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의 군사패권
-4차 6자회담 공동성명의 의미와 한계
‘공동성명’은 과연 진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6자회담 성공은 평화통일로 가는 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용산구협의회가 육교 위에 커다랗게 걸어놓은 현수막의 제목이다. 9월 19일 북경발 뉴스를 통해 13개월만에 재개된 4차 6자회담의 극적인 합의가 알려졌다. 그 이후 동북아 평화체제로의 진입, 평화통일의 이정표, 남북 정상회담의 정례화 등등 각종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날부터 시작된 경수로 제공 여부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성명전을 살펴본다면 오는 이후 6자회담이 과연 순조롭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 반드시 낙관할 수는 없다. 우선 6개항으로 되어있는 공동성명을 살펴보면 핵심적으로 1조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과 그 달성방안, 미국의 대북침공 의사 없음과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권 존중과 적당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논의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2조는 북한의 주권 존중, 북미평화공존,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를 다루고 있다. 이번 공동성명의 수준은 강제적인 이행의무를 부과하는 조약이 아니라 5조에서 규정한 것처럼 추후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입각하여 상호조율된 조치를 취하기 위한 ‘말 대 말’ 수준에서의 합의에 불과하며 북한과 미국, 남한 및 참가국들의 행동이 접속사 없이 무미건조하게 병렬적으로 나열되고 있다. 게다가 내용을 살펴보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북한의 의무는 명확하게 표현된 것에 비해 미국이 이에 대한 반대급부(관계정상화와 경수로 제공)를 어떤 시점에 어떻게 제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서술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연 그 반대급부가 제공될 지 여부도 이번 회담에서 확인되지는 않았다. 이번 회담은 그동안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6자회담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데는 성공했지만 6조에서 앞으로의 회담일정(11월 5차 6자회담)을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애매모호한 채 남아있는데 이는 그만큼 북한과 미국 간의 이견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번 공동성명의 수준은 1994년 상호 반대급부(북한의 핵동결과 미국의 경수로 제공)와 관계정상화를 명시한 ‘제네바기본합의서’에 미치지 못하며 그야말로 잠정적인 각국 행동의 일반적인 원칙을 나열한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한계를 무시하고 ‘선군외교의 승리’라든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안정을 위한 출발점’으로 이번 공동성명의 의의를 과장하는 것은 오히려 6자회담 내부의 한계는 물론이고, 과연 이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가 정착될 수 있는지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봉쇄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현실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 지난 15년 동안 정부와 언론의 호들갑은 별반 새롭지 않다. 1991년 12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었을 때를 기억해보라. 혹은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북한과 미국이 합의에 이르렀을 때 언론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현재와 마찬가지로 온갖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졌지만 이후의 사태는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요구들을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는 미국의 태도에 따라 남북관계마저 경색․악화되어오지 않았던가? 어떻게 보면 이번 6자회담의 ‘합의’를 추켜세우기 전에 질문해야할 중요한 문제는 어째서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성공하지 못했는가, 혹은 어째서 남한과 미국은 ‘북핵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해 왔는가이다.
관계정상화를 꿈꾸는 북한 vs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려는 미국: 타협의 불투명성과 한계
미국은 6자회담 내내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 원칙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해왔다. 지난 3차 6자회담에서 미국은 ‘다단계 포괄적 비핵화방안’을 제시했는데 핵동결에 상응하는 중유지원, 3개월 후 핵폐기 절차가 시작되면 4단계에 걸쳐 잠정적 안전보장, 비핵 에너지 지원,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및 경제제재 해제 논의, 관계 정상화 등을 추진한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핵동결에 상응하여 200만kw의 에너지 지원(이는 지난 7월 12일 남한의 ‘중대제안’으로 수용된다),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경제제재 및 봉쇄 해제를 요구하였다. 비단 보상의 문제 뿐 아니라 동결과 폐기의 범위에 2차 북핵위기의 발원지였던 고농축 우라늄(HEU)이 포함되는지, 그리고 사찰의 주체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인지, 아니면 6자회담의 틀 속에서 새롭게 마련될 것인지도 추가적인 쟁점들이다.
하지만 양자의 입장이 대등하게 조율되는 것은 아니며 장기적으로는 북한이 대부분 미국의 제안을 수용하고 있는데 반해 미국이 이에 대한 반대급부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 것이 회담을 더욱 애매모호한 합의로 몰고 가는 주된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력한 反확산(counter-proliferation) 전략에 입각하여 정책의 우선순위를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의 제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미국과, 냉전시대의 종언 이후 외부로부터의 식량지원에 의존할 정도로 취약해진 경제적 기반을 복구하고 미국․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려는 북한의 정치적 목표가 얼마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는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문제이다. 舊소련과 현실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한 이후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구도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북한에게 커다란 정치․경제적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0여 년 동안 줄곧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서 미국은 북한에게 추가적인 양보를 강요하고 있고 대체적으로 북한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왔다(1994년 「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통한 핵 프로그램의 동결과 폐기, 1998년 「페리 보고서」에서의 중장거리 미사일 프로그램의 중단).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명시하며 전역미사일방어망구상(TMD)․미사일 방어망(MD) 계획을 1990년대 내내 추진해왔을 뿐 아니라, 2001년 「핵태세 보고서」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공격을 포기하는 「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명시적으로 위반하면서 북한을 핵선제공격이 가능한 7개국의 명단에 포함하는 등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유지․확장 속에서 대북 관계 정상화를 부차적이거나 종속된 문제로 취급해왔을 뿐이었다.
따라서 6자회담의 틀 안에서의 합의는 현재로서는 결코 낙관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앞으로 북미 간의 이견과 갈등은 지금까지의 6자회담보다 훨씬 격렬하게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설혹 6자회담의 틀 내에서 (‘제네바 합의’와 같은 수준의) 북한과 미국 사이에 구체적인 합의점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전지구적인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미국으로서는 현재의 한미군사동맹의 근간을 유지하는 한편, 한반도비핵화의 범위를 자국의 핵탑재 잠수함과 항공모함, 비행기의 출입을 제한하지 않는 방향으로 해석하려고 하며 이 경우 6자회담은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불러오기보다는 현존하는 군사적 갈등과 경쟁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생산하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확산 억제 시도의 자가당착: 미국의 핵독점을 전제한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추구
미국의 군사안보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보다 ‘테러와의 전쟁’,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예방전쟁․선제공격마저 마다하지 않는 강력한 반확산 정책이다. 따지고 보면 지난 2003년 결국 ‘제네바 합의’가 미국의 대북 중유 제공 중단과 북한의 핵비확산조약(NPT) 탈퇴로 인해 파탄에 처한 근본적인 이유는 ‘불량국가’에 대한 미국의 불신과 2003년 이라크 침략전쟁으로 가시화된 호전적인 군사․안보정책에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위한 시도는 지난 1970년 출범한 NPT를 최악의 위기상황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자가당착에 빠뜨리고 있다.
현재 미국의 반확산 정책은 자신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전제한다. 이는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 기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 1995년 NPT를 무기한 연장하기로 회원국들이 합의한 전제는 핵보유국들의 핵군축 및 핵폐기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미의회는 13개 핵폐기 의무사항으로 설정된 주요 조처 중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을 1999년 부결시켰고, 핵군비경쟁을 가속화할 수 있는 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금지하는 탄도미사일방어망조약(ABM)을 2002년 파기하였다. 1)부시행정부는 NPT 내 비핵국가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던 소극적 안전보장(핵보유국의 비핵국가에 대한 선제 핵공격 금지)을 명시적으로 철회하였고, (북한을 겨냥한 것으로 추측되는) 지하 벙커를 파괴하기 위해 지표를 관통하는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예산을 지출하고 있다.
올해 5월 열린 NPT 7차 평가회의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이러한 미국의 이중적 태도였으며, 비핵국가들과 미국 사이의 뿌리깊은 불신은 결국 회의가 결렬된 주된 원인이었다. 비핵국가들은 기존 NPT 체제의 이중적 잣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비핵국가에 대한 핵선제공격 금지를 명문화하고 우라늄 농축이나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을 포함하는 ‘평화적 핵이용권’을 주장하였으며, 미국은 서방국가들 중심으로 구성된 핵공급그룹(NSG)을 통해 모든 핵기술의 수출을 규제하고 NPT에서의 일방적인 탈퇴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또한 미국은 핵무기로 전용할 가능성이 있는 관련 기술의 확산을 엄격히 통제하기 위해 경제제재와 저지, 나포, 선제공격을 포함한 확산방지구상(PSI)을 2004년 발표하면서 핵무기의 ‘수평적 확산’(horizontal proliferation; 핵보유국이 늘어나는 것을 가리킴)을 저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천명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IAEA가 제안한 5년 간 핵분열 물질의 생산 중단에 대해서는 자국의 핵이용이 제한될 수 있다며 반대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수직적 확산’(vertical proliferation; 기존 핵보유국들의 핵전력이 강화되는 것을 가리킴)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NPT 비회원국들의 핵개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자신의 언명과는 다르게 미국은 핵무기의 수직적 확산이나 수평적 확산 모두에서 스스로 NPT 체제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 말대로 언제든지 핵무기로 전용 가능하고 사실상 평화적 목적의 핵이용의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라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반확산 정책의 전제는 바로 미국의 핵폐기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절멸의 무기’로서 순식간에 한 도시, 한 국가를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다른 국가들의 핵(무기)개발에 대한 동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오히려 핵무기에 대한 국제적이고 민주적인 통제 자체를 봉쇄한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해체하거나 감축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국가들간의 국제회담으로 평화를 운위한다는 것은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중재자적 역할’의 한계와 한반도․동아시아 평화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운동
세계평화의 대전제는 미국의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감축과 해체, 그리고 미국의 핵폐기이다. 이는 한반도․동아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번 6자회담을 해석하면서 마치 이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당장이라도 구축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과 오산이 아닐 수 없다.
당장 노무현 정권은 이번 공동성명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남한정부의 중재 아래 미국의 유연성(경수로 추후 논의 인정)과 북한의 결단(핵포기)을 이끌어내었다며 스스로의 외교적 노력을 자찬하기에 바쁘고 한반도․동북아 평화번영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6자회담이 타결되면 플랜A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을 정례화하고, 북한경제발전종합계획으로서 ‘북한식 마셜플랜’을 가동할 것으로 알려졌다(《국민일보》9월 24일).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굳건한 한미동맹”의 종속변수일 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정부는 플랜 B를 동시에 상정하고 있는데 이는 대북 경제제재와 PSI 참여, 봉쇄, 군사적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언제든지 과거 역대정권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의 전략에 따라 대북관계가 부침을 거듭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노무현정권의 ‘중재자적 역할’이 무력해질 수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속에 포섭되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모습을 ‘평화체제’라 부른다는 것은 이라크 침략전쟁이 이라크 민중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는 미국의 변명만큼이나 궁색하기 짝이 없다. 현재 전세계를 통틀어 군사적으로 미국에게 대적할 수 있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러할 것이다.2) 향후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경쟁국가의 부재는 바꿔 말하자면 오늘날의 세계평화를 국가간 체계의 유지나 존속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비현실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6자회담을 통해 북․미 관계정상화와 북한의 핵포기가 조율되는 것조차 지난한 과정일 뿐만 아니라, 설혹 어떤 합의가 도출된다고 하더라도 그로 환원되지 않는 그 이상의 것(한반도․동이사이의 평화)을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과정은 6자회담의 성공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에서, 다른 정치적 목표를 제기하는 문제이며, 미국의 군사패권을 해체하고 감축하는 아래로부터의 반미반전운동, 현실의 대중운동 속에서 그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밖에 없다.
1) NPT 4조에서는 “평화적 핵이용”에 대한 비핵국가의 권리를, 그리고 6조에서는 기존의 핵무기 보유국의 “전면적인 핵무기 폐기를 위한 협상 및 조약체결”의 책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6조는 미국 주도의 핵군비 경쟁으로 사문화되어가고 있으며 4조 역시 기존 핵무기 독점을 강화하기 위한 핵관련 기술 이전에 대한 규제로 인해 까다롭게 될 전망이다. 본문으로
2) 2003년도 미국 국방예산은 3,961억 달러로 러시아의 6배, ‘불량국가’로 지목된 북한,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수단, 쿠바 국방비 총합의 26배이다. 심지어 미국의 국방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인도, 남한, 호주의 국방비 총합보다 740억 달러가 많다. 2005년도 미국 국방예산 4,206억 달러는 부르키나파소, 부룬디, 콩고, 케냐, 레소토, 모리셔스, 모로코, 나이지리아, 르완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튀니지 등 아프리카 12개국 3억9천4백만 명의 국민총소득 총합 3,857억 달러보다 많다. 본문으로
“6자회담 성공은 평화통일로 가는 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용산구협의회가 육교 위에 커다랗게 걸어놓은 현수막의 제목이다. 9월 19일 북경발 뉴스를 통해 13개월만에 재개된 4차 6자회담의 극적인 합의가 알려졌다. 그 이후 동북아 평화체제로의 진입, 평화통일의 이정표, 남북 정상회담의 정례화 등등 각종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날부터 시작된 경수로 제공 여부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성명전을 살펴본다면 오는 이후 6자회담이 과연 순조롭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 반드시 낙관할 수는 없다. 우선 6개항으로 되어있는 공동성명을 살펴보면 핵심적으로 1조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과 그 달성방안, 미국의 대북침공 의사 없음과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권 존중과 적당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논의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2조는 북한의 주권 존중, 북미평화공존,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를 다루고 있다. 이번 공동성명의 수준은 강제적인 이행의무를 부과하는 조약이 아니라 5조에서 규정한 것처럼 추후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입각하여 상호조율된 조치를 취하기 위한 ‘말 대 말’ 수준에서의 합의에 불과하며 북한과 미국, 남한 및 참가국들의 행동이 접속사 없이 무미건조하게 병렬적으로 나열되고 있다. 게다가 내용을 살펴보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북한의 의무는 명확하게 표현된 것에 비해 미국이 이에 대한 반대급부(관계정상화와 경수로 제공)를 어떤 시점에 어떻게 제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서술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연 그 반대급부가 제공될 지 여부도 이번 회담에서 확인되지는 않았다. 이번 회담은 그동안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6자회담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데는 성공했지만 6조에서 앞으로의 회담일정(11월 5차 6자회담)을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애매모호한 채 남아있는데 이는 그만큼 북한과 미국 간의 이견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번 공동성명의 수준은 1994년 상호 반대급부(북한의 핵동결과 미국의 경수로 제공)와 관계정상화를 명시한 ‘제네바기본합의서’에 미치지 못하며 그야말로 잠정적인 각국 행동의 일반적인 원칙을 나열한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한계를 무시하고 ‘선군외교의 승리’라든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안정을 위한 출발점’으로 이번 공동성명의 의의를 과장하는 것은 오히려 6자회담 내부의 한계는 물론이고, 과연 이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가 정착될 수 있는지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봉쇄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현실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 지난 15년 동안 정부와 언론의 호들갑은 별반 새롭지 않다. 1991년 12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었을 때를 기억해보라. 혹은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북한과 미국이 합의에 이르렀을 때 언론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현재와 마찬가지로 온갖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졌지만 이후의 사태는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요구들을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는 미국의 태도에 따라 남북관계마저 경색․악화되어오지 않았던가? 어떻게 보면 이번 6자회담의 ‘합의’를 추켜세우기 전에 질문해야할 중요한 문제는 어째서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성공하지 못했는가, 혹은 어째서 남한과 미국은 ‘북핵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해 왔는가이다.
관계정상화를 꿈꾸는 북한 vs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려는 미국: 타협의 불투명성과 한계
미국은 6자회담 내내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 원칙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해왔다. 지난 3차 6자회담에서 미국은 ‘다단계 포괄적 비핵화방안’을 제시했는데 핵동결에 상응하는 중유지원, 3개월 후 핵폐기 절차가 시작되면 4단계에 걸쳐 잠정적 안전보장, 비핵 에너지 지원,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및 경제제재 해제 논의, 관계 정상화 등을 추진한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핵동결에 상응하여 200만kw의 에너지 지원(이는 지난 7월 12일 남한의 ‘중대제안’으로 수용된다),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경제제재 및 봉쇄 해제를 요구하였다. 비단 보상의 문제 뿐 아니라 동결과 폐기의 범위에 2차 북핵위기의 발원지였던 고농축 우라늄(HEU)이 포함되는지, 그리고 사찰의 주체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인지, 아니면 6자회담의 틀 속에서 새롭게 마련될 것인지도 추가적인 쟁점들이다.
하지만 양자의 입장이 대등하게 조율되는 것은 아니며 장기적으로는 북한이 대부분 미국의 제안을 수용하고 있는데 반해 미국이 이에 대한 반대급부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 것이 회담을 더욱 애매모호한 합의로 몰고 가는 주된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력한 反확산(counter-proliferation) 전략에 입각하여 정책의 우선순위를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의 제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미국과, 냉전시대의 종언 이후 외부로부터의 식량지원에 의존할 정도로 취약해진 경제적 기반을 복구하고 미국․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려는 북한의 정치적 목표가 얼마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는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문제이다. 舊소련과 현실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한 이후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구도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북한에게 커다란 정치․경제적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0여 년 동안 줄곧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서 미국은 북한에게 추가적인 양보를 강요하고 있고 대체적으로 북한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왔다(1994년 「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통한 핵 프로그램의 동결과 폐기, 1998년 「페리 보고서」에서의 중장거리 미사일 프로그램의 중단).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명시하며 전역미사일방어망구상(TMD)․미사일 방어망(MD) 계획을 1990년대 내내 추진해왔을 뿐 아니라, 2001년 「핵태세 보고서」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공격을 포기하는 「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명시적으로 위반하면서 북한을 핵선제공격이 가능한 7개국의 명단에 포함하는 등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유지․확장 속에서 대북 관계 정상화를 부차적이거나 종속된 문제로 취급해왔을 뿐이었다.
따라서 6자회담의 틀 안에서의 합의는 현재로서는 결코 낙관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앞으로 북미 간의 이견과 갈등은 지금까지의 6자회담보다 훨씬 격렬하게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설혹 6자회담의 틀 내에서 (‘제네바 합의’와 같은 수준의) 북한과 미국 사이에 구체적인 합의점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전지구적인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미국으로서는 현재의 한미군사동맹의 근간을 유지하는 한편, 한반도비핵화의 범위를 자국의 핵탑재 잠수함과 항공모함, 비행기의 출입을 제한하지 않는 방향으로 해석하려고 하며 이 경우 6자회담은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불러오기보다는 현존하는 군사적 갈등과 경쟁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생산하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확산 억제 시도의 자가당착: 미국의 핵독점을 전제한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추구
미국의 군사안보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보다 ‘테러와의 전쟁’,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예방전쟁․선제공격마저 마다하지 않는 강력한 반확산 정책이다. 따지고 보면 지난 2003년 결국 ‘제네바 합의’가 미국의 대북 중유 제공 중단과 북한의 핵비확산조약(NPT) 탈퇴로 인해 파탄에 처한 근본적인 이유는 ‘불량국가’에 대한 미국의 불신과 2003년 이라크 침략전쟁으로 가시화된 호전적인 군사․안보정책에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위한 시도는 지난 1970년 출범한 NPT를 최악의 위기상황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자가당착에 빠뜨리고 있다.
현재 미국의 반확산 정책은 자신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전제한다. 이는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 기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 1995년 NPT를 무기한 연장하기로 회원국들이 합의한 전제는 핵보유국들의 핵군축 및 핵폐기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미의회는 13개 핵폐기 의무사항으로 설정된 주요 조처 중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을 1999년 부결시켰고, 핵군비경쟁을 가속화할 수 있는 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금지하는 탄도미사일방어망조약(ABM)을 2002년 파기하였다. 1)부시행정부는 NPT 내 비핵국가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던 소극적 안전보장(핵보유국의 비핵국가에 대한 선제 핵공격 금지)을 명시적으로 철회하였고, (북한을 겨냥한 것으로 추측되는) 지하 벙커를 파괴하기 위해 지표를 관통하는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예산을 지출하고 있다.
올해 5월 열린 NPT 7차 평가회의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이러한 미국의 이중적 태도였으며, 비핵국가들과 미국 사이의 뿌리깊은 불신은 결국 회의가 결렬된 주된 원인이었다. 비핵국가들은 기존 NPT 체제의 이중적 잣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비핵국가에 대한 핵선제공격 금지를 명문화하고 우라늄 농축이나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을 포함하는 ‘평화적 핵이용권’을 주장하였으며, 미국은 서방국가들 중심으로 구성된 핵공급그룹(NSG)을 통해 모든 핵기술의 수출을 규제하고 NPT에서의 일방적인 탈퇴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또한 미국은 핵무기로 전용할 가능성이 있는 관련 기술의 확산을 엄격히 통제하기 위해 경제제재와 저지, 나포, 선제공격을 포함한 확산방지구상(PSI)을 2004년 발표하면서 핵무기의 ‘수평적 확산’(horizontal proliferation; 핵보유국이 늘어나는 것을 가리킴)을 저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천명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IAEA가 제안한 5년 간 핵분열 물질의 생산 중단에 대해서는 자국의 핵이용이 제한될 수 있다며 반대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수직적 확산’(vertical proliferation; 기존 핵보유국들의 핵전력이 강화되는 것을 가리킴)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NPT 비회원국들의 핵개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자신의 언명과는 다르게 미국은 핵무기의 수직적 확산이나 수평적 확산 모두에서 스스로 NPT 체제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 말대로 언제든지 핵무기로 전용 가능하고 사실상 평화적 목적의 핵이용의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라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반확산 정책의 전제는 바로 미국의 핵폐기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절멸의 무기’로서 순식간에 한 도시, 한 국가를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다른 국가들의 핵(무기)개발에 대한 동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오히려 핵무기에 대한 국제적이고 민주적인 통제 자체를 봉쇄한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해체하거나 감축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국가들간의 국제회담으로 평화를 운위한다는 것은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중재자적 역할’의 한계와 한반도․동아시아 평화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운동
세계평화의 대전제는 미국의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감축과 해체, 그리고 미국의 핵폐기이다. 이는 한반도․동아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번 6자회담을 해석하면서 마치 이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당장이라도 구축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과 오산이 아닐 수 없다.
당장 노무현 정권은 이번 공동성명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남한정부의 중재 아래 미국의 유연성(경수로 추후 논의 인정)과 북한의 결단(핵포기)을 이끌어내었다며 스스로의 외교적 노력을 자찬하기에 바쁘고 한반도․동북아 평화번영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6자회담이 타결되면 플랜A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을 정례화하고, 북한경제발전종합계획으로서 ‘북한식 마셜플랜’을 가동할 것으로 알려졌다(《국민일보》9월 24일).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굳건한 한미동맹”의 종속변수일 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정부는 플랜 B를 동시에 상정하고 있는데 이는 대북 경제제재와 PSI 참여, 봉쇄, 군사적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언제든지 과거 역대정권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의 전략에 따라 대북관계가 부침을 거듭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노무현정권의 ‘중재자적 역할’이 무력해질 수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속에 포섭되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모습을 ‘평화체제’라 부른다는 것은 이라크 침략전쟁이 이라크 민중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는 미국의 변명만큼이나 궁색하기 짝이 없다. 현재 전세계를 통틀어 군사적으로 미국에게 대적할 수 있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러할 것이다.2) 향후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경쟁국가의 부재는 바꿔 말하자면 오늘날의 세계평화를 국가간 체계의 유지나 존속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비현실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6자회담을 통해 북․미 관계정상화와 북한의 핵포기가 조율되는 것조차 지난한 과정일 뿐만 아니라, 설혹 어떤 합의가 도출된다고 하더라도 그로 환원되지 않는 그 이상의 것(한반도․동이사이의 평화)을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과정은 6자회담의 성공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에서, 다른 정치적 목표를 제기하는 문제이며, 미국의 군사패권을 해체하고 감축하는 아래로부터의 반미반전운동, 현실의 대중운동 속에서 그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밖에 없다.
1) NPT 4조에서는 “평화적 핵이용”에 대한 비핵국가의 권리를, 그리고 6조에서는 기존의 핵무기 보유국의 “전면적인 핵무기 폐기를 위한 협상 및 조약체결”의 책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6조는 미국 주도의 핵군비 경쟁으로 사문화되어가고 있으며 4조 역시 기존 핵무기 독점을 강화하기 위한 핵관련 기술 이전에 대한 규제로 인해 까다롭게 될 전망이다. 본문으로
2) 2003년도 미국 국방예산은 3,961억 달러로 러시아의 6배, ‘불량국가’로 지목된 북한,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수단, 쿠바 국방비 총합의 26배이다. 심지어 미국의 국방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인도, 남한, 호주의 국방비 총합보다 740억 달러가 많다. 2005년도 미국 국방예산 4,206억 달러는 부르키나파소, 부룬디, 콩고, 케냐, 레소토, 모리셔스, 모로코, 나이지리아, 르완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튀니지 등 아프리카 12개국 3억9천4백만 명의 국민총소득 총합 3,857억 달러보다 많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