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데이 서울
2002년부터 남한 사회에 '광장'과 '대중'이 전면적으로 재등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술자리에서 흔히 하는/듣던 관용 어구인 '시대가 변하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은 전혀 다른 의미로 되돌려진 질문이 되었다. '인터넷도 월드컵도 무어 별 다른 게 있겠느냐'라는 일부의 회의적인 혹은 냉소적인 시선은 거두어졌다. 그리고 예의 있기 마련인 '무서운 대중의 광기, 쇼비니즘을 경계해야한다'는 주장만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유효하게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섣부른 예단과 선언 (혹은 바램?)은 여지없이 부서지고 있다. 대중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두 모여 의견을 나누지만 항상/아직 우리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 '어디 대중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분석하는 것이 쉬운 적이 있었느냐'는 말을 하자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겠지만 말이다.
이 대중의 재등장에 386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비중이 얼마인지 그것이 얼마나 언론에 의해 부풀려졌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386에 대한 비판과 분석은 이미 무수히 쏟아졌는데 다시 386을 꺼내다니 한 편으로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386이라고 불리 우는 집단, 이들이 경향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비록 나이는 조금 다르더라도 그와 유사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집단들에 대한 이야기 없이는 지금의 상황들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이야기이지만 87년의 비극이 유령으로 남아서 반복하여 재림하고 있는 지금 그 시대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필요한 것도 물론이다. 사실 어디 재평가되어야 할 것들이 80년대뿐이겠는가? <실미도>가, <태극기 휘날리며>가, <송환>이 그리고 <살인의 추억>이 이를 반복해서 상기해주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10년'이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상기되고 있다.
소개할 책 <썸데이 서울>역시 그런 면에서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참고로 이 책 <썸데이 서울>은 인터넷 공간인 <진보누리>(www.jinbonuri.com)와 <하종강의 노동과 꿈>(www.hadream.com)에 산하의 썸데이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코너를 가지고 있는 저자가 인터넷에 썼던 글들을 모아서 펴낸 에세이집이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서 그의 글들을 접한 이들에게는 낯설지 않을 글들이 지난 12월에 모아져 출간되었다. 저자는 전형적인 386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노래패 활동을 했는데, 자신은 운동보다 사람이 좋았으며 세미나보다 술 먹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한다. 지금은 방송사 PD이며 민주노동당 당원이지만 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을 찍고, 2002년에는 노무현에게 표를 던졌다고 한다. 때로는 자신과 자신의 벗들이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세상을 돌리고 조이는 나사와 너트가 되어 버렸다'고 저자는 자조하기도 한다.
그의 글쓰기 방식은 대부분 대학생활 혹은 방송사 PD 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기억들을 지금의 세태(정세)에 비추어 송환하여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그는 글을 통해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복원해내는 자신의 방식, 자신의 언어를 찾은 어느 386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글들을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좌표들을) 마냥 '후일담류'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의 글에는 어떤 흡인력이 있다. 아마 진보 진영 사람들의 글쓰기에서는 쉬이 찾기 어려운 섬세함과 사회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이를 숨기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글로 재현되는 기억들은 그저 후일담'만'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에게(그리고 그의 독자들에게도) 주는 메시지도 지니고 있다. - 비록 그의 글과 기억이 남한에서 대학을 다니고 그곳에서 운동을 했던 이들에게(만) 강하게 호소하는 듯하다는 느낌을 받더라도 말이다 - 무엇보다도 그의 솔직한 글쓰기가 주는 담백함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을 매력적으로 여기며 인터넷에 업데이트 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읽어보면서 주변 이들에게도 읽어보라고 추천하기도 한다.
한데 나는 산하의 글들을 읽으면서 마냥 좋아할 수 없는 뭔가 석연찮음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산하의 글에 열광할 준비가 되어있고 저런 선배라면 언제든지 술을 먹을 생각도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문제(?)는 저자나 저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때문이다. 그의 글은 결국 저 386과 그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하나의 표본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자 개인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할 요량은 아니다. 저자가 386의 롤 모델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두고 개인에게 탓하는 것은 유능한 논점은 아닌 듯해서다.
주위에 찾아보면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선배들을 적잖게 볼 수 있다. 이제 사십 줄에 가까워지고 있는 그들 주위에는 선배, 동기, 후배가 여의도나 청와대에 있기에 그들은 적잖게 기대도 하고 한 편으로 자신이 대학 때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벗들이 부패 비리로 쇠고랑을 차는 모습을 보면서 착착해 하기도 한다. 여전히 노동자 민중에 대한 애정은 놓지 않으면서도 열린 우리당과 노무현에게 거는 일말의 기대를 부인하지도 않는 386선배들 혹은 그 후배 나이 벌 되는 이들을 나는 적잖게 마주하고 있다. 밤새 술잔을 나누기도 하면서 그들과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그들의 감성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어찌해야할 지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그 선배들에게 나는 그저 '이런 시대에 아직도 운동을 고민하는 그러나 아직 사회 경험이 적은 예뻐할 만한 후배'정도로 인식될 뿐이다. 이 대화의 자리에서 내개 주어진 배역은 기꺼이 '운동을 여전히 고민 하는 자'로서 목소리를 높이고 '당위'를 이야기하는 포지션이다. 이들의 생각과 사고체계, 감성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더불어 그 대화에서 내가 동의를 표명할 수도 없다. 물론 이제 스물여섯에 접어든 '아이'가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운동에 대한 애정처럼 나 역시 감히 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올바르게 대하는 방식과 언어를 나는 아직 모르겠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욕심인가? 나는 내가 겪고 있는 어떤 곤란함이 단지 개인적인 관계들만의 문제는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 입학한 후 얼마 안 되었을 때 운동을 고민하는 선배들은 항상 만나면 고성을 높이다보니 잘 안모이거나 정치적인 이야기들은 뒷전으로 물러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나 역시도 지금은 고성을 높이거나 차라리 다른 이야기를 하곤 하는 자리들이 있다. 혹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정치적인 대화들이 시작되어도 논쟁구도가 뻔하고 그 대화의 결말도 뻔한 자리들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당장 저 광화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서조차 무언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그다지 새롭지 않은 주제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물론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진심'이나 말하기의 '친절함'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아니 이 숙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슨 사려 깊은 대화술을 체득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386과 그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과 대화법의 도출은 나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능력 밖의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보운동 진영이 말하고자 하는 바들을 효과적으로 발언하고 교통하기 위해서는 이는 필수적인 사항이라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반복되고 기억되는 저 80년대의 기억과 우리가 두고 온 것들을 정확히 존중하고 마주하는 자세는 과연 무엇일까? PSSP
이 대중의 재등장에 386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비중이 얼마인지 그것이 얼마나 언론에 의해 부풀려졌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386에 대한 비판과 분석은 이미 무수히 쏟아졌는데 다시 386을 꺼내다니 한 편으로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386이라고 불리 우는 집단, 이들이 경향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비록 나이는 조금 다르더라도 그와 유사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집단들에 대한 이야기 없이는 지금의 상황들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이야기이지만 87년의 비극이 유령으로 남아서 반복하여 재림하고 있는 지금 그 시대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필요한 것도 물론이다. 사실 어디 재평가되어야 할 것들이 80년대뿐이겠는가? <실미도>가, <태극기 휘날리며>가, <송환>이 그리고 <살인의 추억>이 이를 반복해서 상기해주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10년'이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상기되고 있다.
소개할 책 <썸데이 서울>역시 그런 면에서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참고로 이 책 <썸데이 서울>은 인터넷 공간인 <진보누리>(www.jinbonuri.com)와 <하종강의 노동과 꿈>(www.hadream.com)에 산하의 썸데이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코너를 가지고 있는 저자가 인터넷에 썼던 글들을 모아서 펴낸 에세이집이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서 그의 글들을 접한 이들에게는 낯설지 않을 글들이 지난 12월에 모아져 출간되었다. 저자는 전형적인 386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노래패 활동을 했는데, 자신은 운동보다 사람이 좋았으며 세미나보다 술 먹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한다. 지금은 방송사 PD이며 민주노동당 당원이지만 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을 찍고, 2002년에는 노무현에게 표를 던졌다고 한다. 때로는 자신과 자신의 벗들이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세상을 돌리고 조이는 나사와 너트가 되어 버렸다'고 저자는 자조하기도 한다.
그의 글쓰기 방식은 대부분 대학생활 혹은 방송사 PD 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기억들을 지금의 세태(정세)에 비추어 송환하여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그는 글을 통해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복원해내는 자신의 방식, 자신의 언어를 찾은 어느 386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글들을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좌표들을) 마냥 '후일담류'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의 글에는 어떤 흡인력이 있다. 아마 진보 진영 사람들의 글쓰기에서는 쉬이 찾기 어려운 섬세함과 사회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이를 숨기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글로 재현되는 기억들은 그저 후일담'만'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에게(그리고 그의 독자들에게도) 주는 메시지도 지니고 있다. - 비록 그의 글과 기억이 남한에서 대학을 다니고 그곳에서 운동을 했던 이들에게(만) 강하게 호소하는 듯하다는 느낌을 받더라도 말이다 - 무엇보다도 그의 솔직한 글쓰기가 주는 담백함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나는 그의 글을 매력적으로 여기며 인터넷에 업데이트 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읽어보면서 주변 이들에게도 읽어보라고 추천하기도 한다.
한데 나는 산하의 글들을 읽으면서 마냥 좋아할 수 없는 뭔가 석연찮음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산하의 글에 열광할 준비가 되어있고 저런 선배라면 언제든지 술을 먹을 생각도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문제(?)는 저자나 저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때문이다. 그의 글은 결국 저 386과 그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하나의 표본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자 개인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할 요량은 아니다. 저자가 386의 롤 모델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두고 개인에게 탓하는 것은 유능한 논점은 아닌 듯해서다.
주위에 찾아보면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선배들을 적잖게 볼 수 있다. 이제 사십 줄에 가까워지고 있는 그들 주위에는 선배, 동기, 후배가 여의도나 청와대에 있기에 그들은 적잖게 기대도 하고 한 편으로 자신이 대학 때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벗들이 부패 비리로 쇠고랑을 차는 모습을 보면서 착착해 하기도 한다. 여전히 노동자 민중에 대한 애정은 놓지 않으면서도 열린 우리당과 노무현에게 거는 일말의 기대를 부인하지도 않는 386선배들 혹은 그 후배 나이 벌 되는 이들을 나는 적잖게 마주하고 있다. 밤새 술잔을 나누기도 하면서 그들과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그들의 감성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어찌해야할 지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그 선배들에게 나는 그저 '이런 시대에 아직도 운동을 고민하는 그러나 아직 사회 경험이 적은 예뻐할 만한 후배'정도로 인식될 뿐이다. 이 대화의 자리에서 내개 주어진 배역은 기꺼이 '운동을 여전히 고민 하는 자'로서 목소리를 높이고 '당위'를 이야기하는 포지션이다. 이들의 생각과 사고체계, 감성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더불어 그 대화에서 내가 동의를 표명할 수도 없다. 물론 이제 스물여섯에 접어든 '아이'가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운동에 대한 애정처럼 나 역시 감히 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올바르게 대하는 방식과 언어를 나는 아직 모르겠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욕심인가? 나는 내가 겪고 있는 어떤 곤란함이 단지 개인적인 관계들만의 문제는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 입학한 후 얼마 안 되었을 때 운동을 고민하는 선배들은 항상 만나면 고성을 높이다보니 잘 안모이거나 정치적인 이야기들은 뒷전으로 물러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나 역시도 지금은 고성을 높이거나 차라리 다른 이야기를 하곤 하는 자리들이 있다. 혹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정치적인 대화들이 시작되어도 논쟁구도가 뻔하고 그 대화의 결말도 뻔한 자리들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당장 저 광화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서조차 무언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그다지 새롭지 않은 주제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물론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진심'이나 말하기의 '친절함'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아니 이 숙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슨 사려 깊은 대화술을 체득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386과 그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과 대화법의 도출은 나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능력 밖의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보운동 진영이 말하고자 하는 바들을 효과적으로 발언하고 교통하기 위해서는 이는 필수적인 사항이라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반복되고 기억되는 저 80년대의 기억과 우리가 두고 온 것들을 정확히 존중하고 마주하는 자세는 과연 무엇일까?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