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시간
천성산과 명절
공간과 시간 ― 천성산과 명절
심 용 석 | 고려대학교 과학기술학 협동과정 과학사회학전공
필자는 <과학과 진실> 코너 연재를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빠름’ 다시 말해, 속도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은 어떤 것인지 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온 명절과 그렇기에 결코 빗겨갈 수 없는 귀향과 귀경, 여기에서 ‘느림’ 즉, ‘정체’가 준 인상은 어떠하였을까? 첨단화된 기술들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 그 많은 시간을 ‘소요(낭비?)’해 고향에 다녀온다는 것은 사실 역설이다. 그만한 시간의 소요를 ‘낭비’, 내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느끼는 그 어떤 이라도 당연히 적은 시간을 들여 이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까? 너무 뻔한 질문이라 대답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 욕망이 항상 존재해왔던 것은 아니다. 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이, 새만금 사태와 관련하여 2003년의 ‘삼보일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있어 ‘속도’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오늘날 성지순례에 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빠른 이동은 단지 편안함만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빠름에 대한 강조는 일반적이긴 하나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들여지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타당한 것 아닐까?
이러한 빠름에 대한 강조는 [물론, 지금과는 질적·양적으로 다른 형태이겠지만] 아마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른 문명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여겨지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물길이 지닌 높은 생산력은 문명의 출현에 크나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이집트와는 달리 이 곳에서는 범람은 정기적이지도 않고, 발생하는 장소도 일정하지 않았고, 그 규모도 대단해서 때로는 작은 마을을 뒤집어엎을 정도였다고 한다1).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홍수를 어찌해볼 수 없는 신의 노여움[오늘날이야 재해로 받아들여지지만]으로 여겨 매우 두려워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길가메시 서사시』 중 한편은 아예 대홍수에 관한 신화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와는 달리 엄청난 재해를 가져다주는 자연환경에 대처하기보다는 새로운 환경을 탐색하기 위해 이동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국가(부족?)와 충돌하여 결국 전쟁을 벌이곤 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지 못한 채, 도시국가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 지속적으로 잔존하는 불안정한 상태였다.(통합된 국가가 출현하였더라도 이러한 긴장상태는 여전히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공간을 탐험하고 쟁취하는 그리고 때로는 신의 말에도 거역하는 영웅들2)도 이 모든 것과 무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공간 감각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홍수에 대한 두려움, 이를 대비할 수 있는 새로운 영토에 대한 열망, 이를 이끌어줄 영웅에 대한 갈망,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에 대한 대비 등 이 모든 것들이 공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메소포타미아를 이끌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그들에게 있어 시간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항상 잠재해 있었을 전쟁에서도 예상할 수 있듯이, 이동시간 단축과 끊임없는 공간 확장에 대한 강조는 제도적 차원뿐만 아니라 미시적 수준의 시·공간에 대한 감각에까지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다름 아닌 당시 사용되던 미디어와 그에 기입되던 문자이다: 돌이라는 미디어에 끌과 망치로 공들여 새기던 이집트의 상형문자와는 달리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갈대줄기를 이용하여 점토판에 쐐기문자를 새겼다.3) 이집트에서 강조되던 공들여 새기던[다시 말해 많은 시간을 쏟아 붓는] 관행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사치스러운 것이라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측면에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시간(내지는 애니미즘이나 종교 등)보다 공간(내지는 빠른 이동 등)을 강조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공간에 대한 강조는 특히 시간의 단축 결국, 효율성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1748년에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러한 세상을 “시간은 돈이다”라는 한마디로 천명하였는데 그의 입장은 절약되는 시간만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을 환산하여 계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시간’의 출현은 필수적이다. 연재를 시작하는 첫 글에서도 밝혔듯이, 개인마다, 지역과 처한 상황에 따라 그리고 사회·문화에 따라 시간은 결코 동일할 수 없다. 그럼에도(아니 차라리, 그러했기 때문에) 이들을 환산하여 계산할 수 있는 수단은 필수적이었고 [예상하실 터이지만,] 이는 바로 ‘시계’의 도입으로 가능해졌다. 그런데 시계가 출현하게 된 기원을 찾다보면 하나의 역설과 만나게 된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기술사가이자 기술철학자인 멈포드(Lewis Mumford)에 따르면 시계의 도입은 사실 종교적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즉, 중세시대에 온전하며 따라서, 유일한 신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베네딕트는 오늘날 성무일과라 불리는 신에게 하루에 7번 봉헌하는 주기를 제안하였고 7세기 초의 교황이었던 사비니아노(Sabinianus)는 이 주기에 맞춰 종을 울릴 것을 포고하였다. 이에 따라 결국, 13세기 내지 14세기 여타의 자연적 장애물 -가령, 겨울/물시계, 흐린 날씨/해시계-에 방해받지 않고 주기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시계가 출현하게 되었다. 즉, 당시의 시계는 오늘날의 계산가능성을 지닌 수단이라기보다는 신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시계의 역할 또한,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 하지만, 16세기와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시계는 다양한 형태 가령, 도시의 종탑, 작은 가정용 시계 등으로 점차 일상화되면서 오늘날의 의미로 자리잡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자본주의는 계산가능한 시간에 화폐 개념을 더하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삶들이 출현하게 된다: 가령, 인클로우저 운동으로 도시로 유입되어온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시계에 포섭된 시간을 통해 화폐로 전환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톰슨(E. P. Thompson)이 언급했던 성 월요일 풍습이나 수많았던 철야제 및 축제 등도 점차 그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형태의 노동습관이 출현하게 된다 -즉, 노동의 분할, 노동에 대한 감독, 벌금, 벨과 시계, 금전적 유인책, 설교와 학교 교육, 축제와 스포츠에 대한 억압 등.4)
이 과정에서 종교가 지니던 지위 또한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종교가 표상하던 세계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가령,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신과 속세를 매개해주는 교회여야만 했던 관행이 사라졌으며, 회화나 지도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과 지역을 강조함으로써 상징적 의미를 중요시했던 방식은, 원근법,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에 대한 탐험, 위도 및 경도의 도입으로 대체되었다. 즉,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것을 강조하던 중세시대의 종교와는 달리, 이제는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전의 상징적인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들은 신비로움 아니면 기적이었고, 공간의 진정한 질서가 구현된 곳은 천국(Heaven)이었으며 진정한 시간은 영생(Eternity)이었지만 이제 시계에 포섭된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계산가능성 즉, 측정가능성이라는 추상화로만 파악될 뿐이다. 또한, 이러한 추상화는 자본주의와 연결되면서 모든 것들을 화폐로 환원함으로써 더 많은 화폐에 대한 욕망은 당연한 귀결이 되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점차 실재 세계를 부정하면서 오직 양적 표상물에만 관심을 쏟게 되었으며 기계화된 세계상이 주요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제국주의 시대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지역들에 대한 탐험(!)도 이렇듯 변화한 시·공간에 대한 관념과 이와 함께 가능해진 화폐로의 전환과 결코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첫머리에서 밝힌 문제제기로 되돌아가 보자: “차라리 오늘날에 있어서도 빠름에 대한 강조는 일반적이긴 하나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들여지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것 아닐까?” 시계의 출현에서도 드러나는 역설처럼 오늘날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시계에 포섭된 따라서 추상화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간들은 항시 상존할 수밖에 없다. 명절에 귀향과 귀경에 소요되는 시간이 그러한 시간들 중 하나이며 바로 이 점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한국 이러한 관행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과도하게 공간적인 측면만을 강조할 때, 이 외의 것들은 점차 등한시되고, 이는 결국 아도르노가 우려했던 동일성주의5)와도 맥이 닿아 있다는 것이다. 즉, 자연을 계산가능성으로만 재단하여 이 기준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동일화할 수 없는 것들은 제거해버리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천성산 사태 또한, 고속철도의 건설을 오직 하나의 관점[즉, 시계적 시간 내지는 획일화된 공간의 단축]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대화로도 해소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던 것은 아닐까? PSSP
1) 이집트의 경우, 풍부한 충적토를 제공하면서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범람이 풍족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새로운 거주지를 탐색하는 이동 대신, 그들의 삶[내지는 시간]을 지속하기 위한 파라오 즉, 불멸성과 영원성에 대한 제의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각각의 문명에게 있어 물은 환경의 차이로 인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일리아스』 그리고 당시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상기되지 않는가? 결코, 이 두 문명이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리스 역시 이동 내지는 전쟁에 대해 강조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이집트의 신화에서의 주축은 대부분 인간-영웅이 아닌 신들이었으며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은 3000년의 역사 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3) 물론, 이집트의 파피루스도 당시에 사용되던 잘 알려진 미디어이며 공간/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돌보다는 쐐기문자가 사용되던 점토판과 유사한 측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집트가 힉소스의 침략을 받아 이후 공간에 대한 강조가 출현한 뒤 파피루스가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공간에 대한 강조가 미디어[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및 사회·제도 등]와 맺는 관계를 더욱 잘 보여주는 실례일 뿐이다.
4) 이러한 측면에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이미 고전에 속한다. 이와 함께 미하엘 엔데의 『모모』도 꼭 한번 보시길.
5) 갑작스레 아도르노를 언급한 것은 사실, 가까운 기회에 한번 아도르노의 사상과 공간/시간과의 관계에 대해 한번 다루고 싶은 필자의 욕망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아도르노의 저작들에 도전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느낄 그 난해함과 해소될 수 없는 모순으로 그의 사상에 관해서 자세하게 언급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의 동일성주의에 대해서는 사물들 각각이 지닌 특질들을 제거하여 동일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정도로 생각해주시길 바란다. 가령, 별다른 생각 없이 손쉽게 받아들이는 “1+1=2”라는 공식은, 다의성으로 넘쳐나는 사물들의 특질들이 이미 제거된 이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 읽었던 사례인데, 사자와 토끼가 들어가 있는 우리 안에서의 “1+1=2”는 사실 성립하지 않는다.
심 용 석 | 고려대학교 과학기술학 협동과정 과학사회학전공
필자는 <과학과 진실> 코너 연재를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였다. ‘빠름’ 다시 말해, 속도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은 어떤 것인지 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온 명절과 그렇기에 결코 빗겨갈 수 없는 귀향과 귀경, 여기에서 ‘느림’ 즉, ‘정체’가 준 인상은 어떠하였을까? 첨단화된 기술들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 그 많은 시간을 ‘소요(낭비?)’해 고향에 다녀온다는 것은 사실 역설이다. 그만한 시간의 소요를 ‘낭비’, 내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느끼는 그 어떤 이라도 당연히 적은 시간을 들여 이동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까? 너무 뻔한 질문이라 대답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 욕망이 항상 존재해왔던 것은 아니다. 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이, 새만금 사태와 관련하여 2003년의 ‘삼보일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있어 ‘속도’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오늘날 성지순례에 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빠른 이동은 단지 편안함만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빠름에 대한 강조는 일반적이긴 하나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들여지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타당한 것 아닐까?
이러한 빠름에 대한 강조는 [물론, 지금과는 질적·양적으로 다른 형태이겠지만] 아마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른 문명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여겨지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물길이 지닌 높은 생산력은 문명의 출현에 크나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이집트와는 달리 이 곳에서는 범람은 정기적이지도 않고, 발생하는 장소도 일정하지 않았고, 그 규모도 대단해서 때로는 작은 마을을 뒤집어엎을 정도였다고 한다1).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홍수를 어찌해볼 수 없는 신의 노여움[오늘날이야 재해로 받아들여지지만]으로 여겨 매우 두려워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길가메시 서사시』 중 한편은 아예 대홍수에 관한 신화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와는 달리 엄청난 재해를 가져다주는 자연환경에 대처하기보다는 새로운 환경을 탐색하기 위해 이동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국가(부족?)와 충돌하여 결국 전쟁을 벌이곤 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지 못한 채, 도시국가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 지속적으로 잔존하는 불안정한 상태였다.(통합된 국가가 출현하였더라도 이러한 긴장상태는 여전히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공간을 탐험하고 쟁취하는 그리고 때로는 신의 말에도 거역하는 영웅들2)도 이 모든 것과 무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공간 감각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홍수에 대한 두려움, 이를 대비할 수 있는 새로운 영토에 대한 열망, 이를 이끌어줄 영웅에 대한 갈망,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에 대한 대비 등 이 모든 것들이 공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메소포타미아를 이끌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그들에게 있어 시간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항상 잠재해 있었을 전쟁에서도 예상할 수 있듯이, 이동시간 단축과 끊임없는 공간 확장에 대한 강조는 제도적 차원뿐만 아니라 미시적 수준의 시·공간에 대한 감각에까지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다름 아닌 당시 사용되던 미디어와 그에 기입되던 문자이다: 돌이라는 미디어에 끌과 망치로 공들여 새기던 이집트의 상형문자와는 달리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갈대줄기를 이용하여 점토판에 쐐기문자를 새겼다.3) 이집트에서 강조되던 공들여 새기던[다시 말해 많은 시간을 쏟아 붓는] 관행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사치스러운 것이라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측면에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시간(내지는 애니미즘이나 종교 등)보다 공간(내지는 빠른 이동 등)을 강조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공간에 대한 강조는 특히 시간의 단축 결국, 효율성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1748년에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러한 세상을 “시간은 돈이다”라는 한마디로 천명하였는데 그의 입장은 절약되는 시간만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을 환산하여 계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시간’의 출현은 필수적이다. 연재를 시작하는 첫 글에서도 밝혔듯이, 개인마다, 지역과 처한 상황에 따라 그리고 사회·문화에 따라 시간은 결코 동일할 수 없다. 그럼에도(아니 차라리, 그러했기 때문에) 이들을 환산하여 계산할 수 있는 수단은 필수적이었고 [예상하실 터이지만,] 이는 바로 ‘시계’의 도입으로 가능해졌다. 그런데 시계가 출현하게 된 기원을 찾다보면 하나의 역설과 만나게 된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기술사가이자 기술철학자인 멈포드(Lewis Mumford)에 따르면 시계의 도입은 사실 종교적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즉, 중세시대에 온전하며 따라서, 유일한 신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베네딕트는 오늘날 성무일과라 불리는 신에게 하루에 7번 봉헌하는 주기를 제안하였고 7세기 초의 교황이었던 사비니아노(Sabinianus)는 이 주기에 맞춰 종을 울릴 것을 포고하였다. 이에 따라 결국, 13세기 내지 14세기 여타의 자연적 장애물 -가령, 겨울/물시계, 흐린 날씨/해시계-에 방해받지 않고 주기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시계가 출현하게 되었다. 즉, 당시의 시계는 오늘날의 계산가능성을 지닌 수단이라기보다는 신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시계의 역할 또한,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 하지만, 16세기와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시계는 다양한 형태 가령, 도시의 종탑, 작은 가정용 시계 등으로 점차 일상화되면서 오늘날의 의미로 자리잡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자본주의는 계산가능한 시간에 화폐 개념을 더하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삶들이 출현하게 된다: 가령, 인클로우저 운동으로 도시로 유입되어온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시계에 포섭된 시간을 통해 화폐로 전환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톰슨(E. P. Thompson)이 언급했던 성 월요일 풍습이나 수많았던 철야제 및 축제 등도 점차 그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형태의 노동습관이 출현하게 된다 -즉, 노동의 분할, 노동에 대한 감독, 벌금, 벨과 시계, 금전적 유인책, 설교와 학교 교육, 축제와 스포츠에 대한 억압 등.4)
이 과정에서 종교가 지니던 지위 또한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종교가 표상하던 세계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가령,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신과 속세를 매개해주는 교회여야만 했던 관행이 사라졌으며, 회화나 지도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과 지역을 강조함으로써 상징적 의미를 중요시했던 방식은, 원근법,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에 대한 탐험, 위도 및 경도의 도입으로 대체되었다. 즉,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것을 강조하던 중세시대의 종교와는 달리, 이제는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전의 상징적인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들은 신비로움 아니면 기적이었고, 공간의 진정한 질서가 구현된 곳은 천국(Heaven)이었으며 진정한 시간은 영생(Eternity)이었지만 이제 시계에 포섭된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계산가능성 즉, 측정가능성이라는 추상화로만 파악될 뿐이다. 또한, 이러한 추상화는 자본주의와 연결되면서 모든 것들을 화폐로 환원함으로써 더 많은 화폐에 대한 욕망은 당연한 귀결이 되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점차 실재 세계를 부정하면서 오직 양적 표상물에만 관심을 쏟게 되었으며 기계화된 세계상이 주요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제국주의 시대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지역들에 대한 탐험(!)도 이렇듯 변화한 시·공간에 대한 관념과 이와 함께 가능해진 화폐로의 전환과 결코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첫머리에서 밝힌 문제제기로 되돌아가 보자: “차라리 오늘날에 있어서도 빠름에 대한 강조는 일반적이긴 하나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들여지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것 아닐까?” 시계의 출현에서도 드러나는 역설처럼 오늘날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시계에 포섭된 따라서 추상화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간들은 항시 상존할 수밖에 없다. 명절에 귀향과 귀경에 소요되는 시간이 그러한 시간들 중 하나이며 바로 이 점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한국 이러한 관행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과도하게 공간적인 측면만을 강조할 때, 이 외의 것들은 점차 등한시되고, 이는 결국 아도르노가 우려했던 동일성주의5)와도 맥이 닿아 있다는 것이다. 즉, 자연을 계산가능성으로만 재단하여 이 기준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동일화할 수 없는 것들은 제거해버리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천성산 사태 또한, 고속철도의 건설을 오직 하나의 관점[즉, 시계적 시간 내지는 획일화된 공간의 단축]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대화로도 해소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던 것은 아닐까? PSSP
1) 이집트의 경우, 풍부한 충적토를 제공하면서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범람이 풍족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새로운 거주지를 탐색하는 이동 대신, 그들의 삶[내지는 시간]을 지속하기 위한 파라오 즉, 불멸성과 영원성에 대한 제의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각각의 문명에게 있어 물은 환경의 차이로 인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일리아스』 그리고 당시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상기되지 않는가? 결코, 이 두 문명이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리스 역시 이동 내지는 전쟁에 대해 강조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이집트의 신화에서의 주축은 대부분 인간-영웅이 아닌 신들이었으며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은 3000년의 역사 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3) 물론, 이집트의 파피루스도 당시에 사용되던 잘 알려진 미디어이며 공간/시간이라는 관점에서 돌보다는 쐐기문자가 사용되던 점토판과 유사한 측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집트가 힉소스의 침략을 받아 이후 공간에 대한 강조가 출현한 뒤 파피루스가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공간에 대한 강조가 미디어[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및 사회·제도 등]와 맺는 관계를 더욱 잘 보여주는 실례일 뿐이다.
4) 이러한 측면에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이미 고전에 속한다. 이와 함께 미하엘 엔데의 『모모』도 꼭 한번 보시길.
5) 갑작스레 아도르노를 언급한 것은 사실, 가까운 기회에 한번 아도르노의 사상과 공간/시간과의 관계에 대해 한번 다루고 싶은 필자의 욕망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아도르노의 저작들에 도전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느낄 그 난해함과 해소될 수 없는 모순으로 그의 사상에 관해서 자세하게 언급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의 동일성주의에 대해서는 사물들 각각이 지닌 특질들을 제거하여 동일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정도로 생각해주시길 바란다. 가령, 별다른 생각 없이 손쉽게 받아들이는 “1+1=2”라는 공식은, 다의성으로 넘쳐나는 사물들의 특질들이 이미 제거된 이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 읽었던 사례인데, 사자와 토끼가 들어가 있는 우리 안에서의 “1+1=2”는 사실 성립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