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바탕이 연대이듯이 운동의 바탕도 역시 연대입니다
나를 사닥다리라고 한 말은 극히 지당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나도 심사숙고 해보았습니다. 만일 젊은 후진들이 정말 사닥다리를 밟고 더 높이 오를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야 밟히운들 원한이 있겠습니까......그리하여 소인은 어쩔 수 없이 젊은이들을 위해 사닥다리가 될 각오를 하였으나 그들이 사닥다리를 밟고 오를 것 같지 않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루쉰(1930년)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시절의 절반을 선생님의 주변에서 보내왔다. 어디까지가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서 변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아닌지 구분하기도 어려울만큼 주변의 동시대 사람들과 더불어 변화해온 나날들이었다. 선생님은 늘 우리의 외피였고, 때로는 ‘알리바이’이기도 했다.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 펼쳐진 자락의 넓은 언저리에서 ‘이런 일들은 선생님이 하실테니까’, ‘저런 일들은 선생님이 앞으로 하실 것이니까’하면서 우리는 그 외피를 있는 듯 없는 듯 둘러안고서 살아온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 외피가 좀 더 넓기를, 어떤 이들은 그 외피가 좀 더 치밀하게 짜여지기를 원했지만 그 외피는 늘 있는 것이기에 어느덧 일상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지금 그 외피가 사라지고 선생님의 빈자리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다. 슬픔보다는 무거움으로 다가오는 그 빈자리는 앞으로도 조금씩 조금씩 더 발견될 것이다.
선생님을 만나서 늘 꼭 여쭈어 보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었다. 퇴임 하신 후 과천에 내신 연구실을 찾아갔을 때도 다음에는 한번 꼭 물어보아야지 하는 질문이었다. “무엇이 선생님을 그렇게 계속 지탱시켜주고 올바른 입장을 찾아가도록 만들어 주는가요?”라는 물음이었다. 올바른 이론적 입장인가? 그것만은 아니다. 삶의 자세일까? 그것만으로는 여러 가지 상충되는 정치적 입장들 사이에서 선생님의 발언의 위치를 찾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기에 그것만도 아닐 것이었다. 80년대 이후 겪은 선생님의 경험 때문일까? 그러나 그 경험을 공유한 사람이 무수히 많은 만큼 빠르게 변신한 사람의 수도 많으니 그도 아닐 것 같다. 이 또한 선생님의 외피가 당연한 것이었던 것처럼 선생님은 그런 분이니까 그러리라고 덮어놓았다. 그러다 여쭈어 볼 기회를 잃은 것이다.
4.19세대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4.19 현장에 목소리 높여 제1선에 섰다가 그것을 자원으로 재빨리 또는 서서히 변신한 많은 이들과 달리 선생님은 스스로도 ‘주역’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생님께 4.19는 “전복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자유를 인식케 한 사건”이었다. ?자유를 위한 기획을 꿈꾸며?(1999년), ?21세기 진보운동의 기획?, 문화과학사, 2003년, 188쪽.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전태일 열사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선생님이 스스로 운동에 투신한 삶의 여정을 정리한 서울대 교수 정년 퇴임사는 “여기에 이소선 여사께서 오시지는 않았습니다만...”으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전태일은 1970년에 시작되는 만남이 아니라 1970년대 말, 1980년대 말, 그리고 1990년대 전노협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 만남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광주가 있을 것이다. 삶의 전환점이 되었을 해직은 광주와 연결되어 있고, 해직교수협의회에서 1987년, 민교협까지 이르는 과정은 광주와 연결되어 있으니. 그리고 광주는 선생님 개인만의 변화가 아니라 1980년대를 겪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운동과 함께한 것이기에, 변화는 변화를 낳고 자극은 서로를 향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청년들이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 스스로 늘 청년이셨고 사고가 정체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스스로 변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으니 그럴만도 하다. 퇴임하시면서 낸 평론집을 박종철출판사에서 내시면서 선생님은 “그가 꿈꾸던 것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도 애쓴 흔적을 그에게 보이고 싶다”하시지 않았는가. ?진보에서 희망을 꿈꾼다?, 박종철출판사, 2003, 7쪽.
상도연구실에서부터 시작해 산업사회연구회의 출범,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궤적, 그리고 대학원의 후학들간의 관계가 그런 발자취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정년퇴임사에서는 마지막에 “저는 젊은 활동가들이 모인 사회진보연대와 진보네트워크센터가 기존의 운동단체에 덧붙여져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리라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그런 경험 속에서 선생님은 변화해 오셨고, 그렇게 선생님의 신념을 만들어 오셨는지 모른다. 그러나 좀 더 알고 싶다. 무엇이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선생님의 빈자리를 다시 생각할 때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 것일까?
선생님은 지난해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나에게는 인식을 위한 탐색의 길이 두가지 축을 이루고 있다. 하나는 자본과 이에 동전의 양면을 이루어온 국가를 발전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모든 대상을 차별화하고 배제하고 통제하고 폭압하는 맥락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본과 국가에 내재된 폭력을 철저히 인식하는 축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이나 혹은 이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이러한 모순이 어떻게 표출되고 있고 이를 제어하거나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따져 사회운동을 만들어 내거나 생성시키는 일에 관한 논의이다” ?21세기 진보운동의 기획?, 문화과학사, 2003, 6쪽.
자본과 국가를 발전이 아니라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며, 이런 인식론적 전제로부터 새로운 운동의 형식을 개발해간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말들의 핵심은 달리 말하자면 ‘민중의 자리에 서기’일 것이다. 민중을 위한 지식인이 아니라 민중의 지식인이 되려는 것, 그것이 선생님의 삶의 자세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자본주의 세계의 억압의 두 축인 자본과 국가의 폭력성을 밝혀내고, 그 모순들의 다양한 측면들을 규명하고 그것의 극복의 계기를 새로운 운동형식 속에서 발견하려는 집단적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선생님은 늘 민중의 자리에 서려고 하셨다. 그렇게 선생님은 1980년대 중반 민중-계급론을 도입하면서 민중적?민족적 사회학을 구성하려 노력하였다. 출발점에서 선생님은 민중론의 핵심에 계급의 문제가 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 문제가 단지 계급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음을 강조하셨다. “올바른 민중성의 내포야 말로 계급성?민족성이고, 그러한 원칙의 구체화가 민족적?민중적 학문의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적?민족적 학문을 제창한다?(1988년), ?사회과학과 민족현실2?, 한길사, 1991, 20쪽.
그런 민중론의 함의는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지식인운동가인 선생님으로서 ‘민중의 자리에 서기’는 두가지 함의를 지닌다. 첫째는 모순과 억압의 다차원성과 중층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억압의 극복은 억압을 이론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1990년대 초 고백과 전향의 시대에 계급을 버리는 대신 계급적 모순과 다른 모순들의 절합과 다차원성을 밝힐 것을 요구한 것이 그런 방향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민중 범주의 외연과 내포를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민중은 자명한 범주가 아니고 그 자체로 운동하는 범주가 되며, 모순 구조의 변화나 정세의 변화, 그리고 이론의 확장에 따라 그 범주 또한 확장되어야 한다. “민중과 계급의 구성에 대하여 진지하고 엄밀한 재규정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작은 주체들의 존재 알림과 노동운동의 지형문제?(2002년), ?21세기 진보운동의 기획?, 177쪽.
민중적-민족적이면서 민중적-여성적이어야 하고, 민중적-인종철폐적이어야 하는 민중의 범주를 모색하는 일은 문제제기로서, 그리고 운동 자체로서 발전해온 것이었다. 민중이라는 범주는 ‘민중되기’ 그 자체였다. 고정된 계급의 틀이 아닌 확장되는 민중의 범주 속에서 운동을 사고하고 운동의 새로운 형식을 고민할 것을 요구하였다. 선생님은 노동자, 농민, 빈민 나아가 여성, 이주노동자와 아동까지 확장하여 다양한 권리의 차원을 민중 범주 속에서 사고했다. 이 ‘민중의 자리에 서기‘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1990년대 초 여러 가지 이유를 들고 이론적 자기 정리를 통해 ‘낮에 나온 반달’이 될 수 없노라며 변신을 선언한 많은 이들과 달리 차라리 이론적 부정합성 속에서조차 불가능한 영역들의 결합과 문제제기의 개방, 그리고 새로운 운동 형식의 요구로 나아가려는 것을 통해 진보의 가능성을 발견하려고 선생님은 노력하셨다.
그렇게하여 1987년 선생님께서 함께 하고자 했던 이들과 함께 민교협은 “기층민중의 민주적 역량을 주목”하여 설립하었고, ?한국사회 변동과 민교협?(1997년), ?21세기 진보운동의 기획?, 254쪽.
선생님의 말씀대로 역사적 정세속에 등장한 이 지식인 운동은 1980년대 사회성격논쟁과 1990년대 민중운동, 특히 전노협의 결성 사이에 존재해 있던 지식인의 ‘민중 자리에 서기’의 한 노력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1990년 4월 결성된 국민연합(민자당 일당독재 음모 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 국민연합)에 선생님이 기울인 열정은 민중의 자리에 서려는 선생님이 삶의 지평을 확장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계급 속에서 민중을 찾기보다 민중 속에서 계급을 찾으려는 노력과 민중 범주의 내포와 외연의 확장은 1990년대 이후 선생님의 사회운동 참여에서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방향인 ‘연대’를 만나게 된다. 모순의 다차원성과 민중 속에서의 통일성은 운동의 형식에서 고정된 민중범주에 의거하는 것이 아닌 발전해가는 민중범주에 의거한 운동 형식의 다양성과 상호교통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단일 형태 하에서의 통일이 아닌 연대를 통한 교호적 발전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더불어 나타나는 초국경적 모순들의 발견과도 연결된다. “연대는 작은 것으로 대오를 쪼개는 것이 아니라 샛강에서 무수히 흘러나오는 온갖 물줄기를 큰 강으로 흐르게 하여 더욱 맑고 도도하게 가도록 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그렇기 때문에 연대에는 정화과정이 항상 내재하는 것이다.” ?샛강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들이 큰 강으로 흘러?(1999년), ?진보에서 희망을 꿈꾼다?, 273쪽.
퇴임사에서 말하셨듯이 “삶의 바탕이 연대이듯이 운동의 바탕도 역시 연대”이다. 선생님이 좋아하던 표현처럼 만물이 서로 자원이 되어 도움을 주어 삶을 열어간다는 상자이생(相資以生) 또한 바로 연대의 원리가 아니겠는가. 새로운 연대운동의 틀을 갈망하던 사회운동가들과 새로운 연대운동의 필요성을 추구하던 선생님이 1990년대 말 만나게 된 것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비판이론의 현실지향과 현실운동의 이론지향을 결합하는데 긴장을 잊지 않으셨다. 전자에 대해서는 퇴임사에서 “자본주의 모순이 지탱하거나 증폭하고 있는 사태에서는 자기가 채택하는 이론이나 개념이 우선 불안정한 삶에 내몰리고 있는 노동자/민중에게 어떤 효과를 주고 있는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이를 위한 국가권력의 행사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인지 혹은 이를 알려내고 억제하고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지식인-교수-연구자의 윤리적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셨다. 그와 동시에 앞서 말했듯이 민중범주의 확장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현실운동의 이론지향 또는 이론적 자기전화를 요구하셨다. 그렇지 않고 고정된 범주와 틀로 현실을 추려 할 때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 될 수는 있어도 민중의 자리에 선 운동이 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인의 인식론적 단절과 이론적 실천의 노력은 피를 말리는 일일 것이다” ?객관적 조건을 인식하는 비판적 안목의 문제?(1998년), ?21세기 진보운동의 기획?, 247쪽.
라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사실 운동 지형 내에서 이론적 입장의 선긋기를 분명히 하는 것과 운동을 널리 품어내는 것이 양립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선생님이 이 두 입장을 동시에 지녀온 것은 선생님이 대들보이기보다는 주춧돌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앞에서 끌기보다는 뒤에서 밀어주는 것을 더 중요한 소임으로 생각한 분이였다. 그래서 선생님은 남들이 밟고 올라갈 사다리가 되기를 원한 것이었지 선생님의 갔던 길 그대로 모두가 따를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가시면서 선생님이 해오신 길의 한 세대가 마무리되고, 동일한 방식의 운동이 지속되기보다는 더 한걸음 나아간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선생님께서는 요구하고 있지 않겠는가?
이제 선생님의 빈자리의 몇 갈래가 보이고 있다. 선생님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계시던 관심들이 눈에 띤다. 첫째는 연구의 대상이기 이전에 삶의 투신 그자체인 민중운동인데, 그것을 1990년대 초 선생님의 애정어린 대상이자 연대의 출발점을 빌어 말하자면 ‘전노협 정신’이라 불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정신은 ‘노동해방은 노동자 스스로 운동 속에서 자기전화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며, 이를 위해 운동은, 지식인은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대의 틀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는 자본과 국가의 내적 폭력성의 규명으로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화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일, 그리고 그에 맞서는 일이다. 이론가와 활동가들은 이를 위해 집단적으로 어떤 조직적 준비를 할 것인가? 세 번째는 민중에 대한 새로운 포섭전략을 밝히고 그에 맞서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와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젊은 활동가에게 선생님이 기대를 했다면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생님께서 퇴임 전에 영상사회학이라는 영역을 개발하여 새로운 소통의 통로를 찾아보려 한 것도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선생님께서 무엇보다 전노협 후원회 공동대표,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소장, 사회진보연대 대표라는 직함에 큰 애정을 가지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 그렇게 선생님은 빈자리를 남기고 가셨고, 이제 외피를 잃은 남은 이들은 외피가 없기에 “나를 딛고 오르거라”는 외침에 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바치는 조사는 우리가 늘 듣는 것처럼 “선생님 뒤를 따르리니 편안히 잠드소서”나 “선생님께서 못다 이룬 것을 우리가 이룰 것이니 편안히 잠드소서”가 아니라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는지 두눈 뜨고 지켜보소서”로 맺어야 할 것 같다.
루쉰(1930년)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시절의 절반을 선생님의 주변에서 보내왔다. 어디까지가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서 변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아닌지 구분하기도 어려울만큼 주변의 동시대 사람들과 더불어 변화해온 나날들이었다. 선생님은 늘 우리의 외피였고, 때로는 ‘알리바이’이기도 했다.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 펼쳐진 자락의 넓은 언저리에서 ‘이런 일들은 선생님이 하실테니까’, ‘저런 일들은 선생님이 앞으로 하실 것이니까’하면서 우리는 그 외피를 있는 듯 없는 듯 둘러안고서 살아온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 외피가 좀 더 넓기를, 어떤 이들은 그 외피가 좀 더 치밀하게 짜여지기를 원했지만 그 외피는 늘 있는 것이기에 어느덧 일상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지금 그 외피가 사라지고 선생님의 빈자리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다. 슬픔보다는 무거움으로 다가오는 그 빈자리는 앞으로도 조금씩 조금씩 더 발견될 것이다.
선생님을 만나서 늘 꼭 여쭈어 보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었다. 퇴임 하신 후 과천에 내신 연구실을 찾아갔을 때도 다음에는 한번 꼭 물어보아야지 하는 질문이었다. “무엇이 선생님을 그렇게 계속 지탱시켜주고 올바른 입장을 찾아가도록 만들어 주는가요?”라는 물음이었다. 올바른 이론적 입장인가? 그것만은 아니다. 삶의 자세일까? 그것만으로는 여러 가지 상충되는 정치적 입장들 사이에서 선생님의 발언의 위치를 찾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기에 그것만도 아닐 것이었다. 80년대 이후 겪은 선생님의 경험 때문일까? 그러나 그 경험을 공유한 사람이 무수히 많은 만큼 빠르게 변신한 사람의 수도 많으니 그도 아닐 것 같다. 이 또한 선생님의 외피가 당연한 것이었던 것처럼 선생님은 그런 분이니까 그러리라고 덮어놓았다. 그러다 여쭈어 볼 기회를 잃은 것이다.
4.19세대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4.19 현장에 목소리 높여 제1선에 섰다가 그것을 자원으로 재빨리 또는 서서히 변신한 많은 이들과 달리 선생님은 스스로도 ‘주역’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생님께 4.19는 “전복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자유를 인식케 한 사건”이었다. ?자유를 위한 기획을 꿈꾸며?(1999년), ?21세기 진보운동의 기획?, 문화과학사, 2003년, 188쪽.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전태일 열사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선생님이 스스로 운동에 투신한 삶의 여정을 정리한 서울대 교수 정년 퇴임사는 “여기에 이소선 여사께서 오시지는 않았습니다만...”으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전태일은 1970년에 시작되는 만남이 아니라 1970년대 말, 1980년대 말, 그리고 1990년대 전노협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 만남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광주가 있을 것이다. 삶의 전환점이 되었을 해직은 광주와 연결되어 있고, 해직교수협의회에서 1987년, 민교협까지 이르는 과정은 광주와 연결되어 있으니. 그리고 광주는 선생님 개인만의 변화가 아니라 1980년대를 겪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운동과 함께한 것이기에, 변화는 변화를 낳고 자극은 서로를 향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청년들이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 스스로 늘 청년이셨고 사고가 정체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스스로 변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으니 그럴만도 하다. 퇴임하시면서 낸 평론집을 박종철출판사에서 내시면서 선생님은 “그가 꿈꾸던 것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도 애쓴 흔적을 그에게 보이고 싶다”하시지 않았는가. ?진보에서 희망을 꿈꾼다?, 박종철출판사, 2003, 7쪽.
상도연구실에서부터 시작해 산업사회연구회의 출범,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궤적, 그리고 대학원의 후학들간의 관계가 그런 발자취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정년퇴임사에서는 마지막에 “저는 젊은 활동가들이 모인 사회진보연대와 진보네트워크센터가 기존의 운동단체에 덧붙여져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리라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그런 경험 속에서 선생님은 변화해 오셨고, 그렇게 선생님의 신념을 만들어 오셨는지 모른다. 그러나 좀 더 알고 싶다. 무엇이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선생님의 빈자리를 다시 생각할 때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 것일까?
선생님은 지난해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나에게는 인식을 위한 탐색의 길이 두가지 축을 이루고 있다. 하나는 자본과 이에 동전의 양면을 이루어온 국가를 발전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모든 대상을 차별화하고 배제하고 통제하고 폭압하는 맥락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본과 국가에 내재된 폭력을 철저히 인식하는 축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이나 혹은 이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이러한 모순이 어떻게 표출되고 있고 이를 제어하거나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따져 사회운동을 만들어 내거나 생성시키는 일에 관한 논의이다” ?21세기 진보운동의 기획?, 문화과학사, 2003, 6쪽.
자본과 국가를 발전이 아니라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며, 이런 인식론적 전제로부터 새로운 운동의 형식을 개발해간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말들의 핵심은 달리 말하자면 ‘민중의 자리에 서기’일 것이다. 민중을 위한 지식인이 아니라 민중의 지식인이 되려는 것, 그것이 선생님의 삶의 자세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자본주의 세계의 억압의 두 축인 자본과 국가의 폭력성을 밝혀내고, 그 모순들의 다양한 측면들을 규명하고 그것의 극복의 계기를 새로운 운동형식 속에서 발견하려는 집단적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선생님은 늘 민중의 자리에 서려고 하셨다. 그렇게 선생님은 1980년대 중반 민중-계급론을 도입하면서 민중적?민족적 사회학을 구성하려 노력하였다. 출발점에서 선생님은 민중론의 핵심에 계급의 문제가 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 문제가 단지 계급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음을 강조하셨다. “올바른 민중성의 내포야 말로 계급성?민족성이고, 그러한 원칙의 구체화가 민족적?민중적 학문의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적?민족적 학문을 제창한다?(1988년), ?사회과학과 민족현실2?, 한길사, 1991, 20쪽.
그런 민중론의 함의는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지식인운동가인 선생님으로서 ‘민중의 자리에 서기’는 두가지 함의를 지닌다. 첫째는 모순과 억압의 다차원성과 중층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억압의 극복은 억압을 이론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1990년대 초 고백과 전향의 시대에 계급을 버리는 대신 계급적 모순과 다른 모순들의 절합과 다차원성을 밝힐 것을 요구한 것이 그런 방향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민중 범주의 외연과 내포를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민중은 자명한 범주가 아니고 그 자체로 운동하는 범주가 되며, 모순 구조의 변화나 정세의 변화, 그리고 이론의 확장에 따라 그 범주 또한 확장되어야 한다. “민중과 계급의 구성에 대하여 진지하고 엄밀한 재규정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작은 주체들의 존재 알림과 노동운동의 지형문제?(2002년), ?21세기 진보운동의 기획?, 177쪽.
민중적-민족적이면서 민중적-여성적이어야 하고, 민중적-인종철폐적이어야 하는 민중의 범주를 모색하는 일은 문제제기로서, 그리고 운동 자체로서 발전해온 것이었다. 민중이라는 범주는 ‘민중되기’ 그 자체였다. 고정된 계급의 틀이 아닌 확장되는 민중의 범주 속에서 운동을 사고하고 운동의 새로운 형식을 고민할 것을 요구하였다. 선생님은 노동자, 농민, 빈민 나아가 여성, 이주노동자와 아동까지 확장하여 다양한 권리의 차원을 민중 범주 속에서 사고했다. 이 ‘민중의 자리에 서기‘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1990년대 초 여러 가지 이유를 들고 이론적 자기 정리를 통해 ‘낮에 나온 반달’이 될 수 없노라며 변신을 선언한 많은 이들과 달리 차라리 이론적 부정합성 속에서조차 불가능한 영역들의 결합과 문제제기의 개방, 그리고 새로운 운동 형식의 요구로 나아가려는 것을 통해 진보의 가능성을 발견하려고 선생님은 노력하셨다.
그렇게하여 1987년 선생님께서 함께 하고자 했던 이들과 함께 민교협은 “기층민중의 민주적 역량을 주목”하여 설립하었고, ?한국사회 변동과 민교협?(1997년), ?21세기 진보운동의 기획?, 254쪽.
선생님의 말씀대로 역사적 정세속에 등장한 이 지식인 운동은 1980년대 사회성격논쟁과 1990년대 민중운동, 특히 전노협의 결성 사이에 존재해 있던 지식인의 ‘민중 자리에 서기’의 한 노력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1990년 4월 결성된 국민연합(민자당 일당독재 음모 분쇄와 민중기본권 쟁취 국민연합)에 선생님이 기울인 열정은 민중의 자리에 서려는 선생님이 삶의 지평을 확장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계급 속에서 민중을 찾기보다 민중 속에서 계급을 찾으려는 노력과 민중 범주의 내포와 외연의 확장은 1990년대 이후 선생님의 사회운동 참여에서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방향인 ‘연대’를 만나게 된다. 모순의 다차원성과 민중 속에서의 통일성은 운동의 형식에서 고정된 민중범주에 의거하는 것이 아닌 발전해가는 민중범주에 의거한 운동 형식의 다양성과 상호교통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단일 형태 하에서의 통일이 아닌 연대를 통한 교호적 발전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더불어 나타나는 초국경적 모순들의 발견과도 연결된다. “연대는 작은 것으로 대오를 쪼개는 것이 아니라 샛강에서 무수히 흘러나오는 온갖 물줄기를 큰 강으로 흐르게 하여 더욱 맑고 도도하게 가도록 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그렇기 때문에 연대에는 정화과정이 항상 내재하는 것이다.” ?샛강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들이 큰 강으로 흘러?(1999년), ?진보에서 희망을 꿈꾼다?, 273쪽.
퇴임사에서 말하셨듯이 “삶의 바탕이 연대이듯이 운동의 바탕도 역시 연대”이다. 선생님이 좋아하던 표현처럼 만물이 서로 자원이 되어 도움을 주어 삶을 열어간다는 상자이생(相資以生) 또한 바로 연대의 원리가 아니겠는가. 새로운 연대운동의 틀을 갈망하던 사회운동가들과 새로운 연대운동의 필요성을 추구하던 선생님이 1990년대 말 만나게 된 것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비판이론의 현실지향과 현실운동의 이론지향을 결합하는데 긴장을 잊지 않으셨다. 전자에 대해서는 퇴임사에서 “자본주의 모순이 지탱하거나 증폭하고 있는 사태에서는 자기가 채택하는 이론이나 개념이 우선 불안정한 삶에 내몰리고 있는 노동자/민중에게 어떤 효과를 주고 있는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이를 위한 국가권력의 행사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인지 혹은 이를 알려내고 억제하고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지식인-교수-연구자의 윤리적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셨다. 그와 동시에 앞서 말했듯이 민중범주의 확장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현실운동의 이론지향 또는 이론적 자기전화를 요구하셨다. 그렇지 않고 고정된 범주와 틀로 현실을 추려 할 때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 될 수는 있어도 민중의 자리에 선 운동이 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인의 인식론적 단절과 이론적 실천의 노력은 피를 말리는 일일 것이다” ?객관적 조건을 인식하는 비판적 안목의 문제?(1998년), ?21세기 진보운동의 기획?, 247쪽.
라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사실 운동 지형 내에서 이론적 입장의 선긋기를 분명히 하는 것과 운동을 널리 품어내는 것이 양립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선생님이 이 두 입장을 동시에 지녀온 것은 선생님이 대들보이기보다는 주춧돌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앞에서 끌기보다는 뒤에서 밀어주는 것을 더 중요한 소임으로 생각한 분이였다. 그래서 선생님은 남들이 밟고 올라갈 사다리가 되기를 원한 것이었지 선생님의 갔던 길 그대로 모두가 따를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가시면서 선생님이 해오신 길의 한 세대가 마무리되고, 동일한 방식의 운동이 지속되기보다는 더 한걸음 나아간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선생님께서는 요구하고 있지 않겠는가?
이제 선생님의 빈자리의 몇 갈래가 보이고 있다. 선생님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계시던 관심들이 눈에 띤다. 첫째는 연구의 대상이기 이전에 삶의 투신 그자체인 민중운동인데, 그것을 1990년대 초 선생님의 애정어린 대상이자 연대의 출발점을 빌어 말하자면 ‘전노협 정신’이라 불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정신은 ‘노동해방은 노동자 스스로 운동 속에서 자기전화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며, 이를 위해 운동은, 지식인은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대의 틀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는 자본과 국가의 내적 폭력성의 규명으로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화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일, 그리고 그에 맞서는 일이다. 이론가와 활동가들은 이를 위해 집단적으로 어떤 조직적 준비를 할 것인가? 세 번째는 민중에 대한 새로운 포섭전략을 밝히고 그에 맞서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와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젊은 활동가에게 선생님이 기대를 했다면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생님께서 퇴임 전에 영상사회학이라는 영역을 개발하여 새로운 소통의 통로를 찾아보려 한 것도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선생님께서 무엇보다 전노협 후원회 공동대표,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소장, 사회진보연대 대표라는 직함에 큰 애정을 가지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 그렇게 선생님은 빈자리를 남기고 가셨고, 이제 외피를 잃은 남은 이들은 외피가 없기에 “나를 딛고 오르거라”는 외침에 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바치는 조사는 우리가 늘 듣는 것처럼 “선생님 뒤를 따르리니 편안히 잠드소서”나 “선생님께서 못다 이룬 것을 우리가 이룰 것이니 편안히 잠드소서”가 아니라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는지 두눈 뜨고 지켜보소서”로 맺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