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의료보험재정의 위기인가? 민중건강의 위기인가?
의료보험 재정확충에 대한 공통된 인식
최근 보건의료계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의료보험재정을 둘러싼 논란에 빠져있다. 의료보험재정이 위기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실제로 1996년도부터 의료보험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기 시작했으며, 해가 거듭될수록 수입과 지출의 격차가 커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의료보험재정이 보건의료계의 핵심화두로 등장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의료보험재정이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해졌다는 객관적 상황 때문이다.
특단의 조치가 없을 경우 지역의료보험은 당장 올해 안에, 직장의료보험은 1∼2년 내에 재정파탄 상태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둘째, 지금까지 의료보험제도의 개혁을 요구해왔던 보건의료부문의 진보세력들이 의료보험재정을 비롯한 보건복지부문의 예산에 주목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의료보험제도 개혁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의료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하고 의료에 대한 사회적 책임성을 강화하는 것, 이들은 이를 위해 보건의료부문 재정의 안정적 운영과 확대가 관건적인 요소라고 파악하고 있다.
셋째는 의약분업을 둘러싼 이익집단들의 요구가 보험재정의 확충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의사집단의 경우, 의약분업과 연동되어 이루어진 작년 11월 15일 약가 및 수가 조정으로 인한 수익손실분의 보상을 요구하면서, 현재와 같이 취약한 보험재정 상태로는 이러한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아무튼 각 집단들의 속내야 어떻든 간에, 적어도 보건의료부문 내에서 의료보험재정의 안정적인 확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에 이론(異論)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모라토리움 상태의 의료보험재정
그렇다면 도대체 의료보험 재정 상태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이길래 '재정 파탄' 운운하는가? <표 1>은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된 1989년 이후의 지역의료보험 재정수지 현황을 제시한 것이다. <표 1>을 보면, 지역의료보험 재정은 1996년 당기 수지가 적자로 전환되었으며, 1997년 일시적으로 흑자로 전환했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적자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고, 적자폭도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1999년 지역의료보험의 당기 수지는 약 3천 3백억원 적자, 누적적립금은 약 4천억원에 불과하였다. 더군다나 2000년에는 당기 수지적자의 규모가 약 8천 3백억원, 누적적립금은 약 4천3백억 적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즉 특단의 대책, 예를 들면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정부가 대규모의 국고지원을 하거나 지역의료보험 가입자들의 보험료를 대폭 인상하지 않는다면, 당장 올해 안으로 지역의료보험은 진료비 지급불능 상태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직장의료보험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직장의료보험의 경우 1999년 말 현재 누적적립금이 약 1조 5천억원이 쌓여 있어, 외형상으로는 재정에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의 직장의료보험 재정추이를 살펴보면 상황은 전혀 달라지게 된다. 직장의료보험은 1997년부터 당기 수지가 적자상태로 돌아섰다.
1997년의 경우 2,200억원 당기 수지 적자, 1998년 3,800억원 적자, 1999년 7,000억원 적자였으며 올해에는 약 9,000억원의 당기 수지적자가 예상된다. 이런 상태라면, 이르면 내년 말경에는 직장의료보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공무원사립학교교원 의료보험(이하 공교의료보험)의 경우에는 이미 몇 년 전에 의료보험 진료비를 지급하기에도 급급한 수준으로 재정이 떨어져서, 1998년과 1999년에 의료보험료를 각각 36%와 57%를 인상시킨 바 있다.
즉 의료보험재정은 위기상태라기보다는 파산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다.
<표 > 지역의료보험에 대한 국고지원 50% 약속을 지켰을 경우의 상황
의료보험 수입·지출구조의 변화와 정부의 국고지원 약속 불이행
의료보험재정 위기의 원인으로는 먼저 의료보험의 수입·지출구조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최근 수년간 국민들의 의료이용률 상승으로 인해 보험료 수입보다 병원급여비 지출이 훨씬 큰 폭으로 늘어났다. 직장의료보험의 지난 5년간 재정 현황을 보면 보험료 수입 증가율은 9.1%인데 비해 병원으로 지출되는 진료비 증가율은 19.0%로, 보험료 수입보다 진료비 지출이 무려 10% 가까이 높았다.
특히 공교가입자와 직장가입자의 보험료는 표준보수월액으로 불리는 소득을 기준으로 부과되는데,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임금인상률이 둔화되기 시작했고, 여기에 경제위기까지 겹치면서 자연스레 보험료 수입 증가율도 한 자리수로 떨어지게 되었다. 지역의료보험의 경우 이런 전반적인 수입·지출구조의 변화 외에도, 정부의 '국고지원'약속 불이행이라는 요인이 더해지면서 재정구조가 더욱 악화되었다.
정부는 지난 1988년 농어촌 의료보험 시행과 함께, 지역의료보험의 총 소요재정 중 50%를 국고에서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이는 보험료의 50%를, 사용자 혹은 정부가 부담하는 직장 및 공교가입자와 보험료 전액을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지역가입자간의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을 고려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은 지역의료보험 시행초기에 잠시 지켜지는 듯 했으나 해가 거듭될수록 국고지원 비율은 떨어져, 1999년과 2000년에는 국고지원율이 26.1%에 불과한 실정이다. 건강연대(국민건강권 확보를 위한 범국민연대, 이하 건강연대)의 추계에 의하면, 지금까지 정부의 국고지원 미납금은 약 5조3천억원에 이르며, 정부의 국고지원 약속 불이행으로 인해 지역의료보험 가입자들이 추가로 부담한 보험료는 한 가구당 최소 63만원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만약 정부가 지금까지 국고지원 약속을 지켰더라면 국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대폭 경감시킬 수 있었음은 물론, 보험혜택 범위와 수준을 대폭 확대시키고 지역의료보험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즉 지역의료보험 재정을 파탄상태로 몰아 가고 국민들의 보험료 부담을 가중시키며 의료보험의 보장 수준을 열악하게 만든 주범은, 국고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정부였던 것이다. 결국 정부가 국고지원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가 국민의 건강을 의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명실상부한 의료보장제도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았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의료보험재정 위기의 본질 : 사적 이윤 논리의 보건의료체계
그러나 의료보험재정 위기와 관련해서 이상과 같은 분석만으로 그쳐버린다면 이는 현 상황의 본질에 대한 일면적인 해석일 뿐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간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현재의 의료보험재정 위기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의료체계 자체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윤추구를 기본적 동기로 가지는 민간중심적인 의료체계를 갖는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의료공급자가 제공하는 서비스 하나하나에 대해 가격을 매기고, 이 비용을 지불하는 행위별 수가제를 보수지불방식으로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의학적 필요 이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공급자들의 행태를 근본적으로 제어할 방법이 없다. 최근 의료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 보수지불제도를 개편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의료비 절감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는 서구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최근의 노력들이 이렇다 할만한 실효를 거두리라 기대하기에는 섣부른 것이 사실이다. 이윤 추구를 기본적 동기로 하는 의료체계의 부정적 효과가 의료보험재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민간중심적인 의료체계는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고 그 비용을 실제로 부담하는 민중들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민중들이 건강하게 살 권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의료보험재정 위기의 극복 방향 : 의료의 공공성 강화와 경제적 부담의 사회화
단기적으로는 재정파탄 직전에 있는 지역의료보험에 대한 국고지원 50% 약속을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올해 1조2천억원이 추가로 투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지역의보에 대한 추가적인 국고지원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명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대로 지역의료보험 가입자들의 보험료를 약 30% 가량 인상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는 정부가 민중건강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도 지지 않겠다고 자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역의료보험에 대한 국고지원 확대가 중요하며, 절실히 요구되는 사안이기는 하다. 그러나 정부의 국고지원 50% 약속이 지켜진다고 의료보험재정 위기가 근본적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의료보험재정 위기를 둘러싼 논란에는 민중의 건강과 의료보장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내용과 원칙들이 빠져있다. 의료보험이란 본래, 예측하지 못하는 건강상의 위험으로부터 민중의 건강을 경제적으로, 의학적으로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의료보험의 본질이 그렇다면, 의료보험재정 위기문제를 접근하고 해결하는 과정도 이런 본질적인 특성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더 적극적으로는 이같은 특성을 강화,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의료보험재정의 안정적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행위별 수가제가 가지는 문제점이 분명히 있고, 따라서 보수지불제도의 개편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이 국가의 부담과 책임을 줄이려는 시도, 즉 추가적인 재원투입 없이 운영의 효율성 증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또한 정부가 취하는 전통적인 방식인 보험료 인상을 통해 재정위기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의료보험재정 위기는 극복할 수 있을지언정 민중들의 경제적 부담은 오히려 증가시킴으로써 의료보험제도가 가지는 '경제적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라는 본래 취지를 무색케 하는 것이다.
어떤 내용과 방향으로 의료보험재정 위기가 극복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언급 없이, 단순히 의료보험재정 위기가 극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를 들면 어떤 묘책을 써서 현재의 의료보험재정 위기를 극복했다손 치더라도, 현재와 같이 '사적 이윤추구'가 보건의료의 기본논리로 존속된다면 이는 일시적인 날림공사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와 같은 의료체계에서는 이윤축적을 향한 자본의 운동을 지연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멈추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현재의 의료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손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의료보험재정 위기의 극복은 요원할 따름이다.
민중의 건강을 의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방향으로 의료체계를 손질하는데 있어서 핵심은 '의료의 공공성 강화'와 '경제적 부담의 사회화'이다.
사적인 의료체계에 대한 공적인 의료체계의 우월성은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영국과 미국이 사적인 의료체계와 공적인 의료체계의 전형적인 예에 해당하는데, 미국의 경우 국민의료비가 전체 국민소득의 15%에 육박하는 반면, 영국은 약 7% 수준이고 국민 1인당 연간 의료비 지출규모를 봐도 미국이 영국의 3배 이상에 이른다.
그러나 국민들의 건강수준을 비교하면 모든 항목에서 영국이 미국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즉 공적인 의료체계가 재정을 안정화시키고, 민중들의 건강을 보호하는데 훨씬 우월하다. 따라서 사적 이윤추구 논리의 유지를 전제로 하는 시도들은, 그 내용이 어찌되었든간에 재정안정과 민중건강의 보호에 제한적이고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의료의 공공성 강화는 재원마련의 방식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재원마련의 방식은 건강과 의료에 대한 사회적 철학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국민의료보험제도를 갖고있지만 실제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때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전체 진료비의 50% 이상에 이른다.
즉 보험료를 적게내는 대신에 적은 의료보험 혜택을 받고 있으며,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직접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비정상적으로 높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개인의 건강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맡겨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민중들은 비록 보험료를 적게내고 있지만, 개개인이 결과적으로 부담하는 의료비용은 결코 적은 편이 아니다. 건강이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으로 보호될 때, 사회적 비용이 덜 소모될 뿐 아니라 민중의 건강을 보다 잘 보호할 수 있다. 이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의료보험이 건강상 위험으로부터 민중의 건강을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본연의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면, 그래서 의료보험재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전체 민중의 호주머니사정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면, 개별적인 경제적 부담을 사회화시키는 일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의료보험재정에 대한 국가와 자본가의 부담을 증대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민중과 노동자들의 세금과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정당하게 보상받는 과정일 뿐 아니라, 사회적 재원에 대한 민중과 노동자들의 점유력을 높이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민중은 진정으로 노동자·
민중을 위한 의료체계와 재원마련 방식이, 어떤 방식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투쟁의 현장에 서자
문제는 의료보험재정의 위기가 아니다. 건강에 대한 자유주의적 철학 속에서 위협받고 있는 민중건강의 위기가 진짜 문제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건강문제에 대해 노동자·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주장하지 못하는 지금 상황이다.
이미 차려진 밥상에서 먹을 것을 고르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 스스로가 원하는 밥상을 차리도록 하는 것.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그들의 입으로 주장하고, 그 투쟁의 현장에 노동자·민중들이 서도록 만드는 것.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최근 보건의료계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의료보험재정을 둘러싼 논란에 빠져있다. 의료보험재정이 위기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실제로 1996년도부터 의료보험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기 시작했으며, 해가 거듭될수록 수입과 지출의 격차가 커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의료보험재정이 보건의료계의 핵심화두로 등장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의료보험재정이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해졌다는 객관적 상황 때문이다.
특단의 조치가 없을 경우 지역의료보험은 당장 올해 안에, 직장의료보험은 1∼2년 내에 재정파탄 상태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둘째, 지금까지 의료보험제도의 개혁을 요구해왔던 보건의료부문의 진보세력들이 의료보험재정을 비롯한 보건복지부문의 예산에 주목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의료보험제도 개혁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의료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하고 의료에 대한 사회적 책임성을 강화하는 것, 이들은 이를 위해 보건의료부문 재정의 안정적 운영과 확대가 관건적인 요소라고 파악하고 있다.
셋째는 의약분업을 둘러싼 이익집단들의 요구가 보험재정의 확충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의사집단의 경우, 의약분업과 연동되어 이루어진 작년 11월 15일 약가 및 수가 조정으로 인한 수익손실분의 보상을 요구하면서, 현재와 같이 취약한 보험재정 상태로는 이러한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아무튼 각 집단들의 속내야 어떻든 간에, 적어도 보건의료부문 내에서 의료보험재정의 안정적인 확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에 이론(異論)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모라토리움 상태의 의료보험재정
그렇다면 도대체 의료보험 재정 상태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이길래 '재정 파탄' 운운하는가? <표 1>은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된 1989년 이후의 지역의료보험 재정수지 현황을 제시한 것이다. <표 1>을 보면, 지역의료보험 재정은 1996년 당기 수지가 적자로 전환되었으며, 1997년 일시적으로 흑자로 전환했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적자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고, 적자폭도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1999년 지역의료보험의 당기 수지는 약 3천 3백억원 적자, 누적적립금은 약 4천억원에 불과하였다. 더군다나 2000년에는 당기 수지적자의 규모가 약 8천 3백억원, 누적적립금은 약 4천3백억 적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즉 특단의 대책, 예를 들면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정부가 대규모의 국고지원을 하거나 지역의료보험 가입자들의 보험료를 대폭 인상하지 않는다면, 당장 올해 안으로 지역의료보험은 진료비 지급불능 상태에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직장의료보험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직장의료보험의 경우 1999년 말 현재 누적적립금이 약 1조 5천억원이 쌓여 있어, 외형상으로는 재정에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의 직장의료보험 재정추이를 살펴보면 상황은 전혀 달라지게 된다. 직장의료보험은 1997년부터 당기 수지가 적자상태로 돌아섰다.
1997년의 경우 2,200억원 당기 수지 적자, 1998년 3,800억원 적자, 1999년 7,000억원 적자였으며 올해에는 약 9,000억원의 당기 수지적자가 예상된다. 이런 상태라면, 이르면 내년 말경에는 직장의료보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공무원사립학교교원 의료보험(이하 공교의료보험)의 경우에는 이미 몇 년 전에 의료보험 진료비를 지급하기에도 급급한 수준으로 재정이 떨어져서, 1998년과 1999년에 의료보험료를 각각 36%와 57%를 인상시킨 바 있다.
즉 의료보험재정은 위기상태라기보다는 파산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닌 것이다.
<표 > 지역의료보험에 대한 국고지원 50% 약속을 지켰을 경우의 상황
의료보험 수입·지출구조의 변화와 정부의 국고지원 약속 불이행
의료보험재정 위기의 원인으로는 먼저 의료보험의 수입·지출구조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최근 수년간 국민들의 의료이용률 상승으로 인해 보험료 수입보다 병원급여비 지출이 훨씬 큰 폭으로 늘어났다. 직장의료보험의 지난 5년간 재정 현황을 보면 보험료 수입 증가율은 9.1%인데 비해 병원으로 지출되는 진료비 증가율은 19.0%로, 보험료 수입보다 진료비 지출이 무려 10% 가까이 높았다.
특히 공교가입자와 직장가입자의 보험료는 표준보수월액으로 불리는 소득을 기준으로 부과되는데,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임금인상률이 둔화되기 시작했고, 여기에 경제위기까지 겹치면서 자연스레 보험료 수입 증가율도 한 자리수로 떨어지게 되었다. 지역의료보험의 경우 이런 전반적인 수입·지출구조의 변화 외에도, 정부의 '국고지원'약속 불이행이라는 요인이 더해지면서 재정구조가 더욱 악화되었다.
정부는 지난 1988년 농어촌 의료보험 시행과 함께, 지역의료보험의 총 소요재정 중 50%를 국고에서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이는 보험료의 50%를, 사용자 혹은 정부가 부담하는 직장 및 공교가입자와 보험료 전액을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지역가입자간의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을 고려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은 지역의료보험 시행초기에 잠시 지켜지는 듯 했으나 해가 거듭될수록 국고지원 비율은 떨어져, 1999년과 2000년에는 국고지원율이 26.1%에 불과한 실정이다. 건강연대(국민건강권 확보를 위한 범국민연대, 이하 건강연대)의 추계에 의하면, 지금까지 정부의 국고지원 미납금은 약 5조3천억원에 이르며, 정부의 국고지원 약속 불이행으로 인해 지역의료보험 가입자들이 추가로 부담한 보험료는 한 가구당 최소 63만원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만약 정부가 지금까지 국고지원 약속을 지켰더라면 국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대폭 경감시킬 수 있었음은 물론, 보험혜택 범위와 수준을 대폭 확대시키고 지역의료보험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즉 지역의료보험 재정을 파탄상태로 몰아 가고 국민들의 보험료 부담을 가중시키며 의료보험의 보장 수준을 열악하게 만든 주범은, 국고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정부였던 것이다. 결국 정부가 국고지원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가 국민의 건강을 의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명실상부한 의료보장제도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았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의료보험재정 위기의 본질 : 사적 이윤 논리의 보건의료체계
그러나 의료보험재정 위기와 관련해서 이상과 같은 분석만으로 그쳐버린다면 이는 현 상황의 본질에 대한 일면적인 해석일 뿐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간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현재의 의료보험재정 위기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의료체계 자체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윤추구를 기본적 동기로 가지는 민간중심적인 의료체계를 갖는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의료공급자가 제공하는 서비스 하나하나에 대해 가격을 매기고, 이 비용을 지불하는 행위별 수가제를 보수지불방식으로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의학적 필요 이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공급자들의 행태를 근본적으로 제어할 방법이 없다. 최근 의료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 보수지불제도를 개편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의료비 절감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는 서구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최근의 노력들이 이렇다 할만한 실효를 거두리라 기대하기에는 섣부른 것이 사실이다. 이윤 추구를 기본적 동기로 하는 의료체계의 부정적 효과가 의료보험재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민간중심적인 의료체계는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고 그 비용을 실제로 부담하는 민중들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민중들이 건강하게 살 권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의료보험재정 위기의 극복 방향 : 의료의 공공성 강화와 경제적 부담의 사회화
단기적으로는 재정파탄 직전에 있는 지역의료보험에 대한 국고지원 50% 약속을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올해 1조2천억원이 추가로 투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지역의보에 대한 추가적인 국고지원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명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대로 지역의료보험 가입자들의 보험료를 약 30% 가량 인상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는 정부가 민중건강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도 지지 않겠다고 자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역의료보험에 대한 국고지원 확대가 중요하며, 절실히 요구되는 사안이기는 하다. 그러나 정부의 국고지원 50% 약속이 지켜진다고 의료보험재정 위기가 근본적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의료보험재정 위기를 둘러싼 논란에는 민중의 건강과 의료보장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내용과 원칙들이 빠져있다. 의료보험이란 본래, 예측하지 못하는 건강상의 위험으로부터 민중의 건강을 경제적으로, 의학적으로 보호하는 사회적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의료보험의 본질이 그렇다면, 의료보험재정 위기문제를 접근하고 해결하는 과정도 이런 본질적인 특성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더 적극적으로는 이같은 특성을 강화,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의료보험재정의 안정적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행위별 수가제가 가지는 문제점이 분명히 있고, 따라서 보수지불제도의 개편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이 국가의 부담과 책임을 줄이려는 시도, 즉 추가적인 재원투입 없이 운영의 효율성 증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또한 정부가 취하는 전통적인 방식인 보험료 인상을 통해 재정위기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의료보험재정 위기는 극복할 수 있을지언정 민중들의 경제적 부담은 오히려 증가시킴으로써 의료보험제도가 가지는 '경제적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라는 본래 취지를 무색케 하는 것이다.
어떤 내용과 방향으로 의료보험재정 위기가 극복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언급 없이, 단순히 의료보험재정 위기가 극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를 들면 어떤 묘책을 써서 현재의 의료보험재정 위기를 극복했다손 치더라도, 현재와 같이 '사적 이윤추구'가 보건의료의 기본논리로 존속된다면 이는 일시적인 날림공사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와 같은 의료체계에서는 이윤축적을 향한 자본의 운동을 지연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멈추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현재의 의료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손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의료보험재정 위기의 극복은 요원할 따름이다.
민중의 건강을 의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방향으로 의료체계를 손질하는데 있어서 핵심은 '의료의 공공성 강화'와 '경제적 부담의 사회화'이다.
사적인 의료체계에 대한 공적인 의료체계의 우월성은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영국과 미국이 사적인 의료체계와 공적인 의료체계의 전형적인 예에 해당하는데, 미국의 경우 국민의료비가 전체 국민소득의 15%에 육박하는 반면, 영국은 약 7% 수준이고 국민 1인당 연간 의료비 지출규모를 봐도 미국이 영국의 3배 이상에 이른다.
그러나 국민들의 건강수준을 비교하면 모든 항목에서 영국이 미국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즉 공적인 의료체계가 재정을 안정화시키고, 민중들의 건강을 보호하는데 훨씬 우월하다. 따라서 사적 이윤추구 논리의 유지를 전제로 하는 시도들은, 그 내용이 어찌되었든간에 재정안정과 민중건강의 보호에 제한적이고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의료의 공공성 강화는 재원마련의 방식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재원마련의 방식은 건강과 의료에 대한 사회적 철학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국민의료보험제도를 갖고있지만 실제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때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전체 진료비의 50% 이상에 이른다.
즉 보험료를 적게내는 대신에 적은 의료보험 혜택을 받고 있으며,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직접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비정상적으로 높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개인의 건강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맡겨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민중들은 비록 보험료를 적게내고 있지만, 개개인이 결과적으로 부담하는 의료비용은 결코 적은 편이 아니다. 건강이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으로 보호될 때, 사회적 비용이 덜 소모될 뿐 아니라 민중의 건강을 보다 잘 보호할 수 있다. 이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의료보험이 건강상 위험으로부터 민중의 건강을 경제적으로 보호하는 본연의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면, 그래서 의료보험재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전체 민중의 호주머니사정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면, 개별적인 경제적 부담을 사회화시키는 일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의료보험재정에 대한 국가와 자본가의 부담을 증대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민중과 노동자들의 세금과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정당하게 보상받는 과정일 뿐 아니라, 사회적 재원에 대한 민중과 노동자들의 점유력을 높이는 과정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민중은 진정으로 노동자·
민중을 위한 의료체계와 재원마련 방식이, 어떤 방식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투쟁의 현장에 서자
문제는 의료보험재정의 위기가 아니다. 건강에 대한 자유주의적 철학 속에서 위협받고 있는 민중건강의 위기가 진짜 문제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건강문제에 대해 노동자·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주장하지 못하는 지금 상황이다.
이미 차려진 밥상에서 먹을 것을 고르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 스스로가 원하는 밥상을 차리도록 하는 것.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그들의 입으로 주장하고, 그 투쟁의 현장에 노동자·민중들이 서도록 만드는 것.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