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KAPF)의 영화운동
이 작업의 목표는 좌파적 한국 영화 운동의 계보를 만들어 내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시간적 발생 순서를 나열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작업의 난점은 '좌파', '한국', '영화', '운동'이란 개념 모두가 명확한 정의가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각각의 개념들은 나름의 정교한 이론적 고찰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고찰내부에서도 항상 고정적이지 않고 사회·역사적 맥락위에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정치적 판단 위에서 순간적으로만 결정된다. 결국 문제를 판단하는 주체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그 문제를 재구성할 것인가 또 그 과정에서 동시에 주체는 어떻게 변화하는가가 중심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좌파적 한국 영화 운동'의 계보를 살펴보겠다는 것은 전적으로 회고적인 것이며 그 회고 과정 속에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가 새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길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업은 도서관의 먼지 쌓인 자료를 꺼내 새로운 번호표를 달아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씹어 먹어 걸러내고 배설하고 피와 살이 되게 해서 우리 몸을 강건하게 하고 안광이 번뜩이고 팔다리는 무쇠같이 되어 이데올로기 투쟁의 전장에서 지배이데올로기의 보드랍고 연약한 급소를 찾아 찔러 피가 철철 흘러나오도록 하려는 것이다.
거창하게 글을 시작했지만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한국 영화사 전반에 관해서도, 정치 ·경제 이론에 관해서도, 문화·이론 및 철학에 관해서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영화 운동'에 참여해본 경험도 없고 학생운동도 잠깐의 학생회 활동이 고작이었다.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것은 '겸양'을 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글이 지닐 수밖에 없는 치명적 한계에 대해 염두에 두어 어디까지나 '증후적'으로 독해해 줄 것을 부탁하려는 것이다.
'좌파적 한국 영화 운동'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지시하는가 하는 문제는 실천적 운동의 도정위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정도로만 말해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영화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이었고 최초의 영화 운동이라고 불릴 수 있는 흐름이 만들어진 것은 식민지 시대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에 의해서였다. 카프의 활동 시기는 대체로 4기로 나뉘어 진다. 1920년대 초반 신경향파 문학이 발생한 이후 1925년 8월 카프 조직이 결성되기까지(카프전사), 카프결성 후 1927년 1차 조직 개편까지 그리고 영화부가 개설되고 예술의 대중화 논의가 이루어졌던 1930년 2차 개편까지 그리고 영화 <지하촌> 제작 중 대부분의 회원이 검거되어 1935년 사실상 와해되기까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카프의 초기 활동은 주로 문학창작과 비평이었지만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던 임화, 강호, 윤기정, 김유영 등이 조선 영화 예술 협회에 참여하였고 그 곳 연구부에서 약 1년간 영화 이론 및 분장·연기 실습 등을 교육받는다. 이들은 곧 협회의 주도권을 잡게 되고 이후 협회는 카프에 가담 해소된다.
카프는 1930년 1차로 조직을 개편했고 이 때 영화부를 만들었다. 당시 카프의 주된 논제는 '예술의 볼셰비키적 대중화'였는데 이들에게 '영화매체'가 지닌 대중성은 분명히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35년 조직이 와해되기까지 5편의 영화를 만든다. 이중 <유랑>은 조선영화 예술 협회에서, <암로>와 <혼가>는 그 후신인 '서울키노'에서, 그리고 <화륜>과 <지하촌>은 카프 영화부의 제작소인 청복키노에서 만들어졌다. 이 중 <지하촌>은 상영되지 못하였다. 이들 영화의 원본은 모두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몇몇 신문기사에서 그 대략의 줄거리만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유랑>, <혼가>, <암로>는 일제 식민 수탈을 폭로하고 지주와 농민, 해고된 노동자와 자본가사이의 계급 대립 등을 다루고 있고 <지하촌>과 <화륜>은 앞의 세 영화들이 다소 개인적이었던데 비해 대중들의 투쟁 주로 파업투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영화 운동이 가능했던 배경은 우선 카프 자체의 결성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첫째 1919년의 3.1운동을 기점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이 문화정책으로 선회하면서 문예활동에 다소 숨통이 트인 상태였다. 둘째 러시아 혁명의 내용과 맑스주의 사상과 저서가 일본을 거쳐 전파되었다. 당시 일본은 대정 데모크라시라 불리는 시기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일본 자본주의에 관한 분석 및 논쟁이 있었던 때였고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이 일본어로 번역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학생들은 이런 사상들을 접하고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셋째 16미리 장비의 도입이다. 지금도 단편영화 작업의 주요수단인 16미리 카메라는 이때부터 카프내부에서 '소형영화' 제작을 위해 사용하자고 제안된 바 있다. 이런 작고 가벼운 카메라로의 기술적 변화는 영화 운동의 기본적 활동 공간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며 카프 회원들이 이러한 성격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화성격을 '소형영화', '뉴스릴', '연기 영화'로 나누고 각 영화 양식에 따른 배급 방식을 고민했었다. 넷째는 당시 식민 모국인 일본의 영화 산업 발전이다. 이때는 일본영화사에서도 중요한 시기였는데 쇼치쿠와 닛카츠 등의 메이져 영화사가 등장하면서 제작·배급·상영을 연결하는 스튜디오 시스템이 정착되었고 오스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 등의 감독들이 활동을 시작했던 것도 이때였다.
카프 활동의 근본적인 이론적 문제점은 이들이 사용한 분석 모델이 서구 자본주의 사회였다는 점이다. 이들이 말하는 '계급 갈등' 이나 '계급투쟁'은 당시의 조선을 '부르주아 자본주의 시민사회'로 파악한 것에 근거한다. 이러한 인식은 수입된 사상의 기계적 적용에 따른 모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논의는 논리적으로는 정합하고 과격하지만 경제적 구조 분석은 결여한 상태였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반도내에서 최초로 좌파적 시각에서 영화를 사고한 집단이었다는 점과 미약하나마 전국적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고 다양한 양식의 영화를 제작·배급·상영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발성영화 기술의 도입에 따른 제작비 상승 등의 기술 변화와 영화 운동의 관계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무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개량적 민족주의' 좌파들과 끊임없는 사상투쟁을 진행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했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PSSP
이 글의 많은 부분을 변재란 선생의 「1930년대 전후 카프영화활동 연구」,『민족영화2』(친구, 1990)에서 참조했다.
거창하게 글을 시작했지만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한국 영화사 전반에 관해서도, 정치 ·경제 이론에 관해서도, 문화·이론 및 철학에 관해서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영화 운동'에 참여해본 경험도 없고 학생운동도 잠깐의 학생회 활동이 고작이었다.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것은 '겸양'을 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글이 지닐 수밖에 없는 치명적 한계에 대해 염두에 두어 어디까지나 '증후적'으로 독해해 줄 것을 부탁하려는 것이다.
'좌파적 한국 영화 운동'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지시하는가 하는 문제는 실천적 운동의 도정위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정도로만 말해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영화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이었고 최초의 영화 운동이라고 불릴 수 있는 흐름이 만들어진 것은 식민지 시대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에 의해서였다. 카프의 활동 시기는 대체로 4기로 나뉘어 진다. 1920년대 초반 신경향파 문학이 발생한 이후 1925년 8월 카프 조직이 결성되기까지(카프전사), 카프결성 후 1927년 1차 조직 개편까지 그리고 영화부가 개설되고 예술의 대중화 논의가 이루어졌던 1930년 2차 개편까지 그리고 영화 <지하촌> 제작 중 대부분의 회원이 검거되어 1935년 사실상 와해되기까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카프의 초기 활동은 주로 문학창작과 비평이었지만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던 임화, 강호, 윤기정, 김유영 등이 조선 영화 예술 협회에 참여하였고 그 곳 연구부에서 약 1년간 영화 이론 및 분장·연기 실습 등을 교육받는다. 이들은 곧 협회의 주도권을 잡게 되고 이후 협회는 카프에 가담 해소된다.
카프는 1930년 1차로 조직을 개편했고 이 때 영화부를 만들었다. 당시 카프의 주된 논제는 '예술의 볼셰비키적 대중화'였는데 이들에게 '영화매체'가 지닌 대중성은 분명히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35년 조직이 와해되기까지 5편의 영화를 만든다. 이중 <유랑>은 조선영화 예술 협회에서, <암로>와 <혼가>는 그 후신인 '서울키노'에서, 그리고 <화륜>과 <지하촌>은 카프 영화부의 제작소인 청복키노에서 만들어졌다. 이 중 <지하촌>은 상영되지 못하였다. 이들 영화의 원본은 모두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몇몇 신문기사에서 그 대략의 줄거리만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유랑>, <혼가>, <암로>는 일제 식민 수탈을 폭로하고 지주와 농민, 해고된 노동자와 자본가사이의 계급 대립 등을 다루고 있고 <지하촌>과 <화륜>은 앞의 세 영화들이 다소 개인적이었던데 비해 대중들의 투쟁 주로 파업투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영화 운동이 가능했던 배경은 우선 카프 자체의 결성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첫째 1919년의 3.1운동을 기점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이 문화정책으로 선회하면서 문예활동에 다소 숨통이 트인 상태였다. 둘째 러시아 혁명의 내용과 맑스주의 사상과 저서가 일본을 거쳐 전파되었다. 당시 일본은 대정 데모크라시라 불리는 시기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일본 자본주의에 관한 분석 및 논쟁이 있었던 때였고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이 일본어로 번역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학생들은 이런 사상들을 접하고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셋째 16미리 장비의 도입이다. 지금도 단편영화 작업의 주요수단인 16미리 카메라는 이때부터 카프내부에서 '소형영화' 제작을 위해 사용하자고 제안된 바 있다. 이런 작고 가벼운 카메라로의 기술적 변화는 영화 운동의 기본적 활동 공간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며 카프 회원들이 이러한 성격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화성격을 '소형영화', '뉴스릴', '연기 영화'로 나누고 각 영화 양식에 따른 배급 방식을 고민했었다. 넷째는 당시 식민 모국인 일본의 영화 산업 발전이다. 이때는 일본영화사에서도 중요한 시기였는데 쇼치쿠와 닛카츠 등의 메이져 영화사가 등장하면서 제작·배급·상영을 연결하는 스튜디오 시스템이 정착되었고 오스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 등의 감독들이 활동을 시작했던 것도 이때였다.
카프 활동의 근본적인 이론적 문제점은 이들이 사용한 분석 모델이 서구 자본주의 사회였다는 점이다. 이들이 말하는 '계급 갈등' 이나 '계급투쟁'은 당시의 조선을 '부르주아 자본주의 시민사회'로 파악한 것에 근거한다. 이러한 인식은 수입된 사상의 기계적 적용에 따른 모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논의는 논리적으로는 정합하고 과격하지만 경제적 구조 분석은 결여한 상태였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반도내에서 최초로 좌파적 시각에서 영화를 사고한 집단이었다는 점과 미약하나마 전국적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고 다양한 양식의 영화를 제작·배급·상영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 발성영화 기술의 도입에 따른 제작비 상승 등의 기술 변화와 영화 운동의 관계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무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개량적 민족주의' 좌파들과 끊임없는 사상투쟁을 진행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했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PSSP
이 글의 많은 부분을 변재란 선생의 「1930년대 전후 카프영화활동 연구」,『민족영화2』(친구, 1990)에서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