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청산 어떻게 볼 것인가
일시: 2005년 7월 11일 오후 7시 반
장소: 사회진보연대 회의실
사회
임필수 | 정책편집국장
토론
강상구 | 민주노동당 교육국장
정경원 |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노동운동 자료실 연구위원
정리·사진
정희찬 | 정책편집부장
임필수(이하 '임'): 안녕하세요. 회원쟁점토론 코너는 회원들의 활동을 소개할 수 있고 회원들의 문제의식을 교류할 수 있는 자리로서 마련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두 차례 토론을 진행했는데 첫 번째는 노동자 국제주의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고, 두 번째는 성매매방지법을 둘러싼 쟁점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전문가' 토론으로 비쳐져서 회원 참여 폭이 좁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평가가 있어서 누구나 얘기해볼 수 있는 주제로 과거사 청산이라는 주제로 잡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준비하다보니 다른 어느 주제 못지 않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웃음). 간단하게 자기소개 좀 해주시죠.
강상구(이하 '강'): 저는 2001년 3월부터 2002년 9월 30일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정리자) 조사관 활동을 했습니다. 지금은 민주노동당 교육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경원(이하 '정'): 지금은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노동운동자료실에 있고요. 전노협활동을 거쳐서 『전노협 백서』발간작업에 참여했고, 노동운동역사자료실에서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노동운동자료관련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임: 김영삼 정권 때 소위 '역사바로세우기'가 있었지만, 김대중 정권 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유공자법,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국가의 사업방향의 틀이 잡혔다가 특히 노무현 정권에 들어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과거사 청산이 정치 이슈의 주요한 소재가 되는 상황입니다. 또한 드라마 《5공화국》이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같은 기획물도 나오고 있고요.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란이나 1980년대를 다루는 TV프로그램이 사람들의 사고에 어떤 자극을 줄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과거사 청산에 대해서 막연하게 지지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은데 어떤 점들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짚고 갈 수 있는지 얘기를 나누어보았으면 합니다. 일단 가볍게 요즘 혹시 TV나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접하는 대중적 역사인식에 대한 단상부터 풀어놓기로 하죠.
<최근 역사인식에 대한 단상>
정: 드라마 등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어
강: 과거 역사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정되던 평가가 지금은 매우 우연적이고 특정한 계기에 의해 대중들 속에서 크게 변화할 수도 있겠다고 느껴
정: 제가 자료실에 있을 때 삼성그룹의 이병철하고 현대그룹의 정주영을 모델로 한 《영웅시대》1)라는 드라마 작가팀에서 전화가 왔었는데 공정하게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면서 당시 현대 노동자들의 투쟁을 볼 수 있는 기록이나 사진을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드라마가 그것을 공정하게 다룰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죠. 아니나 다를까, 드라마의 내용은 삼성과 현대의 창업주들은 허허벌판에서 한국 경제를 만든 영웅이다, 시청자들이여 경제가 안 좋은 요즘 그들을 그리워하라. 이거 아닙니까. 그들이 허허벌판에서 한국 경제를 만들었습니까?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확립하면서 8.3조치를 통해 부채탕감, 세제 혜택 등 결과적으로 재벌의 자본축적 과정을 보장해준 것 아닙니까.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끊임없이 공급되는 노동자를 착취해서 부를 쌓고. 지금도 우리 사회가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정경유착의 고리들이 확고하게 만든 거 아닙니까. 그 이면에 있는 노동자들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자본의 경영체제를 받아들여야 그나마 기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아니면 자발적으로 너무나 기쁘게 조국 근대화를 위해 열심히 일 했다는 거지요. 드라마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과 재벌들의 경영이 한국사회를 세계 자본주의에 얼마나 어떻게 편입시켰는지, 산업구조를 왜곡시켰는지 전혀 볼 수 없죠. 죽어 가는 노동자와 도시빈민, 농촌경제 파탄… 이런 게 그 드라마에서 말하는 영웅들의 활약에 가려지게 되는 거죠. 시청자들이 실제로 보이는 반응이란 지금 같은 시기에 경제를 발전시킨 지도자가 그리워진다는 둥, 방송을 조기 종영하게 된 데 열우당의 외압이 있었다는 둥, 열우당은 박근혜와 이명박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둥인 것 같더라고요. 드라마의 구성 상 한 부분을 특화하거나 미화해서라도 시청자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 사실을 사실답게 다뤄야 하는데, 이것은 역사 왜곡이죠. 요즘 경영 마인드로 당시의 인물들이 평가되기 때문에 그렇게 드라마가 탄생되는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했던 자본의 모습을 보기는 더 어려운 거죠. 실제로 현대에서 1988년, 1989년에 노동조합 활동하려면 목숨을 걸었잖아요. 식칼로 막 노조 만들려는 노동자들 배 찌르고 그랬으니까. 아직까지 삼성은 무노조 경영을 철학이랍시고 갖고 있는 데 아닙니까. 이런 내용들이 드라마에 담겨지겠습니까?
강: 전 그 드라마 몇 번 봤는데 이명박이 너무 멋있게 그려지더라고요. 보니까 거기서 이명박이 중장비 수리하는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거기서 터줏대감 식으로 오랫동안 근무한 노동자들에게 이명박이 와서 이것저것 효율적으로 바꾸고 출근도 몇 시에 하라는 등 노동통제를 가했어요. 노동통제를 가하니까 그전에 있었던 고참노동자들이 일 안 한다고 하니까 이명박이 나타나서 그러면 그만두라고 하면서 정리를 시켰는데 그 노동자들은 완전 나쁜 놈들로 그려지는 거죠. 이명박이 개혁적인 사람으로 그려지더라고요.
임: 1970년대 한국자본주의 축적과정에서 거대 중화학공업이 형성되면서 이 부문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이나 투쟁이 있었을 텐데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 1970년대는 민주노조운동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시기잖아요. 노동자들이 어용 한국노총에 반대하면서 자주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시작한 거죠. 잘 알다시피 청계피복, 동일방직이나 원풍모방, YH무역 노동자들은 아주 치열한 투쟁을 벌였고요. 우리나라에 중화학 공업 자체가 활성화된 것이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잖아요. 조직화되고, 투쟁으로 나타나기에는 어려웠지만 아예 싸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죠. 한진 칼 빌딩 점거투쟁이라든지, 폭동의 형태로 일어났던 사우디 건설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죠.
강: 전두환을 5공화국에서 미화하니까 인터넷에서 전두환 아저씨 너무 멋지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다가 80년 5월 광주항쟁이 다루어지니까 전두환은 찢어 죽일 놈이 되었어요. 이것을 보면서 그전에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공유되었던 과거 역사에 대한 평가가 특정한 계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점을 최근에 많이 느꼈어요. 그러니까 어떤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흥미 있는 역사해석을 제공하면 역사를 보는 대중의 관점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겠다는 거죠
정: 사회가 어려울 때일수록 역사물들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극은 보통 영웅적 지도자들 몇몇 사람을 둘러싼 알력관계에 내용이 한정되어 있잖아요. 당시의 사회를 전체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보여주니까 현대사를 조명하더라도 한계가 있죠. 중요한 건 당시 등장인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인데, 역사를 부분만 추리거나, 지우거나 하는 게 부르주아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인 거죠. 지배자들 덕에 지금까지 역사가 굴러온 것이다, 앞으로도 조용히 잘 따라야 역사가 발전한다는 걸 은연중에 퍼뜨리는 거죠. 민중이 현실의 문제점을 볼 수 없게 하고, 앞으로 민중이 주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도 앗아가는 겁니다.
<과거청산의 쟁점1>: 민주화운동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정: 과거사 청산은 그간 운동의 성과로서 인식 자체를 바꿨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은 생존권 투쟁으로 분류되어 민주화운동에서 범주에서 제외
강: 김대중 정권의 과거사 청산 작업은 자유주의적인 관점으로서 한계가 많아, 자유민주주의 틀 안에서 민주화를 규정하고 사회주의적 활동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아
임: 일제 식민지배 청산, 한국전쟁 전후 시기의 민간인 학살, 反독재민주화운동 등이 주된 과거청산의 대상이 되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맹점, 맹목이라고 해야 하나, 문제점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정: 지금까지 가장 커다란 과거청산 문제는 일제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인데, 민중적 방식으로 는 일제가 만들어놓은 상징물이나 건물을 때려부수거나, 아니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행위로 나타났죠. 이런 상황에서 반민족특위가 만들어졌는데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 만든) 반민족특위는 미군정 하에서 친일파들이 경찰로 등용되면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유야무야되었죠. 4·19 때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축재에 대해서 처벌해야 한다는 제기가 있었고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한일협정 때문에 다시 일본과의 관계가 불거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일본정부와 박정희 정권은 식민지 지배의 문제를 돈 문제로 청산하게 되었죠. 광주항쟁 이후에 과거청산의 문제가 대중투쟁으로 이어지면서 김대중 정권에서 과거청산이라는 문제와 연결된다고 봅니다. 광주항쟁 당시의 학살자 처벌투쟁이 대중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나면서 처음에는 보상법으로 갔지만 당시 대중투쟁에서 보상법 수준으로 정리할 문제가 아니라고 한 거죠. 형식적인 제스처로 볼 수 있지만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도 보낼 수가 있었고 이 문제가 급진화되기 전에 김대중 정권이 제도화한 것이라고 봅니다. 제도화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과거청산이 부정적인 면만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나쁜 짓 하면 벌받는다는 것을 대통령에게도 적용했던 것, 폭동 내지는 빨갱이라는 식으로 무조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것을 바꾸게 되었고, 국가기구가 모든 것에 폭력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을 드러냈다는 것은 인식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요.
강: 김대중 정권 때 과거청산 작업은 자유주의적 수용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고 봅니다. 진상규명위원회의 경우도 국가로서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하지 않았던 독재국가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습니다. 과거사 청산 작업은 물론 유가족들의 10년 동안의 투쟁2)이 반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집권세력으로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의 이념적 지표를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계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노동자운동을 하다가 공장에서 죽은 많은 사람들은 몇 건 빼놓고는 별로 다루어지지 않았어요.
정: 노동자들의 죽음을 협소한 의미의 민주화의 개념 속에 가두어버려 최소한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노동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연결시켜내기가 한계가 많았던 것이 아닐까요? 생존권투쟁은 민주화운동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노동사건 대부분은 처리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 생활공간인 공장과 사무실의 민주화를 이룬 게 바로 노동자들의 투쟁이고 이것이 사회 민주화의 기본인데도 말이죠.
강: 진상규명위원회 내부에서는 민주화운동을 대부분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우로 한정해서 봤거든요. 그래서 당시 사회경제체제에 저항해서 싸웠던 노동자들의 투쟁은 민주화운동이 아니게 된 거죠. 공권력의 범위를 국가기관, 즉 구체적으로 경찰, 검찰, 안기부, 기무사 등으로 한정한 건데 이것은 당시 독재정권을 뒷받침하던 (자본가를 포함한) 지배계급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죠.
임: 그러한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하셨을 텐데…
강: 유족이나 사건 관련자들과 부딪치는 일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유족이나 사건 관련자들은 돌아가신 분이 민주화운동을 한 것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제가 조사한 사건 중에서 남민전의 이재문씨 사건3)이 있었는데요. 20,000 페이지 가량의 온갖 자료를 보면서 저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한 이재문씨가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고 판단을 했어요. 당시 사회주의자가 군사독재에 맞서서 운동을 했는데 그 방식이 자유민주주의자와 별로 다르지 않았을 뿐이죠. 위원회에 제출하는 보고서에 제가 이 사람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지향을 갖고 활동을 했는데 그 방식이 민주화운동이었다, 이것은 마치 독립운동가 중에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민족주의자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는데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는 기각되었어요. 이유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근데 이건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고 민주화운동이라고 해야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의문사로 인정받아 역사적으로 복권되는 것이었습니다. 제 주장의 취지는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당장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당시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제대로 평가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고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이건 사회주의 운동으로 가야한다고 끝까지 우겼어요. 반면에 당시 남민전 활동을 하셨던 어떤 분은 남민전 활동이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라 다만 민주화운동을 한 것일 뿐이라고 저한테 말씀하셨습니다. 화도 내셨죠.
유족들은 구체적인 물증이 없이 10여 년 동안 투쟁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죽음에 공권력이 개입했다는 것을 신념으로 가지고 있어요. 조사 결과가 유가족들의 주장과 다른 것으로 밝혀지면 유가족들이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조사관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경우도 있었어요. 가족의 죽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유가족들의 논리가 민주화운동의 개념과 자신이 갖고 있었던 신념의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 사실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을 했습니다. 안에서 조사하는 민간출신 조사관은 조사 내용의 합리성에 매몰되는 측면이 있었고, 또 위원회가 유가족들을 점점 민원인 대하듯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유족들이 반발을 한 것이죠. 그러면서 진상규명위원회를 유족이 점거하는 등의 일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요약하자면, 진상규명위원회가 표방하는 민주화운동의 개념 속에 사회주의 운동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조사관 개인의 노력 이외에는 별로 없었고요. 그리고 조사 내용의 합리성에 매몰되는 태도는 사실 개별 사건 하나하나를 요즘 개별 사건 조사하듯이 접근하는 조사방법이 어쩔 수 없이 지니는 한계인데요. 이런 방식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된 사건들이라서 증거 찾기가 어려운데, 증거가 있어야 의문사를 입증할 수 있다는 태도는 처음부터 한계를 설정해놓고 시작하는 거죠. 애초부터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의 객관적인 정황만 인정되면 남아공4)처럼 의문사로 인정한다는 전제가 있었어야 했는데 그런 접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 처음에는 운동을 통해 획득한 것이지만 들어가서 보니 여러 뛰어넘기 어려운 한계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박차고 나오는 대응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강: 민간 조사관들은 여러 번 사표 쓰고 나오자는 논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유가족한테 갔다 오면 설득당해서 오는 거죠. 왜냐면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위원회가 깨지면 당신들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도저히 진상규명작업이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거든요. 결국 유가족들이 점거농성하고 그 안에서 평가 작업을 하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어쨌거나 진상규명위원회를 유지하는 방식이었죠.
정: 가끔 유가족들이 원하는 명예회복이란 게 뭘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열사들이 바라는 건 정말 뭘까, 우리가 그 분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방법은 없을까. 당신은 민주화운동에 몇 퍼센트 기여했습니다, 이런 판정이 어떤 의미일까, 모든 걸 다 바쳐서 활동을 하고 죽어갔건만 그 활동에서 인정되지 않는 그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참 답답합니다. 강상구 동지가 여러 가지 한계에 대해 말씀 하셨는데, 그 중 가장 확실한 한계는 의문의 죽음 앞에서도 지켰던 자신의 활동과 신념을 부정해야 한다는 게 가장 큰 한계인 거 같습니다. 법에서 정한 틀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과거사를 둘러싼 운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볼 것이 주체의 문제 같아요. 정권에게 맡길 일이 아니라 우리가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거리에서 투쟁했을 당시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광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 책임자를 처벌하자고 외쳤는데, 그 정신 계승이 바로 과거에 대한 현재의 올바른 태도라는 거죠. 그걸로 우린 정권에 압력을 행사했던 겁니다. 그런데 제도화되고 난 다음에는 사실상 판도가 바뀌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정신 계승 운동 자체를 정권이 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광주를 생각하며 5월의 거리를 메웠던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이죠. 우리의 투쟁이 활발할 때가 가장 과거를 올바르게 이어갈 때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공간에서 우린 광주에서 죽어간 사람들, 그 이후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활동이 가장 정당했고, 사회를 진보시켰다는 걸 확인했던 것이죠. 과거사 청산의 제도화는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일부일 뿐입니다. 부분이 전체를 뒤엎는 꼴이 되지 않게 해야지요.
<과거청산의 쟁점2>: 여전히 소외 받는 노동자운동
정: 노동자운동이 현대사에서 아예 지워지거나 명망가 중심으로 조명되면서 평범한 민중들의 기여와 의미는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데 자신의 노동운동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강: 민주화운동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오늘날에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지금도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소외된 이들이 존재해
임: 작년 8월 《사회화와 노동》에서 일제 식민지배 청산 관련 글을 쓰면서 제주 4·3 특별법을 다룬 글을 보았습니다. 글의 요지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선한 양민 대 나쁜 공비라는 도식에 의존했던 것은 문제가 크다, 항쟁의 주체라는 접근법이 배제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강: 제가 담당했던 사건 중 한총련 5기 집행부 김준배5)씨 사건이 있었어요. 1997년에 한총련 투쟁국장으로 활동 하다가 광주의 아파트에서 수배 중에 경찰들이 쫓아오니까 뛰어내렸는데 [쫓아오던 경찰들이] 때려서 죽었죠. 이것이 민주화운동인가 아닌가 하는 엄청난 논쟁이 있었어요. 당시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있었던 한총련 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는가, 문민정부는 군사독재 정부가 아닌데 어떻게 민주화운동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1990년대 사건 중에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논란이 심했죠. 김준배씨의 경우에는 인정을 받았습니다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전에 유가족들이 점거농성하면서 포괄적으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는데 이념적으로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요구라기보다는 "내 자식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란 말이냐"는 식이 된 거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김준배씨 사건의 경우 진상규명위원회 위원들이 볼 때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인지 아닌지 판단의 여지가 있는 문제였지만 어쨌든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물론, 위원들 중에는 국가보안법이 문제가 있는 법이기 때문에 이 법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된 단체의 경우는 그 때문에 그 단체의 활동가가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도 했죠..
임: 지금 이루어지는 과거사 청산 작업은 민중운동을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정리하고 포섭하는 시도라고 생각되는데 노동운동 역시 비슷한 영향을 받으리라고 생각되는데요. 특히 현정부 안에 과거 노동운동과 관련 있었던 사람들이 꽤 있는데 … 어떻습니까?
정: 노동운동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두 가지 시도 중 하나는 명망가 몇몇 인물을 중심으로 운동이 만들어진 것처럼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지우는 겁니다. 단적인 예를 들면 일제 시대를 공부할 때, 1930년대를 암흑기라고 하는데 많은 노동자들이 일제에 항거하고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에 대항하면서 조직을 만들고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하면서 투쟁한 경험과 활동들을 배우지 못하는 거죠. 민중들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동의했다는 것을 1950년 한국전쟁이래 줄곧 부정하는 거죠. 87년 노동자 대투쟁도 요즘 교과서나 현대사 책을 보면 6월항쟁에 비해 짧게 정리돼요. 6·29 선언 이후 거리의 시민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작업장에서의 실질적인 민주화를 요구한 투쟁을 지우는 거죠. 이런 부분을 복원하면서 노동운동사를 새롭게 써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일 텐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운동진영 안에서 역사를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일단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시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노동운동을 하고 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경험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임: 명망가 중심으로 현대사를 해석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좀 더 말씀해주시죠.
정: 예전에 노동운동을 하다가 구사대에 의해 부상을 입어서 평생 환자로 살아가야 하는 분이 민주화운동보상심의회에 보상을 신청하기 위해 노동운동역사자료실로 찾아오셔서 전노협 시기나 1980년대 후반 자료들 중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노동조합 소식지나 신문을 보면 위원장 이름만 나오지 그 분 이름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허탕치고 돌아가시면서 하는 말씀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위원장 할 걸 그랬다고, 자신은 위원장보다 열심히 활동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러한 현상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나 해석이 제도의 문제로 국한 되어가면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운동사 자체를 명망가 중심으로 서술하고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거죠. 위인 주변의 평범한 민중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당시 노동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지만 단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과거 운동경력을 이용하여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심한 배신감까지 느끼고 자신은 당시 어떤 역할도 못했다고 느끼는 거죠.
강: 연결되면서 약간 다른 얘기인 거 같기도 한데 진상규명위원회의 민주화에 대한 개념의 협소함으로 인해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많은 분들에 대해서는 김대중 정부 들어서 시작된 제도적인 진상규명조차도 안 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학생운동 관련 사건을 8건 정도 조사하다가 당시 학생운동의 유명한 조직들에서 주요하게 활동했던 사람들을 추적해서 조사해보면 지금은 다 변호사, 교수, 사장… 뭐 이렇습니다. 그런데 남민전처럼 학생운동 이외의 조직에서 활동을 한 사람들은 아주 명망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일수록 고문 후유증이 많아서 절뚝거리면서 오거나 한쪽 눈이 실명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상도 제대로 안 받은 사람들이 태반이고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영광을 찾는 요즘 같은 시기에도 소외되어 있는 거죠. 이런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해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요. 그때 제가 굉장히 가슴 아팠는데 어떤 분이 저한테 "그때 노동자였던 사람은 지금도 노동자로 산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운동했던 사람들 중에는 요즘 국회의원이 아니더라도 통속적인 의미에서 좋은 직업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무실에 가서 얘기하면 당시의 역사의식을 잊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먹고살기 바쁘다보니 이렇게 하면서 산다는 얘기를 듣는데 다 똑같은 레퍼토리입니다.
정: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하는 다른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민주화운동이 보상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민주화에 대한 기여가 몇 퍼센트라는 식으로 평가한다고 합니다.6) 그렇지만 그때의 경험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렵게 사시는 분들을 보면 40%라도 보상을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실제로 든대요. 안타까운 일이죠.
<운동진영의 과제>
정: 노동운동 스스로 자신들의 기록을 보존하고 역사를 되돌아봐야
강: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는 과거사 정리는 제대로 되지 않을 것
임: 노동운동사 관련한 부분을 스스로 정립해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노동운동역사자료실에서 정경원 선배가 활동하면서 느꼈던 보람이나 어려움은 무엇인지 한 말씀 해주시죠.
정: 참 어려운 점이 많이 있죠. 실제로 운동진영에서 자기 자료를 챙기는 기관이 거의 없어요. 민주노총 같은 경우는 노동운동 자료실을 작년에 처음 만들었고요. 예전 비공개 운동 자료는 만듦과 동시에 없애버려서 일단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요. 있더라도 몇몇 사람만 알아볼 수 있게 씌여있다거나 이후의 논의결과는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는 형태로 자료가 남아있고, 게다가 자료가 각각 흩어져있죠.
5-6년 전부터 이런 자료들을 챙겨야 하지 않겠냐는 문제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해서 성공회대에 민주화운동 자료관7)이 먼저 생겼는데 거기서 한겨레와 함께 대대적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민주화운동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을 때 저희 전노협 백서팀에서는 전노협 자료들을 성공회대에 보내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어요. 전노협이 6년 동안 전국조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자료가 엄청나게 많았죠. 저희들이 그 자료들을 민주화운동 자료관에 보내지 않겠다고 한 이유는 지금과 같이 노동운동 진영에서 자신이 생산하는 자료에 대해서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노동운동의 역사적 전통을 찾는 것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료를 트럭으로 실어서 다른 단체나 학교에게 갖다 주는 것은 의미가 없고 앞으로 주체적으로 자료를 보존하고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대 자료관은 지금은 노동운동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다른 자료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이관했습니다. 이제 정부가 산하에 기념사업회를 두고 관장하는 것이죠. 운동 자료를 정권이 가져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모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전반적으로 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정권의 안정을 위해 기록을 파기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국가기구의 기록 관리에 더 신뢰를 갖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행자부 산하 기구가 사업 범위와 성격을 확정하는 데 있어서 국가예산과 인사권으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물을 보존하는 것 자체도 운동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자료를 모으고 보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만 자료를 쌓아 놓는다고 해서 보존되는 것도 아니죠. 우리는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당시 주체들과 투쟁의 의의를 현재로 이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번에 구로동맹파업 20주년을 맞아 그 주체들이 자신의 역사를 정리해보겠다고 모였습니다. 당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이제는 다른 건물이 들어선 공단을 돌아보고, 현재 파업하는 구로지역 사업장을 방문해 함께 연대하고. 앞으로 1년 동안 자료와 기억을 모아 사료집을 낼 계획이라고 합니다. 물론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어떤 활동으로 이어갈 것인가를 주체들이 모여 논의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료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운동이죠. 진정 과거를 기리려면 자료를 박물관의 전시물처럼 만들 것이 아니라 운동하는 주체와 활동을 만들어내야 하는 거죠. 그런 차원에서 작은 자료실들, 그리고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자료실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봐요. 마산·창원 노동자들의 투쟁의 흔적이 있는 자료를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에 가져다 놓는 게 아니고, 바로 그 투쟁 현장 한복판에 두고 노동자 스스로 관리하는 거죠. 그래야 선배들의 투쟁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지 않겠어요? 사실 공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군데 모아 놓으면 더 편할 거 같지만, 그 자료를 구하러 가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더 많은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거든요.
지금은 노동운동 자료를 정리하면서 이전 자료들을 분류하고 목록으로 만드는 동시에 현재의 기록을 남기자는 취지로 투쟁백서나 조직사 쓰기를 운동진영 안에서 확장하려고 했고 그 일환으로 한국통신 계약직 투쟁이나 발전노조의 투쟁기록이나 자료 모으는 작업을 진행했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은 자신들의 역사적인 정당성을 얘기하면서 분위기를 쇄신하는 반면 노동운동은 생존권투쟁으로서만 정리되어서 민주화에 대한 기여가 평가되지도 않고 있는데,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제기할 근거를 만드는 활동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정당성을 둘러싼 투쟁을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강: 자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지하활동 했던 사람들 중에서 당시에 검거된 사람들 관련한 기록이 다 남아 있어요. 그 자료들이 남영동 대공분실, 국정원에 보관되었을 텐데 검찰기록은 검찰이 기소한 자료가 법원으로 가죠 서울지방법원 자료실에 가면 옛날 자료가 엄청 쌓여있어요. 제가 이재문씨 사건이나 민추위 사건 조사할 때 들어가 봤는데 그 때 조사자료들이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텐데 그냥 조사하고 그 이상 활용되지는 못했어요 정부기록들은 5년 보관, 10년 보관, 반년 보관 등으로 기한이 설정되어 있어서 그 기간이 지나면 다 폐기해버려요. 그래서 옛날 자료가 없는 것은 정부가 일부러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보관기간이 지나면 그냥 기계적으로 문서를 모아서 태워버리는 겁니다.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 운동진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세상이 완전 뒤집어지지 않는 한 과거사 정리는 잘 안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나가며>
강: 국가기관 내에 기존의 인적 청산 및 사회 전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어.
정: 현대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 전까지는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하기 어려워, 민중들 스스로 역사를 정립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중요.
임: 지금까지의 얘기들을 정리해야겠군요. 지금까지 했던 얘기들 중에서 빠뜨리거나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해주시죠.
강: 과거사 청산 작업을 다른 사회운동의 발전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죠. 지금 국가기관 안에는 기존의 세력들이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있습니다. 경찰청에 한번 갔었는데 거기 보안국장 책상 위에 《월간조선》이 그 해 1월부터 12월호까지 쭉 쌓여 있더라고요. 이러한 역사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경찰, 군부 안에 그대로 다 있다는 거죠. 인적 청산 없는 한계 내에서의 과거사 청산은 피해자의 일부에 대한 보상으로 그칩니다. 그리고 그 성과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거나, 이를 통해 무언가 정치적 야심을 이루려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겠죠.
정: 제가 3년 전부터는 구술사 작업을 병행하는데 당시 사실의 복원 뿐 아니라 당시에 가졌던 상처가 사람을 어떻게 규정하는 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박창수 열사 부모님하고 몇 시간 얘기를 나눴는데 안기부에 의해서 아들이 죽고 삶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인식이 굉장히 많이 바뀌어요. 아들의 죽음을 매개로 사회를 재해석하는 거죠. 한국 현대사에서 이런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조직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내 아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것이 자랑스럽다고 생각될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는 이상은 부모님이나 가족들의 상처가 치유되기 어렵죠.
지금은 청와대에서 왕년에 운동 안 해본 사람 있냐고 할 정도로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권력 주변에 혹은 그 중앙에 진출하고 있고 과거사 청산의 주체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최근 뉴라이트 운동도 그 반향의 하나로 볼 수 있고요. 그렇지만 과거를 청산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도 비정규직 노동자는 죽어가고, 농민들은 농약을 마시고 있죠. 이런 현실을 청산할 과거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정권이 하는 과거청산에 가두어지면 안 되는 거죠. 민중들은 모순덩어리인 현실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했던 것이기 때문에 민중들 스스로가 역사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그 역사를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미래의 대안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활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과거사 청산은 어쩌면 주체들에게 두 번의 상처를 내는 결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임: 현재의 과거사 청산 작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재사'가 청산이 되어야 과거사를 청산할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린다고 생각하는 반면, 과거사 청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현 정부가 과거사 청산의 주체로 정당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만 마치도록 하고 바쁘신 중에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 [정리자 주] 드라마 《영웅시대》는 2004년 7월 5일부터 2005년 3월 1일까지 MBC를 통해 방영되었다. 그 주된 내용은 실제 정주영, 이명박, 이병철 등의 기업인을 모델로 한 천태산, 박대철, 국대안이라는 인물들이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에 협력했던 일들을 주요 줄거리로 하는데, 방영 당시부터 실제 인물들의 활동에 대한 시시비비가 제기되어 논란이 있었다. 본문으로
2) [정리자 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유가족들의 투쟁은 1988년 10월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 136일 동안의 농성투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각종 토론회와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드디어 1999년 12월 28일 국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 유공자 명예회복 및 예우 등에 관한 법률안'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안'이 통과되었다. 1998년 두 법안이 발의된 이후 유가족들은 당시 여당이었던 국민회의 당사 및 국회에서 점거 및 농성투쟁을 병행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홈페이지(http://www.yolsa.org/index.htm) 참조. 본문으로
3) [정리자 주] 故이재문씨는 4·19 당시《민족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발표되면서 수배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1976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1979년 검거된 이후 1980년 군부의 광주학살 만행에 항의하는 단식투쟁 중 비전향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는 당국의 조치로 1981년 10월 22일 서대문 구치소에서 운명하였다. 이재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은 위원 5명의 찬성으로 "이재문이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에 의하여 사망했다고 판단되나 그 죽음이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므로 기각한다"고 결정했다.(200.9.16) 이에 대해서는 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차(2000.10-2002.10) Ⅲ 제3부 개별사건 보고』, 2003, pp.637-64 참조. 본문으로
4) [정리자 주]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집권 이후 지난 수십 년 동안 백인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기간 동안 일어난 백인과 국가의 인종적 폭력을 조사하고 진상을 규명함으로써 개별적인 보복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과거사를 평화적으로 청산하자는 취지에서 진실과화해위원회(TRC)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TRC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기관이나 각종 단체를 수사할 수 있고 피해자의 진술내용만으로도 가해자를 소환할 수 있었다. TRC는 정당, 언론, 자본, 학계를 조사대상으로 폭력의 동기와 관점, 정황 및 요인을 포괄적으로 규명하려고 하였다. TRC의 활동은 비록 처벌이나 보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단기간에 걸쳐 강력한 권한을 보유하고 과거사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새로운 민주주의적 사회관계를 향한 민중들의 강력한 동의지반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5) [정리자 주] 故김준배씨는 1993년부터 수배를 받아오던 한총련 투쟁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97년 9월 15일 은신 중인 아파트에 들이닥친 전남도 경찰청 보안수사대와 경찰청 기동수사대 형사 24여명을 피해 13층 높이에서 케이블 선을 타고 탈출하다 추락하여 다음날 새벽에 운명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위원회는 김준배씨 사건에 대해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결론짓고 김준배씨를 폭행하여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형사를 '독직폭행죄'로 고발하였다. 한편 이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소수의견의 요지는 김준배씨의 사망이 추락에 의한 손상이라는 점에서 공권력에 의해 사망했다고 보기 어렵고 따라서 관련 공무원을 고발하기로 한 결정은 지나치다고 지적했다. 김준배씨 사건은 『의문사진상규명보고서 1차(2000.10-2002.10) Ⅱ 제3부: 개별사건보고』,2003, pp.495-528 참조. 본문으로
6) [정리자 주] 7월 14일 방영된 KBS 시사프로그램《뉴스 투나잇》의 보도에 따르면 민주화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만든 이른바 "민주화 기여도"에 따르면 故권희정 열사는 50%, 故노수석 열사는 60%, 故우종원 열사는 75%로 판정되었다. 이는 보상금의 차등지급 기준으로 열사의 민주화 기여의 정도를 측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7) [정리자 주] 1999년에 민주화운동자료관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를 성공회대에 소장하고 있다가 2001년 6월 28일 국회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법이 통과된 이후 현재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산지원을 받는 공공특수법인체로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자료수집·기념사업 등의 관련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한편 성공회대에는 부속기관으로서 민주자료관이 운영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성공회대사이버 NGO자료관() 홈페이지 참조. 본문으로
장소: 사회진보연대 회의실
사회
임필수 | 정책편집국장
토론
강상구 | 민주노동당 교육국장
정경원 |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노동운동 자료실 연구위원
정리·사진
정희찬 | 정책편집부장
임필수(이하 '임'): 안녕하세요. 회원쟁점토론 코너는 회원들의 활동을 소개할 수 있고 회원들의 문제의식을 교류할 수 있는 자리로서 마련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두 차례 토론을 진행했는데 첫 번째는 노동자 국제주의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고, 두 번째는 성매매방지법을 둘러싼 쟁점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전문가' 토론으로 비쳐져서 회원 참여 폭이 좁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평가가 있어서 누구나 얘기해볼 수 있는 주제로 과거사 청산이라는 주제로 잡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준비하다보니 다른 어느 주제 못지 않게 어려운 것 같습니다 (웃음). 간단하게 자기소개 좀 해주시죠.
강상구(이하 '강'): 저는 2001년 3월부터 2002년 9월 30일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정리자) 조사관 활동을 했습니다. 지금은 민주노동당 교육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경원(이하 '정'): 지금은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노동운동자료실에 있고요. 전노협활동을 거쳐서 『전노협 백서』발간작업에 참여했고, 노동운동역사자료실에서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노동운동자료관련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임: 김영삼 정권 때 소위 '역사바로세우기'가 있었지만, 김대중 정권 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유공자법, 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국가의 사업방향의 틀이 잡혔다가 특히 노무현 정권에 들어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과거사 청산이 정치 이슈의 주요한 소재가 되는 상황입니다. 또한 드라마 《5공화국》이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같은 기획물도 나오고 있고요.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란이나 1980년대를 다루는 TV프로그램이 사람들의 사고에 어떤 자극을 줄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과거사 청산에 대해서 막연하게 지지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은데 어떤 점들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짚고 갈 수 있는지 얘기를 나누어보았으면 합니다. 일단 가볍게 요즘 혹시 TV나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접하는 대중적 역사인식에 대한 단상부터 풀어놓기로 하죠.
<최근 역사인식에 대한 단상>
정: 드라마 등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어
강: 과거 역사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정되던 평가가 지금은 매우 우연적이고 특정한 계기에 의해 대중들 속에서 크게 변화할 수도 있겠다고 느껴
정: 제가 자료실에 있을 때 삼성그룹의 이병철하고 현대그룹의 정주영을 모델로 한 《영웅시대》1)라는 드라마 작가팀에서 전화가 왔었는데 공정하게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면서 당시 현대 노동자들의 투쟁을 볼 수 있는 기록이나 사진을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드라마가 그것을 공정하게 다룰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죠. 아니나 다를까, 드라마의 내용은 삼성과 현대의 창업주들은 허허벌판에서 한국 경제를 만든 영웅이다, 시청자들이여 경제가 안 좋은 요즘 그들을 그리워하라. 이거 아닙니까. 그들이 허허벌판에서 한국 경제를 만들었습니까?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확립하면서 8.3조치를 통해 부채탕감, 세제 혜택 등 결과적으로 재벌의 자본축적 과정을 보장해준 것 아닙니까.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끊임없이 공급되는 노동자를 착취해서 부를 쌓고. 지금도 우리 사회가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정경유착의 고리들이 확고하게 만든 거 아닙니까. 그 이면에 있는 노동자들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자본의 경영체제를 받아들여야 그나마 기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아니면 자발적으로 너무나 기쁘게 조국 근대화를 위해 열심히 일 했다는 거지요. 드라마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과 재벌들의 경영이 한국사회를 세계 자본주의에 얼마나 어떻게 편입시켰는지, 산업구조를 왜곡시켰는지 전혀 볼 수 없죠. 죽어 가는 노동자와 도시빈민, 농촌경제 파탄… 이런 게 그 드라마에서 말하는 영웅들의 활약에 가려지게 되는 거죠. 시청자들이 실제로 보이는 반응이란 지금 같은 시기에 경제를 발전시킨 지도자가 그리워진다는 둥, 방송을 조기 종영하게 된 데 열우당의 외압이 있었다는 둥, 열우당은 박근혜와 이명박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둥인 것 같더라고요. 드라마의 구성 상 한 부분을 특화하거나 미화해서라도 시청자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 사실을 사실답게 다뤄야 하는데, 이것은 역사 왜곡이죠. 요즘 경영 마인드로 당시의 인물들이 평가되기 때문에 그렇게 드라마가 탄생되는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했던 자본의 모습을 보기는 더 어려운 거죠. 실제로 현대에서 1988년, 1989년에 노동조합 활동하려면 목숨을 걸었잖아요. 식칼로 막 노조 만들려는 노동자들 배 찌르고 그랬으니까. 아직까지 삼성은 무노조 경영을 철학이랍시고 갖고 있는 데 아닙니까. 이런 내용들이 드라마에 담겨지겠습니까?
강: 전 그 드라마 몇 번 봤는데 이명박이 너무 멋있게 그려지더라고요. 보니까 거기서 이명박이 중장비 수리하는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거기서 터줏대감 식으로 오랫동안 근무한 노동자들에게 이명박이 와서 이것저것 효율적으로 바꾸고 출근도 몇 시에 하라는 등 노동통제를 가했어요. 노동통제를 가하니까 그전에 있었던 고참노동자들이 일 안 한다고 하니까 이명박이 나타나서 그러면 그만두라고 하면서 정리를 시켰는데 그 노동자들은 완전 나쁜 놈들로 그려지는 거죠. 이명박이 개혁적인 사람으로 그려지더라고요.
임: 1970년대 한국자본주의 축적과정에서 거대 중화학공업이 형성되면서 이 부문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이나 투쟁이 있었을 텐데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 1970년대는 민주노조운동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시기잖아요. 노동자들이 어용 한국노총에 반대하면서 자주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시작한 거죠. 잘 알다시피 청계피복, 동일방직이나 원풍모방, YH무역 노동자들은 아주 치열한 투쟁을 벌였고요. 우리나라에 중화학 공업 자체가 활성화된 것이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잖아요. 조직화되고, 투쟁으로 나타나기에는 어려웠지만 아예 싸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죠. 한진 칼 빌딩 점거투쟁이라든지, 폭동의 형태로 일어났던 사우디 건설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죠.
강: 전두환을 5공화국에서 미화하니까 인터넷에서 전두환 아저씨 너무 멋지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다가 80년 5월 광주항쟁이 다루어지니까 전두환은 찢어 죽일 놈이 되었어요. 이것을 보면서 그전에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공유되었던 과거 역사에 대한 평가가 특정한 계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점을 최근에 많이 느꼈어요. 그러니까 어떤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흥미 있는 역사해석을 제공하면 역사를 보는 대중의 관점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겠다는 거죠
정: 사회가 어려울 때일수록 역사물들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극은 보통 영웅적 지도자들 몇몇 사람을 둘러싼 알력관계에 내용이 한정되어 있잖아요. 당시의 사회를 전체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보여주니까 현대사를 조명하더라도 한계가 있죠. 중요한 건 당시 등장인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인데, 역사를 부분만 추리거나, 지우거나 하는 게 부르주아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인 거죠. 지배자들 덕에 지금까지 역사가 굴러온 것이다, 앞으로도 조용히 잘 따라야 역사가 발전한다는 걸 은연중에 퍼뜨리는 거죠. 민중이 현실의 문제점을 볼 수 없게 하고, 앞으로 민중이 주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도 앗아가는 겁니다.
<과거청산의 쟁점1>: 민주화운동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정: 과거사 청산은 그간 운동의 성과로서 인식 자체를 바꿨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은 생존권 투쟁으로 분류되어 민주화운동에서 범주에서 제외
강: 김대중 정권의 과거사 청산 작업은 자유주의적인 관점으로서 한계가 많아, 자유민주주의 틀 안에서 민주화를 규정하고 사회주의적 활동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아
임: 일제 식민지배 청산, 한국전쟁 전후 시기의 민간인 학살, 反독재민주화운동 등이 주된 과거청산의 대상이 되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맹점, 맹목이라고 해야 하나, 문제점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정: 지금까지 가장 커다란 과거청산 문제는 일제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인데, 민중적 방식으로 는 일제가 만들어놓은 상징물이나 건물을 때려부수거나, 아니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행위로 나타났죠. 이런 상황에서 반민족특위가 만들어졌는데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 만든) 반민족특위는 미군정 하에서 친일파들이 경찰로 등용되면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유야무야되었죠. 4·19 때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축재에 대해서 처벌해야 한다는 제기가 있었고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한일협정 때문에 다시 일본과의 관계가 불거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일본정부와 박정희 정권은 식민지 지배의 문제를 돈 문제로 청산하게 되었죠. 광주항쟁 이후에 과거청산의 문제가 대중투쟁으로 이어지면서 김대중 정권에서 과거청산이라는 문제와 연결된다고 봅니다. 광주항쟁 당시의 학살자 처벌투쟁이 대중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나면서 처음에는 보상법으로 갔지만 당시 대중투쟁에서 보상법 수준으로 정리할 문제가 아니라고 한 거죠. 형식적인 제스처로 볼 수 있지만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도 보낼 수가 있었고 이 문제가 급진화되기 전에 김대중 정권이 제도화한 것이라고 봅니다. 제도화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과거청산이 부정적인 면만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나쁜 짓 하면 벌받는다는 것을 대통령에게도 적용했던 것, 폭동 내지는 빨갱이라는 식으로 무조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것을 바꾸게 되었고, 국가기구가 모든 것에 폭력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을 드러냈다는 것은 인식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요.
강: 김대중 정권 때 과거청산 작업은 자유주의적 수용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고 봅니다. 진상규명위원회의 경우도 국가로서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하지 않았던 독재국가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습니다. 과거사 청산 작업은 물론 유가족들의 10년 동안의 투쟁2)이 반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집권세력으로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의 이념적 지표를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계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노동자운동을 하다가 공장에서 죽은 많은 사람들은 몇 건 빼놓고는 별로 다루어지지 않았어요.
정: 노동자들의 죽음을 협소한 의미의 민주화의 개념 속에 가두어버려 최소한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노동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연결시켜내기가 한계가 많았던 것이 아닐까요? 생존권투쟁은 민주화운동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노동사건 대부분은 처리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 생활공간인 공장과 사무실의 민주화를 이룬 게 바로 노동자들의 투쟁이고 이것이 사회 민주화의 기본인데도 말이죠.
강: 진상규명위원회 내부에서는 민주화운동을 대부분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우로 한정해서 봤거든요. 그래서 당시 사회경제체제에 저항해서 싸웠던 노동자들의 투쟁은 민주화운동이 아니게 된 거죠. 공권력의 범위를 국가기관, 즉 구체적으로 경찰, 검찰, 안기부, 기무사 등으로 한정한 건데 이것은 당시 독재정권을 뒷받침하던 (자본가를 포함한) 지배계급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죠.
임: 그러한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하셨을 텐데…
강: 유족이나 사건 관련자들과 부딪치는 일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유족이나 사건 관련자들은 돌아가신 분이 민주화운동을 한 것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제가 조사한 사건 중에서 남민전의 이재문씨 사건3)이 있었는데요. 20,000 페이지 가량의 온갖 자료를 보면서 저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한 이재문씨가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고 판단을 했어요. 당시 사회주의자가 군사독재에 맞서서 운동을 했는데 그 방식이 자유민주주의자와 별로 다르지 않았을 뿐이죠. 위원회에 제출하는 보고서에 제가 이 사람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지향을 갖고 활동을 했는데 그 방식이 민주화운동이었다, 이것은 마치 독립운동가 중에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민족주의자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는데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는 기각되었어요. 이유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근데 이건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고 민주화운동이라고 해야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의문사로 인정받아 역사적으로 복권되는 것이었습니다. 제 주장의 취지는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당장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당시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제대로 평가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고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이건 사회주의 운동으로 가야한다고 끝까지 우겼어요. 반면에 당시 남민전 활동을 하셨던 어떤 분은 남민전 활동이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라 다만 민주화운동을 한 것일 뿐이라고 저한테 말씀하셨습니다. 화도 내셨죠.
유족들은 구체적인 물증이 없이 10여 년 동안 투쟁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죽음에 공권력이 개입했다는 것을 신념으로 가지고 있어요. 조사 결과가 유가족들의 주장과 다른 것으로 밝혀지면 유가족들이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조사관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경우도 있었어요. 가족의 죽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유가족들의 논리가 민주화운동의 개념과 자신이 갖고 있었던 신념의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 사실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을 했습니다. 안에서 조사하는 민간출신 조사관은 조사 내용의 합리성에 매몰되는 측면이 있었고, 또 위원회가 유가족들을 점점 민원인 대하듯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유족들이 반발을 한 것이죠. 그러면서 진상규명위원회를 유족이 점거하는 등의 일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요약하자면, 진상규명위원회가 표방하는 민주화운동의 개념 속에 사회주의 운동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조사관 개인의 노력 이외에는 별로 없었고요. 그리고 조사 내용의 합리성에 매몰되는 태도는 사실 개별 사건 하나하나를 요즘 개별 사건 조사하듯이 접근하는 조사방법이 어쩔 수 없이 지니는 한계인데요. 이런 방식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된 사건들이라서 증거 찾기가 어려운데, 증거가 있어야 의문사를 입증할 수 있다는 태도는 처음부터 한계를 설정해놓고 시작하는 거죠. 애초부터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의 객관적인 정황만 인정되면 남아공4)처럼 의문사로 인정한다는 전제가 있었어야 했는데 그런 접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 처음에는 운동을 통해 획득한 것이지만 들어가서 보니 여러 뛰어넘기 어려운 한계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박차고 나오는 대응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드는데…
강: 민간 조사관들은 여러 번 사표 쓰고 나오자는 논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유가족한테 갔다 오면 설득당해서 오는 거죠. 왜냐면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위원회가 깨지면 당신들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도저히 진상규명작업이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거든요. 결국 유가족들이 점거농성하고 그 안에서 평가 작업을 하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어쨌거나 진상규명위원회를 유지하는 방식이었죠.
정: 가끔 유가족들이 원하는 명예회복이란 게 뭘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열사들이 바라는 건 정말 뭘까, 우리가 그 분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방법은 없을까. 당신은 민주화운동에 몇 퍼센트 기여했습니다, 이런 판정이 어떤 의미일까, 모든 걸 다 바쳐서 활동을 하고 죽어갔건만 그 활동에서 인정되지 않는 그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참 답답합니다. 강상구 동지가 여러 가지 한계에 대해 말씀 하셨는데, 그 중 가장 확실한 한계는 의문의 죽음 앞에서도 지켰던 자신의 활동과 신념을 부정해야 한다는 게 가장 큰 한계인 거 같습니다. 법에서 정한 틀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과거사를 둘러싼 운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볼 것이 주체의 문제 같아요. 정권에게 맡길 일이 아니라 우리가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거리에서 투쟁했을 당시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광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 책임자를 처벌하자고 외쳤는데, 그 정신 계승이 바로 과거에 대한 현재의 올바른 태도라는 거죠. 그걸로 우린 정권에 압력을 행사했던 겁니다. 그런데 제도화되고 난 다음에는 사실상 판도가 바뀌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정신 계승 운동 자체를 정권이 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광주를 생각하며 5월의 거리를 메웠던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이죠. 우리의 투쟁이 활발할 때가 가장 과거를 올바르게 이어갈 때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공간에서 우린 광주에서 죽어간 사람들, 그 이후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활동이 가장 정당했고, 사회를 진보시켰다는 걸 확인했던 것이죠. 과거사 청산의 제도화는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일부일 뿐입니다. 부분이 전체를 뒤엎는 꼴이 되지 않게 해야지요.
<과거청산의 쟁점2>: 여전히 소외 받는 노동자운동
정: 노동자운동이 현대사에서 아예 지워지거나 명망가 중심으로 조명되면서 평범한 민중들의 기여와 의미는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데 자신의 노동운동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마련되어야
강: 민주화운동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오늘날에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지금도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소외된 이들이 존재해
임: 작년 8월 《사회화와 노동》에서 일제 식민지배 청산 관련 글을 쓰면서 제주 4·3 특별법을 다룬 글을 보았습니다. 글의 요지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선한 양민 대 나쁜 공비라는 도식에 의존했던 것은 문제가 크다, 항쟁의 주체라는 접근법이 배제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강: 제가 담당했던 사건 중 한총련 5기 집행부 김준배5)씨 사건이 있었어요. 1997년에 한총련 투쟁국장으로 활동 하다가 광주의 아파트에서 수배 중에 경찰들이 쫓아오니까 뛰어내렸는데 [쫓아오던 경찰들이] 때려서 죽었죠. 이것이 민주화운동인가 아닌가 하는 엄청난 논쟁이 있었어요. 당시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있었던 한총련 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는가, 문민정부는 군사독재 정부가 아닌데 어떻게 민주화운동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1990년대 사건 중에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논란이 심했죠. 김준배씨의 경우에는 인정을 받았습니다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전에 유가족들이 점거농성하면서 포괄적으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는데 이념적으로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요구라기보다는 "내 자식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란 말이냐"는 식이 된 거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김준배씨 사건의 경우 진상규명위원회 위원들이 볼 때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인지 아닌지 판단의 여지가 있는 문제였지만 어쨌든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물론, 위원들 중에는 국가보안법이 문제가 있는 법이기 때문에 이 법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된 단체의 경우는 그 때문에 그 단체의 활동가가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도 했죠..
임: 지금 이루어지는 과거사 청산 작업은 민중운동을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정리하고 포섭하는 시도라고 생각되는데 노동운동 역시 비슷한 영향을 받으리라고 생각되는데요. 특히 현정부 안에 과거 노동운동과 관련 있었던 사람들이 꽤 있는데 … 어떻습니까?
정: 노동운동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두 가지 시도 중 하나는 명망가 몇몇 인물을 중심으로 운동이 만들어진 것처럼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지우는 겁니다. 단적인 예를 들면 일제 시대를 공부할 때, 1930년대를 암흑기라고 하는데 많은 노동자들이 일제에 항거하고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에 대항하면서 조직을 만들고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하면서 투쟁한 경험과 활동들을 배우지 못하는 거죠. 민중들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동의했다는 것을 1950년 한국전쟁이래 줄곧 부정하는 거죠. 87년 노동자 대투쟁도 요즘 교과서나 현대사 책을 보면 6월항쟁에 비해 짧게 정리돼요. 6·29 선언 이후 거리의 시민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작업장에서의 실질적인 민주화를 요구한 투쟁을 지우는 거죠. 이런 부분을 복원하면서 노동운동사를 새롭게 써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일 텐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운동진영 안에서 역사를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일단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시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노동운동을 하고 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경험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임: 명망가 중심으로 현대사를 해석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좀 더 말씀해주시죠.
정: 예전에 노동운동을 하다가 구사대에 의해 부상을 입어서 평생 환자로 살아가야 하는 분이 민주화운동보상심의회에 보상을 신청하기 위해 노동운동역사자료실로 찾아오셔서 전노협 시기나 1980년대 후반 자료들 중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노동조합 소식지나 신문을 보면 위원장 이름만 나오지 그 분 이름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허탕치고 돌아가시면서 하는 말씀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위원장 할 걸 그랬다고, 자신은 위원장보다 열심히 활동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러한 현상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나 해석이 제도의 문제로 국한 되어가면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운동사 자체를 명망가 중심으로 서술하고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거죠. 위인 주변의 평범한 민중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당시 노동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지만 단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과거 운동경력을 이용하여 정치권으로 진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심한 배신감까지 느끼고 자신은 당시 어떤 역할도 못했다고 느끼는 거죠.
강: 연결되면서 약간 다른 얘기인 거 같기도 한데 진상규명위원회의 민주화에 대한 개념의 협소함으로 인해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많은 분들에 대해서는 김대중 정부 들어서 시작된 제도적인 진상규명조차도 안 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학생운동 관련 사건을 8건 정도 조사하다가 당시 학생운동의 유명한 조직들에서 주요하게 활동했던 사람들을 추적해서 조사해보면 지금은 다 변호사, 교수, 사장… 뭐 이렇습니다. 그런데 남민전처럼 학생운동 이외의 조직에서 활동을 한 사람들은 아주 명망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일수록 고문 후유증이 많아서 절뚝거리면서 오거나 한쪽 눈이 실명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상도 제대로 안 받은 사람들이 태반이고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영광을 찾는 요즘 같은 시기에도 소외되어 있는 거죠. 이런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해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요. 그때 제가 굉장히 가슴 아팠는데 어떤 분이 저한테 "그때 노동자였던 사람은 지금도 노동자로 산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운동했던 사람들 중에는 요즘 국회의원이 아니더라도 통속적인 의미에서 좋은 직업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무실에 가서 얘기하면 당시의 역사의식을 잊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먹고살기 바쁘다보니 이렇게 하면서 산다는 얘기를 듣는데 다 똑같은 레퍼토리입니다.
정: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하는 다른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민주화운동이 보상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민주화에 대한 기여가 몇 퍼센트라는 식으로 평가한다고 합니다.6) 그렇지만 그때의 경험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렵게 사시는 분들을 보면 40%라도 보상을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실제로 든대요. 안타까운 일이죠.
<운동진영의 과제>
정: 노동운동 스스로 자신들의 기록을 보존하고 역사를 되돌아봐야
강: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는 과거사 정리는 제대로 되지 않을 것
임: 노동운동사 관련한 부분을 스스로 정립해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노동운동역사자료실에서 정경원 선배가 활동하면서 느꼈던 보람이나 어려움은 무엇인지 한 말씀 해주시죠.
정: 참 어려운 점이 많이 있죠. 실제로 운동진영에서 자기 자료를 챙기는 기관이 거의 없어요. 민주노총 같은 경우는 노동운동 자료실을 작년에 처음 만들었고요. 예전 비공개 운동 자료는 만듦과 동시에 없애버려서 일단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요. 있더라도 몇몇 사람만 알아볼 수 있게 씌여있다거나 이후의 논의결과는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는 형태로 자료가 남아있고, 게다가 자료가 각각 흩어져있죠.
5-6년 전부터 이런 자료들을 챙겨야 하지 않겠냐는 문제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해서 성공회대에 민주화운동 자료관7)이 먼저 생겼는데 거기서 한겨레와 함께 대대적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민주화운동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을 때 저희 전노협 백서팀에서는 전노협 자료들을 성공회대에 보내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어요. 전노협이 6년 동안 전국조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자료가 엄청나게 많았죠. 저희들이 그 자료들을 민주화운동 자료관에 보내지 않겠다고 한 이유는 지금과 같이 노동운동 진영에서 자신이 생산하는 자료에 대해서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노동운동의 역사적 전통을 찾는 것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료를 트럭으로 실어서 다른 단체나 학교에게 갖다 주는 것은 의미가 없고 앞으로 주체적으로 자료를 보존하고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대 자료관은 지금은 노동운동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다른 자료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이관했습니다. 이제 정부가 산하에 기념사업회를 두고 관장하는 것이죠. 운동 자료를 정권이 가져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모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전반적으로 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정권의 안정을 위해 기록을 파기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국가기구의 기록 관리에 더 신뢰를 갖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행자부 산하 기구가 사업 범위와 성격을 확정하는 데 있어서 국가예산과 인사권으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물을 보존하는 것 자체도 운동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자료를 모으고 보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만 자료를 쌓아 놓는다고 해서 보존되는 것도 아니죠. 우리는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당시 주체들과 투쟁의 의의를 현재로 이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번에 구로동맹파업 20주년을 맞아 그 주체들이 자신의 역사를 정리해보겠다고 모였습니다. 당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이제는 다른 건물이 들어선 공단을 돌아보고, 현재 파업하는 구로지역 사업장을 방문해 함께 연대하고. 앞으로 1년 동안 자료와 기억을 모아 사료집을 낼 계획이라고 합니다. 물론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어떤 활동으로 이어갈 것인가를 주체들이 모여 논의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료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운동이죠. 진정 과거를 기리려면 자료를 박물관의 전시물처럼 만들 것이 아니라 운동하는 주체와 활동을 만들어내야 하는 거죠. 그런 차원에서 작은 자료실들, 그리고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자료실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봐요. 마산·창원 노동자들의 투쟁의 흔적이 있는 자료를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에 가져다 놓는 게 아니고, 바로 그 투쟁 현장 한복판에 두고 노동자 스스로 관리하는 거죠. 그래야 선배들의 투쟁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지 않겠어요? 사실 공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군데 모아 놓으면 더 편할 거 같지만, 그 자료를 구하러 가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더 많은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거든요.
지금은 노동운동 자료를 정리하면서 이전 자료들을 분류하고 목록으로 만드는 동시에 현재의 기록을 남기자는 취지로 투쟁백서나 조직사 쓰기를 운동진영 안에서 확장하려고 했고 그 일환으로 한국통신 계약직 투쟁이나 발전노조의 투쟁기록이나 자료 모으는 작업을 진행했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은 자신들의 역사적인 정당성을 얘기하면서 분위기를 쇄신하는 반면 노동운동은 생존권투쟁으로서만 정리되어서 민주화에 대한 기여가 평가되지도 않고 있는데,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제기할 근거를 만드는 활동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정당성을 둘러싼 투쟁을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강: 자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지하활동 했던 사람들 중에서 당시에 검거된 사람들 관련한 기록이 다 남아 있어요. 그 자료들이 남영동 대공분실, 국정원에 보관되었을 텐데 검찰기록은 검찰이 기소한 자료가 법원으로 가죠 서울지방법원 자료실에 가면 옛날 자료가 엄청 쌓여있어요. 제가 이재문씨 사건이나 민추위 사건 조사할 때 들어가 봤는데 그 때 조사자료들이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텐데 그냥 조사하고 그 이상 활용되지는 못했어요 정부기록들은 5년 보관, 10년 보관, 반년 보관 등으로 기한이 설정되어 있어서 그 기간이 지나면 다 폐기해버려요. 그래서 옛날 자료가 없는 것은 정부가 일부러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보관기간이 지나면 그냥 기계적으로 문서를 모아서 태워버리는 겁니다.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 운동진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세상이 완전 뒤집어지지 않는 한 과거사 정리는 잘 안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나가며>
강: 국가기관 내에 기존의 인적 청산 및 사회 전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어.
정: 현대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 전까지는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하기 어려워, 민중들 스스로 역사를 정립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중요.
임: 지금까지의 얘기들을 정리해야겠군요. 지금까지 했던 얘기들 중에서 빠뜨리거나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해주시죠.
강: 과거사 청산 작업을 다른 사회운동의 발전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죠. 지금 국가기관 안에는 기존의 세력들이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있습니다. 경찰청에 한번 갔었는데 거기 보안국장 책상 위에 《월간조선》이 그 해 1월부터 12월호까지 쭉 쌓여 있더라고요. 이러한 역사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경찰, 군부 안에 그대로 다 있다는 거죠. 인적 청산 없는 한계 내에서의 과거사 청산은 피해자의 일부에 대한 보상으로 그칩니다. 그리고 그 성과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거나, 이를 통해 무언가 정치적 야심을 이루려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겠죠.
정: 제가 3년 전부터는 구술사 작업을 병행하는데 당시 사실의 복원 뿐 아니라 당시에 가졌던 상처가 사람을 어떻게 규정하는 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박창수 열사 부모님하고 몇 시간 얘기를 나눴는데 안기부에 의해서 아들이 죽고 삶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인식이 굉장히 많이 바뀌어요. 아들의 죽음을 매개로 사회를 재해석하는 거죠. 한국 현대사에서 이런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조직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내 아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것이 자랑스럽다고 생각될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는 이상은 부모님이나 가족들의 상처가 치유되기 어렵죠.
지금은 청와대에서 왕년에 운동 안 해본 사람 있냐고 할 정도로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권력 주변에 혹은 그 중앙에 진출하고 있고 과거사 청산의 주체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최근 뉴라이트 운동도 그 반향의 하나로 볼 수 있고요. 그렇지만 과거를 청산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도 비정규직 노동자는 죽어가고, 농민들은 농약을 마시고 있죠. 이런 현실을 청산할 과거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정권이 하는 과거청산에 가두어지면 안 되는 거죠. 민중들은 모순덩어리인 현실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했던 것이기 때문에 민중들 스스로가 역사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그 역사를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미래의 대안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활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과거사 청산은 어쩌면 주체들에게 두 번의 상처를 내는 결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임: 현재의 과거사 청산 작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재사'가 청산이 되어야 과거사를 청산할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린다고 생각하는 반면, 과거사 청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현 정부가 과거사 청산의 주체로 정당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만 마치도록 하고 바쁘신 중에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 [정리자 주] 드라마 《영웅시대》는 2004년 7월 5일부터 2005년 3월 1일까지 MBC를 통해 방영되었다. 그 주된 내용은 실제 정주영, 이명박, 이병철 등의 기업인을 모델로 한 천태산, 박대철, 국대안이라는 인물들이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에 협력했던 일들을 주요 줄거리로 하는데, 방영 당시부터 실제 인물들의 활동에 대한 시시비비가 제기되어 논란이 있었다. 본문으로
2) [정리자 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유가족들의 투쟁은 1988년 10월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 136일 동안의 농성투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각종 토론회와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드디어 1999년 12월 28일 국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 유공자 명예회복 및 예우 등에 관한 법률안'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안'이 통과되었다. 1998년 두 법안이 발의된 이후 유가족들은 당시 여당이었던 국민회의 당사 및 국회에서 점거 및 농성투쟁을 병행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홈페이지(http://www.yolsa.org/index.htm) 참조. 본문으로
3) [정리자 주] 故이재문씨는 4·19 당시《민족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발표되면서 수배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1976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1979년 검거된 이후 1980년 군부의 광주학살 만행에 항의하는 단식투쟁 중 비전향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는 당국의 조치로 1981년 10월 22일 서대문 구치소에서 운명하였다. 이재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은 위원 5명의 찬성으로 "이재문이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에 의하여 사망했다고 판단되나 그 죽음이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므로 기각한다"고 결정했다.(200.9.16) 이에 대해서는 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차(2000.10-2002.10) Ⅲ 제3부 개별사건 보고』, 2003, pp.637-64 참조. 본문으로
4) [정리자 주]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집권 이후 지난 수십 년 동안 백인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기간 동안 일어난 백인과 국가의 인종적 폭력을 조사하고 진상을 규명함으로써 개별적인 보복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과거사를 평화적으로 청산하자는 취지에서 진실과화해위원회(TRC)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TRC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기관이나 각종 단체를 수사할 수 있고 피해자의 진술내용만으로도 가해자를 소환할 수 있었다. TRC는 정당, 언론, 자본, 학계를 조사대상으로 폭력의 동기와 관점, 정황 및 요인을 포괄적으로 규명하려고 하였다. TRC의 활동은 비록 처벌이나 보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단기간에 걸쳐 강력한 권한을 보유하고 과거사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새로운 민주주의적 사회관계를 향한 민중들의 강력한 동의지반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5) [정리자 주] 故김준배씨는 1993년부터 수배를 받아오던 한총련 투쟁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97년 9월 15일 은신 중인 아파트에 들이닥친 전남도 경찰청 보안수사대와 경찰청 기동수사대 형사 24여명을 피해 13층 높이에서 케이블 선을 타고 탈출하다 추락하여 다음날 새벽에 운명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위원회는 김준배씨 사건에 대해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결론짓고 김준배씨를 폭행하여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형사를 '독직폭행죄'로 고발하였다. 한편 이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소수의견의 요지는 김준배씨의 사망이 추락에 의한 손상이라는 점에서 공권력에 의해 사망했다고 보기 어렵고 따라서 관련 공무원을 고발하기로 한 결정은 지나치다고 지적했다. 김준배씨 사건은 『의문사진상규명보고서 1차(2000.10-2002.10) Ⅱ 제3부: 개별사건보고』,2003, pp.495-528 참조. 본문으로
6) [정리자 주] 7월 14일 방영된 KBS 시사프로그램《뉴스 투나잇》의 보도에 따르면 민주화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만든 이른바 "민주화 기여도"에 따르면 故권희정 열사는 50%, 故노수석 열사는 60%, 故우종원 열사는 75%로 판정되었다. 이는 보상금의 차등지급 기준으로 열사의 민주화 기여의 정도를 측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7) [정리자 주] 1999년에 민주화운동자료관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를 성공회대에 소장하고 있다가 2001년 6월 28일 국회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법이 통과된 이후 현재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산지원을 받는 공공특수법인체로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자료수집·기념사업 등의 관련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한편 성공회대에는 부속기관으로서 민주자료관이 운영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성공회대사이버 NGO자료관() 홈페이지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