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는 것이 그 조건이 된다. 그리고 이는 끊임없이 민중들의 기본권(생존권, 민주주의 등)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한 갈등이 다양하게 폭발했다. 게다가 지난 해 지표상의 경제성장률이 2%로 하락하면서 경제가 악화되었다는 평가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현실에서 체감되는 위기는 훨씬 심각했다(경제위기를 넘어선 사회적 위기라 할 만하다: 생계형 자살 급증, 개인신용불량자 급증, 출산율 저하 등). 물론 이러한 현실이 세계화된 시대의 한국경제의 발전전략으로서 ‘자본유치형 국가’라는 방향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는 DJ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 사회의 기본 방향이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과 불안 요소들을 제어하면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인가이다.
올해 경제전망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학자들은 4%~5%의 경제성장률을 예상하면서 대체적으로 회복세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세계경제(미국을 비롯한 중국과 유럽 경제)의 성장이라는 대외여건의 개선을 제시하고 있지만, 세계경제의 성장이 수출 증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추측일 뿐,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이를 전제로 회복세에 접어든 경제를 발판으로 동북아 중심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전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장동력을 확충하는 문제가 시급하다는 요구가 주를 이루는데, 그들이 성장잠재력의 장애로 꼽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고용 없는 성장(만연된 실업), 경제 시스템의 낙후성(노사분규, 기업의 투명성 등), 소극적인 대외개방(FTA, 서비스 시장 개방 등), 사회의 양극화로부터 비롯된 사회적 갈등(서민들의 생활 안정).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고용 없는 성장’은 경제가 성장함에도 고용이 증가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이의 원인으로는 그나마 수출 증대에 기여하고 있는 IT 산업의 고용흡수 능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 제조업의 중국진출로 인한 공동화 현상과 투자 부진으로 인한 신규채용 미비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경제의 위기를 신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지연시키려는 시도 속에 이미 예정되어있던 결과이다. 이미 97년 외환위기 이후로 추진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만연된 실업과 불안정한 고용을 노동시장의 일반적인 조건으로 만들어왔다. 그리고 한국경제가 (금융, 자본 시장에) 자본투자를 유치하여 성장하겠다는 전략을 취하는 바, 제조업 부문이 성장동력일 수 없다는 점은 전제된 바이다. 그럼에도 최근 고용/실업의 문제가 새삼스레 부각되고 있다면, 그것이 가지는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재정경제부는 2004년 연두 업무보고에서 ‘투자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정책으로 꼽았으며, 이를 올해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성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이전과 같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연한 노동시장은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초민족적 자본의 요구이며, 신자유주의 개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일한 길은 “기간제 고용에 대한 규제 완화, 해고관련 규제 완화 등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계속 추진함으로써 다양한 고용행태를 보편화시켜 잠재적인 노동수요가 고용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추진해온 고용, 실업 정책의 맥락과 다를 바 없다. 동시에 이 말은 지금 재경부가 말하는 '일자리 창출' 정책이 실효성이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정부가 솔선하여 고용창출에 앞장서겠다며 생색을 내고 있는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과 청년실업대책도 그 대부분이 임시직, 직업훈련, 해외연수와 같은 단기처방일 뿐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정권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고용 없는 성장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 하에 기업의 투자활성화가 중요해진다(일자리 확충의 주체는 기업이고, 기업의 투자가 증가해야 일자리도 늘릴 수 있다). 결국 일자리 창출 정책의 핵심은 일자리가 아니라 투자이다(기업하기 좋은 나라). 모든 경제․사회적 정책의 방향성은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쪽으로 맞춰진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투자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양자간․다자간 자유무역협정과 WTO 협상은 필수적이고 확대되어야 하며, 교육과 의료 등의 사회서비스 산업에 있어서 지나치게 공공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본의 투자처를 축소시키는 일이다.
포섭의 기대와 배제의 공포
여기서 핵심적으로 보아야할 부분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불안정한 삶과 만연한 실업이라는 민중의 불만을 다시금 자본의 투자를 위한 최적조건을 형성하기 위한 근거와 동력으로 삼는 역설이다. 우선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라는 비전이 제시되었다. DJ의 경제개혁을 통해 한국 경제는 초민족적 자본들에게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어 자본을 유치하는 것 외에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하에서 살아남을 방도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지적했듯이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수익을 보장하기 위한 개혁은 끊임없이 민중의 기본권과 충돌한다. 노무현 정권은 출범 이후 외자 유치를 위한 조건을 갖춘 한국의 미래로서 ‘동북아 경제 중심’을 제시했지만, 이를 진전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자유구역법 저지 투쟁, 화물연대의 파업, FTA 체결 반대 투쟁 등 노동자 민중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그의 약속에 대한 기대는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조건에서 더욱 커다란 불만과 갈등을 가져왔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 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남은 것은 이 갈등과 불만이 체제의 위기로 전화하지 않도록 사활을 걸고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 하반기 노무현이 제시한 “소득 2만불 시대로 나아가자!”는 구호는 그 내용에서는 동북아 중심 국가 구상과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수사에 불과하지만,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있었다. ‘소득 2만불’이라는 표현은 동북아 중심 국가보다 훨씬 직설적이며, 그만큼 실리적인 기대를 자극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경제가 “마의 1만불 벽을 넘어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느냐, 지금 이 상태에서 주저앉느냐”하는 기로에 서있다는 의식을 확산시켰고, 경제위기 상황과 맞물려 더욱 커다란 위기감을 자극했다. 누구도 지금과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주저앉고 싶지 않다. 소득 2만불 시대를 실현하고, 동북아 중심 국가로서 번영을 누리는 것은 위기감 속에서 합의된 한국 경제의 유일한 미래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나라를 망치는’ 세력으로 가차없이 짓밟아야 했다(작년 하반기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대한 탄압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이와 같은 강요된 합의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관리 방식을 실행에 옮기고자 한다. ‘투자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성장잠재력 배양과 경쟁력 강화’라는 정책 목표의 핵심은 ‘투자’에 있지만, ‘고용과 실업’ 그리고 나아가 성장과 발전이라는 전 국민적인 의제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민중의 저항과 운동에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일례로 노무현 정권은 이 정책 과제 중의 하나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협약 체결 선언을 제시했다. 고용과 실업은 노동자운동 일부가 사회적 협약에 참가하는(혹은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협약의 결과, 현재의 불안정한 노동은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심화된다. 노동의 불안정화가 심화되는 것 자체도 커다란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협약이 ‘포섭과 배제’라는 정권의 위기관리방식의 더욱 강력한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삶과 사회가 위기에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은 불안과 공포를 가중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이라도 지켜야한다는 실리주의의 등장은 당연한 현상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층-중산층과 화이트칼라 노동자 일부-은 자신의 안정을 지키려할 것이다. 이들은 포섭과 참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다수-광범위한 빈곤층, 실업과 반실업 상태에 놓인 대중(이들의 대다수는 불안정 노동층이다), 이주노동자, 여성, 농민-는 배제된다. 게다가 이들의 저항은 용납할 수 없는데, 포섭된 대상들의 안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 내부의 분할은 극심해지고, 결과적으로 (포섭된) 대중이 (배제된) 대중의 투쟁과 저항을 억압하는 비극을 낳을 수 있다.
게다가 이미 만연한 실업의 문제를 국정 가장 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엄밀히 보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문제가 되어왔던 실업과 고용의 불안정이 방치되었을 때 그 자체로 커다란 사회적 위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전반적인 맥락을 보았을 때, 오히려 노무현 정권의 노동자에 대한 포섭과 관리의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자본의 투자에 걸림돌이 되어온 노동자 대중의 저항을 순치하겠다는 강력한 구상이다. 만일 노동자운동이 사회적 협약을 거부한다면(이미 실리주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노동자운동이 이를 거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는 전 국민적인 의제를 거부하고, 한국사회의 미래를 망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노동자운동은 이데올로기 공세와 물리적 탄압에 직면할 것이며, 이는 또 다시 노동자 대중 내부의 분할을 심화시켜 운동의 가능성을 점차 어렵게 만들게 된다.
정당정치의 위기와 정치개혁
신자유주의 개혁 하에서 정당정치는 사회적인 갈등과 위기를 조정하지 못하고, 정치 자체가 위기에 빠진다. 정당은 더 이상 국가행정에 대해 계급적 이익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대표하는 역할을 맡고있지 못하다. 정당은 이미 정책결정에 실질적인 관여를 못하고 있으며, 정당간에 정책적 차별성도 거의 없다. 국회의 입법활동이란 행정을 보조하는 역할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다. 정책의 큰 방향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이미 주어져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정책결정은 행정부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행정부는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면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실행해야 한다. 정책의 정당성 확보는 대의제 민주주의 기관인 국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행정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로부터 정당과 의회정치의 역할을 축소되고, 행정기구의 역할과 권력은 증대된다.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한 위기관리체제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위기를 관리하는 행정적이고 기술관료적인 방식이 정치를 갈음한다. 따라서 정당의 역할도 조정되어야 하는데, 그 핵심은 전문성과 효율성을 갖추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당 외부의 다양한 동원기구, NGO 등과 파트너쉽을 형성하며 이들을 활용한다. 정당 또한 행정부처럼 정책적 전문성을 갖추고, 어떤 이념보다는 사회적 갈등을 행정적인 방식으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렇게 정당의 역할을 조정하기 위해선 정치개혁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개혁 논의는 한층 가열되고 있다. 정치개혁이라는 쟁점은 이미 지난 대선 시기부터 수면 위로 부상한 문제지만, 현재는 가히 ‘정치의 과잉’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정치개혁이 핵심적인 화두가 되었다(흡사 정치가 바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하지만 이는 외양면에서 부풀어있는 측면이 크다. 실제 대중은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최근 정당의 지지도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바, 지지정당이 없다고 말한 부동층이 40~45%에 달하고 있으며, 투표율은 더욱 낮아질 것이란 예상이 우세하다. 게다가 각 정치세력들의 정치개혁 의제나 정책에서도 별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 비례대표제 확대, 선거구 조정과 같은 문제가 정치개혁의 성패가 달린 문제처럼 선전되고 그에 대한 입장이 각 당의 차이 같지만, 이는 각 정당이 자신에게 유리한 지분확보를 위한 사활적인 과제이지 정치개혁 자체의 핵심은 아니다.
한편 현재 달아오르고 있는 정치개혁 논의는 ‘인적청산과 세대교체’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모두에게 이번 총선의 모토는 “일하는 정치(전문성 강화), 깨끗한 정치(정치자금 투명화)로 경제를 되살리자(신자유주의 개혁)!”로 요약된다. 시민운동진영의 이번 총선대응의 주된 흐름인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과 ‘2004 총선 물갈이 국민연대’의 당선운동 흐름도 이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중의 삶에서 정치의 중요성이 사라진 상황은 몇몇 참신하고 전문성 있는 인물교체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패청산, 젊은 정치, 일하는 정치라는 쟁점이 국민을 인입하고 있다면, 이는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상황만은 아니고, 이러한 정치개혁을 통한 현실적인 실리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대선 당시 노무현 정권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386세력은 현실적 실리의 최우선 이해당사자이다. 정치적으로 이들은 길었던 ‘3김 시대’를 거치며 본격적인 정치적 진출이 지체되었던 계층이다. 게다가 이제 386들은 이제 40대에 접어들었으며, 계층으로 보자면 대졸중산층(상대적으로 안정적인)이다. 자신의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지며, 포섭될 희망이 강력한 계층이다. ‘세대교체’는 3김 시대의 구태의연한 세력들로부터 자신들에게로 정치적 발언력과 권한이 이전되는 강력한 계기이다. 그리고 정치개혁은 자신들의 안정된 생활을 지키는 길(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행정적 방식으로 정당의 역할을 조정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치개혁 쟁점이 부각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미디어의 조작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매일같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권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정치권의 반성과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개혁에 관한 각종 토론회와 전문가 진단 프로그램을 구성하며 정치개혁의 상을 제시한다. 게다가 한국사회의 미디어들은 계속해서 효율적인 행정의 중요성과 무능한 국회를 대비시키며 대립을 조장해왔다. 미디어는 행정부는 대통령의 지도력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정책개혁과 갈등조정의 역할을 다 해야하고, 국회는 당략에 사로잡혀 행정부의 효율성을 저해하지 말아야한다고 비판해왔다. 이는 현재의 정치개혁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는 바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로 꼽히는 지역감정을 해결하는 것도 정치개혁의 과제 중 하나다.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확보하고자 하는 전국정당, 무지개 정당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과제이다. 지금의 지역감정은 이전 3김 시대와 달리 성장으로부터의 지역배제와 이에 따른 지역경제 침체라는 조건이 존재한다. 이는 (민족)국가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지역을 선별 포섭하는 세계화 과정에서 동반되는 것이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민족)국가 차원이 아니라 지역별로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발전전망을 가지고 포섭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신자유주의 개혁을 거치면서 수도권을 제외한 여타 지역은 극심한 배제를 경험했다. 이 속에서 실리주의적인 지역발전 이데올로기는 지역감정의 새로운 조건을 낳았다. 더 이상 지역감정은 영․호남의 지역적 분할선을 타고 균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개혁의 과제로서 지역감정 타파는 모든 지역에 골고루 발전의 전망을 약속해야 한다(실제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당선의 중요한 전략은 지역별로 발전을 약속한 것이었다.). 영․호남을 넘어서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약속(열린우리당의 총선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두를 만족시키려면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배제와 포섭의 논리는 계속 지역발전의 전망과 공존한다. 게다가 지역 내부의 불평등과 배제가 더욱 문제다. 한 지역의 발전이 그 구성원 모두의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어떤 지역도 노동의 불안정화와 빈곤의 심화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지역발전 이데올로기는 내부의 배제를 쟁점에서 사라지게 한다.
정확한 현실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자.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위기는 이제 사회의 해체로 나아가고 있다. 가족과 학교 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가 나타난다. 위기와 그 극복전략을 둘러싼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대치가 심화된다. 지배세력은 ‘참여’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포섭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며, 위기를 관리하고자 한다. 배제의 공포 속에서 대중은 내가 아닌 다른 희생양을 찾는다.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논리가 극심해진다. 누군가는 ‘수건돌리기’라고 표현했다. ‘나의 뒤에 수건이 놓이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만약 놓인다면 내가 살기 위해서 그 수건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 위기의 해결이 아닌 지연의 악순환.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정확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사회의 객관적 조건과 현실에 대한 인식, 대중의 불만과 고통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 갈등을 조정하고 위기를 관리하며, 경쟁과 희생의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해내는 지배세력의 방식에 조응하는 것은 운동이 처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참여의 수혜와 관용’을 받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운동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위기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이에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운동 사이의 괴리는 커지고, 이 괴리는 더욱 큰 대중의 절망을 낳는다. 대중을 수동적으로 동원할 것인가, 대중을 능동적으로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는 지배세력과 우리가 맞서야 하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대중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적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이 문제에 맞서는 우리의 출발점이다.PSSP
노무현 정권의 정책은 동북아 중심으로 성장, 번영한다는 구상으로 수렴된다. 이의 핵심은 자본유치이다. 그러나 지난 해 극심한 경기침체와 가계파산, 생계형 자살 증가와 같은 삶의 불안은 노무현의 구상의 실효성에 의구심을 낳았다. 자본도 노동도 강력한 불만을 제기했으며,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었다. 결국 노무현은 자신의 재신임을 내걸고, 일정정도의 정국주도력을 장악했지만 각종 사회갈등과 지배세력 내의 갈등을 관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이제 노무현은 “투자활성화를 통한 성장잠재력 창출 - 일자리 창출”이라는 정책 방향을 내놓고, 위기관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적극적인 외자유치와 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위한 제반 여건을 조성하기(대외개방, 노동 유연화, 금융시장 안정화 등) 위해 모든 경제․사회 정책이 구상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대중의 기본권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따라서 갈등과 저항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이를 관리하기 위한 사회통합 정책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금의 위기는 경제위기로 국한되지 않는 사회의 해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를 동반하고 있다. 가족의 해체, 교육의 붕괴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중첩되는 현상이면서 동시에 대중의 삶의 고통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원인이다. 더군다나 가족과 교육은 대중의 삶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대부분 ‘사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공동체 자체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대중의 실리주의를 더욱 자극한다(포섭에 대한 기대와 배제에 대한 공포). 실리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 코퍼러티즘적인 협약에 대한 대중의 선호-행정기구와 각각의 대중의 실리(소위 이익집단)가 직접 갈등을 조율하고 타협하는 방식-가 일반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선 정당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정당정치는 행정부의 관리 방식의 효율성에 미달하는 무능력한 것이고, 대중은 자신의 삶에서 의회정치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정치적 안정성의 확보는 지배세력들에게 사활적인 과제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정치개혁의 목적은 효율적인 위기관리, 갈등조정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정당의 역할을 조정하는 것이다. 정당은 기존의 이념지향을 벗어나서 전국정당, 무지개 정당이 되어야 한다. 모든 국민을 아우를 수 있어야 위기관리와 갈등 조절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의 ‘참여적 발전’은 대중을 동원하고 동시에 대중들의 불만과 갈등이 급진적으로 전화될 수 있는 능동적 요소를 무력화하는 전략이지만, 이 역시 모순과 갈등의 여지가 많다. 참여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대중을 동원하고, 이러한 동원이 대안과 전망의 부재를 메꾸어 사회의 통합을 이뤄내고자 한다. 하지만 참여의 논리가 극도의 실리주의에 기초하기 때문에(참여한 자만이 수혜를 얻을 수 있다는), 참여를 통한 합의는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결론을 낳을 뿐이다. 오히려 갈등은 증폭되고, 다양한 요구들이 충돌하며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지만 정권에게는 ‘참여’ 자체가 중요한 것인데, 이미 참여는 책임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운동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민중운동이 노무현 정권의 ‘참여적 발전’의 동원 대상에서 제외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민중운동 내부, 노동자 대중 내부의 분할을 심화시키고, 일부를 포섭하는 것은 정권에게 중요한 과제다. 좋았던(?) 옛날을 미래의 전망으로 갖는 것은 정권과 지배세력의 관리방식과 공명하는 것이다. 대중의 실리적인 요구에 기반을 둔 이런 대응은 대중의 운동에 대한 불신과 대중의 수동성을 증가시킬 뿐이다. 현재의 위기가 이러한 실리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현재 대중이 겪고 있는 고통과 삶의 해체가 운동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어떻게 이들의 불만을 능동적으로 조직할 것인지를 차분히 고민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정치과정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은 이질적인 지지층들을 일시적으로 규합해서 수권에 성공했다. 이는 서로 다른 집단들의 이해와 요구를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노무현 자신이라는 희망의 조작을 통해 가능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비전과 정책방향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철저히 신자유주의 개혁 방향에 자신의 조타수를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조건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은 국민의 갈등과 불만을 야기했지만, 노무현 정권은 그들의 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으며 국민들의 불만과 불안에서 비롯되는 혼란을 수습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당선 직후 터져 나온 대통령 측근 비리 문제는 대선자금 문제, 불법정치자금 문제로 일파만파 되었다. 물론 이런 무능과 부정부패는 노무현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라는 현 상황에서 위기를 봉합하고, 지연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대안이나 비전도 제시할 수 없는 지배세력 전반이 직면한 문제이다. 이 문제의 근간에는 삶의 파탄과 사회의 해체에 직면한 노동자 대중의 불만이 놓여있으며, 따라서 핵심은 어떻게 이 불만을 관리(혹은 조직화)할 것인가이다.
이러한 노무현 정권의 대응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으로 비롯된 소위 ‘재신임 사태’다. 경제위기와 이로부터 다양한 갈등과 불만들이 드러나고 동시에 지배계급 내부의 각 분파간의 갈등 또한 첨예해진 상황에서 노무현은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시했다. 재신임 선언은 “대통령 자신과 국가의 위기,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협박에 다름 아니었다. 허나 이 ‘국민협박극’은 역설적이게도 ‘국민투표’라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가장 민주적인 기제를 통해 이루어질 판이었으니, 이만큼 노무현 정권이 말하는 ‘참여’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결국, 노무현이 말하는 ‘참여’란 비전과 대안이 없는 지배계급의 무능을 참여를 통해 국민과 대중에게로 전가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을 참여시켜 합의를 도출하는 것, 이 합의로 비전과 대안의 부재를 대체하는 것이 ‘참여’ 논리의 핵심이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참여에는 경계가 이미 정해져있다. 당연히도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어떻게 잘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가 그 기준이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 혹은 동의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은 배제된다.
‘참여’를 매개로 한 노무현 정권의 정치과정은 이후 더욱 강화될 것이다. 17대 총선에는 노무현의 재신임 문제가 달려있다. 정권의 사활이 걸린 이번 총선에서 알맹이 없는 선심성 공약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그것이 결국 ‘공약’일 뿐인 조건에서 ‘참여’는 더욱 강조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말해온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은 요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협약 체결’이라는 내용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현재 대중들의 삶의 문제가 되고 있는 실업의 문제를 노동자들을 참여시키는 가운데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상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라는 점이 문제다. 그리고 현재 있는 일자리를 쪼개는 방식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지만, 정권과 지배세력은 이 이상의 방안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로부터 또 다시 갈등은 촉발되겠지만, 정권은 계속해서 ‘참여’를 통한 합의를 강조할테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력들에겐 폭력과 배제가 남겨질 것이다.
한국 사회가 처해있는 조건과 노무현 정권의 정책 전망
자본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기 위해 지속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은 이미 주어진 방향성이다. 지난 1년 노무현이 갈팡질팡하는 행보 속에서도 계속해서 제출했던 각종 로드맵은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이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기본 구상이다. 애초에 노무현은 ‘동북아 중심 국가 실현’을 한국 사회 발전 전략으로 내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동북아 중심 국가의 핵심에는 외국인 자본 유치가 필수적인 바, 자본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는 것이 그 조건이 된다. 그리고 이는 끊임없이 민중들의 기본권(생존권, 민주주의 등)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한 갈등이 다양하게 폭발했다. 게다가 지난 해 지표상의 경제성장률이 2%로 하락하면서 경제가 악화되었다는 평가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현실에서 체감되는 위기는 훨씬 심각했다(경제위기를 넘어선 사회적 위기라 할 만하다: 생계형 자살 급증, 개인신용불량자 급증, 출산율 저하 등). 물론 이러한 현실이 세계화된 시대의 한국경제의 발전전략으로서 ‘자본유치형 국가’라는 방향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는 DJ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 사회의 기본 방향이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과 불안 요소들을 제어하면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인가이다.
올해 경제전망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학자들은 4%~5%의 경제성장률을 예상하면서 대체적으로 회복세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세계경제(미국을 비롯한 중국과 유럽 경제)의 성장이라는 대외여건의 개선을 제시하고 있지만, 세계경제의 성장이 수출 증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추측일 뿐,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이를 전제로 회복세에 접어든 경제를 발판으로 동북아 중심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전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장동력을 확충하는 문제가 시급하다는 요구가 주를 이루는데, 그들이 성장잠재력의 장애로 꼽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고용 없는 성장(만연된 실업), 경제 시스템의 낙후성(노사분규, 기업의 투명성 등), 소극적인 대외개방(FTA, 서비스 시장 개방 등), 사회의 양극화로부터 비롯된 사회적 갈등(서민들의 생활 안정).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고용 없는 성장’은 경제가 성장함에도 고용이 증가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이의 원인으로는 그나마 수출 증대에 기여하고 있는 IT 산업의 고용흡수 능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 제조업의 중국진출로 인한 공동화 현상과 투자 부진으로 인한 신규채용 미비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경제의 위기를 신자유주의 개혁을 통해 지연시키려는 시도 속에 이미 예정되어있던 결과이다. 이미 97년 외환위기 이후로 추진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만연된 실업과 불안정한 고용을 노동시장의 일반적인 조건으로 만들어왔다. 그리고 한국경제가 (금융, 자본 시장에) 자본투자를 유치하여 성장하겠다는 전략을 취하는 바, 제조업 부문이 성장동력일 수 없다는 점은 전제된 바이다. 그럼에도 최근 고용/실업의 문제가 새삼스레 부각되고 있다면, 그것이 가지는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재정경제부는 2004년 연두 업무보고에서 ‘투자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정책으로 꼽았으며, 이를 올해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성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이전과 같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연한 노동시장은 국내 기업뿐만 아니라 초민족적 자본의 요구이며, 신자유주의 개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일한 길은 “기간제 고용에 대한 규제 완화, 해고관련 규제 완화 등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계속 추진함으로써 다양한 고용행태를 보편화시켜 잠재적인 노동수요가 고용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추진해온 고용, 실업 정책의 맥락과 다를 바 없다. 동시에 이 말은 지금 재경부가 말하는 '일자리 창출' 정책이 실효성이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정부가 솔선하여 고용창출에 앞장서겠다며 생색을 내고 있는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과 청년실업대책도 그 대부분이 임시직, 직업훈련, 해외연수와 같은 단기처방일 뿐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정권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고용 없는 성장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 하에 기업의 투자활성화가 중요해진다(일자리 확충의 주체는 기업이고, 기업의 투자가 증가해야 일자리도 늘릴 수 있다). 결국 일자리 창출 정책의 핵심은 일자리가 아니라 투자이다(기업하기 좋은 나라). 모든 경제․사회적 정책의 방향성은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쪽으로 맞춰진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투자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양자간․다자간 자유무역협정과 WTO 협상은 필수적이고 확대되어야 하며, 교육과 의료 등의 사회서비스 산업에 있어서 지나치게 공공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본의 투자처를 축소시키는 일이다.
포섭의 기대와 배제의 공포
여기서 핵심적으로 보아야할 부분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불안정한 삶과 만연한 실업이라는 민중의 불만을 다시금 자본의 투자를 위한 최적조건을 형성하기 위한 근거와 동력으로 삼는 역설이다. 우선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라는 비전이 제시되었다. DJ의 경제개혁을 통해 한국 경제는 초민족적 자본들에게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어 자본을 유치하는 것 외에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하에서 살아남을 방도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지적했듯이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수익을 보장하기 위한 개혁은 끊임없이 민중의 기본권과 충돌한다. 노무현 정권은 출범 이후 외자 유치를 위한 조건을 갖춘 한국의 미래로서 ‘동북아 경제 중심’을 제시했지만, 이를 진전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자유구역법 저지 투쟁, 화물연대의 파업, FTA 체결 반대 투쟁 등 노동자 민중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그의 약속에 대한 기대는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조건에서 더욱 커다란 불만과 갈등을 가져왔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 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남은 것은 이 갈등과 불만이 체제의 위기로 전화하지 않도록 사활을 걸고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 하반기 노무현이 제시한 “소득 2만불 시대로 나아가자!”는 구호는 그 내용에서는 동북아 중심 국가 구상과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수사에 불과하지만,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있었다. ‘소득 2만불’이라는 표현은 동북아 중심 국가보다 훨씬 직설적이며, 그만큼 실리적인 기대를 자극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경제가 “마의 1만불 벽을 넘어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느냐, 지금 이 상태에서 주저앉느냐”하는 기로에 서있다는 의식을 확산시켰고, 경제위기 상황과 맞물려 더욱 커다란 위기감을 자극했다. 누구도 지금과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주저앉고 싶지 않다. 소득 2만불 시대를 실현하고, 동북아 중심 국가로서 번영을 누리는 것은 위기감 속에서 합의된 한국 경제의 유일한 미래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나라를 망치는’ 세력으로 가차없이 짓밟아야 했다(작년 하반기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대한 탄압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이와 같은 강요된 합의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관리 방식을 실행에 옮기고자 한다. ‘투자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성장잠재력 배양과 경쟁력 강화’라는 정책 목표의 핵심은 ‘투자’에 있지만, ‘고용과 실업’ 그리고 나아가 성장과 발전이라는 전 국민적인 의제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민중의 저항과 운동에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일례로 노무현 정권은 이 정책 과제 중의 하나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협약 체결 선언을 제시했다. 고용과 실업은 노동자운동 일부가 사회적 협약에 참가하는(혹은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협약의 결과, 현재의 불안정한 노동은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심화된다. 노동의 불안정화가 심화되는 것 자체도 커다란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사회적 협약이 ‘포섭과 배제’라는 정권의 위기관리방식의 더욱 강력한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삶과 사회가 위기에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은 불안과 공포를 가중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이라도 지켜야한다는 실리주의의 등장은 당연한 현상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층-중산층과 화이트칼라 노동자 일부-은 자신의 안정을 지키려할 것이다. 이들은 포섭과 참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다수-광범위한 빈곤층, 실업과 반실업 상태에 놓인 대중(이들의 대다수는 불안정 노동층이다), 이주노동자, 여성, 농민-는 배제된다. 게다가 이들의 저항은 용납할 수 없는데, 포섭된 대상들의 안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 내부의 분할은 극심해지고, 결과적으로 (포섭된) 대중이 (배제된) 대중의 투쟁과 저항을 억압하는 비극을 낳을 수 있다.
게다가 이미 만연한 실업의 문제를 국정 가장 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엄밀히 보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문제가 되어왔던 실업과 고용의 불안정이 방치되었을 때 그 자체로 커다란 사회적 위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전반적인 맥락을 보았을 때, 오히려 노무현 정권의 노동자에 대한 포섭과 관리의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자본의 투자에 걸림돌이 되어온 노동자 대중의 저항을 순치하겠다는 강력한 구상이다. 만일 노동자운동이 사회적 협약을 거부한다면(이미 실리주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노동자운동이 이를 거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는 전 국민적인 의제를 거부하고, 한국사회의 미래를 망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노동자운동은 이데올로기 공세와 물리적 탄압에 직면할 것이며, 이는 또 다시 노동자 대중 내부의 분할을 심화시켜 운동의 가능성을 점차 어렵게 만들게 된다.
정당정치의 위기와 정치개혁
신자유주의 개혁 하에서 정당정치는 사회적인 갈등과 위기를 조정하지 못하고, 정치 자체가 위기에 빠진다. 정당은 더 이상 국가행정에 대해 계급적 이익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대표하는 역할을 맡고있지 못하다. 정당은 이미 정책결정에 실질적인 관여를 못하고 있으며, 정당간에 정책적 차별성도 거의 없다. 국회의 입법활동이란 행정을 보조하는 역할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다. 정책의 큰 방향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이미 주어져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정책결정은 행정부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행정부는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면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실행해야 한다. 정책의 정당성 확보는 대의제 민주주의 기관인 국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행정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로부터 정당과 의회정치의 역할을 축소되고, 행정기구의 역할과 권력은 증대된다.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한 위기관리체제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위기를 관리하는 행정적이고 기술관료적인 방식이 정치를 갈음한다. 따라서 정당의 역할도 조정되어야 하는데, 그 핵심은 전문성과 효율성을 갖추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당 외부의 다양한 동원기구, NGO 등과 파트너쉽을 형성하며 이들을 활용한다. 정당 또한 행정부처럼 정책적 전문성을 갖추고, 어떤 이념보다는 사회적 갈등을 행정적인 방식으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렇게 정당의 역할을 조정하기 위해선 정치개혁이 중요한 쟁점이 된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개혁 논의는 한층 가열되고 있다. 정치개혁이라는 쟁점은 이미 지난 대선 시기부터 수면 위로 부상한 문제지만, 현재는 가히 ‘정치의 과잉’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정치개혁이 핵심적인 화두가 되었다(흡사 정치가 바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하지만 이는 외양면에서 부풀어있는 측면이 크다. 실제 대중은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최근 정당의 지지도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바, 지지정당이 없다고 말한 부동층이 40~45%에 달하고 있으며, 투표율은 더욱 낮아질 것이란 예상이 우세하다. 게다가 각 정치세력들의 정치개혁 의제나 정책에서도 별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다. 비례대표제 확대, 선거구 조정과 같은 문제가 정치개혁의 성패가 달린 문제처럼 선전되고 그에 대한 입장이 각 당의 차이 같지만, 이는 각 정당이 자신에게 유리한 지분확보를 위한 사활적인 과제이지 정치개혁 자체의 핵심은 아니다.
한편 현재 달아오르고 있는 정치개혁 논의는 ‘인적청산과 세대교체’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모두에게 이번 총선의 모토는 “일하는 정치(전문성 강화), 깨끗한 정치(정치자금 투명화)로 경제를 되살리자(신자유주의 개혁)!”로 요약된다. 시민운동진영의 이번 총선대응의 주된 흐름인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과 ‘2004 총선 물갈이 국민연대’의 당선운동 흐름도 이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중의 삶에서 정치의 중요성이 사라진 상황은 몇몇 참신하고 전문성 있는 인물교체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패청산, 젊은 정치, 일하는 정치라는 쟁점이 국민을 인입하고 있다면, 이는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상황만은 아니고, 이러한 정치개혁을 통한 현실적인 실리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대선 당시 노무현 정권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386세력은 현실적 실리의 최우선 이해당사자이다. 정치적으로 이들은 길었던 ‘3김 시대’를 거치며 본격적인 정치적 진출이 지체되었던 계층이다. 게다가 이제 386들은 이제 40대에 접어들었으며, 계층으로 보자면 대졸중산층(상대적으로 안정적인)이다. 자신의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지며, 포섭될 희망이 강력한 계층이다. ‘세대교체’는 3김 시대의 구태의연한 세력들로부터 자신들에게로 정치적 발언력과 권한이 이전되는 강력한 계기이다. 그리고 정치개혁은 자신들의 안정된 생활을 지키는 길(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행정적 방식으로 정당의 역할을 조정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치개혁 쟁점이 부각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미디어의 조작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매일같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권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정치권의 반성과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개혁에 관한 각종 토론회와 전문가 진단 프로그램을 구성하며 정치개혁의 상을 제시한다. 게다가 한국사회의 미디어들은 계속해서 효율적인 행정의 중요성과 무능한 국회를 대비시키며 대립을 조장해왔다. 미디어는 행정부는 대통령의 지도력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정책개혁과 갈등조정의 역할을 다 해야하고, 국회는 당략에 사로잡혀 행정부의 효율성을 저해하지 말아야한다고 비판해왔다. 이는 현재의 정치개혁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는 바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로 꼽히는 지역감정을 해결하는 것도 정치개혁의 과제 중 하나다.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확보하고자 하는 전국정당, 무지개 정당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과제이다. 지금의 지역감정은 이전 3김 시대와 달리 성장으로부터의 지역배제와 이에 따른 지역경제 침체라는 조건이 존재한다. 이는 (민족)국가 전체가 아니라 특정한 지역을 선별 포섭하는 세계화 과정에서 동반되는 것이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민족)국가 차원이 아니라 지역별로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발전전망을 가지고 포섭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신자유주의 개혁을 거치면서 수도권을 제외한 여타 지역은 극심한 배제를 경험했다. 이 속에서 실리주의적인 지역발전 이데올로기는 지역감정의 새로운 조건을 낳았다. 더 이상 지역감정은 영․호남의 지역적 분할선을 타고 균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개혁의 과제로서 지역감정 타파는 모든 지역에 골고루 발전의 전망을 약속해야 한다(실제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당선의 중요한 전략은 지역별로 발전을 약속한 것이었다.). 영․호남을 넘어서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약속(열린우리당의 총선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두를 만족시키려면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배제와 포섭의 논리는 계속 지역발전의 전망과 공존한다. 게다가 지역 내부의 불평등과 배제가 더욱 문제다. 한 지역의 발전이 그 구성원 모두의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다(어떤 지역도 노동의 불안정화와 빈곤의 심화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지역발전 이데올로기는 내부의 배제를 쟁점에서 사라지게 한다.
정확한 현실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자.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위기는 이제 사회의 해체로 나아가고 있다. 가족과 학교 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가 나타난다. 위기와 그 극복전략을 둘러싼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대치가 심화된다. 지배세력은 ‘참여’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포섭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며, 위기를 관리하고자 한다. 배제의 공포 속에서 대중은 내가 아닌 다른 희생양을 찾는다.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논리가 극심해진다. 누군가는 ‘수건돌리기’라고 표현했다. ‘나의 뒤에 수건이 놓이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만약 놓인다면 내가 살기 위해서 그 수건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 위기의 해결이 아닌 지연의 악순환.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정확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사회의 객관적 조건과 현실에 대한 인식, 대중의 불만과 고통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 갈등을 조정하고 위기를 관리하며, 경쟁과 희생의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동원해내는 지배세력의 방식에 조응하는 것은 운동이 처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참여의 수혜와 관용’을 받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운동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위기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이에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운동 사이의 괴리는 커지고, 이 괴리는 더욱 큰 대중의 절망을 낳는다. 대중을 수동적으로 동원할 것인가, 대중을 능동적으로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는 지배세력과 우리가 맞서야 하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대중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적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이 문제에 맞서는 우리의 출발점이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