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L-CIO는 노동 제국주의로 귀환하는가?
1995년 스위니 집행부 당선 이후 미국 AFL-CIO의 대외정책
킴 사입스1)
*번역 : 임 필 수 | 정책편집국장
노동 제국주의와 미국 노동자운동의 비극
미국 노동총연맹-산별노조협의회(AFL-CIO)는 자신의 역사 대부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반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AFL-CIO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움직였고, 진보적인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독재자와 협조했고, 진보적인 정부에 대항하는 반동적인 노동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명백히 입증되었다. 한마디로 AFL-CIO는 우리가 정확히 ‘노동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천을 펼쳤다. AFL-CIA(미국노총-중앙정보국)라는 이름은 좌파의 망상증이 아니며 현실을 정확히 표현한다.
‘노동 제국주의’는 1955년 AFL-CIO의 통합부터 등장한 게 아니다. 정확히 20세기 초, 사무엘 곰퍼스가 지도부를 맡은 미국 노동총연맹(AFL) 때부터 등장했다. AFL은 멕시코혁명 동안 혁명세력을 방해하기 위해 간섭했고, 1차 세계대전에는 정부의 전쟁을 지지했으며, 미국 외교정책 집단 내에서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어도, AFL은 1차 세계대전 후 서반구(특히 멕시코)의 노동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범아메리카노동총연맹(PAFL)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AFL은 윌슨 정부에게 받은 5만 달러를 PAFL 설립에 사용했다.
1924년 곰퍼스가 죽자 대부분의 해외 활동은 일단 끝났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부활했다. AFL은 유럽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처음에는 나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파시스트에 저항한 공산주의자를 목표로 삼았다. 194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훼손하기 위해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고, 그 후에는 유럽대륙에서 소련에 대항하며 미국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장기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CIA는 AFL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CIA가 자금을 중단하자 AFL은 악명 높은 ‘프렌치 커넥션’을 포함해 마약거래에 손을 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라틴아메리카에서 AFL의 활동도 부활했다. 처음에는 반공주의 국제노동조직인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조직(ORIT)를 통해 활동했고, 1954년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하는 데 조력했다. 그러나 쿠바혁명의 성공 이후 AFL-CIO는 이 지역의 도전에 더 적극 대응하려고 아메리카자유노동개발기구(AIFLD)를 창설했다. 특히 AIFLD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한 쿠데타(1964년 브라질과 1973년 칠레)를 위한 기초를 깔았고, 도미니카공화국과 영국령 기니에 간섭했다.
또한 AFL-CIO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활동을 병행했다. 1964년 아프리카아메리카노동센터(AALC)를 설립했고,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항하는 활동을 펼쳤다. 1967년 아시아아메리칸자유노동기구(AAFLI)는 특히 남한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를 돕기 위해 거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AAFLI는 1983-89년 동안 필리핀의 진보적인 노동자조직인 메이데이운동(KMU)에 대항하기 위해 마르코스가 세운 필리핀노동조합회의(TUCP)에 거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이 자금 규모는 폴란드의 연대노조를 포함해 세계 다른 어느 나라의 노동자조직에 지원한 것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AAFLI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95년 존 스위니의 당선과 대외정책 개혁
한마디로 조지 미니와 레인 커크랜드가 의장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AFL-CIO는 반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1980년대 중반 노동운동 내에서 이러한 활동에 반대하는 상당한 흐름이 형성됐다. 1995년 존 스위니가 새로운 의장으로 당선될 때 AFL-CIO의 이러한 활동에 대한 반대는 적어도 하나의 요소였다.
1995년 10월 존 스위니가 당선될 때 많은 활동가들은 AFL-CIO의 대외활동을 급진적으로 개혁하리라 기대했다. 스위니의 초기 활동은 고무적이었다. 1997년 그는 AAFLI, AALC, AIFLD와 유럽에서 활동하는 자유노동조합기구(FTUI)와 같은 반(半)-자율적인 기구들을 해산하게 했고 (보통 연대센터라고 부르는) 아메리카국제노동연대센터(ACILS)라는 중앙집중적인 조직으로 대체했다. 또한 스위니는 국제부에서 오랫동안 냉전의 전사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는 몇몇 개발도상국의 노동자투쟁을 지원하는 긍정적인 노력을 보였고, 이러한 변화는 질적인 개선이었다.
하지만 최근 어떤 사건들은 AFL-CIO의 대외정책 개혁에 의문을 품게 한다. 세 가지 사건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AFL-CIO는 과거 활동에 대해 자료를 공개하고 의혹을 일소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둘째, 연대센터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에 개입했다. 셋째, AFL-CIO는 미국 정부의 냉전시기와 유사한 노동기구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 이 문제들의 상호연관성을 염두에 두며 각각의 문제들을 살펴보자.
AFL-CIO, 과거를 자백하길 계속 거부하다
처음부터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AFL-CIO와 (독자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는) 일부 가입조직들의 반동적인 대외정책에 반대해 투쟁했다. 이러한 도전은 성장과 쇠퇴를 반복했다. 특히 1960년대 AFL-CIO의 대외정책을 분석한 책의 출판은 중요한 계기였다. 또한 1980년대 활동가들이 레이건의 니카라과 공격을 노동운동이 지지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은 것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초기 분석은 AFL-CIO의 활동이 노동운동 외부 즉 CIA, 백악관, 국무부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노동운동의 대외정책을 외부 요인의 결과로 설명했다. 그러나 1989년 나의 책이 출판된 후, 독립 연구자들은 이러한 대외정책이 노동운동 내부에서 내적 요소에 근거해 계발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AFL-CIO의 대외활동이 CIA와 합작한 것이었고 미국 대외정책에 이득을 주었고 백악관과 국무부의 주도력을 지지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접근방식은 그러한 대외정책이 정부의 자금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지만 상층부 관리 내에서 계발되었고 통제되었다고 입증했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평조합원에게 보고되거나 추인되지 않았고 의식적으로 은폐되었다 - 보고되더라도 매우 왜곡된 방식이었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미국 노동자의 이름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AFL-CIO가 해외에서 어떤 활동을 펼쳐 왔는지 모르며, 그러한 활동이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도 모른다.
따라서 활동가들은 지금까지 AFL-CIO의 대외활동에 대한 학술적 조사활동을 펼쳤고 동시에 기층 조합원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활동을 진행했다. 마침내 활동가들은 조합원을 교육하고 그들이 국제노동조직에서 악명을 지우기 위한 활동을 요구하게 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AFL-CIO의 지도부는 이러한 활동을 방해하거나 멈추려고 시도하고 있다.
1998년 이후로 지도부의 이러한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프레드 히르쉬는 AFL-CIO의 대외정책을 처음으로 폭로한 사람 중 한 명이며 캘리포니아 산 호세 지역의 사우스베이 노동평의회에서 “의혹청산”(Clear the Air) 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한 동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미국과 AIFLD가 지원한 칠레 쿠데타(1973년)의 25주년을 회상하고 1974년 AFILD의 지도자 윌리엄 도허티를 반대하는 공식 결의안을 노동평의회가 통과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결의한 통과를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노력이 좌절되었고, 안은 공식적으로 제출되지 못했다.
2000년 영국정부가 칠레의 피노체트 전 대통령을 체포한 사건은 새로운 기회였다. 그러나 AFL-CIO는 그 기회를 잡지 않았다. 프레드 히르쉬와 동료들은 “의혹청산” 결의안을 다시 통과시키려고 시도했다. 결의안이 사우스베이 노동평의회에서 통과되었고, AFL의 주(州) 조직인 캘리포니아노동연맹의 2002년 총회에 상정되었다. 캘리포니아연맹의 집행위원회는 ‘협상안’처럼 보이는 것을 제시했다. 그것은 결의안이 “완화된다면” 이 문제를 더욱 신중히 토의하기 위한 캘리포니아 활동가와 AFL-CIO 대외정책 지도자의 모임을 주선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상안이 수용되었고 누그러진 결의안이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2003년 10월에 약속한 모임이 열리기까지 15개월 이상이 걸렸다. AFL-CIO의 대외정책 지도자들은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기보다는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았고, 모임에 참여한 평조합원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들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에 관한 정보와 보고서를 모아달라는 캘리포니아 활동가들의 요구를 존중하지 않았다.
AFL-CIO가 차베스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폭로되다
AFL-CIO가 과거를 자백하도록 하기 위한 활동이 계속 저항에 직면하는 동안 AFL-CIO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를 전복하려는 활동에 연루되어 있다는 혼란스러운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보수파는 차베스에 적대적인 세력이었으며, 고용주 편에 선 베네수엘라노동자총연맹(CTV)도 종종 번번히 적대세력에 포함되었다. CTV는 2002년 쿠데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나는 2004년 4월에 쓴 기사에서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다음처럼 지적했다.
아메리카통신노동자(CWA)/신문동업조합의 로버트 콜리어의 보도에 따르면 CTV는 2001년 10월, 2002년 3-4월, 2002년 10월-2003년 2월에 벌어진 총파업/공장폐쇄를 수행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기업가연합회인 페데카마라스(FEDECAMARAS)와 협력했다. 콜리어는 CTV가 2002년 3월 쿠데타를 계획하고 조직하는데 직접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콜리어는 “한마디로 AFL-CIO는 반동적인 노동조합 설립을 지원했다.”고 결론을 맺었다.
활동가들은 AFL-CIO(특히 ACILS)와 CTV의 무수한 관계를 발견했다. AFL-CIO는 쿠데타 직전에 CTV의 관리들을 워싱턴으로 인도했다. 베네수엘라연대센터와 결합한 활동가들은 정보자유법을 활용해서 미국 민주주의기부재단(NED)에 제출된 문서와 보고서를 폭로했다. [NED는 미국 국무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기구며, 1983년 레이건 정권 당시에 창설됐다. CIA가 벌이는 정치인에 대한 은밀한 매수나 거짓 민간인조직 창설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CIA를 대체하여 정당들과 NGO 부문에서 중요한 정보기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역주] 자료들은 1997-2002년 동안 ACILS의 활동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어떤 문서들은 AFL-CIO가 페데카마라스가 주도하는 기업가조직과 카톨릭교회, CTV가 연합하고, 차베스 대통령에 대항하는 공동 프로그램을 계발하는 데 어떻게 개입했는지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ACILS가 NED에 제출하는 2002년 1/4분기 보고서를 보자.
CTV와 페데카마라스는 카톨릭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2002년 3월 5일 전국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두 달에 걸친 두 조직간의 회의와 공동계획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사건이었다.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위기의 심화를 막기 위한 ‘민족적 합의’(National Accord)를 도출한 공동활동은 두 조직을 차베스정부에 반대하는 기함 조직으로 확립할 것이다. 연대센터는 두 조직의 협력을 위한 의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초기 모임의 조직 단계를 지원했다. 3월 5일 전국회의는 대충자금(counterpart funds)으로 재정을 충당했다.
전국회의가 열린지 30일이 지나지 않아 CTV와 페데마라카스는 석유회사 경영진의 해고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했고, 쿠데타가 벌어졌다. ACILS가 이런 과정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려면, 우리는 ACILS의 대표자들이 CTV와 페데마라카스의 지도자와 정기적으로 만났다는 사실을 무시해야 한다. 또 1997-2001년 동안 NED가 ACILS와 CTV의 협력활동에 지원한 587,962 달러를 무시해야 한다 (2001년에도 153,777 달러를 지원했다). 2002년 12월에는 6개월 간 활동을 위해 11,6001 달러를 지원했다.
이러한 증거는 활동가들이 AFL-CIO의 대외공작에 대한 항의 행동을 자극했다. 2004년 캘리포니아 총회를 위한 결의안 검토위원회에서 “세계노동자의 단결과 신뢰의 건설”이란 이름의 결의안이 등장했다. 이 결의안은 1994년 7월 캘리포니아주 총회 대표단에서 통과되었다. AFL-CIO의 전국수준의 대외정책 지도자들이 자신의 가장 큰 주(州) 지부로부터 힐난을 받은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조합원은 전체 AFL-CIO의 1/6을 차지한다).
미 국무부와 노동외교자문위원회
AFL-CIO의 이러한 활동은 과거 방식의 활동을 포기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매우 어두운 징조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노동제국주의로 복귀를 뜻하는가, 아니면 존 스위니가 새롭게 선택한 방침에서 벗어난 예외일 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미 국무부의 노동외교[노동부문에 관한 외교] 자문위원회(ACLD)에 AFL-CIO가 참여하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웹사이트에 올라온 자료를 신중히 검토하면 몇몇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ACLD는 미국 대외정책의 증진을 위해 국무부가 제안해 설립되었다. 클린턴정부 때 세워졌지만 부시정부로 이어지고 있다.
2. 존 스위니 의장과 린다 차베스 톰슨 사무총장, 윌리엄 루시 국제위원장, 바바라 쉐일러 국제국장과 필 피시맨 국제차장, 해리 캠버리스 연대센터 집행위원장 등 주요 지도부 모두가 ACLD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위원회는 과거 노동운동 최고위층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자격으로 참여한 사람도 포함하고 있다 (토마스 도나휴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NED 위원이었고 AFL-CIO의 재정책임자였으며 1995년 의장선거에서 스위니와 경쟁했다).
3. 이들 지도자들은 독립적인 행위자이며 특히 부시정부와 다른 접근법을 옹호했다.
4. 이러한 활동은 어떤 출판물로도 보고되지 않으며,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없다.
ACLD는 1999년 5월 20일에 설립되었고, 설립헌장은 위원회의 목적을 분명히 보여준다.
자문위원회의 목적은 국무부가 관리하는 노동외교 프로그램에 관해 국무부 장관을 자문하는 것이다. 국무부는 위원회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부와 긴밀히 협력할 것이다. 특히 위원회는 미국 노동정책의 목표와 이상을 증진하고자 하는 국제사회 내의 미국의 지도력을 보장하고자 한다.
누가 ACLD를 착안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국무부의 외교인권노동국의 에드문드 맥윌리암스 국제노동국장은 노동외교를 부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미국 노동운동이 냉전시기 미국정부에게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외교는 냉전 시기 동안 노동자의 권리와 민주사회를 증진하려는 미국 대외정책의 성공을 위한 핵심적인 요소였다. 당시 노동운동은 공산주의를 봉쇄하고 쳐부수는 데 중요한 정치적 지원이었다. 냉전 이후 정책 결정자들은 노동외교를 격하했다. 동시에 세계화가 노동자에게 새로운 도전을 낳으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훨씬 더 중요해졌다. 활기찬 노동외교가 다시금 미국 대외정책의 소중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그는 “국무부 노동국, 국제개발처(USAID), 해외공보처(USIA)가 수행한 활발한 노동외교가 미국 대외정책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지적하며, 공산주의와 투쟁하자는 정부의 요청에 노동조합이 “다시 집결했고” 서구 정부를 떠받치는 정치적 지지를 제공했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오늘날 노동은 냉전시기처럼 미국 대외정책의 공식화와 이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 외교정책이 증진하고자 하는 목표-민주주의, 인권, 정치적 안정, 사회경제적 발전-는 노동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목표와 동일하다.
그는 세계화가 사회안전망이나 직업훈련 없이 구조조정을 시행하면서 세계 노동자에게 해악을 끼쳤으며, 이처럼 확대되는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고, 미국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관심사를 대외정책 결정가들에게 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며, 노동운동은 정부의 대외정책 과정에 재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미국과 노동의 동맹은 노동자의 권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히 경제발전이 아동노동, 강제노동, 여성과 약소자에 대한 차별적 고용에 기반을 두면 안 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동외교의 부활은 냉전시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깨지기 쉬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민주적 자유를 촉진해야 한다.
국무부 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맥윌리암스의 책이 출판되기 전에 이러한 주장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ACLD의 첫 번째 보고서, “괜찮은 노동의 세계: 새로운 세기를 향한 노동외교”를 받고 몇 개월 간 몇몇 권고 사항을 평가한 후 2000년 11월 8일 ACLD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효과적인 노동외교 없이 미국의 대외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고 지난 4개월 간 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미국 정부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은 당신들이 의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협력관계라고 믿는다.
처음에는 ACLD는 단지 2년 동안 지속되리라 예상되었지만, 부시정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2001년 말(9.11 사건 이후)에 나온 보고서에서는 강조점이 이동한다. 보고서는 “노동외교의 역할과 중요성은 미국의 안보를 증진하고 이를 훼손하는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과 싸우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보고서의 이름이 “노동외교: 민주주의와 안보에 복무하자”란 점에서 강조점의 변화를 더 잘 간파할 수 있다. 두 번째 보고서도 첫 번째처럼 노동권과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만 두 번째 보고서는 노동자의 권리가 미국의 안보를 향상시킬 때만 중요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대테러전쟁은 왜 노동외교의 기능이 중요한지 실례를 제공한다. 비참함, 소외, 절망으로 이끄는 노동조건은 테러리즘 세력이 모이는데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노동조건의 개선은 테러리즘을 예방하고 대항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나아가 보고서는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것은 테러리즘과 싸우고 안보를 보장하려는 미국의 모든 노력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보고서는 “이슬람 국가의 노동조합”에 대해 다룬다. 보고서는 “이슬람의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감성, 정신, 직업을 통제하기 위한 정지적 대리자 역할을 하는 기구이자 도구이기 때문에 정치적 전장”이라고 강조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ACILS의 프로그램은 기업과 산업 수준에서 노동조합의 지도력을 고양하려는 정책이 이슬람 국가의 노동자에게 현대적인 경제적 사고와 정치적 가치를 심어주는 데 가장 유망한 접근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고서는 미국의 안보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반복해서 표현하지만, 세계 노동자의 안녕과 호혜와 연대에 기반한 AFL-CIO의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제 맥윌리암스의 주장의 모순을 살펴보자. 우리는 냉전시기에 AFL-CIO의 역할이 명백히 반동적이었다고 입증했지만, 어째서 맥윌리암스는 냉전시기의 정부와 노동조직의 긴밀한 관계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관계를 재수립해서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목표를 공동으로 실현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러한 모순적인 주장의 의미를 풀기 위해서는 윌리암 로빈슨의 저서, 『과두제의 촉진: 세계화, 미국의 간섭과 헤게모니』를 살펴보아야 한다. 로빈슨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대외정책의 초점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즉 초점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어떤 독재자라도 지지하고 통제하는 것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를 포함하여) 보수적인 정치인들의 지지를 구축하기 위해 “시민사회”에 적극 간섭하는 것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민주주의의 촉진”이 핵심이다. 그러나 미국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사실상 과두제의 촉진 또는 위로부터 엘리트가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과두제 민주주의는 엘리트가 제시하는 사람들 중에서 지도자를 뽑고, 그들이 제안하는 방식으로만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특히 USIAD와 국무부가 주도하는) ‘민주주의건설 프로그램’을 통해 과두제 민주주의를 주입하고 있다. 그리고 국무부는 NED를 통해 연대센터를 포함한 미국의 주요조직과 세계 곳곳의 여러 조직에 자금을 지원한다. 이러한 이해는 민주주의가 미국 대외정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라는 정부 보고서의 주장을 ‘해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리고 노동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미국과 해외의 노동자를 공격하는 미국정부와 협력하고 있다.
노동 제국주의의 귀환과 우리의 선택
지금까지 명백히 드러난 결과를 볼 때 존 스위니가 이끄는 AFL-CIO의 대외정책이 ‘전통적인’ 노동 제국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AFL-CIO 최상층부가 노동 제국주의로 복귀하는 문제를 숨김없이 다루지 않는다면 AFL-CIO를 ‘개혁’하려는 최근 어떤 시도도 실패할 운명에 처할 게 분명하다. 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며, 의미심장한 변화를 추구하려면 회피해서는 안 될 문제다. 미국과 세계 노동자의 안녕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깊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1) [역주] 이 글은 『Monthly Review』 2005년 5월호에 실린 킴 사입스(Kim Scipes)의 「Labor Imperialism Redux?: The AFL-CIO's Foreign Policy Since 1995」를 요약, 번역한 글이다. 웹사이트 www.monthlyreview.org에서 영어 원문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전국작가노동조합(National Writers Union)에서 활동하며 퍼듀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본문으로
*번역 : 임 필 수 | 정책편집국장
노동 제국주의와 미국 노동자운동의 비극
미국 노동총연맹-산별노조협의회(AFL-CIO)는 자신의 역사 대부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반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AFL-CIO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움직였고, 진보적인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독재자와 협조했고, 진보적인 정부에 대항하는 반동적인 노동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명백히 입증되었다. 한마디로 AFL-CIO는 우리가 정확히 ‘노동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천을 펼쳤다. AFL-CIA(미국노총-중앙정보국)라는 이름은 좌파의 망상증이 아니며 현실을 정확히 표현한다.
‘노동 제국주의’는 1955년 AFL-CIO의 통합부터 등장한 게 아니다. 정확히 20세기 초, 사무엘 곰퍼스가 지도부를 맡은 미국 노동총연맹(AFL) 때부터 등장했다. AFL은 멕시코혁명 동안 혁명세력을 방해하기 위해 간섭했고, 1차 세계대전에는 정부의 전쟁을 지지했으며, 미국 외교정책 집단 내에서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어도, AFL은 1차 세계대전 후 서반구(특히 멕시코)의 노동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범아메리카노동총연맹(PAFL)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AFL은 윌슨 정부에게 받은 5만 달러를 PAFL 설립에 사용했다.
1924년 곰퍼스가 죽자 대부분의 해외 활동은 일단 끝났지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부활했다. AFL은 유럽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처음에는 나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파시스트에 저항한 공산주의자를 목표로 삼았다. 194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훼손하기 위해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고, 그 후에는 유럽대륙에서 소련에 대항하며 미국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장기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 CIA는 AFL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그리고 CIA가 자금을 중단하자 AFL은 악명 높은 ‘프렌치 커넥션’을 포함해 마약거래에 손을 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라틴아메리카에서 AFL의 활동도 부활했다. 처음에는 반공주의 국제노동조직인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조직(ORIT)를 통해 활동했고, 1954년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하는 데 조력했다. 그러나 쿠바혁명의 성공 이후 AFL-CIO는 이 지역의 도전에 더 적극 대응하려고 아메리카자유노동개발기구(AIFLD)를 창설했다. 특히 AIFLD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한 쿠데타(1964년 브라질과 1973년 칠레)를 위한 기초를 깔았고, 도미니카공화국과 영국령 기니에 간섭했다.
또한 AFL-CIO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활동을 병행했다. 1964년 아프리카아메리카노동센터(AALC)를 설립했고,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항하는 활동을 펼쳤다. 1967년 아시아아메리칸자유노동기구(AAFLI)는 특히 남한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를 돕기 위해 거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AAFLI는 1983-89년 동안 필리핀의 진보적인 노동자조직인 메이데이운동(KMU)에 대항하기 위해 마르코스가 세운 필리핀노동조합회의(TUCP)에 거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이 자금 규모는 폴란드의 연대노조를 포함해 세계 다른 어느 나라의 노동자조직에 지원한 것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AAFLI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95년 존 스위니의 당선과 대외정책 개혁
한마디로 조지 미니와 레인 커크랜드가 의장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AFL-CIO는 반동적인 활동을 펼쳤다. 1980년대 중반 노동운동 내에서 이러한 활동에 반대하는 상당한 흐름이 형성됐다. 1995년 존 스위니가 새로운 의장으로 당선될 때 AFL-CIO의 이러한 활동에 대한 반대는 적어도 하나의 요소였다.
1995년 10월 존 스위니가 당선될 때 많은 활동가들은 AFL-CIO의 대외활동을 급진적으로 개혁하리라 기대했다. 스위니의 초기 활동은 고무적이었다. 1997년 그는 AAFLI, AALC, AIFLD와 유럽에서 활동하는 자유노동조합기구(FTUI)와 같은 반(半)-자율적인 기구들을 해산하게 했고 (보통 연대센터라고 부르는) 아메리카국제노동연대센터(ACILS)라는 중앙집중적인 조직으로 대체했다. 또한 스위니는 국제부에서 오랫동안 냉전의 전사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는 몇몇 개발도상국의 노동자투쟁을 지원하는 긍정적인 노력을 보였고, 이러한 변화는 질적인 개선이었다.
하지만 최근 어떤 사건들은 AFL-CIO의 대외정책 개혁에 의문을 품게 한다. 세 가지 사건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AFL-CIO는 과거 활동에 대해 자료를 공개하고 의혹을 일소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둘째, 연대센터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에 개입했다. 셋째, AFL-CIO는 미국 정부의 냉전시기와 유사한 노동기구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 이 문제들의 상호연관성을 염두에 두며 각각의 문제들을 살펴보자.
AFL-CIO, 과거를 자백하길 계속 거부하다
처음부터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AFL-CIO와 (독자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는) 일부 가입조직들의 반동적인 대외정책에 반대해 투쟁했다. 이러한 도전은 성장과 쇠퇴를 반복했다. 특히 1960년대 AFL-CIO의 대외정책을 분석한 책의 출판은 중요한 계기였다. 또한 1980년대 활동가들이 레이건의 니카라과 공격을 노동운동이 지지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은 것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초기 분석은 AFL-CIO의 활동이 노동운동 외부 즉 CIA, 백악관, 국무부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노동운동의 대외정책을 외부 요인의 결과로 설명했다. 그러나 1989년 나의 책이 출판된 후, 독립 연구자들은 이러한 대외정책이 노동운동 내부에서 내적 요소에 근거해 계발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AFL-CIO의 대외활동이 CIA와 합작한 것이었고 미국 대외정책에 이득을 주었고 백악관과 국무부의 주도력을 지지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접근방식은 그러한 대외정책이 정부의 자금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지만 상층부 관리 내에서 계발되었고 통제되었다고 입증했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평조합원에게 보고되거나 추인되지 않았고 의식적으로 은폐되었다 - 보고되더라도 매우 왜곡된 방식이었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미국 노동자의 이름으로 국제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AFL-CIO가 해외에서 어떤 활동을 펼쳐 왔는지 모르며, 그러한 활동이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도 모른다.
따라서 활동가들은 지금까지 AFL-CIO의 대외활동에 대한 학술적 조사활동을 펼쳤고 동시에 기층 조합원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활동을 진행했다. 마침내 활동가들은 조합원을 교육하고 그들이 국제노동조직에서 악명을 지우기 위한 활동을 요구하게 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AFL-CIO의 지도부는 이러한 활동을 방해하거나 멈추려고 시도하고 있다.
1998년 이후로 지도부의 이러한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프레드 히르쉬는 AFL-CIO의 대외정책을 처음으로 폭로한 사람 중 한 명이며 캘리포니아 산 호세 지역의 사우스베이 노동평의회에서 “의혹청산”(Clear the Air) 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한 동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미국과 AIFLD가 지원한 칠레 쿠데타(1973년)의 25주년을 회상하고 1974년 AFILD의 지도자 윌리엄 도허티를 반대하는 공식 결의안을 노동평의회가 통과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결의한 통과를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노력이 좌절되었고, 안은 공식적으로 제출되지 못했다.
2000년 영국정부가 칠레의 피노체트 전 대통령을 체포한 사건은 새로운 기회였다. 그러나 AFL-CIO는 그 기회를 잡지 않았다. 프레드 히르쉬와 동료들은 “의혹청산” 결의안을 다시 통과시키려고 시도했다. 결의안이 사우스베이 노동평의회에서 통과되었고, AFL의 주(州) 조직인 캘리포니아노동연맹의 2002년 총회에 상정되었다. 캘리포니아연맹의 집행위원회는 ‘협상안’처럼 보이는 것을 제시했다. 그것은 결의안이 “완화된다면” 이 문제를 더욱 신중히 토의하기 위한 캘리포니아 활동가와 AFL-CIO 대외정책 지도자의 모임을 주선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상안이 수용되었고 누그러진 결의안이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2003년 10월에 약속한 모임이 열리기까지 15개월 이상이 걸렸다. AFL-CIO의 대외정책 지도자들은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기보다는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았고, 모임에 참여한 평조합원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들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에 관한 정보와 보고서를 모아달라는 캘리포니아 활동가들의 요구를 존중하지 않았다.
AFL-CIO가 차베스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폭로되다
AFL-CIO가 과거를 자백하도록 하기 위한 활동이 계속 저항에 직면하는 동안 AFL-CIO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를 전복하려는 활동에 연루되어 있다는 혼란스러운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보수파는 차베스에 적대적인 세력이었으며, 고용주 편에 선 베네수엘라노동자총연맹(CTV)도 종종 번번히 적대세력에 포함되었다. CTV는 2002년 쿠데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나는 2004년 4월에 쓴 기사에서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다음처럼 지적했다.
아메리카통신노동자(CWA)/신문동업조합의 로버트 콜리어의 보도에 따르면 CTV는 2001년 10월, 2002년 3-4월, 2002년 10월-2003년 2월에 벌어진 총파업/공장폐쇄를 수행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기업가연합회인 페데카마라스(FEDECAMARAS)와 협력했다. 콜리어는 CTV가 2002년 3월 쿠데타를 계획하고 조직하는데 직접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콜리어는 “한마디로 AFL-CIO는 반동적인 노동조합 설립을 지원했다.”고 결론을 맺었다.
활동가들은 AFL-CIO(특히 ACILS)와 CTV의 무수한 관계를 발견했다. AFL-CIO는 쿠데타 직전에 CTV의 관리들을 워싱턴으로 인도했다. 베네수엘라연대센터와 결합한 활동가들은 정보자유법을 활용해서 미국 민주주의기부재단(NED)에 제출된 문서와 보고서를 폭로했다. [NED는 미국 국무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기구며, 1983년 레이건 정권 당시에 창설됐다. CIA가 벌이는 정치인에 대한 은밀한 매수나 거짓 민간인조직 창설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CIA를 대체하여 정당들과 NGO 부문에서 중요한 정보기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역주] 자료들은 1997-2002년 동안 ACILS의 활동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어떤 문서들은 AFL-CIO가 페데카마라스가 주도하는 기업가조직과 카톨릭교회, CTV가 연합하고, 차베스 대통령에 대항하는 공동 프로그램을 계발하는 데 어떻게 개입했는지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ACILS가 NED에 제출하는 2002년 1/4분기 보고서를 보자.
CTV와 페데카마라스는 카톨릭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2002년 3월 5일 전국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두 달에 걸친 두 조직간의 회의와 공동계획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사건이었다.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위기의 심화를 막기 위한 ‘민족적 합의’(National Accord)를 도출한 공동활동은 두 조직을 차베스정부에 반대하는 기함 조직으로 확립할 것이다. 연대센터는 두 조직의 협력을 위한 의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초기 모임의 조직 단계를 지원했다. 3월 5일 전국회의는 대충자금(counterpart funds)으로 재정을 충당했다.
전국회의가 열린지 30일이 지나지 않아 CTV와 페데마라카스는 석유회사 경영진의 해고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했고, 쿠데타가 벌어졌다. ACILS가 이런 과정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려면, 우리는 ACILS의 대표자들이 CTV와 페데마라카스의 지도자와 정기적으로 만났다는 사실을 무시해야 한다. 또 1997-2001년 동안 NED가 ACILS와 CTV의 협력활동에 지원한 587,962 달러를 무시해야 한다 (2001년에도 153,777 달러를 지원했다). 2002년 12월에는 6개월 간 활동을 위해 11,6001 달러를 지원했다.
이러한 증거는 활동가들이 AFL-CIO의 대외공작에 대한 항의 행동을 자극했다. 2004년 캘리포니아 총회를 위한 결의안 검토위원회에서 “세계노동자의 단결과 신뢰의 건설”이란 이름의 결의안이 등장했다. 이 결의안은 1994년 7월 캘리포니아주 총회 대표단에서 통과되었다. AFL-CIO의 전국수준의 대외정책 지도자들이 자신의 가장 큰 주(州) 지부로부터 힐난을 받은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조합원은 전체 AFL-CIO의 1/6을 차지한다).
미 국무부와 노동외교자문위원회
AFL-CIO의 이러한 활동은 과거 방식의 활동을 포기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매우 어두운 징조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노동제국주의로 복귀를 뜻하는가, 아니면 존 스위니가 새롭게 선택한 방침에서 벗어난 예외일 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미 국무부의 노동외교[노동부문에 관한 외교] 자문위원회(ACLD)에 AFL-CIO가 참여하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웹사이트에 올라온 자료를 신중히 검토하면 몇몇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ACLD는 미국 대외정책의 증진을 위해 국무부가 제안해 설립되었다. 클린턴정부 때 세워졌지만 부시정부로 이어지고 있다.
2. 존 스위니 의장과 린다 차베스 톰슨 사무총장, 윌리엄 루시 국제위원장, 바바라 쉐일러 국제국장과 필 피시맨 국제차장, 해리 캠버리스 연대센터 집행위원장 등 주요 지도부 모두가 ACLD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위원회는 과거 노동운동 최고위층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자격으로 참여한 사람도 포함하고 있다 (토마스 도나휴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NED 위원이었고 AFL-CIO의 재정책임자였으며 1995년 의장선거에서 스위니와 경쟁했다).
3. 이들 지도자들은 독립적인 행위자이며 특히 부시정부와 다른 접근법을 옹호했다.
4. 이러한 활동은 어떤 출판물로도 보고되지 않으며, 웹사이트에서도 볼 수 없다.
ACLD는 1999년 5월 20일에 설립되었고, 설립헌장은 위원회의 목적을 분명히 보여준다.
자문위원회의 목적은 국무부가 관리하는 노동외교 프로그램에 관해 국무부 장관을 자문하는 것이다. 국무부는 위원회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부와 긴밀히 협력할 것이다. 특히 위원회는 미국 노동정책의 목표와 이상을 증진하고자 하는 국제사회 내의 미국의 지도력을 보장하고자 한다.
누가 ACLD를 착안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국무부의 외교인권노동국의 에드문드 맥윌리암스 국제노동국장은 노동외교를 부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미국 노동운동이 냉전시기 미국정부에게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외교는 냉전 시기 동안 노동자의 권리와 민주사회를 증진하려는 미국 대외정책의 성공을 위한 핵심적인 요소였다. 당시 노동운동은 공산주의를 봉쇄하고 쳐부수는 데 중요한 정치적 지원이었다. 냉전 이후 정책 결정자들은 노동외교를 격하했다. 동시에 세계화가 노동자에게 새로운 도전을 낳으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훨씬 더 중요해졌다. 활기찬 노동외교가 다시금 미국 대외정책의 소중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그는 “국무부 노동국, 국제개발처(USAID), 해외공보처(USIA)가 수행한 활발한 노동외교가 미국 대외정책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지적하며, 공산주의와 투쟁하자는 정부의 요청에 노동조합이 “다시 집결했고” 서구 정부를 떠받치는 정치적 지지를 제공했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오늘날 노동은 냉전시기처럼 미국 대외정책의 공식화와 이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 외교정책이 증진하고자 하는 목표-민주주의, 인권, 정치적 안정, 사회경제적 발전-는 노동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목표와 동일하다.
그는 세계화가 사회안전망이나 직업훈련 없이 구조조정을 시행하면서 세계 노동자에게 해악을 끼쳤으며, 이처럼 확대되는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고, 미국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관심사를 대외정책 결정가들에게 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며, 노동운동은 정부의 대외정책 과정에 재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미국과 노동의 동맹은 노동자의 권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히 경제발전이 아동노동, 강제노동, 여성과 약소자에 대한 차별적 고용에 기반을 두면 안 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동외교의 부활은 냉전시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깨지기 쉬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민주적 자유를 촉진해야 한다.
국무부 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맥윌리암스의 책이 출판되기 전에 이러한 주장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ACLD의 첫 번째 보고서, “괜찮은 노동의 세계: 새로운 세기를 향한 노동외교”를 받고 몇 개월 간 몇몇 권고 사항을 평가한 후 2000년 11월 8일 ACLD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효과적인 노동외교 없이 미국의 대외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고 지난 4개월 간 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미국 정부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은 당신들이 의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협력관계라고 믿는다.
처음에는 ACLD는 단지 2년 동안 지속되리라 예상되었지만, 부시정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2001년 말(9.11 사건 이후)에 나온 보고서에서는 강조점이 이동한다. 보고서는 “노동외교의 역할과 중요성은 미국의 안보를 증진하고 이를 훼손하는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과 싸우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보고서의 이름이 “노동외교: 민주주의와 안보에 복무하자”란 점에서 강조점의 변화를 더 잘 간파할 수 있다. 두 번째 보고서도 첫 번째처럼 노동권과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만 두 번째 보고서는 노동자의 권리가 미국의 안보를 향상시킬 때만 중요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대테러전쟁은 왜 노동외교의 기능이 중요한지 실례를 제공한다. 비참함, 소외, 절망으로 이끄는 노동조건은 테러리즘 세력이 모이는데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노동조건의 개선은 테러리즘을 예방하고 대항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나아가 보고서는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것은 테러리즘과 싸우고 안보를 보장하려는 미국의 모든 노력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보고서는 “이슬람 국가의 노동조합”에 대해 다룬다. 보고서는 “이슬람의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감성, 정신, 직업을 통제하기 위한 정지적 대리자 역할을 하는 기구이자 도구이기 때문에 정치적 전장”이라고 강조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ACILS의 프로그램은 기업과 산업 수준에서 노동조합의 지도력을 고양하려는 정책이 이슬람 국가의 노동자에게 현대적인 경제적 사고와 정치적 가치를 심어주는 데 가장 유망한 접근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고서는 미국의 안보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반복해서 표현하지만, 세계 노동자의 안녕과 호혜와 연대에 기반한 AFL-CIO의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제 맥윌리암스의 주장의 모순을 살펴보자. 우리는 냉전시기에 AFL-CIO의 역할이 명백히 반동적이었다고 입증했지만, 어째서 맥윌리암스는 냉전시기의 정부와 노동조직의 긴밀한 관계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관계를 재수립해서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목표를 공동으로 실현하자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러한 모순적인 주장의 의미를 풀기 위해서는 윌리암 로빈슨의 저서, 『과두제의 촉진: 세계화, 미국의 간섭과 헤게모니』를 살펴보아야 한다. 로빈슨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대외정책의 초점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즉 초점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어떤 독재자라도 지지하고 통제하는 것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를 포함하여) 보수적인 정치인들의 지지를 구축하기 위해 “시민사회”에 적극 간섭하는 것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민주주의의 촉진”이 핵심이다. 그러나 미국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사실상 과두제의 촉진 또는 위로부터 엘리트가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과두제 민주주의는 엘리트가 제시하는 사람들 중에서 지도자를 뽑고, 그들이 제안하는 방식으로만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특히 USIAD와 국무부가 주도하는) ‘민주주의건설 프로그램’을 통해 과두제 민주주의를 주입하고 있다. 그리고 국무부는 NED를 통해 연대센터를 포함한 미국의 주요조직과 세계 곳곳의 여러 조직에 자금을 지원한다. 이러한 이해는 민주주의가 미국 대외정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라는 정부 보고서의 주장을 ‘해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리고 노동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미국과 해외의 노동자를 공격하는 미국정부와 협력하고 있다.
노동 제국주의의 귀환과 우리의 선택
지금까지 명백히 드러난 결과를 볼 때 존 스위니가 이끄는 AFL-CIO의 대외정책이 ‘전통적인’ 노동 제국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AFL-CIO 최상층부가 노동 제국주의로 복귀하는 문제를 숨김없이 다루지 않는다면 AFL-CIO를 ‘개혁’하려는 최근 어떤 시도도 실패할 운명에 처할 게 분명하다. 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며, 의미심장한 변화를 추구하려면 회피해서는 안 될 문제다. 미국과 세계 노동자의 안녕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깊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1) [역주] 이 글은 『Monthly Review』 2005년 5월호에 실린 킴 사입스(Kim Scipes)의 「Labor Imperialism Redux?: The AFL-CIO's Foreign Policy Since 1995」를 요약, 번역한 글이다. 웹사이트 www.monthlyreview.org에서 영어 원문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전국작가노동조합(National Writers Union)에서 활동하며 퍼듀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