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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영화와 민족주의

우리의 수용태도

이정일 |
이 기획의 가장 처음에서 살펴보았던 <제3 영화를 위하여>는 전체 영화사적인 맥락을 염두 해두고 정치적인 영화미학에 관해 이야기한 선언문이다. 하기에 라틴아메리카 해방 영화 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시네마선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선언문은 라틴아메리타 해방영화의 사상적 배경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선언문이다. 선언은 세부분으로 나뉘는데 다음과 같다.

1) 라틴 민족의 문화의 발달과 강화를 위한, 제국주의를 비롯한 문화적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영화
2) 라틴 민족의 미래통합을 위한 공동의 문제와 대상을 향한 전략
3) 영화는 민중의 사회적 의식을 높이고, 비판적 사회 투쟁을 위해 사용된다.

선언의 이러한 내용은 이들이 계급투쟁을 염두에 두었다라기 보다는 오히려 라틴 민족주의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라틴 민족주의는 멀리는 볼리바르부터 가까이는 멕시코의 철학자 호세 바스콘셀로스까지 계속 이어져온 것이다. 이 사상은 외세 특히 미국을 배격 혹은 경계하고 중남미 국가들이 단결할 것을 주장하며 ‘민중’을 계몽하고 선도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다. 바스콘셀로스는 그의 저서『우주적 인종(La raza c?smica)』에서 인류 역사를 세단계로 구분한다. 첫 단계는 물질적 혹은 전쟁의 시대이며 그 다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성적 정치적 시대이고 다가올 새 시대는 정신적 혹은 미학적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실증주의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근대화를 앞세운 디아스 정권 멕시코의 독재 정권
과 이를 뒤에서 사주하고 있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비판한다. 디아스 정권과 미국이 근본으로 삼고 있는 실증주의는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한 상대철학이며 거짓된 보편철학이라고 지적하면서 진정한 보편 철학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탄생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왜곡된 철학과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와 민중을 위한 계몽적 실천을 강조한다. 그의 국립대학교 총장 취임사를 보면

가난과 무지는 우리의 최대의 적이며, 그 중에서 우리에게는 무지의 문제를 해결할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이 순간에 나는 단순히 새총장이 아니라 혁명의 대리인으로서…. 현대의 혁명은 학자와 예술가를 필요로 하지만, 그러한 필요는 학문과 예술이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는데 봉사한다는 조건이 만족되어야 합니다. 억압을 정당화시키는데 자신의 학문을 사용하는 학자와 의롭지 못한 주인을 즐겁게 하는데 자신의 재능을 파는 예술가는 존경과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의 철학은 미국식 실증주의적 삶에 대하여 라틴아메리카인을 미학적 시대를 책임질 ‘우주적 인종’으로 자리매김함과 동시에 이 ‘신인간’이 실천해야할 방향을 제시한다. 이러한 계몽주의적 성격은 솔라나스와 헤티노의 <제3영화를 위하여>에서도 다시 나타나는데 그들은 영화의 본성이 ‘종합시키는 능력, 살아있는 그대로의 기록과 벌거벗긴 현실이 제공될 수 있다는 가능성, 시청각적 도구로서 지니는 계몽적 힘…’이라고 말한다. 또 같은 글에서 <불타는 시간>을 설명하면서 ‘이 영화운동은 열린 결말의 영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교육의 한 방식이었다.’라며 그들의 목적이 영화를 통한 정치적 계몽에 있었음을 분명히 한다. 바스콘셀로스의 이 라틴 민족주의는 중남미 최초의 혁명이었던 멕시코 혁명 후 그 정당성을 확보해주었고 다른 국가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의 사상은 이제껏 역사의 주체에서 소외되어 있던 중남미인들을 역사의 중심에 올려놓은 것이며 이후 많은 라틴아메리카의 변혁 운동의 사상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해방영화 그룹도 마찬가지로 그의 영향권 내에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해방영화가 우리에게 수용된 방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70~80년대 군사독재라는 현실 하에서 해방영화의 급진적 현실 비판의 태도를 애써 눈감은 경우이다. 솔라나스와 인터뷰를 했던 장용석은 ‘80년대에 (이들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조금 과장을 한다면 목숨을 거는 것이었고,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또 다른 운동의 방식이었다’라고 회고한다.
또 다른 하나는 민중 운동 진영에서 이들의 ‘혁명적 무기’로서의 영화라는 개념에 주목하여 계급투쟁의 도정에서 문화 운동의 신화적인 사례로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르헨티나 해방영화들의 영화적 실천에 감탄하며 이러한 실천을 조직해내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화된 수용과정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특수한 현실을 간과하게된다. 즉, 아르헨티나 해방영화 세력들이 갖고 있던 페론주의적 성향에 대한 이해 없이 도식적으로 독재자 혹은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끼워 맞추는 해석을 한것이다. 그러니 페론이 72년에 재집권하고 해방영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대거 정부에 의하여 등용되자 이들이 본래 페론주의자였던 것이나 페론의 초기의 개혁정책의 의미에 관한 이해도 없었던 한국의 영화운동은 어리둥절해 하거나 솔라나스와 헤티스를 배신자로 낙인찍게 된 것이다. 사실 아르헨티나 해방영화 운동이 다른 영화 운동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급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또 해방영화가 한국의 독립영화 제작자들이나 노동자 뉴스 제작단, 서울 영화 집단과 같이 영화를 변혁운동의 한 형태로 영화를 사고하는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서울영화집단은) 기존의 현실 도피적이고 개인 취향적인 제도권영화를 위한 연습과정으로서의 단편영화를 거부하고 민중성을 강조하며 폐쇄적인 소서클을 반합법적인 대중조직으로… 그들은 공동제작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그 예로… <파랑새>는 영화적 실천 활동의 초보적 형태에 지나지 못했지만 민중과 함께 운동하는 영화의 존재양식을 확보하려 하였다는 점에서…이들은 비록 지배이데올로기와 상업영화를 비판하면서 민족영화의 개념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제3세계 영화운동의 성과를 기계적으로 도입하려는 한계에 머물렀고…’
하지만 보다 면밀히 살펴보았을 때 아르헨티나 해방영화들의 사상적 배경에는 라틴 민족주의와 페론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며 이것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한편 해방영화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남한의 다소 특수한 운동 지형과 맞아 떨어지면서 이른바 민족영화라는 개념을 형성하는데 간접적 영향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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