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터'와 '만' 그리고
2001년 6월호에 시작된 ‘갈월동 기행’은 <월간 사회진보연대>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인기 코너다. 사회진보연대의 집행위원들과 같이 갈월동에서 둥지를 트고 있는 단체 상근자 동지들의 에세이로 이루어진 이 코너는 이 글로써 서른일곱 번째를 맞이하고 있는 장수코너다. 웹상에서 확인한 바로는 2002년 7,8월호에서 한 번 펑크가 난 바가 있었고, 필진이 37명이었을 것 같은 선입견과 달리 호성희, 이상민, 박준도 세 동지는 두 번씩 글을 쓰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 꼭지가 인기를 누리다보니 <월간 사회진보연대>를 두고 하는 우스개 소리 아닌 우스개 소리가 하나 있다. <월간 사회진보연대> 독자들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갈월동 기행‘부터’ 읽는 사람과 갈월동 기행‘만’ 읽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다. 우스개 소리라지만 ‘부터’든 ‘만’이든 양자 모두 <월간 사회진보연대>를 만드는 편집실 식구들에게는 큰 압박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동안 사회진보연대의 기관지는 사회진보연대가 출발 초기에 두 번 발간되었던 <진보를 향한 접속>(이라는 사뭇 90년대 후반 냄새가 물씬 나는 제호를 가지고 있던) 시절까지 포함하여 오십 두 권이 나왔다. 오십 두 권의 역사와 5년이라는 세월이면 이젠 조심스럽게 <월간 사회진보연대>를 중견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도 한데, ‘부터’와 ‘만’은 아직은 멀었다고 냉엄하게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
돌아보면 내가 사회진보연대와 본격적으로 연을 맺은 이후 회원으로서 나의 화두도 바로 이 ‘부터’와 ‘만’에 있지 않을까 싶다. 사회진보연대에 가입한 후 나의 자리가 일 년 간의 기자단 활동과 일곱 달의 편집실 생활이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하면 사회진보연대가 집행위원‘만’의 책이 되지 않도록 (집행위원만의 조직이 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 사회진보연대가 그리고 <월간 사회진보연대>가 잘되기 위해서 무엇‘부터’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고정 코너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고 고민도 해보았고 새로운 코너를 기획해서 집어넣기도 해보았다. 과연 그런 작은 시도들이 어떻게 남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권 한 권을 돌아보면 한 꼭지가 충실하면 다른 꼭지가 엉성해지고 어떤 때에는 편집실의 업무가 주도적이기보다는 기술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등 스스로 답답한 적도 많았던 것 같다.
이제 <월간 사회진보연대>가 또 한 번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몇 년째 이야기되었다던 정책국과 편집실의 통합이 금번 총회를 기해 이뤄졌고, <월간 사회진보연대>도 5월부터는 또 다른 모습의 우일신(又日新)한 기관지로 탄생하고자 준비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매체는 여러 가지 미덕을 갖추어야 독자들에게 외면 받지 않는다고 한다. <월간 사회진보연대>가 시장의 논리에 영합하거나 시류에 휩쓸릴 매체는 결코 아니지만 편안한 레이아웃, 정세적인 기획, 필진의 풍성함 등등의 미덕을 두루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또 글을 쉽게 쓰는 문제는 지겨울 정도로 지적 받(아야 하)는 대목이며 최근엔 발간시기를 잘 맞추지 못한 과(過)도 크다. 모두모두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간 사회진보연대>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위에 언급한 것들을 표지로 해서 판가름 되지는 않을 것이다. 독립적인 언론매체도 아니요, 학술지나 평론지도 아닌 한 단체의 ‘기관지’로서, ‘활동의 매체’로서 <월간 사회진보연대>라는 이름의 매체가 부여받고 있는 정체성은 앞서 언급했던 미덕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필요한 무엇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마음에 드는 기관지를 발간하는 것의 어려움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정책국과 편집실의 통합에 거는 기대도 바로 이 대목에 있을 터인데.
묘하게도 지난 2년 정도의 시간동안 편집실을 책임졌던 식구들 대부분은 이제 정책편집국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기관지를 책임졌던 집행위원끼리 쫑파티라도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 역시 이제 ‘잠시’ 갈월동에서 떨어져 있게 되었다. 전후사정은 복잡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마음‘만’은 갈월동에 두고 있으리라. 지금 아쉬운 마음으로 ‘갈월동 기행’을 쓰고는 있지만 ‘갈월동에서’를 쓰면서 느꼈던 희열을 만끽할 수 있는 날이 조속히 다시 오기를 고대해 본다. pssp
그동안 사회진보연대의 기관지는 사회진보연대가 출발 초기에 두 번 발간되었던 <진보를 향한 접속>(이라는 사뭇 90년대 후반 냄새가 물씬 나는 제호를 가지고 있던) 시절까지 포함하여 오십 두 권이 나왔다. 오십 두 권의 역사와 5년이라는 세월이면 이젠 조심스럽게 <월간 사회진보연대>를 중견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도 한데, ‘부터’와 ‘만’은 아직은 멀었다고 냉엄하게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
돌아보면 내가 사회진보연대와 본격적으로 연을 맺은 이후 회원으로서 나의 화두도 바로 이 ‘부터’와 ‘만’에 있지 않을까 싶다. 사회진보연대에 가입한 후 나의 자리가 일 년 간의 기자단 활동과 일곱 달의 편집실 생활이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하면 사회진보연대가 집행위원‘만’의 책이 되지 않도록 (집행위원만의 조직이 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 사회진보연대가 그리고 <월간 사회진보연대>가 잘되기 위해서 무엇‘부터’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고정 코너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고 고민도 해보았고 새로운 코너를 기획해서 집어넣기도 해보았다. 과연 그런 작은 시도들이 어떻게 남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권 한 권을 돌아보면 한 꼭지가 충실하면 다른 꼭지가 엉성해지고 어떤 때에는 편집실의 업무가 주도적이기보다는 기술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등 스스로 답답한 적도 많았던 것 같다.
이제 <월간 사회진보연대>가 또 한 번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몇 년째 이야기되었다던 정책국과 편집실의 통합이 금번 총회를 기해 이뤄졌고, <월간 사회진보연대>도 5월부터는 또 다른 모습의 우일신(又日新)한 기관지로 탄생하고자 준비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매체는 여러 가지 미덕을 갖추어야 독자들에게 외면 받지 않는다고 한다. <월간 사회진보연대>가 시장의 논리에 영합하거나 시류에 휩쓸릴 매체는 결코 아니지만 편안한 레이아웃, 정세적인 기획, 필진의 풍성함 등등의 미덕을 두루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또 글을 쉽게 쓰는 문제는 지겨울 정도로 지적 받(아야 하)는 대목이며 최근엔 발간시기를 잘 맞추지 못한 과(過)도 크다. 모두모두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간 사회진보연대>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위에 언급한 것들을 표지로 해서 판가름 되지는 않을 것이다. 독립적인 언론매체도 아니요, 학술지나 평론지도 아닌 한 단체의 ‘기관지’로서, ‘활동의 매체’로서 <월간 사회진보연대>라는 이름의 매체가 부여받고 있는 정체성은 앞서 언급했던 미덕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필요한 무엇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마음에 드는 기관지를 발간하는 것의 어려움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정책국과 편집실의 통합에 거는 기대도 바로 이 대목에 있을 터인데.
묘하게도 지난 2년 정도의 시간동안 편집실을 책임졌던 식구들 대부분은 이제 정책편집국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기관지를 책임졌던 집행위원끼리 쫑파티라도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 역시 이제 ‘잠시’ 갈월동에서 떨어져 있게 되었다. 전후사정은 복잡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마음‘만’은 갈월동에 두고 있으리라. 지금 아쉬운 마음으로 ‘갈월동 기행’을 쓰고는 있지만 ‘갈월동에서’를 쓰면서 느꼈던 희열을 만끽할 수 있는 날이 조속히 다시 오기를 고대해 본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