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지구적 운동의 국제적 노조주의에 대한 도전에 따른 해방적 노동전략 탐색
새로운 지구적 운동의 국제적 노조주의에 대한 도전에 따른 해방적 노동전략 탐색1)
(Adventures of Emancipatory Labour Strategy as the New Global Movement Challenges International Unionism)
피터 워터만 (waterman@antenna.nl) | Global Solidarity Dialogue (http://www.antenna.nl/~waterman/)
번역 : 사회진보연대 노동국
[해설 ]
이 글은 ‘세계체제론 저널’ 10호(http://jwsr.ucr.edu/archive/vol10/number1/pdf/jwsr-v10n1-waterman.pdf)에 실려 있는 글을 번역한 것이다. 필자인 피터 워터만은 네덜란드의 사회연구학회(Institute of Social Studies)에서 노동자운동을 해왔고 국내에서도 ‘지구화시대의 전세계 노동자’(문화과학)라는 책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문화과학) 저자인 킴 무디와 더불어 90년대 이래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꾸준히 제기하고 전파하고 심화시켜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직면하여 침체를 겪고 있는 노동자운동의 활로의 하나로서 제기되는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워터만에 따르면 이제 포괄적인 용어가 되었다. 그는 세계사회포럼으로 대표되는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성장에 따라 다시금 ‘새로운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킴 무디의 해석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사회운동 노조주의 해석을 비판하고, 사회운동 노조주의 외에 다른 주장들도 평가하면서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도 노동자운동의 혁신이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고, 그간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그 대안적 지향으로 주장되어온 바, 보다 풍부한 논의를 위해서 이 글을 두차례에 걸쳐서 나눠 싣고자 한다.
서론 : 토론의 배경
1980년대 후반에 네덜란드에서 내 스스로가 처음으로 제안한 사회운동 노조주의(SMU) 개념은 남아공의 롭 램버트2)와 에디 웹스터에 의해 처음 수용되었다. 남아공에서 그것은 상당한 정치적 이론적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계급/민중-지역공동체 이해가 불만족스러워서 나는 계급+새로운 사회운동의 의미에서, 뚜렷한 국제(주의)적 차원으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재)개념화했다. 이는 남아공의 이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민중-지역공동체 이해는 브라질, 필리핀, 미국, 스리랑카, 그리고 국제적 수준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고(졌거나) 적용되었다. 그것은 킴 무디(미국)의 작업에서 가장 유력하게 정식화되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에서... 노조는 정치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적극적으로 선도한다. 노조는 여타 사회운동들과 동맹을 맺지만 선거나 일시적인 연합보다 더 강력한 연대를 만드는 계급적 비전과 내용을 제공한다. 그 내용은 단순히 운동의 요구들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가장 큰 사회적 경제적 수준을 가지는 조합원 대중들을 선도자로서 활성화하는 것이다.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빈민, 실업자, 비정규노동자, 주민조직들과 같이 자기 조직화를 유지하기 힘든 이들을 조직하기 위해 사회의 억압받고 착취 받는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일반적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을 사용하는 적극적인 전략적 지향을 의미한다. (무디 1997 b:276)
무디는 또한 그 용어에 명확한 국제(주의)적 지향을 부여했는데, 그가 제안한 국제주의 모델은 역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초국적 기업 내 산업노동자들을 노동의 전위부대로 간주했고 그들의 (이념을) 전위적 국제주의로 표현했다. 그것은 국제적으로 가진 영향력보다 과도하게 그 자신에게 더 친숙한 특정한 네트워크와 동일시된 것이었다(워터만2000 pp.227-310을 보라).3) 우리는 그러한 과도한 동일시, 또는 과도한 일반화가 사회운동 노조주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보다 일반적인 문제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램버트&웹스터 2003).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토론에서 가장 개념적으로 세련되고 경험적으로 지식이 넓은 공헌은 아마도 칼 폰 홀트(2002)가 했을 것이다. 폰 홀트는 사회운동 노조주의 개념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판한다. (1) 과도한 일반성(over-generality) (2) 노동자 의식과 행동에 대한 역사적/공동체적 결정요인 인식 실패 (3) 그가 비판하는 저자들 생각에서 작업장과 국가(그리고 암시적으로, 세계)내에 있다고 생각하는 고양된 계급의식을 앞서의 요인들이 어떻게 방해하거나 혹은 적어도 중대하게 제한하는지에 대한 인식 실패. 그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노조 전략의 이전성(transferability)’에 대해 회의론을 표현하며 노조주의의 제도적 양상과 운동적 양상의 관계에 보다 집중할 것을 제안한다(나라별? 작업장별?).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결함과 비약에 대한 폰 홀트의 확인은 중요하고 역사와 공동체, 제도/운동의 긴장 고려에 대한 그의 강조는 가치있다. 그러나 그의 비판이 무디와 워터만에게 똑같이 적용되든 그렇지 않든, 나는 질문을 제기하고 싶다. 그의 논의가 계급/사회운동적 해석이라기보다 계급/민중-지역공동체 해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운동 이론(그러나 이상하게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적 다양성 이론만)을 지향하는 제스처를 보이지만, 새로운 운동을 일반적으로 ‘비계급적’으로 이해한다. 이것들을 적극적이고 자율적으로-그리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정치적 등가물로서-간주하는데 실패한 것은 그의 결론의 설득력과 범위를 제한한다.
이 논의는 세계화가 무디와 워터만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화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위한 조건을 생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내포한다... 국가적 현실이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여기에서 폰 홀트는 일반적 (보편적, 지구적) 이론을 생산하는 사회적 이론가와 일반적 (국제(주의)적, 해방적) 전략을 발전시키는 사회주의자의 포부 양자를 포기하는 것 같다. 더욱이 내가 나중에 논의하겠지만, 그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Global Justice and Solidarity Movement) 내외에서 약하지만 중요하게 존재하고 있다.4)
2001년도에 나는 어떠한 사례에서도 사회운동 노조주의 개념을 계급/민중 해석에 양보했는데, 그렇지만 나의 본래적인 이해를 ‘새로운 사회적 노조주의’로 심화시키려 했고 네트워킹과 소통의 역할과 문화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으로써 그것을 확장하려 시도했다.
지금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지속적인 충격이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제3세계 표본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조차 방향을 혼란케 하는 효과를 낳으면서(폰 홀트의 비관주의를 설명하는 것?), 동시에 국제적 노동조합은 점점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와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개념 사용과 토론은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1999년 시애틀에 의해 상징화된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발전과 특히 2001년 이후 세계사회포럼(WSF) 프로세스는 그 문제를 노조의 의제로 올려놓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계급/민중-지역공동체 동맹의 문제인가 혹은 계급/새로운 사회운동 동맹의 문제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또는 그 밖의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은 발전을 위해 여전히 유용한 개념인가?
용어법과 적용범위에 대한 몇 가지 최종 설명은 다음과 같다.
* SMU (Social Movement Unionism) = 사회운동 노조주의, 현재 진행 중인 논의나 토론을 위한 포괄적인 용어
* ISMU (International Social Movement Unionism) =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 계급/민중 해석 또는 킴 무디식 해석
* NISU (New International Social Unionism) =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 계급/새로운 사회운동 해석이자 내 자신의 해석
논의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부에서는 개념의 궤적을 둘러싼 역설과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두 가지 경향을 다룬다. 2부에서는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으로 대표되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기회와 그에 대한 도전을 다룬다. 3부에서는 2003년 세계사회포럼으로부터 사회운동 노조주의와 관련된 증거를 제시한다. 4부에서는 개념에 비판적이거나 논쟁 외부에 있으나, 여전히 국제 노동운동의 해방적 대안에 기여하는 관련 글들을 살펴본다. 결론은 노동과 국제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방적 이해가 발전하게 될 곳은 새로운 운동의 궤도 안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1. 역설, 역설, 가장 독창적인 역설
일반적으로 ‘새로운 사회운동’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그 이론을 발전시킨 사람으로 여겨지는 알베르토 멜루치(Alberto Melucci)는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기를 바랄 만큼 그 개념의 (잘못된) 사용에 대해 불만스러워했다. 나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해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 노동운동 전문가들과 노조 지도자들이 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기쁘지만(아래를 보라), 그것이 이해되거나 적용되는 방식은 불편하다. 수 년간 다양하게 노력하고 내 글을 친절하게 참조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 노조주의 개념 사용자들은 공통적으로 이를 오해하거나 잘못 적용해왔다. 뒤에 나올 국제금속노련(IMWF)의 인용문이 드러내듯이 노동자주의적 이해로부터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조차 구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역설을 살펴보자.
오해
나의 공식은 명확했고 단순하거나 도식적이기까지 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회주의 노조이론과 ‘새로운 사회운동’(NSM)이론의 종합이었고 후자가 1980년대에 형성됨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 나는 급진 사회학자들과 소통 전문가들로부터 끌어온 정보화에 대한 이론을 덧붙였다. 사회주의 노조이론으로부터 나는 자본주의적 노동, 계급모순, 노동자의 자기조직화, 현존하는 자본주의 관계 타도와 국제적 연대 및 인간의 자기해방으로서의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취하였다. 새로운 사회운동 이론으로부터 나는 급진민주적 정체성 운동, 각기 다른 급진 민주주의 투쟁의 등가성, 운동 형태로서의 네트워크, 해방투쟁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사회-문화적 영역의 중요성을 취하였다. 급진적 소통이론으로부터 나는 해방운동을 위한 정보와 통신기술의 잠재력에 대한 아이디어를 취하였다. 이러한 국제주의는 탈민족주의적인 것인데 이는 결국 내가 ‘새로운 지구적 연대’라고 개념화한 것이다. 이는 명확하게 사회주의 노조이론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킴 무디가 그러한 것처럼 그 진영에서는 그동안 사회운동-그리고 진보하는 국제주의-가운데에서 노동계급의 전위적 역할을 제시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종종 계급을 무시하는 새로운 사회운동 이론가들에게 사회적 해방에 있어 노동과 노조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러나 사회운동 노조주의 개념을 사용해온 이들 대부분은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이론 진영 또는 실천의 두 복합체 사이의 표현방법으로 그것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계급내의 동맹(임금노동자/비임금노동자)과(이거나) 계급과 민중/지역공동체(노동자/민중, 노동/민족주의자)의 동맹의 표현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앞서 얘기했듯이 노동자/노동조합을 대중운동 혹은 해방운동의 전위로 이해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적용사례는 민족국가(국가로 정의된 민족)로 향한 것이거나 그것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이는 종종 새로운 국제주의를 우선적으로 일국적 사회운동 노조주의간의 국제주의로 간주했다(예를 들어 남아공, 남한, 브라질, 필리핀 노조의 내셔널센터 사이의 국제주의).
이것은 전진된 이해였지만 급진적 이해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동안 레닌주의, 사민주의 혹은 자유주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암시적 혹은 명백한 비판인 한에서, 그리고 노동운동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로 나아가는 한에서 전진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노조주의의 위기의 근원까지 나아가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급진적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러한 근원은 제국주의적이든 반제국주의적이든 민족적-산업자본주의(national-industrializing capitalism, NIC)가 세계화되고 네트워크화된 자본주의(globalised networked capitalism, GNC)로 변모한 것에 있다. 그 속에서 생산과 서비스, 임노동과 노동계급은 가장 대규모의 해체와 재건을 겪고 있고, 노조는 규모가 축소되고 정치적으로 주변화되고 있다. 더욱이 그러한 이해는 해방이론과 실천에서 일국적, 국제적 새로운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급진적이지 않다. 따라서 예를 들어 여성들의 투쟁을 인식하는 곳에서 이는 보편적인 여성들의 투쟁이나 페미니즘이 아니라 관례적으로 ‘여성노동자’로 인식되었다. 결국 위기는 근본적으로 노조형태에 존재한다. 노조는 자본주의와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이 공히 네트워크 형태를 취하는 시대에 여전히 일차적으로 조직적/제도적이다. 즉, 이를 이론적으로 말하면 일국적/국제적 노동운동을 네트워킹적/소통적인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커지는 이 때에 여전히 조직적/제도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여기에서 문제는 대부분의 관련 저자들이 다음과 같은 것들 가운데 하나나 그 이상에 과도하게 집착해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임금 노동자계급, 노조형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이론이다. 실제로 이는 민족적-산업적 (특히 포드주의) 노동자계급, 노조형태, 이데올로기/이론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내가 다른 곳에서(워터만 2001b) 주장했듯이 이는 해방적인 노동자 국제주의를 발전시키기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잘못된 적용
나의 최초의 개념화는 이론적 종합이었으나 동시에 1980-90년대의 사회적 투쟁과 국제주의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경험의 일반화와 그것의 투영이었다. 또한 그것은 현존하는 노조주의와 조합이론을 비판하려는 의도였다. 그것은 존재하는 조합의 경험에 대한 서술과 정당화를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도 없고 훌륭한 장소/과정이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이상적인 것이었다(패니치&리에스 2000).
최초에는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것으로 이해되도록 하려했다. 세계화 시대에 보다 특별한 용어법으로, 그것은 관련성에 있어 지구적이고 더 심화된 지구적 연대가 되도록 할 의도였다. 최종적으로 그것은 이론적 토론과 발전을 유발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동시에 서술적인 동시에 확실한 것-찬양하는 것은 아닐지라도-으로 사용되었다. 아래 인용은 캐리커쳐일지 모르지만, 캐리커쳐가 그러하듯이 진부한 표현이 담을 수 없는 무언가를 나타낼 수도 있다.
ABCD 노총은 사회운동 노조이고 훌륭하다. 다른 노조들도 부디 따르라.
이는 남아공, 브라질, 필리핀에서 새로운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노조들에서 1980-90년대에 그렇게 사용되었다. 그것이 보다 국제적으로, 비판적으로 혹은 미래학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이는 여전히 노동/민중-지역공동체 형태 속에 있었고 포드주의 노동계급과 좌파, 사회주의자, 심지어 공산주의 노조와 이에 관련된 정당에 의해 명확히 표현된 전위와 함께였다. 어떤 노조가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사례로 여겨지는 한 이와 같은 견지에서 그 개념은 비판적인 기능을 박탈당한 것이었다. 전략적이거나 미래학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여전히 민족적-산업적 노조기구의 개념으로 사용된 곳에서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시기에 노동자 스스로를 연계시키는 형태를 극복할 수 없게 되었다. 특정한 장소(‘남반구’) 혹은 특정한 시기(권위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권력에 대항한 투쟁시기)에만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그것은 보편성(내가 언급한, 해방적 이론이나 전략의 열망)을 박탈당했다.
결국, 가장 활기차게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촉진하고 가장 밀접하게 노조와 활동했던 이들이 그 개념을 ‘민주적’, ‘현장’, ‘비정당’, ‘다른 대중운동과의 동맹’과 같은 가장 일반적인(그리고 개념화되지 않은) 특징과 함께 놓아두면서, 그 개념을 정의하거나 재정의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언급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한계들은 현존하는 일국적/국제적 노조 사이에서 그 개념을 지속하게 하고 심지어 확산시켰다. 그러나 이 한계들은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종말?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특정 노조에 연계시키고 자본주의 발전시기로 그것을 한정하고 또는 제도화된 노조주의를 위해 그것을 좌파적이거나 사회주의적 정책/실천으로 나타냄으로써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자리잡은 한계는 엄중한 것이 되었다. 대표적인 모범으로 제시된 남아공의 코사투(COSATU), 브라질의 구찌(CUT), 필리핀의 5.1절운동(KMU)은 감소하는 조합원들을 위한 전통적인 단체교섭조차 수행하기 어렵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산업관계의 덫에 점점 빠지면서 그들의 사회운동 노조주의 특성을 전부 혹은 많은 부분 잃었다. 남아공의 경우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처음으로 적용되었고 가장 많이 토론되었는데, 거기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노조를 조직적 위기에서 빠져나오게 하기보다는 그들의 자율성과 역동성 쇠퇴-그리고 분출하는 사회운동의 물결에 대한 접합의 지속적인 결핍-를 가져온 모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인다(브램블 2003, 브램블&바치시 2003)! 코사투가 뒷받침하는 ‘세계화와 노조의 권리에 대한 남반구 이니셔티브(Southern Initiative on Globalization and Trade Union Rughts, SIGTUR)’의 사례에서, 이는 SIGTUR가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과 국제 노동운동의 연관에 있어 왜 이끌기보다는 뒤쳐지는지, 왜 중심적이기보다는 주변적인지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5)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특정 시간/장소/사례에 갖다 붙이면 그 개념은 제도적 궤적을 따르게 되고 이는 국가적/지역적 경계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억누르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전통적 좌파 이상주의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베일하르츠 1992). 이는 피할수 없이 ‘보수적 이상주의’가 되는 것이다.
“보수적 이상을 특징짓고 그것을 비판적 이상과 구분하는 것은 보수적 이상이 스스로를 오늘날의 현실과 동일시하고 그 이상적 차원을 현재상태의 급진화나 완전한 이행 속에서 발견한다는 사실이다”(수사 산토스 2003).
이것은 노동자 국제주의에서의 어떠한 시도에서도 발생하는 다소 가혹한 운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보수적 이상의 개념이 소비에트 이상에 대해서처럼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인용문은 내가 급진적이라기보다 점진적인 것으로 취급했던 프로젝트 내의 두 가지 요소를 동일시한다. 첫째, 그들이 그들의 이상을 현존하는 노조주의의 ‘급진화 혹은 완전한 이행’에 갖다 붙이는 것이다. 둘째, 지배적인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을 그들이 서술하고 촉진시키는 노조나 네트워크에 적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판적이지 않다는 것이다.6)
2.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도전
‘반기업적’, ‘반자본주의적’, ‘반세계화’ 운동, 즉 ‘운동들의 운동’은 이러한 다양한 이름들이 말해주듯이 무정형적이거나 정치적 이론적 대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실제로, 그것이 ‘운동’인지 혹은 ‘장(field)’인지 (후자는 내가 생각하기에 짖어대고 물어뜯는 측면이 미흡하다) 질문이 제기되어 왔다. 자유주의 전문가들과 민족적-산업적 사회주의자들은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이 전통적인 운동의 특징을 결여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즉 조직, 지도부, 프로그램, 목표, 이데올로기. 내 느낌은 이렇다. 그것이 운동처럼 보고, 운동처럼 짖어대고, 운동처럼 꼬리를 흔들고, 운동처럼 사람들을 움직인다면 그것은 운동인 것이다.7)
위에 언급한 초창기 각 용어들이 이 무정형적 운동의 상태와 변화 국면을 포착하는 반면,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그 명칭은 2002년 초 2회 세계사회포럼에서 세계사회운동네트워크(WSMN)가 부여한 것이다-은 나에게는 어떤 것 보다 더 특징(그 발전의 현 단계)을 잘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 민중주의와 사회주의, 개혁주의와 봉기주의에 대한 불신이 현재적으로 나빠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명칭은 오래된 활동가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제 막 인식하고 활동하는 이들에게도 수용할 만하고,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단지 호소력에 있어서도 ‘해결책은 하나 : 혁명’이라는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구호나 역시 영국의 토니블레어-기든스의 ‘제3의 길’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8)
‘시애틀 전투’와 세계사회포럼은 아마도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가장 잘 알려진 소산일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야기한 그 운동들은 1980년대 제3세계에서 ‘식량 폭동’ 또는 ‘세계은행 소요사태’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네트워크-그리고 네트워크/소통/문화적 조건에 있어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에 대한 이해-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고정된 형태나 경계(제도적 또는 지정학적)가 없고,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한 계속적인 평가를 요구한다. (1)그 장소와 공간들 (2)그 표현형태들 (3)셋 혹은 그 이상의 차원(지방적, 국가적, 지역적, 지구적)에 대한 그 정치적,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충격들 (4)이러한 각각에서 그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와 그 사이의 상호관계들.
이 운동의 제도적 혹은 사회정치적 경계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다양한 시간과 장소에 있는 다양한 세력들의 의미, 무게, 동학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활발하게 개념화되고 평가될 수 있다.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이 무엇이라고 하기보다는 무엇이 아닌지 인식하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 그것은 1968년 운동의 반복이 아니다(이것이 그 뿌리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1980년대의 신사회운동이 아니다(1980년대 운동과 사고의 많은 것들이 그 안에 나타나지만). 또한 (국제) NGO의 창조물이거나 세계시민사회를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어떤 NGO들이 그 내에서 중요한 무게감을 갖고 있고 세계사회포럼이 형태에 있어 급진민주적 지구공동사회의 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세계화된 네트워크 자본주의 시대에서 첫 번째 주요 급진민주 운동이다(급진적이지만 비민주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종교적이고 일국공동체적인 다양한 근본주의들을 생각해 보라). 신자유주의로 알려진 패권적인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항하고 이를 넘어서는 대응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급진민주 운동이다. 그 프로젝트의 근원을 찾으려하고 계속 대안을 제안하는 한 그것은 급진적으로 민주적이다. 또한 제국주의 세계패권에 의한 영구전쟁을 따라 현재 촉진되고 있는 저강도 민주주의+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한 없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므로 그것은 급진적으로 민주적이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기도 한데, 중심적으로 정치·경제적 이슈를 제기하고 그것을 억압받는 사람들 또는 대표되지 못하는 정체성과 소수자(이들은 여성과 남반구처럼 때때로 다수가 된다)들의 요구와 연결시킨다. 문화간의 대화를 나타내고 다른 인식론에 개방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역시 그러하다(수사 산토스 2003). 결국 이는 현 시대의 운동인데 왜냐하면 네트워크화하고 소통적이고 분화적이어서, 지속되는 과거의 일국적 산업 (반)식민주의 자본주의 뿐 아니라 펼쳐지는 미래의 세계화된 네트워크 자본주의 속에 있으면서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9)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도전은 점차 새로운 운동의 낡은 제도에 대한 외부적 도전이라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운동의 스스로(노동자운동이 그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로도 보여져야 한다. 여기서 논점은 노동운동과 다른 사회운동(그리고 NGO들)에 대한 낡은 이해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도전이고 따라서 전통적 노동운동과 노동연구 패러다임에 수반된 사회운동 노조주의 이해에 대한 도전이다. 새로운 이해는 수사 산토스(2003)에 의해 다시 한번 잘 표현되었다.
세계사회포럼의 목적을 심화시키는 것은 고도로 강렬한 집합(aggregation)과 접합(articulation)을 요구한다. 그러한 과정은 광범위하고 일관된 대안을 촉진하는 것뿐만 아니라 투쟁과 저항을 접합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한 접합은 스스로의 정체성과 자율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각기 다른 사회운동들과 NGO들의 결합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생태주의, 평화주의, 원주민, 페미니즘, 노동자, 여타 운동들과 협력하는 대항권력적(counter-hegemonic) 실천과 지식을 촉진하려는 것이라면, 이러한 아이디어가 수평적으로 그리고 모든 운동의 정체성을 존중하여 이에 착수하려는 것이라면,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호간에 인식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핵심은 모든 운동이나 NGO, 모든 실천 혹은 전략, 모든 담론이나 지식에 있어 그것을 침투성 있게 만들어 다른 NGO들(그리고 운동?), 실천, 전략, 담론, 지식에 스며들게 할 수 있는 접촉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실천을 하는 것은 대항권력 운동의 다양성에 공통적인 것을 확인하고 그것에 힘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분열을 없애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목적은 요새의 차이(fortress-difference)를 주체의 차이(host-difference)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례는] 원주민운동과 생태주의운동,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운동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성공은 요구조건에 달려있다. 그렇지만 노력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대항권력적 세계화의 미래에 달려있다.
새로운 국제 사회적 노조주의가 내포하는 것은 상호침투적 이해, 이해와 실천의 변모, 운동과 운동기관 사이의 상호 개방, 정당의 자기변모와 그로 인한 상호 개입이다.
3.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 3차 세계사회포럼, 사회운동노조주의 등
나는 여기서 하나의 장소/공간/사건/양상만 언급할 것이다. 그것은 2003년 1월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3차 세계사회포럼에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들이 참가한 것을 말한다. 세계사회포럼은 물론 전체가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은 아니다. 그렇다면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들은 전체적으로 국제 노조운동은 아니며 국제 노동운동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와 세계사회포럼의 변증법은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보다 일반적으로 숙고하기 위한 심화된 근거를 제공한다.10)
3차 세계사회포럼은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들과 세계사회포럼과의 관계를 보다 심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1) 이미 포럼의 국제위원회(IC)에는 약 12개의 국제적/일국적 노조들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반신자유주의지만 반자본주의는 아니고 다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인해 상당한 위기를 겪고 있다. 그들이 국제위원회에서 하나의 블록으로서 활동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는 없다. 한 두 노조의 예외를 제외하고 그들의 일차적인 관심은 세계사회포럼이 어떤 이국적인 동물, 혹은 동물원인지 알아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주요 전통적 운동기관이 포럼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최초로 국제자유노련(ICFTU)의 사무총장이 참석한 것에서 증명되었다. 그러나 국제산별노련(Global Union Federation)[국제금속노련 등 산업별 연맹들을 말한다. 이들 단위가 국제자유노련에 가입해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행보를 보여왔다고 한다-역주]의 고위 간부들도 역시 참석했는데, 연단에서 활약하거나 조용히 분위기 파악을 했다. 또한 국제자유노련 계열(현재 세계적 노조로 공식화된)을 넘어 국제적/일국적 노조조직/네트워크 역시 참여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급진적 노조네트워크를 비롯해 필리핀의 독립적인 좌파 노조연맹과 인도에서 온 두 명의 광산노동자 활동가, 그리고 의심할 나위 없이 수백 명의 운동지향적인 다른 나라들의 노조활동가들 역시 참여했다. 심지어 가장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운동에 대한 개방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계사회포럼에서 첫 번째 대규모 노조행사는 토론하는 제스처만 취하는 형식적 패널토의(여기서 상투적인 포럼 방식의 문제가 재생산된다)이었지만, 노조/사회운동의 관계에 관한 가장 주요한 패널토의는 국제적 노조들, 독립적 좌파노조들, 연관된 사회운동의 인사들 혹은 사회포럼 프로세스와 과도하게 동일시되는 NGO들 사이에 공통의 기반을 확인했다. 더욱이 그 노조들은 그들이 제도이고, [세계사회포럼의] 장소, 프로세스와 화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이라는 것을 점점 인식할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한 장소와 프로세스는 비록 형식적 대표성이 부족하고 종종 불완전하지만 그들이 심각하게 결핍하고 있고 긴급히 필요로 하는 호소력, 역동성, 대중적 영향력, 동원능력을 갖고 있다.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들의 형식적 대표성은 국제적으로 조합원들 대부분의 무관심과 수동성을 숨기고 있다. 그들은 1억 5천 7백만에서 2억에 이르는 조합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과연 몇 명이 스스로가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들에 속한다고 알고 있을까?12)
그러나 어떠한 관계가 여기에서 발전하고 있느냐는 질문이 남는다. 카리스마 있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인 칠레의 베테랑 사회주의자 후안 소마비아가 후원한 첫 번째 노조의 행사에서 나는 (1)노조들 (2)세계사회포럼 (3)진보적인 국가/인사들 사이에 일종의 이해 혹은 협력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후자는 여기서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칭송받는 PT(브라질노동자당) 정부와 룰라 대통령에 의해 명백하게 표현된다. 방금 브라질에서 룰라를 공식적으로 만나고 돌아온 소마비아는 룰라의 선거 슬로건인 ‘괜찮은 브라질을 위하여’와 ILO의 새로운 프로그램/슬로건인 ‘괜찮은 일자리’를 명시적으로 비교했다(양쪽의 사례에서 '괜찮은'(decent)이란 단어는 명백히 안좋은 것과의 대결을 회피하거나 혹은 확인하면서도, 좀더 나은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들이 '괜찮은 노동'을-완전히-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한에 있어 여기서 확실하게 제안된 것은 국제적 새케인즈주의인데, 그 속에서 노조들과 그들의 ILO/세계사회포럼 협력자들은 2차대전 이후의 사회적 파트너쉽 모델(혹은 이데올로기)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적 규모로 그리고 친한 정부의 도움으로 말이다!13) 내가 생각하기에 그 모델은 많은 면에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가장 주요한 것은 세계사회포럼이나 더 일반적인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역할이 자본의 세계화를 ‘괜찮은’ 것으로 만들 목적의 프로젝트에 기반을 제공하는 것으로 한정될 것인가, 혹은 그 운동이 더 이상적(자본주의 이후)임과 동시에 또-주어진 현재 조건에서-더 현실적인(임노동을 윤리적인 문제로 만들고, ‘비노동자’를 임금노동자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유용한 생산', ‘지속 가능한 소비’ 등과 같은 밀접하게 연관된 시민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는) 것이 될 수 있는 노동 프로젝트를 가지게 될 것인가 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노동 이상주의-자본주의의 범위를 벗어난 것과 그 안에 있는 것-의 정치적, 이론적, 윤리적 기반에 관한 토론이 확실히 요구된다.14)
구 제도가 새로운 운동을 만날 때 무엇인가 변한다. 따라서 노동조합 운동은 그것이 존재했던 2세기 동안 주기적으로 변형되어왔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의 변모시기에 누가, 무엇이 그렇게 변할 것인가?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들과 세계사회포럼의 의사결정권자들이 매우 도구적인 이유로 서로를 연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세계사회포럼이 개방적이므로 위기에 처해있는 원칙들이 지속적이고 공개적으로 제기될 것이라는 장담을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국제적인 두 개의 지도부 중 누가 다른 한쪽이 직간접적인 국가 보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까지 말하려 하겠는가?)
그러나 노조운동 관련 패널토의에서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두 개의 주변적인 발표는 내게는 여론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1. 그 사건은 그 자체로 현재의 사회운동에 관한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들의 이해와 지식의 범위와 한계를 보여준다. 국제금속노련(IMWF)의 사무총장인 마르셀리 말렌타치(이민자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 스웨덴인)는 트레버 응과네와 대면했다. 응과네는 남아공의 사회주의자로서 도시와 농촌에 이르는 최근의 저항의 흐름 속에서 가장 저명하고 논리정연한 지도자인데 당국에 의해 가혹하게 탄압 받는다. 이와 관련하여 코사투는 관계를 매우 조심스러워한다. 응과네의 발표에 대한 말렌타치의 반응은 스웨덴 노동조합이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오랜 연대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이었고, 지금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국제금속노련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실려있다.
[A] 청중 가운데 누군가는 노동조합이 ‘내부로부터’ 점차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있으며, 생산직 노동자가 적어지고 비생산직 노동자, 비정형 노동자-파트타임노동, 혹은 비공식 부문-가 일반적이 됨에 따라 사회변화에 스스로를 더욱더 연관시킨다고 주장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찬성을 얻었다. 그는 이 현상을 ‘새로운 사회적 노조주의’라 불렀다(국제금속노련 2003a).
여기서 순서대로 몇 가지 언급해보자. (1)그것은 누군가가 아니라 워터맨(필자)이었다. (2)이것은 내가 기억하는 한 워터맨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선택해서 표현한 것이다. (3)그것은 말렌타치에 의해 코사투를 방어할 목적으로 그리고 응과네(내가 그 패널에서 전술을 토론했던 동지)에 반대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사건은 정신분열증은 아닐지라도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들의 모호한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나 당/국가/조직과의 동일시가 전통적인 노동자 국제(민족)주의를 표현(남아공에 대한 언론보도를 따르는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하는 한, 새로운 사회적 노조주의(NSU)를 향한 적극적인 태도는 운동을 나타내는 것이다...설사 그것이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ISMU)로 여전히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2. 패널논의의 끝 무렵에 내가 10여 년 혹은 그보다 더 이전에 국제적 노동교류와 필리핀 좌파노조에 대해 연구할 때 친구가 되었던 노조 친구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지금은 좌파 진보노동동맹(APL)의 지도자인 그가 내 팔을 움켜쥐며 그의 조직에 공헌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 손에 ‘사회운동 노조주의 저지!’라는 제목의 노동조합 소책자를 쥐어주었다. 그러나 그 제목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94페이지 중 15페이지에 걸쳐 정의되어 있는데, 참고문헌은 없고 대개 킴 무디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는 각기 다른 투쟁의 영역에 개입하기 위해 모든 유형의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인식하고, 조직하고, 동원하는 것을 지향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비단 ‘노동조합' 조직화에 제한되지 않고, 노동자와 사용자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거나 명확치 않은 곳에서의 새로운 노동배치에 대응하도록 정확하게 개발되어왔다... 그것은 모든 양상-경제적, 정치적, 사회문화적-과 모든 수준-지역적, 국가적, 세계적-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맞춰졌다. (진보적 노동동맹/노동교육과 연구네트워크 2001:74)
몇 가지 지적해보자. 첫째, APL은 KMU의 당-노조주의를 능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좌파 노동조합의 활동을 표현한다. KMU는 1980년대와 90년대 필리핀 좌파 노동조합의 주류 조직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공산당(마오주의)에 대한 종속에 주로 기인하여, 마르코스 독재의 몰락에 따라 분열과 쇠퇴를 거듭하였다. 둘째, 그 책자는 과거 KMU에 대한 사회운동 노조주의 적용과 동일시(램버트 1990, 스키페스 1992)로부터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회복시켰다. 셋째로 내가 보기에 APL의 사회운동 노조주의 개념사용이 개념을 둘러싼 국제적 토론에 적어도 잠재적으로 APL을 끌어들이는 것 같다. (여기서 잠재성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관한 인터넷 토론 목록을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약하고 결론을 내려보자.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들이 세계사회포럼에 점점 더 참석한다면, 나아가 그들이 보다 광범위한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에 점점 더 참여한다면, 양자 대립적 의미에서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과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점차 어려워질 것이다.
오래된 노동조합들은 새로운 운동의 내외부에 있다. 더욱이 이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운동은 오래된 국제 노조기구의 외부뿐만 아니라 점점 내부에 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논쟁, 토론, 대화는 좌파와 우파,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과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 사이의 양자 대립적인 의미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제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 내에서의 대화와 변증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그럼에도 좌파 노동조합들, 더 광범위한 노동운동, 그리고 노동운동 전문가들 사이, 그리고 그들 내의 대화와 변증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사회포럼이나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에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후자를 무시하는 노동조합과 네트워크들이 지방적으로, 일국적으로, 지역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점점 더 스스로를 주변화시키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일찍이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판본으로서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노동조합과 운동, 그리고 전통적인 노동담론에 대해 가지는 친밀성 때문에 더 영향력 있다고 말했다. 나에게 있어 이것은 전진하기 위한 소중한 한 걸음이며 시작이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세계사회포럼의 정신에 보다 밀접하다고 주장해왔다-따라서 더 긴 호흡을 가지게 될까? 그리고 설사 내가 일반적으로 사회운동 노조주의, 특히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를 계속 지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운동을 지속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노동과 국제적 해방에 대한 현재 담론이 사회운동 노조주의로 한정되고 있다거나 사회운동 노조주의로 한정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운동 내에는 경청할 수 있고 경청해야 하는 다른 담론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자. PSSP
(이후 목차)
4. 다른 유토피아로 가는 다른 길
마르크스/마르크스주의로 돌아가자는 것(또는 무언가 나쁜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르크스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마르크스로부터 전진하자는 것(또는 민족-산업적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환경주의(또는 환경주의가 우선은 아니지만 해방이론과 실천은 여기에서도 성장한다는 것)
결론 : 토론을 전진시키기 위해 적합한 광장
부록 1 - 새로운 사회적 노조주의, 국제주의, 소통과 문화
새로운 노동자 국제주의
국제주의, 노동자 국제주의, 노조 국제주의
네트워킹, 소통, 문화
1) 이 글은 국제적 노동네트워킹에 관해 리즈 워킹그룹이 조직하고 리즈 메트로폴리탄 대학이 주최하여 2003년 5월 2-3일 리즈에서 개최된 워크샵 “네트워크 사회에서 세계적 노조주의 : ‘새로운 노동의 국제주의’는 무엇이 새로운가”에 제출된 것을 수정한 것이다.
2) 램버트의 가장 최근작(2003 b,c)는 너무 늦게 도착하여 논평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확실히 관련 있으며 앞으로 긴 토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3) 이 네트워크가 ‘초국적 정보교류(Transnationals Information Exchange, TIE)’다. TIE는 1980대에 현장 노동자 국제주의를 현저하게 촉진시켰고 그 당시 내용과 형식 양자에 있어 선구적인 출판물을 내기도 했다. 오늘날 TIE 암스테르담 사무실은 이전의 (계급)의식 고양과 활동 조직화와 같은 것을 포기하고 자기 활동을 프로젝트 작업, 기금 마련에 활동을 한정한다. 그러나 TIE는 북미에도 사무실과 활동이 있고(킴 무디가 오랫동안 일했던 그 빌딩), 동남아시아와 그 외 지역에도 있다. SIGTUR(아래를 보라)처럼 TIE도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는 것을 볼 수 없다. 어쨌든 훌륭한 웹사이트도 있다(http://www.tieasia.org). 이 두 네트워크가 서로 명백히 모르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4) 더욱이 그것은 사회적으로 수행된 연구 저작에서 명백히 출현하고 있고 그 회수는 증가하고 있다. 비얀윌라(Biyanwila)의 박사논문 초안(2003)이 하나의 사례인데, 그것은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장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여기에서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세부적인 논의를 제공할 뿐 아니라 보다 일반적으로 사회운동 이론의 맥락에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위치시킨다. 그리고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논쟁을 일괄하여 다루면서 마리오 노벨리(Mario Novelli)의 박사논문(2003)은 극히 노조 적대적인 조건의 현 콜롬비아에서도 이와 매우 유사한 것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제기한다.
5) SIGTUR는 일국 노조들의 좌파적 네트워크인데 그것은 제도화된 노조의 인터내셔널과, 노조를 점점 끌어당기는(아래를 보라)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 사이의 어딘가쯤에 스스로를 어정쩡하게 놓는다. 그것은 롭 램버트와 에디 웹스터에 의해 정력적이고 반복적으로 옹호되었다. 그들은 때때로 그 네트워크 내의 문제점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새로운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모범적인 표현임을 주장한다. SIGTUR의 한국과 남아공 노조는 세계사회포럼(2001-3년)에 참가했고 적극적이었만 SIGTUR는 그렇지 않았다. 더욱이 램버트와 웹스터가 여러차례 웹사이트를 요구했지만 SIGTUR는 아직까지 웹사이트가 없고 웹상에서 최소한으로만 볼수 있다. 게다가 아래 가리킨 것처럼, 그것의 일국 노조단위 선거구획[일국의 내셔널센터가 한표씩 행사하는 선거체제]은 회원으로 가입되지 않은 노조뿐 아니라 생겨나고 있는 일국적/국제적 비노조 네트워크를 포괄하는데 방해가 된다. 끝으로, 램버트와 웹스터가 그들의 저작에 새로운 개념 기록과 경험적 정보를 덧붙이지만 그들이 어떠한 비교적 전망(다른 새로운 노동네트워크와 관련한)을 제공하는데 실패하고 또한 적어도 그들의 주장에 대한 나의 문제제기를 피하지 못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SIGTUR가 2004년 인도 세계사회포럼에 결국 참석한다해도 그것은 인도의 2개 회원조직에 대해 의존함으로써 다른 국제 네트워크와의 관계에 있어 부득이하게 거북해질 것이다. (2004년 3월 1일에 추가 : 나는 아직 4차 사회포럼에 참가하겠다던 SIGTUR의 약속이 실현된 증거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2004년 4차 사회포럼에 민주노총이 SIGTUR의 이름으로 참여했고, SIGTUR 행사가 개최되었다고 한다-역자]
6) 남아공 노동전문가들 사이의 보수적 이상주의의 현재 모습에 대해서는 하르코트와 우드(2003)을 보라. 각주에서 암시적으로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종국적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그들은 당면해서는 코사투와 아프리카 민족회의 정부 사이의 새로운 코포라티즘적인 사회적 파트너쉽을 선호한다. 이것이 코사투가 여전히 향유하는 사고와 행동의 자율성 포기를 의미하는한, 그리고 기업에 편입되지 않은 압도적 다수의 노동인구로부터 스스로의 고립을 제도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한, 이는 확실히 자포자기이다. 덧붙여, 그들은 또한 스스로 고립된 남아공 ‘극좌파’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다. 이 모든 것은 대략 2000년 이후 남아공에서 분출하는 사회적 항의의 물결에 비춰본다면 다소 낡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그냥 ‘좌파’라고 분명히 불러야 하는 물결인데, 우연히도 연관되어 헐뜯음을 당해온 것이다.
7) 이것은 경솔한 의견이라서 내가 잘아는 사회운동 전문가들을 화내고 불평하게 만든다. 나는 가장 최근의 논문에서 다소 심각하게 그 개념을 취했다(워터만 2001:7장). 그리고 나는 세계화와 사회적 항의의 견지에서 그 문제를 심각하게 재고할 것을 독자들에게 권고했다(에델만 2001).
8) 알렉스 캘리니코스(2003)는 전자이고 후자에 대항하는데, 그는 그 운동을 ‘반자본주의’로 불렀는데 동시에 그의 표현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는 확실히 목적론적인 과정이다. 피할 수 없는 최종조건(젠더에 의해 도전받는 정치 경제적인 그의 사회주의 개념)이라고 인과율을 퇴행적으로 읽으면서, 캘리니코스는 이 용어를 사회주의자가 아니거나 반사회자의자일수 있는 사람(스탈린 때문에? 사민주의 때문에? SWP때문에?)에게 속여서 팔아먹는다. 따라서 그는 (1)이러한 비사회주의자들은 ‘계급의식’을 결핍하고 있고 (2)SWP는 이를 가지고 있다고 시사한다.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이 반자본주의 혹은 탈자본주의 운동, 그리고 심지어 사회주의가 될 수 있는 한, 이것은 (1)집단적 자기교육과 (2)21세기 사회주의의 재발명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인데, 이것들은 왕국으로 가는 열쇠를 이전에 가졌던 사람들에게 별로 빚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9) 그러한 적극적 일반화는 문제제기에 열려있을 뿐 아니라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내 글에서도 질문되어 왔다. 그 일반화는 비판보다는 바램, 전략을 표현한다고 비판받을수 있다-그리고 비판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세계사회포럼과 사회운동 노조주의 개념사이의 상호 적합성과 함께 특수한 변형을 사고한다는, 여기에서의 목적에 기여할 것이다.
10) 이하는 워터만 2003b에서 가져온 것이다.
11) 나는 주요 노조 행사에 모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특히 신(新)-구(舊) 사회운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세션을 놓쳤는데, 거기에 노조들은 참가하였고 노조운동 관계도 토론되었다. 다행히 닉힐 아난드(2003)가 참석했는데 그는 사회운동 이론 논의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세우고 상당히 독창적이고 가치있는 개념적 접근을 발전시킨다.
12) 이는 단순히 수사적 질문이나 손쉬운 어림짐작이 아니다. 그것은 중요한 연구이슈를 제기하는 것이다. 왜 많은 노조지향적이고 국제주의적 NGO, 연구기관, 후원단체들은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지 않았는가? 이를 제기하는 이유는 1970년대와 1980년대와는 달리 내가 아는 그들 대부분이 제도화된 노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을 중단했고 오늘날에는 오히려 그것에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1990년대 NGO 연대의 위기에 관해서는 글로벌익스체인지(GlobalXchange) 2003을 보라). 따라서 그들이 이미 해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질문을 하는가 하는 수사적 의문이 제기된다.
13) 나는 아무래도 ‘괜찮은 노동’이 ‘사회적 조항’을 계승하는 것으로 판명날 것 같다. 15년 동안 조용히 압력받은 이후 그것(괜찮은 노동)은 새천년의 시작에 있어 국제자유노련(ICFTU)와 그 일당의 주요 국제캠페인이 되었다. ‘사회적 조항’은 WTO의 기능 가운데 하나가 노동권을 제거하는 것인데 WTO의 도움으로 노동권을 획득하겠다는 공상적인 생각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공상적인 전략에 의해 촉진되었는데, 그것은 일국적인 기관들과 국가 간 기관들에 조용히 로비하는 것이었다. 결국 사회적 조항은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부상에 의해 단념되고 소멸되었는데 장례식이나 부검조차도 없었다. 이러한 값비싼 재앙에 비추어 국제자유노련을 평가하면서, 리즈 대학 박사과정의 스튜어트 홋킨슨은 적절한 비문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협상테이블에 앉을 자리도 없었고 거리의 신뢰도 받지 못하였다.” 그의 연구는 현재는 빌 조던 경(卿)이 된 국제자유노련 사무총장인 빌 조던이 저명인사를 활용한 선전을 통해 사회적 조항을 판촉했다는 것 또한 보여준다. 영국의 노조 육성가인 조던은 이 캠페인이 세계화에 직면한 북반구 노조들의 필요에 부합할 뿐 아니라 남반구 노조들에도 팔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남반구 노조들은 그것을 회의하거나 반대했고 북반구 노조들의 보호주의 혹은 적어도 온정주의로 의심했다. ‘괜찮은 일자리’는 죽은 부모의 사산아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사이 노동권에 대해 절박하게 요구되는 국제적 운동은 미뤄져 있다(워터만 2001c).
14) 이러한 두가지 이상 사이 어딘가에 내 글에서 부당하게 간과되었지만 토론에 기여하는 또 다른 작업이 아마 발견될 수 있다. 이것은 관련 이슈와 저작을 훌륭하게 종합한 로날도 문크(2002)인데 그는 구 제도와 새로운 운동을 대립시키기보다는 통합시키는 시도를 한다.
(Adventures of Emancipatory Labour Strategy as the New Global Movement Challenges International Unionism)
피터 워터만 (waterman@antenna.nl) | Global Solidarity Dialogue (http://www.antenna.nl/~waterman/)
번역 : 사회진보연대 노동국
[해설 ]
이 글은 ‘세계체제론 저널’ 10호(http://jwsr.ucr.edu/archive/vol10/number1/pdf/jwsr-v10n1-waterman.pdf)에 실려 있는 글을 번역한 것이다. 필자인 피터 워터만은 네덜란드의 사회연구학회(Institute of Social Studies)에서 노동자운동을 해왔고 국내에서도 ‘지구화시대의 전세계 노동자’(문화과학)라는 책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문화과학) 저자인 킴 무디와 더불어 90년대 이래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꾸준히 제기하고 전파하고 심화시켜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직면하여 침체를 겪고 있는 노동자운동의 활로의 하나로서 제기되는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워터만에 따르면 이제 포괄적인 용어가 되었다. 그는 세계사회포럼으로 대표되는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성장에 따라 다시금 ‘새로운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킴 무디의 해석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사회운동 노조주의 해석을 비판하고, 사회운동 노조주의 외에 다른 주장들도 평가하면서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도 노동자운동의 혁신이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고, 그간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그 대안적 지향으로 주장되어온 바, 보다 풍부한 논의를 위해서 이 글을 두차례에 걸쳐서 나눠 싣고자 한다.
서론 : 토론의 배경
1980년대 후반에 네덜란드에서 내 스스로가 처음으로 제안한 사회운동 노조주의(SMU) 개념은 남아공의 롭 램버트2)와 에디 웹스터에 의해 처음 수용되었다. 남아공에서 그것은 상당한 정치적 이론적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계급/민중-지역공동체 이해가 불만족스러워서 나는 계급+새로운 사회운동의 의미에서, 뚜렷한 국제(주의)적 차원으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재)개념화했다. 이는 남아공의 이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민중-지역공동체 이해는 브라질, 필리핀, 미국, 스리랑카, 그리고 국제적 수준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고(졌거나) 적용되었다. 그것은 킴 무디(미국)의 작업에서 가장 유력하게 정식화되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에서... 노조는 정치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적극적으로 선도한다. 노조는 여타 사회운동들과 동맹을 맺지만 선거나 일시적인 연합보다 더 강력한 연대를 만드는 계급적 비전과 내용을 제공한다. 그 내용은 단순히 운동의 요구들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가장 큰 사회적 경제적 수준을 가지는 조합원 대중들을 선도자로서 활성화하는 것이다.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빈민, 실업자, 비정규노동자, 주민조직들과 같이 자기 조직화를 유지하기 힘든 이들을 조직하기 위해 사회의 억압받고 착취 받는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일반적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을 사용하는 적극적인 전략적 지향을 의미한다. (무디 1997 b:276)
무디는 또한 그 용어에 명확한 국제(주의)적 지향을 부여했는데, 그가 제안한 국제주의 모델은 역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초국적 기업 내 산업노동자들을 노동의 전위부대로 간주했고 그들의 (이념을) 전위적 국제주의로 표현했다. 그것은 국제적으로 가진 영향력보다 과도하게 그 자신에게 더 친숙한 특정한 네트워크와 동일시된 것이었다(워터만2000 pp.227-310을 보라).3) 우리는 그러한 과도한 동일시, 또는 과도한 일반화가 사회운동 노조주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보다 일반적인 문제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램버트&웹스터 2003).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토론에서 가장 개념적으로 세련되고 경험적으로 지식이 넓은 공헌은 아마도 칼 폰 홀트(2002)가 했을 것이다. 폰 홀트는 사회운동 노조주의 개념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판한다. (1) 과도한 일반성(over-generality) (2) 노동자 의식과 행동에 대한 역사적/공동체적 결정요인 인식 실패 (3) 그가 비판하는 저자들 생각에서 작업장과 국가(그리고 암시적으로, 세계)내에 있다고 생각하는 고양된 계급의식을 앞서의 요인들이 어떻게 방해하거나 혹은 적어도 중대하게 제한하는지에 대한 인식 실패. 그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노조 전략의 이전성(transferability)’에 대해 회의론을 표현하며 노조주의의 제도적 양상과 운동적 양상의 관계에 보다 집중할 것을 제안한다(나라별? 작업장별?).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결함과 비약에 대한 폰 홀트의 확인은 중요하고 역사와 공동체, 제도/운동의 긴장 고려에 대한 그의 강조는 가치있다. 그러나 그의 비판이 무디와 워터만에게 똑같이 적용되든 그렇지 않든, 나는 질문을 제기하고 싶다. 그의 논의가 계급/사회운동적 해석이라기보다 계급/민중-지역공동체 해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사회운동 이론(그러나 이상하게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적 다양성 이론만)을 지향하는 제스처를 보이지만, 새로운 운동을 일반적으로 ‘비계급적’으로 이해한다. 이것들을 적극적이고 자율적으로-그리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정치적 등가물로서-간주하는데 실패한 것은 그의 결론의 설득력과 범위를 제한한다.
이 논의는 세계화가 무디와 워터만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화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위한 조건을 생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내포한다... 국가적 현실이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여기에서 폰 홀트는 일반적 (보편적, 지구적) 이론을 생산하는 사회적 이론가와 일반적 (국제(주의)적, 해방적) 전략을 발전시키는 사회주의자의 포부 양자를 포기하는 것 같다. 더욱이 내가 나중에 논의하겠지만, 그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Global Justice and Solidarity Movement) 내외에서 약하지만 중요하게 존재하고 있다.4)
2001년도에 나는 어떠한 사례에서도 사회운동 노조주의 개념을 계급/민중 해석에 양보했는데, 그렇지만 나의 본래적인 이해를 ‘새로운 사회적 노조주의’로 심화시키려 했고 네트워킹과 소통의 역할과 문화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으로써 그것을 확장하려 시도했다.
지금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지속적인 충격이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제3세계 표본이라고 생각되는 곳에서조차 방향을 혼란케 하는 효과를 낳으면서(폰 홀트의 비관주의를 설명하는 것?), 동시에 국제적 노동조합은 점점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와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개념 사용과 토론은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1999년 시애틀에 의해 상징화된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발전과 특히 2001년 이후 세계사회포럼(WSF) 프로세스는 그 문제를 노조의 의제로 올려놓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계급/민중-지역공동체 동맹의 문제인가 혹은 계급/새로운 사회운동 동맹의 문제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또는 그 밖의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은 발전을 위해 여전히 유용한 개념인가?
용어법과 적용범위에 대한 몇 가지 최종 설명은 다음과 같다.
* SMU (Social Movement Unionism) = 사회운동 노조주의, 현재 진행 중인 논의나 토론을 위한 포괄적인 용어
* ISMU (International Social Movement Unionism) =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 계급/민중 해석 또는 킴 무디식 해석
* NISU (New International Social Unionism) =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 계급/새로운 사회운동 해석이자 내 자신의 해석
논의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부에서는 개념의 궤적을 둘러싼 역설과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두 가지 경향을 다룬다. 2부에서는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으로 대표되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기회와 그에 대한 도전을 다룬다. 3부에서는 2003년 세계사회포럼으로부터 사회운동 노조주의와 관련된 증거를 제시한다. 4부에서는 개념에 비판적이거나 논쟁 외부에 있으나, 여전히 국제 노동운동의 해방적 대안에 기여하는 관련 글들을 살펴본다. 결론은 노동과 국제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방적 이해가 발전하게 될 곳은 새로운 운동의 궤도 안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1. 역설, 역설, 가장 독창적인 역설
일반적으로 ‘새로운 사회운동’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그 이론을 발전시킨 사람으로 여겨지는 알베르토 멜루치(Alberto Melucci)는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기를 바랄 만큼 그 개념의 (잘못된) 사용에 대해 불만스러워했다. 나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해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 노동운동 전문가들과 노조 지도자들이 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기쁘지만(아래를 보라), 그것이 이해되거나 적용되는 방식은 불편하다. 수 년간 다양하게 노력하고 내 글을 친절하게 참조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 노조주의 개념 사용자들은 공통적으로 이를 오해하거나 잘못 적용해왔다. 뒤에 나올 국제금속노련(IMWF)의 인용문이 드러내듯이 노동자주의적 이해로부터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조차 구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역설을 살펴보자.
오해
나의 공식은 명확했고 단순하거나 도식적이기까지 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회주의 노조이론과 ‘새로운 사회운동’(NSM)이론의 종합이었고 후자가 1980년대에 형성됨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 나는 급진 사회학자들과 소통 전문가들로부터 끌어온 정보화에 대한 이론을 덧붙였다. 사회주의 노조이론으로부터 나는 자본주의적 노동, 계급모순, 노동자의 자기조직화, 현존하는 자본주의 관계 타도와 국제적 연대 및 인간의 자기해방으로서의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취하였다. 새로운 사회운동 이론으로부터 나는 급진민주적 정체성 운동, 각기 다른 급진 민주주의 투쟁의 등가성, 운동 형태로서의 네트워크, 해방투쟁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사회-문화적 영역의 중요성을 취하였다. 급진적 소통이론으로부터 나는 해방운동을 위한 정보와 통신기술의 잠재력에 대한 아이디어를 취하였다. 이러한 국제주의는 탈민족주의적인 것인데 이는 결국 내가 ‘새로운 지구적 연대’라고 개념화한 것이다. 이는 명확하게 사회주의 노조이론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킴 무디가 그러한 것처럼 그 진영에서는 그동안 사회운동-그리고 진보하는 국제주의-가운데에서 노동계급의 전위적 역할을 제시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종종 계급을 무시하는 새로운 사회운동 이론가들에게 사회적 해방에 있어 노동과 노조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러나 사회운동 노조주의 개념을 사용해온 이들 대부분은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이론 진영 또는 실천의 두 복합체 사이의 표현방법으로 그것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계급내의 동맹(임금노동자/비임금노동자)과(이거나) 계급과 민중/지역공동체(노동자/민중, 노동/민족주의자)의 동맹의 표현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앞서 얘기했듯이 노동자/노동조합을 대중운동 혹은 해방운동의 전위로 이해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적용사례는 민족국가(국가로 정의된 민족)로 향한 것이거나 그것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이는 종종 새로운 국제주의를 우선적으로 일국적 사회운동 노조주의간의 국제주의로 간주했다(예를 들어 남아공, 남한, 브라질, 필리핀 노조의 내셔널센터 사이의 국제주의).
이것은 전진된 이해였지만 급진적 이해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동안 레닌주의, 사민주의 혹은 자유주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암시적 혹은 명백한 비판인 한에서, 그리고 노동운동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로 나아가는 한에서 전진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노조주의의 위기의 근원까지 나아가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급진적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러한 근원은 제국주의적이든 반제국주의적이든 민족적-산업자본주의(national-industrializing capitalism, NIC)가 세계화되고 네트워크화된 자본주의(globalised networked capitalism, GNC)로 변모한 것에 있다. 그 속에서 생산과 서비스, 임노동과 노동계급은 가장 대규모의 해체와 재건을 겪고 있고, 노조는 규모가 축소되고 정치적으로 주변화되고 있다. 더욱이 그러한 이해는 해방이론과 실천에서 일국적, 국제적 새로운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급진적이지 않다. 따라서 예를 들어 여성들의 투쟁을 인식하는 곳에서 이는 보편적인 여성들의 투쟁이나 페미니즘이 아니라 관례적으로 ‘여성노동자’로 인식되었다. 결국 위기는 근본적으로 노조형태에 존재한다. 노조는 자본주의와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이 공히 네트워크 형태를 취하는 시대에 여전히 일차적으로 조직적/제도적이다. 즉, 이를 이론적으로 말하면 일국적/국제적 노동운동을 네트워킹적/소통적인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커지는 이 때에 여전히 조직적/제도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여기에서 문제는 대부분의 관련 저자들이 다음과 같은 것들 가운데 하나나 그 이상에 과도하게 집착해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임금 노동자계급, 노조형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이론이다. 실제로 이는 민족적-산업적 (특히 포드주의) 노동자계급, 노조형태, 이데올로기/이론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내가 다른 곳에서(워터만 2001b) 주장했듯이 이는 해방적인 노동자 국제주의를 발전시키기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잘못된 적용
나의 최초의 개념화는 이론적 종합이었으나 동시에 1980-90년대의 사회적 투쟁과 국제주의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경험의 일반화와 그것의 투영이었다. 또한 그것은 현존하는 노조주의와 조합이론을 비판하려는 의도였다. 그것은 존재하는 조합의 경험에 대한 서술과 정당화를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도 없고 훌륭한 장소/과정이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이상적인 것이었다(패니치&리에스 2000).
최초에는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것으로 이해되도록 하려했다. 세계화 시대에 보다 특별한 용어법으로, 그것은 관련성에 있어 지구적이고 더 심화된 지구적 연대가 되도록 할 의도였다. 최종적으로 그것은 이론적 토론과 발전을 유발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동시에 서술적인 동시에 확실한 것-찬양하는 것은 아닐지라도-으로 사용되었다. 아래 인용은 캐리커쳐일지 모르지만, 캐리커쳐가 그러하듯이 진부한 표현이 담을 수 없는 무언가를 나타낼 수도 있다.
ABCD 노총은 사회운동 노조이고 훌륭하다. 다른 노조들도 부디 따르라.
이는 남아공, 브라질, 필리핀에서 새로운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노조들에서 1980-90년대에 그렇게 사용되었다. 그것이 보다 국제적으로, 비판적으로 혹은 미래학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이는 여전히 노동/민중-지역공동체 형태 속에 있었고 포드주의 노동계급과 좌파, 사회주의자, 심지어 공산주의 노조와 이에 관련된 정당에 의해 명확히 표현된 전위와 함께였다. 어떤 노조가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사례로 여겨지는 한 이와 같은 견지에서 그 개념은 비판적인 기능을 박탈당한 것이었다. 전략적이거나 미래학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여전히 민족적-산업적 노조기구의 개념으로 사용된 곳에서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시기에 노동자 스스로를 연계시키는 형태를 극복할 수 없게 되었다. 특정한 장소(‘남반구’) 혹은 특정한 시기(권위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권력에 대항한 투쟁시기)에만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그것은 보편성(내가 언급한, 해방적 이론이나 전략의 열망)을 박탈당했다.
결국, 가장 활기차게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촉진하고 가장 밀접하게 노조와 활동했던 이들이 그 개념을 ‘민주적’, ‘현장’, ‘비정당’, ‘다른 대중운동과의 동맹’과 같은 가장 일반적인(그리고 개념화되지 않은) 특징과 함께 놓아두면서, 그 개념을 정의하거나 재정의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언급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한계들은 현존하는 일국적/국제적 노조 사이에서 그 개념을 지속하게 하고 심지어 확산시켰다. 그러나 이 한계들은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종말?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특정 노조에 연계시키고 자본주의 발전시기로 그것을 한정하고 또는 제도화된 노조주의를 위해 그것을 좌파적이거나 사회주의적 정책/실천으로 나타냄으로써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자리잡은 한계는 엄중한 것이 되었다. 대표적인 모범으로 제시된 남아공의 코사투(COSATU), 브라질의 구찌(CUT), 필리핀의 5.1절운동(KMU)은 감소하는 조합원들을 위한 전통적인 단체교섭조차 수행하기 어렵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산업관계의 덫에 점점 빠지면서 그들의 사회운동 노조주의 특성을 전부 혹은 많은 부분 잃었다. 남아공의 경우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처음으로 적용되었고 가장 많이 토론되었는데, 거기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노조를 조직적 위기에서 빠져나오게 하기보다는 그들의 자율성과 역동성 쇠퇴-그리고 분출하는 사회운동의 물결에 대한 접합의 지속적인 결핍-를 가져온 모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인다(브램블 2003, 브램블&바치시 2003)! 코사투가 뒷받침하는 ‘세계화와 노조의 권리에 대한 남반구 이니셔티브(Southern Initiative on Globalization and Trade Union Rughts, SIGTUR)’의 사례에서, 이는 SIGTUR가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과 국제 노동운동의 연관에 있어 왜 이끌기보다는 뒤쳐지는지, 왜 중심적이기보다는 주변적인지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5)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특정 시간/장소/사례에 갖다 붙이면 그 개념은 제도적 궤적을 따르게 되고 이는 국가적/지역적 경계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억누르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전통적 좌파 이상주의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베일하르츠 1992). 이는 피할수 없이 ‘보수적 이상주의’가 되는 것이다.
“보수적 이상을 특징짓고 그것을 비판적 이상과 구분하는 것은 보수적 이상이 스스로를 오늘날의 현실과 동일시하고 그 이상적 차원을 현재상태의 급진화나 완전한 이행 속에서 발견한다는 사실이다”(수사 산토스 2003).
이것은 노동자 국제주의에서의 어떠한 시도에서도 발생하는 다소 가혹한 운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보수적 이상의 개념이 소비에트 이상에 대해서처럼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인용문은 내가 급진적이라기보다 점진적인 것으로 취급했던 프로젝트 내의 두 가지 요소를 동일시한다. 첫째, 그들이 그들의 이상을 현존하는 노조주의의 ‘급진화 혹은 완전한 이행’에 갖다 붙이는 것이다. 둘째, 지배적인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을 그들이 서술하고 촉진시키는 노조나 네트워크에 적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판적이지 않다는 것이다.6)
2.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도전
‘반기업적’, ‘반자본주의적’, ‘반세계화’ 운동, 즉 ‘운동들의 운동’은 이러한 다양한 이름들이 말해주듯이 무정형적이거나 정치적 이론적 대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실제로, 그것이 ‘운동’인지 혹은 ‘장(field)’인지 (후자는 내가 생각하기에 짖어대고 물어뜯는 측면이 미흡하다) 질문이 제기되어 왔다. 자유주의 전문가들과 민족적-산업적 사회주의자들은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이 전통적인 운동의 특징을 결여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즉 조직, 지도부, 프로그램, 목표, 이데올로기. 내 느낌은 이렇다. 그것이 운동처럼 보고, 운동처럼 짖어대고, 운동처럼 꼬리를 흔들고, 운동처럼 사람들을 움직인다면 그것은 운동인 것이다.7)
위에 언급한 초창기 각 용어들이 이 무정형적 운동의 상태와 변화 국면을 포착하는 반면,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그 명칭은 2002년 초 2회 세계사회포럼에서 세계사회운동네트워크(WSMN)가 부여한 것이다-은 나에게는 어떤 것 보다 더 특징(그 발전의 현 단계)을 잘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자유주의, 민중주의와 사회주의, 개혁주의와 봉기주의에 대한 불신이 현재적으로 나빠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명칭은 오래된 활동가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제 막 인식하고 활동하는 이들에게도 수용할 만하고,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단지 호소력에 있어서도 ‘해결책은 하나 : 혁명’이라는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구호나 역시 영국의 토니블레어-기든스의 ‘제3의 길’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8)
‘시애틀 전투’와 세계사회포럼은 아마도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가장 잘 알려진 소산일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야기한 그 운동들은 1980년대 제3세계에서 ‘식량 폭동’ 또는 ‘세계은행 소요사태’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네트워크-그리고 네트워크/소통/문화적 조건에 있어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에 대한 이해-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고정된 형태나 경계(제도적 또는 지정학적)가 없고,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한 계속적인 평가를 요구한다. (1)그 장소와 공간들 (2)그 표현형태들 (3)셋 혹은 그 이상의 차원(지방적, 국가적, 지역적, 지구적)에 대한 그 정치적,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충격들 (4)이러한 각각에서 그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와 그 사이의 상호관계들.
이 운동의 제도적 혹은 사회정치적 경계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다양한 시간과 장소에 있는 다양한 세력들의 의미, 무게, 동학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활발하게 개념화되고 평가될 수 있다.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이 무엇이라고 하기보다는 무엇이 아닌지 인식하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 그것은 1968년 운동의 반복이 아니다(이것이 그 뿌리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1980년대의 신사회운동이 아니다(1980년대 운동과 사고의 많은 것들이 그 안에 나타나지만). 또한 (국제) NGO의 창조물이거나 세계시민사회를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어떤 NGO들이 그 내에서 중요한 무게감을 갖고 있고 세계사회포럼이 형태에 있어 급진민주적 지구공동사회의 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세계화된 네트워크 자본주의 시대에서 첫 번째 주요 급진민주 운동이다(급진적이지만 비민주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종교적이고 일국공동체적인 다양한 근본주의들을 생각해 보라). 신자유주의로 알려진 패권적인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항하고 이를 넘어서는 대응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급진민주 운동이다. 그 프로젝트의 근원을 찾으려하고 계속 대안을 제안하는 한 그것은 급진적으로 민주적이다. 또한 제국주의 세계패권에 의한 영구전쟁을 따라 현재 촉진되고 있는 저강도 민주주의+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한 없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므로 그것은 급진적으로 민주적이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기도 한데, 중심적으로 정치·경제적 이슈를 제기하고 그것을 억압받는 사람들 또는 대표되지 못하는 정체성과 소수자(이들은 여성과 남반구처럼 때때로 다수가 된다)들의 요구와 연결시킨다. 문화간의 대화를 나타내고 다른 인식론에 개방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역시 그러하다(수사 산토스 2003). 결국 이는 현 시대의 운동인데 왜냐하면 네트워크화하고 소통적이고 분화적이어서, 지속되는 과거의 일국적 산업 (반)식민주의 자본주의 뿐 아니라 펼쳐지는 미래의 세계화된 네트워크 자본주의 속에 있으면서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9)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도전은 점차 새로운 운동의 낡은 제도에 대한 외부적 도전이라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운동의 스스로(노동자운동이 그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로도 보여져야 한다. 여기서 논점은 노동운동과 다른 사회운동(그리고 NGO들)에 대한 낡은 이해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도전이고 따라서 전통적 노동운동과 노동연구 패러다임에 수반된 사회운동 노조주의 이해에 대한 도전이다. 새로운 이해는 수사 산토스(2003)에 의해 다시 한번 잘 표현되었다.
세계사회포럼의 목적을 심화시키는 것은 고도로 강렬한 집합(aggregation)과 접합(articulation)을 요구한다. 그러한 과정은 광범위하고 일관된 대안을 촉진하는 것뿐만 아니라 투쟁과 저항을 접합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한 접합은 스스로의 정체성과 자율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각기 다른 사회운동들과 NGO들의 결합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생태주의, 평화주의, 원주민, 페미니즘, 노동자, 여타 운동들과 협력하는 대항권력적(counter-hegemonic) 실천과 지식을 촉진하려는 것이라면, 이러한 아이디어가 수평적으로 그리고 모든 운동의 정체성을 존중하여 이에 착수하려는 것이라면,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호간에 인식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핵심은 모든 운동이나 NGO, 모든 실천 혹은 전략, 모든 담론이나 지식에 있어 그것을 침투성 있게 만들어 다른 NGO들(그리고 운동?), 실천, 전략, 담론, 지식에 스며들게 할 수 있는 접촉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실천을 하는 것은 대항권력 운동의 다양성에 공통적인 것을 확인하고 그것에 힘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분열을 없애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목적은 요새의 차이(fortress-difference)를 주체의 차이(host-difference)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례는] 원주민운동과 생태주의운동,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운동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성공은 요구조건에 달려있다. 그렇지만 노력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대항권력적 세계화의 미래에 달려있다.
새로운 국제 사회적 노조주의가 내포하는 것은 상호침투적 이해, 이해와 실천의 변모, 운동과 운동기관 사이의 상호 개방, 정당의 자기변모와 그로 인한 상호 개입이다.
3.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 3차 세계사회포럼, 사회운동노조주의 등
나는 여기서 하나의 장소/공간/사건/양상만 언급할 것이다. 그것은 2003년 1월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3차 세계사회포럼에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들이 참가한 것을 말한다. 세계사회포럼은 물론 전체가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은 아니다. 그렇다면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들은 전체적으로 국제 노조운동은 아니며 국제 노동운동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와 세계사회포럼의 변증법은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보다 일반적으로 숙고하기 위한 심화된 근거를 제공한다.10)
3차 세계사회포럼은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들과 세계사회포럼과의 관계를 보다 심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1) 이미 포럼의 국제위원회(IC)에는 약 12개의 국제적/일국적 노조들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반신자유주의지만 반자본주의는 아니고 다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인해 상당한 위기를 겪고 있다. 그들이 국제위원회에서 하나의 블록으로서 활동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는 없다. 한 두 노조의 예외를 제외하고 그들의 일차적인 관심은 세계사회포럼이 어떤 이국적인 동물, 혹은 동물원인지 알아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주요 전통적 운동기관이 포럼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최초로 국제자유노련(ICFTU)의 사무총장이 참석한 것에서 증명되었다. 그러나 국제산별노련(Global Union Federation)[국제금속노련 등 산업별 연맹들을 말한다. 이들 단위가 국제자유노련에 가입해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행보를 보여왔다고 한다-역주]의 고위 간부들도 역시 참석했는데, 연단에서 활약하거나 조용히 분위기 파악을 했다. 또한 국제자유노련 계열(현재 세계적 노조로 공식화된)을 넘어 국제적/일국적 노조조직/네트워크 역시 참여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급진적 노조네트워크를 비롯해 필리핀의 독립적인 좌파 노조연맹과 인도에서 온 두 명의 광산노동자 활동가, 그리고 의심할 나위 없이 수백 명의 운동지향적인 다른 나라들의 노조활동가들 역시 참여했다. 심지어 가장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운동에 대한 개방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계사회포럼에서 첫 번째 대규모 노조행사는 토론하는 제스처만 취하는 형식적 패널토의(여기서 상투적인 포럼 방식의 문제가 재생산된다)이었지만, 노조/사회운동의 관계에 관한 가장 주요한 패널토의는 국제적 노조들, 독립적 좌파노조들, 연관된 사회운동의 인사들 혹은 사회포럼 프로세스와 과도하게 동일시되는 NGO들 사이에 공통의 기반을 확인했다. 더욱이 그 노조들은 그들이 제도이고, [세계사회포럼의] 장소, 프로세스와 화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이라는 것을 점점 인식할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한 장소와 프로세스는 비록 형식적 대표성이 부족하고 종종 불완전하지만 그들이 심각하게 결핍하고 있고 긴급히 필요로 하는 호소력, 역동성, 대중적 영향력, 동원능력을 갖고 있다.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들의 형식적 대표성은 국제적으로 조합원들 대부분의 무관심과 수동성을 숨기고 있다. 그들은 1억 5천 7백만에서 2억에 이르는 조합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과연 몇 명이 스스로가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들에 속한다고 알고 있을까?12)
그러나 어떠한 관계가 여기에서 발전하고 있느냐는 질문이 남는다. 카리스마 있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인 칠레의 베테랑 사회주의자 후안 소마비아가 후원한 첫 번째 노조의 행사에서 나는 (1)노조들 (2)세계사회포럼 (3)진보적인 국가/인사들 사이에 일종의 이해 혹은 협력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후자는 여기서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칭송받는 PT(브라질노동자당) 정부와 룰라 대통령에 의해 명백하게 표현된다. 방금 브라질에서 룰라를 공식적으로 만나고 돌아온 소마비아는 룰라의 선거 슬로건인 ‘괜찮은 브라질을 위하여’와 ILO의 새로운 프로그램/슬로건인 ‘괜찮은 일자리’를 명시적으로 비교했다(양쪽의 사례에서 '괜찮은'(decent)이란 단어는 명백히 안좋은 것과의 대결을 회피하거나 혹은 확인하면서도, 좀더 나은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들이 '괜찮은 노동'을-완전히-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한에 있어 여기서 확실하게 제안된 것은 국제적 새케인즈주의인데, 그 속에서 노조들과 그들의 ILO/세계사회포럼 협력자들은 2차대전 이후의 사회적 파트너쉽 모델(혹은 이데올로기)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적 규모로 그리고 친한 정부의 도움으로 말이다!13) 내가 생각하기에 그 모델은 많은 면에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가장 주요한 것은 세계사회포럼이나 더 일반적인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역할이 자본의 세계화를 ‘괜찮은’ 것으로 만들 목적의 프로젝트에 기반을 제공하는 것으로 한정될 것인가, 혹은 그 운동이 더 이상적(자본주의 이후)임과 동시에 또-주어진 현재 조건에서-더 현실적인(임노동을 윤리적인 문제로 만들고, ‘비노동자’를 임금노동자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유용한 생산', ‘지속 가능한 소비’ 등과 같은 밀접하게 연관된 시민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는) 것이 될 수 있는 노동 프로젝트를 가지게 될 것인가 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노동 이상주의-자본주의의 범위를 벗어난 것과 그 안에 있는 것-의 정치적, 이론적, 윤리적 기반에 관한 토론이 확실히 요구된다.14)
구 제도가 새로운 운동을 만날 때 무엇인가 변한다. 따라서 노동조합 운동은 그것이 존재했던 2세기 동안 주기적으로 변형되어왔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의 변모시기에 누가, 무엇이 그렇게 변할 것인가?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들과 세계사회포럼의 의사결정권자들이 매우 도구적인 이유로 서로를 연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세계사회포럼이 개방적이므로 위기에 처해있는 원칙들이 지속적이고 공개적으로 제기될 것이라는 장담을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국제적인 두 개의 지도부 중 누가 다른 한쪽이 직간접적인 국가 보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까지 말하려 하겠는가?)
그러나 노조운동 관련 패널토의에서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두 개의 주변적인 발표는 내게는 여론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1. 그 사건은 그 자체로 현재의 사회운동에 관한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들의 이해와 지식의 범위와 한계를 보여준다. 국제금속노련(IMWF)의 사무총장인 마르셀리 말렌타치(이민자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 스웨덴인)는 트레버 응과네와 대면했다. 응과네는 남아공의 사회주의자로서 도시와 농촌에 이르는 최근의 저항의 흐름 속에서 가장 저명하고 논리정연한 지도자인데 당국에 의해 가혹하게 탄압 받는다. 이와 관련하여 코사투는 관계를 매우 조심스러워한다. 응과네의 발표에 대한 말렌타치의 반응은 스웨덴 노동조합이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오랜 연대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이었고, 지금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국제금속노련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실려있다.
[A] 청중 가운데 누군가는 노동조합이 ‘내부로부터’ 점차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있으며, 생산직 노동자가 적어지고 비생산직 노동자, 비정형 노동자-파트타임노동, 혹은 비공식 부문-가 일반적이 됨에 따라 사회변화에 스스로를 더욱더 연관시킨다고 주장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찬성을 얻었다. 그는 이 현상을 ‘새로운 사회적 노조주의’라 불렀다(국제금속노련 2003a).
여기서 순서대로 몇 가지 언급해보자. (1)그것은 누군가가 아니라 워터맨(필자)이었다. (2)이것은 내가 기억하는 한 워터맨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선택해서 표현한 것이다. (3)그것은 말렌타치에 의해 코사투를 방어할 목적으로 그리고 응과네(내가 그 패널에서 전술을 토론했던 동지)에 반대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사건은 정신분열증은 아닐지라도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들의 모호한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나 당/국가/조직과의 동일시가 전통적인 노동자 국제(민족)주의를 표현(남아공에 대한 언론보도를 따르는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하는 한, 새로운 사회적 노조주의(NSU)를 향한 적극적인 태도는 운동을 나타내는 것이다...설사 그것이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ISMU)로 여전히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2. 패널논의의 끝 무렵에 내가 10여 년 혹은 그보다 더 이전에 국제적 노동교류와 필리핀 좌파노조에 대해 연구할 때 친구가 되었던 노조 친구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지금은 좌파 진보노동동맹(APL)의 지도자인 그가 내 팔을 움켜쥐며 그의 조직에 공헌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 손에 ‘사회운동 노조주의 저지!’라는 제목의 노동조합 소책자를 쥐어주었다. 그러나 그 제목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94페이지 중 15페이지에 걸쳐 정의되어 있는데, 참고문헌은 없고 대개 킴 무디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는 각기 다른 투쟁의 영역에 개입하기 위해 모든 유형의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인식하고, 조직하고, 동원하는 것을 지향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비단 ‘노동조합' 조직화에 제한되지 않고, 노동자와 사용자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거나 명확치 않은 곳에서의 새로운 노동배치에 대응하도록 정확하게 개발되어왔다... 그것은 모든 양상-경제적, 정치적, 사회문화적-과 모든 수준-지역적, 국가적, 세계적-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 맞춰졌다. (진보적 노동동맹/노동교육과 연구네트워크 2001:74)
몇 가지 지적해보자. 첫째, APL은 KMU의 당-노조주의를 능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좌파 노동조합의 활동을 표현한다. KMU는 1980년대와 90년대 필리핀 좌파 노동조합의 주류 조직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공산당(마오주의)에 대한 종속에 주로 기인하여, 마르코스 독재의 몰락에 따라 분열과 쇠퇴를 거듭하였다. 둘째, 그 책자는 과거 KMU에 대한 사회운동 노조주의 적용과 동일시(램버트 1990, 스키페스 1992)로부터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회복시켰다. 셋째로 내가 보기에 APL의 사회운동 노조주의 개념사용이 개념을 둘러싼 국제적 토론에 적어도 잠재적으로 APL을 끌어들이는 것 같다. (여기서 잠재성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관한 인터넷 토론 목록을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약하고 결론을 내려보자.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들이 세계사회포럼에 점점 더 참석한다면, 나아가 그들이 보다 광범위한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에 점점 더 참여한다면, 양자 대립적 의미에서 전통적 국제 노조기관과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점차 어려워질 것이다.
오래된 노동조합들은 새로운 운동의 내외부에 있다. 더욱이 이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운동은 오래된 국제 노조기구의 외부뿐만 아니라 점점 내부에 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논쟁, 토론, 대화는 좌파와 우파,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과 전통적 국제 노조기구 사이의 양자 대립적인 의미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제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 내에서의 대화와 변증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그럼에도 좌파 노동조합들, 더 광범위한 노동운동, 그리고 노동운동 전문가들 사이, 그리고 그들 내의 대화와 변증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사회포럼이나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에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후자를 무시하는 노동조합과 네트워크들이 지방적으로, 일국적으로, 지역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점점 더 스스로를 주변화시키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일찍이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판본으로서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노동조합과 운동, 그리고 전통적인 노동담론에 대해 가지는 친밀성 때문에 더 영향력 있다고 말했다. 나에게 있어 이것은 전진하기 위한 소중한 한 걸음이며 시작이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세계사회포럼의 정신에 보다 밀접하다고 주장해왔다-따라서 더 긴 호흡을 가지게 될까? 그리고 설사 내가 일반적으로 사회운동 노조주의, 특히 새로운 국제적 사회적 노조주의를 계속 지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운동을 지속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노동과 국제적 해방에 대한 현재 담론이 사회운동 노조주의로 한정되고 있다거나 사회운동 노조주의로 한정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운동 내에는 경청할 수 있고 경청해야 하는 다른 담론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자. PSSP
(이후 목차)
4. 다른 유토피아로 가는 다른 길
마르크스/마르크스주의로 돌아가자는 것(또는 무언가 나쁜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르크스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마르크스로부터 전진하자는 것(또는 민족-산업적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환경주의(또는 환경주의가 우선은 아니지만 해방이론과 실천은 여기에서도 성장한다는 것)
결론 : 토론을 전진시키기 위해 적합한 광장
부록 1 - 새로운 사회적 노조주의, 국제주의, 소통과 문화
새로운 노동자 국제주의
국제주의, 노동자 국제주의, 노조 국제주의
네트워킹, 소통, 문화
1) 이 글은 국제적 노동네트워킹에 관해 리즈 워킹그룹이 조직하고 리즈 메트로폴리탄 대학이 주최하여 2003년 5월 2-3일 리즈에서 개최된 워크샵 “네트워크 사회에서 세계적 노조주의 : ‘새로운 노동의 국제주의’는 무엇이 새로운가”에 제출된 것을 수정한 것이다.
2) 램버트의 가장 최근작(2003 b,c)는 너무 늦게 도착하여 논평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확실히 관련 있으며 앞으로 긴 토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3) 이 네트워크가 ‘초국적 정보교류(Transnationals Information Exchange, TIE)’다. TIE는 1980대에 현장 노동자 국제주의를 현저하게 촉진시켰고 그 당시 내용과 형식 양자에 있어 선구적인 출판물을 내기도 했다. 오늘날 TIE 암스테르담 사무실은 이전의 (계급)의식 고양과 활동 조직화와 같은 것을 포기하고 자기 활동을 프로젝트 작업, 기금 마련에 활동을 한정한다. 그러나 TIE는 북미에도 사무실과 활동이 있고(킴 무디가 오랫동안 일했던 그 빌딩), 동남아시아와 그 외 지역에도 있다. SIGTUR(아래를 보라)처럼 TIE도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는 것을 볼 수 없다. 어쨌든 훌륭한 웹사이트도 있다(http://www.tieasia.org). 이 두 네트워크가 서로 명백히 모르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4) 더욱이 그것은 사회적으로 수행된 연구 저작에서 명백히 출현하고 있고 그 회수는 증가하고 있다. 비얀윌라(Biyanwila)의 박사논문 초안(2003)이 하나의 사례인데, 그것은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장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여기에서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세부적인 논의를 제공할 뿐 아니라 보다 일반적으로 사회운동 이론의 맥락에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위치시킨다. 그리고 사회운동 노조주의에 대한 논쟁을 일괄하여 다루면서 마리오 노벨리(Mario Novelli)의 박사논문(2003)은 극히 노조 적대적인 조건의 현 콜롬비아에서도 이와 매우 유사한 것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제기한다.
5) SIGTUR는 일국 노조들의 좌파적 네트워크인데 그것은 제도화된 노조의 인터내셔널과, 노조를 점점 끌어당기는(아래를 보라)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 사이의 어딘가쯤에 스스로를 어정쩡하게 놓는다. 그것은 롭 램버트와 에디 웹스터에 의해 정력적이고 반복적으로 옹호되었다. 그들은 때때로 그 네트워크 내의 문제점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새로운 국제적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모범적인 표현임을 주장한다. SIGTUR의 한국과 남아공 노조는 세계사회포럼(2001-3년)에 참가했고 적극적이었만 SIGTUR는 그렇지 않았다. 더욱이 램버트와 웹스터가 여러차례 웹사이트를 요구했지만 SIGTUR는 아직까지 웹사이트가 없고 웹상에서 최소한으로만 볼수 있다. 게다가 아래 가리킨 것처럼, 그것의 일국 노조단위 선거구획[일국의 내셔널센터가 한표씩 행사하는 선거체제]은 회원으로 가입되지 않은 노조뿐 아니라 생겨나고 있는 일국적/국제적 비노조 네트워크를 포괄하는데 방해가 된다. 끝으로, 램버트와 웹스터가 그들의 저작에 새로운 개념 기록과 경험적 정보를 덧붙이지만 그들이 어떠한 비교적 전망(다른 새로운 노동네트워크와 관련한)을 제공하는데 실패하고 또한 적어도 그들의 주장에 대한 나의 문제제기를 피하지 못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SIGTUR가 2004년 인도 세계사회포럼에 결국 참석한다해도 그것은 인도의 2개 회원조직에 대해 의존함으로써 다른 국제 네트워크와의 관계에 있어 부득이하게 거북해질 것이다. (2004년 3월 1일에 추가 : 나는 아직 4차 사회포럼에 참가하겠다던 SIGTUR의 약속이 실현된 증거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2004년 4차 사회포럼에 민주노총이 SIGTUR의 이름으로 참여했고, SIGTUR 행사가 개최되었다고 한다-역자]
6) 남아공 노동전문가들 사이의 보수적 이상주의의 현재 모습에 대해서는 하르코트와 우드(2003)을 보라. 각주에서 암시적으로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종국적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그들은 당면해서는 코사투와 아프리카 민족회의 정부 사이의 새로운 코포라티즘적인 사회적 파트너쉽을 선호한다. 이것이 코사투가 여전히 향유하는 사고와 행동의 자율성 포기를 의미하는한, 그리고 기업에 편입되지 않은 압도적 다수의 노동인구로부터 스스로의 고립을 제도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한, 이는 확실히 자포자기이다. 덧붙여, 그들은 또한 스스로 고립된 남아공 ‘극좌파’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다. 이 모든 것은 대략 2000년 이후 남아공에서 분출하는 사회적 항의의 물결에 비춰본다면 다소 낡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그냥 ‘좌파’라고 분명히 불러야 하는 물결인데, 우연히도 연관되어 헐뜯음을 당해온 것이다.
7) 이것은 경솔한 의견이라서 내가 잘아는 사회운동 전문가들을 화내고 불평하게 만든다. 나는 가장 최근의 논문에서 다소 심각하게 그 개념을 취했다(워터만 2001:7장). 그리고 나는 세계화와 사회적 항의의 견지에서 그 문제를 심각하게 재고할 것을 독자들에게 권고했다(에델만 2001).
8) 알렉스 캘리니코스(2003)는 전자이고 후자에 대항하는데, 그는 그 운동을 ‘반자본주의’로 불렀는데 동시에 그의 표현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는 확실히 목적론적인 과정이다. 피할 수 없는 최종조건(젠더에 의해 도전받는 정치 경제적인 그의 사회주의 개념)이라고 인과율을 퇴행적으로 읽으면서, 캘리니코스는 이 용어를 사회주의자가 아니거나 반사회자의자일수 있는 사람(스탈린 때문에? 사민주의 때문에? SWP때문에?)에게 속여서 팔아먹는다. 따라서 그는 (1)이러한 비사회주의자들은 ‘계급의식’을 결핍하고 있고 (2)SWP는 이를 가지고 있다고 시사한다.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이 반자본주의 혹은 탈자본주의 운동, 그리고 심지어 사회주의가 될 수 있는 한, 이것은 (1)집단적 자기교육과 (2)21세기 사회주의의 재발명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인데, 이것들은 왕국으로 가는 열쇠를 이전에 가졌던 사람들에게 별로 빚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9) 그러한 적극적 일반화는 문제제기에 열려있을 뿐 아니라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내 글에서도 질문되어 왔다. 그 일반화는 비판보다는 바램, 전략을 표현한다고 비판받을수 있다-그리고 비판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세계사회포럼과 사회운동 노조주의 개념사이의 상호 적합성과 함께 특수한 변형을 사고한다는, 여기에서의 목적에 기여할 것이다.
10) 이하는 워터만 2003b에서 가져온 것이다.
11) 나는 주요 노조 행사에 모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특히 신(新)-구(舊) 사회운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세션을 놓쳤는데, 거기에 노조들은 참가하였고 노조운동 관계도 토론되었다. 다행히 닉힐 아난드(2003)가 참석했는데 그는 사회운동 이론 논의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세우고 상당히 독창적이고 가치있는 개념적 접근을 발전시킨다.
12) 이는 단순히 수사적 질문이나 손쉬운 어림짐작이 아니다. 그것은 중요한 연구이슈를 제기하는 것이다. 왜 많은 노조지향적이고 국제주의적 NGO, 연구기관, 후원단체들은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지 않았는가? 이를 제기하는 이유는 1970년대와 1980년대와는 달리 내가 아는 그들 대부분이 제도화된 노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을 중단했고 오늘날에는 오히려 그것에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1990년대 NGO 연대의 위기에 관해서는 글로벌익스체인지(GlobalXchange) 2003을 보라). 따라서 그들이 이미 해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질문을 하는가 하는 수사적 의문이 제기된다.
13) 나는 아무래도 ‘괜찮은 노동’이 ‘사회적 조항’을 계승하는 것으로 판명날 것 같다. 15년 동안 조용히 압력받은 이후 그것(괜찮은 노동)은 새천년의 시작에 있어 국제자유노련(ICFTU)와 그 일당의 주요 국제캠페인이 되었다. ‘사회적 조항’은 WTO의 기능 가운데 하나가 노동권을 제거하는 것인데 WTO의 도움으로 노동권을 획득하겠다는 공상적인 생각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공상적인 전략에 의해 촉진되었는데, 그것은 일국적인 기관들과 국가 간 기관들에 조용히 로비하는 것이었다. 결국 사회적 조항은 지구적 정의 연대운동의 부상에 의해 단념되고 소멸되었는데 장례식이나 부검조차도 없었다. 이러한 값비싼 재앙에 비추어 국제자유노련을 평가하면서, 리즈 대학 박사과정의 스튜어트 홋킨슨은 적절한 비문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협상테이블에 앉을 자리도 없었고 거리의 신뢰도 받지 못하였다.” 그의 연구는 현재는 빌 조던 경(卿)이 된 국제자유노련 사무총장인 빌 조던이 저명인사를 활용한 선전을 통해 사회적 조항을 판촉했다는 것 또한 보여준다. 영국의 노조 육성가인 조던은 이 캠페인이 세계화에 직면한 북반구 노조들의 필요에 부합할 뿐 아니라 남반구 노조들에도 팔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남반구 노조들은 그것을 회의하거나 반대했고 북반구 노조들의 보호주의 혹은 적어도 온정주의로 의심했다. ‘괜찮은 일자리’는 죽은 부모의 사산아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사이 노동권에 대해 절박하게 요구되는 국제적 운동은 미뤄져 있다(워터만 2001c).
14) 이러한 두가지 이상 사이 어딘가에 내 글에서 부당하게 간과되었지만 토론에 기여하는 또 다른 작업이 아마 발견될 수 있다. 이것은 관련 이슈와 저작을 훌륭하게 종합한 로날도 문크(2002)인데 그는 구 제도와 새로운 운동을 대립시키기보다는 통합시키는 시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