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의 옳은 점과 잘못된 점
성매매의 옳은 점과 잘못된 점1)
페미니스트들은 성매매 쟁점을 두고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대략 “성 노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진영과 “폐지주의” 단체들 사이의 논쟁은 종종 격렬하고 증오에 차 있다. 이런 상황은 논쟁의 양쪽 “진영”의 원리들에 공감하면서도 성매매에 관해 부적절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느끼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혼란스러운 것이다. 나는 지난 8년 간 성매매에 관해 연구하면서 부국과 빈국 모두에서 성매매 여성, 알선업자·포주, 고객들을 인류학적으로 관찰하고 이들에 대한 면접조사를 수행했다(O'Connell Davidson 1998). 내가 연구를 수행한 모든 나라들에서 성매매 여성들은 법적·사회적으로 별개의 인간 부류로 간주되고, (갖가지 방식으로) 시민권과 인권을 침해당한다. 나는 성매매 여성들에게 동료 시민들과 동일한 법적·정치적 권리와 보호를 부여해야 한다는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는 또한 제3자에 의해 강제로 성매매에 유입되지 않은 대다수의 여성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다는 사실, 따라서 성매매가 노동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나의 연구에서 상품화된 성을 위한 시장의 존재를 축복할만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O'Connell Davidson 2001, O'Connell Davidson과 Sanchez Taylor 1999를 보라). 이런 의미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들의 폐지주의 주장에 공감한다.
이 글은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성매매에 관한 현재의 수많은 논쟁에서의 오류를 노동자로서 성매매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라 지적한다. 하지만 이 글은 일반적으로 시장관계, 특수하게는 성매매를 지속시키는 사회·정치적 불평등에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한다.
성매매와 개인의 소유권
자유주의적 정치사상 내부에는 신체, 소유권, 노동 사이의 관계에 관한 오랜 긴장이 존재한다. 존 로크는 다음과 같은 언명으로 유명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 자기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이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의 신체의 노동과 손의 작업은 당연히 그의 것”(1993, 274)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언명에서 인간의 노동하는 신체적 능력은 상품화될 수 있다. 하지만 앤더슨(B. Anderson)이 지적했듯이, 로크는 신체를 신이 주신 신성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신체와 맺는 관계는 그가 다른 종류의 소유와 맺고 있는 관계와 동일하지 않다. … 따라서 인간은 자살할 권리나 스스로를 노예 상태에 몰아넣는 권리는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2000, 3)
그러므로 개인의 소유권에 관한 자유주의적 개념은 무엇이 상품화될 수 있고, 시장에서 계약을 통해 교환될 수 있는가에 관한 특정한 질문을 개방한다. 이런 의미에서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성매매에 관한 수많은 현재 논쟁의 의제가 설정된 듯하다. 예를 들어, 신체의 성적 능력이 개인의 소유권을 구성하는가, 아니면 도덕적 손상 없이 인격으로부터 성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성매매 법은 성매매 여성의 소유권을 자발적으로 양도할 수 있는 정당한 자연권을 침해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매매 계약 그 자체가 존엄성이라는 그녀의 자연권을 침해하는 것인가?(예를 들어 Pateman, 1988; Barry, 1995; Jeffreys, 1997; Chapkis, 1997을 보라.)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은 소유권, 노동, 계약상의 동의, 자유에 관한 자유주의적 담론을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권력의 심대한 비대칭성을 은폐 또는 자연화하는데 일조하는 일련의 허구로 간주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의 노동(성적·감정적, 정신적·육체적)은, 브레이버만(H. Braverman)의 말을 빌자면, “모든 생명 과정과 신체적 기능처럼 … 인간 개인의 양도할 수 없는 소유권에 속한” 인간의 노동은 노동자인 인간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시장을 통해서 교환·판매되고 양도되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노동자가 판매하는 것 그리고 고용주가 구매하는 것은 “동의된 양만큼의 노동이 아니라, 동의된 시간 동안의 노동능력이다.”(1974, 54) 개인의 소유권은 그 인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므로, 임노동 계약은 사실상 개인에 대한 지배권의 양도를 수반한다. X량만큼의 돈과 교환함으로써 고용주가 얻는 권리는 특정한 업무를 수행하고, 특정 문제에 관해 사고하고, 고객에게 특정 형태의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지시할 수 있는 권리다.
마찬가지로 성매매 계약에서 성 또는 성적 노동이 교환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객은 성매매 종사자에게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돈 그리고/또는 다른 물질적 혜택을 내놓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혹은 매우 드물게 그녀)가 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그는 성매매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구멍이 되도록 하고, 그를 위해 웃고 춤추고 옷을 입도록 하며, 그를 채찍질하고 때리고 주무르고, 그의 자위행위를 돕고, 그에게 오줌을 누도록, 또는 반대로 그가 오줌을 누거나 수갑을 채우거나 때리는 것에 복종하도록, 아니면 그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다른 행동을 하도록 명령하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O'Connell Davidson 1998). 고용주는 고용 계약을 통해 노동자의 완전히 양도 가능한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을 뿐이며, 마찬가지로 고객이 성매매 계약을 통해 성매매하는 인간을 구매할 수는 없다. 두 계약은 모두 지배권을 판매자에게서 구매자로 이전시키며(그러한 권력의 범위와 양도의 기간이 계약은 내용이다), 따라서 판매자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를 일시적으로 양도하거나 유보하도록 만든다.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개인의 의지에 대한 침해를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극악한 침해로 간주하고, 지배 집단이 인격적인 권력을 행사하여 피지배집단을 자신의 명령에 복속시키는 전(前)자본주의적인 “전통적” 사회 구성체를 탐탁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 관계는 인간이 아니라 상품에 대한 권력의 행사를 수반한다고 가정되기 때문에, 그리고 고용주가 항상 인격적인 권력을 사용하여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유권”을 양도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임노동 계약은 동등하고 상호적이며 자발적인 교환으로 제시될 수 있다. 상품의 교환 가치를 표현하는 보편적인 매개인 화폐가 노동력 “상품”과 교환된다. 자본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상품 교환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형식적인 권리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의 자유로 이해된다. 바로 이러한 교환과정을 통해서 자본가계급의 정치·경제적인 지배가 유지·재생산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개인의 소유권 개념의 미덕은 그것이 타인의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그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의지를 양도하고 다른 누군가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돈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과 종속의 관계를 은폐한다는 데에 있다.
이런 비판에 거의 동요하지 않는 사람에게 성이 노동과 같은 방식으로 상업화될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은 권리에 관한 부적절한 질문일 뿐이다. 프란스(A. France)의 말을 바꿔서 표현하자면, [이들이 보기에] 부자와 빈민,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1세계” [사람들]과 “3세계” [사람들]에게 파리의 다리 밑에서 성매매에 종사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노동을 자유롭게 양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분명 평등과 자유를 더욱 증진시키기를 바란다. 실제로 그들은 전 세계 성매매 여성들이 역사적으로 그리고 여전히 일상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시민권과 인권의 심각한 침해에 도전하려는 열망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제출한다(예를 들어, Walkowitz, 1980; Alexander, 1997; Cabezas, 1999; Uddin et al, 2001를 보라).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침해가 법적·사회적으로 성매매 여성을 노동자가 아니라 성적 비정상자로 취급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은 성매매와 다른 형태의 임노동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여기서부터 현재 성 산업의 버팀목이 되는 계급·젠더·인종 그리고 세계적인 권력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으로 이동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은 그 대신에 종종 다소 상이한 접근을 취하는데, 그것은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의 권리에 관심을 갖는 이들의 접근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세계적인 불평등 그리고/또는 젠더 불평등으로 인해 상품화된 성이 거래되는 시장의 형성 방식을 토론하면서, 어떤 분석가들은 성적 노동을 판매하는 것이 마치 그런 불평등에 맞서는 저항의 한 형태를 표현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기 시작한다.(예를 들어 Bell, 1994; Kempadoo and Dozema, 1998; Nagel, 1997을 보라) 이런 분석은 성매매가 노동의 한 형태라는 주장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노동착취 공장의 노동자들이 바느질을 함으로써 빈곤에 “도전한다”거나, 비행기 승무원이 미소 띤 얼굴로 음료를 접대함으로써 성차별주의에 “반항한다”거나, 카리브 지역에서 구두를 닦는 흑인 어린이가 백인 관광객의 구두에 광택을 냄으로써 인종주의에 “저항한다”고 묘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엇 때문에 성매매는 다른 것으로 간주되는가? 나는 그것이 성과 자아 사이의 곤란한 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재출현한 성과 자아
“성매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패이트만(C. Pateman)은 이렇게 묻고 나서, 고객은 대상화된 여성의 신체에 대한 지배력을 구매하고 성매매 여성은 다른 어떤 직업에서 요구되는 것과는 매우 상이하고 훨씬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녀의 자아를 판매해야만 한다고 대답했다.(1998, 207) 이로 인해 성매매 여성은 손상된다. 신체의 성적 사용에 관한 계약의 체결은 여성의 육체적 완전성과 자아를 분리시키고, 이것은 정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예를 들어, Jeffreys, 1997과 Barry, 1995를 보라). 많은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분석을 비판하면서 성매매가 감정 노동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성매매와 다른 인격적인 서비스업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이런 노동이 언제나 또는 필연적으로 노동자에게 해로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챕키스(W. Chapkis, 1997)는 감정 노동에 대한 호크스차일드(A. Hochschild)의 1983년 고전적인 연구를 인용하여, 비행기 승무원은 종종 감정 노동을 수행함으로써 자신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한다고 믿고 그들 “대부분은 그런 변화를 더 큰 통제력을 확보하는 긍정적인 것으로 묘사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같은 방식으로 챕키스는 성 노동자들이 “상업적인 거래 내에서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자제하는 능력을 경험할 수 있고 … [이것은] 자아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와 육체적 완전성 사이의] 경계를 유지하는 유용한 도구”라고 주장한다(1997, 75). 성과 감정이 “본성 및 자아와 맺고 있다고 가정되는 독특한 관계에서 분리된다고 하더라도 성과 감정의 양도나 상품화가 필연적으로 파괴적이라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Chapkis, 1997, 76).
그런 후 챕키스는 어떤 상황에서는 감정 노동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고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지만 “극장이나 심리 치료실, 탁아소에서 행해지는 감정 노동에 대한 존중이 집창촌에까지 확장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1997, 79). 챕키스는 고용 기간과 조건에 대한 통제력의 결여로 인해 감정 노동을 수행하는 인간적 고통이 심화된다는 호크스차일드의 주장을 수용하여, 성 노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감정의 상품화 그 자체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오히려 “고객과 노동자의 지위 상 차이, 피고용인/고용인 관계, 수행되는 노동에 대한 문화적으로 부정적인 태도와 같은 평범한 문제가 일부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손상의 근원일 수 있다. 이것은 영혼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 상품화됨으로써 필연적이고 치명적인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이미지만큼 거창하지도 시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이런 정식화는 작업장 조직화와 같은 실천적 개입과 그런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부여되는 지위와 존중을 높이려는 더 큰 정치적 운동의 관점에서 비판을 부각시키는 이점이 있다”(1997, 82).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정식화는 성적 경험을 사고 싶지만 페미니스트의 자격은 계속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이점이 있는 것 같다(이것은 성매매의 “녹색 소비자”라고 할 수 있는 “선하고” “책임성 있는” 고객이 되는 법과 관련한 청사진을 제공한다). 그리고 자신의 책 마지막 장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챕키스에게 이것은 확실히 중요하다. “수년 간 돈으로 거래되는 성이라는 주제를 연구한 결과, 나는 결국 그것을 해보기로 결심했다.”2)
(1997, 215) 챕키스는 상업적인 성을 구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호크스차일드와는 달리 “‘노동의 도구’가 되는 것의 인간적 고통,” 또는 자본주의적 노동 과정의 착취적·소외적 본질에 관한 문제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 성매매와 관련된 상업주의를 실제로 비판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성매매에 대한 챕키스의 분석은 위 단락에서 언급된 고용 관계나 작업장 조직화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계급 또는 노동운동에 관한 좀 더 광범위한 논의는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챕키스 [저서]의 「생생한 성행위」[장]은 성매매 여성들의 완전한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꼼꼼한 예들을 제시하지만, 개인의 소유권, 시장 관계, 인권에 관한 정통 자유주의 담론은 문제삼지 않는다. 한편, 그녀 자신의 “상업적 성 경험”의 사례들을 자세히 “공유하는” 장을 [책에] 포함시킨 것과 성 노동자들에게 부여되는 “지위와 존중”을 높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챕키스는 성매매에 수반되는 성적·감정적 노동이 심리치료, 연기, 탁아 서비스에 수반되는 감정 노동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 것 같다. 이것은 성 노동이 일종의 돌봄 혹은 창조성의 형식을 띠(거나 정당한 조건 하에서 최소한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성 노동이 존중되고 사회적으로 예우되어야 한다는 함의를 갖는다.
이런 견해는 “성적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정교화된다. 성적 급진주의 이론은 젠더 자체의 이분법뿐만 아니라, 성에 대해 정상과 비정상, 건전과 불건전, 쾌락과 위험을 나누는 법적·사회적 이분법이 매우 억압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적 급진주의자들은 이런 이분법을 전복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합의 하의 성적 관행을 높이 평가한다(Vance, 1984; Rubin, 1999; Califia, 1994). 이런 시각에서 보면, 상업적인 성의 구매와 판매는 모두 “성애의 다양성”의 합법적 형태들로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칼리피아(P. Califia)는 성매매가 가치 있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며 심지어 성적·인종적·계급적 평등이 완전히 달성된 사회가 오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대에게 구애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이나 매력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상호 끌림이나 성적인 교환이 결합을 위한 통상적인 기초가 되는 사회에서 매력적이지 않은 이들, 즉 자신이 얻는 만큼 줄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나 이익이 없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장애인, 만성 질환이나 불치병을 앓는 이, 노인, 성 기능 장애를 가진 이들은 이들을 차별하지 않는 숙련된 성 노동자들의 봉사에서 계속 (지금도 그런 것처럼) 혜택을 입을 것이다"(1994, 245).
칼리피아는 페티시즘3)
추종자도 상업적인 성을 계속 요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페티시즘 [행동을 위한] 대본은 페티시즘 추종자의 파트너에게는 대리 만족만을 제공하는 승화되고 전위된 자위 행위의 정교한 형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성매매는 [페티시즘 추종자의] 파트너의 페티쉬[성적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물]을 이타적으로 활용하게 함으로써 관계에서 누군가가 “희생자의 역할을 해야할” 필요성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유토피아에서 성 노동자는 “교사이자 치료자이며 이해심이 풍부하고 인정 많은 모험적인 영혼이다. 오늘날 성매매 종사자는 이 모든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은혜를 몰라주는 환경 속에서 친절과 미덕으로 이를 수행하는 것이다.”(1994, 247)
챕키스와 칼리피아의 글에서는, 이제 성매매가 노동의 한 형태라는 주장과 성 노동의 사회적 가치 및 성매매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고객의 권리에 관한 주장이 혼합된다(Perkins와 Bennett, 1985; Queen, 1997도 보라). 성매매 여성들은 그녀들이 없었다면 충족되지 못할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예우되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의사나 교사가 대중의 건강과 교육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예우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성매매는 의료와 교육처럼 젠더·인종·계급의 평등이 완전히 달성된 사회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성매매를 단순한 서비스 노동으로 간주하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호텔 산업의 직종이나 가사 노동과 비교한다면, 위와 같은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너무 바쁘거나 중요한 사람이라 스스로 문을 열고, 잠자리를 정리하고, 옷을 세탁하고, 변기를 청소할 수 없는 사람들 또는 단순히 이런 일들로 귀찮아지기 싫은 사람들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혁명이 온다 해도 이런 사람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숙련되고 전문적인 도어맨, 가정부, 가사 노동자들의 작업으로 혜택을 볼 것이다). 실제로 챕키스와 칼리피아는 성 노동을 치료 또는 심리치료와 비교하고 성매매를 일종의 선험적인 인간 욕구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이들이 근거는 상이하지만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성을 “자아와의 독특한 관계”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아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상품화시키는 성매매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은 고객들이 자신의 인간 욕구를 충족시키고 그들의 진정한 자아를 표현하는데 필요한 것을 성매매가 제공하기 해주기 때문에 이것이 기본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후자의 생각은 내가 면접했던 고객들이 확실히 공유하고 있던 믿음으로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성매매 이용을 성적 “욕구”라는 관념으로 설명한다(O'Connell Davidson 1998). 그러나 성애의 “욕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애의 “욕구”에서 전제적 주체로
성적 만족을 못 느낀다고 해서 사람들이 여타의 기본적인 신체적 욕구를 부정당하거나 의료를 거부당할 때와 같은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다.4)
하루, 일주일, 또는 일년 단위로 정해진 횟수만큼 오르가즘을 느껴야 한다는 생물학적인 법칙은 없다. 사람들이 성적인 [욕구를] 분출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불쾌하거나 심지어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자위를 할 수 없거나 그것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경우),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주는 성적 파트너가 없다고 해서 실제로 그들의 물리적인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성적 욕망은 생리적인 과정일 뿐만 아니라 감정적이고 인지적인 과정에 기초한다. 오르가즘에 도달하고 싶은 충동이 배변의 충동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생물학적인 기능이라면, 성관계 파트너의 나이와 성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성적 교제의 결핍이 건강을 위협하고, 여타의 질병을 앓을 때 의사나 간호사의 봉사가 필요한 것과 동일하게 성 노동자의 “봉사”가 필요하다면, 성매매 종사자의 물리적 외양이나 나이, 젠더, 인종은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관계는 단순한 신체적 기능 또는 물리적 욕구가 아니다. 우리의 성생활은 인간의 경험과 사회성을 범주화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활용하는 관념들에 기초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성적 욕망이 인간의 근본적이고 영원하며 일반적인 성적 욕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성적 욕망을 이렇게 취급하는 것은 매우 문제가 있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정확한 성애의 “필요조건”을 만족시킬 자격이 있다는 주장의 결론은 무엇인가? 칼리피아는 “13줄의 가죽끈이 달린 8인치의 흰 색 에나멜 구두의 뒤꿈치에 차이고”(1994, 245) 싶은 바램이 성적 욕구임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에나멜 구두를 신은 이가 앤 공주 또는 라티파 여왕일 때만 성적인 만족감을 느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또한 “욕구”인가? 그렇다면 백인 인종주의자가 흑인 여성들의 항문에 삽입하려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욕망이나 11세의 어린 아이가 해주는 펠라티오를 바라는 성인 남성의 “욕구”는 어떠한가? 정의 상 자위가 아닌 성관계는 다른 사람 또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한 사람이 성관계 여부와 언제, 누구와 어떻게 성관계를 할 것인가를 통제하는 것은 종종 다른 사람의 동일한 권리를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루빈(G. Rubin)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서구 문화에서 성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누구도 매운 요리를 즐긴다는 이유로 부도덕하다고 간주되거나, 감옥에 가거나, 그녀 혹은 그의 가족에서 추방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죽 구두에 탐닉하는 사람은 이 모든 일과 그 이상을 당할 수도 있다. 결국 누군가 구두를 두고 자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어떤 사회적 중요성을 갖는가? … 성이 너무 심각하게 간주되는 것에 비해 성적 학대는 그렇지 않다. 성애의 취향과 태도에 기초하여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체계적 가학이 존재한다”(1999, 171).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성적 급진주의자들 역시 성생활의 특정 측면들을 너무 심각하게 고려한다. 확실히 누군가의 구두 도착이 공동체의 불쾌함과 [공동체로부터] 추방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은 우습다. 하지만 이 사람이 이런 도착 증세에 탐닉하는 능력을 인권의 지위로 상승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똑같이 우습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구두를 두고 자위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관해 우리가 “그래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또는 그녀가 구두를 두고 자위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면 언제든지 구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해줄 사회적 제도를 설립하는 것이 긴급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위하는 동안 구두에 관해 몽상하면서 그럭저럭 때워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똑같이 “그래서?”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성적 급진주의 이론은 “성관계에 관해 말하는 것이 신체나 쾌락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는(Laqueur 1995, 155)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자위적인 페티시즘을 예로 들면서, 루빈은 자위가 아닌 성관계는 정의 상 관계적이라는 사실에서 파생되는 어려운 쟁점을 회피한다. 구두를 두고 자위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사회는 확실히 관용이 없고 편협하다. 하지만 루빈은 성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그녀가 말하는 관용은 예를 들어 스타벅스에서 옆에 있는 낯선 남성이 갑자기 그녀의 구두를 두고 자위하려는 “욕구”에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칼리피아와 마찬가지로, 루빈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권리와 그것이 개인적인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을 때 타인을 통해 “희생자의 역할을 맡지” 않을 권리를 주장한다. 즉, 돈을 받는 대가로 섹스에서 개인적인 만족을 포기할 권리를 부여받은 성매매 종사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 말이다.
성매매 계약의 핵심은 성매매 여성이 돈이나 다른 이득을 받으면서 성적 상호작용의 결정적인 기준인 개인적인 욕망이나 성적인 취향의 포기를 동의한다는 점이다.5)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모든 사람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성을 판매하는 사람은 최소한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타자로 가정하고, 대상으로 여겨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상품화된 성을 위한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은, 보바르(S. Beauvoir)의 말로 하자면, 성을 파는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은 그 또는 그녀의 의지에 따라 “전제적인[자신의 권력을 부당하고 잔혹하게 사용하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성매매의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는 페미니스트 폐지주의자들에게 성매매는 필연적으로 여성의 정치적 종속을 통해 남성이 자기통치권을 실현하는 가부장적 질서에 조응하는 것이다. 이는 젠더를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고, 여성들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을 함축한다. 여성의 섹스 관광에 대한 테일러(J. S. Taylor)의 연구(2001)와 이주 가정부를 고용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앤더슨(B. Anderson)의 연구(2000)가 보여 주듯이, 인종적·계급적 타자를 대상화함으로써 “남성적인” 자기통치권을 추구할 수 있는 여성들도 존재한다. 게다가 페미니스트 폐지주의자들은 성매매를 통해 여성이 일시적으로 대상에 고착됨으로 그녀의 주체성은 완전히, 영구적으로, 문자 그대로 소멸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사람들이 심지어 대상으로 취급받을 때조차도 문자 그대로 대상이 되거나 혹은 스스로를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라는 중요한 (그리고 때때로 굉장히 고통스러운) 사실을 얼버무리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비록 이 사람들의 목표가 일군의 사람들을 돕거나 혹은 “구원하는” 것일 때에도 그들의 완전한 주체성을 거부하게 될 수도 있는 심대한 정치적 위험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제적인 주체성까지도 즐겁고 이상적인 조건으로 포용하는 성적 급진주의의 성매매에 대한 입장은 확실히 모든 면에서 정치적으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권리와 존중의 정치학
초기 페미니즘 운동이 노인, 병자, 장애인을 돌보는 일과 육아에 수반되는 일을 노동으로 인식할 것을 주장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맥킨토시(M. McIntosh)는 “성 노동자”라는 용어가 성매매 여성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는 여성”이라는 점과 “다른 여성들에게도 그러한 것처럼 자신이 한 일이 단순히 모든 여성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숙련되고 노력이 투여되는 활동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1994, 13). 하지만 사회적 재생산과 관련된 노동이 인식되고 보상받아야 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이런 노동이 단순히 숙련되고 노력이 투여되기 때문만은 아니고, 본질적으로 사회적 가치를 가진다는 기초 위에서 전개되었다. 실제로, 이것이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이 페미니스트들에게 어려운 이슈로 남아있는 부분적인 이유다. 왜냐하면 앤더슨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회적인 재생산 노동은 단순히 신체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활 스타일과 결정적으로는 지위의 재생산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2000, 14). 그래서 예를 들자면, 고용된 가사 노동자가 수행하는 일들은 종종 그들을 고용한 사람들의 지위를 증명하거나 높여주는 데 봉사하는 것이지 고유한 사회적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다. 심지어 자기 가족 애완견이 배변한 후 항문을 닦으라고 하는 것처럼(Anderson, 2000, 26) 기술과 노력이 요구되지만 개인적이거나 집합적인 생존에는 거의 필요하지 않은 일들을 가사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고용주들도 있다.
성매매 여성들에게 부착된 낙인의 극악무도함과 그것이 여성들의 삶에 미치는 결과를 생각한다면, 성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이들이 성매매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목적에 복무하는 본질적으로 존경받아야할 직업으로 재구성하려고 애쓰는 기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욕망이 아니라 성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서야, 이런 입장은 유지되기 힘들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에 사회적인 명예를 부여하도록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어떻게 완벽하게 건강한 개의 항문을 닦아주는 일 혹은 고객의 성적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매매 여성들이 하는 일에 사회적인 명예를 부여해야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성매매의 사회적 가치를 주장함으로써 성매매의 낙인을 걷어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정치적 전략으로서 위험을 수반한다. 새로운 위계화와 새로운 분할을 만들어낼 위험이 존재한다. 만약 성매매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에 존경을 받아야 한다면, 예를 들어 심각한 장애를 가진 고객을 받도록 전문화된 성매매 종사자들은 장애가 없는 남성들을 상대로 하는 사람들보다 어느 정도는 더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장애가 없는 고객을 상대하는 성매매 여성들과 달리 장애인을 상대하는 “섹스 대리인”이 사회적으로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분할이 이미 존재한다. 또한 이것은 고객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성매매 여성이 고용주의 요구에 응하는 가사 노동자들보다 더 존경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사회적으로 영예로운 목표에 헌신할 수 있는 삶의 기회가 계급·젠더·인종에 따라 분할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노동의 형태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개인적인 고결함이나 명예에 관해서 말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심장 전문의가 되는 것이 백인 중산층 남성의 정신적 고상함의 증거가 아니며,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백인 중산층 여성의 개인적 고결함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인간, 시민,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을 권리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을 하는가 아닌가를 조건으로 할 수 없다. 대학교수, 심장 전문의, 성매매 여성, 가사노동자들은 경제 행위자로서 모두가 동등하게 권리를 갖고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성매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권리가 있고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들이 성매매 여성으로 일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합법적인 인정, 권리, 위엄, 존중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이지, 우리가 장애가 있느냐 없느냐, 흑인이냐 백인이냐, 동성애자냐 아니냐, 구두 페티시즘이냐 바닐라 섹스6)
페티시즘이냐 하는 사실과는 관계가 없다.
시장의 배후 그리고 시장을 넘어서
아길라(D. Aguilar)가 제시한 것처럼 성매매에 대한 현재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논쟁의 오류는 “계급과 생산의 사회적 관계라는 기본 개념”에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고 결론을 짓고 싶기도 하다. 확실히, 대다수 사람들이 빈곤상태에서 살아가고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세계에서 성매매에 관해서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몰두하고 있는 문제는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1인당 GDP가 383달러인 인도에서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230만 명으로 추정되고 그들 중 1/4이 미성년자라는 점을 생각해 보라. 또는 1인당 GDP가 고작 69달러인 부마는 약 2만에서 3만 명의 여성과 소녀들을 성매매에 종사하도록 태국으로 수출하고, 수천 명 이상이 성을 팔러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간다는 점(Lim, 1998; AMC, 2000)을 생각해 보라. 비록 이런 여성과 어린이 중에서 일부는 제3자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성매매에 유입되기는 하지만, 그들 중 다수를 성 노동으로 몰아넣는 것은 바로 침체된 경제다. 이는 미국(1인당 GDP가 21,558 달러에 이르는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많은 여성들과 소녀들이 빈곤선의 임금을 받는 여성 노동력의 35%에 합류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성매매할 것을 “선택한다”(Castells, 1998). 이런 사람들이 자기통치권을 실행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그들의 성매매가 그들의 존엄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기만적으로 보인다. 가난에 존엄이란 없고, 가난은 개인의 완전한 행위자로서의 권리를 박탈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노동(성적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을 팔 권리가 존엄이나 행위자로서의 권리를 복구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계급과 생산의 사회적 관계라는 기본 개념에 호소하는 것이 성매매에 관한 페미니스트들의 논쟁을 진전시킬 수 있을까? 마르크스주의 분석가들은 성적 억압의 역사적이고 현재적인 무수한 형태에 관한 질문에 거의 관여한 적이 없었다. 계급 이론가들은 종종 인간의 경험을 두 개로 구분하고 명확하게 분리하는 “공”·“사” 영역이라는 자유주의적 허구를 비판하지 못했다. 대신 거의 전적으로 생산 노동이라는 “공적” 영역의 (이성애, 백인, 남성, 숙련)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부당함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췄다. 비록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급 권력을 은폐하는 허구로서 소유권, 노동, 계약상의 동의라는 자유주의적 담론을 매우 효과적으로 비판하긴 했지만, 그들은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적 담론이 젠더화·성애화·인종화 되어있는 권력 관계를 은폐하고 자연화하는 방식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통 계급 이론가들의 개념[을 담아둔] 연장통에서 발견되는 계급과 생산의 사회적 관계라는 개념은 착취의 한 형태로서 성매매의 특수성을 탐구하기에는 편협한 도구임이 증명될 수 있다. 섹슈얼리티, 젠더, 자아,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 관해 질문하지 않은 채 성매매를 개념화 하는 것은 계급에 관해 질문하지 않은 채 성매매를 개념화하는 것만큼이나 불만족스럽다. 우리는 성매매의 옳은 점과 잘못된 점을 고민하는 폐지주의자들과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 양자에게서 섹스가 특별하고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속에서 성매매 논쟁의 양 “진영”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간과되거나 사소하게 치부되었던 인간 존재와 억압의 형태들을 인식하고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관점을 심각하게 고려하면서도 동시에 자유주의적 담론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면 어떨까?
라커(T. Laqueur, 1995)는 유대-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자위와 성매매가 수세기 동안 거의 동일하게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는 점을 발견했다. 두 가지는 모두 본래 반사회적이고 퇴행적인 성적 실천, 즉 “이성애적 삽입 성교라는 사회적으로 건설적인 행위에 대한 반정립”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이성애적 가족단위에 대한 위협을 의미한다. “자위가 성적 욕망과 쾌락을 가족과 분리시켜 [자기] 내부로 풀어낼 우려가 있다면, 성매매는 그것을 [가족] 외부로 풀어낼 우려가 있었다. … 자위와 성매매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양에 관한 것이다. 둘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또는 여러 사람과 하는 것이라는 점”(Laqueur, 1995, 159-60; Agustin, 2000도 보라).
서구 사회에서 재생산을 담당하는 이성애적 부부생활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강한 혐오, 공포, 반감의 대상이 되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 사실은 우리가 사실 스스로를 자유주의 사상에서의 “추상적 개인” 또는 “주권적 자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가 (최소한 백인 중산층 남성의 경험에 한해서) 자본주의는 “개인주의 원리의 실현이다. 다시 말해, 개인적 존재가 최종 목표이며, 활동이나 노동 그리고 계약 등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옳을 수도 있다(Sayer, 1991). 하지만 하나의 주체로서 [다른 사람과 분리된] 혼자인 개인이라는 관념은 주로 경제적 생활에 관해서 생각될 수 있었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성적이고 젠더화된 존재로서 우리는 대개 사회적 맥락, 성적인 공동체와 젠더 위계 내부에서 갖고 있는 우리의 동일성에 종속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상품 교환 행위에서 “개인 각각은 스스로를 교환의 독점적이고 지배적인 (즉, 교환을 결정하는) 주체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개인의 완전한 자유가 긍정된다”(Sayer, 1991, 59). 성적 급진주의자들은 상품화된 성을 화폐와 교환함으로써 개인이 그녀 또는 그가 성적 공동체와 맺고 있는 고정된 관계로부터 해방되고 성적 주체로서 인식되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위와 같은 부르주아적 허구를 성매매에 적용했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특정한 그리고 매우 불평등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관계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만약 그들이 생존의 대안적 수단에 접근할 수 있다면 임노동도 성매매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권력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급진적으로 분리된 자아를 상상하고 “전제적인 주체”가 될 “자유”일 뿐이다. 우리는 자아에 관한 대안적 관점이 필요하다. 브레이스(L. Brace)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주권적 주체를 무(無)차별의 바다에 익사시키지 않으면서 추상화된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적 관념을 넘어서야” 한다(1997, 137).
자위가 주권적 성 주체를 다시 전망하는 데 유용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성매매 이용은 대개 자위와 성적 판타지를 사회적으로 가치절하하는 것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자위는 단순히 “중요하지 않은” 성적 표현과 경험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베넷(P. Bennett)과 로사리오(V. Rosario)가 주장한 것처럼, “정통적인 재생산 실천의 압박을 넘어선다면, 혼자만의 쾌락은 창조적인 과정, 따라서 인간 생활에 유용하고 풍부한 많은 것의 기본을 내포하는 성적 행동의 생산적인 형태다”(1995, 15). 자위를 이렇게 인식하는 것은 거대한 평등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장애인에게 “성적 대리인”이 필요한가를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장애인이 현재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혼자만의 쾌락에 접근할 수 있는 동일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기술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강조할 것이다. 부부 사이에서 상대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각각의 완전한 책임이라든지 사랑과 감정적 친밀함은 그 상대에 대한 성적 요구를 포함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가정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누구도 자위를 성매매 여성의 의지를 일시적으로 양도하도록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승화시키거나 바꾸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단순히 성적 상호작용을 자위로 대체함으로써 섹슈얼리티의 상호적인 본성을 회피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아니고 성적 판타지나 페티시즘이 결코 실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가 심지어 자위와 판타지가 반드시 다른 사람과의 섹스와/나 판타지의 실현만큼 쾌락적이거나 만족스럽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성애적 결합이 현재 평가받는 것과 동일하게 자위가 평가받는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서도 스스로를 성적 주체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위치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운이 좋아서 또 다른 사람 혹은 타인들, 즉 이성, 친구 혹은 낯선 사람과 상호 호혜적인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자위가 아닌 성관계를 그 자체의 관계적인 특성과 결합의 가능성으로 평가하고 존중하며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성매매 종사자들이 그들의 동료 시민과 같은 법적·정치적 권리와 보호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옳은 것만큼이나 우리가 이성애적인 부부결합을 통해 자신의 성적 자아를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목표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전통적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고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이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것 역시 옳아 보인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1세계” 여성의 특권적 소수로 한정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발전시키길 바란다면, 그들은 시장을 전통의 멍에에 대한 대안으로 사고하는 것을 넘어서야 하고 노동의 형태로서 성매매의 옳은 점과 잘못된 점을 개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유권, 계약적 동의, 자유에 관한 자유주의적 담론을 넘어서야 한다.
1)[편집자 주] 이 글은 Hypatia March 22, 2002에 실린 Julia O'Connell Davison의 The Rights and Wrongs of Prostitution을 번역한 것이다. 성매매를 둘러싼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논쟁이 한국의 상황에서 낯선 부분도 많이 있겠지만, ‘성 노동’을 쟁점으로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시사점이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은 지면분량의 제약 때문에 생략했지만 『사회운동』 웹사이트를 통해 볼 수 있다. 본문으로
2)이 장에서는 챕키스와 20명의 다른 여성들이 “신성한 성매매 여성”과 그녀의 “배우자”에게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룹 섹스를 하게 된 사례가 제시된다. 여기에 참가한 어떤 여성들도 성적 계약을 맺지 않았다. 성매매 구매 고객들이 이런 것을 위해 돈을 지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챕키스는 좀 더 전통적인 형태의 성매매의 옳은 점과 잘못된 점에 대한 입장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상업적 섹스에 대한 수요 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합당해 보인다. 본문으로
3)[역주] 성적 도착 행위 중의 하나로 이성이 몸에 걸치거나 입었던 것을 애무하며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4)사람들이 자신의 성적 타자성(otherness) 때문에 사회적·정치적·법적으로 배제되거나 주변화될 때, 그들이 심각하게 손상을 입는다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겪을 수 있는 심리적·감정적 고통은 특정한 때에 특정한 섹스를 하고 싶다는 바램을 즉각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어서 비롯되는 무력함보다는 좀 더 복잡한 무언가와 연관이 있다. 본문으로
5)독립적으로 일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은 숙련되고 전문적인 성매매 여성들은 분명히 계약에 있어서 제한(예를 들어 술에 취했거나 위협적인 손님은 거절하는 것, 위험한 섹스나 그들이 특히 불쾌하다고 생각하는 성적 행위는 거부하는 것)을 둔다. 하지만 자신들이 끌리는 고객하고만 섹스 한다거나 자신들이 성적이나 심리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행위만을 한다고 계약을 맺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성매매 여성들은 거의 없다. 본문으로
6)[역주] 바닐라 섹스는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성관계로 간주되는 형태의 성관계를 일컫는 용어다. 이성애 관계에서 이는 보통 “정상위”라고도 부르는 “선교사 체위”를 말하고, 동성애 관계에서는 비삽입 행위를 말한다. 본문으로
페미니스트들은 성매매 쟁점을 두고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대략 “성 노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진영과 “폐지주의” 단체들 사이의 논쟁은 종종 격렬하고 증오에 차 있다. 이런 상황은 논쟁의 양쪽 “진영”의 원리들에 공감하면서도 성매매에 관해 부적절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느끼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혼란스러운 것이다. 나는 지난 8년 간 성매매에 관해 연구하면서 부국과 빈국 모두에서 성매매 여성, 알선업자·포주, 고객들을 인류학적으로 관찰하고 이들에 대한 면접조사를 수행했다(O'Connell Davidson 1998). 내가 연구를 수행한 모든 나라들에서 성매매 여성들은 법적·사회적으로 별개의 인간 부류로 간주되고, (갖가지 방식으로) 시민권과 인권을 침해당한다. 나는 성매매 여성들에게 동료 시민들과 동일한 법적·정치적 권리와 보호를 부여해야 한다는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는 또한 제3자에 의해 강제로 성매매에 유입되지 않은 대다수의 여성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다는 사실, 따라서 성매매가 노동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나의 연구에서 상품화된 성을 위한 시장의 존재를 축복할만한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O'Connell Davidson 2001, O'Connell Davidson과 Sanchez Taylor 1999를 보라). 이런 의미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들의 폐지주의 주장에 공감한다.
이 글은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성매매에 관한 현재의 수많은 논쟁에서의 오류를 노동자로서 성매매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라 지적한다. 하지만 이 글은 일반적으로 시장관계, 특수하게는 성매매를 지속시키는 사회·정치적 불평등에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한다.
성매매와 개인의 소유권
자유주의적 정치사상 내부에는 신체, 소유권, 노동 사이의 관계에 관한 오랜 긴장이 존재한다. 존 로크는 다음과 같은 언명으로 유명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 자기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이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의 신체의 노동과 손의 작업은 당연히 그의 것”(1993, 274)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언명에서 인간의 노동하는 신체적 능력은 상품화될 수 있다. 하지만 앤더슨(B. Anderson)이 지적했듯이, 로크는 신체를 신이 주신 신성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신체와 맺는 관계는 그가 다른 종류의 소유와 맺고 있는 관계와 동일하지 않다. … 따라서 인간은 자살할 권리나 스스로를 노예 상태에 몰아넣는 권리는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2000, 3)
그러므로 개인의 소유권에 관한 자유주의적 개념은 무엇이 상품화될 수 있고, 시장에서 계약을 통해 교환될 수 있는가에 관한 특정한 질문을 개방한다. 이런 의미에서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성매매에 관한 수많은 현재 논쟁의 의제가 설정된 듯하다. 예를 들어, 신체의 성적 능력이 개인의 소유권을 구성하는가, 아니면 도덕적 손상 없이 인격으로부터 성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성매매 법은 성매매 여성의 소유권을 자발적으로 양도할 수 있는 정당한 자연권을 침해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매매 계약 그 자체가 존엄성이라는 그녀의 자연권을 침해하는 것인가?(예를 들어 Pateman, 1988; Barry, 1995; Jeffreys, 1997; Chapkis, 1997을 보라.)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은 소유권, 노동, 계약상의 동의, 자유에 관한 자유주의적 담론을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권력의 심대한 비대칭성을 은폐 또는 자연화하는데 일조하는 일련의 허구로 간주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의 노동(성적·감정적, 정신적·육체적)은, 브레이버만(H. Braverman)의 말을 빌자면, “모든 생명 과정과 신체적 기능처럼 … 인간 개인의 양도할 수 없는 소유권에 속한” 인간의 노동은 노동자인 인간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시장을 통해서 교환·판매되고 양도되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노동자가 판매하는 것 그리고 고용주가 구매하는 것은 “동의된 양만큼의 노동이 아니라, 동의된 시간 동안의 노동능력이다.”(1974, 54) 개인의 소유권은 그 인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므로, 임노동 계약은 사실상 개인에 대한 지배권의 양도를 수반한다. X량만큼의 돈과 교환함으로써 고용주가 얻는 권리는 특정한 업무를 수행하고, 특정 문제에 관해 사고하고, 고객에게 특정 형태의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지시할 수 있는 권리다.
마찬가지로 성매매 계약에서 성 또는 성적 노동이 교환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객은 성매매 종사자에게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돈 그리고/또는 다른 물질적 혜택을 내놓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혹은 매우 드물게 그녀)가 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그는 성매매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구멍이 되도록 하고, 그를 위해 웃고 춤추고 옷을 입도록 하며, 그를 채찍질하고 때리고 주무르고, 그의 자위행위를 돕고, 그에게 오줌을 누도록, 또는 반대로 그가 오줌을 누거나 수갑을 채우거나 때리는 것에 복종하도록, 아니면 그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다른 행동을 하도록 명령하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O'Connell Davidson 1998). 고용주는 고용 계약을 통해 노동자의 완전히 양도 가능한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을 뿐이며, 마찬가지로 고객이 성매매 계약을 통해 성매매하는 인간을 구매할 수는 없다. 두 계약은 모두 지배권을 판매자에게서 구매자로 이전시키며(그러한 권력의 범위와 양도의 기간이 계약은 내용이다), 따라서 판매자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를 일시적으로 양도하거나 유보하도록 만든다.
일반적으로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개인의 의지에 대한 침해를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극악한 침해로 간주하고, 지배 집단이 인격적인 권력을 행사하여 피지배집단을 자신의 명령에 복속시키는 전(前)자본주의적인 “전통적” 사회 구성체를 탐탁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 관계는 인간이 아니라 상품에 대한 권력의 행사를 수반한다고 가정되기 때문에, 그리고 고용주가 항상 인격적인 권력을 사용하여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유권”을 양도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임노동 계약은 동등하고 상호적이며 자발적인 교환으로 제시될 수 있다. 상품의 교환 가치를 표현하는 보편적인 매개인 화폐가 노동력 “상품”과 교환된다. 자본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상품 교환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형식적인 권리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의 자유로 이해된다. 바로 이러한 교환과정을 통해서 자본가계급의 정치·경제적인 지배가 유지·재생산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개인의 소유권 개념의 미덕은 그것이 타인의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그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의지를 양도하고 다른 누군가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돈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과 종속의 관계를 은폐한다는 데에 있다.
이런 비판에 거의 동요하지 않는 사람에게 성이 노동과 같은 방식으로 상업화될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은 권리에 관한 부적절한 질문일 뿐이다. 프란스(A. France)의 말을 바꿔서 표현하자면, [이들이 보기에] 부자와 빈민,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1세계” [사람들]과 “3세계” [사람들]에게 파리의 다리 밑에서 성매매에 종사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의 성적 노동을 자유롭게 양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분명 평등과 자유를 더욱 증진시키기를 바란다. 실제로 그들은 전 세계 성매매 여성들이 역사적으로 그리고 여전히 일상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시민권과 인권의 심각한 침해에 도전하려는 열망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제출한다(예를 들어, Walkowitz, 1980; Alexander, 1997; Cabezas, 1999; Uddin et al, 2001를 보라).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침해가 법적·사회적으로 성매매 여성을 노동자가 아니라 성적 비정상자로 취급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은 성매매와 다른 형태의 임노동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여기서부터 현재 성 산업의 버팀목이 되는 계급·젠더·인종 그리고 세계적인 권력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으로 이동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은 그 대신에 종종 다소 상이한 접근을 취하는데, 그것은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의 권리에 관심을 갖는 이들의 접근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세계적인 불평등 그리고/또는 젠더 불평등으로 인해 상품화된 성이 거래되는 시장의 형성 방식을 토론하면서, 어떤 분석가들은 성적 노동을 판매하는 것이 마치 그런 불평등에 맞서는 저항의 한 형태를 표현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기 시작한다.(예를 들어 Bell, 1994; Kempadoo and Dozema, 1998; Nagel, 1997을 보라) 이런 분석은 성매매가 노동의 한 형태라는 주장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노동착취 공장의 노동자들이 바느질을 함으로써 빈곤에 “도전한다”거나, 비행기 승무원이 미소 띤 얼굴로 음료를 접대함으로써 성차별주의에 “반항한다”거나, 카리브 지역에서 구두를 닦는 흑인 어린이가 백인 관광객의 구두에 광택을 냄으로써 인종주의에 “저항한다”고 묘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엇 때문에 성매매는 다른 것으로 간주되는가? 나는 그것이 성과 자아 사이의 곤란한 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재출현한 성과 자아
“성매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패이트만(C. Pateman)은 이렇게 묻고 나서, 고객은 대상화된 여성의 신체에 대한 지배력을 구매하고 성매매 여성은 다른 어떤 직업에서 요구되는 것과는 매우 상이하고 훨씬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녀의 자아를 판매해야만 한다고 대답했다.(1998, 207) 이로 인해 성매매 여성은 손상된다. 신체의 성적 사용에 관한 계약의 체결은 여성의 육체적 완전성과 자아를 분리시키고, 이것은 정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예를 들어, Jeffreys, 1997과 Barry, 1995를 보라). 많은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분석을 비판하면서 성매매가 감정 노동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성매매와 다른 인격적인 서비스업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이런 노동이 언제나 또는 필연적으로 노동자에게 해로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챕키스(W. Chapkis, 1997)는 감정 노동에 대한 호크스차일드(A. Hochschild)의 1983년 고전적인 연구를 인용하여, 비행기 승무원은 종종 감정 노동을 수행함으로써 자신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한다고 믿고 그들 “대부분은 그런 변화를 더 큰 통제력을 확보하는 긍정적인 것으로 묘사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같은 방식으로 챕키스는 성 노동자들이 “상업적인 거래 내에서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자제하는 능력을 경험할 수 있고 … [이것은] 자아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와 육체적 완전성 사이의] 경계를 유지하는 유용한 도구”라고 주장한다(1997, 75). 성과 감정이 “본성 및 자아와 맺고 있다고 가정되는 독특한 관계에서 분리된다고 하더라도 성과 감정의 양도나 상품화가 필연적으로 파괴적이라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Chapkis, 1997, 76).
그런 후 챕키스는 어떤 상황에서는 감정 노동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고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지만 “극장이나 심리 치료실, 탁아소에서 행해지는 감정 노동에 대한 존중이 집창촌에까지 확장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1997, 79). 챕키스는 고용 기간과 조건에 대한 통제력의 결여로 인해 감정 노동을 수행하는 인간적 고통이 심화된다는 호크스차일드의 주장을 수용하여, 성 노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감정의 상품화 그 자체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오히려 “고객과 노동자의 지위 상 차이, 피고용인/고용인 관계, 수행되는 노동에 대한 문화적으로 부정적인 태도와 같은 평범한 문제가 일부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손상의 근원일 수 있다. 이것은 영혼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 상품화됨으로써 필연적이고 치명적인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이미지만큼 거창하지도 시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이런 정식화는 작업장 조직화와 같은 실천적 개입과 그런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부여되는 지위와 존중을 높이려는 더 큰 정치적 운동의 관점에서 비판을 부각시키는 이점이 있다”(1997, 82).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정식화는 성적 경험을 사고 싶지만 페미니스트의 자격은 계속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이점이 있는 것 같다(이것은 성매매의 “녹색 소비자”라고 할 수 있는 “선하고” “책임성 있는” 고객이 되는 법과 관련한 청사진을 제공한다). 그리고 자신의 책 마지막 장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챕키스에게 이것은 확실히 중요하다. “수년 간 돈으로 거래되는 성이라는 주제를 연구한 결과, 나는 결국 그것을 해보기로 결심했다.”2)
(1997, 215) 챕키스는 상업적인 성을 구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호크스차일드와는 달리 “‘노동의 도구’가 되는 것의 인간적 고통,” 또는 자본주의적 노동 과정의 착취적·소외적 본질에 관한 문제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 성매매와 관련된 상업주의를 실제로 비판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성매매에 대한 챕키스의 분석은 위 단락에서 언급된 고용 관계나 작업장 조직화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계급 또는 노동운동에 관한 좀 더 광범위한 논의는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챕키스 [저서]의 「생생한 성행위」[장]은 성매매 여성들의 완전한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꼼꼼한 예들을 제시하지만, 개인의 소유권, 시장 관계, 인권에 관한 정통 자유주의 담론은 문제삼지 않는다. 한편, 그녀 자신의 “상업적 성 경험”의 사례들을 자세히 “공유하는” 장을 [책에] 포함시킨 것과 성 노동자들에게 부여되는 “지위와 존중”을 높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챕키스는 성매매에 수반되는 성적·감정적 노동이 심리치료, 연기, 탁아 서비스에 수반되는 감정 노동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 것 같다. 이것은 성 노동이 일종의 돌봄 혹은 창조성의 형식을 띠(거나 정당한 조건 하에서 최소한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성 노동이 존중되고 사회적으로 예우되어야 한다는 함의를 갖는다.
이런 견해는 “성적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정교화된다. 성적 급진주의 이론은 젠더 자체의 이분법뿐만 아니라, 성에 대해 정상과 비정상, 건전과 불건전, 쾌락과 위험을 나누는 법적·사회적 이분법이 매우 억압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적 급진주의자들은 이런 이분법을 전복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합의 하의 성적 관행을 높이 평가한다(Vance, 1984; Rubin, 1999; Califia, 1994). 이런 시각에서 보면, 상업적인 성의 구매와 판매는 모두 “성애의 다양성”의 합법적 형태들로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칼리피아(P. Califia)는 성매매가 가치 있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며 심지어 성적·인종적·계급적 평등이 완전히 달성된 사회가 오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대에게 구애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이나 매력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상호 끌림이나 성적인 교환이 결합을 위한 통상적인 기초가 되는 사회에서 매력적이지 않은 이들, 즉 자신이 얻는 만큼 줄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나 이익이 없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장애인, 만성 질환이나 불치병을 앓는 이, 노인, 성 기능 장애를 가진 이들은 이들을 차별하지 않는 숙련된 성 노동자들의 봉사에서 계속 (지금도 그런 것처럼) 혜택을 입을 것이다"(1994, 245).
칼리피아는 페티시즘3)
추종자도 상업적인 성을 계속 요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페티시즘 [행동을 위한] 대본은 페티시즘 추종자의 파트너에게는 대리 만족만을 제공하는 승화되고 전위된 자위 행위의 정교한 형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성매매는 [페티시즘 추종자의] 파트너의 페티쉬[성적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물]을 이타적으로 활용하게 함으로써 관계에서 누군가가 “희생자의 역할을 해야할” 필요성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유토피아에서 성 노동자는 “교사이자 치료자이며 이해심이 풍부하고 인정 많은 모험적인 영혼이다. 오늘날 성매매 종사자는 이 모든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은혜를 몰라주는 환경 속에서 친절과 미덕으로 이를 수행하는 것이다.”(1994, 247)
챕키스와 칼리피아의 글에서는, 이제 성매매가 노동의 한 형태라는 주장과 성 노동의 사회적 가치 및 성매매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고객의 권리에 관한 주장이 혼합된다(Perkins와 Bennett, 1985; Queen, 1997도 보라). 성매매 여성들은 그녀들이 없었다면 충족되지 못할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예우되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의사나 교사가 대중의 건강과 교육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예우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성매매는 의료와 교육처럼 젠더·인종·계급의 평등이 완전히 달성된 사회에서도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성매매를 단순한 서비스 노동으로 간주하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호텔 산업의 직종이나 가사 노동과 비교한다면, 위와 같은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너무 바쁘거나 중요한 사람이라 스스로 문을 열고, 잠자리를 정리하고, 옷을 세탁하고, 변기를 청소할 수 없는 사람들 또는 단순히 이런 일들로 귀찮아지기 싫은 사람들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혁명이 온다 해도 이런 사람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숙련되고 전문적인 도어맨, 가정부, 가사 노동자들의 작업으로 혜택을 볼 것이다). 실제로 챕키스와 칼리피아는 성 노동을 치료 또는 심리치료와 비교하고 성매매를 일종의 선험적인 인간 욕구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이들이 근거는 상이하지만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성을 “자아와의 독특한 관계”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아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을 상품화시키는 성매매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은 고객들이 자신의 인간 욕구를 충족시키고 그들의 진정한 자아를 표현하는데 필요한 것을 성매매가 제공하기 해주기 때문에 이것이 기본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후자의 생각은 내가 면접했던 고객들이 확실히 공유하고 있던 믿음으로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성매매 이용을 성적 “욕구”라는 관념으로 설명한다(O'Connell Davidson 1998). 그러나 성애의 “욕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애의 “욕구”에서 전제적 주체로
성적 만족을 못 느낀다고 해서 사람들이 여타의 기본적인 신체적 욕구를 부정당하거나 의료를 거부당할 때와 같은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다.4)
하루, 일주일, 또는 일년 단위로 정해진 횟수만큼 오르가즘을 느껴야 한다는 생물학적인 법칙은 없다. 사람들이 성적인 [욕구를] 분출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불쾌하거나 심지어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자위를 할 수 없거나 그것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경우),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주는 성적 파트너가 없다고 해서 실제로 그들의 물리적인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성적 욕망은 생리적인 과정일 뿐만 아니라 감정적이고 인지적인 과정에 기초한다. 오르가즘에 도달하고 싶은 충동이 배변의 충동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생물학적인 기능이라면, 성관계 파트너의 나이와 성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성적 교제의 결핍이 건강을 위협하고, 여타의 질병을 앓을 때 의사나 간호사의 봉사가 필요한 것과 동일하게 성 노동자의 “봉사”가 필요하다면, 성매매 종사자의 물리적 외양이나 나이, 젠더, 인종은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관계는 단순한 신체적 기능 또는 물리적 욕구가 아니다. 우리의 성생활은 인간의 경험과 사회성을 범주화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활용하는 관념들에 기초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성적 욕망이 인간의 근본적이고 영원하며 일반적인 성적 욕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성적 욕망을 이렇게 취급하는 것은 매우 문제가 있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정확한 성애의 “필요조건”을 만족시킬 자격이 있다는 주장의 결론은 무엇인가? 칼리피아는 “13줄의 가죽끈이 달린 8인치의 흰 색 에나멜 구두의 뒤꿈치에 차이고”(1994, 245) 싶은 바램이 성적 욕구임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에나멜 구두를 신은 이가 앤 공주 또는 라티파 여왕일 때만 성적인 만족감을 느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또한 “욕구”인가? 그렇다면 백인 인종주의자가 흑인 여성들의 항문에 삽입하려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욕망이나 11세의 어린 아이가 해주는 펠라티오를 바라는 성인 남성의 “욕구”는 어떠한가? 정의 상 자위가 아닌 성관계는 다른 사람 또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한 사람이 성관계 여부와 언제, 누구와 어떻게 성관계를 할 것인가를 통제하는 것은 종종 다른 사람의 동일한 권리를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루빈(G. Rubin)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서구 문화에서 성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누구도 매운 요리를 즐긴다는 이유로 부도덕하다고 간주되거나, 감옥에 가거나, 그녀 혹은 그의 가족에서 추방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죽 구두에 탐닉하는 사람은 이 모든 일과 그 이상을 당할 수도 있다. 결국 누군가 구두를 두고 자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어떤 사회적 중요성을 갖는가? … 성이 너무 심각하게 간주되는 것에 비해 성적 학대는 그렇지 않다. 성애의 취향과 태도에 기초하여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체계적 가학이 존재한다”(1999, 171).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성적 급진주의자들 역시 성생활의 특정 측면들을 너무 심각하게 고려한다. 확실히 누군가의 구두 도착이 공동체의 불쾌함과 [공동체로부터] 추방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은 우습다. 하지만 이 사람이 이런 도착 증세에 탐닉하는 능력을 인권의 지위로 상승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똑같이 우습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구두를 두고 자위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관해 우리가 “그래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또는 그녀가 구두를 두고 자위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면 언제든지 구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해줄 사회적 제도를 설립하는 것이 긴급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위하는 동안 구두에 관해 몽상하면서 그럭저럭 때워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똑같이 “그래서?”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성적 급진주의 이론은 “성관계에 관해 말하는 것이 신체나 쾌락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는(Laqueur 1995, 155)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자위적인 페티시즘을 예로 들면서, 루빈은 자위가 아닌 성관계는 정의 상 관계적이라는 사실에서 파생되는 어려운 쟁점을 회피한다. 구두를 두고 자위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사회는 확실히 관용이 없고 편협하다. 하지만 루빈은 성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그녀가 말하는 관용은 예를 들어 스타벅스에서 옆에 있는 낯선 남성이 갑자기 그녀의 구두를 두고 자위하려는 “욕구”에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칼리피아와 마찬가지로, 루빈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권리와 그것이 개인적인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을 때 타인을 통해 “희생자의 역할을 맡지” 않을 권리를 주장한다. 즉, 돈을 받는 대가로 섹스에서 개인적인 만족을 포기할 권리를 부여받은 성매매 종사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 말이다.
성매매 계약의 핵심은 성매매 여성이 돈이나 다른 이득을 받으면서 성적 상호작용의 결정적인 기준인 개인적인 욕망이나 성적인 취향의 포기를 동의한다는 점이다.5)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모든 사람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성을 판매하는 사람은 최소한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타자로 가정하고, 대상으로 여겨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상품화된 성을 위한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은, 보바르(S. Beauvoir)의 말로 하자면, 성을 파는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은 그 또는 그녀의 의지에 따라 “전제적인[자신의 권력을 부당하고 잔혹하게 사용하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성매매의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는 페미니스트 폐지주의자들에게 성매매는 필연적으로 여성의 정치적 종속을 통해 남성이 자기통치권을 실현하는 가부장적 질서에 조응하는 것이다. 이는 젠더를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고, 여성들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을 함축한다. 여성의 섹스 관광에 대한 테일러(J. S. Taylor)의 연구(2001)와 이주 가정부를 고용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앤더슨(B. Anderson)의 연구(2000)가 보여 주듯이, 인종적·계급적 타자를 대상화함으로써 “남성적인” 자기통치권을 추구할 수 있는 여성들도 존재한다. 게다가 페미니스트 폐지주의자들은 성매매를 통해 여성이 일시적으로 대상에 고착됨으로 그녀의 주체성은 완전히, 영구적으로, 문자 그대로 소멸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사람들이 심지어 대상으로 취급받을 때조차도 문자 그대로 대상이 되거나 혹은 스스로를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라는 중요한 (그리고 때때로 굉장히 고통스러운) 사실을 얼버무리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비록 이 사람들의 목표가 일군의 사람들을 돕거나 혹은 “구원하는” 것일 때에도 그들의 완전한 주체성을 거부하게 될 수도 있는 심대한 정치적 위험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제적인 주체성까지도 즐겁고 이상적인 조건으로 포용하는 성적 급진주의의 성매매에 대한 입장은 확실히 모든 면에서 정치적으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권리와 존중의 정치학
초기 페미니즘 운동이 노인, 병자, 장애인을 돌보는 일과 육아에 수반되는 일을 노동으로 인식할 것을 주장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맥킨토시(M. McIntosh)는 “성 노동자”라는 용어가 성매매 여성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는 여성”이라는 점과 “다른 여성들에게도 그러한 것처럼 자신이 한 일이 단순히 모든 여성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숙련되고 노력이 투여되는 활동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1994, 13). 하지만 사회적 재생산과 관련된 노동이 인식되고 보상받아야 한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이런 노동이 단순히 숙련되고 노력이 투여되기 때문만은 아니고, 본질적으로 사회적 가치를 가진다는 기초 위에서 전개되었다. 실제로, 이것이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이 페미니스트들에게 어려운 이슈로 남아있는 부분적인 이유다. 왜냐하면 앤더슨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회적인 재생산 노동은 단순히 신체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활 스타일과 결정적으로는 지위의 재생산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2000, 14). 그래서 예를 들자면, 고용된 가사 노동자가 수행하는 일들은 종종 그들을 고용한 사람들의 지위를 증명하거나 높여주는 데 봉사하는 것이지 고유한 사회적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니다. 심지어 자기 가족 애완견이 배변한 후 항문을 닦으라고 하는 것처럼(Anderson, 2000, 26) 기술과 노력이 요구되지만 개인적이거나 집합적인 생존에는 거의 필요하지 않은 일들을 가사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고용주들도 있다.
성매매 여성들에게 부착된 낙인의 극악무도함과 그것이 여성들의 삶에 미치는 결과를 생각한다면, 성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이들이 성매매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목적에 복무하는 본질적으로 존경받아야할 직업으로 재구성하려고 애쓰는 기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욕망이 아니라 성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서야, 이런 입장은 유지되기 힘들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에 사회적인 명예를 부여하도록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어떻게 완벽하게 건강한 개의 항문을 닦아주는 일 혹은 고객의 성적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매매 여성들이 하는 일에 사회적인 명예를 부여해야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성매매의 사회적 가치를 주장함으로써 성매매의 낙인을 걷어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정치적 전략으로서 위험을 수반한다. 새로운 위계화와 새로운 분할을 만들어낼 위험이 존재한다. 만약 성매매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에 존경을 받아야 한다면, 예를 들어 심각한 장애를 가진 고객을 받도록 전문화된 성매매 종사자들은 장애가 없는 남성들을 상대로 하는 사람들보다 어느 정도는 더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장애가 없는 고객을 상대하는 성매매 여성들과 달리 장애인을 상대하는 “섹스 대리인”이 사회적으로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분할이 이미 존재한다. 또한 이것은 고객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성매매 여성이 고용주의 요구에 응하는 가사 노동자들보다 더 존경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사회적으로 영예로운 목표에 헌신할 수 있는 삶의 기회가 계급·젠더·인종에 따라 분할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노동의 형태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개인적인 고결함이나 명예에 관해서 말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심장 전문의가 되는 것이 백인 중산층 남성의 정신적 고상함의 증거가 아니며,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백인 중산층 여성의 개인적 고결함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인간, 시민,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을 권리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을 하는가 아닌가를 조건으로 할 수 없다. 대학교수, 심장 전문의, 성매매 여성, 가사노동자들은 경제 행위자로서 모두가 동등하게 권리를 갖고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성매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권리가 있고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들이 성매매 여성으로 일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합법적인 인정, 권리, 위엄, 존중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이지, 우리가 장애가 있느냐 없느냐, 흑인이냐 백인이냐, 동성애자냐 아니냐, 구두 페티시즘이냐 바닐라 섹스6)
페티시즘이냐 하는 사실과는 관계가 없다.
시장의 배후 그리고 시장을 넘어서
아길라(D. Aguilar)가 제시한 것처럼 성매매에 대한 현재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논쟁의 오류는 “계급과 생산의 사회적 관계라는 기본 개념”에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고 결론을 짓고 싶기도 하다. 확실히, 대다수 사람들이 빈곤상태에서 살아가고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세계에서 성매매에 관해서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몰두하고 있는 문제는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1인당 GDP가 383달러인 인도에서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230만 명으로 추정되고 그들 중 1/4이 미성년자라는 점을 생각해 보라. 또는 1인당 GDP가 고작 69달러인 부마는 약 2만에서 3만 명의 여성과 소녀들을 성매매에 종사하도록 태국으로 수출하고, 수천 명 이상이 성을 팔러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간다는 점(Lim, 1998; AMC, 2000)을 생각해 보라. 비록 이런 여성과 어린이 중에서 일부는 제3자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성매매에 유입되기는 하지만, 그들 중 다수를 성 노동으로 몰아넣는 것은 바로 침체된 경제다. 이는 미국(1인당 GDP가 21,558 달러에 이르는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많은 여성들과 소녀들이 빈곤선의 임금을 받는 여성 노동력의 35%에 합류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성매매할 것을 “선택한다”(Castells, 1998). 이런 사람들이 자기통치권을 실행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그들의 성매매가 그들의 존엄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기만적으로 보인다. 가난에 존엄이란 없고, 가난은 개인의 완전한 행위자로서의 권리를 박탈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노동(성적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든)을 팔 권리가 존엄이나 행위자로서의 권리를 복구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계급과 생산의 사회적 관계라는 기본 개념에 호소하는 것이 성매매에 관한 페미니스트들의 논쟁을 진전시킬 수 있을까? 마르크스주의 분석가들은 성적 억압의 역사적이고 현재적인 무수한 형태에 관한 질문에 거의 관여한 적이 없었다. 계급 이론가들은 종종 인간의 경험을 두 개로 구분하고 명확하게 분리하는 “공”·“사” 영역이라는 자유주의적 허구를 비판하지 못했다. 대신 거의 전적으로 생산 노동이라는 “공적” 영역의 (이성애, 백인, 남성, 숙련)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부당함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췄다. 비록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급 권력을 은폐하는 허구로서 소유권, 노동, 계약상의 동의라는 자유주의적 담론을 매우 효과적으로 비판하긴 했지만, 그들은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적 담론이 젠더화·성애화·인종화 되어있는 권력 관계를 은폐하고 자연화하는 방식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통 계급 이론가들의 개념[을 담아둔] 연장통에서 발견되는 계급과 생산의 사회적 관계라는 개념은 착취의 한 형태로서 성매매의 특수성을 탐구하기에는 편협한 도구임이 증명될 수 있다. 섹슈얼리티, 젠더, 자아,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 관해 질문하지 않은 채 성매매를 개념화 하는 것은 계급에 관해 질문하지 않은 채 성매매를 개념화하는 것만큼이나 불만족스럽다. 우리는 성매매의 옳은 점과 잘못된 점을 고민하는 폐지주의자들과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 양자에게서 섹스가 특별하고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속에서 성매매 논쟁의 양 “진영”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간과되거나 사소하게 치부되었던 인간 존재와 억압의 형태들을 인식하고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관점을 심각하게 고려하면서도 동시에 자유주의적 담론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면 어떨까?
라커(T. Laqueur, 1995)는 유대-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자위와 성매매가 수세기 동안 거의 동일하게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는 점을 발견했다. 두 가지는 모두 본래 반사회적이고 퇴행적인 성적 실천, 즉 “이성애적 삽입 성교라는 사회적으로 건설적인 행위에 대한 반정립”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이성애적 가족단위에 대한 위협을 의미한다. “자위가 성적 욕망과 쾌락을 가족과 분리시켜 [자기] 내부로 풀어낼 우려가 있다면, 성매매는 그것을 [가족] 외부로 풀어낼 우려가 있었다. … 자위와 성매매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양에 관한 것이다. 둘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또는 여러 사람과 하는 것이라는 점”(Laqueur, 1995, 159-60; Agustin, 2000도 보라).
서구 사회에서 재생산을 담당하는 이성애적 부부생활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강한 혐오, 공포, 반감의 대상이 되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이 사실은 우리가 사실 스스로를 자유주의 사상에서의 “추상적 개인” 또는 “주권적 자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가 (최소한 백인 중산층 남성의 경험에 한해서) 자본주의는 “개인주의 원리의 실현이다. 다시 말해, 개인적 존재가 최종 목표이며, 활동이나 노동 그리고 계약 등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옳을 수도 있다(Sayer, 1991). 하지만 하나의 주체로서 [다른 사람과 분리된] 혼자인 개인이라는 관념은 주로 경제적 생활에 관해서 생각될 수 있었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성적이고 젠더화된 존재로서 우리는 대개 사회적 맥락, 성적인 공동체와 젠더 위계 내부에서 갖고 있는 우리의 동일성에 종속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상품 교환 행위에서 “개인 각각은 스스로를 교환의 독점적이고 지배적인 (즉, 교환을 결정하는) 주체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개인의 완전한 자유가 긍정된다”(Sayer, 1991, 59). 성적 급진주의자들은 상품화된 성을 화폐와 교환함으로써 개인이 그녀 또는 그가 성적 공동체와 맺고 있는 고정된 관계로부터 해방되고 성적 주체로서 인식되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위와 같은 부르주아적 허구를 성매매에 적용했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특정한 그리고 매우 불평등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관계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만약 그들이 생존의 대안적 수단에 접근할 수 있다면 임노동도 성매매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권력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급진적으로 분리된 자아를 상상하고 “전제적인 주체”가 될 “자유”일 뿐이다. 우리는 자아에 관한 대안적 관점이 필요하다. 브레이스(L. Brace)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주권적 주체를 무(無)차별의 바다에 익사시키지 않으면서 추상화된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적 관념을 넘어서야” 한다(1997, 137).
자위가 주권적 성 주체를 다시 전망하는 데 유용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성매매 이용은 대개 자위와 성적 판타지를 사회적으로 가치절하하는 것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자위는 단순히 “중요하지 않은” 성적 표현과 경험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베넷(P. Bennett)과 로사리오(V. Rosario)가 주장한 것처럼, “정통적인 재생산 실천의 압박을 넘어선다면, 혼자만의 쾌락은 창조적인 과정, 따라서 인간 생활에 유용하고 풍부한 많은 것의 기본을 내포하는 성적 행동의 생산적인 형태다”(1995, 15). 자위를 이렇게 인식하는 것은 거대한 평등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장애인에게 “성적 대리인”이 필요한가를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장애인이 현재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혼자만의 쾌락에 접근할 수 있는 동일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기술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강조할 것이다. 부부 사이에서 상대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각각의 완전한 책임이라든지 사랑과 감정적 친밀함은 그 상대에 대한 성적 요구를 포함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가정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누구도 자위를 성매매 여성의 의지를 일시적으로 양도하도록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승화시키거나 바꾸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단순히 성적 상호작용을 자위로 대체함으로써 섹슈얼리티의 상호적인 본성을 회피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아니고 성적 판타지나 페티시즘이 결코 실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가 심지어 자위와 판타지가 반드시 다른 사람과의 섹스와/나 판타지의 실현만큼 쾌락적이거나 만족스럽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성애적 결합이 현재 평가받는 것과 동일하게 자위가 평가받는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서도 스스로를 성적 주체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위치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운이 좋아서 또 다른 사람 혹은 타인들, 즉 이성, 친구 혹은 낯선 사람과 상호 호혜적인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자위가 아닌 성관계를 그 자체의 관계적인 특성과 결합의 가능성으로 평가하고 존중하며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성매매 종사자들이 그들의 동료 시민과 같은 법적·정치적 권리와 보호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옳은 것만큼이나 우리가 이성애적인 부부결합을 통해 자신의 성적 자아를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목표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전통적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고 “성 노동” 페미니스트들이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것 역시 옳아 보인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1세계” 여성의 특권적 소수로 한정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발전시키길 바란다면, 그들은 시장을 전통의 멍에에 대한 대안으로 사고하는 것을 넘어서야 하고 노동의 형태로서 성매매의 옳은 점과 잘못된 점을 개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유권, 계약적 동의, 자유에 관한 자유주의적 담론을 넘어서야 한다.
1)[편집자 주] 이 글은 Hypatia March 22, 2002에 실린 Julia O'Connell Davison의 The Rights and Wrongs of Prostitution을 번역한 것이다. 성매매를 둘러싼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논쟁이 한국의 상황에서 낯선 부분도 많이 있겠지만, ‘성 노동’을 쟁점으로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시사점이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은 지면분량의 제약 때문에 생략했지만 『사회운동』 웹사이트를 통해 볼 수 있다. 본문으로
2)이 장에서는 챕키스와 20명의 다른 여성들이 “신성한 성매매 여성”과 그녀의 “배우자”에게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룹 섹스를 하게 된 사례가 제시된다. 여기에 참가한 어떤 여성들도 성적 계약을 맺지 않았다. 성매매 구매 고객들이 이런 것을 위해 돈을 지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챕키스는 좀 더 전통적인 형태의 성매매의 옳은 점과 잘못된 점에 대한 입장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상업적 섹스에 대한 수요 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합당해 보인다. 본문으로
3)[역주] 성적 도착 행위 중의 하나로 이성이 몸에 걸치거나 입었던 것을 애무하며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4)사람들이 자신의 성적 타자성(otherness) 때문에 사회적·정치적·법적으로 배제되거나 주변화될 때, 그들이 심각하게 손상을 입는다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겪을 수 있는 심리적·감정적 고통은 특정한 때에 특정한 섹스를 하고 싶다는 바램을 즉각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어서 비롯되는 무력함보다는 좀 더 복잡한 무언가와 연관이 있다. 본문으로
5)독립적으로 일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은 숙련되고 전문적인 성매매 여성들은 분명히 계약에 있어서 제한(예를 들어 술에 취했거나 위협적인 손님은 거절하는 것, 위험한 섹스나 그들이 특히 불쾌하다고 생각하는 성적 행위는 거부하는 것)을 둔다. 하지만 자신들이 끌리는 고객하고만 섹스 한다거나 자신들이 성적이나 심리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행위만을 한다고 계약을 맺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성매매 여성들은 거의 없다. 본문으로
6)[역주] 바닐라 섹스는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성관계로 간주되는 형태의 성관계를 일컫는 용어다. 이성애 관계에서 이는 보통 “정상위”라고도 부르는 “선교사 체위”를 말하고, 동성애 관계에서는 비삽입 행위를 말한다. 본문으로
10. 17 여성행진 행동의 날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행진을 이어가자!
지난 7월 3일은 세계여성행진의 헌장과 퀼트가 한국에 도착한 날이었다. 이 날 마로니에 공원에는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모였다. 이들은세계여성행진과 함께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행진 참가단위들을 비롯하여 행진에 함께 하고자 한 개인들이었다. 사회진보연대, 광주민중행동,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세계화반대 여성연대, 전국학생연대회의, 노동자의 힘 여성활동가모임, 빈곤사회연대, 문화연대 등 열 개 단위는 세계여성행진이라는 계기를 통해 한국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아가고자 했다.
여성행진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여성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여성운동의 의제로서 여성노동권과 가족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제안했다. 이에 기반하여 ‘여성행진’은 ‘가사와 직장생활의 양립’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여성정책 하에서 대다수 여성들이 자본의 위기를 극복할 자원으로 동원되며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 여성 대다수가 불안정한 노동에서 온전한 노동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점,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으로 확산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극단적 폭력과 성차별 이데올로기가 어느 때보다 강화되고 있다는 점 등을 발언하였다. 그리고 여성의 온전한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여성노동자, 이주여성, 장애여성, 성노동자, 여성빈민 등의 발언을 듣고 연대를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을 떠난 헌장과 퀼트는 필리핀, 타이, 파키스탄 등을 거쳐 이란, 레바논, 요르단 등을 횡단 중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의해 강화되는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요구와 권리를 모아내고자 기획된 전 세계 여성의 투쟁이 더욱 다양한 요구와 권리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8일에 시작된 세계여성행진은 10월 17일 빈곤철폐의 날 부르키나파소에서 마무리될 예정이다. 그리고 이날 정오에는 지구상 모든 나라에서 여성들의 투쟁이 진행될 것이다. 한국 여성행진은 여성의 고유한 권리를 자본주의 사회 변혁 속에서 인식하고자하는 문제의식 그리고 여성대중운동을 형성해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하고자 한다.
정부의 여성정책과 공명하며 여성들의 요구를 제약하는 주류 여성운동과 여성해방의 과제를 자신의 과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노동운동의 현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하에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상황을 분석하고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기 위한 투쟁은 여성운동진영의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가능해질 것이다. 여성대중운동을 벌였던 소중한 시도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여러 단위의 지속적인 연대활동과 다양한 여성들의 참여와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10.17 여성행진을 만들어가자.
여성의 70%는 비정규직, 비정규직 철폐하라!
여성에 대한 모성 부담 강화 반대한다!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로 신자유주의 반대한다!
- 덧붙이는 말
* 이 글은 성매매에 관한 서구 페미니스트들의 현재 논쟁을 비판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이 글은 노동의 형태로서 성매매에 관심이 있는 소수의 “1세계” 여성들 외에 다른 이들의 경험에 적합한 분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성 노동”의 옳은 점과 잘못된 점을 개념화하는 방식에 있어서 소유와 계약상의 동의에 관한 자유주의적 담론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