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반전운동
2003년 3월 1일부터 이라크국제전범재판까지
번역 : 진재연 (정책편집부장, 반전팀)
*필자 톨가 테무제는 수 년동안 그린피스에서 일하며 지중해에서 핵에너지, 핵무기, 중독성 오염에 반대하는 운동을 해왔다. 평화활동가로서 이라크에 들어가서 전쟁시기동안 쿠르디스탄의 이라크인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그는 이라크국제전범재판의 정보통신팀의 일원이며 <세계적 평화와 정의연합>의 공동설립자다.
2003년 3월 1일, 세뇰 카라카스는 너무나 지쳐 버린 채 앙카라의 한 카페에서 TV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을 설립한 이후로 이 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했다.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은 서로 교류가 없었던 터키의 150여개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 만든 유일한 연합체다. 그들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함께 했고, 3월 1일은 터키정부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미국은 터키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이라크 공격을 위해 이라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터키 남동쪽에 있는 공군기지를 이용하려고 했다. 미 정부는 터키정부에 이를 요구해 왔던 것이다.
세뇰과 다른 반전 활동가들은 오랜 시간을 싸워왔다. 마침내 그들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해냈다. 정치적 배경과 의제가 다른 많은 조직들을 통합했고, 주류언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대중적인 캠페인을 이끌었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을 조직했다.
민중의 힘으로 미군주둔안 부결시키다
그는 지쳐있었고 TV를 보며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었다. 그는 아침에 열렸던 대중적인 행진을 위해 전날 밤 이스탄불에서 앙카라까지 수 시간동안 버스를 탔고 집회를 조직하고 여기저기 뛰어 다닌 데다가, 뷜렌트 아린크 터키 의회 의장이 투표결과를 막 발표할 참이라 더욱 긴장되고 지친 상태였다. 세뇰은 까페의 다른 사람들처럼 숨죽이며 뷜렌트 아린크의 발표를 들었다. 결과는 터키 정부가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해 미군주둔안이 부결된 것으로 나왔다. 여당인 이슬람정의발전당(AKP)의 상당수 의원들이 미국의 제안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이 까페뿐 아니라 터키 전역이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들썩거렸다. 사람들은 소리치고, 울고, 포옹하며 축하하고 있었다. 민중들이 승리한 것이다. 세뇰은 의자에 파묻혀 눈물을 흘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민중들이 이긴 것이다.
1년여 전에 세뇰과 <전쟁반대전선>의 또 다른 창립자였던 르벤트가 이스탄불 중심가에 있는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당시 나는 그린피스 지중해지부의 캠페인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고 그들의 구상과 배경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터키에 있는 다양한 반전그룹들이 하나의 기치로 단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헌신적인 그룹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정치경제적 압력을 받고 있는 터키 정부에 영향을 미치고, 이라크 침략에 반대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의 설립
터키는 오랫동안 여러 조직들이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기치로 모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터키는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 군부쿠데타 이후에 좌파조직들은 붕괴되었다. 남아있는 좌파 분파들은 단결하지 못하면서 갈수록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슬람 그룹들은 훨씬 잘 조직되었지만 정부의 탄압이 심했다. 쿠르드 그룹 역시 엄청난 탄압을 받았으며, 그 중 가장 강력한 분리주의 그룹은 민족차별에 반대하는 정치적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었다. NGO들은 제한된 예산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급진적인 운동세력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쉽게 조직되지 않았고 1980년 쿠데타 이후에는 거리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직들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은 무척 힘들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터키에 있는 그린피스 사무실에서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그린피스 지부들과는 달리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구상중인 더 큰 연합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준비위원회의 구성원이 되었고, 지금까지 터키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유일한 캠페인에 자원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수많은 회의와 토론을 통해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터키의 150개 이상의 조직들이 공동의 전망을 갖고 수평적인 구조를 구성했다. 언덕을 굴러 내려가는 눈덩이처럼 점점 더 힘이 커지고 있었다.
2002년 12월 1일 집회는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조직들이 처음으로 모두 함께 반전집회를 치르는 것이다. 이슬람 조직들도 그곳에 있었다. 공산주의자들도 있었다. 환경운동가들, 동성애자들, 의사들, 변호사들, 쿠르드 조직들...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맞선 단일한 목소리를 내며 최초로 카그라얀 광장에 모였다.
주류 언론의 기자와 언론인들도 자신들이 속한 언론사의 입장과 달리 캠페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반전운동 기사들이 쏟아졌고 반전 메시지는 하나의 의제가 되었다. 여론 조사에 의하면 터키 국민의 82%이상이 전쟁을 반대했다. 터키의 자유주의적인 좌파 지식인들의 조직인 <평화의 발의>는 100여 개 직업의 노동자들(석유 노동자, 교사, 변호사, 의사, 간호사 등)의 거대한 모임을 만들었다.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록 가수들은 “전쟁은 필요 없다. 우리와 함께 할 것인가, 석유와 함께 할 것인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노래와 비디오 클립을 만들었다.
터키에서 가장 사랑 받는 젊은 배우중 하나인 미멧 알리 알라보라는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고 보도 자료를 읽고 집회에서 대중연설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집회에서 경찰견에 물리는 일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가 유명하게 된 계기가 TV드라마에서 경찰서의 형사역할이었다는 것이 재미있는 일화로 남아있다.
2003년 1월, 알라보라와 역시 배우인 그의 아버지, 그리고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의 몇몇 사람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불법적인” 행진을 하면서 유명한 베야짓 광장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온건한 이슬람 정권의 정당인 이슬람정의발전당(AKP)은 반전세력을 공개적으로 진압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미국에서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반대세력을 이용하려 했다. 미국정부는 터키정부가 이라크 침략을 위해 군사기지, 땅, 물의 사용을 허용하면 소위 재정적 지원을 해주겠다고 하면서 공공연하게 터키정부를 매수하고 있었다.
경찰은 미란성 독가스와 곤봉을 사용해야만 베야짓 광장으로 향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광장입구에 서 있던 경찰기동대 앞줄의 경찰서장이 미멧 알리에게 인사를 했다. 미멧 알리는 손을 들고 그의 어깨 너머 군중을 가리키며 마치 고급 나이트클럽에 들어가는 것처럼 “안녕하세요. 저 친구들이 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베야짓 광장에 들어갔다. 반전운동은 다시 거리에 서게 되었고, 이스탄불의 심장에서 다시 한번 평화적이고 거대한 행진을 치러냈다.
다양한 민중들의 행동
평화행진을 조직한 도시는 이스탄불만이 아니다. 메르신부터 이즈미르까지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의 많은 단체들이 동시적으로 행진, 집회와 행동을 조직하고 있었다. 다국적 광산회사의 토지점령에 반대하며 오랫동안 싸워온 베르가마의 마을주민들도 있었고, 평화적 행동을 조직하는 전국의 대학생들도 있었다.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의 유명인사중 한 명인 일디즈 오넨은 터키 의회에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의회를 방문해서 장관들과 의원들을 만났다. 저명한 이슬람 저널리스트인 압둘라만 딜리팍은 지속적으로 의회를 방문해서 이슬람정권의 의원들을 압박했다. 혁명노동자당의 당원인 일디즈 오넨과 유명한 이슬람교도인 압둘라만 딜리팍은 터키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의 일원이었다.
이스티클라 거리에 있는 카라케디 문화센터는 활동가들이 만나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거의 매일 밤마다 회의가 있었고, 전 세계에서 이라크로 가기 위해 온 인간방패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 곳은 존 로스와의 간담회가 있는 동안 활동가들, 저널리스트들로 꽉 찼다. 존은 인간 방패의 일원이며 수년 동안 멕시코 치아파스의 싸파티스타와 함께 살고 있는 저널리스트다. 다음 날 존과 인간방패들은 모든 언론에 실렸다. 좌파활동가들과 함께 이슬람조직들은 인간방패들을 시리아 국경까지 호위했고, 이들을 환호하기 위해 시리아로 가는 거리에 수백 명 때로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모였다.
3월 1일 이전에, 가장 중요한 집회가 열린 날은 2월 15일이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동시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행진을 했다. 터키에서는 3월 1일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은 2월 15일 행진에도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2월 15일은 쿠르드 분리주의 그룹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의 리더인 압둘라 오잘란이 체포된 날이기도 해서 행진에 참가하기로 한 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 (오잘란은 1978년 마르크스 이론에 바탕을 둔 쿠르드노동자당(PKK)을 결성했고, 1999년 2월 15일 터키 특수부대에 체포될 때까지 20여 년 동안 쿠르드의 독립을 위한 무력투쟁을 이끌어 왔다-역주).
경찰과 쿠르드 그룹간의 충돌이 예상되어서 기존 집회들보다 참가율이 낮았다. 그러나 집회대열에는 상당한 수의 예술가, 지식인들 심지어는 당시 의회 의원들까지도 참가했다.
우려했던 것처럼 경찰과 쿠르드 활동가들 사이에 폭력이 오고 갔다. 거의 천 명에 달하는 쿠르드인들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어떤 활동가들은 카디코이 광장에 도착하기 전에 체포되기도 했다. 사람들의 사기를 꺾는 사건이었다.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은 3월 1일 집회를 준비하면서 수많은 토론을 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2003년 3월 1일부터 이라크국제전범재판까지
2003년 3월 1일 아침, 십만의 사람들이 터키 의회의 투표를 부결시키기 위한 행진에 참가하려고 앙카라 광장을 메웠다. 여러 조직들이 의회를 겨냥해 행동을 하고 있었다. 수 천명의 사람들이 터키 의회 맞은편에서 손에 초를 들고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의원들에게 이메일, 문자 메세지, 팩스를 보내고 있었다. 대표자들에게 미국의 요구가 아닌 민중들의 의지에 따라 투표하기를 소리 높여 요구하는 사람들로 도시가 꽉 찼다.
3월 1일, 우리는 승리했다. 그러나 미 행정부는 폭격을 가했고 주권국을 침략했다. 그들은 그렇게 했다. 다른 나라처럼 터키의 민중들은 사기가 꺾였다. 점령이 시작되자 저항세력은 추진력을 잃어버렸다.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은 분열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의 조직으로 돌아갔다. 쿠르드인들은 자신들의 의제로 바빠졌다. 유일하게 남은 적극적 그룹인 <세계적 평화와 정의연합>은 캠페인을 계속하고 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힘겨운 시간동안 터키의 여성 활동가 그룹은 이라크국제전범재판(WTI, World Tribunal on Iraq)을 조직하는 데 선도적이었다. 이 국제적 발의는 미국이 저지른 잔악한 행위를 기록하고 전쟁의 불법성과 부당함을 보여주는 기반이 되었다.
뉴욕에서 서울까지, 히로시마에서 브뤼셀까지 많은 세션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열렸다. 그것들의 총화지점인 이스탄불 세션이 2005년 6월 24일에서 26일까지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렸다. 3일동안 12개나라에서 온 양심배심원들이 이라크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온 54명의 증인과 변호인단의 증언을 들었다. 이라크국제전범재판에서 양심배심원들은 미국정부가 역사상 가장 부당하고, 비도덕적이고, 비열한 전쟁을 일으켰다고 판결하였다 (국제전범재판 홈페이지 주소 : www.worldtribunal.org).
이라크 국제전범재판이 끝난 지 몇 달이 흐른 지금, 터키의 활동가들은 다시 저항운동을 펼쳐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이전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스티븐 해들리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10월 그의 첫 외국 방문지로서 앙카라를 선택했다. 해들리는 워싱턴이 2003년 3월 1일을 잊을 준비가 되어 있고, 터키와 새로운 동맹전략을 맺고 싶다는 부시의 중요한 메시지를 앙카라에 전했다. 워싱턴은 터키 정부가 그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반전 활동가들은 운동을 되살려서 대중들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
*필자 톨가 테무제는 수 년동안 그린피스에서 일하며 지중해에서 핵에너지, 핵무기, 중독성 오염에 반대하는 운동을 해왔다. 평화활동가로서 이라크에 들어가서 전쟁시기동안 쿠르디스탄의 이라크인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그는 이라크국제전범재판의 정보통신팀의 일원이며 <세계적 평화와 정의연합>의 공동설립자다.
2003년 3월 1일, 세뇰 카라카스는 너무나 지쳐 버린 채 앙카라의 한 카페에서 TV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을 설립한 이후로 이 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했다.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은 서로 교류가 없었던 터키의 150여개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 만든 유일한 연합체다. 그들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함께 했고, 3월 1일은 터키정부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미국은 터키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이라크 공격을 위해 이라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터키 남동쪽에 있는 공군기지를 이용하려고 했다. 미 정부는 터키정부에 이를 요구해 왔던 것이다.
세뇰과 다른 반전 활동가들은 오랜 시간을 싸워왔다. 마침내 그들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해냈다. 정치적 배경과 의제가 다른 많은 조직들을 통합했고, 주류언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대중적인 캠페인을 이끌었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을 조직했다.
민중의 힘으로 미군주둔안 부결시키다
그는 지쳐있었고 TV를 보며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었다. 그는 아침에 열렸던 대중적인 행진을 위해 전날 밤 이스탄불에서 앙카라까지 수 시간동안 버스를 탔고 집회를 조직하고 여기저기 뛰어 다닌 데다가, 뷜렌트 아린크 터키 의회 의장이 투표결과를 막 발표할 참이라 더욱 긴장되고 지친 상태였다. 세뇰은 까페의 다른 사람들처럼 숨죽이며 뷜렌트 아린크의 발표를 들었다. 결과는 터키 정부가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해 미군주둔안이 부결된 것으로 나왔다. 여당인 이슬람정의발전당(AKP)의 상당수 의원들이 미국의 제안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이 까페뿐 아니라 터키 전역이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들썩거렸다. 사람들은 소리치고, 울고, 포옹하며 축하하고 있었다. 민중들이 승리한 것이다. 세뇰은 의자에 파묻혀 눈물을 흘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민중들이 이긴 것이다.
1년여 전에 세뇰과 <전쟁반대전선>의 또 다른 창립자였던 르벤트가 이스탄불 중심가에 있는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당시 나는 그린피스 지중해지부의 캠페인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고 그들의 구상과 배경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터키에 있는 다양한 반전그룹들이 하나의 기치로 단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헌신적인 그룹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정치경제적 압력을 받고 있는 터키 정부에 영향을 미치고, 이라크 침략에 반대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의 설립
터키는 오랫동안 여러 조직들이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기치로 모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터키는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 군부쿠데타 이후에 좌파조직들은 붕괴되었다. 남아있는 좌파 분파들은 단결하지 못하면서 갈수록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이슬람 그룹들은 훨씬 잘 조직되었지만 정부의 탄압이 심했다. 쿠르드 그룹 역시 엄청난 탄압을 받았으며, 그 중 가장 강력한 분리주의 그룹은 민족차별에 반대하는 정치적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었다. NGO들은 제한된 예산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급진적인 운동세력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쉽게 조직되지 않았고 1980년 쿠데타 이후에는 거리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직들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은 무척 힘들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터키에 있는 그린피스 사무실에서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그린피스 지부들과는 달리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구상중인 더 큰 연합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준비위원회의 구성원이 되었고, 지금까지 터키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유일한 캠페인에 자원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수많은 회의와 토론을 통해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터키의 150개 이상의 조직들이 공동의 전망을 갖고 수평적인 구조를 구성했다. 언덕을 굴러 내려가는 눈덩이처럼 점점 더 힘이 커지고 있었다.
2002년 12월 1일 집회는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조직들이 처음으로 모두 함께 반전집회를 치르는 것이다. 이슬람 조직들도 그곳에 있었다. 공산주의자들도 있었다. 환경운동가들, 동성애자들, 의사들, 변호사들, 쿠르드 조직들...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맞선 단일한 목소리를 내며 최초로 카그라얀 광장에 모였다.
주류 언론의 기자와 언론인들도 자신들이 속한 언론사의 입장과 달리 캠페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반전운동 기사들이 쏟아졌고 반전 메시지는 하나의 의제가 되었다. 여론 조사에 의하면 터키 국민의 82%이상이 전쟁을 반대했다. 터키의 자유주의적인 좌파 지식인들의 조직인 <평화의 발의>는 100여 개 직업의 노동자들(석유 노동자, 교사, 변호사, 의사, 간호사 등)의 거대한 모임을 만들었다.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록 가수들은 “전쟁은 필요 없다. 우리와 함께 할 것인가, 석유와 함께 할 것인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노래와 비디오 클립을 만들었다.
터키에서 가장 사랑 받는 젊은 배우중 하나인 미멧 알리 알라보라는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고 보도 자료를 읽고 집회에서 대중연설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집회에서 경찰견에 물리는 일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가 유명하게 된 계기가 TV드라마에서 경찰서의 형사역할이었다는 것이 재미있는 일화로 남아있다.
2003년 1월, 알라보라와 역시 배우인 그의 아버지, 그리고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의 몇몇 사람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불법적인” 행진을 하면서 유명한 베야짓 광장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온건한 이슬람 정권의 정당인 이슬람정의발전당(AKP)은 반전세력을 공개적으로 진압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미국에서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반대세력을 이용하려 했다. 미국정부는 터키정부가 이라크 침략을 위해 군사기지, 땅, 물의 사용을 허용하면 소위 재정적 지원을 해주겠다고 하면서 공공연하게 터키정부를 매수하고 있었다.
경찰은 미란성 독가스와 곤봉을 사용해야만 베야짓 광장으로 향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광장입구에 서 있던 경찰기동대 앞줄의 경찰서장이 미멧 알리에게 인사를 했다. 미멧 알리는 손을 들고 그의 어깨 너머 군중을 가리키며 마치 고급 나이트클럽에 들어가는 것처럼 “안녕하세요. 저 친구들이 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베야짓 광장에 들어갔다. 반전운동은 다시 거리에 서게 되었고, 이스탄불의 심장에서 다시 한번 평화적이고 거대한 행진을 치러냈다.
다양한 민중들의 행동
평화행진을 조직한 도시는 이스탄불만이 아니다. 메르신부터 이즈미르까지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의 많은 단체들이 동시적으로 행진, 집회와 행동을 조직하고 있었다. 다국적 광산회사의 토지점령에 반대하며 오랫동안 싸워온 베르가마의 마을주민들도 있었고, 평화적 행동을 조직하는 전국의 대학생들도 있었다.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의 유명인사중 한 명인 일디즈 오넨은 터키 의회에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의회를 방문해서 장관들과 의원들을 만났다. 저명한 이슬람 저널리스트인 압둘라만 딜리팍은 지속적으로 의회를 방문해서 이슬람정권의 의원들을 압박했다. 혁명노동자당의 당원인 일디즈 오넨과 유명한 이슬람교도인 압둘라만 딜리팍은 터키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의 일원이었다.
이스티클라 거리에 있는 카라케디 문화센터는 활동가들이 만나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거의 매일 밤마다 회의가 있었고, 전 세계에서 이라크로 가기 위해 온 인간방패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 곳은 존 로스와의 간담회가 있는 동안 활동가들, 저널리스트들로 꽉 찼다. 존은 인간 방패의 일원이며 수년 동안 멕시코 치아파스의 싸파티스타와 함께 살고 있는 저널리스트다. 다음 날 존과 인간방패들은 모든 언론에 실렸다. 좌파활동가들과 함께 이슬람조직들은 인간방패들을 시리아 국경까지 호위했고, 이들을 환호하기 위해 시리아로 가는 거리에 수백 명 때로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모였다.
3월 1일 이전에, 가장 중요한 집회가 열린 날은 2월 15일이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동시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행진을 했다. 터키에서는 3월 1일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은 2월 15일 행진에도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2월 15일은 쿠르드 분리주의 그룹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의 리더인 압둘라 오잘란이 체포된 날이기도 해서 행진에 참가하기로 한 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 (오잘란은 1978년 마르크스 이론에 바탕을 둔 쿠르드노동자당(PKK)을 결성했고, 1999년 2월 15일 터키 특수부대에 체포될 때까지 20여 년 동안 쿠르드의 독립을 위한 무력투쟁을 이끌어 왔다-역주).
경찰과 쿠르드 그룹간의 충돌이 예상되어서 기존 집회들보다 참가율이 낮았다. 그러나 집회대열에는 상당한 수의 예술가, 지식인들 심지어는 당시 의회 의원들까지도 참가했다.
우려했던 것처럼 경찰과 쿠르드 활동가들 사이에 폭력이 오고 갔다. 거의 천 명에 달하는 쿠르드인들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어떤 활동가들은 카디코이 광장에 도착하기 전에 체포되기도 했다. 사람들의 사기를 꺾는 사건이었다.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은 3월 1일 집회를 준비하면서 수많은 토론을 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2003년 3월 1일부터 이라크국제전범재판까지
2003년 3월 1일 아침, 십만의 사람들이 터키 의회의 투표를 부결시키기 위한 행진에 참가하려고 앙카라 광장을 메웠다. 여러 조직들이 의회를 겨냥해 행동을 하고 있었다. 수 천명의 사람들이 터키 의회 맞은편에서 손에 초를 들고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의원들에게 이메일, 문자 메세지, 팩스를 보내고 있었다. 대표자들에게 미국의 요구가 아닌 민중들의 의지에 따라 투표하기를 소리 높여 요구하는 사람들로 도시가 꽉 찼다.
3월 1일, 우리는 승리했다. 그러나 미 행정부는 폭격을 가했고 주권국을 침략했다. 그들은 그렇게 했다. 다른 나라처럼 터키의 민중들은 사기가 꺾였다. 점령이 시작되자 저항세력은 추진력을 잃어버렸다. <이라크전쟁반대연합>은 분열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의 조직으로 돌아갔다. 쿠르드인들은 자신들의 의제로 바빠졌다. 유일하게 남은 적극적 그룹인 <세계적 평화와 정의연합>은 캠페인을 계속하고 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힘겨운 시간동안 터키의 여성 활동가 그룹은 이라크국제전범재판(WTI, World Tribunal on Iraq)을 조직하는 데 선도적이었다. 이 국제적 발의는 미국이 저지른 잔악한 행위를 기록하고 전쟁의 불법성과 부당함을 보여주는 기반이 되었다.
뉴욕에서 서울까지, 히로시마에서 브뤼셀까지 많은 세션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열렸다. 그것들의 총화지점인 이스탄불 세션이 2005년 6월 24일에서 26일까지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렸다. 3일동안 12개나라에서 온 양심배심원들이 이라크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온 54명의 증인과 변호인단의 증언을 들었다. 이라크국제전범재판에서 양심배심원들은 미국정부가 역사상 가장 부당하고, 비도덕적이고, 비열한 전쟁을 일으켰다고 판결하였다 (국제전범재판 홈페이지 주소 : www.worldtribunal.org).
이라크 국제전범재판이 끝난 지 몇 달이 흐른 지금, 터키의 활동가들은 다시 저항운동을 펼쳐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이전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스티븐 해들리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10월 그의 첫 외국 방문지로서 앙카라를 선택했다. 해들리는 워싱턴이 2003년 3월 1일을 잊을 준비가 되어 있고, 터키와 새로운 동맹전략을 맺고 싶다는 부시의 중요한 메시지를 앙카라에 전했다. 워싱턴은 터키 정부가 그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반전 활동가들은 운동을 되살려서 대중들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