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운동의 과정과 평가
1. 대량실업 직후 실업운동의 양상과 약평.
1) 대량실업 직후 실업운동의 양상
- 부산 실직자 거리행진
경제 공황 초기인 1998년 4월 부산, 실직자 권리를 선언하는 최초의 실업자 거리 시위가 있었다. '실직자 거리행진 준비위원회'의 주최로 열린 실직자 거리행진에는 부당해고된 파라다이스호텔 노조와 한국노총에서 탈퇴하여 민주노총에 가입한 트롤선 선원노조, 부산지역 건설일용노조, 그리고 일반 실직자들과 시민,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부산의 '실직자 거리행진'은 매월 셋째 토요일을 '실직자 거리행진의 날'로 정하고 거의 1년동안 거리행진을 진행하였다. 수차례의 행진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실업자군이 형성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실업자들은 행진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노숙자들을 우선 조직하기로 하고 '노숙자 자활추진위원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으나 주체가 행방불명 되는 등 모임 자체가 흐지부지 되었다.
다양한 시민사회종교단체들이 '행진'을 매개로 결합했으며, 행진초기 실직자의 주체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실직자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행진'만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을 결합시키는데 한계가 있었다는 자평을 남겼다.
- 일용직·저소득노동자 실업대책협의회
98년 6월에는 정부의 실업대책이 한계계층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거나 취약하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임시직·저소득 노동자의 실업문제대책을 요구하는 집단 움직임이 있었다. 주로 빈민지역에 뿌리를 두고 활동해온 빈민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돼 결성된 '일용직·저소득노동자 실업대책협의회'는, 일용직·저소득 실업자에 대한 정확한 실태 파악과 복지정책의 토대 구축, 노사정위원회에의 대표 참여, 대규모 공공사업 조기 발주, 원스톱 서비스센터 설립 등을 요구하면서 기자회견과 가두 시위를 벌였다.
건설일용노동자 및 지역빈민운동단체로 구성된 실업대책협의회는 정책단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실업대책협의회는 전국적인 실업극복단체의 연계를 제안하며 전국적인 실업정책생산단위로의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를 구성하였으며, 서울은 '서울지역실업극복연대'로 전환하게 된다.
- 실업자동맹(준)
98년 12월 22일 전국실업자동맹(가칭) 준비위원회가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결성식을 갖고 99년 상반기까지 전국실업자동맹을 건설할 것을 결의했다. 결성식을 가진 실업자동맹 준비위원회는 일주일에 27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반실업자를 포함한 모든 실업자와 실업운동의 동조자들에게 회원자격을 부여하는 내규를 통과시켰으며, 실업자들의 생존권 확보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자주적 노력을 하기로 결의했다.
실업자동맹 준비위는 이어서 실업자들의 가장 절박한 문제로 △안정된 일자리의 마련 △실업자 지원을 위한 별도의 실업부조금고 등 지원대책 수립 △노숙자에 대한 인간적인 대책 마련 등을 정부에 촉구했다.
실업자동맹은 국민승리21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으나 이후에 독립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서울역 선전전의 진행해 실직자 주체를 형성하고자 했으며, 구호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실업극복사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주체가 불안정하고 지속적인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면서 조직이 해산되었다.
실업자동맹(준)은 실직으로 인해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던 주체들이 모여 결성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 실업자대회
98년 4월 23일 1차 실업자대회를 시작으로 10월까지 6차례의 실업자대회가 개최됐으며, 8월 26일엔 전국의 13개 실업운동 단체들이 전국실업운동단체연석회의를 결성하였다. 이는 IMF범국본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으로(현재의 민중대회 형태) 실직자들의 실질적인 조직이라기 보다는 운동진영내의 주요과제로 실업의 문제를 부각시켰다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 전해투의 '실업자투쟁'
전해투는 '실업자운동'이라는 광범위한 표현보다는 '투쟁'을 조직한다는 것에 전해투 사업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실업자운동 또는 사업으로써 취업알선, 상담 등의 구제사업은 전개되고 있지만 실제 실업자들의 근본적인 요구를 내걸고 실천적인 행동으로 투쟁하는 것은 소극적이다. 따라서 전해투는 원상회복·고용승계를 요구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실업자 군으로 규정하며 이들을 우선 전국적으로 묶어 세워 투쟁을 힘있게 조직하는 것을 중심사업으로 하고 '실업자 주체들의 투쟁'으로 실업문제를 직접 제기해 들어가는 것이다.
전해투는 독자적 계획으로 서울역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한 캠페인과 집회투쟁을 조직했으나 한계가 있었고, 정리해고 저지투쟁, 정리해고노동자의 원상회복투쟁, 고용승계투쟁을 '중앙집중화'시키기 위한 전국순회투쟁을 했다. 전해투는 '실업·해고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가장 절박한 요구의 함축적 의미인 '완전고용'이라는 공세적 요구를 내걸 때만이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양보를 쟁취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실업반대! 완전고용!'의 구호속에 1차 순회투쟁을 전개했다.
- 청년실업
1) '민중의 기본생활권 쟁취와 청년실업 대책 수립을 위한 전국학생특별위원회'
2) 청년실업운동본부(준)
- 민우회, 여성실업자 '희망선언'
한국여성민우회는 전문대 이상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 여성실업자들로 구성된 [희망선언]을 발족하여 활동했다. 여성청년실업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희망선언]은 여성실업자의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요구안 등을 제출하며 활동했으나 조직적 확대를 이루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 사회진보연대 실업정책생산모임
사회진보연대는 99년 2월 '실업정책생산모임'을 구성하여 실업운동에 대한 정책논의모임을 진행하였다. 실업의 원인과 실업운동의 이념과 과제를 밝히고자 했으며, 실업운동에 결합하여 정책적 역할을 담당하고자 했다. 99년 10월 '실업자 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의 책을 발간하고 이후에도 정책제언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나, 논의주체들이 불안정해져서 지속되지 못하고 2001년 해산한다.
- 민주노총 고용안정센터
민주노총은 98년 상반기, 고용안정 및 실업대책사업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취업알선 및 능력개발센타'를 설치할 것을 논의 하고, 민주노총내에 고용안정센터의 건립과 '실업자종합지원센터'의 적극적 결합을 통한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게 된다. 민주노총은 99년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지원을 기반으로 한 '실업자종합지원센터'의 건설과 함께 서울센터 및 전국을 연계하는 지역지원팀의 주관단체가 된다.
민주노총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운영위원단체, 실업자종합지원센터 (서울센터)지역지원팀의 주관단체, 전실연 건설이후 전실연 사업의 주관단체(공동대표-민주노총 위원장, 집행위원장-고용안정센터소장, 사무국-고용안정센터 내 설치)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며 실업극복운동의 주요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정부 및 한겨레,MBC,종교단체,시민단체,양대노총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관협력조직이며, 대량실업이후 조성된 실업기금(1,200억)을 운용하는 단위이다. 다양한 실업자구호사업을 민간단체에 위탁하여 진행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재원을 바탕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사업을 매개로 모인 실업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고자 했다. 이후 실업운동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구호사업, 취업알선, 민간위탁 공공근로' 등을 통하여 지역의 저소득, 중고령 실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재원은 수많은 종교,시민,지역단체들의 실업극복사업의 참여를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실업'사업을 위한 새로운 단체들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2) 약평
대량실업 초기에 실업운동은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실업운동이 존재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실업자와 사회위협으로 느껴지는 실업의 문제가 새로운 운동기반을 형성할 것이라는 기대에 따른 것이었다. 대량실업 초기 등장했던 '실업자동맹'이나 '실업자 거리행진' 등은 실업문제의 정치적인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었으나 더 이상의 자기계획을 가지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민중진영의 실업문제에 대한 대응은 더욱 단명했다. 대량실업 초기에는 노동사회운동단체를 망라하여 실업문제에 대한 입장과 대응방향이 쏟아져 나왔다. 민주노총이나 진보정당에서는 '실업자 조직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고, 사회운동진영에서는 노동, 경제, 여성, 복지, 정보통신, 보건의료 등 각 부문에서 나타나는 실업의 문제를 진단하고 각각의 대응과 총체적인 실업운동이 필요함을 제기했다. 그러나 실업률의 하락과 함께 실업의 문제가 수그러들면서, 실업문제는 경기가 악화되고 있음을 나타나는 사례로, 문서에나 등장할 뿐이었다. '실업운동'은 근본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조직화에 있어서도 실업자 대중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조직화의 강조는 조직화에 있어서의 철저한 실패로 드러났다. 실업노동자는 행진 대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며, 정리해고된 노동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시기 하나의 쟁점이었던 '실업자 노조가입'의 문제는 현장과 연결되지 못했다.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이를 제기하였으나 노사정위 협상내용의 하나일 뿐 실업자(정리해고자)들이 노조가입을 요구하거나 조직하는데는 실패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업이 바로 생존의 위협으로 직결되었던 대다수의 실업자를 지원하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실업자 풀(pool)을 형성, 조직하려는 흐름이 생겨났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재원을 바탕으로 하여 진행된 사업과 센터들이 그것이다. IMF 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실업자들을 보면서 국민 상당수가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인식하여 출발한 실직자 지원사업은 쌀나누기, 시레기 나누기, 월 15만원지원 등의 지원사업을 펼쳤다. 운동진영의 일부에서 IMF재협상을 주장하고 거리로 나올 때에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된 구호사업에 대한 평가는 다음 두가지다. 구호사업을 통해 실업노동자와 만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조직화하는 매개가 되었다는 평가와, 결국 실업노동자들의 분노를 관리하고 잠재우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제출되었다.
실업자구호사업은 국가의 위기상황에 대해 민간단체가 그 원인을 파악하고 책임과 대책마련을 요구하는 방식이 아닌, 정부나 언론의 '실업극복 캠페인'이나 '금모으기 운동'에 조응하여 민간단체가 앞장서서 근거없는 희망을 유포하고 위기관리를 위한 지원으로 표현되었다. 구호사업의 또다른 영향은 실업단체의 활동이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사업'을 중심으로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즉, 실업단체에서 진행하는 구호사업이 중단될 경우 실업자를 만날 수 있는 통로자체가 사라진다는 인식이 존재했다. 실업자를 만나려면 사업이 있어야 하고, 사업이 진행되려면 재정과 인력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은 실업극복국민운동이나 지자체의 지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을 낳았다.
2. 2000년 ~ 2003년까지의 실업운동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던 2000년 2월 이후 실업률은 계속 하락했다. 2000년부터 꾸준히 낮아진 실업률은 '실업'의 문제가 사회적인 관심에서 멀어지는 과정이었다. 정부의 실업대책의 축소 - 공공근로 축소 - 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지원으로 문을 연 전국 100개 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 대한 지원중단은 변화된 실업의 양상과는 무관하게 실업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에서 벗어난 상황을 반영했다.
99년 결성된 실업단체의 전국적인 연대체인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이하 전실연)는 거의 유일한 실업운동조직으로 남아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해소 논의는 전실연이 사회적으로 실업운동의 요구를 제기하고 활동하기보다는 실업운동진영내의 재편과 재정지원문제로 국한된 측면이 존재한다.
1) 실업자종합지원센터와 조직화
99년 시범적으로 시행되었던 실업자종합지원센터는 2000년 전국 100개 센터로 확대되었으며, 2001년 실업극복국민운동의 지원중단으로 인해 많은 단체들이 센터사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취업알선, 생활·노동법률상담, 생계비 지원 및 기타 복지지원프로그램들을 수행했던 지원센터는 지원의 중단과 재개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도 37개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실업운동에서 지원센터사업은 실업자의 조직화를 위한 유의미한 거점으로 인식되었다. 즉, 센터를 중심으로 실업자들이 모이고 각각의 사업을 통해 교육 및 주체를 조직화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센터들이 공공근로 참여자나 생계비지원대상을 중심으로 상조회 등의 모임을 만들었으며, 취업알선상담을 통해 직종별 모임을 구성하고 노동조합의 구성까지를 논의하기도 했다. 생계비 지원 등 구호사업의 중단 이후에는 취업알선과 수급권 상담을 주요한 조직화의 매개로 판단하고 주요사업으로 배치했다. 취업알선의 경우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일용직 중심의 실업노동자가 대부분이었기에 이들을 중심으로 직종별 모임을 구성하고, 낮은 임금에 반대하며 최소한의 노동법을 준수하도록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센터운영 자체를 기금에 의존했던 실업단체들은 기금의 중단으로 인해 절반 이상이 센터사업을 중단했으며, 일부 남아있는 상조회 등의 모임도 지역내 소규모 공동체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모임은 구성되었으나 일자리의 중단이나 지원이 중단되면 해소되는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나마 '지역주민 조직화'에 중심을 두고 활동했던 센터들은 지역운동단체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러한 지역단체들은 지역내 주민들의 이해와 결합하는 주제로 활동의 중심을 변화하였다. 이는 일상적인 주민의 조직화를 목표로 하기에 조직화의 매개로서의 센터사업은 스스로의 목적과 방향을 정립하지 못한채 지원여부에 따라 운영이 흔들리는 한계가 있었다..
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 대한 평가는 정부나 기금을 '활용'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였으나 결국은 스스로 '관리의 주체'가 되거나 활동의 범위를 오히려 국한시켰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재에도 많은 단체들이 정부나 민간기금을 '활용'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지역내 거점으로의 이러저러한 센터의 건립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
전실연은 고실업, 장기실업이 고착화되는 사회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사업을 전개하였던, 노동, 여성, 시민사회, 종교, 빈민, 장애인 등의 단체들의 전국적 연대기구이다. 또한 전국적으로 개별화된 실업운동의 구심을 세우기 위한 활동을 목적으로 한 기구이기도 하다. 전실연은 사회적으로 상대적 소외계층의 실업문제를 중심으로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실업자를 주체로 한 조직화가 목적이었다. 전실연은 전국적 연대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실업자를 포함한 소외계층의 권리를 지켜내고 나아가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영역을 확대하는 사업을 중심에 두었다.
2000년 공공근로 축소와 센터사업의 확대는 전실연의 활동과 기반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2001년 센터사업의 중단과 실업단체들의 자활후견기관으로의 전화는 전실연으로 하여금 연대기구의 성격과 목표를 분명히 할 것을 강제했다. 전실연은 실업운동의 방향논의를 위한 실업단체 설문과 논의를 통하여 '전실연은 '실업'의 문제를 주제로 하는 단체들의 아니라 '실업운동체'임을 분명히 하고, 전실연의 정체성 및 지향은 실업문제 및 실업운동에 대한 방향제시를 통해 사회운동속에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러한 실업단체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실연은 실업단체의 유지·존속을 위한 상층협의에 중심을 두었으며, 전실연의 제도화와 민간고용안정센터 등을 추진하였다.
전실연은 실업운동의 요구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사회적운동으로 제기하며 투쟁하기보다는 실업단체들을 유지하거나 실업기금을 민간기금화하기 위한 협상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3)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대량실업 직후 조성된 1,200억의 민간실업기금을 운영하는 민간대책기구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이다. 그러나 민간단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기금이 근로복지공단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실질적인 기금의 운용은 정부주도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업극복국민운동은 대량실업 초기 다양한 구호사업에 기금을 지원했으며, 2000년 전국에 100개의 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 재정을 지원했다. 그러나 2001년 센터사업의 중단과 실업극복국민운동의 해소논의를 거쳐 2003년 해소하게 된다.
운영위원에 민주노총, 여연, 경실련 등이 참여하고 있는 실업극복위원회는 겉으로는 민간운동기구를 표방하고 있으나 사실상 실업단체의 활동을 규제하며 관리하는 역할을 해왔다. 구호사업 이외에 '실업자 조직'사업에 기금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각 센터와는 사업을 '약정'한 관계라는 이유로 실업극복국민운동의 의사결정이나 최소한의 논의결과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를 둘러싼 평가의 지점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국민운동의 사업이 정부의 실업대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희석시키는 관리자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관리자의 주도적인 역할을 민간단체들이 담당하거나 혹은 묵인했다는 평가이다. 결국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를 민간대책기구로 내세우며 실업자조직운동을 관리하고 실업자대중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했던 정부의 의도와 이에 대한 비판보다는 기금을 중심으로 스스로 그 관리주체를 자임했던 민간단체의 문제점인 것이다.
3) 약평
- 실업운동의 과제와 목표 부재
실업운동진영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2000년은 '자활'사업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과 집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월 말 자활후견기관 신청을 앞두고 제 실업단체들은 앞다투어 자활사업에 대한 계획을 제출하였다. 자활후견기관 신청이 마무리되자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논의가 진행되었다. 또한 5월말로 들어서면서 실업운동진영의 쟁점은 공공근로 축소반대, 실업예산 확충으로 맞추어졌다. 3단계 공공근로의 대폭적인 축소는 전국의 실업노동자들을 한자리로 모이게하며, 3000명이 모이는 실업자대회를 가능하게 했다. 자활사업·국민기초생활보장법·공공근로의 3대 쟁점사안에 대한 대응과 계획을 중심으로 실업운동진영은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나 3대 쟁점을 관통하는 실업운동의 요구는 모호했다. 현안에 대한 구호는 존재했으나, 실업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는 부재했다. 전실연은 2001년 논의를 통하여 실업문제의 사회화와 실업운동의 주체형성, 연대운동의 강화를 목표로 설정했으나, 구체적인 요구나 사업으로 확대되지 못한채 흐지부지 되었다.
대량실업 직후 'IMF 재협상', '구조조정, 정리해고 반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외에 실업운동진영이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명확히 한적이 한번도 없다.
또한 현재 일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임금인상과 고용안정을 위해 싸우고 이미 실업자가 된 사람들을 위해서는 사회적 안전망을 요구한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취업자와 실업자가 원하는 것은 "안정적인 일자리"이다. '안정적이고 떳떳한 일자리의 적극적 창출'은 계속적으로 강조되고 확인되어야할 요구임에도 이는 선명하게 제출되지 못했다.
- 실업자에서 '실업노동자'로
이시기 실업운동의 유의미함은 그동안의 '실업극복'사업에서 '실업운동'으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한다는 요구들이 분출되었다는 것이며, 실업자를 '실업노동자'로 규정하며 주체조직화운동에 대한 고민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실업노동자'라는 언명은 실업자와 노동자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조건에 서 있다는 원칙적인 관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구조조정 상황에서 모든 노동자는 잠재적으로 실업의 위험을 가지며, 실업자들은 영원히 실업상태를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불안정한 노동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노동자나 실업자 모두는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만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업자와 노동자라는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실업노동자"라는 인식을 통해서 양자의 동질성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업자가 중장년실업자인가 청년실업자인가 정리해고자인가과 무관한 것이며, 노동자라고 하는 규정자체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형태로 귀결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 실업운동/제3섹터운동
실업운동진영이 논의를 돌아보면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편의상 이름을 붙이자면 실업운동/제3섹터운동의 논의가 그것이다. 실업극복활동의 방향성을 실업자'운동'으로 잡을 것인가, 아니면 지역의 자활사업·제3섹터사업을 통한 지역운동의 영역으로 잡을 것인가 하는 논점이다. 이러한 논의는 표면적으로 활발히 진행되지는 못했으나 둘다 계속적으로 제기되면서 단체 및 활동가들의 주된 고민의 한축이었다. 이는 실업운동에 대한 고민을 활발하게 하는 긍정적 요소를 지녔으나 거꾸로 그 둘을 선택 혹은 다른 지점의 문제로 사고하는 편향을 낳았다고 보여진다.
즉 실업자운동이라는 포괄적 영역과 자활사업 등 하나의 영역의 문제를 동일한 심급으로 보면서 전자에 있어서는 구체성의 결여를, 후자에 있어서는 운동성의 배제를 가져오는 경향이었다. 여기에는 자활사업에 대한 과도한 긍정성 부여, 혹은 이를 통한 대안의 모색에 대한 맹목적 의미부여가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논의를 통하여 암묵적으로 실업극복단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할 것을 강제받았다. 지역의 기반과 '선의'를 가지고 정부의 비판적(혹은 경쟁적)협력자로 남을 것인지, 실업의 '제거'를 위하여 실업대중 스스로가 조직하는 길고 지난한 투쟁의 길에 나설 것인지. 그러나 논의는 지속되지 못했으며, 자활사업 및 제3섹터논의는 자활후견기관의 몫으로 넘겨졌다. 실업운동이 지속되면서 실업운동의 방향과 요구를 밝히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활동이 진행되면서 실업운동은 재편되지 못했다.
- 사회·민중운동과의 연대의 단절
실업운동진영은 사회·민중운동진영과의 연대를 어디로부터 꾀할지 알지못했거나, 역량의 한계를 이유로 뒤로 밀어놓은 듯 하다. 그러나 실업운동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실업의 '제거'에 있다면 실업과 불안정노동을 강요하며 빈곤을 확산시키는 원인이 신자유주의 정책과 구조조정에 있음을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이는 어느 한 세력의 역량으로 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각각의 차이는 있다할지라도 이에 대해서는 투쟁의 한 괘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에 '자주성'을 기반으로 한 '연대성'의 구현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실업운동진영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실업노동자로의 목소리를 내거나 실업의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며, 부문의 운동으로 스스로를 국한시켰다. 또한 투쟁하는 주체들의 연대를 통한 실업운동의 제기와 주체의 조직화로서의 실업운동이 아닌 '스스로의 조직'을 위한 활동이 중심이 되며 사회운동으로의 실업운동을 제기해내지 못했다.
3) 2004년 현황
전실연은 상반기 수련회를 통해 법인 총회를 열고 법인 설립을 결정했다. 전실연은 사회적 일자리에 대한 전국적인 사업단을 구성하여 그중 여성일용가사사업단을 브랜드화('우렁각시')하여 발족했다. 전실연은 향후 실업운동의 방향에 대해 실업노동자의 조직을 통한 주체운동으로서의 묘연함과 '실업'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어려움을 제기하며 정책적 역량을 강화하고, 모니터링 등을 통한 대정부 정책제안을 제안하고 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해소 이후 남은 기금은 '실업극복국민재단'이 설립되어 운영하고 있다. 실업극복국민재단은 '일자리만들기운동본부'를 제안하여 발족을 앞두고 있다.
3. 실업운동의 평가와 과제
약평을 통해서 실업운동의 시기별로 평가할 지점들을 서술했다. 실업의 원인에 대한 진단을 통해 실업운동의 목표와 요구를 설정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실업운동의 목표와 요구의 부재는 결국 실업운동이 운동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수행하기 보다는 '물질화된 조직'으로 화석화되면서, 스스로의 활동을 축소시키는 경향을 낳았다.
그렇다면 실업운동은 무엇인가? 실업운동이 실업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실업'의 원인을 제거하고, 모두가 떳떳하고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스스로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동안 온전한 의미에서의 실업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업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와 실업자에 대한 구제정책만 있었을 뿐이다. 많은 실업단체들이 있었지만 실업노동자들은 실제로 실업운동에서 주체로 서지 못했다. 실업노동자들은 구호의 대상으로 전락되었고, 자신들의 요구에 근거한 독자적 조직을 꾸리는 데 실패했다. 실업노동자들의 권리를 당연한 권리로 인정하게 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즉, 실업자운동으로의 실업운동은 형성되지 못한 것이다.
대량실업 초기 거리로 밀려나온 실업자들을 조직하거나 정리해고된 노동자의 조직화를 통해 실업운동의 주체를 형성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그 이후 일상적인 사업을 통해 중고령 장기실업자를 조직하려던 시도는 지금도 진행중이나 아직까지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실업노동자'는 누구인가? 노동의 유연화로 인한 노동의 불안정화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을 실업의 위협에 놓이게 했을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게 하고 있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실업노동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불안정한 일자리를 떠도는 노동자들과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중고령장기실업자와 청년실업자. 이러한 실업노동자들의 다양한 군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과 계획없이 실업노동자의 조직화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또한 '실업노동자'의 '조직'에 대한 상조차 불분명하다. 그동안의 논의속에서 노동조합(일반노조 혹은 실업자노조)이나 자조모임 등의 상이 제시되었으나, 어떠한 것도 정확한 조직적 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동안 실업단체들의 활동은 '실업운동이라기보다는 실업이라는 현실공간에서 다양한 배경과 지향을 갖는 단위들이 운동적 접근을 하고 있는 상황(실업운동의 전망과 과제, 김홍일)'이었다. 이는 '실업문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운동의 연대와 결합이라는 긍정적 차원과 함께 실업운동의 단일한 지향과 목표설정의 한계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업단체들은 '실업'이라는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왔으며, 사안적 연대라기 보다는 '실업문제'에 대한 일관된 정책방향을 제시할 것을 요구받았다. 즉, 다양한 요구는 실업운동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가 실업문제 및 실업운동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이에 따른 일관된 정책제시와 실천을 통해 정체성을 확보,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인식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실업'의 문제는 이슈화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실업운동이 '실업'만의 문제로는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업'의 문제를 극명하게 제출하기 위하여 '실업'의 문제가 실업노동자의 삶속에서 어떠한 구체적 문제들로 드러나는지를 보다 폭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과제를 설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업단체들은 실업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폭로하고 그 투쟁을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으로 확장시키는 데에 실패했으며, 불안정노동과 빈곤의 문제를 통해 실업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실패했다. 물론 실업운동을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실업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노동의 유연화를 촉진시키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다면, 이에 맞서서 고용안정과 안정적인 일자리를 요구하며 정부 정책의 전면적 수정을 제기하고 나아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에 실업운동이 위치할 수 있도록 해야했다.
실업운동(?)의 대표적 조직인 전실연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운동을 합의주의적인 시민운동으로 축소시켜왔다. 주체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돈을 매개로 하는 지원사업이 갖는 한계는 자명하다. 기금을 활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기금이 '활용'이 되려면 자기 운동에 대한 명확한 방향과 요구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전실연은 오히려 지원을 안정화하기 위해 연대운동기구로의 전실연을 제도화하는 등 우려스러운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전실연은 스스로의 냉철한 활동평가를 통해 '실업운동체'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민중운동진영과 함께 사회운동·주체운동으로서 실업운동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실업운동의 주체는 반신자유주의투쟁의 주체이기도 하다. 민중운동진영 또한 실업운동을 어느 한 영역의 운동으로 국한시키지 않는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일 주체로 세워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PSSP
1) 대량실업 직후 실업운동의 양상
- 부산 실직자 거리행진
경제 공황 초기인 1998년 4월 부산, 실직자 권리를 선언하는 최초의 실업자 거리 시위가 있었다. '실직자 거리행진 준비위원회'의 주최로 열린 실직자 거리행진에는 부당해고된 파라다이스호텔 노조와 한국노총에서 탈퇴하여 민주노총에 가입한 트롤선 선원노조, 부산지역 건설일용노조, 그리고 일반 실직자들과 시민,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부산의 '실직자 거리행진'은 매월 셋째 토요일을 '실직자 거리행진의 날'로 정하고 거의 1년동안 거리행진을 진행하였다. 수차례의 행진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실업자군이 형성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실업자들은 행진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노숙자들을 우선 조직하기로 하고 '노숙자 자활추진위원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으나 주체가 행방불명 되는 등 모임 자체가 흐지부지 되었다.
다양한 시민사회종교단체들이 '행진'을 매개로 결합했으며, 행진초기 실직자의 주체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실직자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행진'만을 지속하는 것은 그들을 결합시키는데 한계가 있었다는 자평을 남겼다.
- 일용직·저소득노동자 실업대책협의회
98년 6월에는 정부의 실업대책이 한계계층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거나 취약하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임시직·저소득 노동자의 실업문제대책을 요구하는 집단 움직임이 있었다. 주로 빈민지역에 뿌리를 두고 활동해온 빈민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돼 결성된 '일용직·저소득노동자 실업대책협의회'는, 일용직·저소득 실업자에 대한 정확한 실태 파악과 복지정책의 토대 구축, 노사정위원회에의 대표 참여, 대규모 공공사업 조기 발주, 원스톱 서비스센터 설립 등을 요구하면서 기자회견과 가두 시위를 벌였다.
건설일용노동자 및 지역빈민운동단체로 구성된 실업대책협의회는 정책단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실업대책협의회는 전국적인 실업극복단체의 연계를 제안하며 전국적인 실업정책생산단위로의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를 구성하였으며, 서울은 '서울지역실업극복연대'로 전환하게 된다.
- 실업자동맹(준)
98년 12월 22일 전국실업자동맹(가칭) 준비위원회가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결성식을 갖고 99년 상반기까지 전국실업자동맹을 건설할 것을 결의했다. 결성식을 가진 실업자동맹 준비위원회는 일주일에 27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반실업자를 포함한 모든 실업자와 실업운동의 동조자들에게 회원자격을 부여하는 내규를 통과시켰으며, 실업자들의 생존권 확보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자주적 노력을 하기로 결의했다.
실업자동맹 준비위는 이어서 실업자들의 가장 절박한 문제로 △안정된 일자리의 마련 △실업자 지원을 위한 별도의 실업부조금고 등 지원대책 수립 △노숙자에 대한 인간적인 대책 마련 등을 정부에 촉구했다.
실업자동맹은 국민승리21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으나 이후에 독립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서울역 선전전의 진행해 실직자 주체를 형성하고자 했으며, 구호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실업극복사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주체가 불안정하고 지속적인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면서 조직이 해산되었다.
실업자동맹(준)은 실직으로 인해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던 주체들이 모여 결성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 실업자대회
98년 4월 23일 1차 실업자대회를 시작으로 10월까지 6차례의 실업자대회가 개최됐으며, 8월 26일엔 전국의 13개 실업운동 단체들이 전국실업운동단체연석회의를 결성하였다. 이는 IMF범국본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으로(현재의 민중대회 형태) 실직자들의 실질적인 조직이라기 보다는 운동진영내의 주요과제로 실업의 문제를 부각시켰다는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 전해투의 '실업자투쟁'
전해투는 '실업자운동'이라는 광범위한 표현보다는 '투쟁'을 조직한다는 것에 전해투 사업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실업자운동 또는 사업으로써 취업알선, 상담 등의 구제사업은 전개되고 있지만 실제 실업자들의 근본적인 요구를 내걸고 실천적인 행동으로 투쟁하는 것은 소극적이다. 따라서 전해투는 원상회복·고용승계를 요구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실업자 군으로 규정하며 이들을 우선 전국적으로 묶어 세워 투쟁을 힘있게 조직하는 것을 중심사업으로 하고 '실업자 주체들의 투쟁'으로 실업문제를 직접 제기해 들어가는 것이다.
전해투는 독자적 계획으로 서울역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한 캠페인과 집회투쟁을 조직했으나 한계가 있었고, 정리해고 저지투쟁, 정리해고노동자의 원상회복투쟁, 고용승계투쟁을 '중앙집중화'시키기 위한 전국순회투쟁을 했다. 전해투는 '실업·해고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가장 절박한 요구의 함축적 의미인 '완전고용'이라는 공세적 요구를 내걸 때만이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양보를 쟁취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실업반대! 완전고용!'의 구호속에 1차 순회투쟁을 전개했다.
- 청년실업
1) '민중의 기본생활권 쟁취와 청년실업 대책 수립을 위한 전국학생특별위원회'
2) 청년실업운동본부(준)
- 민우회, 여성실업자 '희망선언'
한국여성민우회는 전문대 이상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는 여성실업자들로 구성된 [희망선언]을 발족하여 활동했다. 여성청년실업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희망선언]은 여성실업자의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요구안 등을 제출하며 활동했으나 조직적 확대를 이루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 사회진보연대 실업정책생산모임
사회진보연대는 99년 2월 '실업정책생산모임'을 구성하여 실업운동에 대한 정책논의모임을 진행하였다. 실업의 원인과 실업운동의 이념과 과제를 밝히고자 했으며, 실업운동에 결합하여 정책적 역할을 담당하고자 했다. 99년 10월 '실업자 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의 책을 발간하고 이후에도 정책제언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나, 논의주체들이 불안정해져서 지속되지 못하고 2001년 해산한다.
- 민주노총 고용안정센터
민주노총은 98년 상반기, 고용안정 및 실업대책사업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취업알선 및 능력개발센타'를 설치할 것을 논의 하고, 민주노총내에 고용안정센터의 건립과 '실업자종합지원센터'의 적극적 결합을 통한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게 된다. 민주노총은 99년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지원을 기반으로 한 '실업자종합지원센터'의 건설과 함께 서울센터 및 전국을 연계하는 지역지원팀의 주관단체가 된다.
민주노총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운영위원단체, 실업자종합지원센터 (서울센터)지역지원팀의 주관단체, 전실연 건설이후 전실연 사업의 주관단체(공동대표-민주노총 위원장, 집행위원장-고용안정센터소장, 사무국-고용안정센터 내 설치)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며 실업극복운동의 주요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정부 및 한겨레,MBC,종교단체,시민단체,양대노총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관협력조직이며, 대량실업이후 조성된 실업기금(1,200억)을 운용하는 단위이다. 다양한 실업자구호사업을 민간단체에 위탁하여 진행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재원을 바탕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사업을 매개로 모인 실업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고자 했다. 이후 실업운동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구호사업, 취업알선, 민간위탁 공공근로' 등을 통하여 지역의 저소득, 중고령 실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재원은 수많은 종교,시민,지역단체들의 실업극복사업의 참여를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실업'사업을 위한 새로운 단체들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2) 약평
대량실업 초기에 실업운동은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실업운동이 존재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실업자와 사회위협으로 느껴지는 실업의 문제가 새로운 운동기반을 형성할 것이라는 기대에 따른 것이었다. 대량실업 초기 등장했던 '실업자동맹'이나 '실업자 거리행진' 등은 실업문제의 정치적인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었으나 더 이상의 자기계획을 가지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민중진영의 실업문제에 대한 대응은 더욱 단명했다. 대량실업 초기에는 노동사회운동단체를 망라하여 실업문제에 대한 입장과 대응방향이 쏟아져 나왔다. 민주노총이나 진보정당에서는 '실업자 조직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고, 사회운동진영에서는 노동, 경제, 여성, 복지, 정보통신, 보건의료 등 각 부문에서 나타나는 실업의 문제를 진단하고 각각의 대응과 총체적인 실업운동이 필요함을 제기했다. 그러나 실업률의 하락과 함께 실업의 문제가 수그러들면서, 실업문제는 경기가 악화되고 있음을 나타나는 사례로, 문서에나 등장할 뿐이었다. '실업운동'은 근본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조직화에 있어서도 실업자 대중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조직화의 강조는 조직화에 있어서의 철저한 실패로 드러났다. 실업노동자는 행진 대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며, 정리해고된 노동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시기 하나의 쟁점이었던 '실업자 노조가입'의 문제는 현장과 연결되지 못했다.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이를 제기하였으나 노사정위 협상내용의 하나일 뿐 실업자(정리해고자)들이 노조가입을 요구하거나 조직하는데는 실패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업이 바로 생존의 위협으로 직결되었던 대다수의 실업자를 지원하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실업자 풀(pool)을 형성, 조직하려는 흐름이 생겨났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재원을 바탕으로 하여 진행된 사업과 센터들이 그것이다. IMF 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실업자들을 보면서 국민 상당수가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다고 인식하여 출발한 실직자 지원사업은 쌀나누기, 시레기 나누기, 월 15만원지원 등의 지원사업을 펼쳤다. 운동진영의 일부에서 IMF재협상을 주장하고 거리로 나올 때에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된 구호사업에 대한 평가는 다음 두가지다. 구호사업을 통해 실업노동자와 만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조직화하는 매개가 되었다는 평가와, 결국 실업노동자들의 분노를 관리하고 잠재우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제출되었다.
실업자구호사업은 국가의 위기상황에 대해 민간단체가 그 원인을 파악하고 책임과 대책마련을 요구하는 방식이 아닌, 정부나 언론의 '실업극복 캠페인'이나 '금모으기 운동'에 조응하여 민간단체가 앞장서서 근거없는 희망을 유포하고 위기관리를 위한 지원으로 표현되었다. 구호사업의 또다른 영향은 실업단체의 활동이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사업'을 중심으로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즉, 실업단체에서 진행하는 구호사업이 중단될 경우 실업자를 만날 수 있는 통로자체가 사라진다는 인식이 존재했다. 실업자를 만나려면 사업이 있어야 하고, 사업이 진행되려면 재정과 인력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은 실업극복국민운동이나 지자체의 지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을 낳았다.
2. 2000년 ~ 2003년까지의 실업운동
가장 높은 실업률을 기록했던 2000년 2월 이후 실업률은 계속 하락했다. 2000년부터 꾸준히 낮아진 실업률은 '실업'의 문제가 사회적인 관심에서 멀어지는 과정이었다. 정부의 실업대책의 축소 - 공공근로 축소 - 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지원으로 문을 연 전국 100개 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 대한 지원중단은 변화된 실업의 양상과는 무관하게 실업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에서 벗어난 상황을 반영했다.
99년 결성된 실업단체의 전국적인 연대체인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이하 전실연)는 거의 유일한 실업운동조직으로 남아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의 해소 논의는 전실연이 사회적으로 실업운동의 요구를 제기하고 활동하기보다는 실업운동진영내의 재편과 재정지원문제로 국한된 측면이 존재한다.
1) 실업자종합지원센터와 조직화
99년 시범적으로 시행되었던 실업자종합지원센터는 2000년 전국 100개 센터로 확대되었으며, 2001년 실업극복국민운동의 지원중단으로 인해 많은 단체들이 센터사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취업알선, 생활·노동법률상담, 생계비 지원 및 기타 복지지원프로그램들을 수행했던 지원센터는 지원의 중단과 재개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도 37개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실업운동에서 지원센터사업은 실업자의 조직화를 위한 유의미한 거점으로 인식되었다. 즉, 센터를 중심으로 실업자들이 모이고 각각의 사업을 통해 교육 및 주체를 조직화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센터들이 공공근로 참여자나 생계비지원대상을 중심으로 상조회 등의 모임을 만들었으며, 취업알선상담을 통해 직종별 모임을 구성하고 노동조합의 구성까지를 논의하기도 했다. 생계비 지원 등 구호사업의 중단 이후에는 취업알선과 수급권 상담을 주요한 조직화의 매개로 판단하고 주요사업으로 배치했다. 취업알선의 경우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일용직 중심의 실업노동자가 대부분이었기에 이들을 중심으로 직종별 모임을 구성하고, 낮은 임금에 반대하며 최소한의 노동법을 준수하도록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센터운영 자체를 기금에 의존했던 실업단체들은 기금의 중단으로 인해 절반 이상이 센터사업을 중단했으며, 일부 남아있는 상조회 등의 모임도 지역내 소규모 공동체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모임은 구성되었으나 일자리의 중단이나 지원이 중단되면 해소되는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나마 '지역주민 조직화'에 중심을 두고 활동했던 센터들은 지역운동단체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러한 지역단체들은 지역내 주민들의 이해와 결합하는 주제로 활동의 중심을 변화하였다. 이는 일상적인 주민의 조직화를 목표로 하기에 조직화의 매개로서의 센터사업은 스스로의 목적과 방향을 정립하지 못한채 지원여부에 따라 운영이 흔들리는 한계가 있었다..
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 대한 평가는 정부나 기금을 '활용'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였으나 결국은 스스로 '관리의 주체'가 되거나 활동의 범위를 오히려 국한시켰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재에도 많은 단체들이 정부나 민간기금을 '활용'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지역내 거점으로의 이러저러한 센터의 건립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회의
전실연은 고실업, 장기실업이 고착화되는 사회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사업을 전개하였던, 노동, 여성, 시민사회, 종교, 빈민, 장애인 등의 단체들의 전국적 연대기구이다. 또한 전국적으로 개별화된 실업운동의 구심을 세우기 위한 활동을 목적으로 한 기구이기도 하다. 전실연은 사회적으로 상대적 소외계층의 실업문제를 중심으로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실업자를 주체로 한 조직화가 목적이었다. 전실연은 전국적 연대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실업자를 포함한 소외계층의 권리를 지켜내고 나아가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영역을 확대하는 사업을 중심에 두었다.
2000년 공공근로 축소와 센터사업의 확대는 전실연의 활동과 기반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2001년 센터사업의 중단과 실업단체들의 자활후견기관으로의 전화는 전실연으로 하여금 연대기구의 성격과 목표를 분명히 할 것을 강제했다. 전실연은 실업운동의 방향논의를 위한 실업단체 설문과 논의를 통하여 '전실연은 '실업'의 문제를 주제로 하는 단체들의 아니라 '실업운동체'임을 분명히 하고, 전실연의 정체성 및 지향은 실업문제 및 실업운동에 대한 방향제시를 통해 사회운동속에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러한 실업단체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실연은 실업단체의 유지·존속을 위한 상층협의에 중심을 두었으며, 전실연의 제도화와 민간고용안정센터 등을 추진하였다.
전실연은 실업운동의 요구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사회적운동으로 제기하며 투쟁하기보다는 실업단체들을 유지하거나 실업기금을 민간기금화하기 위한 협상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3)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대량실업 직후 조성된 1,200억의 민간실업기금을 운영하는 민간대책기구가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이다. 그러나 민간단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기금이 근로복지공단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실질적인 기금의 운용은 정부주도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업극복국민운동은 대량실업 초기 다양한 구호사업에 기금을 지원했으며, 2000년 전국에 100개의 실업자종합지원센터에 재정을 지원했다. 그러나 2001년 센터사업의 중단과 실업극복국민운동의 해소논의를 거쳐 2003년 해소하게 된다.
운영위원에 민주노총, 여연, 경실련 등이 참여하고 있는 실업극복위원회는 겉으로는 민간운동기구를 표방하고 있으나 사실상 실업단체의 활동을 규제하며 관리하는 역할을 해왔다. 구호사업 이외에 '실업자 조직'사업에 기금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각 센터와는 사업을 '약정'한 관계라는 이유로 실업극복국민운동의 의사결정이나 최소한의 논의결과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를 둘러싼 평가의 지점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국민운동의 사업이 정부의 실업대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희석시키는 관리자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관리자의 주도적인 역할을 민간단체들이 담당하거나 혹은 묵인했다는 평가이다. 결국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를 민간대책기구로 내세우며 실업자조직운동을 관리하고 실업자대중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했던 정부의 의도와 이에 대한 비판보다는 기금을 중심으로 스스로 그 관리주체를 자임했던 민간단체의 문제점인 것이다.
3) 약평
- 실업운동의 과제와 목표 부재
실업운동진영의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2000년은 '자활'사업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과 집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월 말 자활후견기관 신청을 앞두고 제 실업단체들은 앞다투어 자활사업에 대한 계획을 제출하였다. 자활후견기관 신청이 마무리되자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 논의가 진행되었다. 또한 5월말로 들어서면서 실업운동진영의 쟁점은 공공근로 축소반대, 실업예산 확충으로 맞추어졌다. 3단계 공공근로의 대폭적인 축소는 전국의 실업노동자들을 한자리로 모이게하며, 3000명이 모이는 실업자대회를 가능하게 했다. 자활사업·국민기초생활보장법·공공근로의 3대 쟁점사안에 대한 대응과 계획을 중심으로 실업운동진영은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나 3대 쟁점을 관통하는 실업운동의 요구는 모호했다. 현안에 대한 구호는 존재했으나, 실업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는 부재했다. 전실연은 2001년 논의를 통하여 실업문제의 사회화와 실업운동의 주체형성, 연대운동의 강화를 목표로 설정했으나, 구체적인 요구나 사업으로 확대되지 못한채 흐지부지 되었다.
대량실업 직후 'IMF 재협상', '구조조정, 정리해고 반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외에 실업운동진영이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명확히 한적이 한번도 없다.
또한 현재 일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임금인상과 고용안정을 위해 싸우고 이미 실업자가 된 사람들을 위해서는 사회적 안전망을 요구한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취업자와 실업자가 원하는 것은 "안정적인 일자리"이다. '안정적이고 떳떳한 일자리의 적극적 창출'은 계속적으로 강조되고 확인되어야할 요구임에도 이는 선명하게 제출되지 못했다.
- 실업자에서 '실업노동자'로
이시기 실업운동의 유의미함은 그동안의 '실업극복'사업에서 '실업운동'으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한다는 요구들이 분출되었다는 것이며, 실업자를 '실업노동자'로 규정하며 주체조직화운동에 대한 고민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실업노동자'라는 언명은 실업자와 노동자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조건에 서 있다는 원칙적인 관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구조조정 상황에서 모든 노동자는 잠재적으로 실업의 위험을 가지며, 실업자들은 영원히 실업상태를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불안정한 노동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노동자나 실업자 모두는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만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업자와 노동자라는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실업노동자"라는 인식을 통해서 양자의 동질성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업자가 중장년실업자인가 청년실업자인가 정리해고자인가과 무관한 것이며, 노동자라고 하는 규정자체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형태로 귀결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 실업운동/제3섹터운동
실업운동진영이 논의를 돌아보면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편의상 이름을 붙이자면 실업운동/제3섹터운동의 논의가 그것이다. 실업극복활동의 방향성을 실업자'운동'으로 잡을 것인가, 아니면 지역의 자활사업·제3섹터사업을 통한 지역운동의 영역으로 잡을 것인가 하는 논점이다. 이러한 논의는 표면적으로 활발히 진행되지는 못했으나 둘다 계속적으로 제기되면서 단체 및 활동가들의 주된 고민의 한축이었다. 이는 실업운동에 대한 고민을 활발하게 하는 긍정적 요소를 지녔으나 거꾸로 그 둘을 선택 혹은 다른 지점의 문제로 사고하는 편향을 낳았다고 보여진다.
즉 실업자운동이라는 포괄적 영역과 자활사업 등 하나의 영역의 문제를 동일한 심급으로 보면서 전자에 있어서는 구체성의 결여를, 후자에 있어서는 운동성의 배제를 가져오는 경향이었다. 여기에는 자활사업에 대한 과도한 긍정성 부여, 혹은 이를 통한 대안의 모색에 대한 맹목적 의미부여가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논의를 통하여 암묵적으로 실업극복단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할 것을 강제받았다. 지역의 기반과 '선의'를 가지고 정부의 비판적(혹은 경쟁적)협력자로 남을 것인지, 실업의 '제거'를 위하여 실업대중 스스로가 조직하는 길고 지난한 투쟁의 길에 나설 것인지. 그러나 논의는 지속되지 못했으며, 자활사업 및 제3섹터논의는 자활후견기관의 몫으로 넘겨졌다. 실업운동이 지속되면서 실업운동의 방향과 요구를 밝히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활동이 진행되면서 실업운동은 재편되지 못했다.
- 사회·민중운동과의 연대의 단절
실업운동진영은 사회·민중운동진영과의 연대를 어디로부터 꾀할지 알지못했거나, 역량의 한계를 이유로 뒤로 밀어놓은 듯 하다. 그러나 실업운동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실업의 '제거'에 있다면 실업과 불안정노동을 강요하며 빈곤을 확산시키는 원인이 신자유주의 정책과 구조조정에 있음을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이는 어느 한 세력의 역량으로 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각각의 차이는 있다할지라도 이에 대해서는 투쟁의 한 괘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에 '자주성'을 기반으로 한 '연대성'의 구현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실업운동진영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실업노동자로의 목소리를 내거나 실업의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며, 부문의 운동으로 스스로를 국한시켰다. 또한 투쟁하는 주체들의 연대를 통한 실업운동의 제기와 주체의 조직화로서의 실업운동이 아닌 '스스로의 조직'을 위한 활동이 중심이 되며 사회운동으로의 실업운동을 제기해내지 못했다.
3) 2004년 현황
전실연은 상반기 수련회를 통해 법인 총회를 열고 법인 설립을 결정했다. 전실연은 사회적 일자리에 대한 전국적인 사업단을 구성하여 그중 여성일용가사사업단을 브랜드화('우렁각시')하여 발족했다. 전실연은 향후 실업운동의 방향에 대해 실업노동자의 조직을 통한 주체운동으로서의 묘연함과 '실업'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어려움을 제기하며 정책적 역량을 강화하고, 모니터링 등을 통한 대정부 정책제안을 제안하고 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해소 이후 남은 기금은 '실업극복국민재단'이 설립되어 운영하고 있다. 실업극복국민재단은 '일자리만들기운동본부'를 제안하여 발족을 앞두고 있다.
3. 실업운동의 평가와 과제
약평을 통해서 실업운동의 시기별로 평가할 지점들을 서술했다. 실업의 원인에 대한 진단을 통해 실업운동의 목표와 요구를 설정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실업운동의 목표와 요구의 부재는 결국 실업운동이 운동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수행하기 보다는 '물질화된 조직'으로 화석화되면서, 스스로의 활동을 축소시키는 경향을 낳았다.
그렇다면 실업운동은 무엇인가? 실업운동이 실업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실업'의 원인을 제거하고, 모두가 떳떳하고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스스로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동안 온전한 의미에서의 실업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업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와 실업자에 대한 구제정책만 있었을 뿐이다. 많은 실업단체들이 있었지만 실업노동자들은 실제로 실업운동에서 주체로 서지 못했다. 실업노동자들은 구호의 대상으로 전락되었고, 자신들의 요구에 근거한 독자적 조직을 꾸리는 데 실패했다. 실업노동자들의 권리를 당연한 권리로 인정하게 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즉, 실업자운동으로의 실업운동은 형성되지 못한 것이다.
대량실업 초기 거리로 밀려나온 실업자들을 조직하거나 정리해고된 노동자의 조직화를 통해 실업운동의 주체를 형성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그 이후 일상적인 사업을 통해 중고령 장기실업자를 조직하려던 시도는 지금도 진행중이나 아직까지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실업노동자'는 누구인가? 노동의 유연화로 인한 노동의 불안정화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을 실업의 위협에 놓이게 했을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게 하고 있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실업노동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불안정한 일자리를 떠도는 노동자들과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중고령장기실업자와 청년실업자. 이러한 실업노동자들의 다양한 군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과 계획없이 실업노동자의 조직화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또한 '실업노동자'의 '조직'에 대한 상조차 불분명하다. 그동안의 논의속에서 노동조합(일반노조 혹은 실업자노조)이나 자조모임 등의 상이 제시되었으나, 어떠한 것도 정확한 조직적 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동안 실업단체들의 활동은 '실업운동이라기보다는 실업이라는 현실공간에서 다양한 배경과 지향을 갖는 단위들이 운동적 접근을 하고 있는 상황(실업운동의 전망과 과제, 김홍일)'이었다. 이는 '실업문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운동의 연대와 결합이라는 긍정적 차원과 함께 실업운동의 단일한 지향과 목표설정의 한계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업단체들은 '실업'이라는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왔으며, 사안적 연대라기 보다는 '실업문제'에 대한 일관된 정책방향을 제시할 것을 요구받았다. 즉, 다양한 요구는 실업운동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가 실업문제 및 실업운동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이에 따른 일관된 정책제시와 실천을 통해 정체성을 확보,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인식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실업'의 문제는 이슈화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실업운동이 '실업'만의 문제로는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업'의 문제를 극명하게 제출하기 위하여 '실업'의 문제가 실업노동자의 삶속에서 어떠한 구체적 문제들로 드러나는지를 보다 폭넓게 바라봐야 한다는 과제를 설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업단체들은 실업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폭로하고 그 투쟁을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으로 확장시키는 데에 실패했으며, 불안정노동과 빈곤의 문제를 통해 실업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실패했다. 물론 실업운동을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실업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노동의 유연화를 촉진시키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다면, 이에 맞서서 고용안정과 안정적인 일자리를 요구하며 정부 정책의 전면적 수정을 제기하고 나아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에 실업운동이 위치할 수 있도록 해야했다.
실업운동(?)의 대표적 조직인 전실연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운동을 합의주의적인 시민운동으로 축소시켜왔다. 주체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돈을 매개로 하는 지원사업이 갖는 한계는 자명하다. 기금을 활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기금이 '활용'이 되려면 자기 운동에 대한 명확한 방향과 요구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전실연은 오히려 지원을 안정화하기 위해 연대운동기구로의 전실연을 제도화하는 등 우려스러운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전실연은 스스로의 냉철한 활동평가를 통해 '실업운동체'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민중운동진영과 함께 사회운동·주체운동으로서 실업운동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실업운동의 주체는 반신자유주의투쟁의 주체이기도 하다. 민중운동진영 또한 실업운동을 어느 한 영역의 운동으로 국한시키지 않는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일 주체로 세워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