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과 국사교과서 문제
역사왜곡과 국사교과서 문제
김 대 일 | 회원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역사교육은 때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다.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 국사과의 비중을 늘리겠다느니, 7차 교육과정에서 사회과에 통합된 역사과를 별도로 독립시킨다느니 하는 각종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동안 역사교육이 도외시되었다는 것에 있지 않다. 역사교육의 '양적 빈곤'을 탓하기 전에, '질적 빈곤'을 돌아보아야 한다.
현장에서 국사는 대다수 학생들에게 그리 환영받는 과목이 아니다. 딱딱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국사교과서는 도대체 역사가 학생들의 삶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역사 속에서 학생들이 배워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역사문제를 둘러싼 갈등에 역사교육으로 대처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지금과 같은 교과서로는 그나마도 해결책이 없다. 무엇이 이처럼 교과서를 빈약하게 만들었는가.
국사교과서의 문제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왕조의 변천이라는 뜻의 역(歷)과 이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의 사(史)라는 글자로 이루어진 역사(歷史)라는 단어 그 자체가 증명하듯이, 역사란 본래 권력자의 의지에 의한 기록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기록에 배어있는 권력의 의지는 이를 다른 의미에서 재해석하려했던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우 꿋꿋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역사 '교과서'이다. 본디 공교육이란 그 자체가 민족국가의 발생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공교육이 독일이 민족국가로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공교육이 갖고 있는 성격에 깊은 시사점을 남긴다. 교육권을 놓고 끊임없는 투쟁이 벌어졌지만, 국민의 형성과 관련된 공교육의 역할 자체는 현재까지도 소멸하지 않고 굳건히 살아남았다.1) 그리고 이러한 경직성은 국가가 교육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강할수록 더하며, 파시즘과 패전의 경험을 겪은 일본보다도 오랜 군사독재를 거치며 우익적 민족주의가 공적 담론을 장악한 한국에서 훨씬 더 강하다.
현재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국가가 직접 편찬하며, 다른 교과서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히 전근대시대의 정사(正史) 편찬이라 할 만큼 독단적이며 권위적이다.2) 이렇게 편찬된 국사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는, 한국사를 '민족사의 발전과정'으로 이해하는 단선적이고 우익적인 역사관을 아무 여과 없이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사 교과서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점은 여기서 유래된다. 자연스럽게 서술의 중심에는 민중의 역사보다는 지배자의 역사가 놓이게 되고,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기보다는 정해진 견해에 의한 사실의 나열에 그치게 되고, 민족과 국가라는 우익적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게 된다. 당연히 갈등은 은폐되고 소수자는 기록되지 않으며 한국사가 갖고 있는 어두운 부분들은 미화되거나 또는 누락된다.3) '나선정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국사교과서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이라크 파병의 부당성을 지적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왜곡은 일본에 앞서 한국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근래에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기실 한국의 국사교과서를 좇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이들의 주요 논리는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주변국과 달리 자국민에 대한 혐오감을 지어내는 '자학사관'에 의해 서술되었으며, 따라서 일본 역시 민족 정체성의 함양을 위한 '국적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교과서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모델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은 멀리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매우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차이라면, 한국의 국사교과서가 갖는 반동성은 과거의 유산이 이어지고 있는 것에 있다면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갖는 반동성은 적극적인 우경화 노력의 부산이라는 것 정도일까.
'합의된' 역사인식으로 돌파가 가능한 문제인가?
한중일 3국의 시민단체들과 학계에서는 역사교육을 둘러싼 현재의 갈등에 대한 하나의 노력으로 공동 역사교과서를 편찬하였다. 내용을 떠나 선동적인 구호들로 인민들을 기만해온 각 국의 대처방식보다 일 진전된 소중한 노력임에 틀림없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국경을 넘는 연대를 통해 현재 뚜렷하게 진행되고 있는 각 국의 우경화를 저지하는데 유의미한 성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육이란 결국 권력의 문제이다. 현재의 문제를 상호간의 무지에만 그 원인을 돌리는 것은 결국 이것을 계몽의 문제로 얽어매는 것이다(노무현 대통령이 영상축전을 보내 책의 발간을 환영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문제는 왜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여전히 우익적 민족주의를 고수하고 있으며, 또한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왜 이와 닮아가고 있는가, 중국에선 왜 민족주의적 선동이 줄을 잇고 있는가에 있다. 이것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와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질서가 어떠한 정부와 어떠한 국가와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원하는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일본 전체의 우경화가 과거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없으며 한국의 우익적 민족주의를 아직도 일제 시대의 경험에서 역산하여 끌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강한 국가에 대한 자본의 요구, 일본을 축으로 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대한 긴장감 없이 교육의 내용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어설픈 타협의 결과물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교과서야말로 그 시대 지배계급의 의지를 가장 솔직하게 반영하는 거울이다. 교육현장에서도, 그리고 그 바깥에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 한국, 일본, 중국에서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민족주의의 광풍이 어떠한 맥락에 있는지를 읽어내고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학생들의 삶과 역사를 더불어 숨쉬게 하는, 진실로 억압받은 자를 위한 교육은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1)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함께 공교육의 역할은 공교육이라는 개념이 생긴 이래 가장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여 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공적 영역의 시장화를 넘어 변화하고 있는 민족국가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 정치적인 독재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에서조차 교육에서의 경쟁 도입을 위해 2001년부터 검정교과서 제도로 전환하였다. 또한, 후술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교과서가 그 내용을 놓고 논쟁의 대상으로 오르는 것은 정반대의 의미에서 현재 공교육이 어떠한 것을 요청받는가를 질문하게 한다.본문으로
2) 국사교과서가 국정화된 것은 1972년 10월 유신의 결과였다. 1972년 3월 대구실내 체육관에서 열린 <총력안보를 위한 전국교육자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올바른 국가관에 입각한 우리 교육]이라는 치사를 통해 '국적 있는 교육'과 '주체적 민족사관 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문교부는 그 해 5월 대통령 '유시'에 따라 국사교육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국사를 독립과목으로 추가하여 30점을 배정하고 국사 연구비를 대폭 증액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였다. 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발표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73년 6월이었다.본문으로
3) 글의 분량 상 해당 부분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겠지만, 국사교과서를 조금만 깊게 읽으면 그 교과서의 우익성이 얼마나 명확한지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전쟁이 민족의 웅비나 민족의 위기로 그려져 있고 그 주어도 우리 민족이다. 이 얼마나 우습기 짝이 없는 서술인가.본문으로
김 대 일 | 회원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역사교육은 때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다.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 국사과의 비중을 늘리겠다느니, 7차 교육과정에서 사회과에 통합된 역사과를 별도로 독립시킨다느니 하는 각종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동안 역사교육이 도외시되었다는 것에 있지 않다. 역사교육의 '양적 빈곤'을 탓하기 전에, '질적 빈곤'을 돌아보아야 한다.
현장에서 국사는 대다수 학생들에게 그리 환영받는 과목이 아니다. 딱딱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국사교과서는 도대체 역사가 학생들의 삶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역사 속에서 학생들이 배워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역사문제를 둘러싼 갈등에 역사교육으로 대처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지금과 같은 교과서로는 그나마도 해결책이 없다. 무엇이 이처럼 교과서를 빈약하게 만들었는가.
국사교과서의 문제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왕조의 변천이라는 뜻의 역(歷)과 이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의 사(史)라는 글자로 이루어진 역사(歷史)라는 단어 그 자체가 증명하듯이, 역사란 본래 권력자의 의지에 의한 기록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기록에 배어있는 권력의 의지는 이를 다른 의미에서 재해석하려했던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우 꿋꿋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역사 '교과서'이다. 본디 공교육이란 그 자체가 민족국가의 발생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공교육이 독일이 민족국가로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공교육이 갖고 있는 성격에 깊은 시사점을 남긴다. 교육권을 놓고 끊임없는 투쟁이 벌어졌지만, 국민의 형성과 관련된 공교육의 역할 자체는 현재까지도 소멸하지 않고 굳건히 살아남았다.1) 그리고 이러한 경직성은 국가가 교육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강할수록 더하며, 파시즘과 패전의 경험을 겪은 일본보다도 오랜 군사독재를 거치며 우익적 민족주의가 공적 담론을 장악한 한국에서 훨씬 더 강하다.
현재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국가가 직접 편찬하며, 다른 교과서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히 전근대시대의 정사(正史) 편찬이라 할 만큼 독단적이며 권위적이다.2) 이렇게 편찬된 국사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는, 한국사를 '민족사의 발전과정'으로 이해하는 단선적이고 우익적인 역사관을 아무 여과 없이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사 교과서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점은 여기서 유래된다. 자연스럽게 서술의 중심에는 민중의 역사보다는 지배자의 역사가 놓이게 되고,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기보다는 정해진 견해에 의한 사실의 나열에 그치게 되고, 민족과 국가라는 우익적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게 된다. 당연히 갈등은 은폐되고 소수자는 기록되지 않으며 한국사가 갖고 있는 어두운 부분들은 미화되거나 또는 누락된다.3) '나선정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국사교과서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이라크 파병의 부당성을 지적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왜곡은 일본에 앞서 한국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근래에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기실 한국의 국사교과서를 좇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이들의 주요 논리는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주변국과 달리 자국민에 대한 혐오감을 지어내는 '자학사관'에 의해 서술되었으며, 따라서 일본 역시 민족 정체성의 함양을 위한 '국적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교과서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모델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은 멀리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매우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차이라면, 한국의 국사교과서가 갖는 반동성은 과거의 유산이 이어지고 있는 것에 있다면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갖는 반동성은 적극적인 우경화 노력의 부산이라는 것 정도일까.
'합의된' 역사인식으로 돌파가 가능한 문제인가?
한중일 3국의 시민단체들과 학계에서는 역사교육을 둘러싼 현재의 갈등에 대한 하나의 노력으로 공동 역사교과서를 편찬하였다. 내용을 떠나 선동적인 구호들로 인민들을 기만해온 각 국의 대처방식보다 일 진전된 소중한 노력임에 틀림없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국경을 넘는 연대를 통해 현재 뚜렷하게 진행되고 있는 각 국의 우경화를 저지하는데 유의미한 성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육이란 결국 권력의 문제이다. 현재의 문제를 상호간의 무지에만 그 원인을 돌리는 것은 결국 이것을 계몽의 문제로 얽어매는 것이다(노무현 대통령이 영상축전을 보내 책의 발간을 환영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문제는 왜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여전히 우익적 민족주의를 고수하고 있으며, 또한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왜 이와 닮아가고 있는가, 중국에선 왜 민족주의적 선동이 줄을 잇고 있는가에 있다. 이것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와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질서가 어떠한 정부와 어떠한 국가와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원하는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일본 전체의 우경화가 과거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없으며 한국의 우익적 민족주의를 아직도 일제 시대의 경험에서 역산하여 끌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강한 국가에 대한 자본의 요구, 일본을 축으로 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대한 긴장감 없이 교육의 내용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어설픈 타협의 결과물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교과서야말로 그 시대 지배계급의 의지를 가장 솔직하게 반영하는 거울이다. 교육현장에서도, 그리고 그 바깥에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 한국, 일본, 중국에서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민족주의의 광풍이 어떠한 맥락에 있는지를 읽어내고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학생들의 삶과 역사를 더불어 숨쉬게 하는, 진실로 억압받은 자를 위한 교육은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1)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함께 공교육의 역할은 공교육이라는 개념이 생긴 이래 가장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여 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공적 영역의 시장화를 넘어 변화하고 있는 민족국가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 정치적인 독재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에서조차 교육에서의 경쟁 도입을 위해 2001년부터 검정교과서 제도로 전환하였다. 또한, 후술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교과서가 그 내용을 놓고 논쟁의 대상으로 오르는 것은 정반대의 의미에서 현재 공교육이 어떠한 것을 요청받는가를 질문하게 한다.본문으로
2) 국사교과서가 국정화된 것은 1972년 10월 유신의 결과였다. 1972년 3월 대구실내 체육관에서 열린 <총력안보를 위한 전국교육자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올바른 국가관에 입각한 우리 교육]이라는 치사를 통해 '국적 있는 교육'과 '주체적 민족사관 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문교부는 그 해 5월 대통령 '유시'에 따라 국사교육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국사를 독립과목으로 추가하여 30점을 배정하고 국사 연구비를 대폭 증액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였다. 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발표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73년 6월이었다.본문으로
3) 글의 분량 상 해당 부분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겠지만, 국사교과서를 조금만 깊게 읽으면 그 교과서의 우익성이 얼마나 명확한지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전쟁이 민족의 웅비나 민족의 위기로 그려져 있고 그 주어도 우리 민족이다. 이 얼마나 우습기 짝이 없는 서술인가.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