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성차별, 두 가지 경향
노동의 성차별, 두가지 경향
장 귀 연 |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책위원장
'하기 나름'일 수 있는...
솔직히 고백하면, 나의 경우 '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성차별이라는 것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딸이라고 해서 특정한 규범이나 행동양식을 주입하는 일이 절대로 없는 집안에서 자랐고, 학교에서는 공부만 잘하면 장땡이었다. 전국의 같은 또래 남학생들과 꼭 같은 시험문제로 경쟁하여 대학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성차별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원서를 낼 때였다. 당시 내 경험에서 보면, 서류전형의 기준은 일단은 학벌 차별이 가장 심했던 것 같다. 그 차별 구도에서 나는 이른바 대학서열의 정점에 있는 서울대 출신이었으므로 대단히 유리했다. 그럼에도 가끔 몇몇 군데에서 내 원서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같이 원서를 낸 같은 학교, 같은 과 비슷한 학점 대의 남자들은 서류전형 통과 명단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성차별이라는 거구나'하고 생각했고, 그에 대한 내 반응은 '에잇, 더러워서 안 간다!(못 간다?)'였다. 최종면접에서도 그러했다. 당연히 대개 여성과 남성이 반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입사에서 여자는 몇 명 뽑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더라'라는 루머가 난무했고, 그에 따르면 훨씬 좁아진 확률 속에서 나는 남자들은 제쳐두고 여자들을 경쟁상대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절박했던 건 아니다. '여기 입사하지 못하면 딴 데 가지'라고 생각했다. 한국이 호황을 누리고 있던 10여 년 전이다.
일단 취업문을 통과하고 난 후 직장에 다니는 동안, 그리고 학교로 돌아오고 나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다시 성별은 별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남자들이 훨씬 더 많은, 그래서 더욱 엘리트(?) 분위기가 나는 곳에서, 나는 소수 여성으로서 주목받았고 그래서 더 우쭐했다. 결국 나의 노동과 사회적 활동에서 여성이라는 성별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적은 별로 없다. 이른바 커리어우먼인 내 친구들도 그렇게 보인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할 수 있었다. '여자라는 게 뭐가 문제야, 자기가 하기 나름이지.'
그런데, 과연 그럴까?
신자유주의와 여성노동에 대한 공격
실제로, '그렇다'. 단, '자기가 하기 나름'일 수 있는 경우에는.
의대 여학생 비율이 절반이 넘고, 고시의 여성 합격자 비율도 매년 기록을 경신하며 급상승세를 보이고, 각종 전문직이나 간부직 승진에서 성차별은 금지되었다. 물론 비공식적인 차별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결국 몇몇 직장에 합격할 수 있었듯이 '자기가 하기 나름'으로 돌파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
이처럼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나고 '성차별 금지'가 확산되는 이면에서, 여성평균임금은 남성평균임금의 60%선에서 정체하거나 떨어지고 있고 반대로 여성 비정규직 비율은 가파르게 상승하여 70%에 도달했다. 빈곤의 여성화도 점점 심화되어, 국민기초보장의 여성수급가구 비율이 50%를 넘으면서 상승하고 있고, 여성 가구주 가구의 빈곤율은 남성가구주의 두 배에 달한다. 나는 '여자라는 게 뭐가 문제야, 자기가 하기 나름이지'라고 말했으나, 전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성별 격차는 명백히 점점 악화되고 있다.
이 서로 모순된 얘기의 함정은 '자기가 하기 나름'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는 데 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그러하다. '자기가 하기 나름', 즉 이른바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조차 특권적인 위치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가 노력과 능력을 통해 자본가가 될 수 있는가, 승진할 수 있는가, 정규직이 될 수 있는가? 무수한 노동자들은 노력과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줄 기회도 없고 그럴 필요나 이유도 없다. 자본은 노동을 언제든지 갖다 쓰다가 쓸모없어지면 폐기하고 대체할 부품 이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노력과 능력이라는 것은 노동 강도 경쟁을 강화하는 허위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와 노동의 불안정화는 이를 더욱 악화시킨다. 교묘함을 더해가는 비정규직 형태들을 이용하면서 자본은 맘 내키는 대로 노동자들을 폐기처분하고 심지어 노동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은폐한다. 노동자 세력이 심각하게 약화되면서, 더 많은 노동자들이 "나는 노력과 능력을 가진 인간이지, 기계가 아니다!"라는 찍 소리 한마디조차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성 노동에 대한 공격이 집중되고 있다. 분명히 고용과 승진 등에서 성차별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의 대다수가 성차별 금지법이 다루는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는데, 그것은 직종과 직무의 성별분리 때문이다. 여성 노동자들의 77%가 여성 직종에 집중되어 있고, 바로 이 직종들에서 비정규직화와 저임금화의 추세가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다.
성차별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곳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많은 여성 직종들의 직무는 감정노동이나 가사노동의 연장선상에서 취급된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적'(!) 일들은 주변적인 것이므로, 정규직으로 고용하거나 임금을 많이 줄 필요가 없다는 자본의 논리를 정당화한다. 남자들과 동등하게 노력과 능력을 보여주는 개별 여성을 성차별할 수는 없지만, '여성의 일'은 여전히 '하잘 것 없는 일'인 것이며, 따라서 그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노동자'에 미달하는 것이다.
2월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한 마디만, 한 마디만 하게 해 달라고 호소한 여성 노동자의 모습. 그녀는 말했다. 대의원도 아니고, 조합원도 아니라고. 노조도 없다고. 울먹이는 그녀의 모습은 노동자로서 '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른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에 "아줌마, 뭐야?"라고 대꾸했던 한 노조간부의 말은 '노동자에 미달하는 여성'이라는 자본의 목소리를 반복한다.
참관인석의 아줌마와 아가씨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대의원 석상에도 적지 않은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여성 노동자로서 노조 활동가로 활약하는 그들은 존경받을 만하다. 그 뿐 아니라 몇 년 사이 각종 단체에서도 여성 활동가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확연히 눈에 띈다.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성차별은 줄어드는 경향이고,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여성들은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의 공격 하에 가장 불안정해지는 노동자 집단이 바로 여성 직종이고, 여성의 빈곤화는 더더욱 심화되고 있다. 성차별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도 증명할 방법도 없이, 이들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힘겹게 싸워야 한다. 나를 비롯하여 여성이라는 성별 때문에 거의 불이익을 겪지 않거나 또는 '자기가 하기 나름'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여성들은 운이 좋았다. 훨씬 더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하기 나름'으로 성차별을 극복할 수가 없다.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성차별은 약화되고 있지만, 여성 노동자 집단에 대한 구조적인 성차별은 더욱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의원 석상에 들어오지 못한, 참관인석의 아줌마와 아가씨들. 적어도 '여성'을 보기 위해서는, 어쩌면 대의원석의 훌륭한 여성 노조 활동가들보다 그들의 얼굴을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여자의 하잘것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여전히 '아줌마'와 '아가씨'로 지칭하는 노동운동의 뒷면에서 음흉하게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인 것이다.PSSP
장 귀 연 |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책위원장
'하기 나름'일 수 있는...
솔직히 고백하면, 나의 경우 '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성차별이라는 것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딸이라고 해서 특정한 규범이나 행동양식을 주입하는 일이 절대로 없는 집안에서 자랐고, 학교에서는 공부만 잘하면 장땡이었다. 전국의 같은 또래 남학생들과 꼭 같은 시험문제로 경쟁하여 대학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성차별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원서를 낼 때였다. 당시 내 경험에서 보면, 서류전형의 기준은 일단은 학벌 차별이 가장 심했던 것 같다. 그 차별 구도에서 나는 이른바 대학서열의 정점에 있는 서울대 출신이었으므로 대단히 유리했다. 그럼에도 가끔 몇몇 군데에서 내 원서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같이 원서를 낸 같은 학교, 같은 과 비슷한 학점 대의 남자들은 서류전형 통과 명단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성차별이라는 거구나'하고 생각했고, 그에 대한 내 반응은 '에잇, 더러워서 안 간다!(못 간다?)'였다. 최종면접에서도 그러했다. 당연히 대개 여성과 남성이 반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입사에서 여자는 몇 명 뽑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더라'라는 루머가 난무했고, 그에 따르면 훨씬 좁아진 확률 속에서 나는 남자들은 제쳐두고 여자들을 경쟁상대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절박했던 건 아니다. '여기 입사하지 못하면 딴 데 가지'라고 생각했다. 한국이 호황을 누리고 있던 10여 년 전이다.
일단 취업문을 통과하고 난 후 직장에 다니는 동안, 그리고 학교로 돌아오고 나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다시 성별은 별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남자들이 훨씬 더 많은, 그래서 더욱 엘리트(?) 분위기가 나는 곳에서, 나는 소수 여성으로서 주목받았고 그래서 더 우쭐했다. 결국 나의 노동과 사회적 활동에서 여성이라는 성별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적은 별로 없다. 이른바 커리어우먼인 내 친구들도 그렇게 보인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할 수 있었다. '여자라는 게 뭐가 문제야, 자기가 하기 나름이지.'
그런데, 과연 그럴까?
신자유주의와 여성노동에 대한 공격
실제로, '그렇다'. 단, '자기가 하기 나름'일 수 있는 경우에는.
의대 여학생 비율이 절반이 넘고, 고시의 여성 합격자 비율도 매년 기록을 경신하며 급상승세를 보이고, 각종 전문직이나 간부직 승진에서 성차별은 금지되었다. 물론 비공식적인 차별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결국 몇몇 직장에 합격할 수 있었듯이 '자기가 하기 나름'으로 돌파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
이처럼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나고 '성차별 금지'가 확산되는 이면에서, 여성평균임금은 남성평균임금의 60%선에서 정체하거나 떨어지고 있고 반대로 여성 비정규직 비율은 가파르게 상승하여 70%에 도달했다. 빈곤의 여성화도 점점 심화되어, 국민기초보장의 여성수급가구 비율이 50%를 넘으면서 상승하고 있고, 여성 가구주 가구의 빈곤율은 남성가구주의 두 배에 달한다. 나는 '여자라는 게 뭐가 문제야, 자기가 하기 나름이지'라고 말했으나, 전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성별 격차는 명백히 점점 악화되고 있다.
이 서로 모순된 얘기의 함정은 '자기가 하기 나름'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는 데 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그러하다. '자기가 하기 나름', 즉 이른바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조차 특권적인 위치에서만 가능하다. 노동자가 노력과 능력을 통해 자본가가 될 수 있는가, 승진할 수 있는가, 정규직이 될 수 있는가? 무수한 노동자들은 노력과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줄 기회도 없고 그럴 필요나 이유도 없다. 자본은 노동을 언제든지 갖다 쓰다가 쓸모없어지면 폐기하고 대체할 부품 이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노력과 능력이라는 것은 노동 강도 경쟁을 강화하는 허위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와 노동의 불안정화는 이를 더욱 악화시킨다. 교묘함을 더해가는 비정규직 형태들을 이용하면서 자본은 맘 내키는 대로 노동자들을 폐기처분하고 심지어 노동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은폐한다. 노동자 세력이 심각하게 약화되면서, 더 많은 노동자들이 "나는 노력과 능력을 가진 인간이지, 기계가 아니다!"라는 찍 소리 한마디조차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성 노동에 대한 공격이 집중되고 있다. 분명히 고용과 승진 등에서 성차별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의 대다수가 성차별 금지법이 다루는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는데, 그것은 직종과 직무의 성별분리 때문이다. 여성 노동자들의 77%가 여성 직종에 집중되어 있고, 바로 이 직종들에서 비정규직화와 저임금화의 추세가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다.
성차별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곳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많은 여성 직종들의 직무는 감정노동이나 가사노동의 연장선상에서 취급된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적'(!) 일들은 주변적인 것이므로, 정규직으로 고용하거나 임금을 많이 줄 필요가 없다는 자본의 논리를 정당화한다. 남자들과 동등하게 노력과 능력을 보여주는 개별 여성을 성차별할 수는 없지만, '여성의 일'은 여전히 '하잘 것 없는 일'인 것이며, 따라서 그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노동자'에 미달하는 것이다.
2월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한 마디만, 한 마디만 하게 해 달라고 호소한 여성 노동자의 모습. 그녀는 말했다. 대의원도 아니고, 조합원도 아니라고. 노조도 없다고. 울먹이는 그녀의 모습은 노동자로서 '오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른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에 "아줌마, 뭐야?"라고 대꾸했던 한 노조간부의 말은 '노동자에 미달하는 여성'이라는 자본의 목소리를 반복한다.
참관인석의 아줌마와 아가씨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대의원 석상에도 적지 않은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여성 노동자로서 노조 활동가로 활약하는 그들은 존경받을 만하다. 그 뿐 아니라 몇 년 사이 각종 단체에서도 여성 활동가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확연히 눈에 띈다.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성차별은 줄어드는 경향이고,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여성들은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의 공격 하에 가장 불안정해지는 노동자 집단이 바로 여성 직종이고, 여성의 빈곤화는 더더욱 심화되고 있다. 성차별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도 증명할 방법도 없이, 이들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힘겹게 싸워야 한다. 나를 비롯하여 여성이라는 성별 때문에 거의 불이익을 겪지 않거나 또는 '자기가 하기 나름'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여성들은 운이 좋았다. 훨씬 더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하기 나름'으로 성차별을 극복할 수가 없다.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성차별은 약화되고 있지만, 여성 노동자 집단에 대한 구조적인 성차별은 더욱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의원 석상에 들어오지 못한, 참관인석의 아줌마와 아가씨들. 적어도 '여성'을 보기 위해서는, 어쩌면 대의원석의 훌륭한 여성 노조 활동가들보다 그들의 얼굴을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여자의 하잘것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여전히 '아줌마'와 '아가씨'로 지칭하는 노동운동의 뒷면에서 음흉하게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인 것이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