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며
몇 가지 고해성사
나름대로의 사회생활이 시작되었을 즈음의 어릴 적, 죽을 만큼 싫었던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일요일 아침, 한창 재미있는 만화를 볼 때 빨래를 널어야 했던 것이고 또 한가지는 설거지였다. 정말 싫어서 엄마한테 따지다가 맞기도 많이 했다. 어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말이 너무 많다는 이유가 하나였고, 지 일하기 싫으니까 '오빠'를 갖다 붙인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맹세코 한 치의 왜곡도 없이 말하건대, 아침 햇살이 아까워서 빨래를 '빨리' 널어야 했던 내 그림자 뒤로 오빠는 누워서 TV를 보고 있었고, 치우는 게 싫어 오빠보다 먼저 밥상머리에서 빠져나왔던 나지만 오빠가 다 먹고 난 뒤에 불려 들어가야 했다. 간혹 저항했다 하면 쏟아지는 비난... 그 일련의 과정에서 난 '쌈닭'이 되었고, 대학생 오빠가 설거지 하도록 하는 소기의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히! 말뿐인 나의 저항과 오빠의 가끔씩의 '설거지'가 엄마의 가사노동을 줄여주지는 못했다. 엄마가 하기 싫었던 그 일들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유의 영역으로 여전히 엄마 옆에 남아있다.
저는 부끄럽게도 엄마의 가사노동을 착취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현모양처인 엄마를 기대하며 살아왔습니다.
나 스스로는 그렇게 살려하지 않으면서 엄마에게 그런 것들을 요구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심각하게 자각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결심했지만 때때로, 종종, 거의 매일 일상생활 속에서 엄마에게 죄를 짓고 살고 있다. 그런데 최근 죄의 항목이 하나가 더 추가됐다.
성매매 여성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계기는 '성매매 방지법과 성매매를 둘러싼 쟁점'이란 주제로 열린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 5차 월례포럼에서의 토론과정이었다.
"...... 성매매에 여성이 유입되는 일반적인 동기로 설명되는 것이 경제적인 이유이다. 오늘날의 사회학적 연구들은 성산업의 모든 부문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절대 다수가 노동 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왜 생계를 위해 성매매를 선택했냐는 질문보다 여성 일반의 빈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유의미한 질문이 될 것이다." 가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 분이 질문하셨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 성매매의 문제는 성적착취 구조의 한 영역임과 동시에 성매매 여성들의, '선택'을 한 여성들만의 문제였고 그 하에서 어떻게 '선택'을 하게 됐느냐가 질문의 대상이었다.
물론, 질문을 했을 때의 그 참담한 분위기는 연상이 된다. 어떤 감정이 그녀들의 얼굴에 스치고 결국은 '듣고 싶던 답'을 하게 만들겠지. 마치, 엄마한테 따지고 들었을 때랑 비슷할 것이다.
"엄마는 오빠도 있는데, 왜 맨날 나만 시켜?"
"또 오빠 타령이야. 오빠는 오빠고, 니가 엄마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니?"
"거봐, 엄마는 역시 오빠 시킬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거 아냐"
역시나 연대의 문제
흔히 하는 말로, 연대란 나의 해방이 당신의 해방과 맞닿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은 함께 싸워나가는 것일 텐데 과거를 되돌아보면, 나에게 있어서 '연대'란 몇 가지 형태로 고정되어 있었다.
농활, 철거투쟁, 비정규직투쟁, 이주노동자 투쟁, 교육투쟁 등등. 학생이긴 했지만 대등하게 만나왔다고 할 수 있는 이 단위들이 특징들은 대개가 이미 기존의 관계를 통해서 쉽게 연대할 수 있는 단위들이었다는 점이고, 서로의 해방에 대해 동의와 지지가 1차적으로 이해된 가운데 만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대'의 범위를 축소시켜 버렸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엄마'를 '연대'할 수 있는 동지로 생각해 본 적 없고, '성매매 산업' 에 종사하는 여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엄마는 같은 여성이면서도 여성을 차별하는 저항의 대상이자 설득해서 인정하게 만들어야 하는 계몽의 대상이었고 성매매 여성들은 일종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물론, 엄마의 노동과 성매매 여성의 노동 속에서 사회적 여유를 가지고 있는 나 역시 그녀들에게 '연대'의 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가진 도덕적·지적 우월감이었다. 속된 표현대로 '개뿔' 누가 인정하지도 않는데 스스로 인정한 우월감으로 상대를 제단하고 끼워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
작년엔가 아는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다가 새삼 놀란 적이 있는데, 내가 '가임여성'이 된지 어언 13년이나 지났다는 것이다. 첫 생리를 한 이후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새삼 깜짝 놀란 것이 또 이상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그 기간만큼 내 스스로 '여성'이란 자각을 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릴 적엔 차별 받는 여성이라는 것이 싫어서 '다음 세상엔 꼭 남자로 태어나야지' 라고 생각하거나 '난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고, 좀 나이가 들어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범죄가 무서워서 여자로 태어난 것을 운명의 굴레인양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에 비해서 오빠나 아빠를 옆에서 봐왔을 때는 한 번도 나와 같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오빠가 군대 가기 직전 '아, 나도 차라리 여자였으면' 하고 말하긴 했지만 군대 가더니만 한 번쯤은 와봐야 하는 곳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내 기억이 맞을 거다.
그냥 이렇게 다르게 살다보니 나 같은 여성도 있는 게 아닐까. 한 번도 '여성'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긍정한 적 없고, 같은 여성을 저항의 대상이나 설득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여성들이 '여성'이란 성 안에 또 다른 영역을 만들어 놓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란 말이 굉장한 설득력을 발휘하며 선택된 언니들과의 '자매애'를 형성하게 한다. 같은 여성이라는 것을 알지만, '다른' 여성과 선을 그어 버리고 만다. 이런 사람도 '여성'이다.
숙제
성매매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이후로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나름의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뭐가 정답인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만들어내는 두통 때문에 생각을 그만하게 되기 일쑤였다. 열이면 열, 내가 만나본 여성들은 다 그랬다. 그 중에는 성매매를 당장에 없어져야 할 사회악으로 성매매 여성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심지어 그 사람들마저도 성매매 여성들의 '시민권' 문제가 제기되면 맘 쓰이고, 불편하고 골치 아파하면서 '문제긴 문제야'하며 긍정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선택한 길이니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어느 누가 '인간다운 삶'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참석자들의 입장차가 존재한 이번 여성위 월례포럼에서도 시민권 문제는 전제되고 있었다. 시민권이 봉기적 권리로서의 시민권이든지, 말 그대로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누려야할 천부인권적인 시민권 개념이든지 상관없이 그녀들의 삶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왜 생계를 위해 성매매를 선택했냐는 질문보다 여성 일반의 빈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유의미한 질문''이란 말의 뜻이 여기 있는 것 같다.
개별적인 문제로 돌려버리는 '왜'라는 질문 대신 어느 누구도 배제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시민권(혹은 인권)의 개념 안에서 사회구조적인 빈곤, 특히 '여성의 빈곤을 제기한다면 모든 여성이 동등하게 '권리' 개념 안에서 연대하고 서로를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 같은 여성에게 사과의 방법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엄마의 시민권을 인정하고, 엄마가 나의 시민권을 인정하는 것이 연대의 시작이겠다.
그녀들의 시민권을 인정하는 것이 연대의 시작이겠다.
이제 집에 가서 '엄마'를 만나련다. PSSP
나름대로의 사회생활이 시작되었을 즈음의 어릴 적, 죽을 만큼 싫었던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일요일 아침, 한창 재미있는 만화를 볼 때 빨래를 널어야 했던 것이고 또 한가지는 설거지였다. 정말 싫어서 엄마한테 따지다가 맞기도 많이 했다. 어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말이 너무 많다는 이유가 하나였고, 지 일하기 싫으니까 '오빠'를 갖다 붙인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맹세코 한 치의 왜곡도 없이 말하건대, 아침 햇살이 아까워서 빨래를 '빨리' 널어야 했던 내 그림자 뒤로 오빠는 누워서 TV를 보고 있었고, 치우는 게 싫어 오빠보다 먼저 밥상머리에서 빠져나왔던 나지만 오빠가 다 먹고 난 뒤에 불려 들어가야 했다. 간혹 저항했다 하면 쏟아지는 비난... 그 일련의 과정에서 난 '쌈닭'이 되었고, 대학생 오빠가 설거지 하도록 하는 소기의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히! 말뿐인 나의 저항과 오빠의 가끔씩의 '설거지'가 엄마의 가사노동을 줄여주지는 못했다. 엄마가 하기 싫었던 그 일들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유의 영역으로 여전히 엄마 옆에 남아있다.
저는 부끄럽게도 엄마의 가사노동을 착취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현모양처인 엄마를 기대하며 살아왔습니다.
나 스스로는 그렇게 살려하지 않으면서 엄마에게 그런 것들을 요구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심각하게 자각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결심했지만 때때로, 종종, 거의 매일 일상생활 속에서 엄마에게 죄를 짓고 살고 있다. 그런데 최근 죄의 항목이 하나가 더 추가됐다.
성매매 여성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계기는 '성매매 방지법과 성매매를 둘러싼 쟁점'이란 주제로 열린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 5차 월례포럼에서의 토론과정이었다.
"...... 성매매에 여성이 유입되는 일반적인 동기로 설명되는 것이 경제적인 이유이다. 오늘날의 사회학적 연구들은 성산업의 모든 부문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절대 다수가 노동 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왜 생계를 위해 성매매를 선택했냐는 질문보다 여성 일반의 빈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유의미한 질문이 될 것이다." 가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 분이 질문하셨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 성매매의 문제는 성적착취 구조의 한 영역임과 동시에 성매매 여성들의, '선택'을 한 여성들만의 문제였고 그 하에서 어떻게 '선택'을 하게 됐느냐가 질문의 대상이었다.
물론, 질문을 했을 때의 그 참담한 분위기는 연상이 된다. 어떤 감정이 그녀들의 얼굴에 스치고 결국은 '듣고 싶던 답'을 하게 만들겠지. 마치, 엄마한테 따지고 들었을 때랑 비슷할 것이다.
"엄마는 오빠도 있는데, 왜 맨날 나만 시켜?"
"또 오빠 타령이야. 오빠는 오빠고, 니가 엄마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니?"
"거봐, 엄마는 역시 오빠 시킬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거 아냐"
역시나 연대의 문제
흔히 하는 말로, 연대란 나의 해방이 당신의 해방과 맞닿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은 함께 싸워나가는 것일 텐데 과거를 되돌아보면, 나에게 있어서 '연대'란 몇 가지 형태로 고정되어 있었다.
농활, 철거투쟁, 비정규직투쟁, 이주노동자 투쟁, 교육투쟁 등등. 학생이긴 했지만 대등하게 만나왔다고 할 수 있는 이 단위들이 특징들은 대개가 이미 기존의 관계를 통해서 쉽게 연대할 수 있는 단위들이었다는 점이고, 서로의 해방에 대해 동의와 지지가 1차적으로 이해된 가운데 만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대'의 범위를 축소시켜 버렸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엄마'를 '연대'할 수 있는 동지로 생각해 본 적 없고, '성매매 산업' 에 종사하는 여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엄마는 같은 여성이면서도 여성을 차별하는 저항의 대상이자 설득해서 인정하게 만들어야 하는 계몽의 대상이었고 성매매 여성들은 일종의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물론, 엄마의 노동과 성매매 여성의 노동 속에서 사회적 여유를 가지고 있는 나 역시 그녀들에게 '연대'의 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가진 도덕적·지적 우월감이었다. 속된 표현대로 '개뿔' 누가 인정하지도 않는데 스스로 인정한 우월감으로 상대를 제단하고 끼워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
작년엔가 아는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다가 새삼 놀란 적이 있는데, 내가 '가임여성'이 된지 어언 13년이나 지났다는 것이다. 첫 생리를 한 이후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새삼 깜짝 놀란 것이 또 이상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그 기간만큼 내 스스로 '여성'이란 자각을 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릴 적엔 차별 받는 여성이라는 것이 싫어서 '다음 세상엔 꼭 남자로 태어나야지' 라고 생각하거나 '난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고, 좀 나이가 들어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범죄가 무서워서 여자로 태어난 것을 운명의 굴레인양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에 비해서 오빠나 아빠를 옆에서 봐왔을 때는 한 번도 나와 같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오빠가 군대 가기 직전 '아, 나도 차라리 여자였으면' 하고 말하긴 했지만 군대 가더니만 한 번쯤은 와봐야 하는 곳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내 기억이 맞을 거다.
그냥 이렇게 다르게 살다보니 나 같은 여성도 있는 게 아닐까. 한 번도 '여성'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긍정한 적 없고, 같은 여성을 저항의 대상이나 설득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여성들이 '여성'이란 성 안에 또 다른 영역을 만들어 놓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란 말이 굉장한 설득력을 발휘하며 선택된 언니들과의 '자매애'를 형성하게 한다. 같은 여성이라는 것을 알지만, '다른' 여성과 선을 그어 버리고 만다. 이런 사람도 '여성'이다.
숙제
성매매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이후로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나름의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뭐가 정답인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만들어내는 두통 때문에 생각을 그만하게 되기 일쑤였다. 열이면 열, 내가 만나본 여성들은 다 그랬다. 그 중에는 성매매를 당장에 없어져야 할 사회악으로 성매매 여성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심지어 그 사람들마저도 성매매 여성들의 '시민권' 문제가 제기되면 맘 쓰이고, 불편하고 골치 아파하면서 '문제긴 문제야'하며 긍정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선택한 길이니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어느 누가 '인간다운 삶'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참석자들의 입장차가 존재한 이번 여성위 월례포럼에서도 시민권 문제는 전제되고 있었다. 시민권이 봉기적 권리로서의 시민권이든지, 말 그대로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누려야할 천부인권적인 시민권 개념이든지 상관없이 그녀들의 삶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왜 생계를 위해 성매매를 선택했냐는 질문보다 여성 일반의 빈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유의미한 질문''이란 말의 뜻이 여기 있는 것 같다.
개별적인 문제로 돌려버리는 '왜'라는 질문 대신 어느 누구도 배제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시민권(혹은 인권)의 개념 안에서 사회구조적인 빈곤, 특히 '여성의 빈곤을 제기한다면 모든 여성이 동등하게 '권리' 개념 안에서 연대하고 서로를 지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 같은 여성에게 사과의 방법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엄마의 시민권을 인정하고, 엄마가 나의 시민권을 인정하는 것이 연대의 시작이겠다.
그녀들의 시민권을 인정하는 것이 연대의 시작이겠다.
이제 집에 가서 '엄마'를 만나련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