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대선이 끝난 날
1.
목요일 아침 부시의 당선 확정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사실 담담했다. 물론 지난 선거 못지 않은 사단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기는 하였다. 경쟁이 박빙일수록 지난 선거에서 나타난 흑인들의 투표에 대한 체계적인 방해라든지 각종 선거부정 사태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지난 선거 때 크게 난리가 난 것은 혼란을 불러일으킨 투표용지 문제였으나, 선거인명부의 허술함을 악용한 투표방해 문제도 매우 심각했다. 미국은 양당이 선거인명부를 관리해서 거주지 이전이 잦은 빈민층의 투표 참여를 방해할 수 있는 허점이 존재했다. 예컨대 부시의 동생이 주지사로 있으면서 각종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affirmative action)를 대거 철폐해서 유색인종이나 여성의 반발이 극심했던 플로리다주는 이들의 투표를 방해하려는 유무형의 부정이 벌어진 온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에 항의하는 흐름을 형성하려는 움직임도 상당히 있었으나, 고어 진영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룰 의사가 없었고 패배를 승복한 후에는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사무실에 나와 인터넷에서 각종 미국의 ‘좌파’ 매체들을 둘러보니 선거부정에 대한 언급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도 케리 측이 패배를 인정한 후 자연스럽게 묻히게 되었을 수도 있고, 실제 투표제도나 선거장비의 개선도 있었다. 오히려 나에게 흥미 있는 점은 이번 선거의 투표율이 미국의 역대 최고치를 돌파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미국인들은 이번 선거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리고 부시를 뽑았다. 이 문제는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듯하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생각이 오가던 사이에 - 사무실 내 옆자리에 있는 R은 “그 동안의 반전투쟁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 오히려 정말로 나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은 한겨레에 실린 <한겨레그림판>이었다. 처음에는 만화의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을 쳐다봤다. 한마디로 빈 라덴의 테러위협 테입이 케리를 경쟁에서 탈락시켰고, 빈 라덴이 자기도 당황할만한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얘기였다. 이 그림을 보며 느꼈던 불편한 감정을 말로 쉽게 표현하기도, 왜 그랬을까 설명하기도 쉽지는 않을 듯하다 (부디 독자도 그런 느낌이 들어야 공감대가 생길텐데).
<그림1> 한겨레 2004년 11월 4일
굳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이렇다. 1) 선거 결과가 그렇게 나온 이유는 매우 복합적일텐데, 그것을 비디오 테입 하나로 모조리 환원시키려는 태도는 정말 기가 막힌다. 어떻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검증도 거치지 않은 문제를 명백한 사실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최소한의 저널리즘 정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처사가 아닌가? 2)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성애자가 결혼식을 치르고 야외에서 피로연을 하는 사진이 크게 보도되어서 미국의 기독교원리주의자들을 크게 자극했다고 하던데, <한겨레 그림판>의 논리대로라면 결혼식을 치른 두 명의 동성애자 때문에 케리가 졌다는 말도 성립해야 한다, 3) 빈 라덴이 부시를 도왔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9/11 공격이 부시를 도왔다는 말도 성립해야 한다. 이러한 류의 주장은 미국의 중동 전략/정책으로 인해 인민들이 겪는 고통의 본질적인 측면을 잊게 만들거나, 결국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기울 양비론을 키운다. 4) 설사 전쟁과 테러의 악순환이 각각의 진영에서 부시와 빈 라덴의 입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에서 민주당과 케리는 절대 그 피해자가 아니다. 민주당과 케리는 분명한 주축이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모두 민주당정권 때 벌어졌다. 클린턴은 유고와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했다.) 등등등..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결국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예컨대 부시가 벌인 이라크 전쟁을 정말로 적극적으로 도운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노무현과 한국정부가 아닌가?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의 군대를 보내주었고, 자이툰 부대가 럼즈펠트에게 “미국 시민 대신 이 곳에 와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칭찬을 듣도록 만든 게 누구란 말인가? 또는, 케리는 왜 졌는가? 그것은 우선 케리 진영의 내적 원인으로 설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케리는 네이더를 파멸시키기 위해 반-네이더 캠페인에 7000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풀며 계속 헛다리만 짚었다. 등등등.
2.
하지만 이런 것을 한겨레 그림판에 요구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다른 신문을 보며 그런 것을 요구하지는 않지 않는가? 이는 어떤 “추억의 책가방”과 관련이 있는 문제다.
나에게는 <합당블루스 -한겨레 그림판 모음4>(이론과 실천, 1992)라는 만화책이 있다. 1990년 1월부터 6월까지 말 그대로 한겨레에 실린 만화를 엮은 책이다. 여기에는 박재동씨가 직접 쓴 서문과 황지우씨가 쓴 20페이지가 넘는 <권력에 대한 웃음 - 박재동 만화 아이콘, 분석>이라는 평론이 실려 있다. 혹시 나보고 기관지의 <책과 나> 코너에 글을 쓰라고 하면 소개하려고 점찍어 놓은 책이기도 하다.
<그림2> 박재동씨 만화들
그런데 나에게는 이 만화를 해설할 능력이 없고, 책에 실린 빼어난 평론을 반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듯하여 무슨 말을 보태기 어렵다. 그래서 평론의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대목을 조금 정리해보면.
1) 이 만화들은 우리에게 ‘낯선 괴력’인 절대적인 권력을 한낱 ‘웃겨주는 농담’ 거리로 가볍게 희화시킴으로써 절대권력의 마법에 걸려 있는 우리의 마음(두려움·공포)를 꺼내주는 풍자다. (정말로 그 두려움을 이겨내기가 얼마나 쉽지 않았던가! 서문에서 박재동씨는 아침에 출근할 때 밖에 수많은 전경들이 가로막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유명해지는 것만이 안전해지는 길이다’라고 생각했으나, ‘아니다. 정당한 것이 안전할 뿐이다’라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고 말했다.)
2) 아무렇게나 만화 속의 인물들을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다. 안기부, 치안본부, 검찰, 통일원, 언론담당관료, 문교 관료 등 익명의 거대한 힘을 행사하는 자들은 선악이분법적인 관상을 지녔다. 그들의 얼굴 속에서 두뇌공간은 태엽하나 들어갈 만큼 작은 반면, 입은 포악한 포식성을 지닌 듯 쩍 벌어져 있다. 한마디로 악어 상이다. 또한 전두환을 귀면(장승이나 기와에서 볼 수 있는 귀신 얼굴)으로, 노태우를 원숭이로 형상화하는 것은 정권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다. 고바우 영감이 비시시 동료에게 “끝자가 우와 환이 되어서 우환이 끝이 없다구”라는 만화는 웃을 만반의 준비를 한 독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뿐이다. 만화는 어설픈 말장난과 다르다.
3) 그의 만화가 신문의 표제나 부제와 너무 빡빡하게 밀착해 있으면 오히려 풍자의 힘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그가 각별히 생각하는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친 적이 있다) 전교조에 관한 만화를 그릴 때면 종종 신문 기사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매개 작용에서 무언가 겹침, 비틈, 숨김이 있어야 한다.
결국 풍자가 성공하려면 권력의 공포, 자기 검열을 이겨내야 하며, 정당함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권력들의 본질을 간파해내야 하며, 그러면서도 만화적인 공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일 게다.
하지만 이 얼마나 피말리는 일인가? 그것도 매일매일 전투를 치러야하니. 이런 전투는 어떤 시대 정신과 공명하지 않고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한겨레에 실리는 만화를 보고 어떤 때는 맥이 빠지거나 심지어 분노가 이는 것은 그림판이 시대 정신이 아예 없거나 흐리멍텅하거나 (말장난과 같은 것, 아니 말장난이 유행하는 것도 어떤 시대를 반영하나?) 나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3.
마지막으로 사족과 같은 이야기를 하나 더 하면. 요즘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들도 매주 어떤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사회화와 노동>에 대한 이야기다. 매주 주제를 선정하고 주장의 요지에 걸러내고 필자를 뽑을 때마다 작은 홍역을 겪는 듯하다. 발행일을 제 때 맞추는 데도 큰 어려움이 따른다. (아, 여기서, 그 대표적 주범으로서 독자에게 사과를 해야 할 순서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물론 상황이 그러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근 주제를 보면 ‘헌재 판결’, ‘성매매 방지법’, ‘고교등급제’, ‘친일파 청산’, ‘노동법개악/총파업’ 등등인데, 어떤 공통점과 시사점이 있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전에 이미 마련된 입장이 있지 않은, 주어진 정답이 없는 주제들이란 게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또한, 현재의 한국사회가 지닌 문제의 특징적인 측면을 보여준다는 공통점도 있다. 국가기구의 응집력의 해체, (헌)법의 폭력, 가족/학교/노조라는 대표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의 위기, 민족주의의 퇴행 등등. 문제는 이러한 정세가 앞으로 반복되고 증폭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시의 재집권은 전쟁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득세라는 정세에서 이뤄졌다.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미국 국가의 제일 이데올로기가 종교가 된다면? 역시 초유의 사태다!) 그래서 그런 ‘홍역’도 계속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구호로 정리하면. 명석함으로! 낫과 망치로! 풍자도! PSSP
목요일 아침 부시의 당선 확정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사실 담담했다. 물론 지난 선거 못지 않은 사단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기는 하였다. 경쟁이 박빙일수록 지난 선거에서 나타난 흑인들의 투표에 대한 체계적인 방해라든지 각종 선거부정 사태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지난 선거 때 크게 난리가 난 것은 혼란을 불러일으킨 투표용지 문제였으나, 선거인명부의 허술함을 악용한 투표방해 문제도 매우 심각했다. 미국은 양당이 선거인명부를 관리해서 거주지 이전이 잦은 빈민층의 투표 참여를 방해할 수 있는 허점이 존재했다. 예컨대 부시의 동생이 주지사로 있으면서 각종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affirmative action)를 대거 철폐해서 유색인종이나 여성의 반발이 극심했던 플로리다주는 이들의 투표를 방해하려는 유무형의 부정이 벌어진 온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에 항의하는 흐름을 형성하려는 움직임도 상당히 있었으나, 고어 진영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룰 의사가 없었고 패배를 승복한 후에는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사무실에 나와 인터넷에서 각종 미국의 ‘좌파’ 매체들을 둘러보니 선거부정에 대한 언급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도 케리 측이 패배를 인정한 후 자연스럽게 묻히게 되었을 수도 있고, 실제 투표제도나 선거장비의 개선도 있었다. 오히려 나에게 흥미 있는 점은 이번 선거의 투표율이 미국의 역대 최고치를 돌파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미국인들은 이번 선거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리고 부시를 뽑았다. 이 문제는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듯하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생각이 오가던 사이에 - 사무실 내 옆자리에 있는 R은 “그 동안의 반전투쟁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 오히려 정말로 나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은 한겨레에 실린 <한겨레그림판>이었다. 처음에는 만화의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을 쳐다봤다. 한마디로 빈 라덴의 테러위협 테입이 케리를 경쟁에서 탈락시켰고, 빈 라덴이 자기도 당황할만한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얘기였다. 이 그림을 보며 느꼈던 불편한 감정을 말로 쉽게 표현하기도, 왜 그랬을까 설명하기도 쉽지는 않을 듯하다 (부디 독자도 그런 느낌이 들어야 공감대가 생길텐데).
<그림1> 한겨레 2004년 11월 4일
굳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이렇다. 1) 선거 결과가 그렇게 나온 이유는 매우 복합적일텐데, 그것을 비디오 테입 하나로 모조리 환원시키려는 태도는 정말 기가 막힌다. 어떻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검증도 거치지 않은 문제를 명백한 사실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최소한의 저널리즘 정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처사가 아닌가? 2)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성애자가 결혼식을 치르고 야외에서 피로연을 하는 사진이 크게 보도되어서 미국의 기독교원리주의자들을 크게 자극했다고 하던데, <한겨레 그림판>의 논리대로라면 결혼식을 치른 두 명의 동성애자 때문에 케리가 졌다는 말도 성립해야 한다, 3) 빈 라덴이 부시를 도왔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9/11 공격이 부시를 도왔다는 말도 성립해야 한다. 이러한 류의 주장은 미국의 중동 전략/정책으로 인해 인민들이 겪는 고통의 본질적인 측면을 잊게 만들거나, 결국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기울 양비론을 키운다. 4) 설사 전쟁과 테러의 악순환이 각각의 진영에서 부시와 빈 라덴의 입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에서 민주당과 케리는 절대 그 피해자가 아니다. 민주당과 케리는 분명한 주축이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모두 민주당정권 때 벌어졌다. 클린턴은 유고와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했다.) 등등등..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결국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예컨대 부시가 벌인 이라크 전쟁을 정말로 적극적으로 도운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노무현과 한국정부가 아닌가?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의 군대를 보내주었고, 자이툰 부대가 럼즈펠트에게 “미국 시민 대신 이 곳에 와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칭찬을 듣도록 만든 게 누구란 말인가? 또는, 케리는 왜 졌는가? 그것은 우선 케리 진영의 내적 원인으로 설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케리는 네이더를 파멸시키기 위해 반-네이더 캠페인에 7000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풀며 계속 헛다리만 짚었다. 등등등.
2.
하지만 이런 것을 한겨레 그림판에 요구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다른 신문을 보며 그런 것을 요구하지는 않지 않는가? 이는 어떤 “추억의 책가방”과 관련이 있는 문제다.
나에게는 <합당블루스 -한겨레 그림판 모음4>(이론과 실천, 1992)라는 만화책이 있다. 1990년 1월부터 6월까지 말 그대로 한겨레에 실린 만화를 엮은 책이다. 여기에는 박재동씨가 직접 쓴 서문과 황지우씨가 쓴 20페이지가 넘는 <권력에 대한 웃음 - 박재동 만화 아이콘, 분석>이라는 평론이 실려 있다. 혹시 나보고 기관지의 <책과 나> 코너에 글을 쓰라고 하면 소개하려고 점찍어 놓은 책이기도 하다.
<그림2> 박재동씨 만화들
그런데 나에게는 이 만화를 해설할 능력이 없고, 책에 실린 빼어난 평론을 반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듯하여 무슨 말을 보태기 어렵다. 그래서 평론의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대목을 조금 정리해보면.
1) 이 만화들은 우리에게 ‘낯선 괴력’인 절대적인 권력을 한낱 ‘웃겨주는 농담’ 거리로 가볍게 희화시킴으로써 절대권력의 마법에 걸려 있는 우리의 마음(두려움·공포)를 꺼내주는 풍자다. (정말로 그 두려움을 이겨내기가 얼마나 쉽지 않았던가! 서문에서 박재동씨는 아침에 출근할 때 밖에 수많은 전경들이 가로막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유명해지는 것만이 안전해지는 길이다’라고 생각했으나, ‘아니다. 정당한 것이 안전할 뿐이다’라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고 말했다.)
2) 아무렇게나 만화 속의 인물들을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다. 안기부, 치안본부, 검찰, 통일원, 언론담당관료, 문교 관료 등 익명의 거대한 힘을 행사하는 자들은 선악이분법적인 관상을 지녔다. 그들의 얼굴 속에서 두뇌공간은 태엽하나 들어갈 만큼 작은 반면, 입은 포악한 포식성을 지닌 듯 쩍 벌어져 있다. 한마디로 악어 상이다. 또한 전두환을 귀면(장승이나 기와에서 볼 수 있는 귀신 얼굴)으로, 노태우를 원숭이로 형상화하는 것은 정권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다. 고바우 영감이 비시시 동료에게 “끝자가 우와 환이 되어서 우환이 끝이 없다구”라는 만화는 웃을 만반의 준비를 한 독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뿐이다. 만화는 어설픈 말장난과 다르다.
3) 그의 만화가 신문의 표제나 부제와 너무 빡빡하게 밀착해 있으면 오히려 풍자의 힘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그가 각별히 생각하는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친 적이 있다) 전교조에 관한 만화를 그릴 때면 종종 신문 기사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매개 작용에서 무언가 겹침, 비틈, 숨김이 있어야 한다.
결국 풍자가 성공하려면 권력의 공포, 자기 검열을 이겨내야 하며, 정당함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권력들의 본질을 간파해내야 하며, 그러면서도 만화적인 공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일 게다.
하지만 이 얼마나 피말리는 일인가? 그것도 매일매일 전투를 치러야하니. 이런 전투는 어떤 시대 정신과 공명하지 않고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한겨레에 실리는 만화를 보고 어떤 때는 맥이 빠지거나 심지어 분노가 이는 것은 그림판이 시대 정신이 아예 없거나 흐리멍텅하거나 (말장난과 같은 것, 아니 말장난이 유행하는 것도 어떤 시대를 반영하나?) 나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3.
마지막으로 사족과 같은 이야기를 하나 더 하면. 요즘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들도 매주 어떤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사회화와 노동>에 대한 이야기다. 매주 주제를 선정하고 주장의 요지에 걸러내고 필자를 뽑을 때마다 작은 홍역을 겪는 듯하다. 발행일을 제 때 맞추는 데도 큰 어려움이 따른다. (아, 여기서, 그 대표적 주범으로서 독자에게 사과를 해야 할 순서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물론 상황이 그러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근 주제를 보면 ‘헌재 판결’, ‘성매매 방지법’, ‘고교등급제’, ‘친일파 청산’, ‘노동법개악/총파업’ 등등인데, 어떤 공통점과 시사점이 있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전에 이미 마련된 입장이 있지 않은, 주어진 정답이 없는 주제들이란 게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또한, 현재의 한국사회가 지닌 문제의 특징적인 측면을 보여준다는 공통점도 있다. 국가기구의 응집력의 해체, (헌)법의 폭력, 가족/학교/노조라는 대표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의 위기, 민족주의의 퇴행 등등. 문제는 이러한 정세가 앞으로 반복되고 증폭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시의 재집권은 전쟁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득세라는 정세에서 이뤄졌다.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미국 국가의 제일 이데올로기가 종교가 된다면? 역시 초유의 사태다!) 그래서 그런 ‘홍역’도 계속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구호로 정리하면. 명석함으로! 낫과 망치로! 풍자도!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