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성영화제 프리즘으로 본 성매매
<마마상>, <공창묵시록>, <밤의 요정들의 이야기>
호 성 희 | 여성국장
성매매방지법을 둘러싼 떠들썩한 논쟁이 가라앉고 추운 겨울 내내 생존권을 외치며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하던 여성들도 보이지 않게 된 성매매방지법 시행 6개월. 미아리 화재사건 이후 성매매방지법의 강력한 시행과 단속강화의 목소리가 힘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여성영화제는 영화라는 매개로 이례적인 공간을 만든 듯 하다.
서울여성영화제를 비롯하여 본디 ‘영화제’들과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벌써 7회 째라는 여성영화제를 진보넷 블로그를 통해 삼성과 포스코 등 무노조 신화의 대기업들이 후원을 한다는 꺼림찍한 인상과 함께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여성영화제 ‘여성영상공동체’ 섹션의 주제가 성매매였고, 그에 관한 6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또한 “아시아 지역 성매매 현실과 비디오 액티비즘”이란 주제로 국제포럼도 열렸다.
나는 4편의 영화를 보면서,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시선에 불편해하기도 했고, 성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를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영화속의 성노동자들은 좀더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차이를 만드는 카메라의 일방성
<마마상, Remember Me This Way>
마마상은 업주에게 고용되어 클럽과 성매매 여성들을 관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영화는 2004년 민주노총 주최의 미군재배치 반대 시위에서 시작된다. 카메라는 집회 참가자들에게 집회 때문에 먹고살기 힘들어진다며 강하게 항의하는 업주 여성과 그런 창 밖의 소란에 무심하게 텔레비전을 보는 양희이모를 보여준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고, 영화는 나의 어떤 기대를 채우지 못한 채 끝났다.
영화 제작단체인 '연분홍치마'의 감독들은 마마상인 양희이모를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시선으로 담고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감독들은 어느 순간 듣고 싶은 대답(과거 성매매 피해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을 듣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그녀들은 그녀들과 아주 다른 양희이모의 삶을 이해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감독들의 말처럼, 감독들과 양희이모 사이의 '차이'(다름)는 그 차이를 인정하면 되는 것일까. 오히려 감독들이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양희이모 자신과 그녀들이 양희이모의 삶을 보는 시각이 차이였다. 나의 불편함은 그런 거리감을 고스란히 담아낸 카메라의 솔직함에 있었다. 솔직함은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그건 양희이모를 이해하지 못한, 다른 여성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대기만 한 ‘일방성’이었다.
클럽에서 청소와 통역, 이주 여성들 관리까지를 맡기면서 50만원밖에 안 주는 업주가 자신에게 애들 2차 나가는 걸 시키는 걸 불만스러워 하는 양희이모에게 감독들이 묻는다. “2차는 나쁜 거 아니에요?”하면서, 양희이모가 감독들의 이야기에 맞장구치기를 기대한다. 그녀들은 최저임금에도 못미치는 50만원에 놀라지 않는다. 기지촌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양희이모에게 보여주면서, 과거의 성매매 피해 경험을 말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양희이모는 “어머나..저렇지는 않았어”하며 자기가 있었던 부산의 기지촌과 미군들의 모습을 설명한다. 우리가 매체를 통해 알게된 기지촌의 끔직한 모습을 양희이모가 일했던 곳으로 기억해내기를 바란다. 그리고 도저히 감독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양희이모라는 사람은 다양한 여성의 삶의 하나로 이해하자고 얼버무린다.
양희이모는 마마상들 사이의 경쟁에서 불안해한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를 기대한다. 새파랗게 젊은 이주여성들의 ‘개김’은 그런 불안한 위치에 대한 큰 위협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단속 때문에 꽁꽁 숨어있어야 하는 이주여성들의 신세를 안타까워한다. 어쨌든 그녀들은 먹고살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또 그렇게 서로를 걱정하고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양희이모는 한번도 보지 못한 미군 아버지를 둔 혼혈인이었고, 엄마의 두 번의 재혼으로 생긴 동생들을 교육하고 돌보기 위해 성매매를 해야했다. 그녀는 동생들 때문에 기지촌 여성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꾸지도 못했다. 양희이모는 사진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던 잘생긴 아버지 사진을 술을 많이 마신 어느 날 홧김에 태워버린 걸 후회한다. 그리고 그녀가 믿고 의지했던 동료 마마상의 갑작스런 죽음에 슬퍼한다. 양희이모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 줄 꺼라고 믿었던 그녀의 죽음에 그녀는 정말 간절히 하루의 휴가를 바란다.
“오늘 같은 날은 정말 안나갔음 좋겠다. 그지?”
‘튀기’라 놀림받던 어린 시절과 엄마와 동생을 위해 성매매로 돈을 벌어야 했던 비혼인 그녀에게 반복해서 결혼에 실패했던 엄마도, 그녀를 찾지 않는 아빠도, 그녀의 마지막조차 보아줄 거라고 기대되지 않는 동생들도 원망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기에 성매매 현장의 잔인함은 다른 곳에 있다.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가족, 가족 속의 여성의 일, 가족부양의 짐이 양희이모에게 숙명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 그곳에 세상의 잔인함이 숨어있다.
“당신은 왜 길거리 청소하는 일 대신 성매매를 선택했습니까?”
<공창묵시록>, <생명구원의 식초: 탈성매매 여성들의 목소리>
영화는 거리에서 시위에 나선 성노동자 레이쿤과 주부와의 논쟁 1997년 9월 6일 대만 첸슈이벤 시장은 허가받은 128명의 대만 성매매 여성의 허가증이 무효라고 선포한다. 하룻밤 사이에 이 128명의 성매매 여성들은 경찰의 단속, 일상적인 감시와 괴롭힘의 표적이 된다. 이날 이전 그들은 고객에게 폭행과 학대를 받았을 경우 경찰에게 의지하고 법적인 보호를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성매매 여성들이었다. 정부는 외설반대 캠페인에서 이런 결의를 드러내기 위해, 시장은 의도적으로 128명 여성들의 노동을 불법으로 선포하는 무자비한 조치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들 대부분은 40대 중반에 글을 좀 아는 비혼모들이고, 또 상당수는 많은 가족들을 돌보고 있다. 시정부는 이들 성매매 여성들에게 보조금을 약속했지만, 나중에 이들은 정부의 자선 기금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생계를 위해 일할 수 있으니 그 일을 하게 두라고.” 그래서 허가증 무효에 항의하는 허가받은 성매매 여성들의 대만 동맹(TALP)의 활동이 시작된다. 결국 성매매 여성들이 새로운 정책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한 2년의 유예기간을 얻어낸다. 만일 어떤 형태로든 TALP와 성매매의 비범죄화를 지지한다면, 이것이 대만에서 “성산업”을 장려하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논쟁을 시작했다.(여성영화제 국제포럼 자료집)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여성: 왜 이런 일을 고집스럽게 계속하는 거죠?
레이쿤: 왜냐구요? 시정부가 우리에게 준 이 일, 우리에게 허가증을 줘 놓고 40시간 내에 다시 그 허가증을 빼앗아 가 버리는데,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여성: 내 인격에서라면, 난 차라리 굶어 죽었을거예요. 이런 종류의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거예요. 아시겠어요?
레이쿤: 나야 굶어서 죽을 수 있지요. 하지만 아이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어요, 이해하겠어요?
여성: 그건 각 개인의 인격에 따라 다르지요.
레이쿤: 내 아이들 역시도 살아남기 위해서 대학에 가길 원하고, 그럴 필요가 있다구요!
여성: 그럼, 왜 이런 일을 해요?
레이쿤: 이런 일을 하는 게 망신스러운(체면을 잃는 건)가요?
여성: 당연히 망신이지요.
레이쿤: 난 창피하지 않아요. 내가 뭘 훔치거나 빼앗았나요? 당신한테 돈을 빌렸나요?
여성: 아니요. 그리고 난 당신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에요.
레이쿤: 아니, 당신은 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며 체면 같은 거는 차리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내가 당신한테 뭘 뺏었나요? 당신 남편을 훔친 적 있나요? 당신한테 돈을 빌렸나요? 그렇지 않다면, 왜 이 일을 하는 게 당신 말처럼 체면을 잃는 일이지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돈을 버는 일인데요.
여성: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나라면 절대 이런 일은 안 할 거예요.
레이쿤: 결혼했다는 건 장기 식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내가 가진 건 일회용 식권이라는 것뿐이에요. 거기에 무슨 체면 이런게 있냐는 말이지요. 당신은 남편이랑 결혼했으니 그 남자랑만 자야 하는 거고, 우리도 다른 사람들하고 자야 하는 거죠. 여기 어디에 체면이 없다는 거지요? 그걸 물어보고 싶어요.
여성: 난 당신처럼 모든 남자하고 자지는 않아요, 내 남편하고만 자지.
여성영화제는 여성감독만의 영화만 상영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남성감독이 찍었으나, 대만의 성노동자연대 단체는 코스와스 COSWAS(Collective of Sex Works and Supports): COSWAS는 성노동자들의 권리를 후원하는 사람들과 성산업에 대한 정책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타이페이 공창연합(TALP)에 의해 결성되었다. COSWAS의 결성은 1년 7개월 전부터 시작된 타이페이 공창연합의 적극적인 투쟁의 연장선상이다. COSWAS는 공창 제도와 공창들의 현주소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 목적이다. 또한, 장기적으로 성노동자들의 권리와 그들의 노동조건을 향상시키는 것 역시 COSWAS가 하려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성산업에 대한 정책토론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성매매정책과 성관련 산업시스템이 확립되도록 노력하고 있다.의 의뢰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특별 상영되었다. 이번 서울여성영화제에 코스와스의 대표 왕팡핑과 코스와스 회원 아인씨가 참석했다.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에서 왕팡핑은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지 물어보세요. 그리고 질문으로 성노동자인 아인씨가 상처받을까봐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8년의 투쟁으로 우리에게 쏟아질 비슷한 질문들에 단련되어 있습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더라도 왜 길거리 청소부가 아닌 성매매를 선택했냐는 질문은 1998년 대만 유이한 강당에서 열린 성 노동자와 함께 한 회의에서 여성주의학자가 질문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성매매 여성들에게 쏟아지는 일반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국제포럼 토론에서 왕팡핑은 대만에서 성노동자와 관련된 2단계 논쟁에 대해 설명했다. 1단계 논쟁에선 일반시민들의 생각과 다른 성노동자들의 노동 현실을 밝혔다고 한다. 여권주의자들 “어떻게 감정없이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성노동자들은 “감정있는 사랑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권주의자들이 자신들을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구세주처럼 탈성매매(탈출)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성노동자들을 어떻게 다치게 하는지를 설명했다고 한다. 2단계 논쟁에선 여권주의자들은 논의를 바꿔, “이들은 우리의 자매들이다. 지금은 남성이 문제다. 고객을 벌해야지, 여성을 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왕팡핑은 왜 남성의 욕망이 문제인지, 왜 남성들이 성구매를 하게 되는가를 질문하면서, 이제 공개적인 토론의 장에서 성과 섹스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 큰 장기는 성기가 아니라 ‘뇌’이다. 부부가 즐거운 성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한 공개적 토론을 해야 합니다.”
노동운동 활동가 출신이라고 밝힌 왕팡핑은 8년 동안의 코스와스의 투쟁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성노동자들의 ‘현실’은 그들이 범죄자 취급을 당해왔으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허락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노동자들의 ‘현실’이란 그들의 기본적인 노동할 권리를 박탈당했거나 또는 최악의 노동 조건을 참아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즉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성노동자들이 그들의 기본적인 노동권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즉시 해야 할 일은 성노동과 성노동자들을 범죄/범죄자로 보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일입니다.”(국제포럼 자료집)
또 한편의 영화 <생명구원의 식초: 탈성매매 여성들의 목소리>는 성노동자들이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금지당하고 나서, 나이 많은 4-50대 성노동자들이 식초생산 공장을 설립함으로써 실제로 직업을 바꾸려고 노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97년 공창폐지 이후 그녀들은 병들고, 우울하고, 상처받고, 자살 경향까지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대만의 많은 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녀들에겐 ‘직업을 바꾸려’한다는 생각자체가 수치였을 정도로, 그 과정은 힘들었고,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영화에서 공창폐지에 항의하는 성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학생, 사회단체 활동가들의 모습과 모금을 위해 노동자 시위대열을 갈라서 지나칠 때 노동자들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왕팡핑에게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며, 어떻게 대만의 사회운동이 성노동자운동과 연대할 수 있었는가를 질문했을 때, 왕팡핑은 공창폐지를 반대하는 성노동자들의 시위가 있었고,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준비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코스와스도 불법적으로 일하는 사창의 성노동자들을 만나기는 무척 어렵기 때문에 한국에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대만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고 토론하는 자리에서 성노동자와 연대하는 활동가의 말로 끝난다.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만날 수 있었고, 우리가 여기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작년가을, 여의도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과 구별되었고, 그녀들의 주장을 적기 위해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었던 나는 기자로 오인되었다. "꼬투리 잡을 것만 쓰지 말고, 정말 우리 이야기를 전해줘요..정말 못살겠어요!", "이제 담배 살 돈도 없어서 담배 못핀다고 하면 안믿을꺼죠?"라며 불신에 가득찬 말을 던지는 여성들에게 나는 기자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구경꾼이었을 뿐이었다. 성매매방지법의 가장 큰 목적이 업주와 성매매여성의 고리를 끊어내는데 있다고 말했던 여성단체들은 그녀들과 함께 하지 않았고, 유일하게 그녀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업주들과 집장촌 상인들뿐이었다.
우리는 마음속의 행복을 생산합니다.
<밤의 요정들의 이야기>
이 영화는 인도의 성매매 밀집 장소인 캘커타 홍등가의 DMSC 두바르 여성협력위원회(DMSC: Dubar Women's collaborative committee)는 성노동자들과 그 아이들로 구성된 포럼이다. 이 단체는 1995년 7월 캘커타의 가장 크고 오래된 성노동 지역 중 하나인 소나가치의 성노동자들이 모여 조직한 단체이다. 이 단체의 주된 목적은 성노동자 전체의 공동체를 통해 연대를 조직하여 집단적인 힘을 키우고, 노동자로서 그들 자신의 긍정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하고, 성노동에 대한 합법적이고 사회적인 인식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DMSC의 창립 멤버들은 1992년 소나가치 성노동 지역에서 시작된 성병과 에이즈 방지 프로그램의 동료 교육자로서 모이게 되었다. DMSC의 액티비스트들은 성노동자들 스스로 선택권을 가지고 안전한 섹스를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성매매의 안과 밖에서 그들의 삶을 통제하는 다양한 구조적 장벽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시작부터 깨달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성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것이 성노동자들의 그들만의 조직을 만들게 된 원동력이었다.
1997년 DMSC 활동가들이 1회 전국 성노동자 회의에서 세계화와 이주문제로 발생한 인신매매 문제를 지적한 이래로 DMSC는 미성년 소녀들이 성노동 분야로 팔려오는 경우나 사기, 혹은 강요로 인해 성노동을 하게 된 여성들의 경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DMSC는 성노동자들의 물질적 빈곤과 사회적 배제와 관련하여 그들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현실을 구성하는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이에 도전하는 활동을 한다. 이러한 과점에서 DMSC는 성노동자들이나 그 자녀들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착취하고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데 반대한다. 또한, DMSC는 강제적 노동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명백히 반대한다. 더 나아가 DMSC는 성노동도 노동이므로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 결정되고 시행되는 규범과 조건이 성노동에도 있어야 하고, 이는 누구든 성노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DMSC는 미성년 소녀들이나 자신의 의사에 관계없이 강요당한 성인 여성들의 인신매매와 성노동자화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국제포럼자료집)
성노동자들의 단결과 저항을 그린 이야기다. 성노동자들은 조직을 만들고 투쟁하면서 이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따질 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경찰들이 성매매 여성들을 무조건 잡아갔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면 “거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녀들은 콘돔을 거부하는 고객에게 “콘돔을 끼면 내가 더 좋다”고 설득해서 안전하게 돈을 벌 줄 알고, 폭탄을 들고 와서 협박하는 남자를 함께 제압하고, 무조건 폭력을 행사했던 경찰에 대해 진단서를 끊어 해고시킨다. 그리고 자치위원회를 결성해서 성노동자들이 직접 가가호호 방문해서 안전하게 성노동할 방법을 알려주면서 성노동자들을 조직하고, 18세 이하 미성년이나 인신매매된 노동자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영화는 2001년 3월, DMSC의 성노동자들이 기획하고, 조직, 주최한 삼일간의 “밀레니엄 카니발”을 초점으로 하고 있다. 인도 정부는 델리여성단체들의 반대 시위를 의식해서 쉽게 축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성노동자들은 축제 허가를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결국 허가를 받아내 축제는 잘 알려져 있는 대중적 장소인 캘커타의 솔트레이크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영화 감독 쇼히니 고쉬는 어렸을 적 살던 캘커타를 다시 찾아간다. 가정집들과 다른, 혹은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지적받았던 홍등가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밀레니엄 카니발 개최는 성노동자들이 그/녀들에게 사회가 그어놓은 경계를 뚫고 나온 도전이었던 셈이다. 고쉬는 “성매매에 대한 비난은 단지 돈으로 성을 거래되는 여성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용납할 수 없다고” 여기는 관습과 규범들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위반하는 모든 여성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온 수많은 성노동자들, 일반 시민들, 도시 지식인들이 축제에 참석했고, 축제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들이 토론되었다.
DMSC는 6만에 이르는 성노동자 조직이다. 인도는 높은 실업률 때문에 길거리 행상에서도 여성들이 일하는 것을 보기 쉽지 않다. 이혼해서 부양할 아이들이 있거나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서조차 인도여성들에게 주어진 직업은 다양하지 않다. 두 번의 결혼 경험이 있는 한 성노동자는 다른 지역을 여행하면서 자신이 맘에 든다는 남자를 만났다. 그녀는 말했다. “나랑 자고 싶다면, 내가 캘커타에서 일을 하니 꼭 돈을 갖고 오라”고. DMSC의 성노동자들은 성매매가 성노동이라 주장하며, 노동조합 인정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녀들은 말한다.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 노동자라면, 우리는 마음속의 행복을 생산합니다.”
그녀들은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노동조건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들의 당당함은 투쟁의 힘에서 나온다. “우리가 이렇게 투쟁을 계속한다면, 대학을 나온 여성들도 이곳에서 일하게 될 거예요.”
이 말은 내게 도전적인 질문이 되었다. 나는 ‘빈곤의 여성화’라는 성매매의 구조적인 원인을 극도의 가난 때문에 성매매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쇼히니 고쉬는 묻는다. “가난해서 성매매를 하는 것은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로 성매매를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나?” 그래서 감독은 영화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게이 성노동자를 자꾸 등장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걷고 싶은 방법으로 걷고, 사랑할 수 있는 다른 공동체에서 자유를 찾는다.
후기- 보고 싶은 데로 보기, 감추어진 역사
국제포럼에서 왕팡핑은 마이크를 성노동자 아인에게 넘겼다. 우리는 그녀가 직접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아인이 “97년에 공창이 폐지되고 나서 정말 힘들었습니다...”라고 말하다 말을 잇지 못했다. 왕팡핑은 그동안 공창폐지 이후 힘들었던 기억이 아인씨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포럼이 있던 다음날 나는 <공창묵시록>을 보게 되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아인씨가 뒤늦게 무대앞으로 나올 때, 사회자(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가 말했다. “어제 성매매에 관한 국제포럼이 있었는데..40년인가요? 오랫동안의 성매매를 한 기억이 힘들어서 어제 아인씨가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정정하기 위해 손을 들었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사회자는 “우리나라에선 아직 성노동자가 출현하지 않았지만...”이라는 단서도 달았다. 그러나 전날 국제포럼에 한여연 대표, 김문희씨가 참석했고, ‘하나의 직업군으로 인정하고 성노동자로서, 그리고 성노동자로서의 권리를 갖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요구사항을 발제했다. 어찌보면, 우리가 없는 역사라고 생각하는 성노동자 운동은 의도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전 기지촌여성운동사를 읽게 되었다. 국가가 기지촌 여성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었던 자치규제(정화)위원회는 기지촌 여성들이 모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살벌했던 유신 시절에 집회를 하게 되는 힘이 되기도 했었다.
1971년 송탄에서 미군들이 화대와 기지촌 물가가 비싸다며 신발과 쇼트타임 화대를 5불로, 롱타임 화대를 10불로 인하할 것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배포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미군들의 화대 떼먹기와 화대 인하요구에 대항하였다. 천 명이 넘는 동료 매춘여성들을 조직하여 '우리는 신발이 아니라 인간이다'를 외치며 미군부대 앞에서 데모를 벌였다. 살벌했던 유신시절, 기지촌여성들의 작은 권익을 찾기 위한 노력조차 '북한과의 연계'로 몰려 그녀는 경찰서로 끌려갔다.(정희진, 1999)
이 시위를 주도했던 김연자씨는 최초의 기지촌여성운동가이다. 그녀는 한국사회에서 기지촌 여성이 다루어지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기지촌여성을 ‘인간이하’로 보는 것, 동정하는 것, 반미의 상징으로 이미지화 하는 것, 제국주의 침략의 가장 큰 희생자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그녀는 스스로 말하고자 하고 기지촌여성도 한국사회의 일원으로 주체화되기를 원한다.
다루어지는 방식은 다르지만, 한국, 대만, 인도의 성노동자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가 있다. 그건 바로 가족의 문제다. 성매매 문제는 빈곤의 여성화에 대한 투쟁과 함께 지금의 가족형태를 바꾸지 않고 해결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성매매 없는 사회는 지금 사회에서 성매매와 성매매여성만 도려낸 사회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도 없고, 왜곡된 남녀관계도 없는, 여성의 성이 억압되지 않는, 그래서 성매매가 없는 그런 사회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투쟁에 성노동자들이 있고, 우리는 그녀들의 투쟁에 함께 해야 한다.PSSP
참고문헌
일다(www.ildaro.com), 「마마상 이모의 일상과 기지촌의 현재」, 2004.3.28
정희진, 「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 『한국여성인권운동사』, 1999
『아시아 지역 성매매 현실과 비디오 액티비즘』, 서울여성영화제 국제 포럼 2005 자료집
고정갑희, 「성매매방지특별법과 여성주의자들의 방향 감각」, 『여/성 이론』, 2005년 여름호
성매매방지법을 둘러싼 떠들썩한 논쟁이 가라앉고 추운 겨울 내내 생존권을 외치며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하던 여성들도 보이지 않게 된 성매매방지법 시행 6개월. 미아리 화재사건 이후 성매매방지법의 강력한 시행과 단속강화의 목소리가 힘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여성영화제는 영화라는 매개로 이례적인 공간을 만든 듯 하다.
서울여성영화제를 비롯하여 본디 ‘영화제’들과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벌써 7회 째라는 여성영화제를 진보넷 블로그를 통해 삼성과 포스코 등 무노조 신화의 대기업들이 후원을 한다는 꺼림찍한 인상과 함께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여성영화제 ‘여성영상공동체’ 섹션의 주제가 성매매였고, 그에 관한 6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또한 “아시아 지역 성매매 현실과 비디오 액티비즘”이란 주제로 국제포럼도 열렸다.
나는 4편의 영화를 보면서,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시선에 불편해하기도 했고, 성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를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영화속의 성노동자들은 좀더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차이를 만드는 카메라의 일방성
<마마상, Remember Me This Way>
마마상은 업주에게 고용되어 클럽과 성매매 여성들을 관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영화는 2004년 민주노총 주최의 미군재배치 반대 시위에서 시작된다. 카메라는 집회 참가자들에게 집회 때문에 먹고살기 힘들어진다며 강하게 항의하는 업주 여성과 그런 창 밖의 소란에 무심하게 텔레비전을 보는 양희이모를 보여준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고, 영화는 나의 어떤 기대를 채우지 못한 채 끝났다.
영화 제작단체인 '연분홍치마'의 감독들은 마마상인 양희이모를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시선으로 담고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감독들은 어느 순간 듣고 싶은 대답(과거 성매매 피해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을 듣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그녀들은 그녀들과 아주 다른 양희이모의 삶을 이해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감독들의 말처럼, 감독들과 양희이모 사이의 '차이'(다름)는 그 차이를 인정하면 되는 것일까. 오히려 감독들이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양희이모 자신과 그녀들이 양희이모의 삶을 보는 시각이 차이였다. 나의 불편함은 그런 거리감을 고스란히 담아낸 카메라의 솔직함에 있었다. 솔직함은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그건 양희이모를 이해하지 못한, 다른 여성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대기만 한 ‘일방성’이었다.
클럽에서 청소와 통역, 이주 여성들 관리까지를 맡기면서 50만원밖에 안 주는 업주가 자신에게 애들 2차 나가는 걸 시키는 걸 불만스러워 하는 양희이모에게 감독들이 묻는다. “2차는 나쁜 거 아니에요?”하면서, 양희이모가 감독들의 이야기에 맞장구치기를 기대한다. 그녀들은 최저임금에도 못미치는 50만원에 놀라지 않는다. 기지촌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양희이모에게 보여주면서, 과거의 성매매 피해 경험을 말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양희이모는 “어머나..저렇지는 않았어”하며 자기가 있었던 부산의 기지촌과 미군들의 모습을 설명한다. 우리가 매체를 통해 알게된 기지촌의 끔직한 모습을 양희이모가 일했던 곳으로 기억해내기를 바란다. 그리고 도저히 감독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양희이모라는 사람은 다양한 여성의 삶의 하나로 이해하자고 얼버무린다.
양희이모는 마마상들 사이의 경쟁에서 불안해한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를 기대한다. 새파랗게 젊은 이주여성들의 ‘개김’은 그런 불안한 위치에 대한 큰 위협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단속 때문에 꽁꽁 숨어있어야 하는 이주여성들의 신세를 안타까워한다. 어쨌든 그녀들은 먹고살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또 그렇게 서로를 걱정하고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양희이모는 한번도 보지 못한 미군 아버지를 둔 혼혈인이었고, 엄마의 두 번의 재혼으로 생긴 동생들을 교육하고 돌보기 위해 성매매를 해야했다. 그녀는 동생들 때문에 기지촌 여성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꾸지도 못했다. 양희이모는 사진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던 잘생긴 아버지 사진을 술을 많이 마신 어느 날 홧김에 태워버린 걸 후회한다. 그리고 그녀가 믿고 의지했던 동료 마마상의 갑작스런 죽음에 슬퍼한다. 양희이모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 줄 꺼라고 믿었던 그녀의 죽음에 그녀는 정말 간절히 하루의 휴가를 바란다.
“오늘 같은 날은 정말 안나갔음 좋겠다. 그지?”
‘튀기’라 놀림받던 어린 시절과 엄마와 동생을 위해 성매매로 돈을 벌어야 했던 비혼인 그녀에게 반복해서 결혼에 실패했던 엄마도, 그녀를 찾지 않는 아빠도, 그녀의 마지막조차 보아줄 거라고 기대되지 않는 동생들도 원망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기에 성매매 현장의 잔인함은 다른 곳에 있다.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가족, 가족 속의 여성의 일, 가족부양의 짐이 양희이모에게 숙명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 그곳에 세상의 잔인함이 숨어있다.
“당신은 왜 길거리 청소하는 일 대신 성매매를 선택했습니까?”
<공창묵시록>, <생명구원의 식초: 탈성매매 여성들의 목소리>
영화는 거리에서 시위에 나선 성노동자 레이쿤과 주부와의 논쟁 1997년 9월 6일 대만 첸슈이벤 시장은 허가받은 128명의 대만 성매매 여성의 허가증이 무효라고 선포한다. 하룻밤 사이에 이 128명의 성매매 여성들은 경찰의 단속, 일상적인 감시와 괴롭힘의 표적이 된다. 이날 이전 그들은 고객에게 폭행과 학대를 받았을 경우 경찰에게 의지하고 법적인 보호를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성매매 여성들이었다. 정부는 외설반대 캠페인에서 이런 결의를 드러내기 위해, 시장은 의도적으로 128명 여성들의 노동을 불법으로 선포하는 무자비한 조치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들 대부분은 40대 중반에 글을 좀 아는 비혼모들이고, 또 상당수는 많은 가족들을 돌보고 있다. 시정부는 이들 성매매 여성들에게 보조금을 약속했지만, 나중에 이들은 정부의 자선 기금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는 생계를 위해 일할 수 있으니 그 일을 하게 두라고.” 그래서 허가증 무효에 항의하는 허가받은 성매매 여성들의 대만 동맹(TALP)의 활동이 시작된다. 결국 성매매 여성들이 새로운 정책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한 2년의 유예기간을 얻어낸다. 만일 어떤 형태로든 TALP와 성매매의 비범죄화를 지지한다면, 이것이 대만에서 “성산업”을 장려하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논쟁을 시작했다.(여성영화제 국제포럼 자료집)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여성: 왜 이런 일을 고집스럽게 계속하는 거죠?
레이쿤: 왜냐구요? 시정부가 우리에게 준 이 일, 우리에게 허가증을 줘 놓고 40시간 내에 다시 그 허가증을 빼앗아 가 버리는데,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여성: 내 인격에서라면, 난 차라리 굶어 죽었을거예요. 이런 종류의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거예요. 아시겠어요?
레이쿤: 나야 굶어서 죽을 수 있지요. 하지만 아이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어요, 이해하겠어요?
여성: 그건 각 개인의 인격에 따라 다르지요.
레이쿤: 내 아이들 역시도 살아남기 위해서 대학에 가길 원하고, 그럴 필요가 있다구요!
여성: 그럼, 왜 이런 일을 해요?
레이쿤: 이런 일을 하는 게 망신스러운(체면을 잃는 건)가요?
여성: 당연히 망신이지요.
레이쿤: 난 창피하지 않아요. 내가 뭘 훔치거나 빼앗았나요? 당신한테 돈을 빌렸나요?
여성: 아니요. 그리고 난 당신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에요.
레이쿤: 아니, 당신은 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며 체면 같은 거는 차리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내가 당신한테 뭘 뺏었나요? 당신 남편을 훔친 적 있나요? 당신한테 돈을 빌렸나요? 그렇지 않다면, 왜 이 일을 하는 게 당신 말처럼 체면을 잃는 일이지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돈을 버는 일인데요.
여성: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나라면 절대 이런 일은 안 할 거예요.
레이쿤: 결혼했다는 건 장기 식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내가 가진 건 일회용 식권이라는 것뿐이에요. 거기에 무슨 체면 이런게 있냐는 말이지요. 당신은 남편이랑 결혼했으니 그 남자랑만 자야 하는 거고, 우리도 다른 사람들하고 자야 하는 거죠. 여기 어디에 체면이 없다는 거지요? 그걸 물어보고 싶어요.
여성: 난 당신처럼 모든 남자하고 자지는 않아요, 내 남편하고만 자지.
여성영화제는 여성감독만의 영화만 상영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남성감독이 찍었으나, 대만의 성노동자연대 단체는 코스와스 COSWAS(Collective of Sex Works and Supports): COSWAS는 성노동자들의 권리를 후원하는 사람들과 성산업에 대한 정책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타이페이 공창연합(TALP)에 의해 결성되었다. COSWAS의 결성은 1년 7개월 전부터 시작된 타이페이 공창연합의 적극적인 투쟁의 연장선상이다. COSWAS는 공창 제도와 공창들의 현주소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 목적이다. 또한, 장기적으로 성노동자들의 권리와 그들의 노동조건을 향상시키는 것 역시 COSWAS가 하려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성산업에 대한 정책토론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성매매정책과 성관련 산업시스템이 확립되도록 노력하고 있다.의 의뢰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특별 상영되었다. 이번 서울여성영화제에 코스와스의 대표 왕팡핑과 코스와스 회원 아인씨가 참석했다.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에서 왕팡핑은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지 물어보세요. 그리고 질문으로 성노동자인 아인씨가 상처받을까봐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8년의 투쟁으로 우리에게 쏟아질 비슷한 질문들에 단련되어 있습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더라도 왜 길거리 청소부가 아닌 성매매를 선택했냐는 질문은 1998년 대만 유이한 강당에서 열린 성 노동자와 함께 한 회의에서 여성주의학자가 질문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성매매 여성들에게 쏟아지는 일반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국제포럼 토론에서 왕팡핑은 대만에서 성노동자와 관련된 2단계 논쟁에 대해 설명했다. 1단계 논쟁에선 일반시민들의 생각과 다른 성노동자들의 노동 현실을 밝혔다고 한다. 여권주의자들 “어떻게 감정없이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성노동자들은 “감정있는 사랑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권주의자들이 자신들을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구세주처럼 탈성매매(탈출)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성노동자들을 어떻게 다치게 하는지를 설명했다고 한다. 2단계 논쟁에선 여권주의자들은 논의를 바꿔, “이들은 우리의 자매들이다. 지금은 남성이 문제다. 고객을 벌해야지, 여성을 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왕팡핑은 왜 남성의 욕망이 문제인지, 왜 남성들이 성구매를 하게 되는가를 질문하면서, 이제 공개적인 토론의 장에서 성과 섹스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 큰 장기는 성기가 아니라 ‘뇌’이다. 부부가 즐거운 성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한 공개적 토론을 해야 합니다.”
노동운동 활동가 출신이라고 밝힌 왕팡핑은 8년 동안의 코스와스의 투쟁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성노동자들의 ‘현실’은 그들이 범죄자 취급을 당해왔으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허락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노동자들의 ‘현실’이란 그들의 기본적인 노동할 권리를 박탈당했거나 또는 최악의 노동 조건을 참아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즉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성노동자들이 그들의 기본적인 노동권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즉시 해야 할 일은 성노동과 성노동자들을 범죄/범죄자로 보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일입니다.”(국제포럼 자료집)
또 한편의 영화 <생명구원의 식초: 탈성매매 여성들의 목소리>는 성노동자들이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금지당하고 나서, 나이 많은 4-50대 성노동자들이 식초생산 공장을 설립함으로써 실제로 직업을 바꾸려고 노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다. 97년 공창폐지 이후 그녀들은 병들고, 우울하고, 상처받고, 자살 경향까지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대만의 많은 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녀들에겐 ‘직업을 바꾸려’한다는 생각자체가 수치였을 정도로, 그 과정은 힘들었고,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영화에서 공창폐지에 항의하는 성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학생, 사회단체 활동가들의 모습과 모금을 위해 노동자 시위대열을 갈라서 지나칠 때 노동자들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왕팡핑에게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며, 어떻게 대만의 사회운동이 성노동자운동과 연대할 수 있었는가를 질문했을 때, 왕팡핑은 공창폐지를 반대하는 성노동자들의 시위가 있었고,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준비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코스와스도 불법적으로 일하는 사창의 성노동자들을 만나기는 무척 어렵기 때문에 한국에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대만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고 토론하는 자리에서 성노동자와 연대하는 활동가의 말로 끝난다.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만날 수 있었고, 우리가 여기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작년가을, 여의도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과 구별되었고, 그녀들의 주장을 적기 위해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었던 나는 기자로 오인되었다. "꼬투리 잡을 것만 쓰지 말고, 정말 우리 이야기를 전해줘요..정말 못살겠어요!", "이제 담배 살 돈도 없어서 담배 못핀다고 하면 안믿을꺼죠?"라며 불신에 가득찬 말을 던지는 여성들에게 나는 기자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구경꾼이었을 뿐이었다. 성매매방지법의 가장 큰 목적이 업주와 성매매여성의 고리를 끊어내는데 있다고 말했던 여성단체들은 그녀들과 함께 하지 않았고, 유일하게 그녀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업주들과 집장촌 상인들뿐이었다.
우리는 마음속의 행복을 생산합니다.
<밤의 요정들의 이야기>
이 영화는 인도의 성매매 밀집 장소인 캘커타 홍등가의 DMSC 두바르 여성협력위원회(DMSC: Dubar Women's collaborative committee)는 성노동자들과 그 아이들로 구성된 포럼이다. 이 단체는 1995년 7월 캘커타의 가장 크고 오래된 성노동 지역 중 하나인 소나가치의 성노동자들이 모여 조직한 단체이다. 이 단체의 주된 목적은 성노동자 전체의 공동체를 통해 연대를 조직하여 집단적인 힘을 키우고, 노동자로서 그들 자신의 긍정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하고, 성노동에 대한 합법적이고 사회적인 인식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DMSC의 창립 멤버들은 1992년 소나가치 성노동 지역에서 시작된 성병과 에이즈 방지 프로그램의 동료 교육자로서 모이게 되었다. DMSC의 액티비스트들은 성노동자들 스스로 선택권을 가지고 안전한 섹스를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성매매의 안과 밖에서 그들의 삶을 통제하는 다양한 구조적 장벽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시작부터 깨달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성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것이 성노동자들의 그들만의 조직을 만들게 된 원동력이었다.
1997년 DMSC 활동가들이 1회 전국 성노동자 회의에서 세계화와 이주문제로 발생한 인신매매 문제를 지적한 이래로 DMSC는 미성년 소녀들이 성노동 분야로 팔려오는 경우나 사기, 혹은 강요로 인해 성노동을 하게 된 여성들의 경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DMSC는 성노동자들의 물질적 빈곤과 사회적 배제와 관련하여 그들이 일상에서 부딪히는 현실을 구성하는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이에 도전하는 활동을 한다. 이러한 과점에서 DMSC는 성노동자들이나 그 자녀들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착취하고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데 반대한다. 또한, DMSC는 강제적 노동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명백히 반대한다. 더 나아가 DMSC는 성노동도 노동이므로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 결정되고 시행되는 규범과 조건이 성노동에도 있어야 하고, 이는 누구든 성노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DMSC는 미성년 소녀들이나 자신의 의사에 관계없이 강요당한 성인 여성들의 인신매매와 성노동자화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국제포럼자료집)
성노동자들의 단결과 저항을 그린 이야기다. 성노동자들은 조직을 만들고 투쟁하면서 이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따질 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경찰들이 성매매 여성들을 무조건 잡아갔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면 “거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녀들은 콘돔을 거부하는 고객에게 “콘돔을 끼면 내가 더 좋다”고 설득해서 안전하게 돈을 벌 줄 알고, 폭탄을 들고 와서 협박하는 남자를 함께 제압하고, 무조건 폭력을 행사했던 경찰에 대해 진단서를 끊어 해고시킨다. 그리고 자치위원회를 결성해서 성노동자들이 직접 가가호호 방문해서 안전하게 성노동할 방법을 알려주면서 성노동자들을 조직하고, 18세 이하 미성년이나 인신매매된 노동자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영화는 2001년 3월, DMSC의 성노동자들이 기획하고, 조직, 주최한 삼일간의 “밀레니엄 카니발”을 초점으로 하고 있다. 인도 정부는 델리여성단체들의 반대 시위를 의식해서 쉽게 축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성노동자들은 축제 허가를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결국 허가를 받아내 축제는 잘 알려져 있는 대중적 장소인 캘커타의 솔트레이크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영화 감독 쇼히니 고쉬는 어렸을 적 살던 캘커타를 다시 찾아간다. 가정집들과 다른, 혹은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지적받았던 홍등가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밀레니엄 카니발 개최는 성노동자들이 그/녀들에게 사회가 그어놓은 경계를 뚫고 나온 도전이었던 셈이다. 고쉬는 “성매매에 대한 비난은 단지 돈으로 성을 거래되는 여성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용납할 수 없다고” 여기는 관습과 규범들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위반하는 모든 여성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온 수많은 성노동자들, 일반 시민들, 도시 지식인들이 축제에 참석했고, 축제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들이 토론되었다.
DMSC는 6만에 이르는 성노동자 조직이다. 인도는 높은 실업률 때문에 길거리 행상에서도 여성들이 일하는 것을 보기 쉽지 않다. 이혼해서 부양할 아이들이 있거나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서조차 인도여성들에게 주어진 직업은 다양하지 않다. 두 번의 결혼 경험이 있는 한 성노동자는 다른 지역을 여행하면서 자신이 맘에 든다는 남자를 만났다. 그녀는 말했다. “나랑 자고 싶다면, 내가 캘커타에서 일을 하니 꼭 돈을 갖고 오라”고. DMSC의 성노동자들은 성매매가 성노동이라 주장하며, 노동조합 인정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녀들은 말한다.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 노동자라면, 우리는 마음속의 행복을 생산합니다.”
그녀들은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노동조건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들의 당당함은 투쟁의 힘에서 나온다. “우리가 이렇게 투쟁을 계속한다면, 대학을 나온 여성들도 이곳에서 일하게 될 거예요.”
이 말은 내게 도전적인 질문이 되었다. 나는 ‘빈곤의 여성화’라는 성매매의 구조적인 원인을 극도의 가난 때문에 성매매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쇼히니 고쉬는 묻는다. “가난해서 성매매를 하는 것은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로 성매매를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나?” 그래서 감독은 영화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게이 성노동자를 자꾸 등장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걷고 싶은 방법으로 걷고, 사랑할 수 있는 다른 공동체에서 자유를 찾는다.
후기- 보고 싶은 데로 보기, 감추어진 역사
국제포럼에서 왕팡핑은 마이크를 성노동자 아인에게 넘겼다. 우리는 그녀가 직접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아인이 “97년에 공창이 폐지되고 나서 정말 힘들었습니다...”라고 말하다 말을 잇지 못했다. 왕팡핑은 그동안 공창폐지 이후 힘들었던 기억이 아인씨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포럼이 있던 다음날 나는 <공창묵시록>을 보게 되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아인씨가 뒤늦게 무대앞으로 나올 때, 사회자(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가 말했다. “어제 성매매에 관한 국제포럼이 있었는데..40년인가요? 오랫동안의 성매매를 한 기억이 힘들어서 어제 아인씨가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정정하기 위해 손을 들었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사회자는 “우리나라에선 아직 성노동자가 출현하지 않았지만...”이라는 단서도 달았다. 그러나 전날 국제포럼에 한여연 대표, 김문희씨가 참석했고, ‘하나의 직업군으로 인정하고 성노동자로서, 그리고 성노동자로서의 권리를 갖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요구사항을 발제했다. 어찌보면, 우리가 없는 역사라고 생각하는 성노동자 운동은 의도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전 기지촌여성운동사를 읽게 되었다. 국가가 기지촌 여성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었던 자치규제(정화)위원회는 기지촌 여성들이 모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살벌했던 유신 시절에 집회를 하게 되는 힘이 되기도 했었다.
1971년 송탄에서 미군들이 화대와 기지촌 물가가 비싸다며 신발과 쇼트타임 화대를 5불로, 롱타임 화대를 10불로 인하할 것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배포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미군들의 화대 떼먹기와 화대 인하요구에 대항하였다. 천 명이 넘는 동료 매춘여성들을 조직하여 '우리는 신발이 아니라 인간이다'를 외치며 미군부대 앞에서 데모를 벌였다. 살벌했던 유신시절, 기지촌여성들의 작은 권익을 찾기 위한 노력조차 '북한과의 연계'로 몰려 그녀는 경찰서로 끌려갔다.(정희진, 1999)
이 시위를 주도했던 김연자씨는 최초의 기지촌여성운동가이다. 그녀는 한국사회에서 기지촌 여성이 다루어지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기지촌여성을 ‘인간이하’로 보는 것, 동정하는 것, 반미의 상징으로 이미지화 하는 것, 제국주의 침략의 가장 큰 희생자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그녀는 스스로 말하고자 하고 기지촌여성도 한국사회의 일원으로 주체화되기를 원한다.
다루어지는 방식은 다르지만, 한국, 대만, 인도의 성노동자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가 있다. 그건 바로 가족의 문제다. 성매매 문제는 빈곤의 여성화에 대한 투쟁과 함께 지금의 가족형태를 바꾸지 않고 해결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성매매 없는 사회는 지금 사회에서 성매매와 성매매여성만 도려낸 사회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도 없고, 왜곡된 남녀관계도 없는, 여성의 성이 억압되지 않는, 그래서 성매매가 없는 그런 사회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투쟁에 성노동자들이 있고, 우리는 그녀들의 투쟁에 함께 해야 한다.PSSP
참고문헌
일다(www.ildaro.com), 「마마상 이모의 일상과 기지촌의 현재」, 2004.3.28
정희진, 「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 『한국여성인권운동사』, 1999
『아시아 지역 성매매 현실과 비디오 액티비즘』, 서울여성영화제 국제 포럼 2005 자료집
고정갑희, 「성매매방지특별법과 여성주의자들의 방향 감각」, 『여/성 이론』, 2005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