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 빈민대중의 분노와 행동으로 인간다운 삶을
천만 빈민대중의 분노와 행동으로 인간다운 삶을!
정부가 최저생계비를 계측하고 결정하며 공표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12월 1일, 2005년 최저생계비가 공표되었다. 평균8.9%인상이라는 포장아래 결정된 금액은 1인 가구 40만1천 원, 4인 가구 113만원으로 99년 수준에도 못 미치는 최악의 금액이다. 99년 최저생계비 계측당시 최저생계비는 가계지출의 48.7%, 근로자소득의 38.2%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최저생계비는 가계지출의 43.3%, 근로자소득의 34.1%로 99년 수준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그나마 2005년의 물가인상률 3%가 반영되어 8.9%라는 인상률이 나온 것이다.
석박사급 연구원 200여명을 동원한 가계소비 조사, 한번 참석에 두당 2, 30만원을 지급하는 수십 번의 회의, 총 20억 원의 최저생계비 계측조사비용. 그 모든 것의 결과가 위와 같다면, 과연 정부는 왜 굳이 욕을 먹어가면서 최저생계비를 계측하고 결정하며 공표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최저생계비를 결정하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위원들과 연구원들, 교수들에게 조사/연구/회의참여 명목으로 용돈을 쥐어주기 위해서인가? 설사 그렇다고 하여도, 1인 가구 40만 1천 원이라는 소위 “껌 값”으로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이 가능’하며, 이는 그동안의 생활수준 향상이 반영된 금액이라고 이야기하는 터무니없음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정부가 빈곤문제 해결에 대한 확고한 정책의지도, 그것을 추진할 능력도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면적인 설명일 것이다. 정부는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히 빈민문제와 사회복지에 대한 일관적이고 확고한 정책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생산적이지 않은 자”, “복지의존자” 에게 정부는 아무것도 줄 수 없고, 과거와 같은 비생산적인 ‘예산 퍼주기’ 복지정책(언제 퍼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을 중단할 것이며, ‘생산적’이고 근면한 사람만이 복지를 누릴 자격을 부여하겠다는 의지이다. 또한 복지급여가 노동시장으로부터의 소득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며, 따라서 복지급여 삭감, 수급자격 강화, 수급기간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빈민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것이다. 이는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 노무현 정권의 “참여 복지”, 그리고 지난달 발표된 “일을 통한 빈곤탈출”정책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다.
스스로 삶의 위기를 선택할 자 누구인가
500년 전 영국의 구빈법을 연상하게 하는 이러한 원칙들은 김대중 정권이 집권하면서 내세운 “생산적 복지”라는 언명 속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98년 IMF사태 이후 발생한 대량실업 사태와 빈곤층 증가, 소득의 양극화 속에서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그 제도적 구현태라고 할 수 있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시행하였다. '생산적 복지'는 빈곤과 실업의 문제를 개인의 도덕적 해이와 나태에서 원인을 찾고, 개인이 부지런히 일할 의지를 가질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국민기초생활법은 그 기본원칙을 ‘수급자가 자신의 생활의 유지·향상을 위하여 그 소득·재산·근로능력 등을 활용하여 최대한 노력하는 것을 전제로 이를 보충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근로능력이 있는 자’들은 의무적으로 취업훈련과 자활사업에 참여해야 기초법의 수급자가 될 수 있게 강제하였다. 이렇게 끊임없이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을 강제하는 이른바 노동연계복지가 도입된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가 국가 공공부문의 소관영역으로 치부”되었다고 말하면서 자활후견기관 등 시민단체를 포섭/활용하여 국가책임의 상당부분을 민간에 전가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한편 자활대상자 뿐만 아니라 실제로 노동능력이 없는 수급자의 경우도, ‘놀고 먹는 복지 방지-수급자 관리강화’, ‘조건부 수급자 관리 조건강화’, ‘가짜빈곤층 색출’, ‘소득, 재산조사 강화’ 등 '엄정한 수급자관리'를 통해 많은 빈곤층을 “불법 수급자”라는 이름으로 색출해내고 수급권을 박탈하였다. 이렇게 ‘놀고 먹는 복지’ ‘가짜빈곤층’을 방지한다는 미명 하에 축소되어진 복지를 더욱 축소하는 한편, 보다 많은 빈곤층의 수급권을 박탈하고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이 강제되었다. 실제 수급권자는 이전의 ‘생활보호법’하의 대상자 154만 명에서 140만 명 선으로 대폭 줄었고, 혼자 사는 노인이나 장애인 세대 등 경제위기 이후 한시적 보호를 받았던 계층들이 그 대상에서 대거 탈락되었다. 또한 급여액은 생활보호 때보다도 더욱 축소되었다. 이렇게 수급자가 줄어 든 결과, 생계를 급여에 의지하고 있던 수급자의 자살사태를 빚었으며, 전문요원은 과도한 ‘색출’업무와 스트레스로 과로사 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복지수급에서 탈락된 빈곤층과 양산된 실업노동자층은 조건부 수급이라는 굴레 속에서 직업선택권을 박탈당하고 비정규직과 일용직 등 불안정한 일자리,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노동을 강요당했다. 이를 거부할 경우 급여 지급 중단 등 제재조치를 취해졌다. 이들은 결국 일반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을 거부당한 채 일상적, 장기적 실업과 불안정 고용 상태에 처해졌고, 노동시장과 실업 사이에 또 하나의 계층을 형성하였다.
복지국가의 환상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무현 정권은 “생산적 복지”가 제시한 기본적 원칙들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나라는 세계 중상위 수준의 사회안전망을 갖추고 있다.......'복지를 누릴 권리와 일할 책임' 간에 균형을 맞추도록 하겠다"라고 지난달 25일 시정연설에서 언급하였다. 지나친 공공부조는 수급자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으며 서구가 겪은 ‘복지병’을 앓지 않기 위해 근로연계형 복지로 가야한다고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서구와 같은 의미의 ‘복지’ 가 존재한 적이 있었는가? OECD국가 중에서도 최하의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수준을 자랑하는 국가가 한국이다. 종속적 발전주의와 억압적 국가장치로 인해 복지 자체가 부재하거나 저발전된 반주변부 국가에서 난데없는 ‘복지의존층’을 언급하는 것은 영양실조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다이어트를 강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이른바 ‘복지후진국’들에서 8, 90년대 벌어졌던 ‘복지개혁’의 담론과 매우 유사하며,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노동시장으로의 강제진입과 복지 축소정책을 예고하는 것이다. 얼마 전 11월 10일, 정부 산하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에서 참여복지의 기본방향과 중장기적 계획으로 발표된 “일을 통한 빈곤탈출 지원정책‘이 바로 이러한 정부의 인식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과연?
“일을 통한 빈곤탈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최근 실업률은 안정되었으나 빈곤율은 상승”되었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산업구조와 노동시장의 양극화에 따라 일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근로빈곤층이 증가”에 두고 있다. 그리고 생산적 복지에 따라 구축된 사회안전망도 “근로빈곤층 문제에 대해서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정부는 실업률 안정에 불구하고 빈곤층이 줄지 않는 이유를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증가 탓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위원회가 제시하는 전략은 크게 ‘일하는 빈곤층’에 대한 EITC(근로소득보전세제)의 도입과 사회적 일자리의 확충, 자활지원정책 대상 확대 및 내실화, 저소득층 창업 지원 제도 혁신 등인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놀랍게도 ‘더 열심히 일하라’라는 것이다. 또는 이제는 일하지 않으면 어떠한 복지혜택도 받을 수 없게 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스스로 일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근로빈곤층’이 증가하고 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일을 해도 빈곤하다는 ‘근로빈곤층’에게 ‘일을 통해 빈곤에서 탈출’ 하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위원회가 내놓은 구체적 대책은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거나, 죽어라 일을 해도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건에 있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층을 우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존의 조건부수급과 더불어 노동유인을 높이기 위하여 취해지는 조치가 일을 해서 소득세가 있는 사람에게 소득세액을 감해주거나 환급해 주는 근로소득세액공제(Earned Income Tax Credit, EITC)이다. 이 EITC를 통해 근로빈곤층의 소득보장과 근로유인이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당근’인 셈이다. 그런데 어디서 일을 하라는 것인가? 여기서 “임시적, 불안정한, 저급한 노동조건”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던 자활사업과 사회적 일자리가 갑자기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한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이 사업에 참여한 빈민의 임금은 시장임금을 교란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즉 최저임금 이하수준으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일반 노동시장에서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층의 존재와 어떤 차이도 가질 수 없음은 명백하다. 또한 정부 통계자료에만 근거해도 차상위층을 포함한 근로빈곤층은 350만 명을 상회하는데, 향후 4년 동안 매년 1만 명씩의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문제해결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나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정부의 정책과 예산을 통해 해결해야 할 사업의 운영과 책임을 자활기관과 시민단체에 거의 전적으로 전가시킨다. 민간단체가 맡아야 할 책임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제시된 사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근로빈곤층들을 “자활의지 박약자”나 “복지의존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낙인을 부여하고, “시민들의 최저한의 생활보장권을 박탈하거나 제한하는 정책 동조자” “희생자 비난하기에 동참하는” “정부정책 방향에 빈곤층을 복종시키는” 역할도 포함된다. 참으로 철저한 책임회피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일을 통한 빈곤탈출”은 “생산적 복지”의 기본적 원칙들을 보다 강고히 하는 가운데 국가의 책임을 민간에게 떠넘기면서 저임금 노동자를 대량 양산하는 노무현 정권의 야심작인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한계
이러하듯 “생산적 복지”와 국민기초생활제도, 그리고 최근의 “일을 통한 빈곤탈출”은 대량실업에 따른 빈곤층의 양산, 산업예비군의 극빈층화라는 상황 속에서 실업과 빈곤의 문제를 개인의 도덕적 해이, 취업기피의 문제로 돌림으로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를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한 조처였다. 근로능력과 의지가 있는 자에 대한 노동시장으로의 재진입을 강요하여 열악한 근로조건과 낮은 임금을 감수하도록 하고, 무조건적인 수급으로 인해 근로능력과 의지가 더 약화될 우려가 있는 자에 대한 근로유인, 즉 노동무능력자로의 탈락방지를 통해 한편으론 산업예비군의 최하층을 유지, 관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론 빈곤비용의 최소화를 의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행된 전사회적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이에 첨부된 생산적 복지는 불안정 노동과 빈곤의 거대한 층을 만들어내었다. 실업과 반(半)실업, 취업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이들은 대부분 일용직이거나, 임시적인 일자리에 종사하며 일을 하더라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의 낮은 생활수준과 불안정한 삶의 조건은 “일을 통한 빈곤탈출”이라는 허울 아래 더욱 심각해져 갈 것이다.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일을 해도 빈곤하다는 ‘근로빈곤층’에게 ‘일을 통해 빈곤에서 탈출’ 하라는 논리의 일관성도 맞추지 못하고 있는 노무현 정권의 모습은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음을, 또는 눈앞의 현실조차 제대로 보고 있지 않음을 웅변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노무현 정권이 그렇게 강조하는 ‘일’이라는 것도 불안정한 노동에 다름 아니며, 이렇게 시행되는 ‘일을 통한 빈곤 탈출’ 정책은 신자유주의 공세 하에서 날로 강화되는 노동의 불안정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그는 상황을 역전시킬 어떤 카드도 없고,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을 짧은 집권기간 동안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노무현 정권이 스스로 노동자민중의 삶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행보를 중단할 가능성은 없다. 그는 “억압의 한계”에 빠르게 다가가고 있을 뿐이다. 그 걸음을 멈추게 하고, 고통스런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은 인간다운 삶을 갈구하는 천만 빈민대중 그 자신의 분노와 행동뿐이다. 이는 “노동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는 선언이며, 스스로 원하는 노동을 자발적으로 하겠다는 요구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지배계급들의 노골적인 경멸에 대한 거부이며 빈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와 국가의 책임이라는 항변이다.
그러나 이 투쟁의 목적은 국가로부터 ‘시혜’를 얻어내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빈곤’이라는 화두를 두껍게 칠해진, 이미 파탄을 선고받은 복지국가 프로그램의 그림자를 벗겨내는 과정이다. 이 투쟁의 진정한 목적은 자루 속의 감자처럼 자신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 빈민이 스스로 권리를 요구하고 투쟁하는 주체로 일어서게 하는 것이다. 현 단계에서 이를 위해 노동시민사회영역의 투쟁하는 모든 이들은 빈민의 투쟁에 대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나 ‘의무’가 아닌 진정한 지지와 연대를 보내야 한다. 이 가운데 지난 시기 투쟁의 한계를 극복한 대중적 공동행동이 복원될 것이고, 그 투쟁 속에서 인간다운 삶의 권리가 보장되는 진정한 민중의 대안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최저생계비를 계측하고 결정하며 공표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12월 1일, 2005년 최저생계비가 공표되었다. 평균8.9%인상이라는 포장아래 결정된 금액은 1인 가구 40만1천 원, 4인 가구 113만원으로 99년 수준에도 못 미치는 최악의 금액이다. 99년 최저생계비 계측당시 최저생계비는 가계지출의 48.7%, 근로자소득의 38.2%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최저생계비는 가계지출의 43.3%, 근로자소득의 34.1%로 99년 수준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그나마 2005년의 물가인상률 3%가 반영되어 8.9%라는 인상률이 나온 것이다.
석박사급 연구원 200여명을 동원한 가계소비 조사, 한번 참석에 두당 2, 30만원을 지급하는 수십 번의 회의, 총 20억 원의 최저생계비 계측조사비용. 그 모든 것의 결과가 위와 같다면, 과연 정부는 왜 굳이 욕을 먹어가면서 최저생계비를 계측하고 결정하며 공표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최저생계비를 결정하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위원들과 연구원들, 교수들에게 조사/연구/회의참여 명목으로 용돈을 쥐어주기 위해서인가? 설사 그렇다고 하여도, 1인 가구 40만 1천 원이라는 소위 “껌 값”으로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이 가능’하며, 이는 그동안의 생활수준 향상이 반영된 금액이라고 이야기하는 터무니없음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정부가 빈곤문제 해결에 대한 확고한 정책의지도, 그것을 추진할 능력도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면적인 설명일 것이다. 정부는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히 빈민문제와 사회복지에 대한 일관적이고 확고한 정책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생산적이지 않은 자”, “복지의존자” 에게 정부는 아무것도 줄 수 없고, 과거와 같은 비생산적인 ‘예산 퍼주기’ 복지정책(언제 퍼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을 중단할 것이며, ‘생산적’이고 근면한 사람만이 복지를 누릴 자격을 부여하겠다는 의지이다. 또한 복지급여가 노동시장으로부터의 소득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며, 따라서 복지급여 삭감, 수급자격 강화, 수급기간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빈민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것이다. 이는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 노무현 정권의 “참여 복지”, 그리고 지난달 발표된 “일을 통한 빈곤탈출”정책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다.
스스로 삶의 위기를 선택할 자 누구인가
500년 전 영국의 구빈법을 연상하게 하는 이러한 원칙들은 김대중 정권이 집권하면서 내세운 “생산적 복지”라는 언명 속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98년 IMF사태 이후 발생한 대량실업 사태와 빈곤층 증가, 소득의 양극화 속에서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그 제도적 구현태라고 할 수 있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시행하였다. '생산적 복지'는 빈곤과 실업의 문제를 개인의 도덕적 해이와 나태에서 원인을 찾고, 개인이 부지런히 일할 의지를 가질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국민기초생활법은 그 기본원칙을 ‘수급자가 자신의 생활의 유지·향상을 위하여 그 소득·재산·근로능력 등을 활용하여 최대한 노력하는 것을 전제로 이를 보충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근로능력이 있는 자’들은 의무적으로 취업훈련과 자활사업에 참여해야 기초법의 수급자가 될 수 있게 강제하였다. 이렇게 끊임없이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을 강제하는 이른바 노동연계복지가 도입된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가 국가 공공부문의 소관영역으로 치부”되었다고 말하면서 자활후견기관 등 시민단체를 포섭/활용하여 국가책임의 상당부분을 민간에 전가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한편 자활대상자 뿐만 아니라 실제로 노동능력이 없는 수급자의 경우도, ‘놀고 먹는 복지 방지-수급자 관리강화’, ‘조건부 수급자 관리 조건강화’, ‘가짜빈곤층 색출’, ‘소득, 재산조사 강화’ 등 '엄정한 수급자관리'를 통해 많은 빈곤층을 “불법 수급자”라는 이름으로 색출해내고 수급권을 박탈하였다. 이렇게 ‘놀고 먹는 복지’ ‘가짜빈곤층’을 방지한다는 미명 하에 축소되어진 복지를 더욱 축소하는 한편, 보다 많은 빈곤층의 수급권을 박탈하고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이 강제되었다. 실제 수급권자는 이전의 ‘생활보호법’하의 대상자 154만 명에서 140만 명 선으로 대폭 줄었고, 혼자 사는 노인이나 장애인 세대 등 경제위기 이후 한시적 보호를 받았던 계층들이 그 대상에서 대거 탈락되었다. 또한 급여액은 생활보호 때보다도 더욱 축소되었다. 이렇게 수급자가 줄어 든 결과, 생계를 급여에 의지하고 있던 수급자의 자살사태를 빚었으며, 전문요원은 과도한 ‘색출’업무와 스트레스로 과로사 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복지수급에서 탈락된 빈곤층과 양산된 실업노동자층은 조건부 수급이라는 굴레 속에서 직업선택권을 박탈당하고 비정규직과 일용직 등 불안정한 일자리,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노동을 강요당했다. 이를 거부할 경우 급여 지급 중단 등 제재조치를 취해졌다. 이들은 결국 일반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을 거부당한 채 일상적, 장기적 실업과 불안정 고용 상태에 처해졌고, 노동시장과 실업 사이에 또 하나의 계층을 형성하였다.
복지국가의 환상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무현 정권은 “생산적 복지”가 제시한 기본적 원칙들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나라는 세계 중상위 수준의 사회안전망을 갖추고 있다.......'복지를 누릴 권리와 일할 책임' 간에 균형을 맞추도록 하겠다"라고 지난달 25일 시정연설에서 언급하였다. 지나친 공공부조는 수급자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으며 서구가 겪은 ‘복지병’을 앓지 않기 위해 근로연계형 복지로 가야한다고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서구와 같은 의미의 ‘복지’ 가 존재한 적이 있었는가? OECD국가 중에서도 최하의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수준을 자랑하는 국가가 한국이다. 종속적 발전주의와 억압적 국가장치로 인해 복지 자체가 부재하거나 저발전된 반주변부 국가에서 난데없는 ‘복지의존층’을 언급하는 것은 영양실조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다이어트를 강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이른바 ‘복지후진국’들에서 8, 90년대 벌어졌던 ‘복지개혁’의 담론과 매우 유사하며,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노동시장으로의 강제진입과 복지 축소정책을 예고하는 것이다. 얼마 전 11월 10일, 정부 산하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에서 참여복지의 기본방향과 중장기적 계획으로 발표된 “일을 통한 빈곤탈출 지원정책‘이 바로 이러한 정부의 인식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과연?
“일을 통한 빈곤탈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최근 실업률은 안정되었으나 빈곤율은 상승”되었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산업구조와 노동시장의 양극화에 따라 일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근로빈곤층이 증가”에 두고 있다. 그리고 생산적 복지에 따라 구축된 사회안전망도 “근로빈곤층 문제에 대해서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정부는 실업률 안정에 불구하고 빈곤층이 줄지 않는 이유를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의 증가 탓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위원회가 제시하는 전략은 크게 ‘일하는 빈곤층’에 대한 EITC(근로소득보전세제)의 도입과 사회적 일자리의 확충, 자활지원정책 대상 확대 및 내실화, 저소득층 창업 지원 제도 혁신 등인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놀랍게도 ‘더 열심히 일하라’라는 것이다. 또는 이제는 일하지 않으면 어떠한 복지혜택도 받을 수 없게 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스스로 일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근로빈곤층’이 증가하고 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일을 해도 빈곤하다는 ‘근로빈곤층’에게 ‘일을 통해 빈곤에서 탈출’ 하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위원회가 내놓은 구체적 대책은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거나, 죽어라 일을 해도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건에 있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층을 우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존의 조건부수급과 더불어 노동유인을 높이기 위하여 취해지는 조치가 일을 해서 소득세가 있는 사람에게 소득세액을 감해주거나 환급해 주는 근로소득세액공제(Earned Income Tax Credit, EITC)이다. 이 EITC를 통해 근로빈곤층의 소득보장과 근로유인이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당근’인 셈이다. 그런데 어디서 일을 하라는 것인가? 여기서 “임시적, 불안정한, 저급한 노동조건”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던 자활사업과 사회적 일자리가 갑자기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한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이 사업에 참여한 빈민의 임금은 시장임금을 교란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즉 최저임금 이하수준으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일반 노동시장에서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층의 존재와 어떤 차이도 가질 수 없음은 명백하다. 또한 정부 통계자료에만 근거해도 차상위층을 포함한 근로빈곤층은 350만 명을 상회하는데, 향후 4년 동안 매년 1만 명씩의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문제해결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나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정부의 정책과 예산을 통해 해결해야 할 사업의 운영과 책임을 자활기관과 시민단체에 거의 전적으로 전가시킨다. 민간단체가 맡아야 할 책임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제시된 사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근로빈곤층들을 “자활의지 박약자”나 “복지의존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낙인을 부여하고, “시민들의 최저한의 생활보장권을 박탈하거나 제한하는 정책 동조자” “희생자 비난하기에 동참하는” “정부정책 방향에 빈곤층을 복종시키는” 역할도 포함된다. 참으로 철저한 책임회피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일을 통한 빈곤탈출”은 “생산적 복지”의 기본적 원칙들을 보다 강고히 하는 가운데 국가의 책임을 민간에게 떠넘기면서 저임금 노동자를 대량 양산하는 노무현 정권의 야심작인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한계
이러하듯 “생산적 복지”와 국민기초생활제도, 그리고 최근의 “일을 통한 빈곤탈출”은 대량실업에 따른 빈곤층의 양산, 산업예비군의 극빈층화라는 상황 속에서 실업과 빈곤의 문제를 개인의 도덕적 해이, 취업기피의 문제로 돌림으로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를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한 조처였다. 근로능력과 의지가 있는 자에 대한 노동시장으로의 재진입을 강요하여 열악한 근로조건과 낮은 임금을 감수하도록 하고, 무조건적인 수급으로 인해 근로능력과 의지가 더 약화될 우려가 있는 자에 대한 근로유인, 즉 노동무능력자로의 탈락방지를 통해 한편으론 산업예비군의 최하층을 유지, 관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론 빈곤비용의 최소화를 의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행된 전사회적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이에 첨부된 생산적 복지는 불안정 노동과 빈곤의 거대한 층을 만들어내었다. 실업과 반(半)실업, 취업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이들은 대부분 일용직이거나, 임시적인 일자리에 종사하며 일을 하더라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의 낮은 생활수준과 불안정한 삶의 조건은 “일을 통한 빈곤탈출”이라는 허울 아래 더욱 심각해져 갈 것이다.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일을 해도 빈곤하다는 ‘근로빈곤층’에게 ‘일을 통해 빈곤에서 탈출’ 하라는 논리의 일관성도 맞추지 못하고 있는 노무현 정권의 모습은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음을, 또는 눈앞의 현실조차 제대로 보고 있지 않음을 웅변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노무현 정권이 그렇게 강조하는 ‘일’이라는 것도 불안정한 노동에 다름 아니며, 이렇게 시행되는 ‘일을 통한 빈곤 탈출’ 정책은 신자유주의 공세 하에서 날로 강화되는 노동의 불안정화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그는 상황을 역전시킬 어떤 카드도 없고,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을 짧은 집권기간 동안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노무현 정권이 스스로 노동자민중의 삶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행보를 중단할 가능성은 없다. 그는 “억압의 한계”에 빠르게 다가가고 있을 뿐이다. 그 걸음을 멈추게 하고, 고통스런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은 인간다운 삶을 갈구하는 천만 빈민대중 그 자신의 분노와 행동뿐이다. 이는 “노동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는 선언이며, 스스로 원하는 노동을 자발적으로 하겠다는 요구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지배계급들의 노골적인 경멸에 대한 거부이며 빈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와 국가의 책임이라는 항변이다.
그러나 이 투쟁의 목적은 국가로부터 ‘시혜’를 얻어내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빈곤’이라는 화두를 두껍게 칠해진, 이미 파탄을 선고받은 복지국가 프로그램의 그림자를 벗겨내는 과정이다. 이 투쟁의 진정한 목적은 자루 속의 감자처럼 자신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 빈민이 스스로 권리를 요구하고 투쟁하는 주체로 일어서게 하는 것이다. 현 단계에서 이를 위해 노동시민사회영역의 투쟁하는 모든 이들은 빈민의 투쟁에 대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나 ‘의무’가 아닌 진정한 지지와 연대를 보내야 한다. 이 가운데 지난 시기 투쟁의 한계를 극복한 대중적 공동행동이 복원될 것이고, 그 투쟁 속에서 인간다운 삶의 권리가 보장되는 진정한 민중의 대안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