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태양을 쏘다-5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NORAE-RO TAEYANG-UL SSODA
베를린 영화제가 시작되면서 나는 헐리우드 유명배우들의 베를린 도착소식보다 '초대된 한국영화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으로 설레기 시작했다. 베를린 영화제의 규모나 유럽에서 이 영화제에 대한 관심정도에 비추어볼 때, 영화제 기간동안 한국영화를 통해 대학동료들과 나눈 대화는 마치 내가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올바르게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나를 들뜨게 했다.
초대작의 의미는 특히, 영화상영 후 관객들과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는데 진지한 관객들의 질문과 호기심은 시종 영화관을 뜨겁게 달군다. 마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베를린에 왔을 때처럼.
노래로 태양을 쏘다.
처음에 이 제목을 접했을 때 다소의 아리송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베를린 영화제 초대작 목록에서, 이 영화제목을 독일어나 영어로 옮겼음직한 제목을 쉽게 발견할 수 없었기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영화타이틀은 한국제목 '노래로 태양을 쏘다'를 소리나는 그대로, 즉 NORAE-RO TAEYANG-UL SSODA 로 옮겨졌다. 당황스러움은 곧 웃음으로 바뀌었다. 독일사람이나 외국인이 이 제목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개를 아무리 갸우뚱거려봐도, 아마 영화가 시작되기까지 해답은 못 찾지 않았을까.
두 개의 태양이 떠오른 이후 천여년이 지난 오늘
영화가 시작되고 중국과 한국의 설화를 배경으로 한 설명에서 관객은 흥미를 느낀다. 중국과 한국에는 각각 태양을 주제로 하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어느 날인가 중국에서는 하늘에 아홉 개의 해가 떠올랐고 땅위의 모든 것들이 메말라 죽는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 한국에서도 역시 갑자기 두 개의 해가 떠오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
중국의 설화에서는 하늘에 떠있는 일곱 개의 해를 화살로 쏘아 떨어뜨려 둘 중 하나는 현재의 태양이, 나머지 하나는 달이 되었다는 결말을 갖고 있다. 반면에 한국의 설화는, 하늘에 뜬 두 개의 태양을 향하여 월명이 도솔가를 지어 불러 그 기이한 일을 해결했다는 결말을 갖는다. 시대와 배경이 다른 이 설화는 사건의 시작은 유사하나 그 해결책은 다른데, 결국 우리 조상은 화살 대신 노래로 상서롭지 못한 일을 지혜롭게 해결했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제목에 대한 문구 그대로의 평면적인 해석은 이미 내린 셈이다. 하지만 태양이 두 개가 떠오른 이후 천여년이 지난 오늘날, '노래로 태양을 쏘다'라는 의미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강한 자들의 비상식적 논리, 그 억울함
이 영화는 지난 1여년간의 미국의 스크린쿼터제 철폐압력에 대항한 영화인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한 기록영화이며, 신자유주의 질서에 반대하는 남한 민중들의 문화주권 수호운동을 기록 한 필름이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독일에서, 한국말로 대사를 들을 수 있는 영화를 접하는 즐거움은 상상외로 컸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을 떠나있는 동안 벌어졌던 사건들, 그 현장감이 대사 하나하나를 통해서 전달되어져 온다. 그러면서도, 독일인에 비친 남한 민중의 투쟁모습은 어떠할까, 시종 궁금해하며 옆자리에서 영화를 보고있는 독일인을 흘낏 곁눈질해 본다. 자막은 영어로 처리됐었고, 영어실력이 짧은 내가 보기에도 자막처리에 아쉬움이 있었다.
물론 달리 뾰족한 방법은 없다. 약간은 지루해하는 옆의 독일인을 앉혀놓고 장황하게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다음에야.
영화초반, 너무나 오래간만에 보는 한국 영화스타들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 반색을 하면서도 이내 긴장이 흐른다. 영화인들이 어색한 집회진행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절박한 그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마치 1987년, 거리에서의 긴장이 그대로 피부로 전해지는 것만 같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왜 영화인들이 거리로 나와서 문화주권 사수를 외치는지, 또한 이 사건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지 관중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세계화 혹은 지구화라는 담론아래 문화적 주권마저 빼앗으려는 그 논리가 왜 그리 음험하게 다가오는지 그리고 그것이, 강한자가 말하는 얼마나 비상식적인 논리인지를 보여준다.
그랬다. 가장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요구가 묵살되고 비웃음당하는 시대, 그 공간에 있어본 사람은 그 긴장감을 안다. 탄압과 조롱의 주체들이 "이제는 화해!"라고 외칠 때의 억울함을 당해본 사람은 절감할 수 있다. 한국 민중은 그러한 기억이 있다. 영화 후 간담회 시간에 고국을 떠난 지 아주 오래됐다고만 자신을 밝힌, 한 초로 여인의 흐느낌은 특별한 인생의 굴곡이 없는 나에게도 가슴찡한 공감대를 전해준다.
우리민중의 노래는 무엇일까
영화는 미국의 영화산업 완전개방압력에 반대하는 투쟁이, 영화산업 혹은 문화산업 담당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사회전체의 시민운동의 연대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에게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다소 무거운 질문까지 던지고 있다.
실제로 농성장을 격려, 방문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강한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었으며, 노동조합이 사회개혁투쟁경험이 있는 유럽의 정서에서, 많은 관객들의 호기심을 이끌어냈다. 실제로 상영 후에 노동자들의 격려방문과 그 이후의 연대투쟁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일 관객의 질문이 있었다. 스크린은 영화인들의 비상대책위 토론과 단식농성당 그리고 거리에서의 행진 등으로 생동감있게 채워진다.
나는 작은 모습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조바심이 났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의 무게와 중요성을 피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 무게와 중요성 때문에 작은 모습들을 놓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인지 자막처리되지 않는, 아니 할 수도 없는, 작은 우리들의 대사들 그리고 배경음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렇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고민한다.
우리에게 신자유주의라는 그야말로 파상적인 자본 공세에 맞서는 민중의 노래는 무엇일까. 월명이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면, 우리 민중은 과연 어떤 노래를 지어 불어야 하는 것일까.
베를린 영화제가 안고있는 과제
영화 후 조재홍 감독은 동양 삶의 철학 속에서 삭발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청중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곧이어 한국에서 스크린쿼터 철폐가 가지는 의미, 유럽상황에서 헐리우드 영화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지고, 이에 대한 조감독의 답변이 있었다. 왜 비상대책위원회에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가 라는 질문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감독은 베를린 영화제의 분위기에 대한 느낌을 전한다.
우선은 한국의 영화환경과 비교해볼 때 베를린의 극장시설이 훌륭하다는 칭찬과 부러움이다. 실제로 이 영화가 상영되었던 영화관은 베를린의 노른자위 땅이라고 할 수 있는 포츠담 광장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곳은 세계굴지의 일본기업인 소니사의 건물내부에 자리잡은 여덟 개의 대형극장 중 하나로서, 설계당시부터 건물의 규모와 천문학적인 예산 그리고 건축방법 때문에 화제가 되었던 건물이다.
지금은 베를린의 주요관광지의 하나로, 건물내부의 광장에서는 연신 사진기 셔터를 눌러대는 관광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부한 칭찬으로 막을 내리려나.
그러나 조감독은 그 다음 말을 잊지 않았다. 다음에 베를린 영화제에 올 때에는 천막에서라도 좋으니, 좀더 독일영화가 많이 상영되기를 기대한다는 전언이었다. 아, 실로 독설의 아름다움이다. 객석 여기저기서 공감의 소리와 박수소리가 들렸다. 베를린 영화제, 어떤 과제를 안고있는가.
실제로 그렇다. 현재 상영되고 있는 베를린영화제 출품작들과 영화제 진행을 보면, 이른바 할리우드에 대한 짝사랑을 느낄 수 있다. 유럽에서 스크린 쿼터를 엄격하게 실시하면서 소위 시대착오적 '쇄국정책'을 펴고있는 나라는 프랑스 밖에 없다. 세계화 혹은 전지구화의 위기 앞에 독일도 결코 예외가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계시민' '유럽시민'이라는 미사여구 아래 드리워진, 독일 젊은 세대들의 획일적인 미국문화 그림자가 이를 웅변하고 있다.
삶 자체가 싸움일 뿐이다
영화 말미를 장식했던 김진균 교수의 화두를 주목해 보자.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한 지금의 문화 주권투쟁이 이길 것 같으냐 질 것 같으냐'는 질문. 그 질문에 대한 김교수의 답변은, '노래로 태양을 쏘다' 라는 제목이 과연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 놓여있는 우리 민중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쿼터제 사수를 혹은 문화주권의 사수문제를,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하면 안 된다.
거대한 일본의 군사력에 대해 총 한 자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맞섰던 독립운동과 해방의 과정을 상기하라.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 하는 '현명한 고민'은 결국 친일파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누군가 말하기를, 결국 문제는 삶의 고비고비에서 싸우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는 것이지, 그 싸움의 결과로서 이기느냐 지느냐를 '현명하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김교수의 환한 웃음에서 우리 민중의 신명나는 노래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베를린 영화제가 시작되면서 나는 헐리우드 유명배우들의 베를린 도착소식보다 '초대된 한국영화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으로 설레기 시작했다. 베를린 영화제의 규모나 유럽에서 이 영화제에 대한 관심정도에 비추어볼 때, 영화제 기간동안 한국영화를 통해 대학동료들과 나눈 대화는 마치 내가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올바르게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나를 들뜨게 했다.
초대작의 의미는 특히, 영화상영 후 관객들과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는데 진지한 관객들의 질문과 호기심은 시종 영화관을 뜨겁게 달군다. 마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베를린에 왔을 때처럼.
노래로 태양을 쏘다.
처음에 이 제목을 접했을 때 다소의 아리송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베를린 영화제 초대작 목록에서, 이 영화제목을 독일어나 영어로 옮겼음직한 제목을 쉽게 발견할 수 없었기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영화타이틀은 한국제목 '노래로 태양을 쏘다'를 소리나는 그대로, 즉 NORAE-RO TAEYANG-UL SSODA 로 옮겨졌다. 당황스러움은 곧 웃음으로 바뀌었다. 독일사람이나 외국인이 이 제목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개를 아무리 갸우뚱거려봐도, 아마 영화가 시작되기까지 해답은 못 찾지 않았을까.
두 개의 태양이 떠오른 이후 천여년이 지난 오늘
영화가 시작되고 중국과 한국의 설화를 배경으로 한 설명에서 관객은 흥미를 느낀다. 중국과 한국에는 각각 태양을 주제로 하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어느 날인가 중국에서는 하늘에 아홉 개의 해가 떠올랐고 땅위의 모든 것들이 메말라 죽는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 한국에서도 역시 갑자기 두 개의 해가 떠오르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
중국의 설화에서는 하늘에 떠있는 일곱 개의 해를 화살로 쏘아 떨어뜨려 둘 중 하나는 현재의 태양이, 나머지 하나는 달이 되었다는 결말을 갖고 있다. 반면에 한국의 설화는, 하늘에 뜬 두 개의 태양을 향하여 월명이 도솔가를 지어 불러 그 기이한 일을 해결했다는 결말을 갖는다. 시대와 배경이 다른 이 설화는 사건의 시작은 유사하나 그 해결책은 다른데, 결국 우리 조상은 화살 대신 노래로 상서롭지 못한 일을 지혜롭게 해결했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제목에 대한 문구 그대로의 평면적인 해석은 이미 내린 셈이다. 하지만 태양이 두 개가 떠오른 이후 천여년이 지난 오늘날, '노래로 태양을 쏘다'라는 의미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강한 자들의 비상식적 논리, 그 억울함
이 영화는 지난 1여년간의 미국의 스크린쿼터제 철폐압력에 대항한 영화인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한 기록영화이며, 신자유주의 질서에 반대하는 남한 민중들의 문화주권 수호운동을 기록 한 필름이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독일에서, 한국말로 대사를 들을 수 있는 영화를 접하는 즐거움은 상상외로 컸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을 떠나있는 동안 벌어졌던 사건들, 그 현장감이 대사 하나하나를 통해서 전달되어져 온다. 그러면서도, 독일인에 비친 남한 민중의 투쟁모습은 어떠할까, 시종 궁금해하며 옆자리에서 영화를 보고있는 독일인을 흘낏 곁눈질해 본다. 자막은 영어로 처리됐었고, 영어실력이 짧은 내가 보기에도 자막처리에 아쉬움이 있었다.
물론 달리 뾰족한 방법은 없다. 약간은 지루해하는 옆의 독일인을 앉혀놓고 장황하게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다음에야.
영화초반, 너무나 오래간만에 보는 한국 영화스타들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 반색을 하면서도 이내 긴장이 흐른다. 영화인들이 어색한 집회진행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절박한 그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마치 1987년, 거리에서의 긴장이 그대로 피부로 전해지는 것만 같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왜 영화인들이 거리로 나와서 문화주권 사수를 외치는지, 또한 이 사건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지 관중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세계화 혹은 지구화라는 담론아래 문화적 주권마저 빼앗으려는 그 논리가 왜 그리 음험하게 다가오는지 그리고 그것이, 강한자가 말하는 얼마나 비상식적인 논리인지를 보여준다.
그랬다. 가장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요구가 묵살되고 비웃음당하는 시대, 그 공간에 있어본 사람은 그 긴장감을 안다. 탄압과 조롱의 주체들이 "이제는 화해!"라고 외칠 때의 억울함을 당해본 사람은 절감할 수 있다. 한국 민중은 그러한 기억이 있다. 영화 후 간담회 시간에 고국을 떠난 지 아주 오래됐다고만 자신을 밝힌, 한 초로 여인의 흐느낌은 특별한 인생의 굴곡이 없는 나에게도 가슴찡한 공감대를 전해준다.
우리민중의 노래는 무엇일까
영화는 미국의 영화산업 완전개방압력에 반대하는 투쟁이, 영화산업 혹은 문화산업 담당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사회전체의 시민운동의 연대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에게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다소 무거운 질문까지 던지고 있다.
실제로 농성장을 격려, 방문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강한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었으며, 노동조합이 사회개혁투쟁경험이 있는 유럽의 정서에서, 많은 관객들의 호기심을 이끌어냈다. 실제로 상영 후에 노동자들의 격려방문과 그 이후의 연대투쟁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일 관객의 질문이 있었다. 스크린은 영화인들의 비상대책위 토론과 단식농성당 그리고 거리에서의 행진 등으로 생동감있게 채워진다.
나는 작은 모습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조바심이 났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의 무게와 중요성을 피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 무게와 중요성 때문에 작은 모습들을 놓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인지 자막처리되지 않는, 아니 할 수도 없는, 작은 우리들의 대사들 그리고 배경음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렇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고민한다.
우리에게 신자유주의라는 그야말로 파상적인 자본 공세에 맞서는 민중의 노래는 무엇일까. 월명이 도솔가를 지어 불렀다면, 우리 민중은 과연 어떤 노래를 지어 불어야 하는 것일까.
베를린 영화제가 안고있는 과제
영화 후 조재홍 감독은 동양 삶의 철학 속에서 삭발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청중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곧이어 한국에서 스크린쿼터 철폐가 가지는 의미, 유럽상황에서 헐리우드 영화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지고, 이에 대한 조감독의 답변이 있었다. 왜 비상대책위원회에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가 라는 질문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감독은 베를린 영화제의 분위기에 대한 느낌을 전한다.
우선은 한국의 영화환경과 비교해볼 때 베를린의 극장시설이 훌륭하다는 칭찬과 부러움이다. 실제로 이 영화가 상영되었던 영화관은 베를린의 노른자위 땅이라고 할 수 있는 포츠담 광장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곳은 세계굴지의 일본기업인 소니사의 건물내부에 자리잡은 여덟 개의 대형극장 중 하나로서, 설계당시부터 건물의 규모와 천문학적인 예산 그리고 건축방법 때문에 화제가 되었던 건물이다.
지금은 베를린의 주요관광지의 하나로, 건물내부의 광장에서는 연신 사진기 셔터를 눌러대는 관광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부한 칭찬으로 막을 내리려나.
그러나 조감독은 그 다음 말을 잊지 않았다. 다음에 베를린 영화제에 올 때에는 천막에서라도 좋으니, 좀더 독일영화가 많이 상영되기를 기대한다는 전언이었다. 아, 실로 독설의 아름다움이다. 객석 여기저기서 공감의 소리와 박수소리가 들렸다. 베를린 영화제, 어떤 과제를 안고있는가.
실제로 그렇다. 현재 상영되고 있는 베를린영화제 출품작들과 영화제 진행을 보면, 이른바 할리우드에 대한 짝사랑을 느낄 수 있다. 유럽에서 스크린 쿼터를 엄격하게 실시하면서 소위 시대착오적 '쇄국정책'을 펴고있는 나라는 프랑스 밖에 없다. 세계화 혹은 전지구화의 위기 앞에 독일도 결코 예외가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계시민' '유럽시민'이라는 미사여구 아래 드리워진, 독일 젊은 세대들의 획일적인 미국문화 그림자가 이를 웅변하고 있다.
삶 자체가 싸움일 뿐이다
영화 말미를 장식했던 김진균 교수의 화두를 주목해 보자.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한 지금의 문화 주권투쟁이 이길 것 같으냐 질 것 같으냐'는 질문. 그 질문에 대한 김교수의 답변은, '노래로 태양을 쏘다' 라는 제목이 과연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 놓여있는 우리 민중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쿼터제 사수를 혹은 문화주권의 사수문제를,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하면 안 된다.
거대한 일본의 군사력에 대해 총 한 자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맞섰던 독립운동과 해방의 과정을 상기하라.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 하는 '현명한 고민'은 결국 친일파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누군가 말하기를, 결국 문제는 삶의 고비고비에서 싸우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는 것이지, 그 싸움의 결과로서 이기느냐 지느냐를 '현명하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김교수의 환한 웃음에서 우리 민중의 신명나는 노래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