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평화 운운하는 '세력균형론'의 기만성
이 소 형 | 조직교육부장
'동북아 세력균형'론
노무현 대통령은 3월 22일 육군 3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한반도는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해나갈 것이며 주권국가로서의 당연한 권한과 책임을 다할 것"이라며 이른바 '동북아 균형론'을 언급했다. 이를 계기로 한 축에서는 한-미 동맹의 파탄을 우려하며 '386 반미투쟁 세대의 과대망상'이라며 개탄의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또 한 축에서는 노무현 정부가 중국과 미-일 동맹 중 어디에 무게를 실을 것인지 갈등하고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또한 독도-다케시마 사태로 불거진 한-일간의 외교 갈등에서 노무현정부가 일본에 대한 강력한 항의를 표명한 것에 대해 일본과 미국에게 할 말은 하는 '자주적인 외교노선'이 본격화되었다는 언론보도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한-일간의 외교적 긴장고조와 북한의 핵보유선언, 중국-대만문제, 미국의 동아시아 주둔미군재편 등 복잡하게 얽혀있는 동북아시아의 군사, 외교적 갈등에 대하여 노무현 정부가 내걸고 있는 '세력균형자'론은 '한반도의 자주성 실현'에 조응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지난 3월 초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언급, 일본에게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실질적 배상요구,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강력한 불만토로, 미국의 대북강경노선 비판 등과 같은 맥락에서 노무현 정권의 '자주외교, 자주국방 실현'이라는 모토가 비로소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는 평가가 덧불여지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한 정부가 한-미-일 동맹에 문제를 제기하고 외교와 국방정책에 대해 독자적인 자기노선을 세우겠다는 공식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이례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동북아 세력균형론"은 산적해있는 동북아 외교, 군사문제에 '자주적인' 해법이 될 수 있는가?
동북아 세력균형자로서의 미국이 원하는 것.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세력균형론'을 설명하면서 "한-미-일 남방 3각 동맹은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가 언제까지 그 틀에 갇혀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라는 발언을 덧붙였다. 중국과 미-일동맹의 갈등구도에서 어느 한쪽 편만을 들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부는 세력균형자론의 전제조건은 더욱 굳건한 한-미동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한-미동맹강화와 동북아 냉전구도에서의 중립성을 동시적으로 추진한다"는 기묘한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중국의 존재와 한반도 분단 상황은 여전히 동북아에서의 냉전적 갈등구도를 존속시키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미-일 동맹의 목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냉전적 갈등구도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은 지난 2월 19일 워싱턴에서 양국 외무-국방장관간의 '2+2회담'을 통해 새로운 미-일 안보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이 선언은 해외주둔미군재배치 계획(GPR)에 따른 자위대와 주일미군간의 역할, 임무, 능력의 통합적 운용을 구체화하는 것과 더불어 '미-일 동맹의 세계화'를 강력히 천명하고 있다.
냉전시기 일본은 '반공'의 전진기지로서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사활적인 이해가 걸려있는 지역이었고 때문에 미-일 동맹은 강화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이후 미-일 군사동맹은 오히려 급속도로 강화되었다. 미국은 가상 주적인 소련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냉전이 최고로 치달은 시점에서도 일본에게 부과된 적 없는 군사적 중책을 일본에 맡겼다. 1996년 클린턴과 하시모토 일본총리가 서명한 미-일 공동안보선언은 일본에 10만 명의 미군주둔을 찬성하는 것을 골자로 일본본토방위에만 머물렀던 미-일 동맹을 완전히 재구성하였는데, 이는 1997년 미-일 방위협력지침(U.S.-Japan Guidelines for Joint Defense)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몹시 어색하게도 국가 간 외교협약을 '지침'이라고까지 명시하고 있는 이 새로운 군사조약은 미국이 전 세계 어느 곳에서 시작하고 수행하는 전쟁이라도 그것이 일본의 안보에 관련되었다고 생각되면 일본 자위대의 참여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지침'에 들어있는 '주변사태'라는 표현은 '주변'이 어디까지인지, '사태'란 무엇인지를 어디에도 명시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일본의 안보를 위협하는 '주변사태'는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황적인 개념이라는 모호한 표현만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 '주변'이 한국과 대만해협이 되었든 중동이나 서남 아시아가 되었든 세계 어디든 상관없으며, 다만 미국이 판단하기에 '사태'가 일본의 평화와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될 때, 미국과 일본은 즉각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방위지침의 배경은 1995년 채택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인데, 이 전략의 창시자이자 당시 국무부 차관이었던 조셉나이((Josepg Nye)는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미-일 안보관계는 (바퀴가 빠지지 않게 고정하는)린치핀(linchpin)이다. 우리에게 미-일 안보관계는 아시아에서나 전 세계적으로나 근본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린치핀'인 미-일 동맹 하에 한-미 동맹 역시 지속적으로 현대화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은 2004년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에 이어 올해부터 '차관급 고위급전략회의'를 개설한다. 2006년 새로운 '한-미 안보공동선언'을 작성한다는 일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미 동맹의 전반적인 미래구상이 명시될 예정이다. 이는 '2.19 신(新) 미-일 안보선언'을 작성하는 과정과도 동일한 수순을 밟고 있는데,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통합운용처럼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역할분담과 통합운영이 중요한 쟁점으로 논의될 전망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전략을 위한 '한-미-일 동맹의 현대화'는 일본과 한국의 독자적인 군사역량강화와 동맹국들의 '자율적인 무장화'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미-일 동맹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는 한-미 동맹은 '미-일 동맹의 세계화'에 발맞추어 현대화되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또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에서 일본과 중국의 갈등을 제어하는 '세력균형자' 역할을 강화해야 하는데, 바로 여기에 미-일, 한-미 동맹의 중요한 임무가 부과되는 것이다. 일본의 재무장화는 동북아에서 미-일 동맹 강화의 또 다른 얼굴이며, 북한, 중국, 러시아까지 뻗쳐있는 일본주도의 영토분쟁은 동아시아에서 지속적인 갈등의 요인이자 동시에 미국의 동아시아 전력배치의 합리적 근거로 작동되고 있다. 한국 역시 적합한 역할을 부여받아야 하는데 동북아에서 보다 안정적인 미국주도의 다자간 안보체계를 확립시키는 과제, 즉 북한과 중국에 대해 견제와 화해를 조절하는 역할을 받아 안고 한국정부 스스로 자국의 비용을 들여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지위를 유지, 강화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자주'의 실체는 있는가?
노무현 정부는 기만적이게도 '동북아 세력균형론'을 거론하면서 "한-미동맹에 대해서도 한국정부가 이견이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3월 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원칙으로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간의 이견에 대해 주한미군 추가감축이라는 미국의 협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군과 무관하게 국군이 한반도 방위를 스스로 맡을 수 있도록 자주국방계획을 빠른 시일 내에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무현이 선전하고 있는 '자주외교노선'과 더불어 '자주국방실현'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한국정부의 주체적인 해결방안인 양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스스로도 여러 번 강조한 바 있는 '한-미 동맹의 현대화'의 핵심은 주한미군의 감축과 함께 한국군의 '군비증강'을 전제로 하는 군사체계의 재편에 있다. 정부는 이미 2003년 11월 17일 럼스펠드가 방한하여 개최된 제 35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이라크 추가파병과 함께 용산 미군기지 평택 이전, 주한미군 10개 임무 한국군 이양, 한미전력증강방안, 주한미군의 아시아 지역군으로서의 위상과 성격변화 등이 일괄 타결되었다.
주한미군의 평택미군기지집결과 전력재편을 통한 신속대응군화의 구상에 빠지지 않는 것은 주한미군임무의 한국군이양문제와 한-미연합사령부에 부과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의 문제다. 국방비 증액과 한반도 주변의 첨단무기 및 전력증강계획은 주한미군 재편을 중심으로 하는 한-미 동맹 현대화의 이름으로 추진되는 한국정부의 국방정책이다.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lobal Posture Review)은 주둔미군의 규모 축소와 해당 지역방위를 동맹국의 '무장화'를 통해 진행한다. 한국은 이미 '협력적 자주국방'의 이름으로 2조 원의 예산을 들여 2011년까지 주한미군 감축을 메울 전력증강을 진행하고 있다. 2005년도 국방예산 10% 증가, 전력투자비의 12.6% 증대, 그리고 주한미군으로부터 넘겨받은 10개의 특정임무 중 증축사업, 탐색구조임무 전환 장비 등 총 3개 사업에 186억 원을 새로 편성하였고 임무이양과 관련한 예산은 총 368억 원을 증액하였다. 국방부는 한국군이 독자적인 감시, 조기경보 등 정보수집 및 지휘통제(C4I)를 구축하는 것에 2008년까지 2조 6994억 원의 돈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은 미국에게 4대의 공중조기경보통제기, 이지스함, 정찰위성, 대지(對地) 크루즈(순항)미사일, F-15K 전폭기, 무인 정찰기(UAV), 공중급유기를 구입하여 이미 대북억지력을 넘어서는 동북아 지역방위역할을 부담하고 있다. 이렇듯 미국이 일본의 재무장화를 독려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는 '협력적 자주국방'은 현대화된 한-미 동맹의 핵심이다. 미국은 남한의 전력증강을 통해 동북아 군비경쟁과 긴장감 유지,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지역방위비 절감이라는 다양한 효과를 얻어내고 있다.
결국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한-미간의 이견이란 지극히 부차적이고 형식적인 절차문제에 불과하다. 노무현 정부는 '자주적'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동원하여 '동북아 세력균형자'를 운운하며 미국의 동북아 패권전략을 대신 수행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대북 억지력 차원을 넘어서는 전력증강과 동북아 전체를 사정거리 하에 두고 있는 미국의 최첨단 무기를 한반도 배치시키면서 미국의 이해를 적극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정책의 철저한 하수인
2002년 주한미군은 경기북부지역 훈련장 4천 만평을 반환하고 1백54만평을 신설, 확장한다는 계획(한미연합 토지관리계획)을 발표했다. 이 협정은 같은 해 10월 정기국회를 통과하여 평택에서 75만평에 달하는 토지의 미군기지화를 승인하게 된다. 이 때부터 평택시민들은 15개 시민사회단체로 평택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을 전개해왔다. 2003년 4월 전국의 미군 기지를 평택과 대구, 부산으로 통폐합한다는 주한미군 재편 계획에 따라 용산기지와 미2사단 등 주한미군 핵심부대가 평택 팽성읍과 서탄면 일대로 이전하려 하고 있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기를 반복하고 있는 주민들은 1백 14개 사회시민단체 구성된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저항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국방부는 한국토지공사, 대한주택공사, 한국감정원을 위촉하여 본격적인 물건조사를 시작하였고 마을 주민들의 저항이 불거지자 헬리콥터를 동원해 항공촬영을 하는가하면 미군부대 철조망 안에서 사진을 찍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물건조사를 강행하고 있다. 또한 "0216경비대책"이라는 문건이 입수되었는데 이는 평택경찰서가 작성한 것으로 문정현 신부 등 특정인에 대한 감시 및 사복형사들의 수갑휴대를 의무화하는 등 주민들을 범죄인으로 간주하며 공권력 투입을 본격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평택시민 전체의 80%가 반대하는 평택미군기지 이전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 주한미군 감축계획과 함께 협의된 주한미군의 평택기지로의 집결, 이를 위한 평택미군기지의 확장 및 신설은 주한미군의 아-태 지역 신속 대응군으로의 전화, 즉 '전략적 유연성'을 달성하기 위한 본격적인 실행계획이다. 주한미군의 집결지인 평택과 대구, 부산은 주한미군이 동아시아 분쟁발생 시 어느 지역이든 1시간 이내에 출동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가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군대가 동북아 분쟁개입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했다. 그러나 유사시 동아시아 지역 어디로든 즉각 출동할 수 있는 동북아 신속대응군의 집결지인 평택미군기지 이전을 허용하고 있으며, 동북아 전체를 겨냥한 최첨단 미국무기를 도입하기 위해 국방비를 소모하고 있는 행위! 이것이 동북아 분쟁에 이미 깊숙이 휘말리고 있는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민중의 평화를 기만하지 말라.
노무현 정부는 지역 내 강대국의 패권을 포장하는 것에 불과한 '균형자론'이라는 국제정치학 용어를 도용하면서 자주외교, 자주국방이라는 대중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킨다. 실상 어떠한 현실적인 정책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 허위이데올로기는 미국으로부터 부여받은 동북아 군사패권의 철저한 하수인으로서의 한-미동맹의 본질을 은폐한다.
더욱 분노스러운 것은 노무현 정부는 마치 한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견제하고 있는 것인 양, 또한 '세력균형론'을 통해 동북아 전쟁을 막아내는 주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인 양 온갖 정치적 수사를 늘어놓으며 민중의 평화를 기만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중이 제기하고 있는 '진정으로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들' 대해 노무현은 답할 수 있는가. 전 세계 민중이 상식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동북아 평화란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 파병한 한국군과 자위대부터 철수하는 것이며, 북한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 민중을 살상할 수 있는 대량 살상무기와 최첨단 무기체계를 한반도와 동아시아로부터 즉각 철수시키는 것이다. 또한 주민의 생존권을 앗아가는 평택미군기지 이전협상을 전면무효화하고, 주한, 주일미군을 아-태 지역 신속배치군으로 재편하려는 계획을 저지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복지예산의 여섯 배에 달하는 국방비를 감축하고 대북선제공격론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하는 것이다.
동북아 평화를 운운하며 미-일 동맹의 우산을 떠받치고 있는 한-미 동맹이야말로 진정한 동북아 평화의 적이다. 또한 동북아 민중의 평화는 화려한 정치적 수사로 꾸며진 노무현 정부의 기만적인 군사, 외교정책으로서가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민중들의 반미, 반전, 대안세계화운동으로서만 비로소 획득될 것임을 보다 확고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PSSP
'동북아 세력균형'론
노무현 대통령은 3월 22일 육군 3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한반도는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해나갈 것이며 주권국가로서의 당연한 권한과 책임을 다할 것"이라며 이른바 '동북아 균형론'을 언급했다. 이를 계기로 한 축에서는 한-미 동맹의 파탄을 우려하며 '386 반미투쟁 세대의 과대망상'이라며 개탄의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또 한 축에서는 노무현 정부가 중국과 미-일 동맹 중 어디에 무게를 실을 것인지 갈등하고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또한 독도-다케시마 사태로 불거진 한-일간의 외교 갈등에서 노무현정부가 일본에 대한 강력한 항의를 표명한 것에 대해 일본과 미국에게 할 말은 하는 '자주적인 외교노선'이 본격화되었다는 언론보도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한-일간의 외교적 긴장고조와 북한의 핵보유선언, 중국-대만문제, 미국의 동아시아 주둔미군재편 등 복잡하게 얽혀있는 동북아시아의 군사, 외교적 갈등에 대하여 노무현 정부가 내걸고 있는 '세력균형자'론은 '한반도의 자주성 실현'에 조응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지난 3월 초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언급, 일본에게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실질적 배상요구,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강력한 불만토로, 미국의 대북강경노선 비판 등과 같은 맥락에서 노무현 정권의 '자주외교, 자주국방 실현'이라는 모토가 비로소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는 평가가 덧불여지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한 정부가 한-미-일 동맹에 문제를 제기하고 외교와 국방정책에 대해 독자적인 자기노선을 세우겠다는 공식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이례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동북아 세력균형론"은 산적해있는 동북아 외교, 군사문제에 '자주적인' 해법이 될 수 있는가?
동북아 세력균형자로서의 미국이 원하는 것.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세력균형론'을 설명하면서 "한-미-일 남방 3각 동맹은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가 언제까지 그 틀에 갇혀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라는 발언을 덧붙였다. 중국과 미-일동맹의 갈등구도에서 어느 한쪽 편만을 들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부는 세력균형자론의 전제조건은 더욱 굳건한 한-미동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한-미동맹강화와 동북아 냉전구도에서의 중립성을 동시적으로 추진한다"는 기묘한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중국의 존재와 한반도 분단 상황은 여전히 동북아에서의 냉전적 갈등구도를 존속시키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미-일 동맹의 목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냉전적 갈등구도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은 지난 2월 19일 워싱턴에서 양국 외무-국방장관간의 '2+2회담'을 통해 새로운 미-일 안보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이 선언은 해외주둔미군재배치 계획(GPR)에 따른 자위대와 주일미군간의 역할, 임무, 능력의 통합적 운용을 구체화하는 것과 더불어 '미-일 동맹의 세계화'를 강력히 천명하고 있다.
냉전시기 일본은 '반공'의 전진기지로서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사활적인 이해가 걸려있는 지역이었고 때문에 미-일 동맹은 강화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이후 미-일 군사동맹은 오히려 급속도로 강화되었다. 미국은 가상 주적인 소련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냉전이 최고로 치달은 시점에서도 일본에게 부과된 적 없는 군사적 중책을 일본에 맡겼다. 1996년 클린턴과 하시모토 일본총리가 서명한 미-일 공동안보선언은 일본에 10만 명의 미군주둔을 찬성하는 것을 골자로 일본본토방위에만 머물렀던 미-일 동맹을 완전히 재구성하였는데, 이는 1997년 미-일 방위협력지침(U.S.-Japan Guidelines for Joint Defense)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몹시 어색하게도 국가 간 외교협약을 '지침'이라고까지 명시하고 있는 이 새로운 군사조약은 미국이 전 세계 어느 곳에서 시작하고 수행하는 전쟁이라도 그것이 일본의 안보에 관련되었다고 생각되면 일본 자위대의 참여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지침'에 들어있는 '주변사태'라는 표현은 '주변'이 어디까지인지, '사태'란 무엇인지를 어디에도 명시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일본의 안보를 위협하는 '주변사태'는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황적인 개념이라는 모호한 표현만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 '주변'이 한국과 대만해협이 되었든 중동이나 서남 아시아가 되었든 세계 어디든 상관없으며, 다만 미국이 판단하기에 '사태'가 일본의 평화와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될 때, 미국과 일본은 즉각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방위지침의 배경은 1995년 채택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인데, 이 전략의 창시자이자 당시 국무부 차관이었던 조셉나이((Josepg Nye)는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미-일 안보관계는 (바퀴가 빠지지 않게 고정하는)린치핀(linchpin)이다. 우리에게 미-일 안보관계는 아시아에서나 전 세계적으로나 근본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린치핀'인 미-일 동맹 하에 한-미 동맹 역시 지속적으로 현대화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은 2004년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에 이어 올해부터 '차관급 고위급전략회의'를 개설한다. 2006년 새로운 '한-미 안보공동선언'을 작성한다는 일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미 동맹의 전반적인 미래구상이 명시될 예정이다. 이는 '2.19 신(新) 미-일 안보선언'을 작성하는 과정과도 동일한 수순을 밟고 있는데,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통합운용처럼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역할분담과 통합운영이 중요한 쟁점으로 논의될 전망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전략을 위한 '한-미-일 동맹의 현대화'는 일본과 한국의 독자적인 군사역량강화와 동맹국들의 '자율적인 무장화'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미-일 동맹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는 한-미 동맹은 '미-일 동맹의 세계화'에 발맞추어 현대화되어야만 하는 상황이다. 또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에서 일본과 중국의 갈등을 제어하는 '세력균형자' 역할을 강화해야 하는데, 바로 여기에 미-일, 한-미 동맹의 중요한 임무가 부과되는 것이다. 일본의 재무장화는 동북아에서 미-일 동맹 강화의 또 다른 얼굴이며, 북한, 중국, 러시아까지 뻗쳐있는 일본주도의 영토분쟁은 동아시아에서 지속적인 갈등의 요인이자 동시에 미국의 동아시아 전력배치의 합리적 근거로 작동되고 있다. 한국 역시 적합한 역할을 부여받아야 하는데 동북아에서 보다 안정적인 미국주도의 다자간 안보체계를 확립시키는 과제, 즉 북한과 중국에 대해 견제와 화해를 조절하는 역할을 받아 안고 한국정부 스스로 자국의 비용을 들여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지위를 유지, 강화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자주'의 실체는 있는가?
노무현 정부는 기만적이게도 '동북아 세력균형론'을 거론하면서 "한-미동맹에 대해서도 한국정부가 이견이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3월 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원칙으로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간의 이견에 대해 주한미군 추가감축이라는 미국의 협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군과 무관하게 국군이 한반도 방위를 스스로 맡을 수 있도록 자주국방계획을 빠른 시일 내에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무현이 선전하고 있는 '자주외교노선'과 더불어 '자주국방실현'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한국정부의 주체적인 해결방안인 양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스스로도 여러 번 강조한 바 있는 '한-미 동맹의 현대화'의 핵심은 주한미군의 감축과 함께 한국군의 '군비증강'을 전제로 하는 군사체계의 재편에 있다. 정부는 이미 2003년 11월 17일 럼스펠드가 방한하여 개최된 제 35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이라크 추가파병과 함께 용산 미군기지 평택 이전, 주한미군 10개 임무 한국군 이양, 한미전력증강방안, 주한미군의 아시아 지역군으로서의 위상과 성격변화 등이 일괄 타결되었다.
주한미군의 평택미군기지집결과 전력재편을 통한 신속대응군화의 구상에 빠지지 않는 것은 주한미군임무의 한국군이양문제와 한-미연합사령부에 부과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의 문제다. 국방비 증액과 한반도 주변의 첨단무기 및 전력증강계획은 주한미군 재편을 중심으로 하는 한-미 동맹 현대화의 이름으로 추진되는 한국정부의 국방정책이다.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lobal Posture Review)은 주둔미군의 규모 축소와 해당 지역방위를 동맹국의 '무장화'를 통해 진행한다. 한국은 이미 '협력적 자주국방'의 이름으로 2조 원의 예산을 들여 2011년까지 주한미군 감축을 메울 전력증강을 진행하고 있다. 2005년도 국방예산 10% 증가, 전력투자비의 12.6% 증대, 그리고 주한미군으로부터 넘겨받은 10개의 특정임무 중 증축사업, 탐색구조임무 전환 장비 등 총 3개 사업에 186억 원을 새로 편성하였고 임무이양과 관련한 예산은 총 368억 원을 증액하였다. 국방부는 한국군이 독자적인 감시, 조기경보 등 정보수집 및 지휘통제(C4I)를 구축하는 것에 2008년까지 2조 6994억 원의 돈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은 미국에게 4대의 공중조기경보통제기, 이지스함, 정찰위성, 대지(對地) 크루즈(순항)미사일, F-15K 전폭기, 무인 정찰기(UAV), 공중급유기를 구입하여 이미 대북억지력을 넘어서는 동북아 지역방위역할을 부담하고 있다. 이렇듯 미국이 일본의 재무장화를 독려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는 '협력적 자주국방'은 현대화된 한-미 동맹의 핵심이다. 미국은 남한의 전력증강을 통해 동북아 군비경쟁과 긴장감 유지,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지역방위비 절감이라는 다양한 효과를 얻어내고 있다.
결국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한-미간의 이견이란 지극히 부차적이고 형식적인 절차문제에 불과하다. 노무현 정부는 '자주적'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동원하여 '동북아 세력균형자'를 운운하며 미국의 동북아 패권전략을 대신 수행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대북 억지력 차원을 넘어서는 전력증강과 동북아 전체를 사정거리 하에 두고 있는 미국의 최첨단 무기를 한반도 배치시키면서 미국의 이해를 적극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정책의 철저한 하수인
2002년 주한미군은 경기북부지역 훈련장 4천 만평을 반환하고 1백54만평을 신설, 확장한다는 계획(한미연합 토지관리계획)을 발표했다. 이 협정은 같은 해 10월 정기국회를 통과하여 평택에서 75만평에 달하는 토지의 미군기지화를 승인하게 된다. 이 때부터 평택시민들은 15개 시민사회단체로 평택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을 전개해왔다. 2003년 4월 전국의 미군 기지를 평택과 대구, 부산으로 통폐합한다는 주한미군 재편 계획에 따라 용산기지와 미2사단 등 주한미군 핵심부대가 평택 팽성읍과 서탄면 일대로 이전하려 하고 있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기를 반복하고 있는 주민들은 1백 14개 사회시민단체 구성된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저항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국방부는 한국토지공사, 대한주택공사, 한국감정원을 위촉하여 본격적인 물건조사를 시작하였고 마을 주민들의 저항이 불거지자 헬리콥터를 동원해 항공촬영을 하는가하면 미군부대 철조망 안에서 사진을 찍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물건조사를 강행하고 있다. 또한 "0216경비대책"이라는 문건이 입수되었는데 이는 평택경찰서가 작성한 것으로 문정현 신부 등 특정인에 대한 감시 및 사복형사들의 수갑휴대를 의무화하는 등 주민들을 범죄인으로 간주하며 공권력 투입을 본격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평택시민 전체의 80%가 반대하는 평택미군기지 이전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 주한미군 감축계획과 함께 협의된 주한미군의 평택기지로의 집결, 이를 위한 평택미군기지의 확장 및 신설은 주한미군의 아-태 지역 신속 대응군으로의 전화, 즉 '전략적 유연성'을 달성하기 위한 본격적인 실행계획이다. 주한미군의 집결지인 평택과 대구, 부산은 주한미군이 동아시아 분쟁발생 시 어느 지역이든 1시간 이내에 출동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가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군대가 동북아 분쟁개입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했다. 그러나 유사시 동아시아 지역 어디로든 즉각 출동할 수 있는 동북아 신속대응군의 집결지인 평택미군기지 이전을 허용하고 있으며, 동북아 전체를 겨냥한 최첨단 미국무기를 도입하기 위해 국방비를 소모하고 있는 행위! 이것이 동북아 분쟁에 이미 깊숙이 휘말리고 있는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민중의 평화를 기만하지 말라.
노무현 정부는 지역 내 강대국의 패권을 포장하는 것에 불과한 '균형자론'이라는 국제정치학 용어를 도용하면서 자주외교, 자주국방이라는 대중이데올로기를 유포시킨다. 실상 어떠한 현실적인 정책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 허위이데올로기는 미국으로부터 부여받은 동북아 군사패권의 철저한 하수인으로서의 한-미동맹의 본질을 은폐한다.
더욱 분노스러운 것은 노무현 정부는 마치 한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견제하고 있는 것인 양, 또한 '세력균형론'을 통해 동북아 전쟁을 막아내는 주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인 양 온갖 정치적 수사를 늘어놓으며 민중의 평화를 기만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중이 제기하고 있는 '진정으로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들' 대해 노무현은 답할 수 있는가. 전 세계 민중이 상식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동북아 평화란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 파병한 한국군과 자위대부터 철수하는 것이며, 북한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 민중을 살상할 수 있는 대량 살상무기와 최첨단 무기체계를 한반도와 동아시아로부터 즉각 철수시키는 것이다. 또한 주민의 생존권을 앗아가는 평택미군기지 이전협상을 전면무효화하고, 주한, 주일미군을 아-태 지역 신속배치군으로 재편하려는 계획을 저지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복지예산의 여섯 배에 달하는 국방비를 감축하고 대북선제공격론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하는 것이다.
동북아 평화를 운운하며 미-일 동맹의 우산을 떠받치고 있는 한-미 동맹이야말로 진정한 동북아 평화의 적이다. 또한 동북아 민중의 평화는 화려한 정치적 수사로 꾸며진 노무현 정부의 기만적인 군사, 외교정책으로서가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민중들의 반미, 반전, 대안세계화운동으로서만 비로소 획득될 것임을 보다 확고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