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영화를 위하여
남한 영화 운동의 좌표를 그리기 위해서는 때로는 다소 먼 길을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영화 운동도 다른 나라의 운동을 참조하며 모범사례를 연구하고 영감을 받았다. 지난번에 다루었던 카프의 영화 운동이 일본과 소련의 경우를 참조했다면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는 70년대 말 80년대 초 남한 영화 운동의 이론화 작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번 '영화 속으로'는 69년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도 솔라나스(Fernando Solanas)와 옥타비오 헤티노(Octavio Getino)가 쓴 일종의 선언문(혹은 소논문), '제3영화를 위하여'는 먼 우회로의 시작이 될 것이다.
우선 이 글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약 20페이지 남짓한 작은 논문인 '제3영화를 위하여'는 영화운동에 정치적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준 '최초'의 글이다. 물론 구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이 이 글보다 먼저 있었고 이론적 논의들도 '제3영화를 위하여'에 앞서 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문학을 중심으로 문예 전반을 설명하는 용어고 네오리얼리즘은 '제3영화를 위하여'에 따르면 '체제 내'의 저항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영화운동의 정치적 이론적 근거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운동'으로서의 영화 운동의 이론적 작업의 시초는 '제3 영화를 위하여'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69년 발표된 후 70년대에 걸쳐 엄청난 파급효과를 내며 빠르게 전파되어 나갔고 이 글에서 제안하는 제작 및 배급 방식은 하나의 규범이 되었으며 현재는 모든 영화사 책에서 솔라나스와 헤티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글이 지니고 있는 급진성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솔라나스와 헤티노는 이 글에서 영화를 3가지로 구분한다. 제1영화는 할리우드 영화 및 할리우드식 제작방식과 배급방식을 사용하는 모든 형태의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장사꾼의 쇼'에 불과하고 이런 영화들은 신식민주의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기능한다. 제2 영화 즉 유럽의 작가주의 영화들은 '미(美) 그 자체가 혁명적이다.'라거나 '새로운 영화 혁명'등을 언급하면서 정작 신식민주의 본질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제 2 영화로 지칭된 영화들은 구체적으로는 프랑스 누벨바그,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과 그 영향권 안에 있는 브라질의 시네마 노보(Cinema Novo)까지를 포함한다. 이들은 이 제2영화들이 그 사회적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인식을 가지고 출발하였지만 현실에 대한 구조적인 통찰의 부족으로 정치적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일부 엘리트 관객만을 만족시켰을 뿐이며 결국 시장논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예술적 형식과 산업적 구조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통해 영화가 상업성에 질식당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회화와는 다르게 대중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할 영화라는 장르가 감독 한 사람의 개인적인 텍스트가 되어왔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제 3영화는 자본주의적 산업구조에 종속되지 않는 저예산 영화가 되어야 하며, 감독이 영화의 메시지를 결정하는 이른바 작가영화와는 달리 영화의 의미를 관객이 직접 만들어 가는 영화, 즉 가르시아 에스피노사의 말을 빌면 불완전 영화(imperfect cinema)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제 3영화론은 미국과 유럽의 영화가 지니고 있었던 이론적 난점들을 비록 지나치게 단순화한 면이 있지만 정확하게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솔라나스는 이러한 그들의 이론을 영화 <불타는 시간>을 통해 직접 실천한다. 이 영화는 '제3영화를 위하여'가 발표되기 한 해전에 만들어져 베네수엘라의 메니다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운동가들에 의해 완전히 독립적인 제작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불타는 시간>은 예술적 책임을 지는 한 명의 감독이 아니라 해방영화 그룹 전체가 참여하는 집단제작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관객을 직접 '영화 만들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영화는 갑자기 진행을 멈추고는 '이제 당신이 결론을 내리고 영화를 진행시킬 차례다. 당신에게 발언권이 있다'라며 말을 건다.
'동지들, 이것은 그저 영화를 보여 주는 것도 쇼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만남(A MEETING)이며. 반제국주의 연합의 행동입니다. 여기는 바로 이러한 투쟁에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만을 위한 장소입니다. 왜냐면 여기에는 구경꾼이나 적들의 동조자들을 위한 자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오직 이 영화가 목격하고 심화하려했던 시도의 과정들의 작가들과 주인공들의 자리만 있습니다. 이 영화는 대화를 위한 사전 읽을거리이며 의지를 구하고 찾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 앞에 내어놓는 것은 여러분들을 위한 보고서이며 관람후의 논쟁을 위한 것입니다', '역사의 진정한 작가와 주인공으로서 여러분이 도달할 결론들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모아둔 경험과 결론들은 상대적인 가치만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해방의 현재와 미래인 여러분에게 유용한 것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것이 우리가 영화를 멈춘 이유입니다. 결론은 여러분들이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열려져있습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작가'가 만들어낸 한편의 독립된 예술이 아니라 관객이 공동 창작의 주체로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집단적인 제작방식과 더불어 이들은 운동가를 축으로 하는 배급망을 만들 것을 주장한다. 이들이 말한 제1, 제2 제3 영화는 위에서 보다시피 이른바 제 1세계, 제 2세계, 제3세계와는 다른 개념이며 각각이 하나의 영화제작 및 배급을 비롯한 '영화'를 둘러싼 경제적 하부구조와 이데올로기적으로 소비되는 담론의 장까지 포함하는 개념적 단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이들이 제시한 영화와 생산구조와의 관계 그리고 영화와 관객사이에 새로운 관계설정이라는 부분이다. 이들은 할리우드식 제작방식에 맞서 게릴라식 제작을 이야기했고 작가주의에 맞서서 집단창작을 이야기한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사고하는 것은 영화의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시도인 것이다. 이 영화들이 정말로 혁명적인 것은 이들의 구호가 '혁명'이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근본판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혁명적' 사고는 그들이 '선언'을 발표한지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장 급진적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날카롭게 지적했던 상품으로서의 영화, 예술로서의 영화의 특징이 여전히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며 이 두 가지 특징들을 규정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구조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영화그룹의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영화운동은 전 세계에 할리우드와 유럽영화이외의 영화가 존재하며 그것도 가장 논쟁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렸다. 이들의 운동은 '제3세계 영화운동'의 가장 중요한 실천이면서 동시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이들을 체제외적 영화를 지향하는 급진적인 전 세계 영화인들의 영화적 선배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PSSP
「제3영화를 위하여」는 『영화운동론』(서울영화집단,1983)에 번역 소개되었다. 지금 이 책은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운데 대학도서관에도 분실된 경우가 많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예술의 전당' 예술자료원에 1권이 있다. 이 글의 영문 번역은 Bill Nichols 의 『Movies & Methods』에 실려 있다. 영화 <불타는 시간>은 한예종 영상원 자료실이나 노동자 뉴스 제작단, 미디어센터에 문의하여야 한다.
우선 이 글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약 20페이지 남짓한 작은 논문인 '제3영화를 위하여'는 영화운동에 정치적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준 '최초'의 글이다. 물론 구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이 이 글보다 먼저 있었고 이론적 논의들도 '제3영화를 위하여'에 앞서 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문학을 중심으로 문예 전반을 설명하는 용어고 네오리얼리즘은 '제3영화를 위하여'에 따르면 '체제 내'의 저항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영화운동의 정치적 이론적 근거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운동'으로서의 영화 운동의 이론적 작업의 시초는 '제3 영화를 위하여'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69년 발표된 후 70년대에 걸쳐 엄청난 파급효과를 내며 빠르게 전파되어 나갔고 이 글에서 제안하는 제작 및 배급 방식은 하나의 규범이 되었으며 현재는 모든 영화사 책에서 솔라나스와 헤티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글이 지니고 있는 급진성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솔라나스와 헤티노는 이 글에서 영화를 3가지로 구분한다. 제1영화는 할리우드 영화 및 할리우드식 제작방식과 배급방식을 사용하는 모든 형태의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장사꾼의 쇼'에 불과하고 이런 영화들은 신식민주의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기능한다. 제2 영화 즉 유럽의 작가주의 영화들은 '미(美) 그 자체가 혁명적이다.'라거나 '새로운 영화 혁명'등을 언급하면서 정작 신식민주의 본질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제 2 영화로 지칭된 영화들은 구체적으로는 프랑스 누벨바그,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과 그 영향권 안에 있는 브라질의 시네마 노보(Cinema Novo)까지를 포함한다. 이들은 이 제2영화들이 그 사회적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인식을 가지고 출발하였지만 현실에 대한 구조적인 통찰의 부족으로 정치적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일부 엘리트 관객만을 만족시켰을 뿐이며 결국 시장논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예술적 형식과 산업적 구조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통해 영화가 상업성에 질식당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회화와는 다르게 대중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할 영화라는 장르가 감독 한 사람의 개인적인 텍스트가 되어왔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제 3영화는 자본주의적 산업구조에 종속되지 않는 저예산 영화가 되어야 하며, 감독이 영화의 메시지를 결정하는 이른바 작가영화와는 달리 영화의 의미를 관객이 직접 만들어 가는 영화, 즉 가르시아 에스피노사의 말을 빌면 불완전 영화(imperfect cinema)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제 3영화론은 미국과 유럽의 영화가 지니고 있었던 이론적 난점들을 비록 지나치게 단순화한 면이 있지만 정확하게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솔라나스는 이러한 그들의 이론을 영화 <불타는 시간>을 통해 직접 실천한다. 이 영화는 '제3영화를 위하여'가 발표되기 한 해전에 만들어져 베네수엘라의 메니다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운동가들에 의해 완전히 독립적인 제작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불타는 시간>은 예술적 책임을 지는 한 명의 감독이 아니라 해방영화 그룹 전체가 참여하는 집단제작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관객을 직접 '영화 만들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영화는 갑자기 진행을 멈추고는 '이제 당신이 결론을 내리고 영화를 진행시킬 차례다. 당신에게 발언권이 있다'라며 말을 건다.
'동지들, 이것은 그저 영화를 보여 주는 것도 쇼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만남(A MEETING)이며. 반제국주의 연합의 행동입니다. 여기는 바로 이러한 투쟁에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만을 위한 장소입니다. 왜냐면 여기에는 구경꾼이나 적들의 동조자들을 위한 자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오직 이 영화가 목격하고 심화하려했던 시도의 과정들의 작가들과 주인공들의 자리만 있습니다. 이 영화는 대화를 위한 사전 읽을거리이며 의지를 구하고 찾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 앞에 내어놓는 것은 여러분들을 위한 보고서이며 관람후의 논쟁을 위한 것입니다', '역사의 진정한 작가와 주인공으로서 여러분이 도달할 결론들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모아둔 경험과 결론들은 상대적인 가치만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해방의 현재와 미래인 여러분에게 유용한 것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것이 우리가 영화를 멈춘 이유입니다. 결론은 여러분들이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열려져있습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작가'가 만들어낸 한편의 독립된 예술이 아니라 관객이 공동 창작의 주체로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집단적인 제작방식과 더불어 이들은 운동가를 축으로 하는 배급망을 만들 것을 주장한다. 이들이 말한 제1, 제2 제3 영화는 위에서 보다시피 이른바 제 1세계, 제 2세계, 제3세계와는 다른 개념이며 각각이 하나의 영화제작 및 배급을 비롯한 '영화'를 둘러싼 경제적 하부구조와 이데올로기적으로 소비되는 담론의 장까지 포함하는 개념적 단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이들이 제시한 영화와 생산구조와의 관계 그리고 영화와 관객사이에 새로운 관계설정이라는 부분이다. 이들은 할리우드식 제작방식에 맞서 게릴라식 제작을 이야기했고 작가주의에 맞서서 집단창작을 이야기한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사고하는 것은 영화의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시도인 것이다. 이 영화들이 정말로 혁명적인 것은 이들의 구호가 '혁명'이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근본판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혁명적' 사고는 그들이 '선언'을 발표한지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장 급진적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날카롭게 지적했던 상품으로서의 영화, 예술로서의 영화의 특징이 여전히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며 이 두 가지 특징들을 규정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구조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영화그룹의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영화운동은 전 세계에 할리우드와 유럽영화이외의 영화가 존재하며 그것도 가장 논쟁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렸다. 이들의 운동은 '제3세계 영화운동'의 가장 중요한 실천이면서 동시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이들을 체제외적 영화를 지향하는 급진적인 전 세계 영화인들의 영화적 선배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PSSP
「제3영화를 위하여」는 『영화운동론』(서울영화집단,1983)에 번역 소개되었다. 지금 이 책은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운데 대학도서관에도 분실된 경우가 많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예술의 전당' 예술자료원에 1권이 있다. 이 글의 영문 번역은 Bill Nichols 의 『Movies & Methods』에 실려 있다. 영화 <불타는 시간>은 한예종 영상원 자료실이나 노동자 뉴스 제작단, 미디어센터에 문의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